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여왕 (1)
3. 춤추는 여왕 Dancing Queen – ABBA (1976) (1)
덴마크 왕국에는 무언가가 썩어 있다.
부왕 발데마르 4세가 신의 곁으로 돌아간 뒤 지금까지 어언 삼십팔 년 세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여왕이자 스웨덴의 여군주. 공식적인 왕위를 양자 에릭에게 넘긴 뒤에도 아직까지 여왕이라 불리는 마르그레테는 그 세월 동안 덴마크라는 환자를 고치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덴마크에도, 노르웨이에도, 스웨덴에도 도려낼 환부는 보이지 않았다. 질병의 이름은 포르투나Fortuna, 세계의 여제Imperatrix Mundi라 불리는 세월 그 자체였으므로.
잉글랜드인들에게는 바이킹이라 불리고, 프랑스인들에게는 노르만이라 불리며 온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북방인들의 시대는 이제 까마득히 흘러가버렸다.
남은 것은, 북쪽 세 나라의 상권을 장악한 탐욕스러운 한자 도시들, 그에 공동으로 대응하자며 칼마르 동맹을 만들어놓고, 정작 한 사람의 국왕에게 힘을 몰아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완고한 귀족들, 저들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주제에 앞으로 무작정 달려나가는 이웃나라들.
“... 그러므로 오직 절제와 균형만이 중요합니다. 한 번 깨진 균형은 쉽사리 되찾을 수 없으며, 균형을 희생하여 얻는 그 어떤 이득도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를 기억하십시오.”
사뭇 정중하게 마르그레테는 기나긴 훈계를 마쳤다.
“예,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모왕母王 폐하’. 하지만 지금 우리는 수업이 아니라, 국무회의Statsradet 중이지 않던가요?”
칼마르 동맹의 군주 에릭은, 성인이 된 후 마침내 양모 마르그레테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당장 지금 국무회의에 들어와 있는 신료들 중 그 누구도 이 자리의 상석에 마르그레테가, 그 옆, 후계자의 자리에 이론상 국왕 에릭이 앉아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지 않던가.
그래, 덴마크 왕국에는 무언가가 썩어 있다. 그러나 마르그레테가 생각하는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썩어 있다.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뭔가 창의적인 비아냥을 떠올리려 했다.
허나 에릭의 소소한 저항은 마르그레테의 입이라도 되는 양 노신 하나가 끼어들면서 금방 끊기고야 말았다.
“국무회의는 국왕 폐하를 보좌하여 나라를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국왕 폐하께서 회의와 자문을 통해 지혜를 갈고 닦으실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국무회의의 목적에 부합합니다.”
“거기까지. 하루는 짧고, 돌봐야 할 국사는 많습니다.”
“예, 폐하.”
돌봐야 할 국사가 많다던 마르그레테가 방금 전까지 제게 기나긴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안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에릭 상대로는 곧잘 나오던 말대꾸가, 마르그레테의 말 한 마디 앞에서는 도통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따분한 국무회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계속 진행되었다. 그놈의 균형, 균형, 균형.
한자 동맹의 수장 격인 뤼베크 시에서 벌어진 소요사태 대처. 독일 해안으로 도망쳐 재기를 노리는 해적들에 관한 대책, 사모기티아Samogitia 지방에서 또 한 차례 피어오르는 반란의 기운...
에릭이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슬슬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던 무렵.
“그리고 기사단국에서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곧 비공식으로 사절을 파견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틀란드 이야기겠군. 누가 온다는가?”
“단치히 시장, 콘라트 레츠카우입니다. 올 여름 회담의 기사단측 대표로 내정된 자이기도 하지요.”
기사단국. 발트해 동안의 주인.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회 등, 북방 이교도를 정복한다는 명목으로 발트해 너머의 영토를 차지한 기사단들은, 그 이교도들이 사라진 지금도 멀쩡히 남아 발트해 무역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현재 기사단국과 덴마크 사이 최대 현안은 10년 넘게 끌어오고 있는 고틀란드 할양 문제였다.
