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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바이킹-4화 (4/116)

별사람 (3)

1. 별사람 (3)

흐발세이 교회 앞마당에서 열린 팅을 한바탕 뒤집어놓은 시그리드가 질문의 홍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은, 얄궂게도 빨리 찾아온 겨울 덕분이었다. 파울과 스베인의 죄를 논하기로 되어 있던 날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더니, 갑자기 날씨가 겨울로 변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은 그린란드의 삶에서, 겨울이라고 허송세월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겨울에는 겨울에만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여름에는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해야만 겨우 삶을 또 한 해 이어나갈 수 있던 것이다.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1406년의 겨울은, 그린란드에 남아 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그 이전의 겨울들과 마찬가지로 혹독하고도 매서웠다.

그러나 훗날 1406년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해 겨울이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했다고 증언하곤 했다. 희망의 불꽃이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데웠던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은 그날이 오지 않았고, 1406년이 아름답게 회상되기까지는 아직 긴 세월이 남아 있었다.

“어, 춥다, 추워. 핌불베트르고 뭣이고 얼른 끝나기나 했으면 좋겠는걸.”

시그리드의 집 문을 힘껏 닫으며 스베인이 툴툴거렸다. 물개 기름이 타며 나오는 매캐하고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요르드가 꽁꽁 얼어붙고, 간혹 유빙이 아니라 빙산 하나가 통째로 흘러들어오기도 하는 겨울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었다. 굳이 배를 띄울 것도 없이, 멋모르고 물 위로 고개 내미는 온갖 바다짐승들을 그대로 얼음 위로 걸어가 사냥할 수 있던 것이다.

“오늘은 꽤 소득이 있으셨다면서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집주인 시그리드가 스베인을 맞이하러 나왔다.

“소득은 개뿔. 죽을 뻔했는데. 뭐, 교회의 신이든 토르든 누군가가 보우해주었는지 어디 상하지 않고 끝나긴 했지만서도.”

겨울철 사냥을 위해 브라타흘리드와 뒤르네스 젊은이들을 이끌고서 북쪽부터 쭉 훑어 내려오던 스베인은, 얼어붙은 흐발세이 앞바다에서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

스크렐링들도 동녘정착지까지는 잘 내려오지 않았으니, 이 겨울철 한정 사냥터는 이론상 정착지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실제로는 더 무서운 경쟁자, 그러니까 사람 하나쯤은 쉽게 찢을 수 있는 백곰이 종종 저도 물개를 잡겠노라며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허나 굳이 따진다면 더 재수 없는 쪽은 스베인보다는 북극곰 쪽이었는데, 하필 맞닥뜨린 인간 무리가 근대적 준군사조직의 면모를 살짝 띄게 된 사냥꾼들이었던 것이다. (비효율이라면 참지 못하는 이방인 욘의 손길이 닿은 결과였다.)

결국 곰은 거기서 목숨을 잃고, 흐발세이로 끌려가 털가죽과 알몸뚱이가 분리되는 불우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욘이 그랬는데, 저어기 동쪽에는 검은 곰도 있고, 갈색 곰도 있대요. 그런데 이 흰곰만큼 덩치가 크거나 사납지는 않대요.”

“결론이 뭐냐, 그래서?”

“잘하셨다고요. 당장 예물 하나하나가 급한 판에, 그럴듯한 털가죽 하나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냥 흰곰이라고 해도 동녘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흉폭한 짐승의 털가죽이라고 하면 더 좋아라 하지 않겠어요?”

“잘 모르겠다. 국왕이라는 사람이 그런 걸 좋아할까? 심지어 지금 왕 노릇하는 사람은 따뜻한 덴마크에 사는 아낙네라던데.”

비단 스베인뿐 아니라 그린란드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왕이라는 게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지체 높은 사람이라 여길 뿐이었다.

가끔 그린란드는 왕에게 공물을 바치곤 했더랬다. 바다코끼리 상아와 백송고리, 곰 털가죽 등등을 바다 동쪽으로 보내면, 왕은 이를 받고는 저의 땅 어딘가에서 진귀한 물건(예컨대, 포도라고 불리는 기묘한 먹거리)을 답례로 보내왔다.

그러나 그것도 사십 년 전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 노르웨이 왕이 보낸 배는 단 한 척도 당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좋아할 수밖에요. 중요한 건 희소성이니까요.”

“희소, 뭐?”

