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태어나다 (1)
4. 거칠게 태어나다 Born To Be Wild – 스테픈울프 (1968) (1)
코펜하겐에 당도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시그리드와 그린란드인들은 뜻한 바를 여럿 이루었다.
비록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꽤 있기는 했지만, 여하튼 그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로스킬데 궁정의 눈길을 끌었고, 그 덕에 많은 소득을 올렸다.
용병단을 꾸릴 수 있게 되었고, 아이슬란드 유력자들의 훼방으로 무산될 줄 알았던 회사 설립도 면허장까지 받아 거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파울 신부는 주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거 막상 이렇게 헤어지려니 섭섭하구려.”
스베인은 영 섭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새 정을 붙였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동녘정착지를 멀쩡히, 아니, 이전보다도 더 좋게 가꾸어둘 테니.”
비꼬는 듯하면서도, 은근슬쩍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라는 암시를 하는 파울 신부였다.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말거라, 시그리드야. 그리고 고맙다. 네가 가르쳐준 것들이 많이 도움이 될 게다.”
“제가 뭘 얼마나 도와드렸다고요. 다 욘 덕이지요.”
신생 그린란드 회사는, 이름은 벌써 코펜하겐의 길드 거리에 뜨르르하게 퍼져 있었지만, 정작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는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북쪽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한다는데, 잉글랜드인들이랑, 바스크인들이랑... 그 이상은 잘 모르겠군그래. 뭐, 대구나 청어가 비싸게 팔리는 것 생각하면 수익이야 꽤 날 걸세. 우리 여왕 폐하께서 어디 허투루 그런 면허장을 내주셨겠나?’
이 정도가 코펜하겐에서 가장 소식 밝은 상인에게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도맡아야 했다. 우선은 그린란드부터, 그리고 적당히 간을 보아가며 슬슬 아이슬란드까지 장차 북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다리 역할을 할 그린란드 회사의 기반을 다지는 중임.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 그리고 아마 소식을 들으면 일전의 그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싹 집어치우고, 저는 항상 시그리드‘님’의 혜안을 믿었다며 달려올 브리스톨의 리처드 등등. 딱히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선량한 사람들이 정직하게 저의 이익만 위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시그리드와 파울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아라비아 숫자*나 회계의 기본 등, 검은 책에 들어 있는 지식 중 파울의 새 세속적 직무에 필요한 것을 속성으로 가르쳐 주었고, 파울 역시 욘이 동녘정착지를 관리·감독하던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가락이 있었으므로 금방 배우고 또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나갔다.
“그러면 삼천 노블을 어떻게 나눌 생각이냐, 시그리드야? 저 회사랑 우리네 용병단 사이에서 어떻게든 분배를 해야 할 텐데.”
“듣자하니 그 삼천 노블도 시민 하나하나에겐 큰돈이지만 용병단 하나 꾸리기엔 많이 빠듯할 것 같던데.”
스베인과 파울이 번갈아가며 물었다.
그 말마따나, 얻은 소득이 많은 만큼 앞으로 넘어야 할 벽도 높다는 게 문제였다.
초장부터 기사단국을 필두로 동유럽의 어지간한 군주와 용병들이 모두 개입할 대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은 기회인 동시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시그리드가 처음 생각했던, 고작해야 소소하게 강도나 해적 잡는 정도의 규모로는 그런 전장에 발을 들일 수도 없을 것이었다.
“삼천 노블을 모두 용병단 세우는 데 쓸 생각이에요.”
“뭐? 그러면 파울 이 사람네 회사는 어쩌고?”
“미리 생각해둔 게 있어요.”
시그리드가 리프를 새장에서 꺼내주며 씩 웃었다.
백송고리와 함께 다니는 소녀의 모습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닌지라, 그들이 머무는 여관에서 바로 대로로 나오면 쭉 펼쳐지는 길드 거리의 상인들은 이제는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사람들이 지나가면 아는체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이들 친절한 이방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인들은 평소와 조금 다른 대꾸를, 아니, 사업 제안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그린란드 회사에 투자를 하라고?”
“네, 플랑드르에서는 다들 이렇게 한다던데요.”
욘이 그 옛날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룰 때, 저지대에서 ‘근대적’ 주식회사의 모태가 나타났다고 했던 것을 떠올린 시그리드는 대충 둘러대었다.
