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2화 (2/116)

별사람 (1)

1. 별사람Starman – 데이비드 보위 (1972) (1)

사백여 년 전 그린란드를 개척한 붉은머리 에이릭은 목 좋은 곳에 농장을 세우고 브라타흘리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브라타흘리드와 마주하고 있는 피요르드에는 에이릭의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는 이 ‘에이릭의 피요르드’가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는데, 지금은 아주 꽁꽁 잘 얼어 있었다.

허나 덕분에 동녘정착지의 중심지인 가르다르에서 피요르드 건너편 브라타홀리드로 오가는 길은 훨씬 편해졌다. 잘 얼어붙은 피요르드를 그대로 걸어서 가로지르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지금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브라타흘리드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별사람은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 여기로 와서 우리를 만나고는 싶어하지만 / 우리를 너무 놀라게 할까 걱정하지요...”

육백 년 뒤에야 널리 불리게 될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발음은 지금의 잉글랜드 사람 중 누구 하나 알아듣지 못할 ‘현대’ 영어.

욘이 종적을 감춘 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가 시그리드에게 해주었던 놀라운 이야기들만큼이나 20세기 후반 ‘서방 세계’를 달구었던 ‘히트곡’ - 대체 뭘 때린다는 걸까? - 들도 선명하게 시그리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욘은 툭하면 이런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곤 했던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피요르드를 총총 걸어 건넌 끝에 브라타흘리드 기슭에 닿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동녘정착지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서쪽 정착지에 이어 ‘가운데 정착지’까지 막 개척자들이 발걸음 내딛던 시절, 브라타흘리드부터 저 남쪽 헤르욜프스네스까지 총 오백여 곳에 달하는 농장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 합쳐도 백 곳이 채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개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 몇 군데에 몰려 있었다.

브라타흘리드는 그런 곳 중 하나로, 지금의 동녘정착지에서 ‘마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시그리드가 이곳에 온 까닭은, 바로 이 브라타흘리드에서 가장 힘센 사내 – 은유적으로든, 실제로든 –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얼음이 끝나고, 꽁꽁 얼어붙었기는 매한가지인 땅을 밟은 시그리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세상의 종말, 라그나로크의 전조다 이 얘기예요. 큰겨울 핌불베트르Fimbulvetr*가 그 시작이고, 세상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는 역병이 두 번째 징조지요... ”

“그때가 되면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검은 죽음이 앗아간...”

“물론이지요. 이곳 그린란드는 세상 어디보다 먼저 영원한 겨울을 맞이할 땅이니까요.”

동녘정착지가 어려운 시절에 봉착한 이래로, 저런 말로 사람들을 꾀는 이들이 하나둘씩 응달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도 난봉꾼 콜그림*은 유별나게 뛰어난 말재주로 단연 돋보였는데, 제 별명을 헛되이 얻은 게 아님을 증명하듯 오늘도 여인 하나를 곁에 두고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콜그림 곁의 여인은, 유부녀인 스테이눈이었다. 스테이눈은 아이슬란드 사람 토르스테인의 배를 타고 남편 토르그림과 함께 가르다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새 콜그림의 저 라그나로크 타령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아저씨, 누가 보면 두 분 사이를 오해하겠어요.”

끝내 한 마디 하고 가기로 작정한 시그리드가 말을 붙였다.

“아이고, 시그리드 아씨 아니십니까요, 헤헤.”

미신이란 미신은 모두 믿고 또 그걸 열심히 퍼뜨리고 다니는 콜그림은, 시그리드를 보자마자 바짝 얼어붙었다.

멀고 가까움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어떻게든 혈연으로 엮인 그린란드에서, 시그리드의 혈통은 꽤 특이한 축에 들었다.

