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여왕 (4) (수정 및 내용 추가)
3. 춤추는 여왕 (4)
가르다르의 어느 긴 겨울밤, 욘으로부터 한 발의 총성이 온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시그리드는 암만 욘이라지만 과장이 심하다고 내심 여겼다.
그때만 해도, 언젠가 자신이 쏜 미니에 탄 한 발이 유럽의 절반을 전쟁으로 몰아넣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덴마크 왕실 재정 구천 노블을 아껴서 저의 용병단 밑천으로 삼아보려던 시그리드의 책략이 엉뚱하게도 칼마르 동맹과 튜튼 기사단국 사이의 전쟁 위기를 불러온 것이 1408년 3월.
그리고 진작부터 기사단국과 한판 붙어볼 생각으로 기사단령 내의 사모기티아인들에게 반란을 슬슬 부추기고 있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왕 요가일라는 냉큼 이 기회를 붙잡았다.
그니에즈노Gniezno 대주교의 입을 빌어 발표한 성명에서 요가일라는 로스킬데에서 벌어진 외교적 분쟁의 근본 원인이 무도한 기사단국 측에 있다고 비난하였다.
비난은 물론 핑계였고, 본론은 그 뒤에 붙은 문장, 만약 기사단이 덴마크에 대한 비난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기사단의 무도함을 감안해 지금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기사단국 사이에 유지되고 있던 모든 협약 또한 무효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이었다.
한편, 기사단장인 융잉엔의 울리히는, 튜튼 기사단 – 어쩌면 독일인 대부분 – 에게 전해내려오는, 기막히게 형편없는 외교감각을 십분 발휘하였다.
즉,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기사단국의 세력과 지위를 위협하는 데 있으니, 폴란드를 선제공격하면 모든 문제가 알아서 해결되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1408년 5월,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를 상대로 먼저 전쟁을 선포했다. 폴란드만 굴복시키면 리투아니아는 두려움에 떨며 요가일라 대신 새 왕을 옹립할 것이요, 그리되면 오만한 덴마크도 알아서 굴복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대망의 6월,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된 고틀란드 반환 회담이 원래 열리기로 했던 날이 지났다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 튜튼 기사단의 기사들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같은 달, 사모기티아인들을 필두로 기사단이 점유하고 있는 발트해 연안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폴란드는 기사단이 그토록 경이로운 판단력을 발휘하여 대뜸 침공해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고, 기사단은 폴란드를 치러 간 사이 동방 영토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고작 개전 한 달만에 양측은 9개월 간의 휴전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 9개월을 양측이 어떻게 보낼지는 뻔했다.
동맹을 만들기 위한 뇌물, 상대의 동맹으로 하여금 배신토록 하기 위한 뇌물, 첩자의 활동자금, 상대편 첩자 매수 자금. 용병단 섭외를 위한 선금, 그 용병단을 가로채기 위한 한층 두둑한 선금...
온갖 재물의 흐름이, 신성로마제국부터 킵차크 칸국까지 유럽의 동쪽을 금빛으로 수놓기 시작했다.
로스킬데의 왕실 금고에서 시그리드 일행이 묵고 있는 코펜하겐의 누추한 여관으로 노블 금화 한 무더기가 전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뭐야, 약조한 건 구천 노블 아니었소? 왜 이리 적소?”
금화를 전하러 나온 로스킬데 궁정의 신료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작은 궤짝* 하나를 털썩 내려놓았다. (하기야, 저의 호주머니를 제외한 다른 곳으로 금이 나가는 것을 기껍게 여기는 관료가 어디 있겠는가.)
“삼천 노블이다. 너희가 동참한 그 소란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가재정에도 큰 부담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감사히 받을 일이다.”
그 ‘부담’이 무엇인지는 시그리드 일행뿐 아니라 코펜하겐 시민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기사단국과의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기 위한 용병단. 마르그레테를 끝으로 단절될 에스트리드센 가문의 문장을 따와, ‘푸른사자 용병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급조 용병단.
봉신과 용병들을 힘닿는 데까지 끌어모으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기사단국 사이에서, 부끄럽지도, 과하게 두드러지지도 않을 만큼의 규모라지만, 그런 용병단을 단기간에 꾸리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 쪽도 계약을 완수하진 못한 셈이잖아요.”
