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태어나다 (4)
4. 거칠게 태어나다 Born To Be Wild (4)
리투아니아 경기병들이 막 돌격하던 때, 진영 중앙의 거의 맨 뒤에 있는 그린란드 연대 사이에 은발 소녀의 머리통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우리 우익에 있는 리투아니아 군대가 앞으로 돌격하고 있어요.”
스베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는 시그리드의 이야기를 들은 얀 지슈카가 담담히 말했다.
“이제 시작하는구만. 하기야, 저쪽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든 응하는 시늉을 안 할 수는 없었겠지.”
시그리드를 목말 태운 스베인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기사단이 이 일대에서 패악질 부린 게 벌써 이백 년 남짓 되었소. 그게 무슨 뜻이겠소? 이백 년 동안 그 후과를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주변을 다 후려치고 다녔다는 게지.”
요가일라가 엄청난 군대를 모아야 했던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기사단의 주력을 물리칠 수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수하들이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니 요가일라로서는 물러날 수 없는 게요. 어차피 여기 그룬발트 언저리까지 온 이상 일전을 피할 수도 없게 되었던 데다가, 어설픈 도발이라 할지라도 응하는 시늉을 해야지, 안 그러면 마음속 어딘가에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봉신들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테니.”
이미 어제 저녁에 각 연대 지휘관들에게는, 이튿날 전투가 벌어질 경우에 대비한 작전계획이 다 전달되어 있었다.
“어르신 보시기엔 우리까지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 같소?”
“그럴 공산이 크지,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드레빈츠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결국 썩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이곳, 그룬발트와 타넨베르크 사이의 숲과 벌 사이에서 결전을 치러야 할 것이었다.
사촌동생 요가일라에 비해 전략안은 부족할지언정 장수로서의 재능은 훨씬 뛰어난 비타우타스 대공이 입안했다는 계획은 이러하였다.
먼저 경기병 위주로 구성된 우익의 리투아니아군이 기사단에게 선공을 가한다.
적당히 싸움이 무르익으면 리투아니아군은 패퇴하는 시늉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기동성 하나를 제하면 나머지 모든 것이 기사단보다 달리는 리투아니아군 전력이기에, 기사단 또한 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 전력 일부가 이탈한 틈을 타, 좌익의 폴란드-덴마크 기사들이 돌격한다. 기사단과 리투아니아군만큼의 격차는 아니어도 폴란드와 덴마크 역시 기사단에 비하면 전력은 한두 수 아래. 그러나 그를 만회할 만한 수적 우위가 있었다.
그처럼 연합군 기사들과 기사단 본대가 혼전을 벌이는 사이, 용병 보병 위주로 구성된 중앙도 차근차근 진격하며 기사단을 몰아붙인다. 기동성을 발휘해 추격하는 기사단을 따돌린 리투라니아군도 전장으로 돌아와 기사단 본대의 측면을 찌른다.
“싸움은 지구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날씨도 하필 쾌청하여 기사들 날뛰기엔 최적이라오.*”
“총 쏘기에도 좋고요.”
시그리드의 말에 수긍하면서 동시에 반론하는 지슈카였다.
“하지만 화약무기는 저쪽에도 있지.”
그 말에 화답하듯, 저 멀리 기사단 진영에서 사석포 여러 문이 불을 뿜었다. 고작해야 큰 바윗돌 따위를 쏘는 것이었으므로 큰 타격은 없었지만, 이만한 결전이 아니라면 전장에 나설 일도 없었을 몇몇 전마들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대열이 군데군데 흐트러졌다.
“더구나 보다시피 리투아니아군은 말 탈 줄 아는 이들이라면 다 끌고 온 모양인데, 거짓 후퇴라는 게 말이 쉽지 자칫하면 진짜 후퇴가 되기 마련이오.”
보헤미아의 숲속에서 몇 번이고 그런 전투를 치러본 지슈카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뭐, 그러면 잘 되었네. 우리가 전공을 세울 기회 아니겠소? 설령 우리까지는 순서가 오지 않더라도 꽤나 죽고 다칠 테니, 시그리드가 안배해둔 그 뭐더라, 하여간 그것도 쏠쏠하게 쓰일 테고.”
