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여왕 (2)
3. 춤추는 여왕Dancing Queen (2)
가끔 로스킬데를 방문하곤 하는 궁정시인 민네쟁어Minnesaenger들은, ‘첫눈에 일어나는 격정’이니 ‘눈앞이 번쩍 뜨이는 기적’이니 하는 상투어로 사랑을 노래하곤 했다.
에릭이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를 처음 만났을 때 겪은 것이 바로 그런 엄청난 충격, 눈앞이 번뜩이면서 짜릿하고도 아린 무언가가 온몸을 휩쓰는 경험이었는데, 훗날에는 다르게 회상하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시그리드의 미모가 아닌 스베인의 몽둥이가 그 원인임이 명백하였다.
경호하는 사람을 더 붙일 것을 계속 권했으나 에릭의 그 악명 높은 고집*으로 인해 결국 두 명밖에 따라오지 못한 수행원들은, 그제라도 저들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양 숨겨둔 칼을 뽑았다.
“이 괘씸한 놈들!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불충한 불한당들아! 이 죄는 목숨으로 갚아라!”
임금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위업을 이룬 저의 몽둥이를 다시 들어올리며 스베인이 따져물었다.
“덴마크에서는 도둑놈을 족치는 게 목숨으로 갚아야 할 죄요?”
“그 죄목에 또 다른 무도함을 더하는구나! 이분은 바로 너희 모두의 주군이신 에릭 폐하시다!”
“나는 그런 양반을 왕으로 선출한 적 없는데.”
1389년 노르웨이의 귀족들이 모여 에릭을 ‘에릭 3세’로 추대할 때 그린란드 사람은 누구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고대의 관습에 비춰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왕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로만 겨우 들어 알던 콜그림과 여타 그린란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울 신부나 여관 주인은 흠칫 놀랐지만, 파울은 워낙 표정이 점잖고 해적 출신이라는 여관 주인은 워낙 험상궂어 놀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저들의 임금 목도 쳐본 적 있는 잉글랜드 족속들 중에서도 반골과 별종들끼리 따로 튀어나와 세운 나라 출신인 욘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배웠다. 국왕의 어깨에 실린 권위와 권력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국왕이나 자신이나 다 같은 사람이라 철석같이 믿는 시그리드였다.
그러므로 이 무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에릭과 그 수행원들이 더욱 당황하게 되었다.
“그, 그러니까 네놈들은 국왕 시해를 범할 뻔하였다. 그것도 이곳, 로스킬데가 지척인 코펜하겐에서 말이다! 순순히 죄를 인정한다면...”
그때 시그리드가 한 발짝 나와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커크월에서 자기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상기하며 내는, 태연함 가장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순간 정적이 내렸다.
“저기, 국왕 시해에 대한 벌은 사형이지요?”
“당연히 그렇지.”
에릭이 선뜻 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여관에는 에릭 폐하와 두 분 수행원을 제외하면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이랑 바스크 고래잡이들 뿐이고요.”
“잠깐, 그 말이 참이냐? 그러면 그 백송고리는 대체 어떤 영주의 것이기에...”
에릭의 말을 무시하고 시그리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거래를 하지요. 방금 전 일을 없던 걸로 하고, 지금 들고 계신 그 총을 넘겨주세요. 대체 무슨 뜻으로 우리가 합법적으로 벌어들인 재물로 주문한 물건을 훔쳤는지도 해명해 주시고요.
폐하, 저희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이대로 국왕 시해미수 혐의를 받고 사형당하는 것보다는, 우선 여기서 조용히 입막음을 한 다음 부리나케 도망치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이러나 저러나 죽을 판이라면야, 그게 합리적이겠지요.”
“어림도 없는 소리! 폐하, 명만 내려주시면 즉시 저 불한당들의 목숨을 취하겠습니다! 어디서 감히 저런 무엄한 망발을...!”
“어디 한 번 해 보쇼. 우리가 이래 봬도 흰곰깨나 잡아본 사람들이오.”
“다들 진정하십시오! 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인이 금방 멱살잡이라도 할 것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뒷문 쪽을 지키던 콜그림과 군나르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이밀고, 파울 신부는 애써 수행원과 스베인 사이를 가로막고, 위층에서 저들끼리 뭔가 논의하던 바스크 사람들도 놀라서 막 튀어나올 무렵.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고향 포메른을 떠난 이래 처음 겪는 재미, 마르그레테의 궁정에서는 도저히 느낄 일 없던 재미에 흠뻑 취한 에릭의 웃음소리였다.
