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19화 (19/116)

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1)

5. 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1) - 비 지스 (1971)

패배를 목전에 두었음에도, 기사단은 끝까지 분투했다.

폴란드군의 가운데를 파고들었던 기사단장 울리히의 16개 연대는, 대열이 ‘악마의 불꽃’에 무너져내리고 리투아니아군이 후방까지 차단하면서 끝내 섬멸당했다.

그러나 우익의 리투아니아군과 중앙의 용병대를 골고루 짓밟던 기사단원수 발렌로데의 프리드리히와, 좌익의 폴란드-덴마크 기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대지휘관 리히텐슈타인의 쿠노는 무사히 남은 병력을 인솔해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무렵 이미 해는 저물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기사단원들과 그 군마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추격하는 적도 지쳐 있을 터. 역습 한 번으로 전세를 만회한다!”

발렌로데의 프리드리히는 결단을 내렸다. 섣부르게 인근의 요새로 물러나다가 리투아니아 경기병의 추격에 따라잡히느니, 본진을 요새화하여 마지막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노련한 기사들의 지휘 하에, 마차를 벽으로 세운 임시 요새가 세워졌고*, 기사단원들은 숨을 고르고 종자들로부터 새 군마와 랜스를 받았다.

그리고 서쪽으로 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폴란드군과 리투아니아군이 진지에 육박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흔한 전투 구호 대신, 가장 효과적으로 기사단 진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말을 골라 외쳤다.

“전투는 끝났다! 항복하라!”

“융잉엔의 울리히는 허망하게 죽었다!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거든 속히 무장을 내려놓아라!”

기사단장의 깃털 달린 투구와 그의 깃발을 드러내 보이며, 크라쿠프·대폴란드 연대의 기사들은 마차의 벽에 달려드는 대신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곧 진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이야, 양익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기사단장이 탈출을 포기하고 적진에 남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사단국의 법에 따라 이 전쟁에 끌려 나와 짐꾼 노릇을 하던 이들의 입장은 달랐던 것이다.

“뭐? 우리가, 아니, 기사단이 패배했다고? 기사단장 나리도 죽고?”

“그러면 우리도 끝난 것 아닌가?”

“조용히 해라! 어찌 경거망동을 하느냐?”

몇몇 기사들이 입단속을 시도했으나, 그들이 기사를 선망하며 배우고 익힌 말재주란 궁중의 연애시일 뿐, 무지렁이들을 타이르는 방법은 그중에 없었다.

“이보쇼, 기사 나리. 우리가 농사고 뭣이고 다 때려치우고 전쟁 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게 어디 댁들 좋으라고 하는 것인줄 아쇼?”

“말 잘했다! 다 댁들이 우리를 지켜줄 힘이 있으니까 따르는 거지. 그러니까 암만 아니꼬와도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이렇게 부역에도 따르는 게요.”

“그런데 이제 듣자하니 기사단장 나리도 죽었다면서? 싸움판에서는 아주 거하게 털렸고. 그러면 무엇하러 우리가 댁들이랑 같이 여기서 죽어야 하오?”

가장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무엇이 저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비천하다 부르든 말든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다. 우직하게 의리 따위를 중히 여기던 농민은 역병과 기근이 처음 닥쳤을 때 모두 죽었으므로.

그러므로 모두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런 셈을 속으로 마쳤다.

기사단은 이제 끝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기사들을 죽이고 갑옷을 내다 파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존자가 없다면 그 누구도 그들의 배신을 누설하지 못할 것이요, 마리엔부르크의 기사단 본부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들은 농촌 어딘가에 – 지금보다 훨씬 부유해진 채로 – 녹아들어 사라진 뒤일 테다.

그리고 셈을 마친 짐꾼부터 하나둘씩 몽둥이를 들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나중에는 대놓고.

“이놈들, 제자리로 돌아가라!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크억!”