“플랑드르에서? 나는 알프스 남쪽에서 그런다고 들었는데, 플랑드르까지 퍼졌나 보구나. 뭐, 어쨌든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정말로 뭔가를 아는 상인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고,
“플랑드르! 아, 그렇지, 그래. 당연히 알고말고.”
차마 그린란드 시골 소녀도 아는 것을 상인으로 잔뼈 굵은 자신이 모른다고 할 수는 없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국왕이 – 그러니까 영 미덥잖은 포메른의 에릭이 아닌, 마르그레테 여왕이 – 직접 면허장을 발급해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뤼베크 시에서 수출되는 소금이 북쪽 바다의 생선과 만나면 엄청난 수익을 낸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
“그러면 투자하실 만큼의 금액을 열흘 안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현금이 어렵다면, 지급을 보증하는 뭔가를 대신 주셔도 되고요. 그러면 투자를 받은 것으로 저희 장부에 기록하고, 여기 이 증명서를 드릴게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그리고 현명한 국왕 폐하의 도움으로 가르다르 주교좌에 오르게 될 저,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이 이를 보증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이왕 서로 돕기로 한 김에, 상점 벽을 조금 빌릴 수 있을까요?”
지나가듯 툭 던지는 물음에, 상인 대부분은 그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동의를 받았으니, 투자자와 용병 지망생을 구하기 위한 광고를 내도 뭐라고는 못할 터였다.
광고를 종이에 인쇄해서 뿌리자니, 목판인쇄술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 열악한 현실은 차치하고 당장 종잇값부터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남의 상점 벽에 그림을 그리면 그만일 테다.
“야, 이거 재밌는데?”
“조심해서 하세요. 지우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하니까.”
그린란드 사람들이 사다리와 물감을 들고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길드 거리 좌우에 늘어선 건물 벽에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가 구경하던 코펜하겐 시민들은, 곧 기묘한 그림 두 장을 보게 되었다.
욘이 심심풀이로 끄적이던 목탄 그림 - 아직 이 시대에 나타나기엔 한참 이른 만화풍 그림 – 에서 배운 화풍으로 시그리드가 직접 도안을 그리고, 그린란드 사내들이 물개 가죽 다루던 솜씨로 도려내어 만든 가죽 스텐실.
‘단기 고수익 보장! 그린란드 회사에 투자하세요!’
한쪽에는 고래와 대구, 그리고 황금을 가득 들고 기뻐하는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글귀를 미심쩍게 여기기에는 아직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충분히 보지 못한 – 애초에 겪어보지도 못한 – 코펜하겐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튜튼 기사단 때려잡고 거하게 한탕 벌자! 백송고리 용병단에 지원하라!’
글귀 아래, 스베인을 모델로 한 건장한 사내가 몽둥이로 투구 입은 기사 머리통을 야무지게 내려치는 그림이 드러났다. 우스꽝스럽게 짜부라진 투구 바깥으로는 은화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교회에서 무어라 할 것을 염려해 기사단의 십자 문양은 눈치껏 생략했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 설령 글자를 모른다 해도 - 다들 눈치껏 (특히 은화 부분을) 알아보는 듯했다.
“거 누가 지었는지 이름 참 듣기 좋다니까.”
스베인이 저의 작품을 감상하며 말했다. 라틴 문자는 여전히 읽지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는 여전히 ‘매의 단’이 더 낫다고 보는뎁쇼.”
리프가 콜그림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놈. 매랑 백송고리랑 같냐? 봐라, 리프도 뭐라 하잖냐.”
대충 그렇게 여기저기 ‘광고’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길. 헌데 길드 거리에서 여관 있는 뒷골목으로 들어가는 그 길목에 갑주 차려입은 사내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에릭의 아들 옌스요*. 푸른사자 용병단에서 그럭저럭 중요한 자리 하나를 맡고 있소.”
시그리드 일행의 용모는 이미 알고 있다는 양, 대뜸 자기소개를 하는 사내였다.
“너무 지저분해서 도저히 저 안쪽으로는 들어갈 엄두가 안 나더군. 이 정도만 안쪽으로 들어와도 주변에 이목은 없으니 괜찮을 게요.
용병단은 올 겨울에 배로 출발할 것이오. 그래야 휴전이 끝나는 내년 봄이 되기 전까지 폴란드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그대들이 정녕 전쟁에 나서고자 한다면,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게 상책일 게요. 이 사실을 알리러 왔소.”
