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3화 (3/116)

별사람 (2)

1. 별사람Starman (2)

이방인 욘이 지닌 지식의 깊이를 지레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사람은, 시그리드 하나를 제외하면 대개는 같은 지식인뿐이었다.

따라서 평범한 그린란드 사람들이 보기에, 동녘정착지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은 바로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이었다. 파울은 잠깐이지만 노르웨이의 베르겐 – 그린란드인 절대 다수의 생각에는, 로마와 예루살렘이라는 곳 다음으로 큰 도시 – 에서 수학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그 자체로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단다. 시그리드 네 표정을 보니, 너도 브라타흘리드에서 네 몫의 짐을 짊어지고 돌아온 듯하구나.”

“저야 그렇다 치고, 신부님의 짐은 무엇인가요? 위증을 말씀하실 정도면 가볍지는 않을 텐데요.”

“이방인 욘은 말했단다. 이대로라면 그린란드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그리고 나도 그 말에 십분 동의하고 있지. 욘은 세상의 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수치로 정리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볼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욘의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나는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이 저 망측한 이교를 들고 나온 것도 아주 조금은, 그러니까 사제에게 허용되는 만큼의 한도 내에서는 이해할 수 있단다.

물론 여기가 아니라 동녘 땅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아니, 그런 얘기를 했다는 의심만 받더라도 화형당해 마땅하겠지만, 절박한 마음에서는 절박한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파울은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 이면에 스베인의 그것과 같은 굳은 결심과 고집, 그리고 각오가 깃들어 있음을 시그리드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교회와 수도원의 남은 토지를 모두 빼앗아 나누어주고, 경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고기잡이로 내몬다고 한들 뭐가 바뀌겠니?

아직 그나마 여름에 풀이 자라는 땅에서 우리가 밀을 기르지 않는 것은, 이제 밀이 여물기도 전에 겨울이 오게 되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고기잡이라니? 목재가 부족해서 당장 이곳 가르다르와 헤르욜프스네스에 남은 고기잡이배조차 근근이 보수하는 판국에, 사람을 더 밀어넣는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을까?”

피요르드 건너편 브라타흘리드에 있는 스베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한 파울이었다.

“스베인 아저씨의 생각이 조금 과격하고 아귀가 안 맞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게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이유가 되나요?”

“슬프게도 그렇단다. 나로서는 하느님께, 또 네게 용서를 거듭 구하면서도 콜그림이 욘을 죽였노라 위증할 것을 청할 수밖에 없구나.”

화로의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파울 신부의 얼굴에 가득한 착잡함이 드러났다.

“시그리드야. 우리가 살길은 단 하나뿐이다. 욘을 도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이 점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 해가 바뀔수록 겨울은 길어지고, 바닷길이 열리는 달은 짧아지고 있지.

한여름에도 유빙 때문에 피요르드를 드나들 수 없게 되는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동쪽에서 도움을 구해서 이곳 그린란드를 벗어나야 해. 그게 우리 사람들을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그것과 콜그림 아저씨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우리는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처지야. 짧아지기만 하는 여름에 유빙을 피해 다니며 겨우 얻는 바다코끼리 상아는 이제 아무런 값어치도 없어. 저 먼 남쪽 어딘가에서, 훨씬 커다란 짐승에게서 얻는 질 좋고 큼직한 상아가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단다.

그런 판에 이 땅의 작은 이교도 소식이 조금이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면 어떻게 되겠니? 겨우 어떻게 지원을 얻어낸다 한들 곧장 무산되고야 말겠지!

‘아무리 저들의 사정이 딱하다지만, 영혼이 메마른 이들의 육신을 배불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새 주교를 속히 파견토록 교회에 청하십시다. 배를 보내는 것보다 그게 우선입니다...’ 마르그레테 여왕의 궁정에서는 그런 공허한 말이나 오갈 거야.

그런 핑계를 대면서 우리 그린란드에 절실히 필요한 지원을 모두 전비로 돌려버리겠지! 그들 딴에는 세상 끄트머리의 아무런 가치도, 도울 명분도 없는 땅을 지원하는 데 재물을 허비하느니 전쟁에 쓰는 것이 더 알찰 테니. 홀슈타인이든 리보니아든, 하나가 된 세 나라*가 전쟁 벌일 땅은 많을 테니까!”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이교 혐의를 콜그림 아저씨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시군요... 그래야 한 사람의 일탈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어디 그뿐이겠니... 우리 정착지에 남은 이천 명 조금 안 되는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대피시키려면, 그리고 아이슬란드든 노르웨이든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될 곳에 터전을 다지라면, 결국 우리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만 해. 그 권위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모든 게 무너질 수밖에 없단다.