발트해의 요충지 고틀란드는 마르그레테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려 한창 싸우는 틈에 해적들에게 점령당했다.
스웨덴 왕위를 두고 마르그레테와 대립하던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에게 섬의 명목상 통치권을 넘겼고, 걸어다니는 전쟁기계와 같던 기사단은 고틀란드의 농민과 해적 연합군을 단번에 쓸어버리고 섬을 차지했다.
칼마르 동맹이 성립한 이후부터 마르그레테는 줄곧 고틀란드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몇 년 전, 한자 동맹의 중재로 9천 노블Noble을 대가로 기사단이 덴마크에 섬을 할양한다는 조정안이 제시되었고, 원래대로라면 올해(1408) 6월 3일, 칼마르에서 이 안을 논의하기 위한 후속 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절로 내정되어 있는 자가 회담 전 미리, 그것도 심지어 대리인을 보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찾아온다? 기사단이 상당히 급한가 보구려.*”
예정된 회담 이전에 비공식으로 만남을 청하는 것은, 아쉬움과 다급함의 징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식 회담이 열리기 전에 미리 체결을 확정짓고자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튜튼 기사단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무엇인지는, 좌중에서 가장 국사에 어두운 에릭조차 알고 있었다.
“예, 저희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앞서 말씀드렸던, 사모기티아의 불온한 기미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전운이 짙게 드리우는군.”
유럽의 북동쪽 끝을 차지하며 그 너머와의 교역을 독점한 기사단국은, 그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파괴와 약탈을 저질렀다. 이교도들, 그리고 이교도로 지목당한 기독교인들이 숱하게 노예로 붙잡혀 이슬람 세계로 팔려나갔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대로 농노가 되었다.
이는 많은 이익을 남겼으므로, 주변으로부터 (도의적 분노로 치장된) 질투와 미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질투와 미움을 입 밖으로 낼 만한 힘이,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한 사람 아래 연합한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거인이 나타났다. 언제고 적당한 이유, 예컨대 사모기티아인들의 반란 같은 명분이 주어진다면, 새로 탄생한 거인은 기꺼이 팔뚝을 드러낼 것이다.
“다음은 아이슬란드의 유력자들이 탄원한 내용입니다. 접견을 청하면서 그들의 용건을 적어 올렸는데...”
“이미 읽어보았소. 잉글랜드인들이 그 섬에 드나든다는 이야기 아니오? 허나 발트해 동쪽에 모든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잉글랜드와의 관계까지 챙기기는 어렵지 않겠소? 어차피 그리 중요한 섬도 아니니, 우선은 뒤로 미루도록 합시다.”
“폐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로스킬레 궁정의 국무회의에서 봉신과 백성들의 청원을 처리하는 절차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지혜로웠다.
청원자가 얼마나 간절하고 위중한 사안을 들고 왔는지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또 시급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간절함과 위중함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바로 재상들에게 청원자가 보이는 ‘성의’였다. 정말로 급하다면 기꺼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바칠 것이요, 그런 성의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면 애초에 궁정의 관심을 받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영 성의가 부족했던 아이슬란드인들의 청원이 후순위로 밀린 것도, 그들과의 접견이 마르그레테 대신 에릭의 몫으로 잡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저의 그 일정을 떠올린 에릭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다음은?”
“폐하의 관심을 요하는 일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아이슬란드의 유력자들이 나름 곳간을 털어 예물을 모으고, 그들 중 언변과 견식이 그나마 훌륭한 축에 드는 올라프의 아들 토르스테인을 비롯해 여러 훌륭한 사람들을 보냈는데도 이런 취급이었다.
그러니 오늘 아침 로스킬레에 나타난 떠돌이 수사인지 신부인지가 올렸다는, 그린란드가 어쩌고, 대양 너머의 땅이 저쩌고 하는 헛소리가 마르그레테 여왕 앞까지 올라갈 일도 없이 재상들의 책상 밑바닥으로 직행한 것도 순리였다.