전설적인 붉은머리 에이릭의 막내아들 토르스테인은 빈란드Vinland에서 죽은 둘째 형 토르발드의 시신을 찾고자 항해를 준비하던 중 돌림병으로 죽었는데, 시체의 몸으로 입을 열고서는 아내 구드리드에게 축복을 남겼다. 곧 구드리드가 아이슬란드 사람과 재혼하고, 수많은 자손을 남기며, 그 자손들은 하나같이 총명하고 선량하며,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반면 빈란드의 도깨비Skraeling*들을 상대로 무용을 떨친 방패처녀shieldmaiden이자 에이릭의 고명딸이었던 프레이디스는, 빈란드의 부를 독점하려는 욕심에 자신과 함께 그 미지의 땅으로 향한 두 동업자와 그 아랫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훗날 그것이 들통나자, 에이릭의 장남이었던 행운아 레이프는 후손들이 대대로 불행을 안고 살 것이라며 저의 누이동생을 저주하였다.

그러므로 구드리드의 후손인 비요른과 프레이디스의 후손 솔베이그 사이에서 태어난 시그리드의 핏줄에는 사백여 년간 내려온 축복과 저주가 함께 흐르는 셈이었다

시그리드가 태어난 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는 참으로 밝혀졌다. 적어도, 당대 그린란드인들은 그렇게들 여겼다.

시그리드는 구드리드의 후손답게 명민했고, 그 밝은 두 눈은 항상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세상의 만물을 담곤 했다. 그러나 동시에 프레이디스의 후손답게 조실부모라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북녘의 브라타흘리드부터 남쪽 끄트머리의 헤르욜프스네스까지, 모두가 시그리드를 좋아했고, 동시에 그를 은연중 멀리했다. 그 밝은 눈빛과 모두에게 비추는 따뜻함은, 이 무렵의 그린란드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그리드의 양부 겸 스승 노릇을 하던 이방인 욘까지도 불현듯 사라져버렸으니, 이 또한 시그리드 근처에 감도는 불행의 소산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콜그림은 믿고 있었다.

아니면 욘이 말하던 ‘파블로프의 개’ 같은 경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고 콜그림이 시그리드에게 집적거린다고 오해한 욘이 콜그림을 거하게 혼쭐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흠흠. 여기 이 아리따우신 분과 저는 그냥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요. 오해는 마시고... 아, 내 정신 봐. 스베인 님을 뵈러 오셨겠지요? 그분의 농장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찾아가보시지요.”

얼른 시그리드를 쫓아내려 안달이 난 사람처럼 콜그림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시그리드는 버릇대로 싱긋 웃어보이곤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야 콜그림이 난봉꾼이다, 어쩌면 몰래 사악한 주술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떠들었지만, 시그리드는 그린란드의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듯 콜그림도 좋아했다.

(욘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했다지만) ‘옛 신들’이라 불리는 오딘과 토르, 프레이야와 거인족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내는 재주에 있어서는 콜그림만한 사람이 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콜그림이 남의 집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큰일이라도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

곡식은 물론이요 소먹이 목초를 기를 땅도 없어, 그저 브라타홀리드 농장에 더부살이하는 이들의 작은 마을을 지나 시그리드는 농장으로 걸어올라갔다.

빙산만한 덩치를 자랑하는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시그리드를 마중하러 나왔다. 나이는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곳의 거친 삶을 견뎌내는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벌써 상처와 주름투성이였다.

“시그리드, 내 혈육.”

“그간 잘 지내셨나요?”

이 좁은 동녘정착지에 서로 피 이어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되겠느냐만, 어쨌든 시그리드와 스베인 모두 붉은머리 에이릭의 후손이었으니 혈육이라는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내가 물어야 할 말이다. 욘과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시그리드 너 아니더냐.”

행운아 레이프의 후손인 스베인은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브라타흘리드의 사실상 우두머리로 지내고 있었다. 지금은 가외로 또 다른 무리를 하나 이끌고 있었지만.

“그야, 많이 그립긴 하지만...”

욘, 아니, 미합중국 공군 중령 존 윌슨의 정체를 알던 시그리드는 말을 흐렸다. 허나 스베인은 그런 미묘한 말투의 변화를 눈치 챌 만큼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부른 것도 바로 이방인 욘의 실종 때문이다. 나는 주교 흉내 내는 에인드리디 그 노인네나 헛똑똑이 파울 신부와는 달리 말재주가 없다. 그러니까 돌려 말하지 않겠다. 욘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게냐?”