시그리드야. 내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욕심을 위해 네게 죄악을 행할 것을 권하는 게 아니야.”

“... 우리 모두를 위한 마음뿐이겠지요. 신부님도,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도, 모두 마찬가지로요.”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

그 사실을 이방인 욘은 그린란드의 뜻있는 이들에게 훤히 드러내보이고야 말았다.

이교도 스베인도, 파울 신부도 모두 그린란드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를 위해 죄악을 범할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까지도.

한쪽은 도끼를, 다른 한쪽은 언변을 무기로 삼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스베인과 마찬가지로, 파울 신부도 팅이 열리기 전까지 마음을 정해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아직도 욘이 머물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지저분하고 누추하지만 아늑한 집. 그러나 그 집이 어째 오늘따라 숨통을 조여오는 듯해, 시그리드는 다시금 겉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섰다.

해는 기운 지 오래였지만, 아직 가르다르의 일상은 끝나지 않았다.

피요르드 곳곳으로 밀려들어오는 크고 작은 나무조각을 종일토록 모은 사내와 아낙들이 고된 일과를 마치고 가르다르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열흘 뒤에 열릴 팅에서 법을 말하는 사람logsogumadur* 노릇을 할 스노리 노인이 새로 길들인 백송고리*를 팔뚝에 얹은 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토르스테인이 아이슬란드로 돌아갈 때, 그에게 저 백송고리를 팔아 손녀딸 잉그리드의 지참금을 마련할 생각이라던가.

욘이 털어놓은 이야기에 따르면 수십 년 안으로 사라질 풍경.

그러나 동녘정착지에서의 삶은 어떻게든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그들 그린란드 사람다운 모습. 시그리드가 자신의 피붙이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역경과 고난은, 그것이 사람의 시련이든 하늘과 땅의 시련이든, 그저 넘고 또 넘어야 할 무언가일 뿐. 좌절은 없다.

노르웨이 왕의 통치 아래서 살기를 원치 않아, 험난한 바다를 뚫고 아이슬란드에 닿았던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 아이슬란드도 마음에 들지 않아, 더 험난한 바다를 뚫고 그린란드에 닿았던 붉은머리 에이릭이 그러했듯.

시그리드의 푸른 두 눈은 어느새 멀리 서쪽 하늘 높이 일렁이기 시작한 북녘의 빛(오로라), 그 색색의 너울로 향했다.

파울 신부와 이방인 욘은 저것을 오로라 보레알리스, 자연현상의 일종이라고 불렀다. (파울과 달리 욘은 오로라가 생기는 원리까지 설명해주곤 했다.)

반면 콜그림은 언제고 저 빛이 바로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잇는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Bifrost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둘 다일 수는 없는 것일까? 구천삼백만 마일 떨어진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바람이 지구자기장에 붙잡혀 생기는 빛이라는 설명도, 오래된 신들의 고향과 곧 멸망하고 더 좋고 밝은 세상으로 바뀔 현세를 잇는 무지개다리라는 설명도, 모두 멋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과학의 눈으로 보든, 신화의 눈으로 보든, 저 오로라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숨통은 찬찬히, 그러나 확실히 조여 들어오고 있었다. 동녘정착지는 스베인과 파울 두 사람이 그리는 서로 다른 앞날을 모두 품기에는 너무나 좁고 궁벽했다.

어쩌면 열흘이 다 가기 전에 스베인과 파울은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콜그림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고 스베인이 이교 운운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파울은 에인드리디와 수도원의 노인들을 설득해 두 수도원 중 한 곳 정도의 농지를 나누어줄 지도 모른다. 그린란드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이슬란드인 토르스테인의 배에 모을 수 있는 모든 상아와 백송고리를 끌어모아 노르웨이로 보낼 것이다. 부디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과 함께.

‘그리고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겠지. 만약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면, 15세기 초를 끝으로 동녘정착지에 대한 기록이 끊기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두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고한 콜그림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한들 갈등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갈등의 원인은 두 수도원에 딸린 그나마 비옥한 농지도, 콜그림이 떠들어대는 옛 신들의 이야기도 아니요, 북녘의 사냥터를 걸어잠그고 서녘정착지를 무너뜨린, 그리고 이제는 동녘정착지 문턱까지 들이닥친 혹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혹한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도 않았다. 욘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사백 년은 족히 이어질 것이라던가. 소빙기Little Ice Age라 칭하기에는 결코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칼바람이 피요르드를 타고 불어와 시그리드의 코를 아리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는, 생전 처음 품어보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올라 시그리드 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어쩌면 그래서 욘은 자신에게 토르스테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넌지시 물어보았던 게 아닐까.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날 기회였으니까.

