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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바이킹-13화 (13/116)

춤추는 여왕 (3)

3. 춤추는 여왕 (3)

지식과 오만에 닮은 면이 있다면,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 외의 다른 것들을 시야에서 가려버린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흔들리는 기사단국을 화약의 힘으로 겁박하면 고틀란드를 공짜로 얻어낼 수 있으리라 믿은 에릭도, 바깥 세상의 사정을 이방인 욘을 통해 배웠기에 기사단국의 사절이 당연히 근대국가의 외교관과 똑같이 판단하리라 여겼던 시그리드도, 콘라트 레츠카우의 반응을 제대로 예견하지 못했다.

단치히 시장 콘라트 레츠카우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부귀영화를 제하면) 오직 단치히 시 하나뿐. 단치히가 기사단국에 속하는 자유도시라고 해서, 단치히가 기사단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치히의 이익과 기사단의 이익이 상치된다면 전자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것이었다.

애초에 왜 그런 사람에게 외교를 맡기느냐고 기사단장Hochmeister 융잉엔의 울리히에게  묻는다면, 어깨 으쓱하며 ‘그러면 누구에게 맡기란 말이냐?’라는 답만 돌아올 터였다. 아직 국가이익이라는 개념은커녕, 전문적인 외교관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유럽이었으니.

그런 콘라트 레츠카우의 눈으로 바라본 허울뿐인 국왕 에릭이 준비했다는 ‘여흥’은 어떠했는가?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구를 읊는다는 느낌을 물씬 풍기며, 에릭은 말했다.

“화약을 이용한 무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쓰인 지도 벌써 일백 년이 훌쩍 넘었소. 이 강력한 무기는 성벽을 공격하는 데도, 단단한 진형을 무찌르는 데도 쓸모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외의 용도로 쓰기에는 위력이 신통찮고 쓰기도 번거롭소.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소이다. 자, 보시오!”

에릭이 손짓하자, 저쪽 멀리서 깃발 하나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열 명 남짓한 장정들이 무언가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보조를 맞추어 앞으로 나왔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머리가 흰 여인이었다.

“그 어떤 석궁보다도 정확하고 강력하게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무기요. 안전을 위해 조금 거리를 두고 시연할 수밖에 없는 데 미리 양해를 구하겠소.”

“국왕 폐하, 우리는 평화를 논하고자 손님을 맞이한 것이지, 전쟁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에릭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미 북방 삼국뿐 아니라 한자 동맹과 그 너머까지 익히 알려진 바였다. 마르그레테가 제지하고 나섰으나 결국 허사였다.

“그러나 고대의 현인도 ‘평화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장을 마련하거나 병마를 조련할 재물이 없어 전쟁의 기술을 숙달치 못한 것은 우리 왕국을 괴롭혀온 크나큰 해악이 아니었던지요?”

그사이 저쪽에서 또 다른 깃발이 올라왔다.

“아, 준비가 끝난 모양이로군. 보시오! 저쪽 멀리에 줄지워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로스킬데와 코펜하겐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견고하고 좋은 갑옷이라오.

그리고 이쪽에 서 있는 이들은 전쟁은커녕 싸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변방 그린란드의 사람들이오. 심지어 보다시피 저들 중에는 소녀도 하나 섞여 있지!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저 막대가 바로, 이 사람이 오늘 보이고자 하는 여흥의 주역이라오.”

에릭이 언급한, 곱상하게 생긴 소녀가 한 발짝 나와 어색한 동작으로 예를 표했다.

“시작하라.”

“예, 폐하.”

소녀는 그대로 반 바퀴 돌더니, 우렁차게 호령했다.

“부대 차렷!”

그랬더니 정말로 나머지 아홉 장정이 그 말대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목표 정면의 표적, 거총据銃!”

“거총!”

막대를 일제히 들어올린 사내들이, 저들의 뺨에 막대 끄트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사격 개시!”