“그러면 다시 고틀란드 이야기로 돌아가십시다.”
“예, 폐하.”
“모든 명분과 법리에 비추어 덴마크의 정당한 강역인 고틀란드를 돌려받는 데 구천 노블은 지나친 값이오. 그러니 최대한 저쪽의 급한 사정을 이용해 값을 낮춰보도록 하시오. 단, 지나쳐서도 안 되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중용과 절제를 잊지 마시오...”
구천 노블이면 얼추 이만 프랑. 덴마크의 국가재정을 생각하면 가벼운 돈은 아니었다. 기병과 중장보병을 수만씩 거느린 채 수십 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나 잉글랜드 왕에게는 푼돈이겠지만.
에릭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딴생각을 했다. 중기병 삼천 정도를 대략 한두 달쯤은 움직일 수 있는 돈이라면...
멀리 창가에 이상한 형체 하나가 아른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바닷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흰색 형체.
제왕과 귀족의 사냥매로 쓰이는 백송고리, 큼직한 데다가 멋들어지기까지 한 흰매였다.
포메른에서 보낸 소년 시절, 생부의 손님으로 방문한 무슨 대공이 저런 사냥매를 한 마리 데리고 있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로스킬데에 저런 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던가? 사냥을 즐기지도 않는 마르그레테 할멈이 나 몰래 저런 녀석을 키우고 있었을 리도 없고...’
에릭이 새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동안, 새도 어째 에릭을 궁금하게 여기며 골똘히 쳐다보는 듯했다.
재상 하나가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에릭의 시선은 강제로 국무회의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백송고리 생각뿐. 에릭은 이 따분하고도 무용한 모임이 파하는 대로 저 새의 정체를 수소문할 작정을 하였다.
“리프! 한참 찾았잖니!”
주인 남겨두고 어디 멀리 다녀온 게 잘못임은 아는지, 리프는 발톱 날카로운 매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살포시 시그리드 곁에 내려앉았다.
“거 봐라. 내가 돌아올 거라고 했잖냐.”
“언제 그랬습니까? 기억에 없는데.”
“신부님 귀가 어두운 게요.”
평소처럼 티격태격 다투는 스베인과 파울이었다.
“그나저나 그 청원인지 뭣인지는 아직 소식 없소?”
“내심 기적을 기대했건만, 역시 예상대로입디다. 하기야,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 기적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오크니 제도에서 미콜라스의 포경선을 타고 코펜하겐에 들어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미콜라스의 소개를 받아, 상인 길드 뒷골목, 고래잡이들이 자주 들린다는 여관에 짐을 푼 일행은 시그리드의 설계도대로 시제품을 만들어줄 대장간을 찾았다.
설계도에 그려진 것은 수총hand cannon*으로 쓰기에도 뭣할 만큼 작은 구경의 쇠대롱에 기묘하게 굽은 나무 판을 덧댄 그림. 용도를 의심하는 대장장이에게는, 세상 북쪽 끝 야만인들에게 폭죽 소리로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다행히도 그런 장난감 같은 물건이라면 굳이 길드의 논의를 거치지 않더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흥정 끝에, 품이 많이 들어가는 대롱 안쪽의 홈은 생략하되 값은 조금 헐하게 받는 쪽으로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합의에 이르렀다.
일감이 많기도 하고, 의뢰한 물건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대장장이는 닷새 뒤에 돌아오라고 말했다.
파울 신부가, 이왕 기다리게 된 김에 주변 구경도 할 겸 로스킬데 궁정에 청원을 올리고 오자고 제의한 것은 그때였다.
호메로스와 다윗 왕이 힘을 합해 청원하는 글을 대필해준다 한들, 중간에 보일 성의가 없다면 윗선까지 통할 리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허나 밑져야 본전 아니던가? 그럴 공산이 희박하긴 하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린다면 굳이 총을 만들고 사람을 모을 것도 없이 빈란드 개척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기도 열심히 하셔야겠소. 뭐, 우리야 신부님 덕분에 이렇게 좋은 구경을 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만.”