욘이 나타나지 않은 그런 세상이었다면, 자신은 그 기회를 잡았을 지도 모른다. 토르스테인은 비록 홀아비였지만 아직 나이가 서른을 겨우 넘겼을 뿐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소문으로 들려오는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

마음속에 떠오른 의심과 불안이 마치 길동무라도 되는 것처럼, 공연히 혼잣말을 입 밖에 내는 시그리드였다.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저 아래 가르다르와 그 너머 흐발세이, 브라타흘리드, 헤르욜프스네스까지 도처에 있었다.

그리고 어떤 비정한 술수를 써서라도 이곳 정착지를 위해 싸워나가고자 하는 스베인과 파울처럼, 시그리드 역시 이 땅의 사람. 존 윌슨 중령이 바이킹이라 부르던 사람 중 하나였다.

부단히 고민하던 머리는 마침내 무언가 그럴듯한 생각을 내어놓았다.

‘이 생각을 왜 진작에 못 했담.’

스베인과 파울을 화해시키고, 겸사겸사 콜그림의 목숨도 구하고 – 그 못된 버릇도 조금은 고쳐주고 – 어쩌면 그린란드까지도 구할 수 있는 길.

이제는 온전히 저 혼자의 것이 된 누추한 집으로 돌아가는 시그리드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서려 있었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침내 팅이 열리는 당일 아침, 콜그림은 주교대리 에인드리디의 이름으로 체포되어 흐발세이로 압송되었다.

대낮임에도 마치 동녘 유럽의 늦은 오후와 같이 어둑어둑한 흐발세이 교회 앞마당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그리드 그 아이로부터 따로 언질이 있었습니까?”

“걱정 마라. 내 뜻대로 해주겠노라는 확답을 받았다. 너희는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손 하나 꿈쩍하지 말아라. 때가 되면 내 외칠 테니.”

여차하면 싸울 준비를 하라는 지시에 따라, 스베인을 따르는 사내들 여럿은 품에 몰래 도끼를 숨긴 채 흐발세이로 모여들었다.

“과연 여럿이서 모여들었군. 저런 흉흉한 기색으로 나타나면 누가 모를 줄 알고?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

“우리 또한 오늘로써 죄를 범하는 것 아닙니까. 욘이 쓰던 말을 빌리면야 필요악이겠지만...”

“시그리드 그 아이가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니 다행이지. 자, 가서 필요한 일을 행하게나.”

파울도 귀가 있고 머리가 있었으므로, 에인드리디 주교대리에게 청해 두 수도원에서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가르다르와 흐발세이 일대에서 장정들을 모았다.

에인드리디를 필두로 정착지의 마지막 성직자들, 그리고 팅을 주재할 스노리 노인이 자리를 잡았다. 그 주변으로 스베인 이하 농장주들이 하나씩 서고, 그 틈을 다른 자유민들이 채웠다. 사내들의 원 바깥에는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팅과는 인연이 원래 없는 구경꾼들이 더 큰 원 하나를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원 한가운데에는 울고불고하며 살려달라 애걸하는 콜그림이 있었다.

두 겹 원 사이 애매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시그리드의 품이 어째 불룩하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팅을 시작하겠소.”

주변을 잠시 둘러본 스노리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히 선언했다.

붉은머리 에이릭이나 행운아 레이프의 시대에는 팅의 시작을 알리는 다른 의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몰락을 앞둔 지금의 동녘정착지에는 그럴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만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문 일이었기에 따로 의례를 갖출 필요가 없게 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좌중은 물론이요 콜그림마저도 긴장 가득한 침묵 속에서 스노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우리는 이방인 욘이라고도 알려진 빌햘름의 아들 욘의 실종에 대해,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이 이바르의 아들 콜그림을 고발한 건을 다루고자 모였소.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 앞으로 나아와 팅 앞에서 밝히시오. 그대는 어찌하여 콜그림이 욘을 살해하고 시체를 숨겼다고 고발하였소?”

파울이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콜그림이 어찌하여 이방인 욘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는지, 그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비열한 습격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그 사악한 의도를 실행으로 옮겼는지, 참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미 흐발세이 교회의 강론을 들으며 파울 신부의 언변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은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허어’, ‘저런!’ 같은 감탄사로써 추임새를 넣었다.