‘아마도 1983년으로요’라는 대답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답변을 잘 골라야 한다. 사람 하나가 죽고 사는 문제, 아니, 그 이상이 되었으니.”

“네?”

느닷없이 일이 커지는 느낌에 시그리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르다르를 오가는 내 아랫사람이 귀띔해주더군. 곧 팅이 열릴 것이다. 거기서 저들은 욘이 난봉꾼 콜그림에게 살해당했다고 몰아갈 작정이야.”

스베인이 말하는 ‘저들’이 누구인지는 시그리드도 모르지 않았다.

옛 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자들이 생기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동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주교 대행 에인드리디, 그리고 남쪽의 그나마 비옥한 농장들을 점유하고 있는 두 수도원의 노인들 등등.

“콜그림 아저씨를요?”

“욘이 콜그림을 흠씬 두들겨팬 걸 못 본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만한 망신이면 사람 하나 죽일 원한이라고 우기기에는 충분하지.”

재작년 여름, 콜그림이 시그리드에게 집적대었다고 오해한 욘이 발끈하여 달려들었던 일을 거론하는 스베인이었다.

“어차피 저들에게 중요한 건 우리 쪽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지, 진실이 아니야. 차마 나는 건드릴 수 없으니, 우리 ‘이교도’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또 가장 떠벌거리고 다니는 콜그림 그놈을 쳐내겠다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 하나를 마구잡이로...”

“시그리드, 네가 모르는 어른들의 일이 제법 많다. 이제는 너도 다 컸으니 슬슬 알아가야 하겠지.

잘 들어라. 오래된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우리와 교회의 저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는 건 비단 목욕하는 날(토요일)의 이튿날에 무얼 하느냐 때문만이 아니야.

서녘정착지에서 우리가 물러난 지 벌써 거의 육십 년이 지났다. 그 후손들은 아직도 여기저기 더부살이로 명을 겨우 잇고 있을 뿐이야. 저 남쪽, 가장 비옥한 땅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언제고 욘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우리 조상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고집한다면,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더군. 그 말이 옳다.

우리가 살아온 방식, 너와 나의 조상 에이릭의 대부터 내려온 그 방식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 이미 우리는 굶주리지 않기 위해 사백 년 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물개 고기를 먹고 있지 않으냐?

당장 양이든 소든, 이 땅의 모든 가축을 도축하고, 남은 땅은 교회의 것이든 수도원의 것이든 모두 빼앗아 우리 모두의 것으로 삼아 공동으로 경작해야 해. 목초 대신 곡식의 종자를 어떻게든 구해서 심어야 하겠지. 그리고 남은 이들은 집안이 어쩌고, 출신이 저쩌고를 떠나서 모두 고기잡이든 바다코끼리 사냥이든 나서야 하고.”

언변이 달리는 스베인치고 꽤 길게 이어지는 말. 그가 얼마나 이 이야기에 진심인지, 또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해 고민해 왔는지 시그리드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것보다 이방인 욘의 입은 꽤 쌌다는 것도.)

“에인드리디 할아버지나 파울 신부님 같은 분들이 가만 있진 않을 텐데요.”

“가만 있지 않다뿐이랴? 교회가 어쩌고, 신앙이 저쩌고 하며 사사건건 우리를 막아설 게다.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이교도 노릇을 하련다! 나를 따르는 자들도 태반이 다 그런 생각일 테고!

처음 이 브라타흘리드가 세워질 때, 누가 처음으로 땅을 축복했더냐? 프레이야 여신을 섬기는 무당 토르비요르크였다. 빈란드에 닿은 수완가 토르핀의 일행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 누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더냐? 피 흘리며 토르께 기도한 사냥꾼 토르할이었다.

반면 교회의 신은 우리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지도, 이 빌어먹을 추위 – 핌불베트르든 뭣이든 – 를 몰아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신을 바꿔야겠지!

