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6화 (16/116)

거칠게 태어나다 (2)

4. 거칠게 태어나다 Born To Be Wild (2)

비스툴라Vistula 강물은 흐른다. 아름다운 폴란드 땅의 풍요로운 초원과 농지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저 강물, 폴란드의 젖줄에 그 옛날 반다Wanda 공주가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늘 그렇듯 이 풍요로운 땅을 탐내는 독일인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저 강물의 끝, 바다로 이어지는 그곳은 독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탐욕스럽고도 교만한 족속들의 거점, 기사단국의 수도 마리엔부르크.

그러나 그것도 이제 오래 남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들의 오만함을 징벌하고야 말 것이다.

폴란드 땅에서는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주 요가일라는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호쾌하게 웃었다.

“놈들은 저 강물이 저들을 지켜주리라 안심하고 있겠지.”

“비드고스치에서 벌이고 있다는 그 양동작전, 나름 괜찮은 발상이었소. 듣자하니 꽤 효험도 보고 있는 듯하고.”

앙숙이자 혈육, 그리고 이번에는 동맹인 저의 사촌동생 요가일라의 웃음에 함께하는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였다.

폴란드 땅에서 마리엔부르크를 치는 가장 빠른 경로는, 브롬베르크라고도 부르는 비드고스치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쿨름 인근의 기사단 요새들이 뚫리면, 마리엔부르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하나, 그 도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거대한 천연 해자 비스툴라 강밖에 없을 것이었다.

지난 9개월의 휴전 동안, 폴란드 군세는 비드고스치에 모여들었다. 보헤미아와 실레지아, 덴마크 등지에서 모여들 용병들 또한 비드고스치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휴전이 끝나자마자, 비드고스치의 폴란드군은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쿨름 방면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 기사단은 요가일라의 군대가 비드고스치 방면에서 곧 본격적으로 움직이리라 예상하고, 그쪽에 저들의 주력을 배치해 놓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비드고스치의 군대는 양동부대에 불과했다. 그곳으로 향하던 용병들은 도중에 집결지가 한참 동남쪽으로 떨어진 체르빈스크로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을 것이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가용한 모든 군대가 모이고 있는 곳도 이곳이었다. 이곳 체르빈스크에 설치된 부교를 통해, 폴란드군과 용병들은 비스툴라를 도하하고 있었다.

비스툴라 강이 해자 역할을 해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기사단장 울리히는, 강 맞은편에 있어야 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붉은 바탕에 하얀 염소. 루블린 연대banner*입니다, 폐하!”

국왕 직속 크라쿠프·대폴란드 연대를 이끄는 마시코비체의 진드람이 달려와 고했다.

“때맞추어 하나씩 도착하는군.”

숙적이자 동맹인 요가일라에게 비타우타스가 화답했다.

“내 다른 건 몰라도, 조직을 다루는 그대의 재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소. 고작 일주일만에 이만한 병력을 집결시키다니.”

청-백 깃발에 수놓아진 금빛 사자. 르부프 연대가 루블린 연대 바로 뒤를 이었다.

이어서 나타나는 마조비아의 두 연대.

굽어진 길 위의 십자가. 스레니아바 깃발을 휘날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연대.

“리투아니아 쪽은 어떻소?”

“일주일 안으로 사십 개 연대가 모두 집결할 게요. 기사단 놈들이 그 저주받을 이교도 추장 에디구Edigu를 끝내 끌어들이지 못한 덕이지.”

작년에 모스크바를 불태운 금장한국*의 군벌 에디구는, 이번 전쟁 소식을 듣고 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모스크바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리투아니아와는 악연이 많다 보니, 이 기회에 기사단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칠 심산인 듯했다.

허나 기사단이 이교도와 한편에 서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는지, 에디구는 끝내 성과 없이 철군하게 되었다.

“첩자들이 보고하기로는 기사단이 거절한 게 아니라 진중에 역병이 돌아서 철군을 결정했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오.”