“사격 개시!”

단치히 시장인 동시에 한 사람의 기사단원으로서 몇 번이고 전장을 오간 적도 있던 레츠카우조차 놀라게 하는 벼락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가 걷힐 무렵.

“하하하! 보시오! 이것이 바로 신무기의 힘이라오!”

미리 준비된 듯한 기민함으로, 연기가 걷히자마자 달려나간 시종들이 하나같이 말끔하게 구멍이 뚫린 흉갑* 아홉 벌을 들고 돌아왔다.

“그... 실로 훌륭하군요. 하지만 이러한 무기를 시연하시는 본의가 무엇이신지...”

“잠깐! 아직 여흥은 끝나지 않았소! 더 대단한 것을 보여드릴 터이니 감상은 조금 뒤로 미루시기 바라오.”

레츠카우의 눈에, 방금 전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는 허수아비가 보였다. 곧 이전과 동일하게 허수아비 과녁 위에 갑주가 입혀졌는데, 눈대중으로 살피니 그 거리가 얼추 오륙십 루테ruthe*는 되어보였다.

이번에는 앞서 에릭 앞으로 나아와 인사를 올렸던 소녀가, 손수 쇠막대를 들었다.

“방금 전 보여준 정도로는, 고작해야 지금의 석궁보다 갑절쯤 나을 뿐이지. 그러나 화약이 지닌 잠재력은 그 이상이오.

저 소녀,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이를 입증해줄 것이니, 잘 보도록 하시오.”

석궁의 유효사거리는 잘 쳐도 십오 루테 정도. 그것도 숙달된 용병이나 군인이 도구의 힘을 빌어 겨우 장전할 만큼 센 석궁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 가냘프게만 보이는 소녀가 오십 루테 거리에서 과녁을 관통할 수 있다니, 이 어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이야기겠는가?

우레소리가 또 한 번 나고, 곧 레츠카우의 상식은 약간이나마 무너지게 되었다.

“하하! 해냈군! 보시오! 또 한 번 말끔하게 관통하였구려!”

그러나 기쁨에 날뛰는 에릭과는 대조적으로, 마르그레테 여왕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폐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콘라트 경, 이 무례에 양해를 구하겠소.”

마르그레테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레츠카우에게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 역시 마침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해 숙고할 여유를 주십사 청하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히야, 그걸 진짜 맞췄네. 정말 대단하다, 시그리드야.”

스베인이 혀를 내둘렀다.

“다른 분들도 고생 많으셨어요. 모두들 잘 따라와주신 덕분이지요.”

시그리드가 시연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인 그린란드 사람들을 칭찬했다.

총열을 만드는 것이야, 대포나 수총 만들던 가락이 있으니 에릭의 후원을 받자 금방 이루어졌지만, 그 안에 강선을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결국 시그리드의 당초 계획과는 달리 혼자만 강선 파인 총을 들게 되었다. 강선 없는 머스킷 시연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시그리드 홀로 장거리 저격 시연을 한 것은 이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왕실 사냥터의 한적한 곳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 그렇게 언제고 욘이 시그리드에게 해주었던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영국 육군 이야기를 따라 재구성한 전열보병 분대 하나와 샤프슈터 하나가 탄생하게 되었다.

“제가 뭐랬습니까. 이 궁니르Gungnir가 표적을 빗맞힐 리 없다니까요.”

콜그림이 시그리드의 라이플에 제멋대로 붙인 별명을 또 거론하자, 머릿수를 하나라도 늘리기 위해 이 사격 시험에 동참하게 된 파울 신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저 ‘라이플’인지 ‘리플’인지, 뜻도 모르는 그 이름으로 계속 부를 수는 없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교도 티를 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부님께서 새로 이름을 지어주시던가요. 시그리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아주 정교한 석궁이나 아주 긴 창 같은 무기라고. 번개 소리를 내고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매서운 창이라면 그게 궁니르지 뭡니까?”

