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물 위의 다리 (3)
2. 험한 물 위의 다리 Bridge Over Troubled Water (3)
굳이 팅벨리르Thingvellir까지 가지 않아도 여기서 알팅그를 열 수 있을 만큼 아이슬란드의 유력자들이 거의 다 모인 스칼홀트 성당.
아이슬란드와의 연줄은 총독 비그푸스와 몇몇 뒤 구린 상인들이 전부인 브리스톨의 리처드로서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 사람들하고 말이 통하겠습니까? 딱 보아도 우리 말은 한 마디도 안 들을 기색인데요.”
“아무리 언어가 달라도 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꺼내면 되지요.”
생각보다도 더 험악한 분위기에 살짝 얼어붙은 것은 시그리드도 마찬가지였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것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곧 토르스테인과 그 아버지 올라프가 나타나고 – 토르스테인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 마음고생 외에 딱히 시달린 흔적은 없는 파울 신부도 다른 이들에게 붙들려 나왔다.
개중 딱 보아도 자신이 남들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듯한 사내 하나가 곧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운을 떼었다.
“아이슬란드의 모든 교역은 베르겐 상인들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노르웨이 왕 사이의 오래된 약조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지만 어찌 약조를 쉽게 어길 수 있겠느냐? 더구나 탐욕스러운 잉글랜드인들은 우리와 말이 다르고, 섬기는 왕도 다르다.
자비로우신 신께서는 그분의 피조물이자 자식들인 우리를 위하여 항상 베풀어주신다. 그리고 이 섬을 둘러싼 바다의 생선은 바로 우리 아이슬란드 사람의 몫이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 사람들이 연명케끔 해주는 이 어장에 저들 잉글랜드인들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잉글랜드인들과 결탁한 혐의에 대해 자백코자 나온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여, 이를 깊게 생각하며 일말의 감춤 없이 실토하도록 하라.”
“문제가 된 나침반은 제가 잉글랜드 사람의 후손에게 배운 방법으로 직접 만든 것입니다.”
시그리드의 똑부러진 목소리가 홀의 높은 천장에 닿아 울렸다.
“그렇다면 잉글랜드인과의 결탁을 인정하는 것인가?”
“제가 아이슬란드에 닿기 전까지는 이 섬에 잉글랜드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잉글랜드인과 공모한 사실이 있느냐 물으신다면, 네, 사실입니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모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그리드가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살살 일어났다.
“나침반으로 인해 엉뚱한 혐의를 받게 된 이후, 저는 여기 이 브리스톨의 리처드와 만나 논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앞에 모두의 이익을 위한 제안을 하고자 이렇게 출두하였습니다.”
이 자리는 제안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누군가 언성을 높이려 하였으나, 미리 공모한 대로 때맞추어 총독 비그푸스가 아주 거하게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묻혀버렸다.
“브리스톨의 리처드, 지금부터 진실을 말할 것을 신 앞에 맹세하겠습니까?”
“예, 맹세합니다.”
이제 와서 계획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 리처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은 잉글랜드에서 이곳 아이슬란드로 떠나올 때, 뒤에 어선들을 거느리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어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대구를 잡고 있습니다. 잡은 대구를 말려서 보관하면, 굳이 그때그때 항구로 돌아갈 것도 없이 선창이 가득 찰 때까지 조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잡은 대구는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깁니까?”
“그것은... 시세에 따라 다릅니다. 잉글랜드를 넘어 해협 건너 땅으로 가면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고요. 물론 그쪽 상인들이 우리와 직접 거래해준다는 전제 하에서지만요.
브리스톨에서만 대구를 판다고 가정하면, 배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 선원들을 고용하는 비용, 암염을 사들이는 비용 등을 모두 감안하면 대략 두세 배 이익이 남습니다.”
그러자 좌중은 노기어린 목소리로 가득 찼다.