코펜하겐에서 폴란드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배를 타고 발트해 맞은편 슈테틴Stettin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자유도시 슈테틴의 종주권은 그 주변을 영지로 삼고 있는 에릭의 본가 그리핀 가문에게 있었으므로, 오가는 배편이 막힐 일은 없었다.
“슈테틴에서부터는 육로로 이동해야 하오. 그러니 그대들이 정 이번 전쟁에 참전코자 한다면, 잠자코 우리 뒤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게요. 영주든 농노든, 용병단이 지나가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니.”
“집결지가 정해졌나요?”
시그리드가 묻자, 옌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
“어허, 우리 단장님 앞에서 말이 짧구려.”
성의없음을 넘어 업신여김이 느껴지는 짧은 대꾸에 스베인이 한 소리 하자, 길바닥을 뚫을 듯한 한숨이 이어졌다.
옌스로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저들 그린란드 촌놈들이, 마치 마상창시합이 열릴 때 어설프게 기사들을 따라하며 웃음을 주는 어릿광대처럼 용병단 행세를 하며 그들 뒤를 따라온다면 막지 말라는 지시.
그리고 그보다 더 은밀한 곳에서 내려온, 저들이 원한다면 데리고 전장에 나가되, 가급적이면 저 같잖은 여자아이가 이쪽에 목숨빚을 지게 만들라는 지시.
저 기묘한 소녀는 어떻게든 지엄한 분들과 엮인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행색이 변변찮은 것을 보았을 때, 당장 저 소녀가 에릭 왕의 새 정부情婦로 들어가든가 할 일은 없을 듯하기도 했다.
한참 고민한 끝에 옌스는, 일단은 공손한 시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습니다. 집결지가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딘지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용병단에서도 고위직들 사이에서만 공유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우선은 슈테틴에서 동쪽 어딘가로, 육로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두십시오.”
‘슈테틴에서 동쪽 어딘가’이라면, 폴란드와 기사단국을 넘어 중국까지, 아니, 지구는 둥그니까 이론상 하늘 아래 모든 땅이 다 포함되는 두루뭉술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사견을 덧붙이자면... 저 ‘백송고리 용병단’이라는 것, 아직 늦지 않았으니 허튼짓 관두길 바랍니다.
삼천 노블이 큰돈인 것은 맞지만, 용병단 하나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용병단을 무장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 그리고 훈련된 군인을 모으는 비용. 이것들을 모두 감당하면서 유의미한 규모로 용병단을 꾸리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정 전장 구경하기를 바라신다면, 차라리 주보상인* 노릇을 하는 게 낫습니다. 어차피 그 무슨 길드인지도 하나 차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팔짱 낀 스베인은 콧방귀를 끼었다.
“그쪽 걱정이나 하쇼. 내 풍문으로 들으니 덴마크 군대, 아니, 용병들을 암만 긁어모아도 저 폴란드인가 뭐시깽인가 하는 곳 군대에 비하면 생쥐만할 것이라던데.”
“우리가 생쥐면 그쪽은 벼룩이겠군.”
막 언쟁이 벌어지려던 차, 시그리드가 잽싸게 나서서 막았다.
“말씀 고맙습니다, 옌스 경.”
그러나 용건은 다 전했던 옌스는 시그리드의 겉치레 인사에 굳이 상냥히 대꾸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로 용병단을 꾸릴 심산이라면 적어도 우리까지 비웃음거리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여인이 전쟁에 나서는 것도 이상한데, 용병단장까지 하려고?”
그러는 자신들이 지혜롭고도 관대하다며 추앙하는 마르그레테 여왕도 같은 여인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은 한 번도 옌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왕과 자신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부터가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전투를 앞둔 군대의 숙영지에 드나드는 젊은 여인들 – 그러니까, 전투원이 아닌 일종의 상인으로서 – 에 시그리드를 빗대지 않은 것만으로도 옌스 딴에는 자제한 셈이었다.
“거, 끝까지 재수없는 놈이로구만.”
저의 할 말 다 늘어놓고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등 돌려 사라지는 옌스를 보며 스베인이 툴툴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우리가 실적을 올리기 전까지는 계속 이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시그리드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어째 점점 주인 닮아가는 듯한 리프가, 멀어져 가는 옌스 등짝을 바라보다 휙 날아올라 쓰고 있던 모자를 낚아채 진흙탕에 버렸다.
“크하하! 잘했다, 잘했어!”