그랬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광경. 그리고 그 광경이 약속하는 영광이었다.

깃발의 수는 이미 쉰 개를 훌쩍 넘겼고, 종국에는 일백에 육박할 예정이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덴마크, 그리고 그들의 대의(와 재물)에 이끌린 여러 나라의 용병들까지.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아는 한, 이토록 많은 수의 깃발이 한데 뭉친 적은 없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비스툴라 강 위의 부교는 오늘도 군사들의 행렬로 가득했다.

비스툴라 강물은 흐른다. 전쟁과 기근으로 텅 빈 마을과, 돌보는 사람 없는 황폐한 농지를 지나면서.

푸른사자 용병단의 뒤를 바짝 따라 움직이는 백송고리 용병단. 그 용병단을 이끄는 그린란드 소녀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그러하였다.

용병단은 바다를 건너 슈테틴에 닿고, 거기서 다시 여러 번 강을 건너고, 도시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들판을 지났다.

사람이 있다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빈궁함에 몸부림치는 마을. 무장한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부리나케 숨는 농민들.

시그리드의 손과 머릿속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이 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저 그러려니 하고서 받아들이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마음이 쏠린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시그리드로서는, 홀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일까? 날씨는 따뜻하고 땅은 비옥하건만, 그런 곳일수록 더더욱 사람들은 고통과 궁핍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중세의 질서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어나갔고, 삶의 중심이어야 할 교회는 둘로 나뉘어 저들끼리 싸웠다.

질서를 만들고 지켜온 자들. 저들이 행하는 바의 선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은, 질서가 흔들릴수록 더욱 굳세고 거친 손길로 주변을 억눌렀다.

그 결과가 지금껏 시그리드의 눈에 들어온, 황폐한 풍경일 테다.

이방인 욘은 이렇게 말했다.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유럽은 비로소 근세로 들어서는 첫발을 내디뎠다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임금은 올랐고, 농노들은 장원을 벗어나 점점 그들의 지주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그런 서술은, ‘시대의 흐름’이라는 게으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후대 역사가들만의 특권이리라.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탄압과 저항, 반란과 억압이 있었을지, 시그리드는 알지 못했으나 짐작할 수는 있었다.

“다 왔다!”

“맙소사, 정말 엄청난 군대로군! 저 깃발들 좀 보게!”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을 잠시 접어둘 때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비스툴라 강줄기 어드메, 그 강의 허리춤에 둥둥 떠 있는 부교와, 강 건너편에 꾸려진 거대한 숙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덴마크의 푸른사자 용병단 되시오?”

부교 앞을 지키던 폴란드 궁정의 서기관 하나가 달려왔다.

“아니, 그건 우리 앞쪽의 기사 나으리들이고, 우리는 백송고리 용병단이올시다. 여기 깃발 보시오.”

“백송고리 용병단? 어디 보자... 그렇군. 먼길 오느라 고생들 하셨소.”

한참 깃발과 저의 손에 들린 명단을 번갈아 살피던 서기관이 아무런 진심 느껴지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보다시피 집결지는 여기가 아니라, 강 건너편이라오. 여기서 후발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모두 모이면 그때 건너가도록 하시오. 워낙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한 번 섞이게 되면 걷잡을 수 없소이다.”

“후발대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보쇼, 암만 용병이라지만 군기는 지키시오. 선발대에 주보상인이 따라붙는 경우도 있소?”

말이 점잖아 ‘주보상인’이지, 시그리드를 위아래로 살핀 서기관 머릿속에 떠오른 인상은 분명 주보상인들을 따라다니는 다른 유형의 여성들에 가까운 듯했다.

“말조심하시오. 우리 단장님이시오.”

스베인이 슥 나섰다. 그 덩치,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는 큼직한 도끼 – 북녘사냥터에서 바다코끼리의 머리통과 몸을 분리할 때 쓰던 물건 – 는 확실히 사람의 편견을 깨뜨리고 유연한 사고를 촉진하는 효능이 있었다.