아직 절반 넘게 살아 있던 기사단원들은, 그렇게 명예로운 기사의 랜스도, 용맹한 용병의 창끝도 아닌, 무지렁이 농부들의 몽둥이와 단검에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마차로 급조하였음에도 제법 견고해보이는 적진 안쪽에서 뭔가 소요가 발생했음은 분명했다. 진상은 나중에 규명키로 한 폴란드군과 리투아니아군, 그리고 아직까지는 여력이 있던 몇몇 용병들은 그대로 기사단 본진에 돌입했다.

그 혼란 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지휘관들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한몫씩 챙긴 기사단령 주민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텅 빈 진영을 샅샅이 뒤져서야 폴란드군은 겨우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대지휘관 리히텐슈타인의 쿠노, 전사. 기사단원수 발렌로데의 프리드리히, 전사!

본진에서 잡힌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고작 열에 하나에 불과하다 합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언덕 위에서 받는 보고. 요가일라 주변을 빙 둘러싼, 지친 기색 역력한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신께 영광을! 폴란드에 영광을!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 폐하께 영광을!”

이어서 곁에 있는 비타우타스를 위해 또 리투아니아의 영광을 운운하고... 억지로 쥐어짜내는 환호가 주욱 이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의 전쟁이란 것은 아직 의례, 한 편의 거대한 기사도 연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절박한 상황에서는 어떤 비열한 수라도 동원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처럼 전장에 승리자로 우뚝 선 입장에서는 그 승리를 완결지을 의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고생했다.”

“아저씨도요.”

어느새 ‘선생님’에서 ‘아저씨’로, 부르는 칭호가 한결 친숙해졌지만 지슈카와 시그리드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주변에는 그린란드 연대 사람들이 지친 나머지 그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피에 덜 젖은 땅을 찾아, 누비갑옷을 담요 삼고 투구를 베개 삼아 드러누운 이들 사이에서 벌써 코 고는 소리도 나고 있었다.

저 멀리 기사단 본진까지 추격해간 것은, 열심히 짓밟히고 도망다니고 재편하느라 체력이 남아 있던 용병들 – 시그리드는 언뜻, 반쯤 박살난 덴마크 용병을 이끌고 전진하는 기사 옌스를 본 것도 같았다 – 의 몫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구나. 승패에 무관하게, 이날 싸움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서야 끝날 줄은 알고 있었다만.”

벌써부터 까마귀는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날개 없는 두발짐승들이 서로 한바탕 죽고 죽이고 난 뒤, 그 싸움에서는 빠져 있던 남루한 복장의 두발짐승들이 달려와 죽은 짐승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가고, 그러고 나면 날개 달린 짐승들의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 까마귀 무리가 잘 아는 이 하늘과 땅의 법도였다.

그러나 오늘, 까마귀들은 저들이 알던 그 상례가 깨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터였다.

“아저씨, 두 번째 약속, 아직 유효하지요?”

“약속은 지켜져야 약속 아니겠느냐.”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헤니히 영감을 찾아 시체더미를 뒤지러 간 콜그림과 한스 일행이라기에는, 어째 묵직한 발소리였다.

“그대가 백송고리 용병단의 단장, 그린란드의 시그리드인가?”

크라쿠프의 문장을 어깨에 단 기사. 폴란드 국왕의 직속 기사였다.

“나의 국왕이시자 주군이신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요가일라)께서 그대를 부르셨다.”

무슨 일인지 시그리드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별 군말 없이, 스베인과 지슈카에게 계획대로 이행하라는 눈빛만을 보낸 채 기사를 따라 아직도 환호성이 울리고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로스킬데 궁정 드나들며 그 궁중 예법이라는 것을 대충 배운 시그리드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때마침 요가일라는 비타우타스와 함께 지도를 펴놓고 뭔가를 열띠게 논하는 중이었다.

“이 일은 조금 뒤에 마저 얘기하십시다. 어차피 전상자 처치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이 들판에 머물러야 할 테니.”

