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103화 (103/107)

용봉지회 (1)

마음속으로는 ‘동창 환관들의 윤리의식, 이대로 괜찮은가?’란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연우혁은 안심하며 걸어 나왔다. 허 중관이 옆에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나 원 참.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게. 깜짝 놀랐지 않나.”

“죄송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

“공공께서 자네를 좋게 보고 계신 건 맞네. 원래 재주 있는 자를 아끼시는 분이니, 자네 같은 인재를 아끼시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교만해져서는 안 되네. 공공께서는 원래 너그러운 분이 아니시니.”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허 중관 같은 노련한 환관의 말은 귀기울여서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필요에 따라 동창의 연줄을 붙잡을 연우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미 반쯤 호랑이 등 위에 탔으니, 호랑이가 어떤 성격인지 잘 파악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동창에 환관 하나가 있었네. 젊었지만 재주가 뛰어나서 제독께서도 총애하실 정도였지. 공공께서도 그 환관에게 일을 맡겼는데, 처음에는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잘 해결했다네. 처음에는 말이야.”

“어떻게 됐습니까?”

“많은 환관들이 겪은 것처럼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네. 교만해진 탓에 실수를 저질렀고 공공의 심기를 거슬렀지. 지금은 석신사(惜薪司)로 쫓겨나서 땔감이나 자르는 신세가 됐네. 아마 평생 출세는 힘들 거야.”

‘저런.’

남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고 동창의 연줄을 붙잡은 이상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관리들 사이에서는 실수 한 번에 한직으로 쫓겨나 거기에 평생 갇혀 사는 것도 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수는 정말로 커다란 실수일 수도 있었지만 윗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관리가 된 이상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중관의 말이 맞다. 운이 좋았군.’

연우혁은 새삼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주 공공이 기분이 좋아서 수락해줬으니 망정이지, 만약 천박한 무부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역정이라도 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공공 앞에서는 말 한 마디도 조심해서 꺼내겠습니다.”

“음!”

허 중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젊은 판관이 기특한 점은 그렇게 대단한 출세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교만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금도 허 중관의 말을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것이라고 넘길 수 있었는데 저렇게 귀담아들어주다니.

어린 환관들이 보고 배웠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교만해진 환관은 무슨 실수를 저질렀답니까? 저처럼 무림인들의 비무라도 구경을 권한 겁니까?”

“아닐세. 그 환관은 교만해져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받았네. 그들이 지은 죄의 증좌를 몰래 없애줬지.”

“...?”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무림맹 비무 권한 게 뇌물 받고 증거 없앤 것과 동급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자와 비교했을 때 많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았지만, 연우혁은 허 중관의 판단을 믿어보기로 했다.

동창에서 보낸 시간이 몇 년인데 아무렴 자신보다는 더 잘 알지 않겠는가?

***

최근 보름 사이 궁 판관은 눈에 띌 만큼 초조해하고 불안해했다.

눈치 없는 지부 어른은 ‘연 판관의 재주를 얼마나 아끼면 그러나’하고 웃어댔지만, 궁 판관의 걱정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동창과 엮인 관리들 중 멀쩡하게 끝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관리들한테 동창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괜히 화를 입을까 싶어 궁 판관은 입만 다물고 기다렸다.

더 걱정되는 건 젊은 판관 놈이 처세술은 영 별로라는 점이었다.

온갖 기괴망측한 일들은 눈 감고도 맞히는 놈이 처세술에 관해서는 영 어리숙하니, 동창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오죽 신경이 쓰였으면 차를 끓일 때 찻잎을 두 움큼이나 넣었을까.

그걸 본 하인들은 ‘무슨 일이 생기셨나보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판관 어르신. 연 판관께서 돌아오셨답니다.”

“!”

그렇기에 연우혁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기뻐한 건 궁 판관이었다.

“팔다리는 멀쩡하더냐?”

“예? 예...”

“뒤에 따라온 무인들은 없고?”

“예.”

“그럼 됐다!”