“쉿! 저기 여왕님이랑 도둑 국왕님 오십니다.”

그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국왕이라는 존재는 툭하면 백성의 물건을 훔쳐가고, 그럴 때면 뒤통수를 후려쳐야 정신을 차리며, 아주 맛깔나게 때린 다음 잘 을러대면 오히려 껄껄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 그린란드 사람들은 그리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두 왕을 맞이했다.

(이쯤이면 파울 신부도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가 보기에는 아주 황당무계한 결론인데, 의외로 시그리드조차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저쪽을 두둔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된 바, 두 사람이 그린란드 사람들 있는 쪽으로 나온 것은 시그리드 일행을 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레츠카우의 귀가 닿지 않는 곳을 찾아나온 것에 불과했다.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사람들이 마치 곁에 없는 것처럼, 마르그레테가 언성을 높였다.

“무슨 짓이냐니요. 소소한 여흥이지요. 그것도 아주 교훈적인 여흥이요.”

“그래요, 확실히 교훈은 주었군요. 기사단에게도, 이 사람에게도요.”

마르그레테는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여전히 저의 라이플을 들고 있는 시그리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데, 그 기세가 자못 흉험하여 그린란드 사람들은 모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신무기는 보나마나 저 남쪽 어디선가 구해왔겠지요. 잉글랜드에 이런 무기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필시 이탈리아나 카스티야처럼 전쟁이 잦으면서도 부유한 지방에서 고안한 무기일 테지요.

그런 무기를 국왕이 어디선가 수소문해 구해온 뒤, 일개 평민들을 무장시켜 갑옷을 꿰뚫는 시연을 했습니다. 기사단국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에릭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집불통 심보는 마르그레테보다 더한 데다가, 하필 앞에 자신이 그토록 호언장담했던 상대인 시그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우리 세 나라가 옛날의 그 호구들, 해적 하나 감당 못해서 쩔쩔매던 한심한 나라가 아님을 알게 되겠지요! 정당한 우리의 땅을 감히 돈을 받고 되팔 생각 따위야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는 저들의 목숨줄과 다름없는 해협을 꽉 쥐고 있는 우리에게 마땅한 존중과 경의를 바치게 될 겁니다.”

“틀렸습니다! 틀렸어요! 어떻게 이곳 덴마크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냈건만 배우는 것이 없습니까? 이 신무기를 폐하께서 고안해낸 게 아닌 이상에야, 다른 군대들도 금방 이런 무기를 채용해 전장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목전의 일만 보도록 하지요. 기사단국과 우리 삼국은 상호불가침 조약으로 얽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약은 한자 동맹이 보증한 것이지요. 그리고 전운이 드리운 지금, 우리가 먼저 기사단국을 자극한 형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뒷일을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제가 이 총을 고안한 건 아니지만, 그린란드 사람이 고안한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먼저 만들어낸 것과 다름없거든요. 이 이점이 사라지기 전에 먼저 기사단국을 치고, 한자 동맹도 꺾고, 서둘러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꼬박꼬박 이어지는 말대꾸에, 마르그레테도 결국 폭발했다.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는, 그에 반비례하여 격앙된 노기를 가득 담았다.

“에릭, 헛소리 집어치워라! 그린란드 사람이 이런 무기를 만들었다고? 감히 네가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하느냐?

고작해야 무기 하나다! 잉글랜드가 고작 장궁 하나의 힘으로 지금까지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해 왔다고 여기고 있느냐!

한자 동맹? 고작 홀슈타인 하나 수복하지 못해 쩔쩔매는 우리가 무슨 수로 한자 동맹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간간이 들려오는 음성과 두 사람의 표정만 보아도, 뭔가 일이 뜻대로 되고 있지 않음이 명백하였다.

“그, 시그리드야, 이제라도 도망칠까? 아니면 장전이라도 슬쩍 다시 해놓는다든가.”

“잠시만 기다려보지요.”