“희소성 말입니다, 희소성. 중대한 일을 맡게 되었으면 그런 것쯤은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지금의 그린란드에서 시그리드와 더불어, 왕이라는 게 무얼 하는 사람인지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축에 드는 파울 신부가 끼어들었다.

“엥, 언제부터 여기 계셨소? 아니, 그보다도 신부라는 작자가 교회는 버려두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게요?”

“갚아야 할 죗값이 있는 몸으로 어찌 교회를 돌보겠습니까.”

“자, 자, 그만 싸우시고요. 우리가 엊그제 회의를 했을 때 스베인 아저씨는 사냥으로 노곤한 탓에 꾸벅꾸벅 졸으셨으니 못 들으셨을 수도 있지요.”

의도로 치면 분명 저를 옹호해주는 말이겠지만, 어째 저에게 한 방 먹이는 듯한 시그리드의 말에 스베인의 입이 절반쯤 벌어졌다가 마지못해 닫혔다.

느닷없이 겨울이 닥치면서 그 채비로 모두가 바빴던 탓에, 스베인과 파울의 죗값은 콜그림의 재판 때와는 훨씬 덜한 관심 속에서 정해지게 되었다.

이미 이전의 팅에서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의 제안이 얼렁뚱땅 통과되어 버리면서, 파울과 스베인 역시 처벌하기 곤란해졌다.

이때, 자신이 죄악을 범하고 또 시그리드에게도 죄지을 것을 교사한 것을 두고 심하게 자책하고 있던 파울이 선뜻 제안하고 나섰다.

오로지 그린란드를 위해서 죄를 범했으니 그린란드 사람들을 위해 분골쇄신함으로써 이를 갚고자 한다는 제안에, 팅의 여론도 금방 움직였다. 그러자 스베인도 제 앙숙에게 질 수 없다는 심보로 똑같은 죗값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엊그제부터 두 앙숙이 시그리드네에 모여 복닥거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왕 이리 된 것, 처음부터 다시 짚어보는 것도 좋겠구나. 내가 기억하기로도 그저께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는 허점이 꽤 많았으니.”

스베인을 향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파울 신부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시그리드가 일전의 그 ‘검은 책’을 펼쳤다.

“우리가 빈란드로 가려면, 세 가지가 필요해요.”

“사람, 배, 황금. 나도 거기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스베인 아저씨 말씀대로에요.”

고작 이천 명 인구의 그린란드만으로는 도저히 빈란드 항로 개척이라는 대업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먼길을 오갈 수 있는 항해술도 진작에 맥이 끊어져, 간혹 들리는 ‘스페인 사람들(바스크인)’이나 잉글랜드 사람들, 그리고 그보다는 그래도 자주 들리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외부와의 교류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판이었다.

더구나 난바다의 풍랑과 해무를 뚫고 빈란드로 갈 수 있는 배도 없었다. 그런 배가 있었다 한들, 진작에 모두 분해해서 바다코끼리를 잡는 사냥배로 전용한 지 오래였다.

결국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황금이 있어야 했는데, 이는 정확히 지금의 그린란드가 몰락한 원인이기도 했다. 애시당초 바다코끼리 상아의 값이 폭락하지 않았다면 그린란드의 곤경도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시그리드 너는 말했지. 어떻게든 딱 한 번만 거하게 투기를 받으면...”

“‘투자’입니다. 투기는 황금에 대한 탐욕에서 말미암는 죄악을 일컫는 말이고요.”

“투자라고 하려고 했소. 이럴 때만 귀가 밝아서는.”

“자, 자, 진정하시고요. 네, 제 계획대로라면, 한 번만 제대로 투자를 받으면 그때부터는, 욘이 쓰던 표현을 빌리면 ‘스스로 굴러갈 수 있’게 된답니다.”

그린란드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막연한 희망으로 욘의 지도를 대했지만, 이방인 욘을 더 가까이서 접했던 파울과 스베인은 그 지도가 참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욘과 가깝지 않았더라면 콜그림을 두고 그런 야단법석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들이 아는 수완 좋은 욘이라면, 정말로 저런 지도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 이교도 민족들 이야기를 했었지. 그런데 그곳에 정말 그리도 황금이 넘쳐날까?”

“서쪽 대륙 어디에도 코끼리가 없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해요.”

동쪽 유럽에서 적당한 투자를 받아, 빈란드 해안에 전초기지를 세운다.