“하, 뭐.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랑 풍습이 다를 수도 있겠군. 여자가 이끄는 용병단이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오. 하기야, 이만한 군대가 모이는 걸 내 생전에 보게 될 줄도 몰랐지.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질문에 답이나 해주시오. 당신들, 백송고리 용병단의 선발대 아니오? 이게 끝일 리는 없지 않소.”

“우리가 전부인데요.”

“뭐라고? 아니, 여기 명단에는 분명 화포 삼백 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화포 삼백 문 맞는데요.”

시그리드가 저의 ‘궁니르’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뒤따르던 불량배 한스와 그 후임 몇몇도, 좋다고 저들의 총을 자랑스레 들여보였다.

“지금 장난하시오? 아니면 우리 폴란드를 무시하는 겐가? 대포와 수총handgonne 차이도 모를 줄 아시오?*”

“이건 수총이 아니오. 머스킷이라고, 대포와는 쓰임새가 다르지만 어쨌든 아주 강력한 무기요. 우리 단장님 건 그것보다도 더 매서운 궁니르, 아니, 라이플이고.”

처음 최신식 화포 삼백 문이라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요가일라의 궁정에 속한 그 누구도 그것이 진짜 삼백 문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용병 삼천을 고용하면 그중 진짜로 무기를 들고 있는 자가 이천에 불과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삼백 문 중에도 쓸만한 것은 한 삼십 문쯤 되고, 나머지는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한 물건이거나 허풍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단정하곤 했다.

그러므로 백송고리 용병단이 진짜로 삼백 정의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은, 여러모로 예상 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이 뜻밖의 사태를 맞이해 당혹감에 휩싸였던 서기관은, 곧 깨달음을 얻었다. 삼백 문 ‘화포’가 거짓부렁이든 아니든 어차피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니, 이 문제를 남에게 떠넘기면 그만이었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로군... 내 선에서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닌 듯하니, 우선은 강을 건너도록 하시오. 그리고 강을 건너는 즉시, 마스코비체의 진드람 경을 찾아가시오. 푸른 바탕에 이목구비가 달린 태양 문장을 찾아가면 될 것이오. 그분을 뵙고, 이 ‘신형 화포’의 쓰임새에 대해 남김없이 고하도록 하시오.”

시그리드는 서기관에게 뭘 더 묻고자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 뒤에 벌써 줄이 생겨 있었다.

“이봐! 우리는 실레지아에서 온 용병이다! 비엘룬 연대는 어디에 있나?”

대개 목소리 큰 자들은 그럴 만한 이유와 여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삼백 명의 용병단, 그리고 그들의 짐을 실은 마차까지. 결코 짧지 않은 백송고리 용병단의 행렬임에도 여기까지 쩌렁쩌렁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그들 뒤에 선 무리는 꽤 잘 나가는 용병단인 듯했다.

서기관은 시그리드 일행에게 얼른 가보라는 손짓만 하고는 부랴부랴 행렬 뒤쪽으로 달려갔다.

“아! 잘 오셨습니다! 비엘룬 연대는 이미 강을 건너서, 저기 저쪽, 프셰미실 연대 옆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기다린 끝에 강을 건너 숙영지에 도착한 시그리드 일행은, 이미 푸른사자 용병단 쪽에서 선수를 쳤음을 알게 되었다.

“아, 여기들 계셨구만. 진드람 경을 만나뵈러 가는 길이었습니까? 이제는 그럴 필요 없게 되었으니 안심하십시오.”

서기관의 말대로 진드람을 만나러 가던 시그리드와 스베인은, 도중에 일전에 코펜하겐에서 만난 적 있던 기사 옌스를 맞닥뜨렸다.

“뭔 수작을 부린 게요?”

“수작이라니, 말이 심하시구만. 오히려 그쪽에서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그 ‘화포 삼백 문’ 때문에 생긴 오해도 잘 풀었고, 배속 문제도 해결해드렸는데.”

“배속 문제라고요?”