시그리드도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저와 에릭 두 사람이 나름대로 공모하여 짠 계획을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파울과 에릭 두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하고, 거기에 간간이 욘이 말해주었던 이 무렵의 유럽사까지 더해 판단하면, 지금의 저 고틀란드 반환을 둘러싼 주변 정세는 얼추 이러한 듯하였다.

튜튼 기사단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기사단국의 존재 목적은 발트해 동쪽의 이교도들을 토벌하고 개종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 유럽의 마지막 이교도 왕,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기사단의 존재 목적은 완수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해산할 기사단이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역시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한 이래, 양국 공동의 적 기사단국을 치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 왔다.

기사단국이 발트해의 요해지 고틀란드를 덴마크에 넘기고 그 대신 불가침을 재확인받고자 하는 것도,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잠재적 전선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콘라트 레츠카우라는 기사단 측 사절은, 이번 시연을 자신들에 대한 압박으로 정확하게 해석하고, 덴마크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구천 노블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고틀란드를 그대로 반환할 것이다. 장차 벌어질 전쟁에 불개입을 확약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저쪽에서 그 사절이 후다닥 달려와서는 정말 시연을 감명깊게 잘 보았다. 우리 두 나라의 평화와 우호를 위해, 고틀란드 섬은 그 어떤 대가도 없이 그대로 반환하겠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기를 바라자꾸나. 제발 그 레츠카우라는 자가 기사단을 위해 최선의 길을 택하기를...”

파울 신부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사람의 사고방식이 성직자 한 사람의 축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시당초 이 세상의 고통과 혼란 중 상당 부분은 존재할 리가 없을 터였다.

콘라트 레츠카우는 이러한 일을 여러 해 겪어본 사람답게 능숙하게 결론에 도달했다.

기사단국은 안팎에서 적과 대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릭 왕은 언제고 자신들도 기사단을 칠 수 있으며, 그 준비를 오래 전부터 해왔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사단국 사절로서의 권한을 어떻게 활용해야 단치히 시의 이익을 가장 잘 도모할 수 있을까?

답은 이러했다.

장차 벌어질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덴마크와 기사단국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는 것이 단치히 시에는 이롭다. 그러므로 에릭 왕의 ‘여흥’을 어떻게든 전쟁 발발의 사유casus belli로 삼아야 했다.

북방의 세 나라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 기사단국의 싸움. 여기서 기사단국이 승리한다면, 덴마크는 비단 기사단국뿐 아니라 불가침조약을 보증한 한자 동맹의 신뢰까지 먼저 저버린 셈이 된다.

한자 동맹은 발트해 무역 이권을 지금보다도 더 확실하게 뜯어낼, 아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기사단국에 속하지만 한자 동맹 가맹도시이기도 한 단치히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한자 동맹과 기사단국이 북방 삼국의 이권을 많이 얻어낼수록, 단치히에게 떨어지는 몫도 늘어날 터였다.

반면 기사단국이 패배한다면? 단치히는 독립을 선언하고 곧장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왕인 요가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그만이다. 발트해에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상대가 갑자기 소멸한 한자 동맹은, 발트해 일대의 동맹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만큼 단치히의 발언권은 올라간다.

덴마크가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직접 참전하는 것이 기사단국의 이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그저 잠시 떠오르다 사라지는 단상에 불과했다.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상대에 비하면 북방 삼국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콘라트 레츠카우는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마르그레테를 찾아, 방금 전 그 신무기를 선보이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의 표정은 사람 좋은 외교사절에서, 거룩한 분노에 가득 찬 기사로 바뀌어 갔다. 두 가지 모두 겉으로 드러내는 가면임은 매한가지였으니, 갈아끼우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 분 폐하께, 제게 부여된 권한으로써, 기사단국의 명예와 신앙심, 그리고 사명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립니다.