세상에 정해진 부富의 양은 일정하다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그러므로 그들 땅에서 조업을 하여 그토록 큰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슬란드에서 많은 재물을 도둑질한다는 것과 같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둑놈 같으니!”
“음험한 잉글랜드 자식! 어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툭하면 저들의 조상과 혈통을 자랑하면서도, 한창 바이킹들이 영국을 유린할 때 저들의 조상들도 슬쩍 거기 가담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편리하게 잊어버리는 아이슬란드의 유력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분개하면 분개할수록, 점점 논점은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사람들에게서 잉글랜드 어선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한창 성토하는 이들 사이에, 또랑또랑한 시그리드 목소리가 다시 퍼졌다.
“정 그렇게 억울하시다면, 여러분께서 직접 이 일에 뛰어드는 건 어떨까요?”
“뭐라?”
“잉글랜드인들뿐 아니라 이곳 아이슬란드 사람들, 거기에 우리 그린란드까지. 우리는 땅을 빌려주고, 생선을 말리고 염장하는 일을 맡는 거에요. 이곳 아이슬란드는 목재가 부족하지만,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의 계획대로 빈란드 땅을 개척하게 되면 그 문제도 해결되겠지요*.”
“지금 우리에게 잉글랜드인들과 결탁할 것을 권하는 겐가? 오래된 약조는...”
시그리드가 곧 검은 책을 끄적이며 숙달한 솜씨로 그린 도표 하나를 펼쳤다. 어설프게 이해한 비교우위론을 바탕으로, 전 아이슬란드가 대구 무역에 뛰어들 때 올릴 수 있을 예상 수익을 도식한 그림이었다.
(아직 태어나려면 한참 남은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 역시 잉글랜드 사람이기는 했다.)
“고작 양모 약간을 받아내느니, 건어물 장사로 올린 높은 소득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는 쪽을 로스킬데의 임금님도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그린란드와 마찬가지로, 이곳 아이슬란드도 외부와 교역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섬이에요. 그리고 모든 교역은, 항상 자신의 우위를 극대화할 때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법이지요.
아이슬란드에서 고기잡이에 투입할 수 있는 모든 인력과 재화를 모으고, 잉글랜드 어선들까지 끌어들인 다음, 그렇게 얻은 대구를 팔아 그 돈으로 곡식과 꼭 필요한 물품들을 들여오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 보시다시피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익이 아이슬란드의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을 테고요.”
시그리드의 설명 솜씨는 아직 욘에게 한참 미치지 못했고, 또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논리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시그리드가 리처드에게 단언한 것처럼, 탐욕은 언어와 논리를 초월하는 법. 바벨탑이 무너지고 언어가 달라진 뒤에도, 어쨌든 금과 은은 만국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던가.
솔깃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몇몇이,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총독 비그푸스와 그의 수하들은 청중 사이에서 열심히 바람잡이 노릇을 했고, 저의 아들이 이 일에 연루된지라 어쩔 수 없이 그린란드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던 토르스테인의 아버지 올라프도 이때다 싶었는지 여기저기 말을 걸었다.
“조용! 어찌 성당에서 탐욕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스칼홀트 주교 욘이 목소리를 높였다. (청빈의 교리를 설파하는 수도회 사람들 여럿을 이단으로 몰아 불태우곤 하던 교황청이 듣는다면 이단으로 의심할 법한 소리였다.)
“그런 주교께서도 여기 성당에서 베르겐 상인들과 만나 상담(商談)을 잘만 나누시던데...”
“누구야! 방금 누가 그런 말을 했는가!”
“정숙하시오! 정숙! 논의가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으니, 그린란드인들과 잉글랜드인들의 공모에 관한 논의는 잠시 멈추도록 하겠소!”