시그리드가 물었다.

“여기 군대가 연대 단위로 편성되고 있지 않습니까? 외부에서 온 용병들도 그에 맞추어 여기저기 나뉘어 편성되든, 저들끼리 연대 하나를 꾸리든 하고 있지요.

우리 덴마크군, 아차, 덴마크 용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푸른사자 용병단의 기사와 경기병들은 연대 하나를 이루어 폴란드 국왕 폐하가 이끄는 기병대에 속하게 될 것이고, 석궁수와 창병들은 따로 연대를 꾸리게 될 것입니다. 백송고리 용병단도 이 연대에 들게 될 것이고요.”

“꿍꿍이가 뭐요?”

“아무래도 말이 서로 통하는 이들끼리 묶여 있어야 편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총이라는 물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는 지휘관도 여기는 없고요.”

코펜하겐 교외에 머무는 동안 푸른사자 용병단이 머스킷과 라이플 사격 시험을 여러 차례 참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필시 다른 속셈이 있을 터였다. 말이 같은 나라 사람이지, 실제로는 손발이 전혀 안 맞을 것이 명백했다. 더구나 어떤 응큼한 뜻 – 예컨대, 시그리드의 목숨을 일부러 위태롭게 한 뒤 구해주는 시늉을 한다던가 – 을 위해 함부로 백송고리 용병단을 험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시그리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스베인은 그냥 옌스가 싫어서 각각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데, 옌스가 먼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뭐, 정 우리의 이 관대한 처사를 받아들이기 싫으시다면야, 어디 다른 연대를 찾아보시든가요. 아니면 다른 용병단을 찾아서 함께 연대 하나를 새로 차리시든가.”

이론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토박이라면 모를까, 유럽의 동쪽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용병들은 대개 독일인이었고, 시그리드는 코펜하겐에서 머무는 동안 헤니히에게 독일어*를 배웠으니까.

그러나 한 번도 전장에서 검증된 적 없는 ‘보잘것없는 꼬마 화포’가 무장의 전부인 데다가, 머릿수도 적고, 심지어 그 우두머리는 여자이기까지 한 이 우스꽝스러운 무리와 함께하려는 용병단을 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어쩔 테냐?”

지난번에 귀한 교훈을 얻었는지, 옌스는 두건을 꽉 동여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리프였다.

그러나 스베인과 시그리드는 멀어져가는 옌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저쪽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호의는 아닐 거에요.”

“그러면?”

“일단은 한 번 주변에 우리 무기를 홍보라도 해 보지요.”

“홍보라고? 아, 코펜하겐 교외에서 했던 것처럼 사격 시범을 해 보자는 말이로구나.”

시그리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기사단을 상대해 왔던 노장 진드람은, 기사단이 종종 사석포bombard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기사단 사람들이 아는 한, 전쟁이란 대개 말 위에서 이루어지고 끝나는 것이었다. 당장 세상 반대편에서 온 타타르인들조차 이 상식에 동의하지 않던가. 그들이 알기로 전쟁에서 화약이란 향신료와도 같은 것이라, 종종 유용하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소녀는 사람의 눈길을 끄는 방도를 아주 잘 터득한 듯했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일말의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저의 막사 앞으로 찾아와서는, 구구절절 저의 ‘신형 화포’가 어쩌고저쩌고 늘어놓는 대신, 서두를 이렇게 뗀 것이다.

“이번 전쟁을 시작한 게 이 라이플인데, 구경 한 번 해 보시겠어요?”

솔직히, 사람인 이상 궁금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암만 갑주를 잘 차려입은 기사도 이 총 한 방이면 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답니다. 비록 위력은 거대한 화포에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기사 한 명을 육성하고 무장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이 총도 꽤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 작은 화포에서 어떻게 그만한 힘이 나온다는 말이냐?”

“그런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요.”

오산 기지에서 막 휴가 나온 존 윌슨 대위에게 어설픈 영어로 호객하던 동대문시장 상인 덕에 이런 유용한 인용구를 쓸 수 있게 된 시그리드였다.