비록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지만, 외교 사절인 제 앞에서 이토록 공공연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무력시위를 벌인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콘라트 공, 앞서 국왕 폐하가 밝힌 것처럼, 단순한 여흥에 불과한 일입니다. 물론, 실로 조야하고 폭력적인 취향의 여흥이기는 했습니다만, 그 의도는 좋았으니...”

마르그레테가 언제 그토록 에릭을 호되게 나무랐냐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그 의도가 문제입니다.

마르그레테 폐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는 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에릭 폐하께서는 여흥을 빙자하여 공공연히 우리 기사단국을 협박하고, 우리의 성스러운 사명을 모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명예를 위해, 부득불 다음과 같이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칼마르에서 고틀란드 반환을 두고 공식 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되었던 금년 6월 3일 이전까지, 오늘의 무례를 사과하는 사절을 2만 노블의 배상금과 더불어 기사단의 본부가 있는 마리엔부르크로 보내십시오. 아, 물론 배상금은 고틀란드 할양의 대가인 9천 노블과는 별개입니다.”

“싫다면?”

에릭이 콧방귀를 뀌었다. 마르그레테의 날카로운 시선이 뒷통수에 박히든 말든, 저 스베인이라는 야만인의 몽둥이보다는 덜 따가웠다.

“만약 말씀드린 기한까지 정중한 사과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우리 기사단국으로서는 귀국이 적대적 의도를 먼저 드러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상호불가침 조약을 귀국이 먼저 파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잘 되었군. 어디 한 번 해 보시오. 전쟁이라도 하시게?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가만 있을 것 같소? 그대들의 기사단장이 얼마나 무용이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스웨덴 해안을 약탈하는 동시에 마리엔부르크 성을 지킬 수는 없을 게요.*”

“전쟁의 승패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신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전쟁의 승패가 결정난 뒤에도, 우리 기사단국과 기사단국의 벗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교역이 끊기게 되면 귀국이 어찌 될지는, 한낱 사절인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만.”

그러고는, 마르그레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저의 체류는 여기서 끝나야 할 듯합니다. 다시 뵐 날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내리는 무거운 침묵.

“폐하,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에릭을 힐난하면서도, 마르그레테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가 그려지고 있었다.

레츠카우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기사단 내에 친우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레츠카우의 생각보다 기사단은 닥쳐올 전쟁을 진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든 균형을 되찾을 수는 있다. 에릭의 완고함을 꺾고, 길이 남을 교훈 – 그리고 그가 또 한 번 이렇게 고집을 부리려 할 때마다 따라붙을 꼬리표 – 을 주는 것. 그런 이득을 거두고, 에릭의 오만과 만용으로 발생한 비용은 최소화할 방도를 마르그레테는 계속 구상하였다.

“여왕 폐하?”

낯선 목소리가 여왕의 힐난과 사색을 동시에 끊은 것은 그때였다.

에릭이 어디선가 데려온 – 그리고 그의 황당한 주장에 따르면, 저 소형 화포를 고안했다는 – 은발 소녀였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구상한 해결책이 하나 있는데, 말씀을 올려도 될지요?”

결국 문제는 한자 동맹이 보증한, 덴마크와 기사단국 사이의 불가침조약이었다.

곧 닥칠 전쟁에서 기사단이 패배하더라도, 한자 동맹은 그대로 남아 북방 삼국의 상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한자 동맹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주선한 불가침 조약과 영토할양 회담이 에릭 한 사람으로 인해 뒤엎이는 것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군주들에게 무시당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불가침조약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기사단국 사이의 전쟁에 숟가락만 얹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어차피 용병단 하나를 차리려던 판이었다. 시그리드는 욘이 가르쳐준 미래의 지혜 한 토막을 떠올렸다.

“기사단국과 덴마크 사이에만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나요?”

