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지회 (2)
“아, 아니. 판관 어르신...”
장가전장의 무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자, 연우혁은 새삼 관직이란 게 편하단 걸 느꼈다.
예전 포쾌였을 때 저런 말을 했었다가는 ‘포쾌 놈아 미친 거냐’하며 대번에 쌍욕이 날아왔을 텐데 판관이 되고 나서 비슷한 말을 하자 ‘판관 어르신’하며 주저하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속으로는 욕을 해도 자칫 판관의 비위라도 거슬렀다가 한경에서의 앞일이 귀찮아질까봐 참는 게 분명했다.
판관 본인의 힘 또한 장가전장의 일을 훼방놓기에는 충분했고, 게다가 관리들이란 건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는 더 똘똘 뭉치기 마련.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판관 앞에서 난동이라도 부렸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 날로 한경의 관리들은 장가전장을 아주 집요하게 물어뜯기 시작할 터였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느냐?”
“그,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번 장가전장의 상행을 책임지고 있는 부총관 오복고가 입을 열었다.
장주의 젊은 핏줄이 명목상으로는 책임자라지만 아무래도 실무에서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조리 있게 설명에 나서는 건 부총관이었다.
“저희는 만풍객잔을 통째로 써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포두들도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할 만큼 크고 작은 객잔들이 난립한 한경에서, 만풍객잔은 어지간하면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크고 번영한 객잔이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객잔을 통째로 빌릴 수 있는 건 이 객잔이 장가전장의 소유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객잔의 일층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은 전부 다 장가전장의 무인들이었다. 외부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장 공자께서는 분명 허리춤에 검을 차고 계셨습니다. 그건 제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 소협께서 객잔에 들어오신 겁니다.”
“제기랄, 마땅한 객잔이 없어서 머물 곳을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소!”
위명호는 발끈했다.
한경의 크고 작은 객잔들이 전부 꽉 들어찬 탓에 머물 곳을 찾느라 객잔의 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말씀은 정확하게 하셔야지요. 위 소협.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셨잖습니까.”
“여기 객잔이 그쪽 객잔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대뜸 꺼지라고 하니 시비거는 줄 알았을 뿐이오!”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있던 장가전장의 무인들은 대뜸 꺼지라고 외쳤다. 당연히 사정을 모르는 위명호가 그런 모욕을 참고 물러날 리 없었다.
위명호는 눈에 불꽃을 튀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무인들과 초식을 교환했다.
뒤늦게 부총관이 나타나 객잔의 주인을 알렸기에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장 공자의 검이 사라진 것이다.
“보십시오. 판관 어르신.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누굴 의심하겠습니까? 검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위 소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 포쾌가 물었다.
“그런데 위 소협도 자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검을 빼돌렸답니까?”
“싸우느라 혼란스러웠으니 객잔 문 밖에 사람 한 명 대기시켜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객잔 문 주변의 발자국을 확인해보았습니까?”
“...!”
부총관은 일개 포쾌의 지적에 허를 찔려서 당황했다. 다른 무림인들도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리고 정 교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명장 밑에 약졸이 없다지만 이 놈들...!’
이 젊은 판관 놈의 재주를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 부하의 부하들마저 저런 재주를 보이자 믿기 힘들 정도의 패배감이 들었다.
‘아니다. 놈은 아직...!’
정 교위는 연우혁이 이번 일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교위가 보기에 이번 일은 연우혁이 실수한 것 같았다.
“그,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위 소협이 갖고 갈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갖고 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층에서 내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그 위층에 있던 짐에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확언컨대, 공자께서는 일층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층에 있던 짐을 뒤져봤나?”
“뒤져보지 않았습니다만...”
“뒤져보고 와라. 적 포쾌, 정 포쾌. 같이 가서 확인하고 오도록.”
“......”
몇몇 장가전장의 사람들은 뭐라도 씹은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판관이 자기 할 말만 하는데 유쾌하게 ‘예, 예’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착각한 게 있었다.