그곳에서 그린란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곡물을 재배하고, 배를 더 건조하는 데 필요한 목재를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 욘이 말한 ‘아즈텍’인들과 접촉한다. 그들에게 바다코끼리 상아를 팔고, 황금을 받는다.

그렇게 그린란드의 바다코끼리 상아 무역은 다시금 – 말 그대로 – 황금기를 맞이하고, 모두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때도 이교를 믿고 싶은 이가 있다면 빈란드의 광활한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면 그만일 것이다.

“아즈텍인가 하는 곳에 그렇게 황금이 넘쳐난다면, 차라리 왕에게 군사를 얻어서 몽땅 그 황금을 차지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 미완성인 그들의 계획을 재차 짚어나가다 보니,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허점이 보이곤 했다. 그런 허점 하나를 발견한 스베인이, 저의 노르웨이 바이킹 조상들이 던졌을 법한 질문을 던졌다.

파울 신부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지식인으로서의 통찰력과 스베인에 대한 경쟁심 중 무엇이 그 원인이 되었는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된다 하는 게요?”

“유럽의 군주들은, 기회가 된다면 우리 그린란드를 거칠 것도 없이 곧장 이 ‘아틀란티스의  대양(대서양)’를 건너고자 할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의 기반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황금이 있다는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그 군주라는 작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시그리드의 제안을 들어주겠소?”

질문을 던진 뒤에야, 어째서 일전 회의 때 ‘희소성’ 얘기가 나왔는지를 떠올리는 스베인이었다.

정 그렇다면 그나마 아직 유럽에서 비싸게 팔린다는 흰송고리를 한 백여 마리쯤 잡아다 바쳐서 환심을 사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흰송고리는 희소성으로 그 가치가 유지되는 사치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에 대량으로 처분하면 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파울 신부조차 차마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게 만든) 시그리드의 답변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 문제는, 저도 며칠간 고민해보았어요.”

“오, 뭔가 또 떠오른 게 있나 보구나.”

“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산은 따로 있더라고요. 바다코끼리 상아나 곰가죽 같은 것도 물론 예물로서 환심을 사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야말로 지금의 유럽에서 가장 귀한 물건 아니겠어요?”

시그리드가 저의 검은 책을 가리켰다. 정성껏 그린 복잡한 그림. 그리고 간간이 현대 영어로 적힌 간략한 문장. 고작해야 푸타르크futhark*밖에 모르는 스베인은 물론이요, 나름 교육을 받은 파울 신부조차 설명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이 안에 담긴 지식 정도라면, 우리가 빈란드를 개척하고 탐험할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은 기꺼이 대가로 내주지 않을까요?”

“그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길래 그렇게 자신하고 있는 거냐?”

“욘의 지도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한 정도에요. 앞으로 오백오십여 년간 벌어질 일들에, 그사이 만들어질 놀라운 물건들 이야기, ‘과학’ 이야기...”

“시그리드야, 나는 너만큼은 아니어도 욘이 어떤 사람인지 얼추 알고 있었고, 또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안다. 그러니 그 책에 어떤 놀라운 비밀과 주술이 담겨 있다 한들 의심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다...”

스베인이 말하다 말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왠일로 파울 신부에게 – 그것도 시비조가 아닌 멀쩡한 말투로 – 물었다.

“이보쇼. 나는 배운 게 딱히 없어서, 그 왕이라는 자들이 뭔 생각으로 사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듣기로는 뭐든지 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작자라는데, 내가 한 번 그런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려 하니 만일 내가 틀렸다면 알려주시오.”

“물론이지요.”

파울 신부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그 속에 그런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그러니까 내가 왕이라면, 이렇게 할 것 같구나. 너를 붙잡은 뒤, 우선 그 책의 비밀을 모조리 털어놓으라 하고는, 싹 입을 씻는 거지.

애초에 그렇게나 강력하고 제멋대로 하는 이들이라면, 굳이 우리들과의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아니면 한 수 더 떠서, 비밀을 모두 밝히지 않는다면 군사를 보내 그린란드를 싹 불태워버리고 우리를 노예로 잡아가겠다, 그렇게 협박할 수도 있을 테고.”

“아.”

의외로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스베인 그대의 논리가... 타당합니다.”

파울 신부는 정말로 하기 싫은 말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도 못한 세상의 매운맛에, 시그리드는 얼떨떨하니 물개 기름 화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흠흠, 그래도 이미 팅에서 의결된 것을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우선은 닥친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닥친 일이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건데, 신부 그대가 맡았던 일은 어찌 되었소?”