수상할 정도로 칼마르 동맹에 우호적이고, 전원 북방인으로 구성된 용병단이 슬그머니 전쟁에 참여하여 응당의 몫을 주장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방인 욘의 나라 미국도, 소련이라는 강대한 나라를 상대로 세상 곳곳에서 그런 일을 많이 벌였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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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치히 근교 출신인 콘라트 레츠카우는 원 역사에서도 기사단의 단치히에 대한 간섭과 과세에 불만을 품고, 기사단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마침내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대패하자 레츠카우가 이끄는 단치히 시는 곧장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요가일라(야기우에워)에게 충성을 맹세했지요.

하지만 1411년 1차 토룬 화약으로 기사단국의 단치히 지배가 재확인되면서 레츠카우와 단치히의 친폴란드 세력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튜튼 기사단은 단치히의 자치권에 대해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명목으로 레츠카우를 불러냈고, ‘협상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레츠카우와 그 일행을 모조리 살해해버립니다.

그러나 기사단의 쇠퇴는 이미 모두에게 명백해져 있었고, 결국 단치히와 주변 도시들은 1454년 기사단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폴란드를 다시 끌어들입니다. 이어지는 전쟁 끝에 기사단국은 완전히 몰락해 폴란드 왕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이 되고, 단치히는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그단스크로서 번영을 이어가게 됩니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럽산 화약무기가 스웨덴산 로스훌트 대포Loshult gun(14세기 전반)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중동과 킵차크 칸국 양쪽을 통해 빠르게 유럽 전역에 화약무기가 퍼지던 시대의 흐름에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늦어도 14세기 후반에는 다른 유럽 지역에서 보조무기로 널리 쓰이던 핸드캐논도 도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뫼르쾨 총Mörkö gun과 같은 유물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원이 많은 지리적 특성상 원시적 화약무기보다는 중무장 기병이 더 활약할 여지가 많던 동유럽 국가들이 비교적 늦게 (15세기 후반) 개인화기를 도입한 것과 대조됩니다.

아직 충분히 화약무기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무기들은 당장 북유럽 국가들의 국력 증진에 도움이 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착실히 발전한 화약무기 제조 전통은 훗날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군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지요.

* 야금술의 발전과 더불어 대규모 전쟁이 빈번히 벌어지면서, 유럽의 갑옷은 점차 중세를 대표하는 사슬 갑옷에서 판금 갑옷(우리가 흔히 ‘기사’하면 떠올리는 통짜 갑옷)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작중 시점은 그 과도기로, 기존의 사슬 갑옷 위에 판금이나 기타 기법으로 제조된 갑옷 ‘부품’ (흉갑, 견갑, 팔뚝 보호대 등등)을 보강하던 시기입니다.

* 루테(막대rod를 뜻함)는 전근대 독일 각지에서 쓰이던 길이의 단위로, 전근대 단위가 그렇듯 지역과 시대에 따라 3.7*50길이는 제각각이었습니다. 19세기 초 프로이센 기준으로 1 루테는 대략 3.77m에 해당합니다.

* 총열 내부에 파인 나선형 홈을 뜻하는 강선은, 본디 총의 사거리 증가가 아닌, 장전시의 편의성 증대를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사격 후에 총열 내에 남는 불순물 등을 쉽게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지요. 이러한 강선은 16세기 말엽부터 유럽 각지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했는데, 18세기에 들어서야 강선이 탄도를 안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조명을 받게 됩니다. 강선총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기계의 힘으로 강선을 팔 수 있게 되면서부터지만, 그 이전부터도 강선총은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엄청난 수공이 들어가고, 총의 수명 자체도 줄어드는 문제가 있었기에 어디까지나 제한적·보조적 수준에 머물렀지만요.

* 계속 언급되는, ‘곧 들이닥칠 전쟁’이란 1409년부터 1410년까지 벌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대 튜튼 기사단국의 전쟁을 말합니다. 이 전쟁에서 기사단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훗날 폴란드에 예속된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락하기까지 기나긴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 마르그레테가 이끄는 칼마르 동맹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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