“크하하! 야, 이거 재밌구나. 그래, 임금 노릇에 이런 재미가 있어야지, 할망구가 백날 떠드는 절제니 균형이니 하는 게 무슨 재미냐?
좋다! 너, 기묘하게 생긴 아이야. 네 거래에 응하겠다. 단, 너 또한 네가 누구이며, 그 백송고리 주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대체 왜 며칠 전에 로스킬데에 찾아왔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사실대로 밝힌다면, 네 말대로 방금 전 그 일은 없던 일로 하겠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긴 하지만...”
“장담컨대 머리통은 안 깨졌을 게요. 내가 머리 부수려고 작정했으면 그 뜻이 이루어졌을 테니.”
“스베인, 낄 때와 끼면 안 될 때를 좀 구분하십시오.”
스베인과 파울이 뭐라 떠들든, 에릭은 제멋대로 의자 하나를 빼내곤 그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아, 그리고 이 ‘총’. 이것을 돌려줄 테니, 이게 대체 무얼 하는 물건인지, 그리고 왜 이것을 만들고자 하였는지도 밝혀다오. 참고로 저 야만인이 떠드는 것과 달리, 네가 내기로 했다는 값의 세 배를 쳐 주고 나왔다.”
국왕 머리통이나 내려치는 놈에게 도둑놈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던 – 그리고, 점점 그 미모에 눈이 가기 시작하는 눈앞의 소녀에게마저 도둑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던 – 에릭이 의자 앞 식탁에 고급스러운 보자기로 싼 총을 턱 올려놓았다.
“좋아요. 그러면 하나씩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질문에는 대답으로, 대답에는 다시 질문으로.”
“그래, 좋다. 내 국왕의 이름으로 약조하마.”
시그리드 또한 식탁 맞은편 의자를 빼 그 위에 앉았다.
그린란드 사절단과 국왕의 독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1936년에 출간된 사회생활의 고전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 Influence People』은 고아 소년 존 윌슨이 공영도서관을 드나들던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였다.
허나 그 책의 저자 데일 카네기는, 1408년 코펜하겐의 길드 거리 뒷골목에 있는 누추한 여관 겸 주점에서 자신의 책에 적힌 여러 비결들이 덴마크의 이름뿐인 국왕을 상대로 쓰이는 상황을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 그러니까, 정말로 이 백송고리 주인은 너라는 말이냐?”
“네, 맞다니까요. 자, 질문 하나 하셨으니 이젠 제 차례에요.”
다음에는 꼭 저 ‘총’의 용도와 제조 목적을 물으리라 내심 다짐하며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송고리의 주인은 분명 평민으로 위장한 채 덴마크를 방문한 어느 국왕이나 제후쯤 되리라 단정하고서 따분하고 무의미한 궁정의 일과를 걷어치우고 이렇게 모험에 나선 에릭은 어느새 이 기묘한 문답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소소한 재미라 여기고 시작한 문답 놀음이었건만, 시그리드라는 이 소녀의 이야기에는 사람을 몰입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요. 곧 고틀란드 섬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고. 그게 사실인가요?”
반환 협상은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고틀란드의 반환 자체는 딱히 엄청난 비밀도 아니었다.
“그래, 사실이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그래, 허나 이유를 알고 싶다면 너도 먼저 내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수행원 하나가 마땅찮은 표정으로 저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느냐? 내가 이 소녀에게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게 두려우냐? 어차피 오늘 일은 어떻게든 마르그레테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어차피 나는 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으며, 그래본들 나 말고 다른 후계자를 구할 방도도 없다.”
그리고 에릭의 생각대로 국정을 운영할 방도도 없었고, 그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도 지금껏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눈 반짝이며 듣는 목전의 소녀 하나가 처음이었다.
저 소녀보다 두세 살쯤 어릴 저의 아내 필리파조차 저런 눈으로는 에릭 저를 바라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명목상 시어머니 마르그레테를 동경하며 그가 붙여준 교사와 학자들하고만 이야기할 뿐.
“네, 말씀하세요, 폐하.”