그렇게 스칼홀트에 모인 모든 아이슬란드 유력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 머나먼 바다에서 놀라운 부를 건져내는 이 흐름에 동참하여, 시그리드가 구상한 회사의 방안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총독 비그푸스와 욘 주교는 화해하고, 연중 흐리던 하늘은 밝게 개고, 햇살이 아이슬란드의 들판을 비추고, 백송고리 리프는 제가 노래하는 새라도 된 것처럼 지저귀고.
... 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칼홀트를 뒤집어 놓은 그 모임 이후, 시그리드가 다시금 불려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나침반은 핑계에 불과했고, 중요한 것은 잉글랜드인들과의 교역 하나뿐이었으니까.
곧 팅벨리르에서 알팅그가 열리고, 이틀간의 논쟁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잉글랜드인들의 왕래를 막고, 아이슬란드의 대구는 오로지 아이슬란드 사람들만 잡고 또 팔 수 있도록 로스킬데 궁정의 확언을 받아오기로.
자본의 논리에 무지한 것이 죄는커녕 정상인 지금의 시대에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말로 대구가 바깥 세상에서 그리도 비싸게 팔린다면, 아이슬란드 사람 – 보다 정확히는, 아이슬란드의 유력자들 – 이 이를 독점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다. 무엇하러 그 이익을 외지인과 나누겠는가?
그리고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려난 그린란드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냥 그대로 아이슬란드에 남겨지게 되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시그리드와 스베인이 머무는 총독의 집에 머리 긁적이며 나타난 상인 토르스테인의 말이었다.
“아니, 우리랑 약속을 하지 않았소? 분명 덴마크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셨잖소?”
“배를 구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아버지께서, 이제 이 일에는 엮이지 말라고 엄명을 놓으신지라... 나침반 값으로 받은 바드말 절반은 그대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옷감 따위가 중하오? 로스킬데로 여왕인지 국왕인지를 뵈러 갈 것 아니오? 설마 날아갈 심산은 아닐 테고 배를 띄울 텐데.”
“하지만 거기에 우리 자리는 없겠지요.”
낙담한 시그리드 말에, 발끈하던 스베인도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어색하게 두 사람을 둘러보던 토르스테인은 작별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슬쩍 빠지고, 문은 야속하니 쾅 닫혔다.
“기운 차려라, 인석아.”
스베인이 시그리드의 축 처진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이제 어쩌죠?”
이방인 욘이 사라진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항상 저의 뜻대로 해내 왔던 시그리드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욘에게도, 또 리프를 처음 만난 날 스노리 노인에게서도 들은 바 있던 시그리드였다. 허나 듣기만 하는 것과 눈앞에서 겪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사실 우리나 욘 그 사람의 수완을 아니까 그 책에 적혀있는 것을 믿는 거지, 사정 모르는 남들이야 의심부터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
어쨌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지 않았니. 마음 조급해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라. 혹시 아니, 그러다 보면 또 네가 전에 한 것처럼 뭔가 번쩍하는 생각을 해낼 수도 있을지도.”
언변이 달리는 스베인에게 사람 달래는 재주가 따로 있을 리 만무했다.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 그 덩치에는 영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나, 다행히 이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 궁색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스베인이었다.
“여차하면 뭐, 여기서 한두 해 더 지내보지. 보아하니 저 잘난 귀족들이야 우리를 고깝게 여겨도, 우리네 나침반 사간 보통 사람들은 꽤 너를 좋아하는 눈치던데.”
총독도 비슷한 말을 했더랬다.
‘이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건 맞지만, 어쨌든 잉글랜드인들이 나타난 게 우리 모두에게 손해만은 아닐 수도 있음을 확실히 알리긴 했소.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대로 사람들의 여론을 모으다 보면 반드시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력자들의 뜻을 꺾을 수 있을 게요. 알팅그라는 게 사실 겉보기처럼 모든 자유민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팅벨리르에 모인 청중 태반이 한목소리를 내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압박이 되거든.’
“내가 총독 그 사람 말을 제대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그런 뜻이었다.”
