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화 (5/116)

별사람 (4)

1. 별사람Starman (4)

나침반만 있다면 노르웨이로든 덴마크로든 뜻대로 떠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토르스테인의 답변을 듣고 싱글벙글한 채로 돌아온 시그리드는 곧장 계획을 세웠다.

첫째, 나침반을 만든다.

둘째, 토르스테인에게 나침반을 자랑한다.

셋째, 나침반으로 뱃삯을 갈음한다.

그리고 이 간단한 계획은 첫 단계부터 큼직한 암초를 만났다.

“자철석?”

“네, 그런 게 어디 주변에 없을까요?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는 철광석이라는데요.”

파울 신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장 대장간이라는 게 무엇인지 두 눈으로 본 사람도 손으로 꼽을 판이다. 철광석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미 공군성 편 공군규범 64-3 『생존』의 어지간한 내용은 욘이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다 배운 시그리드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나침반이 없을 때 방향을 찾는 법이 나와 있을뿐, 나침반이 없을 때 하나 새로 만드는 법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시그리드는 아니었다. 코덱스를 한참 뒤진 끝에 시그리드는 또 다른 발상을 내었다.

“그러니까... 이 쇠바늘을 저 털가죽에 문지르라고?”

날씨가 영 좋지 않아,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저의 사냥꾼 무리와 가르다르에 머물고 있던 스베인이 또 끌려나왔다.

“네.”

“대체 왜?”

“설명을 듣고 싶으세요? 정말로요? 그러니까 마찰로 정전기를 일으킨 다음에 일시적으로 바늘을 자화시키는 건데요...”

‘뭐, 원하신다면야’ 하며 어깨 으쓱한 시그리드가 일부러 복잡하게 풀어놓는 설명 앞에서 스베인은 금방 질문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니, 되었다. 되었어. 문지르마.”

이 무렵이면 쇠바늘은 오직 가르다르 성당이나 남쪽의 수녀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된 지 오래였지만, 시그리드는 그 에인드리디 주교대리로부터 책 한 권 분량의 양피지를 빼돌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스베인이 아무리 문질러도 바늘이 자석이 되지는 않았다.

언제 슬그머니 나타난 파울 신부가 ‘그렇게 무식하게 문지르니까 그렇지요. 제가 해보겠습니다.’하고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여전히 신통치 않았다.

실로 바늘허리를 매달아 대롱대롱 들어올리면 잠깐 북쪽(인 듯한 방향)을 가리키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다음 방법.

전자석을 이용한다.

하지만 쇠도 구하기 어려운 판에 어디서 구리선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또 다음 방법...

“아! 번개!”

“번개?”

“네, 그런 게 있어요.”

그린란드의 겨울은 가장 어두울 때인 동시에 가장 흐린 때이기도 했다. 혹한이 잦아지는 요즘은 벼락을 동반한 눈폭풍쯤이야 매년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콜그림은 토르의 묠니르* 이야기를 늘어놓아 독실한 교회 신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디 보자... 피뢰침을 세우고, 그걸로... 아니, 그런데 피뢰침은 뭘로 만들어야 하지?

스베인 아저씨, 벼락을 맞게끔 하기 위해 동녘정착지의 쇠붙이를 모두 모아 기둥 모양으로 높이 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미쳤다는 소리를 푸짐하게 듣고 어쩌면 몰매까지 맞겠지. 아, 네가 그런 얘기 하고 다니면 몰매는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시그리드 너는 좋아하니까. 지난 팅 이후로는 더 그렇고.”

그린란드의 살림살이가 아무리 어렵다지만, 쇠붙이 한두 점을 못 살 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쇠를 녹이고 두드릴 여력이 되지 않는 동녘정착지로서는 어쨌든 쇠못 하나하나가 아쉬웠다.

바다코끼리 상아가 아니라 니벨룽Niflungar 일족의 황금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다 할지라도, 아이슬란드 상인이든 바스크 원양어선이든 외부인이 그린란드에 방문하지 않으면 쇠붙이를 마련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러면 피뢰침은 어렵고... 어디 보자...”

코덱스를 여기저기 뒤적이던 시그리드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정전기, 전기, 벼락... 벤저민 프랭클린! 아저씨, 혹시 연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연?”

“네, 바람에 태워 하늘 높이 띄우는 마름모꼴 장난감인데...”

스베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그린란드 사람에게는 금시초문이었지만, 다행히도 파울 신부는 베르겐 시절에 그 연이라는 장난감을 먼발치서 본 적이 있더랬다.*

가르다르 성당에 딸린 방직소dyngja 아낙네들이야 항상 시그리드를 좋아했으므로, 긴히 쓸 데가 있어서 털실*을 조금 가져가겠다 하자 흔쾌히 응해주었다.