스베인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브라타흘리드 시절부터 스베인을 알던 그린란드 사람들은, 그 쾌활함이 겉치레에 불과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고작해야 북극곰이나 바다코끼리, 그리고 간혹 도깨비Skraeling 무리와 다투는 것이 전부였던 그린란드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녘정착지의 모든 인구를 합친 것보다도, 아니, 거기에 아이슬란드의 모든 사람까지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무와 신앙에 이끌려 이 벌판에서 부딪히려 하고 있는데.
그리고 저 싸움을 뚫고 어떻게든 두각을 드러내야만, 파멸이 예정된 그들의 고향을 구할 첫 발짝을 내딛을 수가 있을 터인데.
“걱정 마시오, 아가씨. 이 지슈카,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오. 우리가 싸움에 뛰어들게 되든, 아니면 적당히 기회를 보아 후퇴하든, 어느 쪽이든 아가씨네 용병단에게도 최선이 되도록 노력하겠소. 이때를 대비해서 지난 며칠 밤을 새지 않았소이까.”
그 말대로였다.
화약과 총기 보급의 한계로 – 코펜하겐 대장장이들의 솜씨는 나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이 시기의 제철 기술로는 총열 수명에 한계가 있었다 – 지슈카가 백송고리 용병단의 솜씨를 본 것은 고작 한 번의 일제사격 시범이 전부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슈카와 그의 부관들, 그리고 시그리드와 백송고리 용병단 사람들은 이곳 그룬발트까지 오는 도중에도 밤마다 머리를 맞대었다.
(전장에 나선 아리따운 처녀가 밤마다 사내를 저의 군막에 들인다는 것은 곧장 보잘것없는 작자들의 구설수에 오를 법도 했지만, 그런 소문을 입 밖에 내었다가는 그린란드 사내들의 주먹보다도 먼저 저들 대장의 성품을 잘 아는 지슈카네 사람들의 발길질이 들이닥칠 터였다.)
그 결과, 그들이 저 싸움판 속에 뛰어들게 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나갈지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합의를 보았다. 이제는 지슈카의 솜씨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그리드가 긴장 속에서, 지슈카의 눈 노릇을 하며 전장의 모습을 중계하는 동안에도, 리투아니아군은 기사단 전열에 부딪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튜튼 기사단의 단장, 융잉엔의 울리히는 이제 시작한 지 한 시간째에 접어든 전투의 모습을 언덕 위에서 조망하였다.
“단장 각하! 우리의 형제들이 리투아니아 이교도 무리를 패주시키고 있습니다! 추격의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사단원수Ordenmarschall인 발렌로데의 프리드리히가 보낸 전령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잠시 저 패주가 책략의 일부일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검토한 울리히가 곧 답했다.
“저 이교도들은 간교하기로는 사라센인들과 다르지 않다. 기사단원수에게 전하라. 추격을 허용하되, 지나쳐서는 안 된다.”
“예, 각하!”
전령이 물러나자마자 울리히는 목청껏 주변에 외쳤다.
“들어라! 곧 배교자 왕의 군세도 움직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또한 달려나가 온 힘으로 주님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미 그들 삶의 일부가 된 군율에 따라 본대의 지휘관 모두가 기사단장 근처로 모였다.
“때가 되었다, 형제들이여! 지시를 내리겠다! 대지휘관Grosskomtur, 리히텐슈타인의 쿠노!”
“예, 단장 각하.”
“여섯 개 연대를 이끌고 폴란드군의 정면을 쳐라!”
말없이 군례를 올리며 쿠노는 물러갔다.
“남은 열여섯 개 연대는 나와 함께 돌격한다. 앞서 돌격한 여섯 연대의 형제들이 적의 예봉을 꺾는 사이, 우리는 적 정면을 우회해 우익의 허리춤으로 찌르고 들어가 배교자 왕을 직접 공격한다.”
때맞추어 울리히의 귀에 반대편 폴란드군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가 메아리치며 전해왔다.
의문을 제기할 때는 이미 지났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일제히 투구를 쓰고 면갑面甲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지축이 울렸다.
오른쪽에는, 벌써부터 전투에 돌입한 쿠노의 부대,
왼쪽 멀리서 앞서나가는 것은, 이교도 군세를 흐뜨러트린 리히텐슈타인이 노련한 판단으로써 리투아니아군 추격에 전념하는 대신 말머리를 돌려 폴란드군 후방을 들이치게끔 한 여섯 개 연대.