“이쯤이면 답해보지 그러느냐? 네가 이 총을 만든 까닭을. 이러한 물건 – 잉글랜드인들은 핸드건handgonne이라 한다지? - 은 고작해야 들고 다니는 작은 화포에 불과하지 않으냐? 사람 놀라게 하는 용도, 그리고 보병 대 보병끼리 싸움이 붙기 전 기선을 제압하는 용도가 전부일 텐데.”
약속은 약속이고, 또 어렵사리 구한 총을 이용해 용병단 노릇을 시작한다는 저의 발상대로라면 에릭을 통해 일감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였으므로 시그리드는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건 지금까지의 핸드건 이야기고, 이 총은 달라요. 작은 대포라기보다는, 아주 강한 석궁 내지는 아주 긴 창 같은 것에 가까우니까요.”
“네 고향이라는 그린란드에 무슨 불한당이라도 있는 게냐? 왜 그런 무기를 고안했느냐?”
“불한당이 있기는 하지요. 궁핍과 굶주림이라는 불한당이요.”
“그리고 너는 너희 척박한 고향 땅 살림에 보태고자 용병 생활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로구나. 하기야, 좋은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척박한 땅이라면 기사는 고사하고 뛰어난 창병도, 석궁수도 구할 수 없을 테니, 아예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서 무장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칭찬에는 칭찬으로 응대하는 게 마땅할 터. 시그리드가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폐하. 알아봐 주시니 그간 고생한 게 조금은 덜해지는 느낌이네요.”
에릭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훅 달아오름을 느꼈다. 수사학을 배웠을 턱이 없는 시골 소녀가, 그저 예의상으로 마음에도 없는 감사의 뜻을 전했을 리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자, 이제는 제가 다시 여쭙겠습니다. 앞서 폐하께서는 고틀란드를 반환받는 것이 흡족치 않다고 하셨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고틀란드는 마땅히 덴마크의 영토, 나의 영토다. 내 정당한 땅을 훔쳐간 놈들이, 그 값이라며 한두 페니도 아니고 구천 노블을 부르고 있으니, 분통이 안 터질 수가 있겠니?
기사단 놈들은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어.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갑옷 입은 프로이센 머저리들이 무서워서 아직도 그놈들의 협상놀음에 응해주고 있단 말이지.”
해적 출신이라는 여관 주인은 ‘고틀란드’와 ‘기사단’이라는 낱말이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제 앞의 식탁을 내리쳤다. 그러나 다들 에릭과 시그리드의 문답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깐, 구천 노블이라고요? 그거, 잉글랜드 금화 아닌가요?”
“그래, 꽤 큰 돈이지*. 나라의 재정으로 못 부담할 만큼은 아니지만, 애초에 명분 없는 것도 저쪽이고 아쉬운 것도 저쪽이란 말이야.”
유창한 언변에 휘둘리는 것은 에릭만이 아니었다.
암만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지만, 현재에 관한 지식은 턱없이 부족한 시그리드에게, 에릭의 눈과 입을 거쳐 나오는 이야기는 그대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아직은 어설프게 만든 시제품 머스킷 한 자루가 무장의 전부인 용병단의 첫 상대를 찾던 시그리드 머릿속에, 딴에는 그럴듯한 생각이 번뜩하고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에릭이 말하는 기사단국이란, 갑옷 좀 좋게 차려입고 싸움 좀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 못된 무리들.
그런 무리가 강점한 땅을 돌려받는 데 일조하고자 미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처럼 보였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억에 오래 남을 대담 – 그리고 그린란드 소녀의 얼굴 – 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누추한 여관에서 나온 에릭의 귀에 수행원의 물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일행은 코펜하겐 시를 벗어나 로스킬데로 돌아가는 길의 중간에 서 있었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끝에 저의 주군에게 올린 질문이리라.
“국왕이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더구나 그 계획, 나는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 로스킬데로 돌아가는 즉시,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금화를 보내주어라. 도시의 길드에도 연통을 넣어서, 그린란드인들이 하는 일에 간섭한다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전하고.”
구천 노블이 아깝다면, 안 주면 그만이다. 협상장에서의 대화가 지겹다면, 전장에서 강철로써 대화하면 그만이다.