방수성이 좋은 물개 가죽과 물개 뼈로 연을 만들고, 옷감을 도로 풀어 얻은 실로 연줄을 마련했다.

이제는 벼락이 치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점심 즈음에 잠깐 해가 고개만 내밀고 도로 서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야속한 성탄절이 지나고, 동녘정착지는 어떻게 겨우겨우 1407년 새해를 맞이했다.

1406년 겨울을 데웠던 희망의 불꽃도 그 무렵에는 슬슬 잦아들고 있었다.

동쪽 땅에서 후원을 받아 서쪽으로 나아가자 공언한 시그리드의 원대한 계획이, 바로 그 첫 발짝, 배편 마련부터 발목을 잡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불이란 대개 장작이 필요한 법인데, 그 장작이 툭 끊긴 셈이었다. 그러니 야속한 사람 마음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물론 그럼에도 꿋꿋이 시그리드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런 이들일지라도 마음속에 의심의 새싹이 하나쯤 돋는 것은 금할 수 없었다.

만약 시그리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벼락을 끌어들여 범상한 쇠바늘을 태양 없이도 방위를 알 수 있는 보물로 탈바꿈시키겠노라 하였다면, 차라리 늑대 두 마리가 각각 태양과 달을 삼킬 것이라는 콜그림의 이야기가 더 그럴듯하다고들 했을 터였다. 그나마 시그리드였으니 다들 반신반의하면서도 계절 바뀌기를 기다릴 뿐.

“성과가 없어도 너무 낙담하지는 마시지요. 이 사람도 상인인 이상, 반드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배편이야, 레이캬비크에서 한 두 세 해 기다리다 보면 생길 테고요.”

언제고 토르스테인이 그렇게 진심어린 위로를 전하러 오기도 했다. 만일 그 사람 좋은 미소가 아니라면, 빈정거린다고 오해할 법도 하였지만, 시그리드는 그저 빙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 웃음이, 욘과 그의 지식을 철석같이 믿는 데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핏줄에 흐르는 고집불통 오기 때문인지는 시그리드 본인도 알지 못했다.

이어지는 기다림 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마침내 연중 가장 폭풍이 잦은 계절인 늦겨울 – 남쪽에서는 ‘봄’이라고도 부른다는 – 이 찾아왔다.

이 무렵에는 멀리 수녀원과 헤르욜프스네스까지도 시그리드의 엉뚱한 뱃삯 마련 계획이 다 소문 나 있었다.

그러므로 그해 여름의 바다코끼리 사냥을 의논코자 열린 팅에 참석한 헤르욜프스네스 사람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행여 그사이 폭풍이 한 번쯤 오지 않을까 하며 가르다르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스노리 노인이 시그리드네 문을 두드렸다.

“뱃사람에게 붉은 저녁하늘은 기꺼움이요, 붉은 아침하늘은 근심거리라는 옛말이 있다.

새벽녘에 잠깐 하늘이 개었는데, 그때 보니 남동쪽에 붉은 기가 가득하더구나. 무엇을 준비하고 있든 슬슬 채비할 때가 된 것 같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뜩이나 궂은 날씨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먼바다에 풍랑 휘몰아치는 소리가 가르다르를 남북으로 둘러싼 두 피요르드를 타고 울려왔다.

여기까지는 혹한이 시작된 이래로 2~3월이면 종종 벌어지던 일이었지만, 뭐가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슬슬 내리는 부슬비 맞아가며 뭔가를 부산스레 준비하는 소녀의 모습은 분명 동녘정착지에서는 처음 보이는 것이었다.

가르다르 성당에서 한참 떨어진 마을 초입 공터에서 시그리드가 ‘그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자, 자! 거기 구경하시는 분들은 좀 더 비켜나시고요. 여기로 벼락이 내리칠 텐데, 그렇게 붙어있다가는 큰일 나요!”

“콜그림 아저씨! 허리춤에 그 도끼 풀어놓으세요! 쇠붙이를 가지고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요!”

졸지에 조수 노릇을 하게 된 스베인은 연과 한참 씨름을 한 끝에, 마침내 피요르드를 타고 몰아치는 칼바람의 힘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와, 떴다!”

가르다르와 흐발세이에서 몰려온 어린아이들이 저들 부모나 조부모 품에서 한입으로 환호하였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에 시그리드와 스베인의 입꼬리도 말려올라갔다.