스베인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미래 지식이고 무엇이고, 일단은 이곳 그린란드를 벗어나 그들의 종주국 노르웨이의 사실상 종주국 덴마크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배편을 마련하는 것은 파울 신부의 몫으로 떨어졌다.

헌데 지금 북녘사냥터를 겨우 오가는 그런 배들을 제하면, 동녘정착지에 남은 멀쩡한 배는 아이슬란드 사람 토르스테인의 크노르Knorr* 한 척뿐이었다.

“오는 길에 보니까 토르스테인 그 친구는 저들 아이슬란드 사람끼리 모여서 뭔 작당을 하고 있던데, 출항을 하겠다느니, 덴마크로 향한다느니 하는 얘긴 안 들리더군. 보나마나 허탕치고 온 게지.”

의외로 예리한 스베인의 지적에, 파울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면목 없습니다...”

“엇, 뭐가 잘 안 풀렸나요?”

화롯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계획의 허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한창 고민하던 시그리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대답 대신 나오는 파울 신부의 한숨은 많은 말을 함축하고 있었다.

해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겨울철이지만, 저 북쪽과는 달리 이곳 동녘정착지에서는 한겨울에도 해가 잠깐 뜨기는 했다.

짧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 잠깐의 어둑한 햇빛을 틈타, 시그리드는 토르스테인과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가르다르 성당의 객관客館으로 향했다.

딱히 무슨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파울 신부와 함께 백날 머리를 맞대고 있어봤자 뾰족한 수가 제 발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우선은 한 번 부딪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한 번 죽을 위기를 겪고 난 뒤 갑자기 조신해진 콜그림으로부터 무언가 슬픈 얘기를 들었는지 마당 구석에서 눈시울 훔치는 스테이눈 아주머니에게는 차마 다른 이의 행방을 물을 수 없어, 한참 헤맨 뒤에야 토르스테인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반갑습니다.”

시그리드는 성당에 들릴 때 사람 좋은 토르스테인과 몇 번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욘은 그의 성품을 일컬어 ‘신사적’이라고 했는데, 신사가 무엇인지 얘기만 겨우 들어 아는 시그리드도 토르스테인이 스베인 같은 옛 시대 사람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임은 알 수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국왕님께서 왕비를 새로 맞이하시는 자리*에도 초대받으신, 귀하신 분이시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정중하게 저를 대해주시니 오히려 부담스러운걸요.”

“그러는 시그리드 그대도 훌륭한 조상을 두지 않았던가요. 정중하게 대함이 오히려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은근슬쩍 띄워주는 화법에도 토르스테인은 은근히 거리를 두는 정중함을 – 그리고 그 뒤에 감추어진, 상인다운 경계심을 – 거두지 않았다.

“저기, 그러면 국왕 폐하를 만나뵙기도 하셨겠네요?”

“먼발치에서지만, 그런 적도 한 번 있긴 합니다.”

“와, 대단하세요. 그러면 저도 국왕 폐하를 만나뵐 수 있을까요?”

“하하, 만약 이 사람이 지난날 팅에서 아가씨의 언변과 계획을 들어 알지 않았더라면 그 말씀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제 파울 신부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배는 당분간 이곳 동녘정착지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신의 뜻이든, 날씨의 변덕 때문이든, 어쨌든 지난 몇 년간 아이슬란드의 그 누구도 닿지 않은 이 땅에 들리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이윤을 남길 수 있을 만큼의 재화를 싣고, 그 재화로 최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겠지요. 장사의 이치란 그런 것이니.”

어째서 파울 신부가 토르스테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했는지, 시그리드는 얼추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종종 들리는 베르겐보다, 훨씬 번화한, 따라서 북쪽 촌동네 상인에게는 가혹할 수밖에 없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나 로스킬데로 향해야 한다고 하면, 더더욱 그 말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조금 외람된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바다코끼리 상아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크노르가 거의 가라앉을 만큼 가득 상아를 채우고도 모자라지 않을까요? 그만큼 상아를 모으려면 어쩌면 두세 해는 가뿐히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하하, 역시 총명하십니다! 허나 두세 해를 기다려야 한다면 두세 해를 기다려야지요. 수백 년간 지금처럼 상인 노릇하기 어려울 때가 없었다고, 베르겐에서든 레이캬비크에서든 상인들은 모두 떠들고 있답니다. 그러니 여러 해를 기다릴지언정 함부로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면 잘 되었네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장 이듬해 봄에도 떠날 수 있다는 말씀 아닌가요?”