“알겠소. 하기야, 가뜩이나 피곤한 판에 논쟁을 더 해봐야 피차 무의미하겠지. 저녁에 다시 찾아뵙겠소, 아우님 폐하.”

때맞추어 비타우타스 대공이 물러났다.

그렇게 독대하게 된 국왕 요가일라는 피곤함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했다.

“먼저 너의 전공을 치하하는 바이다. 오만과 독선으로 감히 나를 해하려 하던 저 무뢰한을 쏘아 넘어뜨린 게 너와 너의 그 신묘한 무기였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러한 공적에는 마땅한 포상이 있어야 할 터.

그러나 포상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제안할 것이 있다.”

그 제안을 시그리드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모양인지, 곁의 시종들이 어느새 금화가 담긴 궤짝을 들고 왔다.

“네 아래에 있는 용병이 기사단장 울리히를 쏘아 죽인 것을 많은 이들이 보았다.”

“네, 맞습니다. 그이의 이름은 뤼베크의 헤니히에요.”

“그것은 중요치 않다. 어차피 연대기에 기록되어서는 안 될 이름이니.”

얼추 어떤 제안이 나올지는 시그리드도 짐작하고 있었다. 과연 그 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미 요가일라 그의 개종이 거짓이었다며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퍼붓는 기사단이었다. 오늘의 전투 결과가 서쪽으로 전해진 뒤에는, 거기에 더 많은 해괴한 모욕이 덧붙여지리라. 악마의 힘을 빌렸다는 둥, 지나가는 길의 모든 마을을 약탈했다는 둥.

그리고 폴란드인들과 달리, 기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황제와 교황(두 교황 모두)의 귀를 빌릴 수 있는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개 필부가 기사단장을, 그것도 악마의 무기라고 매도하기 좋은 병장기로써 쏘아 죽였다고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우리 폴란드에게도, 또 네 용병단에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다.

이에 나는 그 무공, 융잉엔의 울리히를 쏘아 죽인 그 공로를 너희에게서 사들이고자 한다. 나는 그 공로를 내 충신 중 하나에게 넘길 것이며, 네가 이 제안에 동의하는 순간 너와 나는 모두 함구하기로 맹세하는 것과 다름없다.”

억지로 전공을 빼앗는 것보다야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이미 아이슬란드와 덴마크를 거치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덜 순진해진 시그리드는, 그것이 순수하게 선의에서 나온 제안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용병인 저들이 기사단의 부추김을 받고 요가일라 본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마르그레테와 마찬가지로, 흔히 세간 사람들이 훌륭한 군주라 부르는 무리는 대개 그 속을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그런 생각에서 금방 마음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 지금은, 그런 냉소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단, 금화 대신 다른 대가를 원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저는 이 전투에 앞서, 보헤미아 용병 얀 지슈카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요가일라의 눈썹이 추어올려졌다.

“협약이라?”

“그렇습니다. 오늘의 전투가 저희 연대가 위치한 후방까지 미치지 않을 경우, 무엇으로 전공을 세울지를 두고 논의한 끝에 맺은 협약이었습니다. 그 협약을 이행하는 데 국왕 폐하께서 도움을 베풀어주신다면, 뤼베크의 헤니히가 세운 전공을 기꺼이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기사단장 하나를 죽인 것의 대가로 삼고자 하는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도 저 벌판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 중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꾀를 조금 내었습니다.”

처음 시그리드가 지슈카의 손을 잡았을 때 내걸었던 조건 중 두 번째. 어떻게든 전투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전상자 구호였다.

이미 보헤미아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하던 지슈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용병들 뒤에 따라붙은 주보상인들과 그들을 따라다니는 이발사*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입은 부상이 곪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작 상인과 이발사들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더냐?”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폐하.”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요가일라는, 피로함을 느끼기도 했거니와 언뜻 듣기에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였기에 승낙하는 손짓을 하였다.

