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도망쳐야 한다...!’
결심과 함께 모금묘사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그 기세도 같이 흐릿해졌다.
걸견폐요공(桀犬吠堯功).
모금묘사 조의망이 익힌 심법의 이름이었다.
내공을 쌓는 속도도, 쌓인 내공의 정순함도 보장해주지 않았지만, 이 심법은 도둑에게는 신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려 쌓은 내공의 성질을 변화시켜 무인의 존재를 흐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강호에 은잠술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내공 성질 자체를 변화시켜서 무인을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심법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이 심법은 다른 기공 하나와 같이 익히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견설고골결(犬齧枯骨訣).
이름에 개가 들어가는 탓에 우스워 보일 수 있겠지만 이 기공과 걸견폐요공을 같이 익히면 눈앞에서도 잡기 힘들 만큼 기감이 흐릿해졌다.
천하의 독혼수 당등도 모금묘사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러워했다.
무슨 사악한 무공인진 몰라도 눈앞에서 초점을 잡기 힘들 정도라니.
‘이건 단순히 은잠술이 아니라 환술의 요결까지 들어간 무공이다!’
당등은 상대가 익힌 심법과 펼치는 기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했다.
무력으로는 당등을 상대할 경우 순식간에 한 줌 핏물이 되겠지만 놀랍게도 이런 도주 상황에서는 저 모금묘사란 놈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푹!
당등은 냅다 자신의 왼팔을 바늘로 세게 찔렀다. 독이 묻어 있었는지 찔린 곳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찾았다, 이 찢어 죽일 도둑놈 새끼!”
“...!”
으르렁거리며 쫓아오는 당등의 모습에, 모금묘사는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무림의 술법 중 환술은 고통이나 충격을 받으면 깨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모금묘사가 익힌 무공 또한 환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기에 상대가 눈앞에서 봐도 그 초점을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
역으로 말하자면 고통을 주면 모금묘사의 무공도 그 효과가 줄어들었다. 독혼수는 그걸 노리고 자신의 왼팔을 찔러 고통스러운 독을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다루는 독이니 중독은 되지 않을 것이고 통증만 있을 테니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팔에 바로 독 묻은 암기를 꽂아 넣는 독심이라니.
“이... 당신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판관의 명령을 받고 쫓아온단 말이오!”
“명령? 명령?! 방금 그 말로 네놈의 회음혈에 박힐 암기가 하나 더 늘었다! 아주 뾰족하게 박아주지.”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당등의 말에, 모금묘사는 자신이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판관의 명령으로 쫓아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저렇게 죽일 기세로 쫓아오는 거냐...!’
* * *
하루 전 한경에 도착한 당등은 아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지부 어른도 만나고 강 노인에게 약재도 좀 갖다 주고...
그런 다음 기특한 포두, 아니 판관 녀석을 찾아갔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이 포두 녀석이 세운 공적으로 판관이 된 것이다.
무림에서 진충비도란 별호를 얻고 명성을 날린 것보다 판관이 된 게 몇 배는 더 신기한 일이었다.
‘하긴, 조정의 썩어빠진 벼슬아치 놈들도 눈깔이 달렸다면 한 일들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했겠지!’
낭중지추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말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걸 보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유쾌해진 당등은 선물로 새로 만든 독이나 몇 개 전해줄까 싶어 관아에 방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다른 구역의 포쾌들도 몰려왔는지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대, 대협.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다. 무슨 일이냐고 두 번 물어봐야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게, 웬 미친 도둑놈이 판관 어르신을 협박해서 시끄럽습니다. 저희 포쾌들은 일치단결해서 놈들의 소란을 막아낼 생각인데, 궁 판관 어르신은 ‘니놈들을 믿느니 내 집의 늙은 개를 믿겠다’라고 하셔서...
-도둑놈 하나 때문에 이 소란을?
-그 자도 무림인입니다. 모금묘사 조의망이라고...
-흥! 잘 됐군. 선물을 바꿔줘야겠다. 판관 어른 있소? 당장 얼굴 좀 봅시다!
당등은 연우혁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사를 대충 마친 뒤 자신이 모금묘사를 잡아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연우혁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모금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판관 네가 찾아줘야지?