“하하! 이거 꽤 재밌는데?”

그러나 기쁨에 취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사치였다.

“연 날리는 건 나중에 실컷 하시고요, 일단 그 줄 제게 넘겨주세요.”

시그리드는 말뚝 대신 단검을 땅에 박고, 거기에 연줄을 매었다. 먼바다에서 가끔 낮게 들려오던 천둥소리가, 이제는 제법 가까워졌다.

태양을 가린 두터운 먹구름. 차가운 바다의 냉기를 한껏 머금은 날선 바람. 저를 바라보는 인간 모두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맨살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양, 눈 덮힌 채 동녘정착지를 굽어보는 산등성이.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는 듯, 마치 흐린 하늘을 향해 꿋꿋이 날아갈 것만 같은 연 한 조각.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겼다.

암만 생각해도 벼락 어쩌고 하는 건 마녀같은 짓이 아닌가 하는 성직자의 본능과, 아무리 그래도 시그리드가 하는 일인데 성공을 위해 기도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가운데서 갈등에 휩싸인 주교대리 에인드리디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서는 벼락이 무사히 내리치게끔 해주십사 기도를 올릴 무렵.

마침내 하늘이 쪼개지고, 모두의 머리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됐다!”

하늘 높이 떠오른 연에 벼락이 직격하는 것을 본 시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환성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물개 뼈로 만든 연의 뼈대와 비를 흠뻑 머금은 연줄을 타고 땅으로 흩어진 벼락은, 연을 바짝 불태워버렸다.

앙상한 뼈대만 남아 떨어지는 연을 보며, 스베인은 저도 모르게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저의 어른답지 못한 탄식을 부하들 중 누군가 들었을까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그 곁에서 넋이 나간 채 시그리드와 연을 번갈아 바라보는 콜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세상에... 대장, 보셨습니까? 사람이 번개를 불러냈습니다. 우리 시그리드 아씨가요.”

흐발세이 코앞까지 내리치던 번개도 어째 멎은 듯. 경악 속에서 조용히 웅성대는 어른들 중 열에 아홉은 성호를 긋고 있었다.

단순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번개의 신은 농부의 신이요, 일하는 자의 신이요, 교회의 신이기도 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경이 앞에서, 그들의 머리는 잠시 얼어붙은 듯했다.

파울 신부와 스노리 노인 등, 그리 단순하지 않은 사람들 또한, 교차하는 만감 가운데서 조용한 귓속말과 수근거림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반면 시그리드의 눈길은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소박한 기적의 결과물에만 쏠려 있었다.

“아뜨뜨.”

십억 볼트 전압을 맞아 절반쯤 재로 화한 연에 끼워둔 쇠바늘을 무심결에 맨손으로 만진 시그리드는 그제야 자신이 장갑을 아직 옆구리에 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시그리드는 바늘 중 몇 개가 제대로 자성을 띄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해냈다! 해냈어!”

미리 준비한 작은 나무잔에 바늘을 띄워본 시그리드가 깔깔 웃었다.

“와아아!”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가장 먼저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무거운 정숙을 깨뜨렸다.

저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알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서 펼쳐진 놀라운 광경을 동심 어린 기쁨으로 즐길 뿐.

그 기쁨에 어른들이 이어서 떠밀리고, 사방에서 일어난 환호의 물결은 다시금 시그리드에게 향했다.

“... 아이들이 빠져들게끔 하자꾸나 / 아이들이 놀게끔 하자꾸나 / 모든 아이들이 춤추게 하자꾸나...”

저도 모르게,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시그리드였다.

폭풍이 가르다르를 덮치며, 차가운 빗줄기는 진눈깨비로 변하고, 이윽고 함박눈으로 화하였다.

그러나 물개 기름 화로 몇 개가 꺼지고, 순간의 열정은 식을지언정, 잠시나마 그린란드 사람들의 마음에 차올랐던 의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위해 벼락마저 붙잡을 수 있는 소녀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이미 그 자리를 채웠으므로.

“맙소사, 정말로 북쪽을 계속 가리키는군.”

나침반을 만져보는 토르스테인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제 앞에 찾아온 시그리드에게 나침반을 돌려주었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는 눈도, 예쁘장한 젊은 여인을 보는 눈도 아닌, 이전과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시그리드를 바라보는 토르스테인이었다.

“그런 일을 해내실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벼락을 사람의 재주로써 다룰 수 있다니...”

이 모든 난리법석이, 유럽 다른 곳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자철석을 못 구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토르스테인이 알 리는 없었다. 그런 엄청난 방법으로 만들어낸 물건이라면 대단한 보배인 것이 당연하리라 여기고 있을 터.

