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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107화 (107/107)

107화

“왜 그러시오?”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하오문도들이 이런 눈빛을 보내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몇몇 이들은 경악을 넘어서 경멸의 눈빛까지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충비도 나으리한테 그런 협박을 하십니까?”

“무슨... 아니... 양상군자가 판관 놈 따위의 사정을 봐줘야 한다는 거냐?”

다른 곳이면 모를까 하오문에서 이런 말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모금묘사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몇몇 하오문도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진충비도 나으리는 다른 판관들과 다릅니다. 그 분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밖의 하오문도들 중에서도 그 숫자가 제법 될 겁니다.”

“뭔...”

모금묘사는 저런 말을 듣는 판관이 세상천지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변변한 뇌물 하나 바칠 힘 없는 하오문도들에게 좋은 말을 들을 판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걸 떠나서 한경의 하오문은 저번에 직접 신세를 졌습니다.”

이교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첨언했다. 그제야 슬슬 느낌이 왔는지 모금묘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놈... 아니, 그 자가 그러니까 하오문에게 은혜를 베푼 게 있다는 거요?”

“예.”

“난 몰랐소. 판관 놈이 그런 놈인 줄 어떻게 알았겠소?”

모금묘사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분명 있었다.

판관이란 건 강호의 무림인들에게 절대 그 인식이 좋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에게 인식이 좋은 고관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소사(小事) 하나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면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을 거절하면 반대쪽에게 이득을 주며 협박했으며, 가끔은 없는 사건도 만들어서 은자를 뜯어냈다.

포쾌가 욕을 많이 먹는다지만 사실 진짜 큰 도둑은 판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모금묘사는 판관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을 때 그 재주를 비싸게 팔아먹는 놈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판관이 재주가 있는데 그걸 공정하게 쓴다니.

백주대낮에 귀신 홀린 작자도 저것보단 그럴듯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그랬겠지.”

“!”

독혼수가 갑자기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어째서...”

“네놈은 하찮은 도둑이니까! 진짜 대도(大盜)였다면 훔칠 물건에 눈이 벌게지기 전에 판관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하고 그 인품에 넙죽 엎드렸을 거다. 아까 네놈이 스스로를 양상군자라고 했느냐?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진식(陳寔)이 서까래 아래 숨어 있는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불러주자 그 도둑놈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넙죽 엎드렸다. 네놈이 뭔데 스스로를 양상군자라고 하는 거냐? 넌 도둑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소인배다, 버러지 새끼야!”

“...!”

모금묘사의 얼굴이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독혼수의 지적이 어느 모욕보다도 더 날카롭게 모금묘사의 양심을 꿰뚫은 것이다.

모금묘사가 평범한 도둑이면 모를까, 스스로를 대도라고 자부하고 도역유도를 읊어대는 모금묘사에게 저 반론할 수 없는 지적은 머리를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마냥 아팠다.

“할... 할 말이 없소.”

“없겠지!”

“부디 진정하십시오, 당 대협. 그런데 모금묘사가 연 판관을 건드린 게 어찌하여 대협의 체면을 훼손한 게 되는 겁니까?”

“아. 내가 진충비도한테 모금묘사를 잡아다주겠다고 호언장담했거든.”

“......”

“......”

하오문 무인들은 묘한 눈빛으로 복도 바닥을 쳐다 보았다. 고개를 들고 당등을 쳐다보았다가는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모금묘사의 부하들도 당 대협께서 잡으신 겁니까?”

“그건 진충비도가 잡았지.”

“?”

이교는 그 총명함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하들도 연 판관이 잡고 정보도 연 판관이 캐냈으면 딱히 당등이 잡아다주는 게 아니지 않나...?

갑자기 아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외쳤다.

“연, 연 판관께서 오셨습니다!”

*   *   *

연우혁은 포쾌 중 하나가 ‘독혼수 대협께서 청월루 들어가셔서 무슨 짓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란 보고를 듣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연우혁에게 별로 좋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연우혁은 경공을 펼쳐 청월루 앞까지 날아들었다. 이렇게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건 처음이었다.

“당 대협! 당 대협!”

“왜 그렇게 소란이냐?”

당등은 뒷짐을 진 채 위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연우혁은 시종이 가져다 준 천으로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혹시...”

“혹시?”

“청월루에서 싸우신 겁니까?”

“아닌데? 무슨 소리냐?”

당등은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마냥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옆의 하인을 보며 물었다.

“내가 여기서 싸우거나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나?”

“아이고. 아닙니다. 당 대협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지요!”

‘개새끼.’

하인은 속으로 욕했다. 저 새끼는 당문만 아니었어도 진작 강호에서 비명횡사했을 작자였다.

들이닥쳐서 멋대로 중독시킨 것도 모자라 판관이 오니까 입단속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라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연우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의 판관이 얼마나 대단한 눈썰미를 갖고 있는지 잘 아는 당등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돌리려고 애썼다.

“여긴 왜 왔나?”

“대협께서 청월루에 뛰쳐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싶어서 달려왔습니다.”

“아. 그거!”

당등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금묘사를 붙잡느라 그런 거지.”

“모금묘사 말입니까?”

“그래. 아까 도망친 놈을 쫓다보니 청월루까지 가게 되더군. 놈이 아주 교활해! 사람 많은 기루로 들어가면 못 쫓아올 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독혼수 대협이시지요.”

“그렇지. 그렇지. 바로 들어가서 놈을 쫓아갔다. 다행히 청월루의 사람들은 의협의 기풍이 있어 내 외침을 듣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주더군. 내 앞은 비켜서고 놈의 앞은 막아서니, 이렇게 놈을 잡을 수 있었지. 안 그런가?”

“맞, 맞소이다.”