그때, 문간에서 사람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나침반이라는 기물 하나 때문에 이 소란이라니.”
알팅그가 끝나고, 딱히 가둬놓을 명분도 없어진지라 어영부영 풀려난 파울 신부였다.
“파울 신부님!”
풀 죽어 있던 시그리드가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다.
“죽지도 않고 돌아오셨구만.”
투닥거리던 끝에 – 죽어도 인정은 않겠지만 – 슬쩍 이 호리호리한 신부에게 정 붙인 스베인이 짐짓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아, 오다가 받은 게 있다. 사람들이 시그리드 네 얘기를 하면서 내게 건네주더라.”
“네?”
파울 신부가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사이에 한 번 바다안개가 자욱하게 낀 적이 있던 모양이다. 나침반 덕에 목숨 건진 사람들이 내게 찾아와 얘기하더구나. 나침반 값을 너무 조금 낸 것 같다면서, 꼭 시그리드 네게 전해달라던데.”
알팅그 결과와 더불어 시그리드가 잉글랜드 사람에게 배운 비법으로 나침반을 만들었다고 밝혔다는 이야기도 함께 퍼진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한 분은 집안 명물이라며 하우카르틀*을 권하던데, 사양하고 마음만 받겠다고 했단다.”
파울이 내놓는 것들은, 정말로 별것 아닌 사소한 물건들이었다. 아이슬란드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나왔음이 틀림없는, 바드말 약간, 건량 조금.
문득, 이루어낸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책하던 시그리드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쨌든 무언가 하나는 해내지 않았던가? 그린란드보다 아주 약간 나은,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을 뿐이던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나침반을 싼값에 보급했고, 그 덕에 바다안개와 폭풍 속에서 죽어나갔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빈궁하게 살아가야 했을 아이들은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들 모두는 조금씩, 저도 모르는 사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힘써 나아가게 될 테다*.
지식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 지식이 퍼질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과 다툼을 자신의 순진함으로 인해 과소평가했을 뿐.
만약 시그리드에게 조금 더 그럴듯한 작위나 명예가 있었다면, 베르겐의 상인들은 구멍가게 주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산이 있었다면, 소위 유력하다는 자들조차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힘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면, 그때는 결코 이런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더 강해지는 길밖에 없었다. 욘의 책 속에 담긴 지식으로써 모두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멸망이 예정된 그린란드와 그곳에 사는, 시그리드가 사랑하는 친척과 이웃들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는.
“저기, 시그리드야?”
“신부님, 시그리드 혼자 생각에 빠지게 내버려 두십시다...”
그러나 스베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그리드는 벌떡 일어났다.
“리처드를 다시 만나러 가야겠어요. 함께 가주시겠어요? 저 혼자 가면 험한 소리를 듣기 십상일 테니까요.”
다행히 아직 브리스톨 사람 리처드는 그 후미진 피요르드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가 거느리고 온 듯한 어선들도 여러 척 피요르드 안쪽에 들어와 있었는데, 모양새를 보아하니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채비를 하기 위함인 듯하였다.
그 난리를 겪었으니 우선은 철수하고, 한 이삼 년 뒤에 다시 눈치를 보아 조용히 돌아오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일 테다.
하늘에 붕 떠서 시그리드 일행을 따라오던 리프는, 피요르드 내려다보이는 길목에 시그리드가 도착하자마자 삑삑 울어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험악한 기세의 리처드가, 이번에는 저의 잉글랜드 선원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말이 선원이지, 수틀리면 해적으로도 돌변할 수 있을 법한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잘도 다시 나타나셨군요. 이제 어쩔 겁니까, 예? 공연히 긁어부스럼만 만들어서 곤란하게 되었잖습니까!”
거침없이 올라가던 리처드의 언성은, 시그리드 뒤에서 도끼 짊어진 채 나타난 스베인을 보자 그제야 겨우 낮아졌다.