궁 판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밖을 나섰다. 하인이 말한 대로 연우혁은 팔다리가 잘려 있지도 않았고 뒤에 압송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도 없었다.

동창 앞에서 말실수를 하지도,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고생했다! 동창의 환관들 사이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염라대왕 앞에서 돌아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을 해낸 거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연우혁은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궁 판관의 걱정이 좀 과한 편이었다.

아무 연줄이 없으면 모를까, 친분이 있는 환관과 함께한다면 염라대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동창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참. 한 가지 돌려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젊은 판관이 낯익은 상자를 가볍게 들어 올리자 궁 판관은 어디서 봤나 싶어 이마의 주름을 잡았다. 이상하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번쩍!

열린 상자 안에는 묵직한 은덩어리가 가득 차있었다. 상자의 정체를 깨달은 궁 판관은 경악했다.

“공공께서 이런 건 필요 없다고 하셔서 다시 갖고 왔... 엇, 판관 어른? 여봐라! 판관 어른께서 쓰러지셨다!”

연우혁의 말도 안 되는 짓에 일각 정도 정신을 잃고 혼절했던 궁 판관은 찬물 세례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당황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동창한테 뇌물을... 아끼는 놈이 강호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 정말 미쳐버린 것이냐?!”

환관들이 짐짓 괜찮다고 말해도 억지로라도 쥐어줘야지 돌려준다고 그걸 그냥 갖고 오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궁 판관의 눈에 연우혁은 한경의 관리들을 모조리 저 깊은 강 속으로 끌고 들어갈 역귀처럼 보였다.

“오해하신 겁니다. 사실 제가 이번에 나온 동창의 환관들과 친분이 있어서...”

연우혁은 허 중관은 물론이고 주 공공 앞에서 재주를 선보인 적 있어서 이번에 불려나온 거라고 설명했다.

궁 판관은 이 젊은 놈이 정말 재주가 뛰어나서 동창의 눈에 든 건지, 아니면 재주가 뛰어난 탓에 하늘의 질투를 받아 실성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했다.

“...그래. 네 녀석 말이 맞든 틀리든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느냐. 동창 놈들이 지랄을 하면 그 때 다시 생각하도록 하자. 이건 쓰지 않고 보관해두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궁 판관은 연우혁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간덩이가 큰 건지 아니면 잘 몰라서 이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절대 멍청한 놈은 아닌데...

“그래. 동창의 일을 도우면서 알게 된 건 없고?”

궁 판관이 물은 건 어떤 일들을 해결했느냐가 아닌, 일들을 해결하면서 한경의 관리로서 쓸만한 사실을 주워들은 게 있느냐였다.

실리에 집중하는 궁 판관다운 말이었다.

연우혁도 할 말이 있었던 만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오. 뭘 알아냈느냐?”

“곧 무림맹이 한경 인근에서 용봉지회를 연답니다.”

“커, 커헉. 커허헉.”

기운을 차리려던 궁 판관은 다시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

“음. 정말 진행되는군.”

무림맹에서 날아온 서신은 물론이고 개방 분타주나 다른 구파일방의 속가제자한테 접견 요청이 들어오자 연우혁은 곧 용봉지회가 열린다는 실감이 들었다.

금의위 교위의 헛소문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문파들이 움직이며 말을 꺼낸 이상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연우혁은 궁 판관이 업무를 보고 있는 관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근 한 달 사이 궁 판관의 심기가 매우 날카로워졌기에 말을 걸기가 조심스러웠다.

사실 궁 판관만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한경의 관리들 중 이런 일을 반기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싫어했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싫어했다.

굳이 따지자면 지부 어른 정도만 호탕하게 웃으며 무림 명숙들의 인사를 즐거이 받을 뿐.

벼슬아치들이라면 이런 일에 한몫 크게 벌 수 있을 텐데도 싫어하는 걸 보면 정말 무림인들과는 견원지간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정 교위가 한심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러나 복식은 포쾌의 그것이라 별로 위세가 살지 않았다.