그 간단한 것을 지금껏 하지 못한 까닭은, 지금의 덴마크나 스웨덴으로서는 도저히 기사단국이 자랑하는 막강한 군대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 보다 정확히는, 마르그레테와 그를 둘러싼 대신들, 그리고 귀족들이 그렇게들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
그것이 시그리드의 제안이었다. 화약의 힘으로, 장궁이나 석궁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같은 기사로써 대응하지 않고도, 그 탄탄한 갑옷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음을 보여주자. 그리하여 정당한 덴마크의 땅 고틀란드를 돈 한 푼 쓰지 않고 돌려받자.
대가는 본디 고틀란드의 값으로 지출될 예정이었던 구천 노블로부터 일부를 떼어 지급하면 그만일 테다.
그 이야기에 혹한 에릭은 단치히 시장 레츠카우가 곧 협상의 사전조율을 위해 방문할 것임을 귀띔해주었고, 그전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라 주문하였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면, 아예 그구천 노블을 통째로 줄 것이라 공언하면서.
“구천 노블은 결코 가벼운 돈은 아닙니다. 마르그레테 폐하께서는...”
“마르그레테! 마르그레테! 마르그레테가 대체 너희 덴마크인에게 무엇이기에 여기서까지 그 이름으로 내 발목을 잡느냐?”
아아, 마르그레테, 그 원망스러운 이름이여.
저의 노호성에 잠시 움츠러든 수행원들을 둘러보며 에릭이 말을 이었다.
“기사단의 운은 다한 지 오래다. 저 단치히 시장이라는 자가, 회담이 이루어지기 한참 전에 몰래 이곳 로스킬데로 기어들어오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리고 마르그레테도 이를 알고 있겠지. 다만 한자 동맹이 그 뒤에 있기에, 늘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한 발 물러나 방관할 뿐.
신이 내리는 공평한 죽음이 어찌 너희가 추앙하는 마르그레테는 피해가겠느냐? 너희가 정녕 덴마크의 신하라면, 너희의 명실상부한 임금을 따르는 것이 현명할 테다.”
마르그레테는 춤춘다.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는 대신, 그 숱한 장애물들 사이로 빙빙 돌 뿐이다.
고작해야 상인의 무리인 한자 동맹의 금력金力이 무서워 그들과 함께 춤추고, 이백 년간 발트해 동쪽에 군림한 기사단의 무력이 두려워 그들과도 함께 춤춘다. 그렇게, 여왕의 원무圓舞는 수십 년을 이어져 왔다.
그러나 춤추는 솜씨로 맞추는 완벽한 균형 위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균형이 깨질 때에만 비로소 기울어짐이 생기고, 기울어짐이 생겨야만 비로소 흐름이 생긴다.
보라. 저 그린란드인들, 세상 끝에서 온 이방인들도 세상의 균형을 흔들고자, 저들이 살길을 얻고자 저들 국왕의 머리 내려치는 일을, 그러고서도 뻔뻔히 거래니 협상이니 떠드는 그런 무엄함을 불사하지 않던가.
그 발악에 가까운 발버둥에는, 마르그레테의 우아한 원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길이 느껴졌다.
대담을 마치고 일어나면서, 문득 닥친 장난기에 에릭은 살벌한 농담을 던졌다.
‘만약 내가 네 계획에 동조하는 시늉만 하고, 이곳을 나서자마자 도시의 모든 경비대를 불러 너희를 붙잡는다면 어떻게 할 심산이냐?’
그러자 돌아오는 당당한 대답.
‘온 코펜하겐 사람들이, 오늘 이 누추한 뒷골목에서 국왕 폐하께서 도둑질에 손을 대시고 그 댓가를 받았다는, 악의 가득하게 과장된 소문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그리 하시지요.’
생각은 그곳에서 멈춘다. 그린란드인들이 아니라, 은발 소녀 시그리드. 군주에게 어울리는 새를 거느린, 아무것도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국왕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털썩 의자에 걸터앉는 소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신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불꽃 같은 눈빛,
그 모습을 한참 회상하며 먼 곳을 바라보는 에릭의 속뜻을 오해했는지, 두 수행원 모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필시 그들 두 사람의 충성을 시험하며 침묵으로써 압박한다 여긴 것이리라.
“저희는 그저 저희의 주군이자 국왕이신 에릭 폐하를 따를 뿐입니다.”