“그렇다고 이곳 아이슬란드에서 고기잡이하는 걸 포기하실 생각이신가요?”
“그야 당연히 아니지요. 이대로 돌아간 다음에 한 이삼 년 있다가 돌아오면 그만일 겝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슬란드의 높은 사람들에게 단단히 찍혔으니, 이제는 더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 피요르드 주변에 뿌릴 입막음 값도 껑충 뛰어오를 테고요. 그러면 얼마나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할지 아십니까? 저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실 겁니까?”
잉글랜드 어부와 상인들이 타고 다니는 것은 아이슬란드의 보잘것없는 고기잡이배보다야 훨씬 나은 코그지만, 그런 코그라 할지라도 난바다에서는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특히나 그 옛날 바이킹들로 하여금 크라켄Kraken의 전설을 만들어내게 했던 아이슬란드의 거칠고 예측불허한 바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안전한 항만이 필요합니다. 먹거리야 잡은 대구를 그대로 먹으면 되니 상관없지만요. 그런데 이제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러다가 아예 저쪽 덴마크 여왕이 우리네 국왕께 배 보내지 말라고 얘기라도 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성이 그렇게 모험심 가득한 이는 못 되는지, 한 번 악에 받쳐 시작한 리처드의 하소연은 구구절절 이어졌다.
“이렇게 한 번 그쪽 말 믿고 따라갔다가 큰일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네?”
“그런 항만이 있기는 한데요.”
시그리드에게서 의외의 답변이 나오니, 열변 토하던 리처드의 말이 툭 끊겼다.
“간혹 유빙이 조금 떠내려오기는 하고, 한겨울에 쓸 수 있는 포구는 딱 한 군데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무도 안 건드리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진작에 우리네 상인이든 어부든 찾아갔겠지요.”
“사실 바스크, 그러니까 나바르Navarre 사람들은 몇 번 왔다 가긴 했는데요.* 여하튼 들어보세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유명한 말도 있잖아요.”
욘이 종종 주워섬기던 표현 중 하나였으므로, 스베인과 파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에게는 금시초문이었는데, 훗날 그는 브리스톨로 돌아간 뒤 ‘이런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이 무식쟁이야’라는 말머리를 붙인 채 저 ‘속담’를 재인용하게 될 터였다.)
“아이슬란드의 보통 사람들 생각을 바꾸는 거에요.”
“그걸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린란드가 잘 살면 되지요. 지금이야 서로 교류가 거의 끊어졌지만, 그럴듯한 배편만 생긴다면 못할 것 없지 않겠어요? 옛날에 그랬다는 것처럼 그린란드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오는데, 올 때마다 돈을 뿌리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그게 저희와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 아이슬란드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그린란드 남쪽 끝에 제가 온 마을이 있어요. 크노르로는 오가기가 어렵지만, 코그라면 사정이 훨씬 나을 거에요.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라는 이름을 대면,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테고요.”
“값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바다코끼리 상아는 대구보다는 값을 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백송고리나 물개 가죽도 있고요.”
파울 신부가 때맞춰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을 선원으로 쓰는 거에요.”
“네? 하지만...”
“오래된 약조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베르겐 상인들 외 다른 이들과 교역하는 걸 막고 있다지요? 하지만 그린란드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제한이 없답니다.”
마냥 순진하기만 해 보이던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거의 베네치아나 피렌체 상인에 가까운 편법 이야기에 리처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인의 본능은 그대로인지라,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상인답게 이익과 손해를 대조하며 장래의 수익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었다.
“후, 좋습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믿어보도록 하지요. 어차피 앞으로 이삼 년은 여기 아이슬란드를 오가기 어려울 테니까요.”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이왕 이렇게 거래하는 김에 한 가지 소소한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로스킬데나, 꼭 로스킬데는 아니라도 이곳 아이슬란드 밖으로 나가는 배편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리처드가 그 호의에 어떤 대가를 붙일까 고민하기도 전, 그를 따라온 뱃사람 무리 사이에서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있습니다, 그 배편.”
