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105화 (105/107)

용봉지회 (3)

‘무림인 놈들이 늘어나니 미친놈들도 따라서 늘어나는구나!’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범위를 확장시켰다. 평소에는 상단전을 혹사시키지 않기 위해 제한적으로 짧게 쓰는 걸 선호했었지만, 반복된 사용으로 훈련된 능력은 이런 것도 가능했다.

‘다섯 명! 두 명은 몰랐다.’

본채 밖 담벼락 위의 한 명과 그 주변으로 포진한 네 명을 느끼고 연우혁은 놀랐다.

말을 걸고 있는 본인을 포함한 세 명은 기감으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두 명은 특별한 은잠술을 익혔는지, 딱히 연우혁보다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기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영안이 없었다면 놓쳤을 게 분명했다.

‘그렇군. 애초에 세 명은 일부러...’

연우혁은 상대 도둑놈이 미친놈 같지만 생각보다 치밀하단 걸 깨달았다.

세 명은 일부러 기감을 희미하게라도 느끼게 해서 방심시키고, 만약 뛰쳐나오면 진짜로 은신했던 두 명이 예상을 찔러 당황시키는 것이다.

과연 무공 익힌 판관 저택의 앞마당까지 올 담력이었다.

“굶어죽는다니. 어째서지?”

연우혁은 뛰쳐나가서 탈혼비도를 던지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속셈을 좀 더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진충비도 당신은 판관으로 일하고 있지 않소. 기행을 벌이는 무림인이 한둘이 아니라지만 당신 같은 괴인도 드물 것이오.”

“나는 그저 충군애민을 위해서 일할 뿐.”

가식적인 말을 하면서 낯이 뜨거워졌지만 연우혁은 참고서 내뱉었다.

무림인들이 ‘너는 왜 무림인이 판관을 하느냐’라고 캐물을 때 ‘난 원래 무림이 싫었다’나 ‘판관을 해야 그 권세로 편하게 살지 않겠느냐’같은 대답은 썩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상대도 이런 황당한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

연우혁은 영안을 괜히 열었다 싶었다. 상대의 알고 싶지 않은 중얼거림까지 잡아주는 것이다.

상대는 미친놈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는지 자기 할 말을 바로 꺼냈다.

“진충비도 당신이 방해한 내 부하가 둘이나 되오. 알고 있소?”

“잠깐, 그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많이 잡았는데?”

“...몇 놈을 잡아넣은 것이오?”

담벼락 위의 도둑놈은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 판관 놈이 대체 몇 놈을 잡아넣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도역유도(盜亦有道)란 말을 아시는지 모르겠소.”

도역유도.

보통 도둑들이 배때기에 기름이 차면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철학을 읊곤 하는데 그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도둑놈들에게도 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한경의 도둑들은 관리의 체면을 지켜가며 도둑질을 하고 있소.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도둑들도 도(道)를 지키지 않을 것이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슬슬 짜증이 난 연우혁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간단하오! 우리도 관리의 체면을 존중해줬으니 진충비도 당신도 우리의 체면을 존중해서 적당히 잡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한경의 모든 포쾌들이 밤에 잠을 자지 않아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물건이 사라지게 될 테니.”

“......”

“혹시라도 이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나는 모금묘사(摸金墓師) 조의망! 내 별호는 들어봤겠지.”

모금묘사 조의망.

별호에 ‘묘(墓)’가 들어간 걸 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조의망은 원래 도굴꾼 출신이었다.

도굴꾼들의 대부분은 묘를 파헤치다 죽거나 붙잡혀서 죽는 게 보통. 그 중 극히 일부만이 부를 얻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조의망은 그런 극히 일부 중에서도 더욱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묘 안의 비급을 찾아 무공을 익히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무공의 강함이야 그리 높지 않았지만 원래 도둑놈의 무공이란 것은 도망치거나 숨는 것만 잘하면 충분한 법.

그런 점에서 조의망이 익힌 무공은 제몫을 넘치도록 해주고 있었다.