여기는 판관이 일을 맡는 관아의 형관이었고 평소에 무림인들을 보며 굽신거리는 포쾌들도 여기 오면 목이 뻣뻣해졌다.
“지금 감히 판관 어르신의 명에 불만을 품는 것이냐! 장가전장의 위세가 국법을 무시하고 판관을 깔보는구나!”
“칼 찬 무림인들이 한경을 우습게 봐도 이렇게 우습게 보다니!!”
‘아차.’
부총관 오복고는 아차 싶었다. 휘하의 무인들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용봉지회가 열리지도 않았는데 한경의 고관들과 문제가 생겨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부총관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외쳤다.
“오해입니다, 오해입니다! 포쾌 어르신들. 여기 무인들은 허약해서 오래 서있으면 햇빛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런 겁니다!”
급할 때는 포쾌 놈도 포쾌 어르신이 되기 마련.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무인들이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부총관은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뇌물을 갖다 바치라는 신호였다.
“감히 뇌물을 갖다 바치려고 하다니!!”
“...?!!”
부총관은 기겁했다.
살면서 뇌물 줬다고 지랄하는 포쾌 놈들은 처음 봤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놈이 아니라 일치단결해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정 교위도 황당했는지 포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놈들이 포쾌인지 금의위 교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금의위 교위도 뇌물을 거절하진 않는데...
“됐다. 장가전장이 한경에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한 모양이군. 확인이나 하고 오도록.”
“감, 감사합니다. 판관 어르신!”
부총관은 깊숙이 감사를 표하며 재빨리 뛰어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이게 뭔 짓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헛짓거리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부총관. 이거 괜찮은 겁니까?”
장적이 황당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아무리 경험이 부족한 공자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이상하단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다려보시죠.”
“아니, 뭔 생각으로 저러는 겁니까? 무림인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저러는 건가?”
“쉿. 목소리가 큽니다. 일단 기다려보십시오. 짐에 없다는 걸 알면 고집을 더 부리던 꺾던 하지 않겠습니까.”
부총관은 저 젊은 판관이 대체 무슨 생각인가 고민하며 초조히 기다렸다.
뇌물인가? 그렇다면 은밀하게 따로 만나길 원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암시를 했을 텐데? 정말 무림인들의 위세를 죽이려는 거라면 다른 문파들과 연락해서...
“돌아왔습니다!”
담벼락 밖에서 장가전장의 무인들과 두 포쾌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정문을 지나는 무인들에게 외쳤다.
“있었느냐?!”
“...예... 있었습니다.”
“없다면 됐... 잠, 잠깐. 뭐라고?!”
“여, 여기... 이거 아닙니까?”
심부름을 맡은 장가전장의 무인들은 죄를 지은 것마냥 검을 들어올렸다. 누가 봐도 장적의 검이었다.
보는 눈이라도 없다면 수작이라도 고민했을 테지만 두 포쾌가 같이 간 탓에 그냥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순간 좌중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부총관이나 장 공자는 물론이고 교위의 얼굴도 썩어 들어갔다. 저 검이 짐 사이에 있을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저 놈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냈단 말이냐!’
스스로의 재주에 자부심을 가진 정 교위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었다. 정 교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 힘드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이상한 놈인가?’
적조는 정 교위를 쳐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금의위 교위가 포쾌로 변장했을 때부터 참 특이하다 싶었는데...
“정, 정말 몰랐습니다. 판관 어르신. 저희가...”
경험 많은 부총관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는지 혀가 머뭇거렸다. 누가 봐도 장가전장이 애꿎은 젊은이를 모함하려고 한 것 같았다.
“절대... 그게...”
“장가전장의 잘못은 아니지.”
“어, 어째서입니까!”