적 포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변장을 해야 한다지만 금의위 교위가 포쾌로 지내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군...”

연우혁은 적조를 보며 ‘네가 할 소리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지금 금의위의 정 교위는 놀랍게도 포쾌로 위장한 채 용봉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위장해야지. 그럼 교위 신분으로 당당하게 검을 차고 돌아다니란 말이냐? 마두 놈들이 잘도 있겠군.

이번 용봉지회 같은 일에서 ‘나 금의위요’하고 모습을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건 위에서 크게 문책할 만한 일이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금의위 간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정 교위는 가장 쉽게 위장할 수 있는 신분으로 위장했다. 바로 포쾌였다.

지금 정 교위는 연우혁의 먼 친척으로 한경에 찾아와 출세를 노린다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혹시 교위께서 해줄 조언이라도 있나?”

“무림인 놈들은 믿지 마라. 여유만 되면 놈들에게 감시를 붙여놓는 게 좋겠지. 특히 거대문파일수록 더더욱.”

“음. 금의위면 모를까 나는 무리겠군.”

뛰어난 교위들을 여럿 부릴 수 있는 금의위면 모를까 연우혁이 부릴 수 있는 건 포쾌들밖에 없었다. 이런 포쾌들한테 무림인들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는 대번에 목이 날아날 터였다.

그건 정 교위도 알았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만큼 소문에 귀기울이고 정보를 캐내라. 지금 무림인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만큼 놈들이 가진 꿍꿍이도 수없이 많을 터. 마침 판관의 자리는 이런 꿍꿍이 가진 놈들을 긁어내기 딱 좋은 자리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든 꼬투리 잡히면 심문해서 아는 걸 다 토해내게 하라 이건가?”

“그래. 잘 이해했군.”

‘괜히 물어봤네 이 자식.’

연우혁은 한경의 명판관으로 불리고 싶었지 한경의 미친판관으로 불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자기 검이 사라졌다고 찾아온 무림인을 심문해서 어느 문파와 엮였는지 토해내라고 하면 무림에서 혈마판관 같은 별호 얻기 딱 좋았다.

“판관 나으리! 무림인들끼리 다툼을 해결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

무림인들끼리의 다툼은 보통 자기들끼리 해결을 하거나 둘 중 한 명이 도망치는 식으로 끝나기 쉬웠다. 아무래도 국법 없이 사는 이들이 무림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양쪽 다 믿는 구석이 있고 체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 된 기회다. 놈들의 약점을 잡아서...”

“들어오라고 해라.”

연우혁은 정 교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사람들을 불렀다.

***

북표 위가장 출신의 젊은 무인, 위명호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파무림의 용봉지회에 참가해 명성을 알리기 위해 한경에 일찍이 찾아왔으나, 겪게 된 건 장가전장과의 구원(舊怨)으로 인한 낯부끄러운 다툼이었다.

위가장이 장가전장과 악연이 있다지만 자신을 도둑으로 몰 줄이야!

장가전장의 젊은 공자, 장적 놈의 검이 사라진 게 화근이었다. 그 근처에서 검이 발견되지 않자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위명호를 범인으로 몰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위명호는 장적 놈의 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놈의 검이 운철을 써서 만든 명검이든 황실에서 하사받은 명검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잘 됐다.”

“?”

설명을 들은 정 교위의 말에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 교위도 진상을 알아차린 것일까?

“뭐가 잘 됐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 장가전장은 이번에 참가하는 여러 문파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상인 출신들은 고루한 무림인들보다 훨씬 더 타협하기 수월한 편이지. 장가전장의 편을 들어서 은혜를 베풀어줘라. 그럼 저들도 네 수족이 되어서 정보를...”

연우혁은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저 무인이 검을 가져간 게 아니다. 네 짐을 더 뒤져보도록.”

“......”

대뜸 내뱉는 판관의 말에 정 교위는 물론이고 좌중에 몰려 온 무림인들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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