기사고 뭣이고, 유럽 남정네 태반의 숙명인 휑한 정수리는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저는 언제고 저리 안 된다는 확약이라도 어디서 받은 양, 후다닥 모자를 주워 연신 소매로 훔쳐대는 옌스를 보며 껄껄 웃는 스베인이었다.
실컷 웃고는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평소와는 뭔가 다른 모습이 그린란드 사람들을 맞이했다.
“이보쇼, 주인장. 장사 접으려고 하쇼? 뭔 짐을 그렇게 바리바리 싸는 게요?”
스베인이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괜히 전직 해적이라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님을 입증하는, 쌀쌀맞고 험상궂은 얼굴과 그에 상응하는 말투로 여관 주인이 대뜸 반문했다.
“기사단 놈들과 전쟁 나는 데 일조했다는 풍문이 있던데.”
“만분의 일 정도겠지만, 일조한 건 맞소.”
여관 주인은 에릭이 저의 여관에서 스베인에게 얻어맞는 것도 본 사람이었으니,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챘을 테다. 자신이 목격한 것과 뱃사람들 풍문을 종합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리라.
“그리고 전쟁에 직접 나가겠다며 용병을 모으고 있고.”
“네, 맞아요.”
“내 이름은 뤼베크의 헤니히요.”
이 여관에 묵은 지 거의 반 년이 되어가는데 한 번도 주인장 이름을 못 들었다는 것이 그제야 그린란드 사람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만약 그가 해적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설령 가명일지라도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 무뚝뚝한 말투로, 시그리드의 의심을 확인해주는 헤니히였다.
“일평생 여관 주인만 했던 건 아니오.”
“해적이었다면서.”
“급양형제단의 형제이기 전에는 뤼베크의 소금 밀매상이었고, 형제들이 나를 버린 뒤에는 고틀란드의 자경단원이었소.”
“자경단원이라고요?”
호기심이 앞선 시그리드가 스베인을 제치고 나와 물었다.
“기사단이 상륙했을 때 섬의 해적과 용병들 대부분은 부리나케 내뺐지만, 나를 포함해 몇몇은 남아서 농민들과 함께 버텼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전멸했지. 고작해야 해적 나부랭이 몇 놈. 일평생 땅만 파먹고 살던 무지렁이 몇몇이었으니.
나와 동료들은 그전에 내뺀 놈들이 숨겨둔 보물 위치를 실토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소. 한자 동맹 배들을 열심히 털어먹던 주제에 한자 도시로 다시 기어들어갈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대개는 여기 코펜하겐에 눌러앉게 되었소.”
숨겨둔 보물 따위 있을 리 없던 농민들의 운명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못된 놈이오. 바다 위에서 못할 짓을 많이 저질렀소. 그렇지만 고틀란드에서 보낸 자유로운 시절은 내 비루한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고, 우리와 곁에서 죽어갔던 이들은 우리와 달리 딱히 죄도 짓지 않았소.
이왕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놈들을 먼저 보내주고 싶소. 기사단 놈들의 그 잘난 갑옷을 꿰뚫을 무기가 있다고 들었소. 그대들이 몇 달만에 배운 재주를 나라고 못 배울까. 그러니 나를 용병단에 끼워주시오. 그러면 비슷한 처지의 잡것들 여럿 붙잡아서 함께 오리다.”
그 기나긴 이야기를 끝으로, 그들이 아는 과묵한 여관 주인으로 돌아온 헤니히에게 시그리드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단장님이라 부르겠소. 기사단 놈들에게 본때만 보여줄 수 있다면야.”
“환영합니다, 뤼베크의 헤니히.”
그렇게 악수가 오가고, 신생 백송고리 용병단은 보급관quartermaster 겸 신병 모집책을 얻었다.
시그리드의 도움을 받아 ‘임대’ 표지판까지 만들어 여관 앞에 붙인 헤니히는, 자신이 약속한 대로 정말 그날 저녁까지 사람 여럿을 끌고 왔다.
“저기, 시그리드야, 저대로 괜찮겠냐?”
딱 보아도 헤니히와 비슷한 연배의,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하지만 그 흔적이 주로 얼굴의 주름살과 불룩 나온 배에 집중된 이들. 그리고 시정잡배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으로 지칭하기가 어려운 이들.
“뭐, 광고도 딱히 멀쩡한 사람들이 보고 찾아올 걸 기대하고 그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삼천 노블이라는 돈으로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그리고 시그리드가 유럽 곳곳을 들쑤시며 벌일 온갖 일의 후과로부터 시그리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용병단을 만들 수 있을까?