반면 ‘저 거짓말쟁이!’ ‘그러고도 당신이 교회의 사람인가!’ 같은 소리도 간혹 나왔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스베인의 눈초리를 받고 잦아들곤 했다.

몇 번이고 콜그림이 파울의 고발을 끊고 저의 무고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었지만, 스노리 노인의 준엄한 호통에 끊기고야 말았다. 그 외에도 남편 몰래 눈물 훔치며 재판을 바라보던 아이슬란드 여인 스테이눈이 끝내 기절하는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팅의 진행에 큰 지장은 주지 않았다.

“하여, 저는 여기서 고발을 마치고자 합니다. 저의 고발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그리고 죄인에게 어떠한 처벌이 가해져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팅에 맡깁니다.”

“그대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소,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이여?”

“그렇습니다. 스무날 전, 이방인 욘이 추악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이,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가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의 증언을 듣도록 하겠소. 이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파울과 스베인 모두 시그리드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함부로 저의 목소리를 낼 사람은 적어도 자유민들이 모인 안쪽 원 안에는 없었다.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는 앞으로 나오시오.”

열흘 동안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이 장면을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혼잣말로 조용히 연습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것이라.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스노리 노인과 파울, 스베인, 콜그림, 그 외 동녘정착지에서 중요하다 할 만한 모두가 바라보는 원 안쪽으로 걸어나왔다.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그대는 우리 앞에 증인으로서 섰소. 이제 우리는 그대의 이야기를 듣겠소.”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시오.”

용기가, 또는 아드레날린이 젊은 피에 녹아 시그리드의 온몸을 데웠다.

팅에 모여든 좌중은, 문득 자신들이 시그리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그리드가 그들 모두를 훑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진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콜그림은 무고합니다. 이방인 욘은 그저 조용히 사라졌을 뿐입니다.

둘째,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은 콜그림이 짓지 않은 죄를 억지로 덮어씌우려 했고, 이를 위해 제게 위증을 권유했습니다.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은 파울의 계획을 거꾸로 이용해 자신에게 반하는 모두의 입을 틀어막고 자신의 뜻대로 이 정착지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제가 열흘 전 제 귀로 들은 바입니다.”

웅성임이 일어나고, 곧 그 속에 노여움과 분노가, 두려움과 황망함이 깃들었다.

누군가 벌떡 일어나 거짓말이라 외치고, 누군가는 또 벌떡 일어나 진실을 더 말하라 외치고, 누군가는 벌떡 일어난 뒤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좌우만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파울과 스베인은 실망과 분노, 자책으로 범벅된 미묘한 눈빛으로 시그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용! 조용히들 하시오!”

스노리 노인이 외쳤다.

그러나 스노리의 외침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나지막하면서도 어째 모두의 귓속을 파고드는 시그리드의 목소리였다.

“세 번째 진실이 남아 있습니다. 마저 듣기를 원하신다면 정숙해 주세요.”

처음 팅이 시작할 무렵의 정숙함과는 사뭇 다른 무게의 침묵이 주변에 내렸다.

“셋째, 저는 콜그림뿐 아니라 파울과 스베인도 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그대는 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소. 팅에서 발언할 권리는 없소이다.”

스노리 노인이 법을 말하는 이다운 정중함으로써 끼어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제 얘기를 마저 듣고 싶어하는 걸요.”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스노리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시그리드가 노렸던 기회가, 그린란드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낼 기회가 열렸다.

“오늘의 다툼, 무고와 겁박, 폭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의 옆에 서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지요. 바로 해마다 점점 가혹해지는 이 겨울,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에요.

스베인은 우리가 이 그린란드를 계속 터전으로 삼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파울은 결코 우리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곳에서 견뎌낼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 선조의 고향 동녘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 앞에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난관을 이겨낼 방도를 찾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 떳떳지 못한 수를 부리는 것까지 감수한 것이고요. 이는 두 사람이 모두 제게 밝힌 바임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손가락질과 노호성이 거듭 일어났다.

“콜그림을 무고한 죄는? 그 죄는 어떻게 할 거요?”

“그리 따지면 콜그림 저 작자가 이교 앞잡이 노릇한 건 어떻고? 그거야말로 살인보다도 더 못된, 불타 죽어도 마땅한 죄 아닌가! 지금껏 스베인의 무리 눈치를 보느라 참았을 뿐이지!”

“뭐라고? 네놈 말 다 했느냐!”

“그만! 모두 조용! 조용히!”