레이캬비크나 커크월보다도 더 큰 마을 – 파울은 이를 ‘도시’라 불렀지만 시그리드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직 이 낱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 을 보게 된 그린란드 촌놈들은, 이미 세상 구경하는 재미에 잔뜩 맛을 들였던 것이다.
“그러면 돌아가 볼까요? 다행히 아직 짐마차는 떠나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러자꾸나.”
볼 일도 다 보았고, 구경도 다 했다. 로스킬데에 즐비한 수도원 중 한 곳에 식자재와 포도주를 납품하고 돌아가는 짐마차 편으로 그린란드 촌놈들은 그들의 숙소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그린란드 사람들이 이틀간 묵었던 여관에 뜻밖의 귀한 손님이 찾아와, 백송고리를 데리고 다니는 소녀가 혹시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느냐 은화 하나 던지며 묻는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 코펜하겐 서문에 당도해 있던 시그리드 일행은 알 턱 없는 사정이었다.
여기서 지척인 유틀란드에서 ‘검은 죽음’이 다시 일어났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헛소문은 바람을 타고 퍼지면서, 이미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는 사람이 끊어졌다는 둥, 플렌스부르크에서 천사가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둥, 온갖 살이 다 붙었다.
‘회개하시오!’ ‘진노의 날이 왔다!’ 등등을 외치며, 저의 헐벗은 등짝을 성가 가락에 맞춰 채찍질하는 무리가 서문 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구경하러 나오는 이들. 진심으로 눈물 흘리는 이들. 순간의 격정에 휘말려 웃통 벗고 그 광풍 사이로 뛰쳐드는 이들.
미치광이 수도사들은 그 곁에서, 곧 닥칠 종말을 설파하고, 거지들은 구경꾼들 사이를 쏘다니며 구경한다. 잡상인들이 거두어들인 고아 아이들은 몇 푼 되지 않는 싸구려 방물 따위를 판다고 고래고래 악을 지른다.
그 사이로, 얼마 전 선포된 농노법Vornedskab의 굴레를 피해 코펜하겐 시내로 들어가려다 성문 앞에서 붙잡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은 농노들 곁에서, 그들을 붙잡은 불량배들은 뒤쫓아온 지주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약속된 금액보다 더 많은 보수를 줄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이제 농노들이 잡혔으니 볼 일 다 보았다며 지주들이 대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욘은 지금이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그 문턱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암흑기’라고 부르게 될 중세.
욘이 옛날에 읽었다는 어느 책에서는 지금을 ‘중세의 가을’이라고 불렀다던가.
그러나 지금이 정녕 가을이라면, 그것은 욘의 이야기로만 들었던 수확의 계절 가을이 아닌, 느닷없는 혹한에 사람이 죽어나가고 배가 가라앉는 시련의 계절 가을, 그린란드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런 가을인 듯했다.
그 모든 소란을 뚫고, 전직 해적이라는 소문 도는 험악한 인상의 주인장이 운영하는 그들의 여관에 돌아온 시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제가 맡긴 총이 완성되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에요.”
검은 책에 담긴 미래의 지식을, 그들의 뜻대로, 남의 뜻에 휘둘리는 일 없이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예컨대 언제고 천연두가 돌 때, ‘소의 종기에서 나온 고름을 몸에 넣으면 된다’라고 시그리드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다행일 테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여느 권력자의 판금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총을 들고 한다면, 그때는 가장 오만한 권력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암만 신통한 무기라 해 보았자 고작 한 자루 아니냐. 무얼 할 생각이니?”
“아직은 아이슬란드에서 벌어들인 돈이 조금 남았으니까, 몇 자루 더 만들고 화약이랑 탄환까지 마련할 수 있을 거에요. 미콜라스 아저씨도 조금 더 보태주기도 했고요.”
“용병단을 꾸릴 생각이로구나.”
바깥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 그나마 밝은 파울 신부였다.