나는 우리 조상이 세운 이 그린란드 정착지가 세상 끝날 때까지 번성하기를 바란다. 그것뿐이야.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토르가 아니라 마훈드(무함마드)인가 하는 세상 남쪽 끝 야만인들의 신이라도 기꺼이 믿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막아선다면, 대천사 가브리엘이든 늑대 펜리르든 나는 도끼를 들고 싸울 것이다.

그러니 말해다오. 욘은 어떻게 된 것이냐? 이 자리에서 네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고 답해보거라.”

약간의 망설임 끝에 시그리드는 마음을 정했다. 스베인은 다른 사람이 맹세까지 하면서 내놓는 말을 함부로 의심할 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콜그림의 목숨도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그나마 비옥한 땅이 남아 있는 가르다르와 그 남쪽 사람들은 대체로 독실한 신자들이었고, 소싯적에 외지에서 공부까지 했던 파울 신부는 그린란드에서 가장 언변이 유창한 사람이었다. 파울 신부가 팅에서 콜그림이 욘을 죽였다고 고발하고 나선다면, 판결이 어찌 나올지는 뻔했다.

콜그림은 비록 사람됨이 경박하고 툭하면 여인에게 추근덕대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시그리드에게 오래된 신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준 사람, 혹한으로 잃은 첫 가족들만은 항상 마음 한 구석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시그리드는 머릿속이 그렇게까지 정교하지는 못한 스베인을 위해 적당히 단순화한 욘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 그러니까, 욘은 못된 주술사의 저주를 받아서 지금 이때로 날아왔다, 그 말이로군. 강력한 주술사가 직접 저주를 걸 만한 사람이라면 귀족일 테고... 그래, 왜 처음에 우리와 말이 안 통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도 능숙하게 사람들을 다루었는지, 많은 게 설명되는구나. 고맙다.”

시그리드의 단순한 설명을 다시 제멋대로 이해한 스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얼개는 얼추 들어맞았으므로 시그리드도 더 부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양심의 거리낌 없이 팅에서 증언할 수 있겠구나. 보나마나 파울 신부나 늙다리 에인드리디는 너를 회유하려 하겠지. 이왕이면 저들이 너로 하여금 위증토록 하게 만들려 했다는 것까지 팅에서 함께 증언하면 더 좋겠고.”

“네?”

만약 시그리드가 그 말대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팅에서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사내들뿐. 그러나 여인들의 참관을 막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도 종종 욘을 따라 가르다르나 흐발세이에서 열리는 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팅은 욘이 ‘민주주의’라고 부르던 것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팅은 분명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으는 자리이고, 칼과 도끼 대신 관례와 법을 논하는 자리였지만, 이성보다는 감성이, 정의보다는 세력이 앞서는 변장한 폭력의 장이기도 했다.

스베인은 바보가 아니었고, 콜그림을 비롯해 스베인을 따르는 옛 신의 새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사람들이 콜그림을 무고했다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그들은 지켜보는 군중의 분노를 자아내고, 그것을 교회와 농장주들을 향해 돌릴 것이다.

그리고 피가, 그린란드에 얼마 남지 않은 에이릭과 개척자들의 피가 그날 밤을 흥건히 적시게 될 것이다.

“네 표정을 보니, 내가 말하던 어른의 사정을 너도 얼추 짐작할 수 있게 된 것 같구나. 이 자리에서 확답하라고 윽박지르지는 않으마.

단, 팅이 열리기 사흘 전까지는 거취를 정해야 할 게다. 네가 그날 어떻게 증언하든, 사람의 피가 흐르지 않고서는 다음날 해가 뜨지 않을 테니.”

스베인의 시선이, 사냥철에 바다코끼리 두개골을 쪼개는 큼직한 도끼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시그리드는 놓치지 않았다.

처음 자신이 스베인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까닭, 스베인 앞에서 저의 웅대한 계획을 털어놓겠다던 다짐이 다짐으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브라타홀리드를 떠난 지 한참 지나서야 겨우 떠올랐다.

