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6화 (6/116)

별사람 (5)

1. 별사람Starman (5)

겨울이 늘 그렇듯 하늘은 흐렸지만, 해가 떨어지자마자 뜬 보름달의 은은한 빛은 구름을 뚫고 동녘정착지를 둘러싼 설산과 해빙을 두루 비추고 있었다.

스노리 노인이 말한 선물이 무엇일지, 궁금함을 품고서 시그리드는 묵묵히 스노리 노인의 뒤를 따랐다.

해를 거듭할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눈과 얼음의 경계를 향해, 노인과 소녀는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한때 목초가,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는 밀이 자라던 완만한 비탈을 지날 무렵, 마침내 스노리 노인이 말을 꺼냈다.

“어렸을 적에는 항상 궁금했었다. 노인들은 어떻게 저리도 지혜로울까.

그런데 지나고 보니, 노인의 지혜라는 건 그저 허풍이고, 그간 살아왔던 것을 잣대로 이런저런 허튼소리 늘어놓는 것을 젊은이들이 지혜라 착각하는 것이더구나.”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개어 달이 곰보 얼굴을 드러내자, 멀찌감치 다 무너져가는 폐가 한 채가 보였다. 지금 그들이 밟고 있는 옛 농지를 경작하던 농장일 테다.

쓸만한 목재는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챙겨간 탓에, 이제는 폐가라기보다는 돌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아직 돌담 곳곳에 회칠한 흔적이 남아 있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회칠을 하였을 잉글랜드 장인의 솜씨를 증거하는 양, 그리고 그런 장인을 불러올 수 있었던 동녘정착지의 번영을 증거하는 양.

“선물이라 말은 했지만, 받고 받지 않고는 오직 네 마음에 달렸다. 내 얘기를 네가 어찌 듣든 네 마음대로인 것처럼 말이다. 어찌 정하든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 뜻대로 하려무나.”

아마도 문이 나 있었을 법한 틈을 지나, 사람이 한때 거하였을 곳으로 두 사람은 들어섰다.

스노리 노인의 손짓에, 시그리드는 눈치껏 제가 들고 있던 물개기름 등불을 넘겨주었다.

등불을 넘겨받은 스노리는 벽난로 굴뚝이었음직한 돌기둥 쪽으로 향했다. 그 곁의 무너진 담벼락을 밟고 올라가더니, 굴뚝 틈바귀에 한 손을 숙 밀어넣고는 무언가를 꺼냈다.

“자, 이게 선물이란다.”

보송보송한 무언가가 시그리드의 손바닥에 닿았다.

“뭔가요?”

“네 눈으로 보려무나.”

스노리 노인이 등불을 가까이 해주었다. 아직 솜털뭉치를 벗어나지 못한 백송고리 새끼 한 마리가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아직 안 죽었을 게다. 몸을 데워주려무나.”

어린 맹금에 대한 가여움보다 호기심이 앞선 시그리드를 위해, 스노리 노인이 담벼락에 기대고는 이 ‘선물’의 이력을 늘어놓았다.

“백송고리는 원래 막 날기 시작한 다음에 잡아서 키워야 사냥매로 쓰임새가 있는 법이다. 첫 날갯짓을 하기도 전에 둥지에서 데려온 매는 바보새*라고 부르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녀석들이 둥지를 트는 곳 여럿을 미리 찾아두고 놈들이 막 둥지를 떠날 때쯤을 기다리곤 한다.

헌데 오늘 아침에 이쪽을 살피러 왔더니, 어미 매가 날개가 꺾인 채로 근처에 죽어 있더라. 아마 네가 벼락을 다루었던 그날 찾아온 폭풍에 휘말렸던 것이겠지. 이 불쌍한 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어미를 찾다가 저렇게 지쳐 쓰러진 게고.”

새끼 백송고리의 조그만 몸뚱아리에 귀를 가져다 대어보았지만, 고동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미약한 탓에 비탈과 벼랑을 흩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묻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일평생 백송고리와 함께 살다시피 한 스노리 노인의 말이 틀릴 리는 없었다. 시그리드는 노인의 지혜가 들어맞기를 바라며, 등불을 솜털 그슬리기 직전까지 바짝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는 안 해도 된다. 사람의 체온만으로도 충분해. 한참 그렇게 몸을 데워주면 금방 깨어나서 삐약거릴 테니.”

귀여운 만큼이나 가여운 새끼 매를 움켜쥔 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궁금해진 시그리드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새끼 매들을 바보새라고 부르나요?”