당황하는 기색 없이, 시그리드는 품에서 준비해온 물건을 꺼냈다.

검은 코덱스Codex. 에인드리디 주교대리에게 얻어내고, 시그리드 자신의 손으로 내용을 지운 뒤 욘의 미래 지식으로 가득 채운 책.

그 책의 첫 번째 면에는, 바로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느닷없이 책 한 권이 그들 앞에서 펼쳐지고, 난생 처음 보는 지도가 눈앞에 드러났기에, 모두가 다시금 침묵했다. 들려오는 것은 ‘뭔데? 나도 좀 보자’ 하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와보려는 웅얼거리는 소리뿐.

“이방인 욘이 남기고 간 지도입니다.

우리는 여기, 세상의 북쪽 끝에 있어요.

스베인은 우리가 어떻게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 말은 옳지만, 고작 이천 명에 불과한 우리가 이곳 동녘정착지에서 무엇을 하든 충분치는 않을 거에요.

파울은 우리가 어떻게든 동쪽 땅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동쪽의 그 어떤 왕도 세상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에게 거저 도움을 주려 하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이곳 그린란드는 북쪽 끝이기만 한 게 아니에요. 동쪽, 우리 조상의 고향 유럽, 그리고 서쪽, 복된 빈란드Vinland the Good. 이 두 곳을 잇는 중간 지점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제안합니다.”

스노리 노인도, 파울 신부도, 브라타흘리드의 주인 스베인도,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여인, 그것도 갓 성년이 된 시그리드는 팅에서 발의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앞으로 동녘정착지의 모두는 이 일, 동쪽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서쪽으로 가는 길을 내는 이 일에 동참하는 거에요. 우리가 우리로 남으면서도 이곳 그린란드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이것이라고,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물론 그 말 한 마디에 모두가 동의하며 축배를 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 열흘 동안 시그리드는 쏟아지는 질문과 의심에 대응하느라 잠도 잘 못 잘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교회의 신을 믿느니 차라리 옛 신들을 따르며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보자는 것보다, 그리고 하나가 된 세 나라의 궁정을 배회하며 도움을 구걸하는 것보다, 미지의 땅으로 남은 빈란드 항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자는 제안이 훨씬 그럴듯하게 들렸다는 것.

결국 그린란드 사람들은 붉은머리 에이릭과 첫 개척자들의 후예였던 것이다.

곧 다시 팅이 열리고, 각각 콜그림을 무고한 혐의와 참된 신앙을 버리고 이교를 조장한 혐의로 파울과 스베인의 죗값이 논의될 때까지도, 고발당한 본인들과 재판하는 모든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 ‘욘의 지도’ 속 형상이 아른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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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유럽이 대개 그러했듯, 기독교를 받아들인 바이킹 사회에서도 성직자들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정치 등에 깊숙이 관여하곤 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그 속세에 관여하는 방식이 유럽 본토보다 훨씬 더 바이킹스러웠다는 점이겠지요. 직접 빈란드 탐사대를 이끌고 떠났다가 실종된 에이릭 그누프손 주교(12세기 초)나, 발굴된 시신에 생전에 한쪽 발을 절단당한 흔적이 역력히 남은 올라프 주교(13세기 중반), 루터파로 개종하라는 국왕의 명령에 불응하여, 직접 일백 명 전사를 거느리고 반종교개혁(물리)에 나섰던 아이슬란드의 욘 아라손 주교 등이 그 사례가 되겠습니다.

* ‘하나가 된 세 나라’란 14세기 말 형성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삼국의 동군연합인 칼마르 동맹을 말합니다. 칼마르 동맹이 형성될 수 있던 배경에는 덴마크 공주 출신인 마르그레테 1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이 있었지요. 작중 시점에서 칼마르 동맹의 공식 군주는 마르그레테의 양자 포메른의 에릭이지만, 여전히 마르그레테가 섭정으로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그레테든 에릭이든 그린란드의 운명에는 큰 관심이 없던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 늦어도 14세기경에는 오로라가 신화적 현상(예컨대,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잇는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이 아닌 자연적 현상이라는 ‘상식’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북유럽에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법을 말하는 이’는 중세 북유럽의 팅에 있던 사회자 내지는 의장으로, 팅을 주재하고 각중 불문법과 판례들을 외워서 읊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매속에 속하는 맹금 중 가장 덩치가 큰 종인 백송고리는 북극해에 인접한 그린란드, 스칸디나비아, 북미 북부 등지에 서식합니다. 특히 그린란드 백송고리는 사냥매로 가치를 인정받아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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