아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이 죄악 가득한 세상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성직자는 신을 섬기고, 기사는 칼을 들며, 백성은 땅을 간다.
이는 신이 허락한 유일한 질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질서가 그들이 아는 한 가장 오래된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질서는 이교도들과 역병, 도처에 도사린 악마들의 농간으로 인해 항상 도전받는 질서였다. 그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리히와 그의 형제들은 이 땅에 섰다.
그들이 알기로 영원히 이어져왔으며 말일末日까지 이어져야만 할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를 아직 모르는 자들에게는 가르침을 주는 기사단.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은 거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거룩한 일에 대항하는 자는, 신을 모독하는 자, 배교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기사단의 대적大敵, 폴란드의 요가일라는, 반드시 거짓으로 개종한 자이거나 배교자여야만 했다.
“배교자에게 죽음을!”
어느새 배교자의 깃발, 크라쿠프·대폴란드 연대의 붉은 바탕 흰독수리 깃발이 눈앞에 다가왔다.
“깃발을 노려라! 저 깃발을 꺾어, 신의 정의와 우리의 올바름을 세상 모두에게 알려라!”
요가일라의 명령이 적 용병대에게 전해졌는지, 이미 짓밟히고 있는 첫 번째 줄을 구원하고자 두 번째 대열도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두 번째 대열마저도, 때를 놓치지 않고 좌익 쪽에서 달려온 여섯 개 연대를 맞이해 폴란드 기병들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모든 것이 가장 영광된 한 순간을 위해 향해가고 있었다.
“각하! 저와 저의 형제들은 배교자 왕이 정의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갑옷을 벗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저희에게 부디 기회를!”
혼전 속으로 뛰어들기 전, 잠시 주변을 살피는 울리히에게 평기사 하나가 말을 달려 다가왔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쾨커리츠의 디폴트Diepold입니다, 각하!”
“좋다! 돌격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전황의 급박함을 깨달은 요가일라는, 자신의 마지막 예비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없을 것이었다.
“우리도 가자꾸나! 덴마크와 폴란드 기사들 사이를 뚫고 들어간다!”
“예, 각하!”
소통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양측 사이를 뚫고, 크라쿠프의 깃발을 빼앗는다.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강철로 뒤덮인 인마가 한 덩이가 되어 앞으로 달려나갔다.
곧 랜스가 부러지고, 검과 철퇴가 볕을 보았다. 그 반사광 속에서, 그리고 볕을 보기 부끄럽다는 양 곧장 적의 갑옷을 뚫고 살갗을 찢는 철퇴의 감촉 가운데서 울리히는 신의 은총을 느꼈다.
강철과 강철이 격돌한다. 갑옷이 뚫리고 피와 살점이 튄다.
주인 잃은 말은 날뛰며 말 잃은 기수를 짓밟고,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을 듯하기만 하던 용병들은 이제 다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못할 몸이 되어 진흙탕에 자빠진다.
“시그리드, 정신 차려라!”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고 나서야 시그리드는 자기 자신을 기억했다. 자신이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세상을 바꿀 힘을 얻겠노라며 사람 죽일 궁리를 할 때 저도 모르게 짊어지게 된 그 짐의 무게를 느꼈다.
“나라고 안 두려운 줄 아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래야 우리 모두, 그린란드의 모두가 살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만하게, 스베인! 시그리드 아씨는 총명하니 그만하면 되었을 게야. 정신 차릴 시간을 좀 주고, 자네는 얼른 가서 지휘권이나 이양받아 오게!”
어느새 눈빛이 조금 바뀐 지슈카가 이번에는 시그리드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시그리드, 잊지 마라! 나는 네가 말한 것을 잊지 않을 테니, 너도 내게 약속한 대로 이 싸움에 임해야 한다! 이 싸움, 우리 연대가 나서면 이길 수 있다!”
최후방에 있던 그린란드 연대까지 앞으로 전진하면서, 이제 살육의 전선은 그들 눈앞까지 다가왔다.