에릭은 짐짓 만족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것으로 저 두 사람의 충심을 얻었다고 착각할 만큼 순진한 에릭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 일에 잠시 쓸 만한 사람을 얻었다 여길 뿐.
“그래, 너희가 마침 말을 걸었으니, 잘 되었다. 이 자리에서 내 명령을 내리마.”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폐하.”
“로스킬데로 돌아가는 대로, 너희 둘은 아직 그곳에 뭉기적대고 있을 아이슬란드 촌놈들을 붙잡아 와라. 저 시그리드라는 소녀, 그리고 그린란드 사람들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야겠다.”
과연 저 소녀와 그가 다룰 수 있노라 공언한 화약의 힘은, 마르그레테의 끝나지 않는 원무에 끝을 선고할 수 있을 것인가?
에릭의 직감은 ‘그렇다’라 말해주고 있었다.
시그리드가 준비에 요구한 것은, 에릭 기준으로는 놀랍도록 적은 양의 금은과 화약, 그리고 남의 귀를 피해 총을 쏴볼 수 있도록 사냥터 이용을 허가해주는 것 등 몇 가지 사소한 협조가 전부였다.
그 덕에, 에릭은 시그리드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면서도 단치히 시장 겸 기사단국 사절 레츠카우를 맞이하는 데 분주한 마르그레테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
콘라트 레츠카우가 탄 기사단의 배가 로스킬데 항구에 닿기 며칠 전, 시그리드는 에릭에게 준비 완료를 알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폐하, ‘백송고리’ 일행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했다. ‘여흥’ 준비도 잘 되고 있으렷다?”
“예, 말씀하신 대로 갑주를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비공식 사절인만큼, 레츠카우를 맞이하는 연회 역시 평소보다 훨씬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공식 사절을 맞이할 때 빠질 수 없는 복잡한 예식은 생략되고, 대신 우연히 로스킬데에 들린 손님에게 연회를 베푸는 형식으로 회담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허나 그런 연회라 하여 여흥이 없을 수는 없는 법. 시그리드 일행은 먼 땅에서 찾아온 재주꾼들이라는 명목으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이나 상인으로서는 훌륭한 인상일지 몰라도, 외교 사절로는 영 미덥잖은 몸가짐과 기색을 지닌 콘라트 레츠카우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께는 영원한 젊음의 축복이 깃든 듯하군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레츠카우는 마르그레테에게 먼저 예를 갖추었다. 덴마크 궁정의 관습대로* 마르그레테를 포옹하고, 경의를 담은 입맞춤과 악수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마르그레테에게 영원한 젊음이 주어진다면 가장 곤란해지는 사람인) 에릭에게, 훨씬 덜한 경의를 담아 똑같은 예를 행했다.
“오늘의 이 만남이 성사된 데 대해 전능하신 신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만남을 둘러싼 정황이 정황이다 보니, 응대가 조촐할 수밖에 없음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요. 덴마크를 대신하여 레츠카우 그대를 환영하오. 이 만남이 양측에 모두 안녕과 평화를 약속하는 계기가 되기를!”
“모왕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단, 응대가 조촐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감히 여쭈어도 될지요?”
“내 아주 의미심장하면서도 유익한 여흥을 준비했소이다.”
에릭이 입을 열 때마다 철렁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적지 않았다. 마르그레테를 필두로, 좌중의 모든 이들이 에릭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럴 때만 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여기며, 에릭은 자신이 준비한 말 – 시그리드와 짠 계획에서 자신이 맡은 몫 – 을 꺼냈다.
“리미니의 금인칙서*가 선포된 이래로 기사단은 세상의 북동쪽 끝을 지켜 왔소. 그리고 불과 십여 년 전 고틀란드의 해적을 소탕한 것처럼, 세상의 이쪽 구석에서는 그대들만큼 무예에 능하고 용맹한 이들이 없음을, 신앙의 수호자라 불릴 자격이 있음을 꾸준히 입증해왔지.
그러나 이는 또한 엄청난 부담이기도 하오. 그렇지 않소? 세상의 반대편 끝에서 달려온 타타르족부터 쿠만인들, 툭하면 들고 일어나는 세미갈리아와 쿠를란트의 어리석은 족속들...
이에 나 에릭은, 이제 더 이상 그 부담을 그대들 기사단 홀로 짊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이 유익한 여흥 한 토막으로써 드러내고자 하오.”