“부모에게서 매다운 게 뭔지 배우지 못한 채 사람 손을 타게 되니까. 그래서 이런 녀석들을 길들이려 노력하는 건 도박에 가깝지. 바보새 중 열에 아홉은 갈매기만도 못하게 되지만, 열쯤에 하나는 최고의 사냥매가 된단다.”

문득 파울 신부가 종종 입에 올리던 ‘빈 서판tabula rasa’ 이야기를 떠올리는 시그리드였다. 맹금의 습성을 익히지 못하는 만큼, 오히려 그 빈자리에 새로운 재주와 습관을 채울 수 있는 이치일 테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녀석을 네게 선물로 주려는 이유기도 하다.”

“이 백송고리가요?”

“저 동쪽에서는 이렇게들 말한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독수리를 / 왕에게는 백송고리를 / 대공에게는 익더귀(새매 암컷)를 / 후작에게는 송골매를...’*

그러니까 다들 우리네 백송고리만은 옛날 값 그대로 사 가는 것일 테다. ‘검은 죽음’은 군왕과 농노를 똑같이 노리지만, 농노와 달리 군주의 빈 자리는 금방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사실, 처음에는 이 바보새를 보았을 때는 다른 녀석을 찾을까 생각도 했다. 내 말했듯이 바보새는 사냥매로 제대로 자랄 공산이 낮으니 말이다. 그때만 해도, 스베인 녀석이 하고 있는 것처럼 왕실에 바칠 예물로서 백송고리 한 수쯤 마련해줄 생각뿐이었거든.”

“그렇다면 지금은 생각이 바뀌신 것이겠지요?”

“네 말대로다. 바보새는 사냥매로는 쓸모가 없기 마련이지만, 키우기에 따라서는 또 나름의 쓸모가 생길 수도 있거든. 올 여름에 떠날 작정이라고 들었는데, 그전까지 잘 길들이면 네 먼 길에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줄 게다.”

스노리 노인은 팅을 주재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콜그림이 라그나로크 이야기를 늘어놓든, 수녀원장인 순례자 헬가 – 요즘 젊은이들은 ‘노망난 헬가’라고 불렀지만 - 가 『요한의 묵시록』 말씀을 제멋대로 속언俗言으로 풀어서 외치든 스노리 노인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는다 하여 귀가 닫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진리를 시그리드는 새삼스레 체감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역할도 해줄 거다. 세상 어디를 가든, 임금에게나 어울릴 사냥매를 버젓이 팔에 올리고 다니는 소녀라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겠지.

동쪽 땅에서 네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런 일 아니겠느냐?”

“맞아요. 저기 덴마크 여왕님께 후원을 청할 생각이에요. 유럽의 나라들은 대부분 다 붙어있다고 하니까, 덴마크가 어렵다면 그 옆의 다른 나라들로 향할 생각이고요.”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었다. 고작 거기서 그칠 리가 없지 않으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벼락을 불러냈을 때,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느냐? 경황이 없었으니 아마 너는 못 보았겠지.

서녘정착지가 무너지던 그날 이후로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은 것을, 그저 잠깐 지나쳤다 끝날 희망보다도 더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것이 바로 네가 가진 지식, 이방인 욘의 지식이 지닌 참된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책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늙고 어리석은 내가 어찌 감히 헤아리겠냐만, 장담컨대 책의 내용보다도 그 내용을 어찌 쓰느냐, 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느냐가 더 중할 것이다.

네가 나아갈 저 동쪽 땅이 지금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노르웨이 왕에게 도움을 애걸했을 때 이후로 사정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네? 노르웨이 왕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고요?”

“지금보다 사십 년은 더 전의 일이다. 죽은 알프 주교가 가르다르에 부임하기도 전, 아르니 주교가 죽고 흰머리 크누트가 대리로 있던 시절의 일이었으니. 그리고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비단 시그리드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녘정착지 사람들에게 스노리 노인은 항상 스노리 노인이였다. 아들과 딸을 일찍 떠나보내고 손녀와 함께 사는 노인.

그러나 스노리 노인의 자글자글한 주름 뒤에는 생각보다 더 큰 비밀이 있었던 듯하였다.