강호에서 명성을 날린 신투들이 채 오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동안 십 년 넘게 살아남아 ‘모금묘사’라는 별호를 자처한다는 점이 바로 그랬다.

‘저 멀리 북쪽에서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연우혁은 상대가 용봉지회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온갖 잡놈들까지 다 같이 온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하들도 있었나?”

“물론! 수족 역할을 해줄 자들이 없다면 용(勇), 의(義), 인(仁)이 왜 있겠소? 명심하시오. 내 경고는 두 번은 없을 것이니!”

모금묘사는 상대가 자신의 명성을 알자 만족스러워하며 훌쩍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혹시라도 뛰쳐나올까 싶었는데 판관은 나오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모양이었다.

“조 대인. 저 판관 놈이 호락호락하게 말을 들을까요?”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하들은 모금묘사의 명령에 따라 도둑질에 나서는 부하기도 하면서 성과와 자질에 따라 은잠술의 초식 한두개를 가르침 받는 제자기도 했다.

가진 것 없는 도둑도 몇 년 일하면 목에 힘이 들어가는데 모금묘사 같은 신투를 업은 도둑들이 온순할 리 없었다. 이들은 모금묘사 앞에서는 조심스러워도 다른 자들 앞에서는 마치 낭중(囊中) 속의 물건이 이미 자기 물건이 된 것처럼 오만하게 굴었다.

그런 부하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확실히 드문 일. 모금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판관 놈이 내 경고를 무시한단 말이냐?”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오나 저 판관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보니...”

말을 꺼낸 부하 말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부하가 더 있었다.

그만큼 한경 인근에서 진충비도의 소문이 자자하게 난 것이다.

눈을 감고서도 백 리 밖의 도둑을 탁탁 잡아내고 비도를 던져 천 리 밖의 죄인을 잡는다는 소문은 아무한테나 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경 놈들 허풍도 잘 떠는구나’했던 도둑들도 자신들의 수법 몇 개가 순식간에 파훼되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인이긴 하지. 하지만 천치가 아니라면 내 경고를 이해했을 거다.”

모금묘사는 단순히 자신의 명성만을 믿고 있지 않았다.

노련한 도둑답게 한경의 상황 또한 영리하게 읽고 있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무림인들이 몰려든 상황에서 판관이 들끓는 도둑들을 잡지 못하는 건 꽤 체면이 상하는 일.

관졸이나 군병들을 더 부르면 이제 조정에서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관리로 생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한경 관리들의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는 꼴이 됐다.

가장 현명한 건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모금묘사 본인도 용봉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무림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목적을 이루고, 판관 노릇에 집착하는 괴인인 진충비도도 체면을 챙기면 어찌 서로 이롭지 않겠는가?

* * *

“......”

모금묘사는 황당함을 가득 드러내며 객잔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삿갓을 푹 눌러 쓰고 얼굴을 가린 부하가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세 놈이 전부 다 잡혔다는 거냐?”

“예...”

“불가능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조의망이 신경질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판관 놈에게 경고를 한 게 이틀 전이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잡힌 놈은 없었다. 일이 방해만 받았을 뿐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당연히 휘하의 부하들도 더 경계를 하면서 일을 벌이면 벌였지 덜 경계하진 않았다. 판관에게 경고를 했다고 해서 방심할 만큼 이들이 멍청하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세 놈이 잡혔다고?!

“세 놈이다, 세 놈. 한 놈만 쫓아다녀도 보름은 걸릴 텐데 어떻게 이틀 만에 세 놈이 잡혔다는 거냐.”

“사... 사실 오늘 세 놈이 다 잡혔습니다.”

“...말해봐라! 어떻게 잡혔는지.”

부하는 벌벌 떨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첫 번째 놈은 이 근처 무가(武家)의 묘를 뒤져보려고 했다.

일반적인 도굴꾼이 노릴 법한 목표는 아니었지만, 모금묘사는 보검이나 비급서도 매우 높게 쳐줬다.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는 도둑은 패물보다 무공을 귀히 여겨야 하는 법.