그러나 그런 오해를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보기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아마 아이슬란드나 다른 곳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할 것 없이 훨씬 쉬운 방법으로 이 나침반을 만들 수 있을 거에요.”

“그렇다면 더더욱 약속을 잘 지켜야겠군요. 그 쉬운 방법이 남들에게 알려지면 큰일일 테니 말입니다.”

모든 배의 선장들이 저 나침반을 구하지 못해 혈안이 되리라.

잠시 토르스테인은, 일전에 베르겐에서 마주쳤던 한자 동맹의 부유한 상인들은 물론이요, 그리고 그런 이들마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이탈리아 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도... 지난날 흐발세이에서 열린 팅에서, 자기 앞의 은발 소녀가 펼쳐보였던 그 기묘한 검은 책의 모습이 연신 떠올랐다.

“어, 저기요?”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이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약속했던 것처럼, 출항할 수 있는 계절이 되는 대로 닻을 올리도록 하지요.”

토르스테인의 크노르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동녘정착지의 유일한 항구, 헤르욜프스네스에 정박해 있었다.

허나 피요르드가 얼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 입구까지 유빙이 떠내려오는 것은 다른 피요르드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므로, 설령 나침반의 힘으로 짙은 안개를 뚫을 수 있다 한들 이 계절에 출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을 넘어 자살에 가까웠다.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니, 잠시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 기항할 겁니다. 거기서 동남쪽으로 향해, 페로Faroe에 들렸다가 코펜하겐으로 가려고 합니다. 궁정이 있는 로스킬데에서는 지척인데, 아무래도 상아를 팔거나 다른 재화로 교환하는 데는 코펜하겐 쪽이 더 수지가 맞거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확답은 못 드립니다. 우리 배의 선원들은 모두 제 아버지 대부터 집안을 섬기던 노련한 이들인데도 폭풍을 피하진 못했거든요. 요즘 바다가 정말 미쳤는지... 좌우지간 폭풍만 안 만난다면 올 1407년이 가기 전에 덴마크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바다의 변덕이 우리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조금 더 걸릴 테고요.”

어수룩한 벽촌 아가씨를 대하는 말투와는 격을 달리하는, 진중하면서도 사무적인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토르스테인이었다. 시그리드를 그렇게 응대할 가치도,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있는 상대로 어느새 받아들인 것이다.

“승객은 얼마나 태울 수 있을까요?”

“올 여름에 힘 닿는 데까지 바다코끼리 상아를 사들여 싣는다 치고, 또 듣자하니 왕실에 진상할 공물도 화물로 싣고자 하신다던데요... 그것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면, 대략 열 명 정도까지는 일행을 태울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이상은 어려울 겁니다.”

사람 머릿수로는 이천. 장정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은 동녘정착지 사정상, 열 명 이상을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는 여정에 데리고 가는 것은 어차피 어려울 것이었다. (욘이 일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덕에, 시그리드는 그런 계산에 익숙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도 토르스테인의 말에 더 토를 달지 않고,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엊그제 불어닥친 폭풍은 아직 온전히 가시지 않아, 음침한 안개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함께 마을을 메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또 무슨 일인지 옥신각신하는 두 인영이 멀찍이서 보였다. 보나마나 스베인과 파울이리라.

“오, 시그리드로구나. 토르스테인 그이와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지?”

파울 신부가 반갑게 맞이했다.

“네, 출항은 올 늦여름, 대동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 열 명이래요.”

“열 명이라? 잘 되었군. 이보쇼, 신부님. 열 명 중에 시그리드와 신부님 빼고 나머지는 모두 내 아랫사람들로 채우겠소.

우리가 떠난 사이에 동녘정착지에서 사람 때문에 난리 벌어지는 꼴은 막아놓고 가야 하지 않겠소?”

무어라 입 벌려 반박하려던 파울 신부는, 의외로 논리정연한 스베인의 말에 살짝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알겠습니다. 단, 잊지 마십시오. 바깥 세상은 이교에 대해 그리 관대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기가 막혔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게요.우리가 오래된 신들의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걸리면, 신부님이 알아서 잘 막아주지 않겠소? 원래 사람은 화형대 앞에서는 누구든 달변이 되는 법이라 하니, 이미 언변 유창하신 신부님이라면야 저 콜그림이 교회 앞에서 프레이야가 고양이 썰매 타는 소리를 해도 잘 변호해주실 수 있으실 게요.”

“참된 신앙에서 멀어진 죄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버린 이가 짊어져야지요. 그리고 그러다가 시그리드가 연루되면 어찌하실 겁니까?”