에릭 본인이 선뜻 나서면서 직접 여흥을 준비하겠노라 했을 때 왜 말리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마르그레테의 얼굴에 스치든 말든, 에릭은 목청껏 호령했다.
“자, 들어와라!”
바깥에서 기다리던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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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에서는 에릭 7세, 노르웨이에서는 에릭 3세, 스웨덴에서는 에릭 13세인 에릭은 편의상 그 출신지를 따서 ‘포메른(포메라니아)의 에릭’으로도 불립니다. 외아들 올루프를 일찍 잃은 마르그레테에게는 후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종손자인 에릭을 고향 포메른(포메라니아) 공국에서 데려와 후계자로 삼은 것이지요. 그가 스칸디나비아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이라는 함의를 지닌 ‘포메른의 에릭’이라는 호칭이 널리 퍼졌을 만큼, 에릭은 인기가 없는 정도를 넘어 칼마르 동맹을 해체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동시대인들의 기록은 에릭의 모험심과 지성, 매력과 미모(“... 아름다운 몸매와 붉은 기 도는 금발, 발그레한 얼굴과 길고 가는 목...”)에 대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장점을 덮어버리고 때로는 단점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하던 그의 치명적 결점, 광기에 가까운 고집불통 성향도 함께 언급하고 있지요.
마르그레테가 1412년 급사하자 친정에 나선 에릭은, 마르그레테의 외교 위주 대외정책을 폐기하고 군사 일변도 대외정책으로 선회합니다. 마르그레테가 재위 전 기간에 걸쳐 다져놓은 왕권은 에릭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지요. 이러한 팽창적 정책은 한자 동맹의 경계와 불만을 불러왔고, 에릭은 한자 동맹이 발트해 무역으로 큰 이익을 올리는 것을 역이용해 발트해와 북해를 잇는 외레순 해협을 봉쇄하고 막대한 통행세를 물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미 스칸디나비아의 무역은 한자 동맹과의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교역 단절로 인한 경제난과 전쟁으로 인한 세수부담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덴마크 위주의 중앙집권화와 전제적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재빨리 이 반란의 대세에 동참했고, 결국 에릭은 1439년부터 차례로 삼국의 왕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릭은 여기서 순순히 포기할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자 동맹과 싸우기 위해 육성했던 함대와 함께 덴마크를 탈출해, 발트해 무역의 요지 고틀란드를 점거하고 약 10년에 걸친 해적왕 생활을 시작합니다. 에릭 전에 고틀란드를 점거했던 해적단 급양형제단과 달리, 에릭은 토벌당하기 전 무사히 고틀란드를 벗어나 포메른으로 돌아가서는 그곳의 공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에릭은 1406년 잉글랜드의 필리파와 결혼합니다. 이는 한자 동맹을 견제하기 위한 마르그레테의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지요. (이전에 언급된, 토르스타인 올라프손이 친척들과 함께 참석한 국혼이 바로 이 결혼이었습니다.) 필리파는 정치적으로 유능했고, 자주 스웨덴을 오가며 에릭의 막무가내 정책으로 인해 쌓여가는 귀족들의 불만을 달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에릭과 필리파 사이의 관계는 개인적으로는 썩 원활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둘 사이에는 끝내 후계가 생기지 않았고, 1430년 필리파가 사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자마자 에릭은 필리파의 시녀였던 세실리아와 공개적인 연애행각을 벌이고 마침내 재혼까지 하게 됩니다. (귀족들에게 필리파는 왕인 에릭보다도 더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이는 에릭 축출 여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 15세기 초반부터 서유럽 경제는 ‘귀금속 대기근Great Bullion Famine’으로 불리는 금은 부족 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는 흑사병과 광맥 고갈로 인한 금은 생산량 감소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통한 중동으로의 금은 유출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5세기 후반부터 신대륙의 금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귀금속 대기근은 종식되고, 대신 가격혁명으로 통칭되는 인플레이션이 새롭게 유럽 경제계를 덮치게 됩니다.
* 포옹-키스-악수 순서의 인사 방식은, 13세기 초의 저명한 덴마크 학자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기록에 전하는 덴마크 궁정의 예법입니다.
* 에릭이 언급하는 리미니 금인칙서Golden Bull란, 122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튜튼 기사단에게 발트해 연안을 지배할 권한을 부여한 칙서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