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6)
“정황부터 확인하도록.”
주 공공이 냉정히 명령을 내렸다. 허 중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남파 무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장등원이 이끄는 종남파 무인들은 지시받은 대로 황수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만큼 빠르게 도착하진 못했다. 방해가 붙은 것이다.
“추적자가 붙은 것 같아, 도중에 산으로 빠져서 놈들을 따돌렸습니다.”
“추적자라니, 설마...”
“예! 저 자들이 분명합니다.”
금의위 무인들을 노려보던 장등원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허 중관에게 말했다.
“참. 잘 됐습니다. 대인. 저 자들이 금의위의 아패(牙牌)를 갖고서 금의위라고 주장하던데,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대인께서 진상을 밝혀주십시오!”
장등원은 자기들이 금의위 무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아직 의심하고 있었다.
아패를 비롯해 금의위 교위를 증명하는 검을 갖고 있다지만 그건 얼마든지 죽이고 뺏을 수 있었다. 게다가 동창의 환관들도 저들이 살수 집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은 검과 아패를 존중해야 하니 앞에서는 금의위라고 인정해줬지만 속으로는 동창의 도착만 기다리고 있었다.
“음. 미안하네. 사실 저들은 살수 집단이 아니라 금의위가 맞네.”
“......”
장등원을 비롯한 종남파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다.
살수 집단이 아니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빨리 설명 좀 해주게. 금의위 놈들이 추적해왔고 따돌렸다고? 추종향을 썼나보군...”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장등원은 충격에서 회복한 뒤 마저 설명했다.
살수 놈들, 아니 금의위 무인들이 쫓아오는 것 같아서 산을 돌아 따돌렸는데, 황수장에 도착하고 보니 안의 사람들은 전멸했고 살수 놈들, 아니 금의위 무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금의위 무인들이 먼저 도착해서 혈겁을 벌였다고 의심이 갔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금의위 무인들을 이끄는 정 교위가 경고했다.
“종남의 무인들은 잘 들어라! 감히 관의 일을 돕지 않고 방해한 건 괘씸하지만 넘어가주겠다. 그러나 범부의 하찮은 의협심으로 감히 금의위를 의심했다가는 용서가 없을 것이다. 알겠나?”
교위도 지금 상황이 매우 불리하단 건 잘 알고 있었다.
정파 무림인들의 뒤를 쫓다가 앞질러 도착했는데 살겁이 벌어져 있었으니, 정 교위도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심문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불리할 때일수록 큰 소리를 치고 권세를 휘둘러야 했다.
종남파의 명성은 조정이나 황실에도 알려져 있을 만큼 비범했지만, 금의위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경고하면 분명 잘 알아들을 것이다.
...상대에게 다른 연줄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쪽이나 잘 듣게. 우린 동창일세. 여기 가마 안에 계시는 분은 주 공공이고. 근처에는 천호소에서 데리고 온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네. 그러니 금의위 이름으로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게.”
“......”
정 교위를 비롯한 금의위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본 종남파 무인들은 친근감을 느꼈다.
누구나 속고 속는 것이 무림 아니겠는가!
“어떻게 먼저 도착했나?”
“...종남의 무인들을 쫓다보니 황수장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놈들이 우릴 눈치 채고 빙빙 돌길래, 먼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오.’
연우혁은 정 교위가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짧은 움직임만 보고서 목적지를 찾아내려면 애초에 그 목적지가 어느 정도 심중에 있어야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도착했을 때 상황은?”
“황수장 안의 무인들은 전멸한 상태였다. 전멸한지 한 시진 정도는 지난 것 같더군. 홍목대사로 보이는 놈도 죽어 있었다.”
“홍목대사까지?!”
허 중관은 놀랐다.
홍목대사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여기서 같이 죽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 ...그보다 정말 이 주변에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나? 정천호가 까다로운 인물이라 병사를 안 내줄 텐데.”
정 교위의 말에 허 중관은 피식 웃으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진충비도. 설명해주게.”
“뭘 설명까지... 그냥 잘 부탁드린 거지요.”
“진충비도?!”