“그때 바르다르의 아들 이바르*라는 신부가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국왕의 명을 받고 찾아온 사람이었지. 그는 대략 이십 년을 두 정착지를 오가며 지내다가, 서녘정착지가 무너지고 몇 년 후에 도착한 국왕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나와 다른 다섯 청년은 이바르와 함께 노르웨이로 향했다. 바다코끼리 상아를 직접 팔러 간다는 게 팅에서 밝힌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파울 그 젊은이가 했던 생각대로 왕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스노리 노인과 동료들의 임무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당장 지원의 흔적은 물론이요, 스노리 노인 소싯적의 그런 모험담을 들은 사람도 없었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

우리는 그린란드를 벗어나 노르웨이로 이주할 수 있도록 국왕의 배를 내어 달라 탄원하려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와 아이슬란드는 훨씬 교류가 많았고, 그곳 사정이 우리만큼이나 여의치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오래잖아 우리는 깨달았다.”

노인의 눈은 어느새 밤하늘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방금 전, 바보새 이야기를 할 때 보였던 반짝임은 사라지고 대신 한없는 어둠만이 고여 있었다.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갑자기 추워진 것처럼 느껴졌던 겨울은 모두에게, 비단 우리뿐 아니라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도 많은 괴로움과 놀라움을 일으켰단다.

사람들은 떠들곤 했다. 큰겨울 핌불베트르가, 라그나로크가, 진노의 날Dies Irae이,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노라고.

그리고 비축한 곡식이 떨어지고, 역병이 일어났지.

우리 그린란드에서 사람들 넷 중 하나가 죽을 동안, 노르웨이에서는 절반이, 더 북쪽에서는 셋 중 둘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저 똑같이 살아가고, 똑같이 세금을 뜯기고,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얼어죽고 굶어죽을 뿐.”

노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푹 파인 눈두덩을 타고 흘러나온 눈물은 멀리 가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마침내 기다림이 끝나고, 알현의 날이 왔다. 이바르 신부를 따라 우리는 망누스의 아들 호콘(호콘 6세)의 앞에 섰고, 우리 여섯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곳 그린란드 동녘정착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헐값에 처분한 바다코끼리 상아로 산 몇 가지 물건과 함께.

시그리드야. 그곳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떠나온 땅 유럽이다. 세상이 죽어간다고 떠들지만, 실제로 죽어가는 건 사람뿐이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직자도, 임금도, 귀족도, 농노도, 그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며, 죽어갔던 대로 죽어갈 뿐이다. 삶은 점점 가혹해지고 죽음은 점점 흔해지는 데도.

우리는 차마 그런 곳으로 우리의 살아남은 가족과 이웃들을 내몰 수 없었다.*

시그리드야, 그런 곳에 너는 지금, 바깥의 사람들이라면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것을 들고 가려 하고 있다.

만약 네가 우리 사이에서 그러했듯,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배움을 그 책 속에서 꺼낸다면, 네가 피워올릴 희망의 등불은 이곳에서보다 훨씬 거대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림자도 더 크게 드리울 테고.”

시그리드는 스노리 노인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 어떤 고뇌를 안고 살아왔는지도.

욘은 지금 시그리드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중세’라고 불렀다. 그리고 ‘중세’ 다음의 ‘근대’인들은 지금의 이 시대를 암흑기라고 불렀다고 했다.

대체 무엇을 그리 어둡다 말한 것일까. 어쨌든 삶은 이어졌고, 문명은 발전했으며,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 땅의 삼분의 일 불태우기를 굳이 기다리지 않고도 단추 한 번 눌러서 지구 전체를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는데.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시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높고 낮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저의 자리에서 뭔가를 바꿔나갔기에 마침내 ‘가운데 시대’를 지나 ‘지금에 가까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 테다.

그러나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실수와 오해, 분노와 증오, 그리고 죽음이 있었을까.

콜그림은 언제고, 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바친 오래된 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욘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밝은 눈 둘이 모두 멀쩡한 채로 무엇이 무익한 다툼이고 무엇이 피해갈 수 있는 다툼인지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그런 다툼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자신은 언제까지 침묵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입을 열게 될 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무엇을 말하든, 시그리드 그가 두꺼운 책의 표지를 열어 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지식을 겉으로 드러낼 때, 그때 자신의 이미지, 한쪽 팔에 흰 새를 얹은 그 이미지는 단순한 상상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노인네 헛소리에 착한 시그리드 너만 심란하게 되었구나. 이 이야기는 내 앞서 말한 것처럼 그냥 흘려보내려무나.”

시그리드의 심각한 표정을 한 발 늦게 눈치챈 스노리 노인은, 평소의 그 사람 좋은 노인네 말투로 금방 돌아왔다.