시그리드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인건비 절감.
“그게 이 총이 지닌 진짜 힘이거든요. 갑옷을 멀리서 꿰뚫는 것도 꿰뚫는 거지만, 우리처럼 싸움과 별 연 없는 사람들도 고작 한두 달 훈련으로 능숙하게 그런 솜씨를 보일 수 있다는 것 말예요.”
그렇다면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기사나 경기병, 석궁수를 끌어드니느니, 저렇게 불한당과 무뢰배들을 모아서 훈련시키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훈련을 시킨다고?”
“부탁해요, 스베인. 그게 그러니까...”
그 옛날, 욘이 무슨 기사쯤 되는 사람이라 여겼던 시그리드는 어떻게 하면 기사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욘의 옛날/시그리드의 미래(?)에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에서 일어난/일어날 일들을 주워듣게 된 것은 그 덕이었다.
욘에 따르면, 정예군인 양성을 위해서는 직각식사*를 필두로 온갖 불합리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한 법도 여럿을 상세하게 풀이하여 알려주려던 차, 무례한 휘파람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야아,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정말 아리따우십니다, 아씨. 이 번화한 도시에서 밤을 홀로 보내신다면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닐 텐데...”
저의 버릇 못 버리고 수작을 걸어오는 새파랗게 어린 – 그러나 싹수는 노란 - 놈이 하나 있었다.
시그리드가 무어라 창의적인 대꾸를 생각하기도 전에, 어린놈 고개가 퍽 하는 굉음과 함께 앞으로 확 꺾였다.
“단장님께 못하는 소리가 없다.”
지난 십 년을 회한을 품고서 살아온 헤니히는 저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저에게 그런 기회를 준 소녀를 업신여김으로써 초장부터 분위기를 흐리는 작자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정도야 예삿일이었다.
“얼레? 주인장, 언제 그런 몽둥이를 마련했소?”
“이게 그린란드 풍습 아닌가? 지난번에 보니까 자네도 이렇게 하드만.”
“우리 풍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잘 하셨소. 더 패시지 그러시오.”
“잠깐! 잠깐만요.”
시그리드가 끼어들어, 저의 뒤통수 싸매고 쓰러진 젊은이를 일으켜 세웠다. 얼떨떨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시그리드가 물었다.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기로 하신 것 맞지요? 계약기간 동안 그에 상응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지실 거고요?”
“네? 어, 네. 네.”
얼이 살짝 빠져 있던 젊은이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섣부른 동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자본주의를 모르는 세계 출신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네, 됐어요. 자, 마저 하세요.”
“알겠소, 단장.”
“예절에 맞는 게 뭔지 알기 전까지는 그냥 맞아야지. 자, 이리로 와라.”
그렇게 시작한 곡소리는 한참 이어졌다.
시그리드에게 추파를 던졌던 놈들, 그냥 젊은 처자가 보이면 희롱하는 게 습관이라 저의 버릇대로 하려던 놈들 등이 하나같이 먼지 나게 얻어맞은 뒤, 신생 용병단은 헤니히의 여관을 벗어나 푸른사자 용병단이 머무는 교외 들판 옆에 터를 잡았다.
파울 신부는 주교 서품을 준비하는 동안 틈을 내어 훈련 물자와 여타 용병단 살림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점점 계절은 가을을 지나, 출발이 예정된 겨울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기사 옌스 말마따나 진짜 용병단 옆에서 흉내를 내는 광대 모임 같던 백송고리 용병단은, 여전히 광대 꼬락서니를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그들 무리 중 그나마 귀족에 가까운 자가 스베인과 시그리드였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야, 아가씨, 그 흰매 근사한데요? 저도 매사냥 하면 좀 아는데, 어디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라도... 으억!”
“이런 싹수 노란 놈을 보았나!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놈이 벌써부터 우리 단장님을 희롱해? 내 네놈에게 우리 용병단에 맞는 예절을 보여주겠다.”