금화를 세러 나온 – 원래 숫자를 다루는 것은 시그리드와 파울의 몫이었다 – 시그리드가 이쪽에 맞장구를 쳐주기는커녕, 저쪽 재수 없는 높은 사람 편을 들어주니 스베인도 살짝 기가 죽었다.
“마냥 천둥벌거숭이만 모인 줄 알았는데 그건 다행히도 아니로구나.”
총을 만들고, 시연하고, 계획이 엉뚱한 쪽으로 새나가고... 이 모든 일들은 아무튼 기사단의 잘못이라는 것이 궁정의 공식 입장.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에릭 폐하가 또 한 건 했다’ 정도가 더 중론에 가까웠다. 몇몇 과격파들과 귀족 젊은이들은 오히려 에릭의 ‘통쾌한’ 행동을 부풀려진 풍문으로 듣고 열광했지만.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이 시그리드 한 사람에게 있다고 차마 지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랬다가는 그런 시그리드 한 사람에게 휘둘린 셈이 되는 에릭과 마르그레테 모두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
“또한 우리의 관대하신 마르그레테 폐하께서는, 너희 촌놈들에게 한없는 아량을 베푸사, 부족한 육천 노블의 값을 훨씬 상회하는 은덕을 베푸기로 하셨다.”
그 은덕이 무엇인지는 곧 밝혀지게 되었다.
로스킬데 궁정에서의 소총 사격시험이 일으킨 한 가지 소소한 효과는, 바로 그린란드라는 지명이 부쩍 자주 언급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아이슬란드인들의 청원, 그리고 그 청원보다도 더욱 심한 무관심 속에 파묻혔던 파울 신부의 청원이 대신들의 책상에서 마르그레테 앞으로 직행하게 된 것이다.
아이슬란드 유력자들과는 달리, 마르그레테에게는 그 변방의 섬에서 누가 기득권을 쥐고 흔드냐는 것보다는 얼마나 많은 세수를 올릴 수 있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인들에게 그 일의 총책을 맡긴다면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울 터. 현지 사정에 밝은 외지인을 시켜 북쪽 바다에서의 조업을 감독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 수순이었다.
마지막 주교가 죽은 이래 삼십 년간 공석이었던 가르다르 주교좌. 기독교 세계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그 주교좌에 덴마크 왕이 원하는 사람을 앉히는 데는 그리 많은 헌금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가르다르 주교라고? 내가?”
금화를 받은 이튿날, 코펜하겐에 거하는 룬드Lund 대주교의 아랫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파울 신부는 화들짝 놀랐다.
“예, 이곳 코펜하겐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으신 후, 서품을 받고 그린란드로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왕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회사의 운영을 감독하시게 되겠지요.”
파울과 함께 이 낭보를 들은 시그리드의 귀에 먼저 들어온 것은 ‘회사’라는 단어였다.
“네? 회사라고요?”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곧 왕명으로 ‘그린란드 회사Greenland Company’라는 새 길드에 대한 면허장이 발급된 것이라던데요. 지금 있는 덴마크 무역 길드와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곧 로스킬데 궁정에서 그 면허장도 – 시그리드가 아닌, 청원을 올린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의 이름 앞으로 – 내려왔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그리고 그 너머 땅’에서 어업과 포경을 행할 권리와, 그 권리 일부를 타국인에게 위임하고 그 대가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면허장이었다.
삼천 노블 정도면, 회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는 부족하지만, 몇몇 사업에 시범적으로 착수하고 투자자들을 더 모으기에는 충분한 종잣돈이었다. (일의 추이를 관망하고자 여전히 코펜하겐에 남아 있던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에 따르면 그러했다.)
반면 내려지지 않은 은덕도 있었다.
“이보쇼, 우리가 우습소? 우리도 이 용병인지 뭣인지 할 거라고! 아니, 애시당초 우리 시그리드가 아니었더라면 이 용병단이 세워질 일도 없었다니까?”