“모든 게 아마 네 계획대로 될 게야. 이 백송고리를 팔에 들고 궁정에 나아가고, 그에 감명 받은 여왕은 네 솔깃한 이야기를 그대로 귀담아듣고, 그렇게 우리는, 아마 나는 아니겠지만 내 손녀 잉그리드와 군나르 그 놈팽이는 안온하게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

시그리드의 손바닥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게 느껴진 건 그때였다.

보송한 솜털이 부시럭대고, 몇 달 뒤에 시그리드가 익히 본 그 맹금으로 탈바꿈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 자그만 생명 하나가 역시 맹금에게 어울리지 않는 ‘삐약’ 소리로 먹이를 달라 보챘다.

“여기, 먹이 가져왔다.”

스노리 노인이 저의 비법으로 물개 내장을 저며 만든 모이를 품에서 꺼냈다.

건네받은 시그리드가 모이를 잘게 찢어 입가에 가져다주니, 바보새는 곧잘 삼켰다.

“그나저나, 뭐라 부르고 싶으냐?”

스노리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나마 고민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까지도 그대로 꺼질 줄만 알았던 생명이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삐약대는 것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프Lif요.”

“리프. 삶이라. 좋구나.”

시그리드는 리프에게 모이를 주느라, 스노리 노인의 웃음에 서린 감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1407년 여름, 공식적으로는 신임 가르다르 주교 파견 및 빈란드의 이교도를 참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선교사 파견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시 공식적으로는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을 우두머리로 하는 그린란드 사절단이 헤르욜프스네스를 떠났다.

배 위에 우뚝 서서 마지막까지 손을 흔드는 시그리드, 그 시그리드 양 옆을 지키는 스베인과 파울, 시그리드 옆구리에 끼워진 검은 책 한 권, 시그리드 머리 위를 맴도는 흰 매 한 마리.

이 모든 풍경을 헤르욜프스네스에서 지켜보던 동녘정착지 사람들은, 피요르드를 떠나 동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무언가 엄청난 것이 실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에 실린 예물의 양은, 지난날 알프 주교를 태우고 온 국왕의 배가 – 끝내 베르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침몰했다고들 들었다 – 실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했음에도.

다들 그렇게 이런저런 감상에 차 있는 동안, 정작 여름이 오기까지 시그리드가 리프 길들이는 것을 도와주었던 스노리 노인은 다른 생각, 그러니까 지난 겨울의 일에 온 마음을 쏟느라 곶을 지나 사라져가는 배의 모습은 눈에 넣지 못하였다.

솜털 보송한 바보새에게 리프라는 이름을 주는 시그리드.

그 리프라는 이름을 떠올린 스노리는 서녘정착지가 무너지고 오래된 신들의 이름이 삼백 년만에 처음으로 트인 하늘 아래서 불리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라그나로크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가 끝난 뒤 열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갈 한 쌍의 부부, 리프와 리프트라시르Lifthrasir. ‘삶’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스노리는 희미한 기억을 뚫고 떠오른 그 이야기를 도로 마음속에 묻었다. 젊은이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는 것은 노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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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노리 노인이 설명한 것처럼, 아직 날갯짓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의 손을 타게 된 매는 제대로 된 맹금의 습성을 익히지 못한다고 합니다. 중세 그린란드에서 이런 새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고증할 수 없지만, 당시 서유럽에서는 이런 매를 ‘niais’(둥지를 뜻하는 라틴어 nidus에서 유래. 현대 영어에서는 eyass)라고 불렀고, 이는 현대 프랑스어에서도 ‘물정 모르는 사람’ 내지는 ‘바보’의 의미로 통용됩니다.

* 중세 유럽에서 이처럼 세상 만물에 격식과 형식을 부여하려는 사고방식은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모든 계층에게 각각 어울리는 맹금이 있다는 이 구절의 내용은 15세기 유럽 상류층의 취미생활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 『성 알반의 서Book of Saint Albans』에서 인용했습니다.

* 이바르 바르다르손은 1341년 노르웨이를 출발해, 이십 년가량을 그린란드에서 보낸 후 1363년 본국으로 복귀합니다. 그가 당시 제출한 보고서는 14세기 그린란드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서 다루어지고 있지요. 이 무렵 호콘 6세 – 마르그레테 1세의 부군 – 를 알현한 플랑드르 상인은, ‘그린란드에서 온 두 성직자와 여섯 속인俗人’이 자신 전에 국왕을 접견했노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노리 노인의 이야기는 이를 근거로 창작한 가공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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