“뭐, 하늘에서 보석이라도 떨어진다면야 그렇겠지요.”

그 말을 들은 시그리드의 눈이 번뜩였는데, 이미 잠깐 고개 내민 해가 시그리드 뒤편으로 저물고 있었으므로 토르스테인은 알아보지 못했다.

“보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태양돌solarsteinn*도 취급하시나요?”

“태양돌? 그런 귀물은 국왕 폐하나 웁살라 추기경 같은 분들의 배에나 실리는 것이랍니다.”

“태양돌보다 더 귀중한 물건, 하늘에 해가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아니,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방위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라면 어떤가요?”

“하하! 그런 물건이 있다면야 참 좋겠지요. 허나 세상에 없는 것을 암만 바라고 구한다 한들 나타날 리가 있겠습니까?”

“헤헤, 그렇지요?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아가씨 말씀마따나 바다코끼리 상아는 사실 좋은 값을 받기가 난망해요. 만약 그런 물건이 있다면야 상아보다 훨씬 귀할 것이고, 그렇다면 얼른 독점해서 이익을 취해야 하겠지요.”

“당장 출항할 만큼 귀한 물건인가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토르스테인이 말을 슬쩍 늘어뜨렸다.

“상상 속의 이야기를 왜 이리 길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요.”

상상 속의 이야기라는 말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침반이라는 물건은, 이곳 그린란드에서는 아직은 검은 책의 도면을 제외하면 시그리드의 머릿속에만 있었으니까.

물론 조금만 더 시야를 남쪽으로 옮기면, 한자동맹에게 비싼 항구세와 관세를 내지 않으면서 저들의 수확물을 팔 길을 찾고자 코펜하겐과 로스킬데를 기웃거리던 바스크인 고래잡이들이 이미 그것보다도 더 발달한 형태의 나침반을 소매 깊숙한 곳에 감추고 다니는 중이기는 했다.

허나 시그리드는 이를 알지 못했고, 아이슬란드에서는 그럭저럭 견문이 넓은 편이지만 유럽 전체로 따지면 북쪽 촌놈일 뿐인 토르스테인도 마찬가지였다.

--- *** ---

* 중세 그린란드의 언어생활에 대해 남은 자료는, 그린란드 일대에 남은 룬(푸타르크) 문자 기록이 전부입니다.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 점차 룬 문자 자체가 라틴 문자로 대체될 무렵까지도 그린란드에서는 계속 룬 문자가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13세기경에는 그린란드식 룬 문자만의 독특한 면모도 조금씩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남아있는 자료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 중세 바이킹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배를 운용했습니다. 용머리 선수로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롱십longship – 함급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문헌에 언급됩니다 – 은 주로 해전과 노략질에 쓰였고, 상업적 목적의 원양항해에는 비교적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크노르(또는 크나르knarr)가 쓰였습니다.

* 중세 바이킹 항해술의 핵심은 태양을 활용한 방위계측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바이킹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출발해 북아메리카 동해안부터 동지중해까지 온갖 바다를 들쑤시고 다닐 수 있었지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소빙기로 접어드는 14세기 즈음부터,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방문하는 노르웨이 본토의 배가 부쩍 조난을 자주 당하게 되고 종국에는 거의 끊기게 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유리한 바람이 부는 시기에 구름과 안개가 끼게 되면 태양을 이용한 방위계측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토르스테인 올라프손이 1405년 노르웨이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난당해 그린란드까지 표류한 것도 ‘짙은 안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13세기부터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문헌에 등장하는 태양돌solarsteinn입니다. 태양돌은 구름을 투과하는 미미한 양의 빛을 감지할 수 있는 광물결정으로, 이를 사용하면 태양이 있는 방위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나침반과 달리 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지식이 요구되었기에 널리 쓰이지는 못하고 15세기경부터는 나침반에 대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 토르스테인이 실제로 칼마르 동맹의 명목상 군주 에릭과 잉글랜드 공주 필리파의 혼인식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일가붙이를 포함해 아이슬란드의 유력한 집안 사람 여럿이 1405년 전후 일제히 노르웨이를 다녀오는 일이 있었기에, 토르스테인 올라프손도 결혼식 하객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토르스테인은 무슨 일인지 결혼식 자체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일찍 노르웨이를 출발했다가 그린란드에 표류하게 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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