하도 감감무소식인지라, 참다못해 코펜하겐 교외에 막 세워진 용병단 임시 숙영지를 찾아간 스베인에게는 코웃음과 냉대만 쏟아졌다.
“우리가 알 바 아니오. 촌뜨기 몇 명 모인 주제에 용병은 무슨. 전쟁이 무슨 촌구석에서 고기잡이하는 것과 같은 일인 줄 아나 본데, 어림도 없는 소리지.
냉큼 돌아가시오. 정 할 말 있으면 우리네 주군, 아차, 고용주 되시는 마르그레테 폐하께 가서 따지시던가.”
스베인은 에릭 뒤통수도 때려본 사람이고, 시그리드는 에릭과 마르그레테 앞에서 엄연한 살인 무기를 들고 설치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것을 꿈에도 알 리 없는 용병대장이었다.
다음날 시그리드는 곧장 로스킬데로 향해 재차 접견을 요청했고, 이 은발 소녀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궁정 사람들은 금방 문을 열어주었다.
(저들은 몇 달을 기다려도 고작 에릭 한 사람 접견하고 끝이었는데, 저들보다 한참 조촐한 차림으로 도착한 그린란드 사람은 단번에 마르그레테를 통해 저들 뜻을 이룬 것을 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먼발치서 시그리드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따름이었다.)
안내를 맡은 궁정 시종은 시그리드를 어느 첨탑 위로 데리고 올라갔다. 접견을 하기에는 영 묘한 자리 선정이었다.
필시 무언가 타인의 이목 없는 곳에서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리라.
시종은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라 하곤 계단통 아래로 사라졌다.
그린란드의 여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기나긴 덴마크의 낮이지만, 그런 낮에도 끝은 있었다. 불그스름한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시그리드가 살아가는 지금을 『중세의 가을』이라 지칭한 학자가 있었다고 욘은 말했다.
진홍색으로 가득 물든 하늘을 침범하는 납빛 구름. 그 구름을 비추는 구릿빛 가짜 광휘.
임박한 한 시대의 끝. 거기서 완성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형식의 아름다움.
그러나 그린란드를 떠난 이래 시그리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가을이 아니라 겨울뿐이었다. 그린란드에 닥친 겨울보다도 더 혹독한 겨울.
그린란드인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나머지 유럽인 대다수도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다. 바깥세상은 동녘정착지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더 혹독하고 잔인했다.
스노리 노인이 경고했던 것처럼, 그리고 아이슬란드와 코펜하겐에서 보고 겪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썼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개를 돌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욕심도 부리고, 허황된 이야기에 탐닉하며, 헛된 발버둥에 열광했다. 누군가는 나침반을 삶의 지표, 희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누군가는 막연한 희망으로 고향을 떠나 먼바다를 헤치고 다녔다.
기근과 역병, 전쟁, 죽음이 항상 그들 곁에 있었고, 그들의 삶은 그로 말미암아 고독하고, 궁핍하며, 추악하고, 야만스럽고, 또 짧았으므로.
그리고 시그리드에게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이, 그리고 바꿔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그리드는 마르그레테가 자신에게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그리드는 이미 준비해두었다.
“여왕 폐하.”
그사이 곁눈질로 배운 예법으로 엉거주춤 인사를 올리는 시그리드였다.
“그린란드의 시그리드. 네가 이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 맞습니다.”
“어째서냐? 나는 너의 도움을 받아, 에릭이 벌인 그 소란을 수습할 방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에릭의 그 무책임한 판단에 함께할 수밖에 없을 만큼 너희 그린란드의 사정이 절박했음도, 네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살길을 찾아 실로 놀라운 재치와 용기를 보였음도 알아보았다.”
공식적으로는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견식 넓은 이의 눈에는 금방 북방 삼국의 지원을 받고 있음이 드러나는 그런 용병단을 보내 전쟁을 거든다.
승리한다면 응당의 몫을, 패배한다면 나름의 변명을 챙길 수 있는 방책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칭찬하고 또 내게 계책을 바친 데 보답하고자,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주었다.”
마르그레테는 콘라트 레츠카우를 맞이하던 연회의 그 ‘여흥’을 보면서, 그린란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파울 신부나 그 덩치 큰 야만인이 아닌, 변방에서 온 소녀임을 꿰뚫어보았다.