멀리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가 직접 이끄는 좌익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크라쿠프 연대기가 주인을 바꾸고, 조금씩 전선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첫 번째 돌격을 마친 기사단원들은 숫제 하마下馬하여*, 무자비한 살육기계로서 폴란드군 중기병 사이를 헤집었다.
그러나 지슈카의 외눈에는 전장의 흐름이 슬슬 바뀌려는 기미가 보였다.
기사단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과 리투아니아군 그 누구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일 때와 죽을 때 매한가지로 성가를 부르는 강철의 전사들에게, 평소처럼 두려워하며 ‘신앙의 승리’를 허용하는 대신, 이번에야말로 물러나지 않겠다며 바득바득 달라붙는다.
기사단이 돌격해오며 가한 첫 번째 충격은, 이제는 다시는 이쪽 대열에 전해지지 않을 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쪽에게 전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지금 저들 기사단이 보이고 있는 괴물 같은 투지가 꺾이게 된다면, 바로 그것이 역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될 터.
그렇다면 그들, 그린란드 연대가 바로 그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르신, 지휘권 이양받고 왔소!”
처음 연대를 꾸릴 때 위에서 내려왔던 허울뿐인 지휘관들. 그들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았든, (적절한 폭력을 곁들여) ‘이양’받았든, 지금으로서는 중요치 않았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하게 만들 테니.
“좋다! 그린란드 연대! 지금부터 내 지시를 따른다!”
지슈카가 목청껏 외치며, 연대 전체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 군마 위에 올랐다.
그 와중에 언뜻 시그리드에게도 시선이 닿았다. 얀 지슈카는 소녀의 눈빛이 그사이 조금 더 닳고 조금 더 굳세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 말만 따르면, 너희 중 대부분은 살아서 이 싸움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나를 믿고, 백송고리 사람들은 너희의 우두머리, 이 기적의 소녀가 만들어준 병기의 힘을 믿거라!
자, 전진!”
“어르신만 믿겠소! 자, 시그리드, 내 어깨에 타라! 콜그림! 너도 따라붙고!”
미리 약속한 절차대로 그린란드 사람들은 척척 움직였다.
“창병, 앞으로! 총병, 뒤로!”
몇 번 시도해보지도 못한 진법이었다. 만약 직접 보고 지휘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큰 부대였다면, 엄두도 못 내었을 일.
“거기, 이름이 한스였나? 뒤로 빠져라! 한스 네놈은 나름 병장* 아니냐? 주변 간수 똑바로 해!”
“야네크! 여기서까지 어벙하게 굴 거냐! 앞으로! 간격 지키고! 보헤미아 사람 망신을 시킬 작정이냐!”
“헤니히, 댁도 마찬가지요! 기사단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알지만, 그 잘난 총 쏴보기도 전에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지휘관 한 사람의 역량으로, 여태껏 이 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총창진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겨우 지탱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차 죽어가는 사람과 죽이는 사람의 소리가 다가왔다.
“하, 이거 쉽진 않겠군.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대들 원하는 전공 올리기는 좋은 기회요.”
지슈카가 조용히 말했으나, 주변이 온통 아우성이라 그린란드 사람들에게는 닿지 않은 듯했다.
“배교자 왕이여! 나와 형제들이 심판을 대행하러 왔다!”
“당황하지 마라! 폐하를 지켜라!”
“제기랄, 비타우타스, 대체 네놈 군대는 어디에 있느냐!”
폴란드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바로 코앞, 요가일라와 그 주변 측근들이 있는 곳까지 기사단원의 돌격을 허용할 만큼.
그러나 갑옷에 성한 구석 하나 없이, 하얀 바탕의 검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을 만큼 검붉은 피로 뒤덮인 채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게 된다면, 그 일 모두를 폴란드군의 용렬함 때문이라 몰아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시그리드?”
“네, 거리 닿아요!”
“11시 방향, 깃발 옆!*”
“알겠습니다, 스베인!”
“알았다!”
아직 세상에 라이플을 보유한 군대가 딱 한 곳, 백송고리 용병단이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스베인이 그 덩치에 어울리는 완력으로 발을 쿵 내디디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위, 목말을 탄 시그리드는 저의 ‘궁니르’를 겨냥했다. 요가일라를 향해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배교자 왕에게 죽음을!”
숨을 죽이고, 쏘았다.