“아차, 그 생각은 못 했군. 알겠소. 토르의 ‘th’ 소리라도 하는 놈이 있다면 묠니르로 머리 얻어맞는 기분을 느끼도록 만들어주겠소.”

“그러니까 그런 불경스러운 이름 자체를 입 밖에 내지 말라, 그 얘깁니다. 좀...”

“자, 자. 추운 데서 이러지 마시고요. 들어가서 얘기 나누자구요.”

이제는 욘의 흔적이 조금은 사라지고, 대신 시그리드가 홀로 만들어가는 삶의 흔적이 조금씩 남게 된 누추한 집이 세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일전에 우리가 이야기를 나눴지요. 동쪽 땅의 군주들에게 무엇으로 후원의 값을 치를지를 두고요.”

“그랬지.”

“이번에 나침반을 만들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시그리드가 이제는 저의 몸 일부처럼 된 듯한 책을 꺼내 펼쳐보였다. 이제는 두 사람에게도 익숙해진 연 그림과, 알 수 없는 ‘+’와 ‘-’ 기호로 가득 찬 장을 넘어, 온갖 도식과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지면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이 책의 존재를 숨길 거에요. 대신, 책 안에 들어 있는 지식의 타래를 하나씩, 하나씩 풀 거에요. 이번에 연이랑 나침반을 만든 것처럼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그리고 더 크게 보면 우리 모두는 유럽의 군주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거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책의 힘으로 사람들을 모은다면, 사람들을 돕고 그로써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겠어요?”

눈앞에서 펼쳐진 기적을 두고 함께 기뻐하고 환호하는 사람의 고리 사이에서, 시그리드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를 느꼈다.

사람의 머릿속에, 책의 종이 안에 갇힌 지식이 바깥 세상으로 나올 때, 그리고 그 세상을 바꿀 때 일어나는 물결. 지식 그 자체보다도 훨씬 거대한 힘.

누군가에게는 희망, 누군가에게는 구원.

그것을 함께 느끼지 못한 파울과 스베인의 귀에는, 그저 상인이 창고에 저의 재화를 쌓아놓고 하나씩 꺼내는 것처럼 군주들과 흥정하겠다는, 제법 그럴듯한 말로 들릴 뿐이었지만.

두 사람이 고개 끄덕이고 추임새를 막 넣으려던 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엇, 스노리 어르신 아니시오?”

“재밌게들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노인네가 분위기 망쳐 미안허이. 시그리드 보려고 찾아왔네.”

팅에서는 법을 말하는 이지만, 팅이 열리지 않을 때에는 그저 백송고리를 다루는 평범한 노인일 뿐인 스노리였다.

그 스노리가, 팅에서와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얼굴로, 그러나 그 뒤에 무언가를 숨긴 듯한 표정으로 시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시그리드야, 네게 줄 선물이 있다. 따라오려무나.”

--- *** ---

* 예나 지금이나 망치 묠니르는 토르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번개의 신인 동시에 농민과 여타 평범한 사람들의 신인 토르는 특히 후대로 갈수록 바이킹 사회에서 널리 숭배되었고, 그린란드에서도 묠니르 형상이 음각된 주춧돌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그린란드인들의 사가』에도 빈란드에서 자해 의식을 치르며 토르에게 축원한 사냥꾼 토르할의 이야기가 전하지요.

* 선진시대 중국에서 기원한 연이 정확히 언제, 어떤 경로로 유럽에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연날리기 풍속을 아주 과장된 형태로 서술한 것을 보면, 적어도 그의 시대까지는 유럽에 연이 없었거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4세기경에는 연의 군사적 활용 방안이 병서에 언급될 만큼 연이 널리, 그리고 빠르게 퍼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 10세기 무렵부터 (이전의 주력산업이던 노략질을 대신해) 방직업이 새로운 바이킹 사회의 주요 산업으로 대두하게 됩니다. 이들이 직조하던 모직물 바드말vadmal은 스칸디나비아와 아이슬란드에서 화폐로 쓰이기도 할 만큼 가치가 높았는데, 흥미롭게도 직조는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훗날 보다 ‘근대적’인 공장제 수공업 체제를 도입한 플랑드르와 잉글랜드 모직업에 밀려나는 한 가지 원인이 됩니다.) 그린란드산 바드말은 헤르욜프스네스 공동묘지에 매장된 그린란드인들의 수의 등을 통해 표본이 많이 남아 있는데,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동시대 아이슬란드 바드말보다 더 정교하게 품을 많이 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