그래서 이 첫 번째 도둑놈은 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사흘에 걸쳐서 흙을 파내고 지하 통로를 만들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니 낮에는 입구를 덮어두고 밤에는 천으로 주변을 가린 채 파내려갔다.

“실수한 게 없는데, 무어냐? 왜 잡힌 거지?”

“그, 판관 놈이 묘 주변에 새 흙이 조금 흩뿌려진 걸 보고 바로 매복했다고 합니다...”

“......”

조의망은 귀를 의심했다.

물론 무덤을 파내려갈 때는 안의 흙을 밖으로 던져야 하는 만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당연히 모금묘사의 부하도 그걸 잘 알았다. 흙이 조금 흩뿌려졌다고 해봤자 정말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흙만 보고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리다니?

이런 바쁜 와중에 진충비도 놈 본인이 매복하고 있는 건 보통 자신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다음을 말해봐라.”

두 번째 놈은 판관에게 어이없게 동료가 잡혀가자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대담하게도 첫 번째 놈이 훔치려고 했던 묘에 대낮에 찾아가, 인적 드문 시간을 노려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이미 거의 만들어진 통로였기에 입구만 가리면 대낮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묘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자 두 번째 도둑은 신이 나서 관을 들어올렸다. 보통 부장품은 그 아래에 보관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 순간 기관진식이 발동되더니 마비독이 발라진 암기가 날아들었다. 두 번째 놈은 그걸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관 아래에 암기를 놓는 놈들은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모금묘사는 당혹스러워했다. 본인 또한 경험 많은 도둑이었기에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이상한 소리인지 잘 알았다.

물론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서는 부장품이 있는 곳에 기관진식을 설치해놓는 게 좋겠지만, 애초에 무덤이란 건 도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자를 잘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 아닌가.

부장품을 보관하는 곳에 암기를 놓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판관 놈이 첫 번째 놈을 잡은 다음에 허락을 받고 암기를 배치해놨다고 합니다...”

“......”

모금묘사는 놀라워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것에 화를 내거나 보복을 고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무슨 이런 놈이 있단 말이냐?

“세 번째 놈은?”

“세 번째 놈은 둘이 잡힌 다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려고 관아에 접근했습니다. 지게꾼으로 변장해서 지나가는 척 들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포쾌들이 포위하지 뭡니까. 그래서 대뜸 잡혔습니다.”

“그게 다냐? 들킨 이유가 있을 텐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골똘히 생각하던 모금묘사는 의아함을 느꼈다.

물론 모금묘사는 하오문과 인연이 깊은 만큼 부하들도 하오문에 가서 소식이나 정보를 부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금방의 일이었다. 하오문이 무슨 쥐나 새도 아니고 일의 전말을 벌써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아낸 거냐?”

“그게 말입니다...”

부하는 우물쭈물댔다.

그 모습에 모금묘사는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팍!

모금묘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탁자를 박차고 생선요리와 국물이 든 그릇을 사방으로 던진 뒤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사악함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의 기감을 전혀 잡아내지 못했기에 모금묘사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고수다!’

눈빛과 손톱에서 보이는 목청색 빛과 유난히 길고 굵은 오른팔. 그리고 흉악하게 일렁거리는 눈동자와 목소리.

이런 고수는 무림에서 많지 않았다.

‘...독혼수 당등!’

모금묘사는 오늘 자신의 운수가 흉이 가득하다는 걸 직감했다. 많고 많은 무림인들 중 독과 암기에 능통하고 독랄하기로 유명한 고수를 만나다니.

“야, 거기 서라. 모금묘사! 네놈이 도망치면 진충비도한테 호언장담한 이 당등의 체면이 뭐가 되겠냔 말이다! 도망치면 사지에 각기 다른 독을 꽂아주마!”

“......”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모금묘사는 욕설이 절로 나왔다.

무슨 놈의 판관이 이렇게 체면도 없이 무림인에게 일을 맡긴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사천당문의 고수란 자가 체면도 없이 그걸 날름 받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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