-...예... 그렇군요.
연우혁은 조금 당황했지만,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응 가능할까 고민하던 차에 당등 같은 고수의 도움은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부하들을 잡아서 심문해보겠습니다. 조금 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하루 안에 처리하겠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리고 실제로 당등의 말대로 판관은 하루 안에 부하들을 여럿 잡아들였다. 모금묘사와 만나기로 한 객잔을 듣자 당등은 바로 그 부하 놈을 데리고 출발했다.
-판관 취임 선물로 그 도둑놈 모가지를 잘라다주겠다!
-가능하면 살려서 데리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맡겨만 두라고 했는데 놓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심지어 모금묘사가 숨은 위치까지 연 판관이 알려준 거였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 당등은 살기 넘치게 쫓아왔다. 아무리 경공을 펼쳐도 거리가 점점 줄어들자 모금묘사는 이를 악물었다. 점점 등뒤가 서늘해지는 게 금세라도 암기가 날아올 것 같았다.
“!”
당등은 눈을 크게 떴다.
하필이면 모금묘사가 담벼락을 넘은 쪽이 시전(市廛) 쪽이라 사람들이 서로 어깨가 부딪칠 만큼 꽉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죽었다 살아난 모금묘사는 역용술을 펼치며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누볐다. 걸견폐요공과 견설고골결이 모금묘사의 인기척을 줄이고 추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살... 살았다.’
모금묘사는 십 년 동안 쓸 대운을 오늘 하루에 다 쓴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거나 다른 장소였다면 등의 요혈에 독혼수가 쏘아낸 암기가 날아들었을 것이다.
뒤를 보니 독혼수 당등이 담벼락 위에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시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당문의 무인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일까 싶으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모금묘사를 재촉했다.
‘...빨리 빠져나가야겠군.’
모금묘사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자 득실을 생각하게 됐다. 한경에 와서 참으로 손해가 컸다.
독혼수한테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쓸만한 부하들이 잡혀간 게 뼈아팠다. 진충비도 놈을 윽박지른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곤란한 상황이 됐다.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덤벼들 것인가, 아니면 물러날 것인가?
‘...물러나자.’
젊은 판관 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에 굴욕감이 쓴물처럼 치밀었지만, 결심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모금묘사는 자신이 진충비도한테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혼수도 아닌 진충비도한테 겁을 먹을 줄이야.
다른 도둑들이 들으면 비웃을 소리였지만, 직접 겪어 본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저 놈은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턱 밑까지 차올라왔다.
‘이번에 꼭 장로 자리를 얻으려고 했건만...’
모금묘사 조의망이 용봉지회로 떠들썩한 한경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조의망이 노리는 건 하오문의 장로 자리였던 것이다.
다른 문파와는 다른 이질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하오문이었지만, 그래도 문파의 장로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감과 권한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건 어느 도둑이든 탐을 낼 자리였다.
그러나 하오문의 장로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혹은 무공이 강하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문파를 위해 세운 공이 많아야 될 수 있는 게 장로의 자리였다.
모금묘사는 각종 다양한 비급과 병장기, 보물을 하오문에 바침으로써 자신의 자격을 증명할 요량이었다.
용봉지회 같은 경우에는 강호의 온갖 문파 출신들이 몰려오니 몇 개 빼돌린다 하더라도 태산에서 한 줌 흙을 긁은 정도일 터. 모금묘사와 모금묘사가 가르친 부하들이라면 충분히 한 몫을 모을 수 있었는데...
...하필 미친 판관 놈을 만나버릴 줄이야.
“조훤사등수(鳥喧蛇登樹)?”
“견폐객도문(犬吠客到門).”
암어를 말하자 청월루의 뒷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들어오라고 문을 열었다. 모금묘사는 갑자기 한경을 뛰어다닌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조 대협!”
“무슨 일이오?”
하오문의 후기지수, 취봉(醉鳳) 이교가 보기 드물게 질린 얼굴로 복도를 달려오자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한경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무슨 일이라니... 내 일이란 게 뭐가 있겠소? 알면서 왜 그러는 거요?”
“지금 기루에 독혼수 당등이 사생결단할 각오로 와있습니다.”
“......”