보통은 타인의 재물을 훔쳐내는 것을 범죄라 부르지만, 영주나 자유도시에게 밉보인 사람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 이전을 하는 것은 정당한 일에 속했다.
개중에는 정말로 불의한 사람도 있기 마련. 그런 이들을 먼저 손봐주어 돈을 벌고, 그것으로 다시 더 큰 무리를 꾸리고, 그렇게 반복하여 마침내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가 말하던 조건 중 하나, ‘사람 모으기’를 달성한다.
“맞아요. 이렇게나 풍요로운 동쪽 땅 유럽에 이토록 불행이 넘쳐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을 기회로 삼는 수밖에 없어요.”
미래의 지식에 해박한 욘이었지만, 이 무렵, 그러니까 15세기 초의 북유럽 역사에는 밝지 못했다. 이 무렵의 유럽사란, 프랑스 땅에서 벌어지는 백년전쟁, 멀리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질 로마의 멸망, 그리고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아다니는 사기꾼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으므로.
그렇지만 언뜻 생각해도, 이곳 덴마크라 한들 용병의 일감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 여기 여관 바깥의 대로변에만 나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해적과 전쟁 이야기였으니.
“우리가 처음 헤르욜프스네스를 떠날 때 품었던 계획에서는 꽤 많이 벗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손으로, 그리고 우리의 뜻대로 빈란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이 길뿐인 걸요.
원하신다면 돌아가셔도 좋아요. 바스크 고래잡이들 중에 자신이 직접 그린란드까지 가보겠다고 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요.”
그만큼으로도 그린란드는 근근이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끊겨버린 외부와의 교류가 어느 정도는 재개되는 셈이니, 갑자기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변의 물개가 동나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터.
이만큼만 해도 동녘정착지에서는 몇 년은 끊이지 않을 얘깃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만족하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한 시그리드와 함께 계속 어디론가 나아갈 것인가?
그날 밤 여관에서의 대화 이후로 다시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베인의 고민은 이어지고 있었다.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왕 바깥 세상으로 나온 길에 끝까지 다 보고 가야죠.”
“이놈아, 너는 돌아가봤자 빈털털이 뜨내기지만 나는 아니잖느냐.”
“그리 말씀하시니 퍽 서럽습니다.”
콜그림이 툴툴대는 시늉을 했다.
“서러우면 갈라서든가. 언제는 내 언변이 좋아서 네놈이 내 아랫사람 노릇을 했느냐?”
시그리드 말마따나, 바스크인들과 잉글랜드인들에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조업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린란드를 소개해준 것만으로도 그들은 꽤 큰 성과를 낸 셈이었다.
동녘정착지 바깥 세상의 소위 권력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힘의 편린을 곁다리로나마 지켜본 스베인 머릿속에는, 자신도 그렇게 부흥하는 동녘정착지에서 우두머리 노릇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 넓은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갈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그 책에서 어떤 경이가 또 튀어나올지,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그곳에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
“에라이, 되었다. 고민은 나중에 실컷 하련다.”
“지금은 뭐 얼마나 바쁘시다고...”
“시끄럽다. 저기 저 대장간이나 잘들 감시하고 있으래두.”
시그리드에게 저 대장간 주인이 약조한 기한이 다 되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기껏 만든 ‘머스킷’ - ‘라이플’보다 만들기가 쉬운 총을 그렇게 부른다고 시그리드는 말했다 – 을 누가 훔쳐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시그리드와 파울 신부는, 때마침 코펜하겐에 들린 다른 바스크 원양어선들에게 지난번 그 계획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달라는 미콜라스의 부탁을 받은지라, 지금쯤 한창 그들 머무는 여관에서 그 유창한 말재간을 발휘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총이 무사히 완성되어 시그리드 앞에 놓일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은 스베인의 몫이 되었다.
“다들 의심이 심하다니까요. 아니,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신무기라면서요. 그런 걸 누가 탐냅니까?”