위명호는 발끈해서 외쳤다가 연우혁이 쳐다보자 압도되어서 고개를 숙였다. 젊은 판관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쌓은 무공의 경지 때문도, 가진 관직의 위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저 판관이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신위 때문이었다.
연우혁은 사람들이 대충 들을 준비를 하자 입을 열었다.
“도둑놈은 아마 장가전장의 하인 중 하나였을 거다. 놈은 검을 빼돌려서 객잔을 빠져나가봤자 들키기도 쉽고, 별로 남는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검을 빼돌린 뒤 위층으로 올라가 짐에 던져 넣은 거다.”
장가전장이 당한 수법은 꽤 치밀하고 집요한 수법이었다.
먼저 검이나 장신구처럼 사라지면 알아차릴 물건들을 훔친 뒤 갖고 가지 않고 상대의 짐 사이에 얌전히 숨겨놓았다.
이런 짓을 몇 번 반복하게 되면 상대는 물건이 사라져도 소란을 일으키기 꺼려하거나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가 조심하게 됐다.
바로 그 때 진짜 노리던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아마 장적이 소란을 다 피우고 나면 검의 진짜 위치도 슬쩍 발견한 척 했으리라.
“...그, 그런...! 지금 당장 놈을 잡아라!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해!”
‘힘들 텐데.’
연우혁은 이제 와서 달려가 봤자 도둑을 잡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연우혁이 해결했을 때도 일이 다 터진 이후였고, 도둑 입장에서는 조금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몸을 뺐을 테니 아마 관아로 왔을 때 도망쳤으리라.
아니나다를까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돌아와서 황망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하인 하나가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아... 이... 이...”
분해서 어찌할 바 모르던 부총관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연우혁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판, 판관 어르신 덕분에 전장의 보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실로 명판관이십니다!”
부총관은 물론이고 장적도 정신을 차리고 포권했다.
“나 장 모, 위 소협에게 사과드리오! 장가전장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소. 부끄러울 뿐이오.”
“...도둑의 수작에 매몰차게 대했다가는 나 또한 도둑놈이나 마찬가지겠지.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위 소협께서는 실로 대인이시오!”
장가전장의 사람들은 위명호에게 깔끔하게 사과했다.
이 상황에서 더 뻗댈 수 없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자기 가문의 하인이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충격이 컸다.
자칫하면 큰일날 뻔 했던 만큼 반성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림인들끼리 은원을 잊고 화해하는 모습에 포쾌들은 물론이고 관의 하인들까지 감격스러워했다.
연 판관의 재주가 아니었다면 저 무부 놈들이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검이 저기 위에 있단 걸 알아낸단 말이냐?! 아무리 신통력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하인 놈은 또 왜?!”
그 분위기 속에서 정 교위만 혼자 머리를 싸매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본 적조는 혀를 쯧쯧 찼다.
뱁새가 황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봤자 결국 뱁새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텐데, 저 교위는 아직도 멀었군!’
***
두 무림인들을 화해시킨 뒤로도 연우혁은 몇 가지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했다.
주루에서 각자 은자를 냈지만 한 닢이 사라진 탓에 싸우던 무림인들, 절에서 머무르다가 개가 검을 물어간 탓에 주지 스님과 다투던 무림인, 노점에서 끼니를 때우던 도중 비급을 잃어버린 무림인 등등.
‘도둑이 기승을 부리나?’
절도가 많아졌지만 연우혁은 무림인들이 많아졌기에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이라 생각했다.
“진충비도 되시오?”
“누구냐?”
연우혁은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볍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자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별호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할 말이 있소이다.”
“말해라. 듣고 있다.”
“당신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소.”
“...?”
상대의 말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가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잘못 온 것 아닌가?’
다른 관리들과 달리 연우혁은 뇌물을 긁어내기는커녕 자기가 받은 포상금을 밑의 포쾌들한테 나눠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누가 굶어죽는다는 거지?”
“바로 도둑이오!”
“......”
연우혁은 비도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