동정심과 연민이 지금 시그리드에게 보이는 호의에 한몫 거들었다는 점은, 마르그레테 스스로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린란드에는 다시 주교가 생길 것이고, 그린란드 회사의 상선과 어선은 극북의 빙해*를 오갈 것이다. 그리고 그린란드 회사가 번영하게 된다면, 너희 그린란드 사람들이 말하는 빈란드 땅에 발을 디딜 수도 있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쟁에 나서기를 청하느냐? 전쟁은 어리석은 사내들이 술주정으로 늘어놓는 무용담과는 다르단다.”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폐하께서 설령 세 나라의 모든 힘을 제게 실어주신다 한들, 충분하지는 못할 거에요. 제가 용병단을 꾸려 전장에 나서려 하는 건 그 때문이랍니다.”
“충분하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저는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라지 않아요.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를, 그들의 꿈을 스스로 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르그레테는 시그리드의 푸른 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수십 년 전의 어린 자신을 발견했다.
기사가 되기를 바라는 철부지 자식의 꿈을 짓밟아야만 하는 농노의 마음으로, 슬픔과 온정을 담아 마르그레테는 말했다.
“그런 세상은 있을 수 없단다, 얘야.”
“아녜요, 폐하. 존재할 수 있어요. 다만 지금 이 유럽에 이미 존재하는 세상이, 다른 세상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 용병단으로 새 세상을 열겠다는 말이더냐? 아홉 위인*들도 하지 못한 일을?”
“용병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용병단은 사람들에게 빈란드 땅의 이름을, 그리고 그 땅이 약속하는 새로운 삶을 드러내 보일 거예요. 그리고 제가 사람들을 제 재주로 돕는 동안, 저나 다른 사람들이 핍박받지 않도록 하는 방패가 되어주겠죠.”
시그리드는 욘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그에 상응하는 반발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시그리드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 앉아 당하고만 싶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에릭은 네가 그 총이라는 물건을 고안했다고 말했지. 너는 총명한 아이니, 어쩌면 정말로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너 혼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린란드의 시그리드야. 설령 가장 강대한 군주일지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지.”
“폐하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다른 세상을 열 수 있는 땅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건 가능하지요. 이곳 유럽의 삶을 벗어나, 그들 자신의 꿈을 그릴 수 있는 땅으로요.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모아야만 우리 그린란드 또한 그린란드 사람들의 그린란드로 남을 수 있을 테고요.”
가르다르의 누추한 집에서 새싹을 틔우고, 스칼홀트 성당 앞 대장간과 커크월의 여관방에서 자라난 시그리드의 구상이 마침내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한 나라 군주의 후원을 받아 신대륙을 ‘개척’한다면, 이는 결국 그 군주를 위한 영토를 늘려주는 데 불과하다. 대서양을 바로 가로지르는 항로가 발견되는 순간, 그린란드의 쓸모는 다하게 될 터였다. 욘에게 전수받은 미래의 지식은 쓰임을 얻기도 전에 질식하여 망각 속에 빠져들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린란드가 그린란드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빈란드를 개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린란드인들의 손만으로 빈란드를 개척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빈란드로 나아가야만 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야 할 것이다.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가 저도 모르게 말해주었듯.
“그린란드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아니요. 그린란드는 지금 있는 사람들을 먹여살리기도 빠듯한 걸요. 하지만 바다 건너, 빈란드는 얘기가 다르지요.
빈란드는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처럼 그냥 땅Land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유럽 전체를 다 합친 것보다도 거대한 대륙이지요.
그런 곳이라면, 사람들은 마음껏 자신이 살고자 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어요. 이단이니, 이교도니, 반역자니 하는 그런 비난을 서로 퍼붓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면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살 수 있어요. 제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얘기하든, 그리고 무엇을 만들든, 누구도 저들의 목숨을 걸고 가로막지 않을 거에요. 싫으면 그저 옮겨가면 될 테니까요.
저는 그 준비를 하기 위해 용병단을 꾸리려는 거에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죽일 준비를 해야 하는게 우리가 살아가는 슬픈 현실이니까요.”