붙잡힌 모금묘사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뒤를 쳐다 본 독혼수가 시퍼렇게 타오르는 독망(毒蟒)의 눈동자로 모금묘사를 노려본 것이다.

말을 맞추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렇게 불편한 여건에서도 도둑을 기어코 붙잡으실 줄이야. 다시 한 번 대협에게 탄복했습니다. 강호의 어느 누가 대협처럼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커험.”

어지간히 뻔뻔한 당등이었지만 연우혁의 칭찬을 듣자 조금 민망한 모양이었다. 슬쩍 창밖을 쳐다보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

“아까 놈을 놓쳤을 때만 해도 저는 이 도둑을 절대 잡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땅이 무너지는 듯...”

“그래, 그래! 자. 이놈은 여기 있군! 난 가보겠다. 진충비도. 네가 판관이 된 축하는 충분히 한 거다!”

당등은 손을 흔들더니 후다닥 떠나버렸다. 하오문 사람들과 남은 연우혁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사과했다.

“당 대협께서 난리를 치신 것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중독되신 분들은 괜찮습니까?”

“...!”

모금묘사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모금묘사가 보기에 위화감을 느낄 만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이, 이 자는 대체 어떻게...?’

“다친 자는 없으니 괜찮습니다. 저번에 받은 은혜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사과를 해야 한다면 독혼수께서 직접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제가 부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등이 독을 흩뿌리면서 날뛴 걸 깨달았을 때 하오문과 관계가 어디까지 악화될지 몰라 걱정했었는데, 보아하니 별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최소한 화가 났어도 당등에게 화가 났지 연우혁에게까지 화살이 돌려지진 않을 것 같았다. 당문의 괴팍한 소문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오히려 저희가 사과드려야 할 일입니다. 모금묘사가 판관 어른의 공무를 방해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오문도가 몇 명인데 그 행동을 모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용봉지회가 열리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방문해주십시오. 빈약한 재주지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연우혁은 모금묘사를 끌고 나왔다. 꽁꽁 묶진 않았지만 어차피 당등이 점혈을 끝내놓은 상태라 끌고 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모금묘사는 묵묵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보시오. 진충비도.”

“듣고 있다.”

“할 말이 있소.”

연우혁은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경의 시세가 궁금한 거로군.”

죄를 지은 자는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 도형(徒刑)이나 유형(流刑) 등 다양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매로 맞고 장으로 맞고 노역을 하고 유배를 가는, 얼핏 보면 서로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이 형벌들도 사실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속형(贖刑)이 가능하단 것이었다.

죄에 맞는 은자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깔끔하게 풀려날 수 있는 이 인자한 국법은 몇몇 특정한 죄나 특별한 상황, 혹은 조정의 고관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당연히 한경도 마찬가지였다. 한경의 속형 시세는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연우혁이 봤을 때 모금묘사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값을 내고도 남았다.

하오문과 관계도 깊고 아직 남은 부하들도 있지 않은가. 재물을 충분히 갖고 올 터였다.

궁 판관도 아마 모금묘사가 속형하기를 정화수 떠놓고 빌고 있으리라.

“북쪽에서 악명을 날렸으니 그걸로 한경에서 더 과하게 처벌받진 않는다. 하지만 한경에 와서 판관에게 겁박을 한 죄가 있으니 그건 추가되겠지. 값이 만만치 않을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우혁은 ‘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이 도둑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멋대로 속형을 깎아줄 수는 없었다.

“...속형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오.”

“속형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처벌을 그냥 받겠다는 거냐? 왜? 부하들이 도망이라도 갔나?”

연우혁은 상관없었지만 모금묘사가 그냥 벌을 받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좀 많았다. 특히 궁 판관이 바로 그랬다.

“...아니, 속형은 할 수 있소. 아무리 비싸도 그 정도는 별 거 아니지.”

‘이 자식이.’

자기보다 몇 십 배는 부유한 것 같은 도둑놈의 말에 연우혁은 살짝 분노했다.

“네게 도둑질당한 자들이 찾아오면 속형이 늘어날 수도 있다.”

“내게 도둑질당한 자들은 대부분 내게 당한지도 모르고 있소.”

“......”

“여하튼 그걸 말하려고 한 게 아니오. 진충비도. 난 이번 일에서 독혼수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소.”

“그렇군.”

연우혁은 대충 대답했다.

도둑놈이 붙잡힌 다음 회개하고 반성했다는 말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붙잡은 놈들은 언제나 회개하고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러니 좀 풀어달라 깎아달라 지랄염병들을 해대곤 했다.

“나는 평생을 도둑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도(道)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번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눈이 멀어 실수를 저질렀군. 부끄럽기 그지없소.”

“그렇군.”

“원래 나는 하오문의 장로 자리를 노리고 있었소. 왜인지 아시오? 내 무공을 스스로 갈무리하고 더 높은 경지를 노리기 위해서였소. 나는 싸움에 관심은 없지만, 내가 익힌 무공의 경지를 올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소. 절정의 경지에만 올라도 내 적수는 천하에 없을 것이오.”

“그렇군.”

“하지만 그건... 탐욕이었소. 도둑에게도 도가 있고 누구에게 뭘 훔쳐야 하는지 아는 것이 성도(聖道)인데 난 그걸 잊고 있었던 거요.”

“그렇군.”

“그래서 생각이 들었소. 마땅히 속신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번 일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그렇군.”

“다른 판관이었다면 보물을 바치는 것으로 죄를 갚았겠지만 진충비도 당신에게는 모욕일 거라 생각했소. 그래서 당신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주려고 하오.”

“그렇군.”

“혈교의 무인들이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려고 하오!”

“그렇군. ...잠깐, 방금 뭐라고 했나?”

“...설마 안 들었소?”

모금묘사의 눈빛에 연우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다 들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다시 한 번 들으려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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