시그리드의 20세기 미국식 영어보다도 더 이색적인 억양과 문법. 얼핏 들어도 아이슬란드인이나 잉글랜드인은 아니었다.
“프랜시스, 자네가 나설 때가 아닐세.”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부하가. 협업하는 사이지요, 우리는.”
그러고는 리처드 옆으로 슬쩍 나와, 먼저 손을 건네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라고 합니다, 저는 기푸즈코아Gipuzkoa 사람.*”
“기푸즈코아요?”
“저 남쪽에, 나파로아Nafarroa 옆인데...”
“나파로아라면 혹시 나바라Navarre 말씀이신가요?”
“아, 부릅니다, 그렇게도.”
나바라와 그 일대. 즉 바스크 사람이었다. 독특한 문법와 어투, 그리고 딱 보아도 주변의 잉글랜드 사람과는 달라 보이는 용모는 그 때문이리라.
“그린란드라는 곳 드나들며 고기 잡는 것,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하지만 결정하는 것, 혼자는 못 합니다. 어차피 가야 하니, 우리 대장께, 함께 가시렵니까?”
시그리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 *** ---
* 15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뒤를 이어 아이슬란드 원양어업과 교역에 직접 뛰어들게 된 한자 동맹 소속 독일인들은 실제로 독일 땅에서 목재를 들여와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이캬비크에서 함부르크를 오가는 거리와 래브라도나 뉴펀들랜드를 오가는 거리는 거의 비슷하지요.
* 하우카르틀Hakarl은 독성을 띄기 때문에 날로는 먹을 수 없는 그린란드상어 살코기를 어떻게든 식량으로 쓰기 위해 발효건조시킨 음식으로, 삭힌 홍어와 비슷하게 암모니아가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 원 역사에서도 영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15세기 중반부터 아이슬란드인들은 활발히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비록 부족한 인구와 턱없이 달리는 본국의 힘으로 인해 유럽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기록은 브리스톨이나 헐Hull 등 잉글랜드 항구 곳곳에 아이슬란드인들의 무역 거점이 생겨났음을 증언하고 있지요.
* 유럽에서 최초로 대규모 포경업을 시작한 바스크인들은, 잔혹할 만큼 효율적인 포경 기법으로 인해 이미 15세기 즈음에는 그들의 첫 활동 근거지였던 비스케이 만의 고래를 멸종위기로 몰아넣은 상태였습니다. 이는 바스크 어선들이 더 먼 곳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되지요. 이에 따라 바스크 포경선은 점차 당대 최첨단을 달리는 카라벨의 형태로 진화하게 되고 – 반대로 카라벨과 카락에도 바스크 포경선의 흔적이 여럿 남게 됩니다 – 그 활동 범위는 북해 너머까지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린란드의 헤르욜프스네스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15세기 초 남유럽 유행을 모방한 흔적이 역력한 두건은 바스크 어선 선발대가 그린란드에 잠시 들렸을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후 16세기에 이르게 되면 바스크 포경업자들은 아예 래브라도와 뉴펀들랜드에 포경업 전초기지를 세우게 되고, 이 일대가 더 거대한 자본과 군사력을 등에 업은 유럽 열강들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북아메리카 동해안에서 성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에도 많은 바스크인들이 왕래하였는데, 그 결과 바스크어-아이슬란드어 피진이라는 유럽 언어 역사상 어쩌면 가장 기묘하다 할 수도 있을 조합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든 상호교류가 그렇듯 늘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1615년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바스크 선원 학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제정된 ‘바스크인 척살법’은 공식적으로는 2015년에 폐지됩니다.)
* 고립어(language isolate)인 바스크어는 인도유럽어족과는 뿌리부터 다른 이질적인 언어로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