유럽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 가까운 친지로 삼고 살아온 시그리드는 이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검은 책에 담긴 지식을 억누르고 제멋대로 오용하려 할 사람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무너뜨리고, 그들마저도 이해하고 따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시그리드가 만들어낸 총, 그 화약의 힘이 필요할 테니까.
석양을 등진 채,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 하얀 맹금과 함께 첨탑 위를 지키는 은발 소녀와, 그 석양과 소녀를 함께 눈에 담으며 소녀의 꿈을 귀기울여 듣는 늙은 여왕.
시그리드가 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대체 그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드러나는 진실 한 토막마다 의문 수십 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마르그레테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마르그레테는 그저 듣기로 했다. 설령 허황될지라도, 그 자체로 시그리드의 꿈은 아름다웠으므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첨탑의 그림자는 꼭대기에 두 인영을 품은 채 동쪽으로 길게 늘어져 갔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첨탑 위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그토록 아름다운 붉은 빛깔로 물들이던 석양은 사라진 지 오래. 그 풍경의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어둠이 사방을 뒤엎었다.
박명조차 지워지고, 양초를 마련할 여력 되지 않는 평민과 농노들은 모두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 무렵.
이제는 석양이 밝히던 장밋빛 세상을 벗어날 때였다.
소녀를 연민하고, 그 아름다우면서도 거창한 꿈에 함께 기뻐하는 마르그레테에서, 만에 하나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에 대비해야만 하는 군주 마르그레테로 돌아올 때였다.
석양의 빛 속에서 이어진 이야기 가운데서, 마르그레테는 시그리드가 그리는 앞날, 저 빈란드 땅에서 펼치고자 하는 미래의 편린을 슬쩍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총명하면서도 어딘가 구름 속을 헤매는 듯한 소녀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모든 사람이 저의 살고픈 대로 살게끔 하고 싶다는 그 꿈은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위험했다.
어쩌면 미치광이 방랑수도사들이 떠드는 것처럼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유럽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적어도 군주와 귀족들은 그렇다고 믿는 질서에 미칠 위협.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만약 몽상의 영역을 벗어나 진실로 이 땅 위에 그 꿈이 조금이라도 이루어지게 된다면, 겨우 실 몇 가닥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질서라는 허상은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다.
마르그레테는 침소 곁의 작은 방으로 에릭을 불렀다. 한참 바깥을 바라보던 마르그레테가 마침내 정적을 깨뜨렸다.
“시그리드 그 아이에게 정 용병단을 차리고 싶다면 차리라고 하였다. 푸른사자 용병단을 따라 참전할 수 있도록 해주려무나.”
“예? 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 회사라는 것을 차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 마르그레테와 에릭 모두 용병단 일에는 무관한 몸. 그러나 마르그레테는 에릭에게 푸른사자 용병단의 실무를 맡겨둔 터였다. 성공한다면 좋은 경험을 얻게 될 것이요, 실패한다면 겸손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것은 네가 직접 그 아이에게 물어보거라. 어차피 지난 석 달 간, 계속 그 아이 주변을 맴돌거나, 아니면 맴돌 생각에 골몰해 있거나, 둘 중 하나 아니었더냐?”
잠깐 뜨끔하던 에릭은, 곧 저의 속마음을 감추어본들 허사임을 깨달았다.
“맞습니다. 시그리드 그 아이를 제 곁에 두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은 손에 꼭 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심한 세상의 파랑 속에서 영영 놓쳐버릴 테니. 그것이 에릭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번번이 실패했겠지. 그 아이가 품은 꿈은, 네 머리 위에 얹힌 세 개의 왕관쯤은 가볍게 여길 만큼 웅대하니까.”
“... 그렇습니다.”
법적으로 에릭의 아내인 잉글랜드의 필리파는 또래 여인들보다도 성숙이 늦었다. 그러므로 에릭 또한 필리파 대신 다른 여인들에게서 간혹 밤의 낙을 얻곤 했다.