“명중이다!”
“잘했다! 계속 전진!”
시그리드는 스베인에게, 스베인은 저의 옆 콜그림에게 라이플을 건네주었다. 여분 라이플에 탄과 화약을 재는 일은 콜그림과 다른 그린란드 사람들의 몫이었다.
계속 앞으로, 앞으로.
보헤미아 창병들과 바로 뒤의 석궁수들이 벽을 만들고, 백송고리 용병단의 소총수들은 그 뒤에서 보조를 맞추었다.
“잡병은 비켜라, 그린란드 연대 납신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억지로 힘 주어 외치는 소리.
마침내 적이 눈앞에 닥쳐왔다.
그 의기만으로는 도저히 폴란드군의 투지와 수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돌격이 돈좌되어 무수히 많은 적군 사이에 고립된, 그러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대열을 다시 이루어 버텨내려 하는 기사들이 창병들 눈에, 그 다음에는 석궁수와 소총수 눈에 들어온다.
“창병, 뒤로! 석궁수, 엄호해라! 총병, 앞으로!”
“총병, 앞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뒤에서 우군이 나타났으니 이때야말로 물러날 때가 아닐 수 없었다. 전열이 와해된 이후로 폴란드군 사이에 섞여 있던 용병들이 먼저 우르르 뒤로 빠지고, 그 흐름에 멋모르고 주변 폴란드군도 함께 옆으로 비켰다.
“목표 정면의 표적! 거총!”
“거총!”
시그리드 대신 지슈카의 입에서 나오는 구령. 그러나 이미 몇 달 동안 숙달에 숙달을 거쳤던 백송고리 용병단은 한 점 흔들림 없이 저들의 머스킷을 들어올렸다.
곧 돌격할 것처럼 들이닥치던 창병 대열이 멈추고, 그 사이로 낯선 쇠대롱 든 무리가 튀어나오자, 삼면에서 폴란드군과 용병들을 상대하던 기사단도 잠시나마 이쪽을 놀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치 온 전장이 잠시 멈춘 듯, 모두가 백송고리 용병단을 바라보는 사이.
“사격 개시!”
“사격 개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왜 자신들이 무릎을 꿇게 되었는가. 거대한 표적이 되어, 가장 먼저 피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구는 기사단원들은 끝내 저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들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창병 앞으로! 총병 뒤로! 즉시 장전!”
매캐한 화약 연기를 뚫고, 보헤미아 창병들이 앞으로 다시 전진했다.
도저히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기사단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한 발 늦게 깨우친 폴란드군이 양익에서 합세하면서, 전세는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회개하라!”
구멍 뚫린 왼쪽 어깨를 방패삼아, 한쪽 팔로 워해머를 휘두르며 달려오던 기사단원은 창병들의 창날에 떠밀려 결국 쓰러졌다.
보헤미아 시절부터 이런 일을 많이 해봤던 도적 출신 용병이, 능숙한 동작으로 단검을 뽑아 기사의 목을 찔렀다.
“시그리드, 3시, 하얀 깃발!”
“알겠어요! 스베인!”
또 한 번 총성이 울리고, 저쪽에서 또 하나가 쓰러졌다.
“총이 망가졌어요, 콜그림!”
“아직 한 정 남았습니다! 장전해서 건네드립죠!”
기사들은 총이라는 신문물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지만은 않았다.
지금껏 숱한 전장을 누벼오며 무예를 갈고닦았던 이들답게, 금방 저 악마의 무기가 불과 몇몇에게만 들려있을 뿐이며, 장전하는 사이에 일반 화포만큼은 아니어도 꽤 오랜 틈이 생긴다는 것을 금방 꿰뚫어본 것이다.
“헤니히! 헤니히 어디 갔나! 그쪽 제대로 단속 안 하나!”
“지슈카 어르신! 헤니히 영감은 낙오한 것 같습니다! 아까 기사들 돌격할 때 이후로 안 보이는뎁쇼!”
“젠장! 얼른 장전이나 마쳐라!”
“장전 완료!”
“사격 준비 끝!”
“창병 뒤로! 총병, 준비되는 대로 쏴라! 석궁수, 엄호!”