장등원은 물론이고 정 교위까지 놀라워했다. 장등원은 연우혁을 보며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했다.
“이, 이렇게 젊은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선풍도골의 중년인일 줄 알았소.”
“...?”
연우혁은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건가 의아해했지만 대답하기도 전에 정 교위가 먼저 말했다.
“네놈이 그 포두 놈이냐?!”
“이제는 판관이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그 건방진 하가 놈이 네놈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동창에 붙어?!”
신세를 졌던 하 교위 이름이 나오자 연우혁은 멈칫했다. 허 중관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은혜는 여기 진충비도가 베풀었지. 일의 앞뒤를 왜곡해도 정도가 있지 않나.”
“무슨...!”
“그리고 지금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서 핏물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게! 난 솔직히 지금도 의심스러우니 말이야. 자네들이 여기 놈들을 고용한 뒤 들킬 것 같으니 싹 쓸어버린 것 아닌가?”
“...!”
허 중관 뒤의 환관들은 물론이고 종남파 무인들까지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금의위는 이번 일에서 성급한 행동들을 많이 저질렀다. 무림인의 짐을 뒤지고, 뒤를 쫓은 뒤 앞지르기까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음해를...!”
“그러게 누가 무도하게 행동하라고 했나? 지금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것도 주 공공의 자비라고 생각하게. 이 정도면 죽이고 나서 확인해도 될 테니.”
서슬퍼런 환관의 말에 정 교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교위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서두른 건 그저 공을 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황수장의 일은 정말로 우리가 한 게 아니다. 의심가는 놈이 있다.”
허 중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고 여기까지 숨기다니.
괜히 금의위가 아니었다.
“누군가?”
“화산파다.”
“......”
“......”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교위는 발끈해서 외쳤다.
“정말이다!”
“그냥 되는 대로 지껄이는 건가? 아니, 근처에 있는 유명한 문파라고 말하면 믿어줄 줄 알았나?”
“도착했을 때 멀리서 화산파 놈들이 도망치는 걸 봤단 말이다. 놈들은 분명 화산파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음!”
장등원은 신음소리를 냈다.
확실히 화산파도 황수장 같은 사파 무리들을 토벌할 만한 이들이었다. 인근의 정파 문파였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자들을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도둑놈처럼 습격해서 쓸어버리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의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금의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무엇이 아쉬워 저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런 무식한 무부 놈들이...!”
정 교위는 한탄했다.
멍청한 놈들밖에 없어서 정 교위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우혁도 입을 열었다.
“화산파는 아닐 겁니다.”
“아둔한 놈!”
“정 교위. 화산파 무인들이 도망치시는 걸 멀리서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무복 말고 화산파 무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까?”
“화산파 특유의 검을 들고 있었다. 삿갓을 쓰고 있었고...”
“검은 어디에 차고 있었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정 교위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 벼락출세한 포두 놈은 뭘 안다고 캐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방향을 물은 겁니다.”
“몇 놈은 왼쪽에 찼고 몇 놈은 오른쪽에 차고 있었다.”
연우혁은 원하는 걸 얻어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화산파는 사이하고 독랄하다는 이유로 좌수검(左手劍)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검을 오른쪽에 차고 있던 자는 아마 흑도무림의 무인이었겠지요. 화산파의 무인으로 위장했지만 급해서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
정 교위는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보고 넘긴 걸 눈앞의 포두 놈이 짚어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과연...!”
뒤에서 듣고 있던 주 공공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범인들은 도망간 건가?
“아닙니다. 공공.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합니다. 애초에 화산파의 짓으로 위장하고 싶으면 무복이든 검이든 몇 개를 남겨놓으면 그만인데, 무엇하러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망치는 귀찮은 방법을 선택하겠습니까? 잡히기라도 하면 일이 더 꼬일 텐데요.”
-과연 그렇구나.
속임수치고는 희한한 속임수였다. 연우혁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화산파처럼 보이는 무인들은 금의위를 속이려고 대기하고 있다가 도망친 게 아니라, 이쪽으로 오다가 금의위를 발견하고 도망친 겁니다. 황수장에 금의위 무인들이 보이니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쳤겠지요.”