‘우리도 못하는 것을 감히 신참이 하려 하느냐’하는 속마음을 감추며, 이 용병단에서 가장 먼저 얻어맞은 기록을 세운 불량배 한스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점점 용병단 덩치가 불어나면서 시그리드와 함께 물자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된 헤니히가 넘겨준 몽둥이었는데, 한스는 자신의 이 알량한 권위를 제법 진지한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스베인이 ‘이방인 욘의 비법’에 따라 열심히 신참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어쭈, 고개 돌아가지? 총 쏘는데 앞을 봐야지, 옆을 보고 있어? 아니면 그게 네 면상의 앞부분이냐? 하기야, 네놈 ‘옆모습’은 도저히 사람 면상처럼 안 생기긴 했더랬다.”
총을 쏘기에 앞서 총 모양 나무조각을 가지고 제식훈련을 하던 중, 옆에서 벌어진 소란에 고개를 돌린 신참 하나가 오늘의 갈굼 대상이었다.
“그, 이건 진짜 총도 아닌데...”
“이야, 말대꾸까지 하는구만. 야! 한스! 요즘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
“에고고, 죄송합니다, 나리. 제가 꼭 오늘 중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돌려보내겠습니다요.”
그러나 이런 고된 훈련에는 보람도 있었다.
시그리드가 화약과 탄환을 마련해 올 때마다 하는 사격 훈련. 수없는 욕설과 매질로 숙달된 그 솜씨를 발휘할 때면, 코펜하겐과 그 교외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 사이에 휩쓸린 척하면서 슬쩍 푸른사자 용병단 사람들까지 와서 구경을 하던 것이다.
그래, 그들은 어쩌면 용병 시늉을 하는 어릿광대에 불과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설령 두터운 갑옷 차려입은 기사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상대할 수 있는, 번개와 불꽃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광대였다.
그 힘이 지니는 의미를 반추할 겨를도, 지성도 없는 평범한 용병이라도, 사격을 구경하러 온 관객들의 탄성 속에서 어렴풋이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그 무렵, 로스킬데 궁정의 신료가 ‘우연히’ 슈테틴 시에 들려서는, 역시 어쩌다 보니 그 도시에 들린 폴란드 사람에게 이번 전쟁에 참전하기로 한 덴마크 용병들의 명단과 정보를 ‘유출’하는 일이 있었다.
튜튼 기사단에게 모욕을 당한 저들의 국왕을 위해, 그리고 전쟁이 가져올 짭짤한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덴마크의 푸른사자 용병단이 기사와 경기병, 석궁병과 보병을 합해 이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움직일, ‘촌놈과 불한당, 전직 해적까지 뭉쳐서 도합 삼백 명에 불과한 오합지졸’이라는 진상에 가까운 설명 대신, ‘최신형 화포 삼백 문 및 그 운용 인원’이라는 거창한 소개가 붙은 백송고리 용병단.
9개월의 휴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 본격적으로 결전을 준비하던 폴란드의 요가일라와, 그의 평생의 앙숙이자 혈육, 악연 가득한 동맹이기도 한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의 작전회의까지 올라간 명단에는 그 두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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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비아 숫자는 이미 12세기에 이탈리아 상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지만, 15세기 초중반까지도 알프스 이북에는 단편적·간헐적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옌스 에릭손은 덴마크 기사 집안 출신의 실존인물로, 포메른의 에릭이 몰락하는 단초를 마련한 1434년 엥엘브레크트 반란의 원인제공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소 조야하게 비유하자면, 동학농민운동과 고부군수 조병갑의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 14세기까지도 고틀란드의 중심지인 비스뷔Visby 시를 제외한 나머지 농촌 지역은, 자체적인 팅을 보유한 자치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농민들은 자신들의 자치권을 지키는 데 진심이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외지인들에 대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대응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잔혹하게 진압당했지요. 일례로 1361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마르그레테의 아버지)가 고틀란드를 침공했을 때, 농민들은 명백한 수적·질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꾸려 맞섰습니다. (2000년대에 발굴된 이들의 유해는 중세 백병전 양태를 고증하는 데 좋은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1398년 튜튼 기사단이 고틀란드를 침공했을 때의 기록은 확실치 않지만, 그 이후 1408년 섬이 다시 덴마크에 양도될 때까지 섬 전체에 기사단이 일종의 계엄 상태를 유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간 저항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육해공을 막론하고 유명한(?) 가혹행위인 ‘직각식사’(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팔을 직각으로만 움직이며 식사를 하는 것)는 미국 사관학교 문화가 국군 창군 초기에 들어와 퍼진 것입니다. 보다 깊게 들어가면 제식훈련과 군 가혹행위는, 보다 ‘근대적’인 군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동전의 양면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