이어서 또 한 차례, 처음 그들이 이 싸움판에 뛰어들었을 때보다 훨씬 어지러운 총성. 그리고 지지 않겠다는 듯 또 한 번 돌격하는 기사들.
“믿음의 적에게 죽음을!”
“기사 나리부터 먼저 가십쇼!”
“질 수 없다! 폴란드에 영광을!”
사방에서 일어나는 혼란.
그 혼란 반대편에서, 그사이 지친 기사단장 울리히는 몸에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짰다.
저 멀리, 사람 어깨 위에 올라 탄 채 그 저주받을 쇠대롱을 휘두르는 마녀가 눈에 들어왔다.
장궁이나 석궁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가장 용맹한 기사들만을 쏘아 죽이는 저주받을 무기.
그리고 그 저주받을 무기와 함께 지옥불을 뿜어내는 용병들의 대열.
“단장 각하! 물러나야 합니다!”
“아니다! 저들이라고 화약이 무한하지는 않을 터!”
“각하, 저들 때문이 아닙니다! 뒤를, 뒤쪽을 보십시오!”
저 멀리, 언덕 위의 숲에서, 일찍이 패퇴시킨 줄 알았던 리투아니아군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패잔병의 기세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움직임. 기사단의 갑옷을 꿰뚫을 수 없는 빈약한 무장만을 하고 있다지만, 그렇다 한들 저 숫자와 기세만으로도 지금의 기사단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뚫고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철수 신호를 보내라.”
“예, 단장 각하! 본대에 전하겠습니다!”
“아니! 철수하는 것은 양익. 기사단원수와 대지휘관뿐이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남은 전력을 추스르고 반격이든 철수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
기사단이 여태껏 이곳, 유럽의 북동쪽 끝에 군림할 수 있던 근원은, 바로 그들의 위망이었다.
온 유럽의 귀족 젊은이들에게 선망받는 기사. 그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패배할 때까지도 값진 대가를 물리는 신앙의 검.
그 위망이 무너지면 그때야말로 기사단은 끝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한 세속적인 계산이 신앙의 열망과 뒤섞여 구분되지 않은 채, 울리히의 머릿속에서 완수되었다.
“형제들이여, 들어라! 우리는 여기에서 죽는다! 신앙의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만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주자꾸나!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신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죽자꾸나!”
지친 기색 역력한 채 칼과 철퇴를 휘두르던 기사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모두가 다시 한 번 성가를 부른다.
“경배받으소서, 성모 마리아시여, 거룩한 여왕, 자비의 어머니시여...”
퇴로는 끊어지고 있다. 지금 전력을 다해 들이친다 한들, 그들 중 살아서 진영으로 돌아갈 자는 절반이 채 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자.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이시여!”
실제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개 귀족의 자제요, 불운하게 전사하지 않고 무사히 포로로 잡힌 귀족의 자제는 몸값을 받고 살아 풀려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비장한 열의 속에서 그러한 사실은 사라지고, 고매한 희생이라는 그 광기어린 열기가 대신 모두의 가슴을 데웠다.
피칠갑된 투구 사이로 나오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 방금 전과 다름없는 동작으로 적의 머리를 후려치며 나오는 그 음률이, 다시 한 번 적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달려들던 폴란드 기사들은 어찌하여 이백 년간 저들 튜튼 기사단이 이 동녘 땅의 사람 모두에게 공포이자 불패의 상징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실제로는 패배하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했던 기사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꺾이지 않았다.
저들의 뒤에 있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이요, 교회 그 자체요, 유럽 전체였다. 풀을 자라게 하는 그 흙이, 건물을 지탱하는 그 기반이 무너지지 않는 한, 기사단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 참혹한 싸움의 진흙탕과 대비되는 고고한 선율이, 그 어떤 논변보다도 확실하게 그 사실을 폴란드 기사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때, 기사들 눈 바깥, 그득 쌓인 사람과 말의 시체 사이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그 입 다물어라!”
모두의 눈이 그쪽으로 향한다. 평범한 누비갑옷을 입은 일개 용병. 이미 반쯤 죽은 배불뚝이 사내. 저의 것임이 분명한 피가 몸통을 가로질러 흘러내리고, 그 한쪽 눈은 찢어진 두피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이미 막혔다.
“헤니히 아저씨!”