주 공공은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그보다 장등원이 앞서서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하시오, 정말! 진충비도의 명성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알 것 같소!”
“하찮은 재주일 뿐이오.”
“아니오. 진충비도가 없었다면 화산파는 괜한 누명을 쓰지 않았겠소!”
끼어들어서 떠드는 무림인의 모습에, 주 공공은 짜증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불행히도 가마 안이라서 시선은 닿지 않았다.
“잠깐, 그럼 범인은 어떻게 된 건가?”
“간단합니다. 화산파로 위장할 이들이 오다가 도망쳤으니, 범인은 안에 남아있습니다. 급한 만큼 시체로 위장해 있겠지요.”
“......”
정 교위는 눈만 끔벅이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태연하게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내뱉는 이놈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자기 자신도 저 말에 홀린 것처럼 설득되고 있다는 거였다.
‘무슨... 이런 놈이...?!’
***
귀창괴걸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마두, 봉홍은 귀식대법을 언제쯤 풀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제기랄. 흑교서 놈. 돌아가게 되면 죽여버리겠다.’
흑염방의 책사, 흑교서 우거는 값만 내면 지혜를 빌려주는 흑도의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흑교서가 제값을 하지 못한 적은 없었기에 봉홍은 흑교서를 나름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 홍목대사의 일도 그랬다.
봉홍을 비롯해 정파에 추살령이 걸린 마두들이 모여서, 언변 좋은 약장수 놈 하나를 홍목대사란 거창한 이름과 함께 내세운다.
이 사찰을 후원해주는 자들이 생기고 떡고물에 관심을 가지는 문파들이 늘어나면 손을 잡고 암중에서 더욱 큰 이득을 누린다.
이 계획을 정교하게 다듬어 준 게 바로 흑교서였다. 흑교서의 재주가 아니었다면 난폭하기만 한 마두들이 일사불란하게 홍목대사와 사찰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흑교서의 재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홍목대사라고 떠받들어지자 거만해진 놈이 마두들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나 관리와 손을 잡으려 하자, 흑교서는 놈을 죽이라고 냉철하게 조언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내버려두면 언제 마두들의 이름을 밀고할지 몰랐으니까.
또 그 말이 맞다고 여겼기에 봉홍은 놈과 손을 잡은 황수장에 찾아가 다른 마두들과 함께 살육을 벌였다. 물론 그냥 살육만 벌인 건 아니었다. 흑교서의 지시대로 추적을 혼란시킬 위장도 준비해왔다.
화산파의 무복이나 검이 발견되면 아무리 뻔한 수작이라 하더라도 화산파한테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을 터.
화산파가 인근 사찰이나 불문과 사이가 안 좋은 만큼 더더욱 효과적인 계책이었다.
그런데 이번 계책은 끝이 좋지 않았다. 화산파의 소행으로 위장시켜야 할 놈들이 오다 사라지고 밖에는 금의위 놈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영리하게 기지를 발휘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금의위 놈들을 상대로 도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빨리 가라. 빨리...’
이렇게 시체가 쌓여 있으면 일일이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수상한 놈들이 따로 있다면 더더욱.
대충 확인만 한 뒤, 더럽고 냄새나는 일들은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게 무림인인 것이다.
“!”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귀창괴걸은 움찔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들켰나? 아니다. 들켰을 리가 없다! 어떻게... 하지만 왜 이쪽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귀창괴걸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을 했다. 다른 마두들도 비슷했을 것 같았다.
푹!
“커헉!”
귀창괴걸은 운이 좋았다. 다른 마두의 비명에, 귀창괴걸은 귀식대법을 풀고 튕겨 일어났다.
놀랍게도 앞에 금의위 놈들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까지 있었다. 종남의 청불검도 보였다.
“어... 어떻게...?”
“네놈을 여기서 죽이게 되어 반갑구나!”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지?”
“하. 네놈의 하찮은 재주로 진충비도 연 대협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
그게 대체 누구냐?
청불검이 확신을 가지고 내뱉은 말에 귀창괴걸은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