모금묘사는 오늘 자신이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보통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 * *
분노와 굴욕으로 눈이 뒤집힌 당등은 설욕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모금묘사는 하오문과 관계가 있는 놈.
그렇다면 하오문으로 가서 놈을 끌어내겠다!
“당 대협. 아무리 당문의 위세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일은 후회하실 겁니다.”
삼층에 모여 있던 하오문의 무인들과 하인, 기녀들은 녹색 얼굴로 당등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당문의 위세가 사천을 호령한다지만 하오문 또한 이렇게 무시 받을 문파는 아니었다.
강호의 밑바닥들은 밑바닥대로 보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세가나 구파일방이 하오문을 굳이 건드리거나 토벌하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등 또한 만만찮게 미친 사람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일 끝나면 네놈들 원하는 대로 보복해라. 대신 이 당등도 원하는 걸 하겠다. 난 그 개잡놈을 반드시 잡아 죽이고 말겠다!”
‘미친 새끼!’
하오문의 무인은 새삼 당문의 무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자기 자존심과 감정이 풀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 독심이라니.
오늘 독혼수는 대뜸 청월루에 쳐들어오더니 기녀들과 하인들도 물리치고 일층과 이층을 지나 삼층으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대뜸 말했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중독됐다. 살고 싶으면 모금묘사 놈을 불러와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인! 저희는 정말 그런 도둑놈을 알지 못해요!”
기녀 중 한 명이 애절하게 외쳤다. 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간장을 녹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등은 냉정했다.
“그럼 알아와라!”
“천지를 돌아다니는 두 발 달린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어요?”
“못하겠으면 죽어라!”
“......”
기녀들은 질린 눈빛으로 물러섰다. 정말로 미친 작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등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한 시진 정도 지나자 당등은 눈을 번쩍 떴다.
“이층 놈들한테 전해라! 네놈들도 중독됐다고. 슬슬 독이 올라올 시간이군.”
“절대 안 되오!”
하오문 무인이 쏘아보며 말했다.
삼층의 하인들이나 무인들이면 모를까 이층은 손님들이 있는 곳 아닌가.
그들이 중독되면 뒷수습이 정말로 까다로워졌다.
“그들이 중독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독혼수!”
“이 당등 걱정은 고맙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그 놈을 데리고 와라. 안 그러면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다 한 줌 핏물이 될 테니!”
‘미친 개새끼가...!’
“내가 졌소! 독혼수! 그만두시오!”
쿵!
안쪽 문이 열리더니 모금묘사가 튀어나와서 엎드렸다. 그걸 본 당등은 살짝 놀랐다.
하오문이 정보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확신했지만 하오문 쪽에 은신하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보다 관계가 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독을 풀어주시오!”
“알겠다.”
독혼수는 선선히 손짓했다. 삼층 사람들의 얼굴에 걸려 있던 녹색 기운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협. 아래층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새끼를 대협이라고 부르는 것도 화가 났지만 하오문 무인들은 참고 말했다.
“아래층은 없다.”
“예?”
“중독시키지 않았다고.”
“......”
“한 번! 한 번은 하오문의 체면을 존중해서 넘어가준다.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네놈 눈깔을 꿰어버리겠다.”
“죄, 죄송합니다.”
무인들은 넙죽 엎드렸다. 새삼 독혼수의 괴팍한 성정을 느낀 것이다.
이교가 모금묘사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하오문의 잠정적인 소문주로 대우받는 후기지수답게 이교는 침착하게 말했다.
“독혼수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모금묘사를 찾으신 겁니까?”
“내가 말해줘야 하냐?”
“말해주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하오문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냉정한 지적에 당등도 살짝 반성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이렇게 날뛰었으니 이유는 말해줘야겠지. 모금묘사는 내 체면을 훼손했다.”
“내가 무슨 당신의 체면을...!”
모금묘사는 정말로 억울했다. 당문의 무인을 건드릴 만큼 모금묘사가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해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놈에게 물어봐라.”
“난 그저 판관 하나에게 경고했을 뿐이오! 진충비도란 놈 말이오. 그 놈이 이번 일에 방해가 되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모금묘사는 멈칫했다.
삼층에 있는 하오문의 사람들 전원이 경악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