여름철 북쪽 사냥터에서는 하루종일 해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시그리드의 공책 한구석에는, 욘이 설명해준 그 백야라는 현상의 원리가 시그리드 본인만 알아보는 약어와 도식의 조합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린란드 남쪽 끝짜락에 있는 이곳 동녘정착지는 사정이 다르기도 했고, 하지가 지난 지도 꽤 되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가 가르다르 대성당 근처에 있는 저의 집 – 욘의 집 – 에 돌아올 무렵에는 이미 사방이 슬슬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혹시나 욘이 돌아와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갑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이 짐은 없던 것이 될 텐데.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문을 연 시그리드는, 정말로 좁고 누추하지만 포근한 저(와 욘)의 보금자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반가움에 사로잡혔다.

“시그리드, 브라타흘리드를 다녀왔다고 들었다. 보나마나 스베인 그자의 부름을 받은 것이겠지.”

그러나 인영의 정체는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 흐발세이 교회의 본당신부였다.

“갑자기 이렇게, 네 집에 쳐들어와서 너를 심문하는 꼴을 만들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파울 신부의 한 발 늦은 사과였다.

“사정이라면, 욘 아저씨가 실종된 것 말씀이신가요?”

“잘 알고 있구나. 하기야, 이미 스베인에게 얼추 들었겠지.

네 양심대로 답해주려무나. 욘이 사라진 것, 콜그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 그렇지 않으냐?”

시그리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파울 신부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고개 들어 지붕(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더니, 성호를 긋고 시그리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 네게도 용서를 구하마. 부디 팅에서 콜그림의 죄를 거짓으로 증언해다오.”

아무래도 이방인 욘의 실종이 일으킨 파장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모양이었다.

--- *** ---

* 북유럽의 기독교 수용은 지리적 한계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늦었습니다. 더구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는 기독교 문명의 변방이었기에, 흔히 북구 신화로 잘 알려진 이교적pagan 전통이 꽤 오래 살아남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례로 가르다르의 주교좌성당 안뜰에서는, 딱 보아도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의식의 흔적 – 나란히 정렬된 바다코끼리 두개골 스무 개 – 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운문 에다에 묘사되는 큰겨울 핌불베트르는 봄여름 없이 삼 년간 이어지는 겨울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정확히 어떤 형태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린란드 바이킹들이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서쪽 정착지를 포기하던 무렵 노르웨이 국왕 망누스 4세가 ‘그곳의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성직자를 추가로 파견하는 것을 검토(만 하고 말았습니다만)했던 것을 보면 14세기 중엽 시점까지는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작중 언급되는 붉은머리 에이릭과 슬하 사남매 이야기는 ‘붉은머리 에이릭의 사가’와 ‘그린란드인들의 사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다만 시그리드 비요른스도티르의 가계에 대한 설정은 작중 창작입니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사이의 계층 및 상하관계가 분명했던 당대 사회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던 토르스테인과 결혼한 시그리드 역시 그 출신이 한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 빈란드는 뉴펀들랜드 섬 혹은 지금의 뉴잉글랜드 해안 북부 일대를 지칭하던 바이킹식 지명입니다. 한편 ‘말린 털가죽skra을 입는 자들’ 또는 ‘소리지르는skraekja 자들’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는 고대 북구어 단어 스크렐링Skraeling은, 북미 원주민, 이누이트인들의 조상인 툴레인, 그리고 툴레인들에게 밀려나 소멸하기 전까지 그린란드 전역에 분포하던 도싯인들까지, 당시 북극권 주변에 거주하는 모든 非유럽인들을 통칭해 부르는 표현이었습니다. 작중에서는 ‘도깨비’로 의역했습니다.

* 콜그림·파울 할바르드손·에인드리디 안드레손은 실존인물, 스베인 라그나르손은 가상인물입니다. 이중 콜그림은 1407년, 토르스테인을 따라온 아이슬란드 상인 토르그림의 부인 스테이눈을 ‘흑마법’으로 유혹한 혐의를 받아, 팅에서의 재판 끝에 유죄 판결을 받고 화형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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