“좋다. 오늘의 이 싸움, 훗날 그룬발트 전투라 불리게 될 이 싸움에서 발생한 양측 부상자들을 구호할 권한을 너, 그린란드의 시그리드와 백송고리 용병단에게 허하겠다.”

허락을 받자마자 시그리드는 한참 뒤에 있는 저의 용병단 마차로 돌아와, 두건을 쓰고서 새장 안에 잠자코 있던 리프를 꺼내주었다.

리프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주려는 뜻은 결코 아니요, 주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저를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식은 들었다, 시그리드야.”

그 효험이 있었는지, 리프가 날개를 퍼덕이며 솟구치자마자 스베인과 지슈카가 곧 시그리드 옆을 찾아왔다. 두 사람을 따라 백송고리 용병단 사람들, 그리고 오늘 전투를 치르며 부쩍 그들과 가까워진 보헤미아 용병 여럿이 함께 모여들었다.

“이제 시작하면 되는 것이냐?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우리 시그리드는 벼락도 맘대로 부르는... 아니,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소. 좌우지간 시그리드를 믿으시오, 지슈카 어르신.”

검은 책에서 꺼낸 두 가지 지식. 환자 선별triage과 소독.

환자 선별은, 이제 요가일라의 승낙까지 받은 판이었으니 이제는 정말로 신분이고 뭣이고 따지지 않고 오로지 부상의 경중에 따라서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치료의 가망이 없는 이와, 잘만 치료하면 쇳독 오르는 일 없이 살아날 수 있는 이를 구분하는 기술은 이발사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재주였다. (자칫 가망 없는 이를 잘못 손댔다가는, 품삯을 받기는커녕 전몰자의 동료들에게 몰매를 맞기 때문이었다.)

“네 말대로 화주火酒를 있는 대로 긁어모으고 개중 특히 독한 건 따로 다 빼놓게는 했다. 오는 길에 확인해보니 주보상인들이 그거 이제 없던 일로 하면 안 되냐고 나를 붙잡고 늘어지더구나.”

원래 주보상인들에게 대목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그리고 전투가 벌어진 당일 밤(승리했을 때에만 한해서)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짚어주세요. 우리가 사람을 구하면 구할수록 받을 보상은 늘어납니다.”

시그리드가 주보상인과 이발사들에게 제시한 동업 조건은 이러하였다.

비교적 도수가 낮은 증류주는 수돗물 대신 쓰고, 부족한 만큼은 물을 끓여서 보충한다.

그리고 도수가 높아서 여차하면 불도 붙일 수 있을 그런 화주는 따로 모아서 소독용 알코올로 쓴다.

아군이든 포로든 소정의 진료비를 받되, 귀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들어간 수공 이상으로 받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수익은 모두에게 공동으로 분배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믿지 않는 눈치더라. 그치들이야 맨날 퍼먹는 게 술이니까, 그 술에 무슨 엄청난 효능까지야 있겠느냐며 미심쩍어하던데.”

스베인이 곁가지로 덧붙였다. 술이 귀한 – 동녘정착지에 귀하지 않은 게 얼마나 있겠냐만 – 그린란드 사람으로서는 이 동네 사람들의 부어라마셔라 경향이 여전히 놀라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그리드는, 욘이 종종 말하던 그 전설적인 독주毒酒 보드카의 원산지가 폴란드임을 알고 있었다. 알코올 대용으로 쓰기에 이만한 술이 또 있겠는가? 그 옛날(?) 소련군은 보드카를 소독약과 진통제, 심지어 엔진 부동액으로까지 썼다고 했더랬다.

따라서 사람들이 시그리드를 의심하는 것 이상으로, 시그리드는 이곳의 독주에 소독 효과가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확인차 체르빈스크 떠나기 전날 밤 한 잔 마셨다가 사흘을 고생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 저들끼리 있는 줄 알 때만 그리 떠들다가 스베인 아저씨 지나가시면 화들짝 놀라면서 입을 꾹 닫지 않던가요?”