“어차피 군대가 다 모이려면 아직 사나흘은 남았다고 들었어요. 공터를 마련해주시면, 한 번 실제로 이 라이플을 쏘아서 과녁 맞추는 것을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진드람은 흔쾌히 허락했다.

시그리드 생각에, 용병들, 특히 석궁수들과 소총병은 제법 좋은 조합을 이룰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 이렇게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면, 귀한 화약과 탄환 – 코펜하겐에서 주문제작한 미니에 탄 – 을 소비하는 것 이상의 효험을 얻을 수 있을 법했다.

그런 잡념을 떨쳐버리고, 시그리드는 뺨에 개머리판을 가져다 대었다.

욘에게 말로만 들었던 사격술을 코펜하겐 교외에서 몇 번이고 실습하면서 이제는 완벽히 숙달한 시그리드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참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아쇠를 당긴다.

다른 머스킷과는 다르게, 오직 이 라이플 ‘궁니르’에만 적용된 순발식 메커니즘에 따라, 용두가 화문을 들이받으며 불꽃이 일었다.

우렁찬 총성이 비스툴라 강 위를 부는 바람에 실려 퍼져나갔다.

“야, 명중이다!”

“역시 우리 단장님이시라니까!”

콜그림과 한스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시오! 저것이 바로 우리네 용병단의 실력이라오. 저 총 하나로 무슨 상대든 다 때려잡을 수 있소.”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오늘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앞으로 함부로 시그리드를 두고 험한 말을 못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효험은 없다는 것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그리드의 귀에도, 호기심에 이끌려 찾아온 용병들과 기사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뭐, 성벽 위에서 깔짝대는 적을 멀리서 족치는 데는 쓸모가 있겠군. 석궁보다야 사거리가 기니까.”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성벽까지 적을 밀어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암. 당연하지. 화포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쓸모는 있지만 딱 그뿐이지. 전쟁의 주역은 당연히 말 타고 달리는 우리들 몫 아닌가.”

“저기 저 덩치 큰 놈이 떠들기로는 달리는 기병을 저 작은 화포로 맞춘다던데?”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말을 놀라게 하는 데는 효험이 있겠네.”

“헛소리! 사석포도 쓰는 기사단 놈들이야. 그런 놈들이 부리는 군마가 고작 저런 꼬맹이 화포 소리에 놀라겠는가?”

저들끼리 갑론을박을 하는 듯하였으나, 자세히 들어보면 결국 시그리드네 용병단과 협력하려는 의향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허울만 좋고 실속은 없는 무리와 함께 대오를 이루게 되면 당장 저들의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이익을 내는 것이 지상 목표인 용병들로서는 오히려 기사들보다도 더 검증이 안 된 신무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검증이 되면 그때는 그 어떤 기사들보다도 더 신무기 확보에 혈안이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구경꾼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고, 먼발치서 측근 여럿을 대동하고 관람하던 이 – 아마 비타우타스나 요가일라 둘 중 하나인 듯했다 – 도 별 말 없이 돌아섰다.

이제 남은 것은, 저들끼리 잡담하느라 남들 흩어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몇몇 용병들, 그리고 주변 정리를 하는 헤니히와, 슬그머니 사라지려다 그 헤니히에게 붙잡혀온 한스와 그의 또래 불량배들뿐.

“어떻게 할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으로 슬쩍 다가온 스베인이 물었다.

“그러게요... 일단은 두고 봐야죠. 화약을 더 쓰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네 일제사격 솜씨를 보여줘야 하나.”

“그런다고 저놈들이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더 싫어할지도.”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그리고 나서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옌스 그 사람 말대로 덴마크 용병연대에 들어가는 수밖에요.”

아직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용병 중 하나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아주 좋은 무기요. 내 계획을 이루는 데는 최고겠군!”