콜그림이 막 투덜대던 차, 스베인 눈에 얼핏 봐도 대장간과는 별 연이 없을 듯한 귀공자 하나가 수행원 두엇을 거느리고 길 건너편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야, 야. 저기 저놈 봐라. 어째 무위도식하는 놈팽이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저런 놈이 왜 저런 데를 들어가지?”
금방 답이 나왔다. 안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무리 보아도 그 ‘총’처럼 생긴 것을 들고 나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들 앞에서 길잡이 노릇하는, 족제비 닮은 녀석 하나가 어딘가로 손짓하며 그들 무리를 뒷골목으로 이끌고 있었다.
“뭐야. 대체 왜...”
“쉿, 시끄럽고. 저놈들 뒤를 따라가자. 시그리드가 도둑놈들 잡는 걸로 우리네 용병단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지 않았더냐?”
“괜찮겠습니까요?”
“야, 저놈들은 넷이고 우리는 여덟이다. 어디 뒷골목 들어갈 때 에워싸고서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스베인네 패거리가 북녘사냥터에서 스크렐링 사냥꾼들과 숨바꼭질하던 그 솜씨로 코펜하겐 뒷골목을 따라 귀한 집 놈팽이(가칭) 무리를 추격하던 중, 콜그림은 뭔가를 깨달았다.
“저기, 저놈들 어째 가는 방향이...”
“우리 묵는 여관 쪽이로구만. 거 봐라, 수상한 놈들 맞지 않느냐.”
수상한 놈들은 우선 족치고 보는 것이 척박한 극북의 법도다. (어쩌면 스크렐링들과 그들 그린란드 사람들이 서로 척지게 된 것도 그 법도 탓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저쪽도 평소 뭘 하고 사는 놈들인지 어째 눈치가 빨라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저러다가 저놈들이 먼저 여관으로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어쩔 수 없지. 놈들이 여관 들어가면 그 뒤를 덮친다. 시그리드도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으니까. 콜그림, 군나르, 너희 둘은 뒷문 쪽으로 가서 그쪽을 틀어막아라.”
스베인은 나머지 여섯을 거느리고 여관 앞쪽으로 향했다.
안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그대가 주문한 물건이 맞소?”
“뭐예요, 돌려주세요.”
“하하, 맨입으로는 곤란...”
스베인은 가장 먼저 문을 열어젖히며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잡았다, 요놈! 얘들아, 족쳐라!”
그리하여 칼마르 동맹의 이론상 군주 에릭은, 모처럼 잠행을 나왔다가 저의 이론상 신민인 그린란드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스베인으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으면 임금이고 황제고 우선 때려잡고 보던 조상들의 미풍양속을 뜻하지 않게 계승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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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그레테 1세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고틀란드 반환은, 원 역사에서는 1408년 9월 공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한자 동맹의 중재안에 따라 칼마르 동맹은 9천 노블(잉글랜드에서 발행한 고액 금화. 금으로 환산시 70.2kg)을 지급했고, 기사단은 자신들이 그간 고틀란드에 구축한 방어시설을 따로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덴마크 측에 섬을 인계하게 됩니다. 콘라트 레츠카우는 칼마르에서의 회담에 기사단 대표로 참석했는데, 회담의 사전협의를 위해 로스킬레를 방문했다는 것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 로스킬데(덴마크어: 로스킬레)는 대략 11세기경부터 덴마크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로스킬데 주교령 코펜하겐이 상업도시로 더 번영하고 있었지만요. 이후 에릭이 폐위당한 뒤 그 뒤를 이은 크리스토페르 3세가 불타버린 로스킬데에서 코펜하겐으로 – 1417년 에릭에 의해 코펜하겐은 국왕령으로 편입됩니다 - 천도를 결정하면서 로스킬데는 옛날의 영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 핸드건handgonne이라고도 하는 수총(핸드 캐논)은 화승총의 조상에 해당하는 소형 화포입니다. 개인화기라기보다는 사람이 휴대할 수 있는 소형 화포에 가까운 개념인지라, 15세기 중엽, 화약무기 운용 경험이 쌓이면서 본격적으로 개량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보조적인 역할로만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