“살아계셨구만! 얼른 우리 쪽으로 돌아오시오! 얼른!”
“대열을 지켜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꽤 떨어진 쪽에서 외치는 전우들의 소리는, 헤니히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 듯하였다.
“융잉엔의 울리히! 나를 보아라! 너희가 어떻게 신을 입에 올릴 수 있느냐! 너희가 고틀란드를 불태울 때, 너희의 신은 어디 있었느냐?”
“독신자瀆神者! 그 입을 다물어라!”
“2시 방향!”
“저도 봤어요!”
기사단원 하나가 분노에 가득 차 달려나왔으나, 멀리, ‘은발 마녀’가 있는 쪽에서 일어난 총성이 귀에 닿기 무섭게 쓰러졌다.
그 소란에 놀란 울리히는 시체의 언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헤니히는 숙달된 동작으로, 자신의 복수를 가능케 해준,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세상을 뒤바꾼 그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탄환이 기사단장 울리히의 흉갑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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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중 묘사된 서술은 원 역사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택했던 것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 리투아니아군의 기동이 처음부터 의도된 거짓 후퇴 전술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패퇴하고 있던 와중에 비타우타스의 리더십으로 겨우 군세를 추슬러 역습을 가했던 것인지는 21세기까지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비타우타스 본인이 킵차크 칸국의 에디구와 벌인 싸움에서 이 전술에 한 번 거하게 당한 적이 있기에 – 이러한 거짓 후퇴 전술은 레그니차 전투(1241) 때부터 몽골군이 유럽 군대를 상대로 자주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 여기서 교훈을 얻은 비타우타스가 그룬발트 전투에서 이를 적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반면 리투아니아군이 처음부터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전투에 임했다기에는 그 후퇴가 썩 질서정연하지 못했다는 점, 기사단의 역습으로 폴란드군이 곤경에 처한 이후에도 – 작중 언급되는 크라쿠프 연대기 쟁탈전, 기사 디폴트의 돌격 등은 원 역사에서도 벌어진 일입니다 - 한참 지나서야 리투아니아군이 전장에 복귀했다는 점 등을 들어, 계획된 거짓 후퇴가 아니라 진짜 후퇴였다는 반론도 존재합니다.
작중에서는 두 주장을 절충해, 비타우타스가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거짓 후퇴 전술을 채택했고, 그 위험이 현실화되어 어지러운 후퇴가 발생했다는 쪽으로 서술했습니다.
한편 원 역사의 그룬발트 전투에 비해 또 한 가지 연합군에 불리한 요인은, 바로 시기의 차이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한여름인 7월에 전투가 벌어져, 장장 9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무거운 갑옷을 걸친 튜튼 기사단의 전투력이 먼저 고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필 새벽에 부슬비까지 내려 기사단이 보유한 화약 상당수가 젖어 사석포를 쓰기 어려워지기까지 했지요.
* 화약무기의 등장 이전까지도, 투사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두터운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뿐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런 중갑을 입은 기사들이 엘리트 중기병뿐 아니라 중보병으로서도 ‘도검불침’에 가까운 충분히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뜻했지요. 예컨대 동시대의 다른 유명한 전투인 아쟁쿠르 전투에서도, 프랑스 기사들은 (결국 모두 실패했지만) 양익에서 영국 궁병대를 공격하는 기병뿐 아니라 정면에서 영국군 대열에 육박하는 중보병으로서도 운용되었습니다.
* 병장Corporal은 중세 후기 용병대에서는 분대장에서 소대장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위치였습니다. 전설적인 용병 존 호크우드의 백색 용병단처럼 기업화된 대형 용병단의 경우에는, 용병단에 ‘인수합병’된 소규모 용병단의 단장에게 주어지는 지위이기도 했지요.
*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기계식 시계는 대략 14세기 초엽부터 상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15세기경에는 시침뿐 아니라 분침도 있는 – 기묘한 것은 정작 ‘분’이라는 단위는 분침의 발명 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 시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성무일도를 비롯한 많은 종교적 의례를 위해 정확한 시간 계측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유럽 최초의 기계식 시계를 발명한 것은 바로 교황 실베스터 2세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후스파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보헤미아 출신인 지슈카가 시계의 개념과 12시간 방위 표기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