선 굵은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텁수룩한 수염이며, 호탕한 웃음이 그대로 굳은 듯한 모습이며, 모두 호인好人의 상이었으나, 단 하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가 그런 인상을 흐리고 있었다.

“계획이라고요?”

“그렇소. 이번 전쟁 내내 후방에서 뒹굴다가 고향에 무사히 돌아가는, 실로 용기 있는 자만이 꾀할 수 있는 계획이지.”

그게 어딜 봐서 용기 있는 계획인지, 순간 시그리드는 자신의 독일어 실력을 의심하였다.

그 찰나의 의심을 동의의 증거로 받아들였는지, 애꾸눈 사내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아, 내 소개도 안 했구만. 트로츠노브의 얀이라오. 애꾸눈 지슈카라고도 부르지.”

몰락귀족 출신 도적으로, 이번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하는 조건으로 막 사면을 받은 터였던 얀 지슈카가 백송고리 용병단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 *** ---

* 오늘날에는 폴란드어로 비스와 강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례로 굳어진 비스툴라 강은, 크라쿠프, 바르샤바, 그단스크 등 폴란드 중심부를 지납니다. 이 강을 통한 곡물 수출은 훗날 폴란드의 번영에 크게 일조하게 되지요.

비스툴라 강에 전해 내려오는 반다 공주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크라쿠프 시의 창립자로 전해지는 전설적 인물 크라쿠스 왕에게는 반다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자색을 탐낸 독일인 족장 뤼디거는 반다를 자신에게 시집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원한을 품은 뤼디거는 얼마 후 크라쿠스가 사망하자 곧장 군사를 일으켜 폴란드 땅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때 반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반다 공주는 전장에서 뤼디거를 꺾었지만, 자신의 미색으로 인해 뤼디거 이후로도 계속 탐욕스러운 독일인들이 쳐들어올 것을 깨닫고 비스와 강에 몸을 던집니다. 놀랍도록 민족주의적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이미 15세기경 지금의 형태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깊은 감정적 골이 있음을 방증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튜튼 기사단 전쟁에 관한 연대기는 공통적으로 배너banner로 부대의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른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한 전력 기준으로, 요가일라의 폴란드군은 용병들까지 포함해 총 50개 배너, 비타우타스의 리투아니아군은 40개 배너,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이 직접 이끈 튜튼 기사단군은 51개 배너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군의 배너 하나하나의 모양새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당대 역사가들은 정작 양측의 총 병력 수는 기록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20세기까지도 폴란드와 독일 역사학계는 그룬발트 전투에 동원된 양측 병력수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측으로서는 선조들의 치욕스러운 패배를 어떻게든 평가절하하고자 하고, 반대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쪽에서는 선조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어떻게든 부풀리고자 하였기 때문이지요. 또한 각각의 배너 역시 그 인원수가 제각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은 킵차크 칸국을 유럽에서 부르던 이름입니다. 칸의 황금빛 천막에서 유래한 명칭이지요. 리투아니아는 몽골이 휩쓸고 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일대의 빈자리를 채우며 빠르게 성장한 국가인지라, 킵차크 칸국과 종종 충돌하곤 했습니다. 비타우타스 대공 역시 풍운아 티무르에게 밀려난 토크타미쉬 칸과 함께 킵차크 칸국 원정을 치른 바 있습니다.

망기트 부의 수장(에미르) 에디구는 이때 비타우타스와 토크타미쉬의 연합군을 패퇴시키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그는 무너져가는 킵차크 칸국을 지켜내고자 분발했는데, 티무르가 휩쓸고 간 틈을 타 슬그머니 독립을 추구하던 모스크바 등 러시아 공국들을 짓밟은 1408년의 원정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에디구가 기사단 쪽에 참전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작중의 허구로, 기사단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이 1년 남짓 앞당겨진 것의 나비효과입니다.

* 한자 동맹의 영향으로, 대략 17세기까지 동유럽 일대의 공용어lingua franca는 독일어, 보다 정확히는 독일의 한자 도시들에서 널리 쓰이던 중세 저지 독일어였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