그런 여인들은 대개 에릭의 이름에 붙은 권력에 매혹되고, 그 다음에는 에릭의 외모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그런 여인들과는 다른, 진심으로 마주앉아 이야기 나누고 싶은, 그리고 낮에든 밤에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처음으로 자아낸 여인은, 안타깝게도 둘 중 어느 하나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필리파 그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마. 왕위에 오른 자들이 정부를 두는 것이야 딱히 부끄럽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니.
허나 이것 하나는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이다. 시그리드 그 아이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어째서입니까?”
모왕에게 사사건건 말대꾸하는 것은 평소와 같았으나, 그 어조는 훨씬 거셌다.
허나 평소 에릭이 대들 때의 대꾸와는 다른, 부드러운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아이가 가능한 한 부드러운 방식으로 실패하기를 바란다. 세상의 벽에 정면으로 부딪히기 전에 먼저 좌절하기를, 그리하여 속에 품은 아름다운 꿈을 꿈으로서 간직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린란드를 살리기 위해 먼길을 떠나온 시그리드에 대한 동정과 연민, 시그리드가 자신의 용병단을 이끌고 나서고자 한다면서 밝힌 허황된 포부. 그리고 그럴 공산은 크지 않지만, 그 포부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졌을 때 일어난 파란.
만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금까지 여왕이 추어 왔던 끝없는 원무를 재개할 때였다. 한자 동맹과 기사단국 등 숫한 이웃나라들과의 관계에서 그러해 왔듯, 이번에는 시그리드에 대한 연민과 경계 사이에서.
“네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날개가 꺾인 뒤에도 늦지 않다.”
“그러면 제가 그 꿈을 꺾기를 바라십니까?”
“내 분명 거리를 두라 하지 않았더냐? 그린란드의 시그리드는 둘 중 하나다. 출신과 사연이 비범할 뿐 나머지는 범상한 몽상가거나,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세상에 들이닥칠 전례 없는 풍파의 전조거나.
전자라면, 우리가 굳이 가까이할 이유가 없다. 후자라면, 우리 삼국으로서는 도저히 가까이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그 앞을 가로막아서도, 그 뒤를 받쳐주어서도 안 된다.”
차마 그 꿈을 스스로 짓밟을 수는 없던 마르그레테가 정한 내린 결론은 이러하였다.
‘결국 돌고 돌아 그 균형 이야기입니까? 여기서까지요?’라는 말은 에릭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씀, 마음 속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미 에릭은 알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온 그 토르스테인이라는 촌동네 상인. 왕의 권위로 윽박지르자 자신이 그 동녘정착지라는 벽지에서 겪은 이야기를 감춤 없이 그대로 털어놓았던 그자로부터,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냈다.
그린란드 땅에 만연해 있던 이단. 그 이단과 신앙인들 사이를 중재하고 나선 시그리드.
그리고 중재를 위해 나선 시그리드가 그린란드의 그 조촐한 팅에서 드러내 보였던 검은 책.
검은 책에 담겨 있던, 번개를 불러내는 비술祕術.
그러므로 총이라는 신무기 역시 검은 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또 무엇이 들어있을 것인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이 담겨 있을 것인가?
시그리드에 대한 집착과 검은 책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느새 조금씩 뒤섞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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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분이 생기자마자 전근대의 전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전쟁이 선포되고, 교전이 시작되기 무섭게 양측 모두 턱없이 전쟁 준비가 부족함을 깨닫고 바로 휴전에 합의하는 이 해괴한 상황은 놀랍게도 원 역사의 폴란드-리투아니아-튜튼 기사단 전쟁에서도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변경된 점은 고작해야 개전 시점이 1년 당겨진 (1409 → 1408) 정도지요.
* 1408년 기준으로 구천 노블은 대략 금 70kg 정도에 해당합니다.
* 빙해氷海는 북극해 및 북극권 근처 북대서양의 총칭으로 종종 쓰이던 표현이었습니다.
* 아홉 위인이란, 중세에 가장 모범적인 기사로 칭송받던 위인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세 명의 이교도(헥토르·알렉산드로스 대왕·율리우스 카이사르), 세 명의 유대인(여호수아, 다윗, 유다 마카베오), 세 명의 기독교인(아서 왕, 샤를마뉴,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일컫는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