“야, 역시 똑똑하다니까. 어찌 알았느냐?”

“다 방법이 있죠.”

시그리드 또한 소독의 효능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욘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손씻기의 효험을 주장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외톨이 의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원수쯤 되었더라면, 그 어떤 반대파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을 것임도 알고 있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역시, 만약 군 간호사 신분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 대신 왕관을 쓴 몸이었다면 굳이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완고한 군부와 영국 사회를 움직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그리드에게는, 방금 전까지도 사람 여럿을 죽인 총과, 비슷한 무기로 무장한 삼백 명 조금 안 되는 사내들, 그리고 얀 지슈카라는 듬직한 동업자에 이제는 브와디스와프 2세 요가일라의 허락까지, 지금 그룬발트와 타넨베르크 사이의 이 들판에서 얻어낼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힘이 쥐어져 있었다.

“자, 그러면 시작해 볼까요? 다들 많이 지쳤겠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일의 가치를 생각하며 열심히 임해주기 바라겠습니다.”

그들이 오늘 낮까지만 해도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기 위해 누볐던 전장을 향해, 이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뛰쳐들어가는 그린란드 연대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미 체력이 다 떨어진 용병들이 엄청나게 많은 구호 실적을 올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슈카의 지휘에 따라, 병장급 되는 이들과,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말귀 잘 알아듣는 이들로만 선별된 전령들이, 평소처럼 전사자의 갑옷을 벗기는 데 열중하는 대신 시체 사이를 뒤지며 숨 붙은 이들을 찾는 주보상인의 하인들과 이발사 조수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병장급도 되지 않고, 지슈카로부터 ‘똘똘한 사람’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용병들은, 시그리드의 지시를 받기 위해 그 주변을 맴돌거나, 아니면 저들 연대에서 부상당해 낙오한 이들을 찾아 저들끼리 전장을 누볐다.

이제는 한스 병장이 된 전직 불량배 한스와, 그에게 가장 먼저 얻어맞은 정으로 지금은 그를 형님처럼 따르게 된 병사 여럿도 그러한 무리 중 하나였다.

“이쯤이었지?”

“네, 맞습니다요. 앗, 저기 있다. 저기 저놈이 그, 총에 두세 방 맞고서도 달려오던 그 미친놈 아닙니까.”

“언뜻 보니 그런 것도 같고... 혹시 모르니까 발로 차 봐라. 살아 있는지는 봐야지, 그게 아가씨, 아니, 단장님 지시니까.”

한스를 따르는 녀석 하나가 그 말 듣고 냉큼 가서는, 저의 총자루로 쓰러진 기사를 툭툭 쳐보았다.

“반응이 없는데, 그냥 시체인 것 같습니다.”

“됐다, 그러면. 저기, 저 시체 둔덕 옆이나 보자.”

시그리드나 그린란드 사내들은 은근히 시체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했는데, 불량배 한스와 그 패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죽음은 항상 그들 곁에 있는 것이었다. 당장 코펜하겐에서도, 혹독한 겨울이 닥쳤을 때 얼어죽은 거지들 시체를 성문 바깥에 모아놓지 않던가?

지금은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거슬리는 악취가 주변을 메우고 있을 뿐. 그들의 동료를 찾든, 이 죽음의 틈바귀에서 소소한 이익을 건지려 애쓰든, 모두 적당한 동기만 있다면 참고 견딜 만한 것이었다.

“찾았다!”

둔덕 반대편에 삐죽 나온 억센 팔이 한스의 눈에 들어왔다. 마침 둔덕 건너편에서, 갑옷 입은 기사 하나를 어디서 용케 구해온 파비스pavise 방패에 올려 옮기고 있던 콜그림네 무리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콜그림 아재, 좀 도와주쇼! 헤니히 영감 찾았소! 빌어먹을... 거 맥주 좀 작작 처먹지... 끄응!”

“으으... 나는 이제 다 이루었네. 여한이 없...”

겨우 머리통과 어깨까지 삐져나온 헤니히는 절반쯤 정신을 차렸다.

“영감, 죽는 소리 집어치우쇼. 남의 머리통 후려칠 때는 퍽 팔팔하더만. 콜그림 아재!”

“야, 사내자식이 영감탱이 하나를 못 짊어지냐! 나도 숨 붙은 놈 하나 찾아서 옮기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어이! 군나르! 멍 때리지 말고 가서 저기 한스 좀 도와줘라!”

전투가 한창일 때, 요가일라를 노리고 달려들었다가 ‘궁니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쾨커리츠의 디폴트를 저의 패거리 몇몇과 함께 옮기고 있는 콜그림이었다.

디폴트는 총을 맞을 때의 충격으로 낙마해 혼절하긴 했지만 탄환 자체는 어깨에 맞았기에 숨이 아직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헤니히와 한스 일행을 뒤로하고, 콜그림은 열심히 시체밭 사이를 누볐다.

큰겨울 핌불베트르에 이은 또 다른 라그나로크의 전조. 끝없는 전쟁.

그토록 고고하던 기사들이 모두 죽어 누비갑옷 입은 용병, 그마저도 입지 못한 농부들과 함께 땅에 드러누워 있는데, 이 또한 어찌 이 세상이 끝나가는 징표가 아니랴?

라그나로크가 얼른 찾아와 이 잘못된 세상을 말끔히 고쳐주기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은 콜그림으로서는, 그러므로 능히 목젖 너머에서 넘어오는 역겨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방패를 들고서 얼마나 걸었을까? 마차 하나를 가져다 놓고 구호를 진두지휘하는 지슈카가 보였다. 콜그림이 목청 높여 물었다.

“어르신, 혹시 시그리드 아씨 어딨는지 아십니까?”

“저쪽 천막들 사이에 있을 걸세.”

“네, 감사합... 엇?”

“왜 그러는가?”

백송고리 한 마리가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저의 주인이 있는 곳 상공을 맴도는 리프였다.

맹금이 우는 소리가 한때의 전장을 훑고 지나가자, 몰래 곳곳에 내려와 있던 까마귀 여럿이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콜그림의 눈에는, 시그리드 있는 쪽을 가리키는 지슈카 등 뒤로 두 마리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것이 들어왔다.

두 마리 까마귀를 거느린 애꾸눈 신이 가리키는 곳에는, 저녁노을의 마지막 빛과 막 떠오른 보름달 빛이 함께 비추는 곳에는, 은발 소녀가 있었다.

“화주랑 그냥 술이랑 구분하셔야 합니다! 아니, 포도주는 절대 안 됩니다! 맥주도 안 되고요! 설명 안 듣고 뭐 하셨어요? 야네크 아저씨, 저 사람 좀 데려가서 다시 가르쳐주세요! 아니, 그 몽둥이는 내려놓고! 일손 하나가 급한데 지금 뭐하려는 거에요? 진짜로 가르쳐주라고!”

목청껏 외치고, 그러면서도 연신 저의 손에 들린 양피지에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다시 손가락질하고. 또 다시 무언가를 적고.

“그 물 어디서 떠 왔어요? 강물요? 안 돼요! 꼭 끓여야 한다고요! 팔팔!

거기, 이미 죽을 것 같은 환자는 내버려두고, 신부님을 찾으세요!

팔 부러진 게 무슨 대수입니까? 귀족이든 뭐든 지금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기 저쪽에 더 위중한 환자도 많잖아요!

거기, 귀족 어르신은 정 아니꼬우시면 저기 국왕 폐하께 가서 따지시고요! 네, 네. 그래요, 어느 동네의 귀하신 누구누구 되시겠지요! 그런데 저는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폐하한테 전권을 위임받았다니까요?”

죽음의 한가운데. 비명 지르는 환자와 종부성사 치러주는 군종사제들 사이에, 죽음이 수반하는 피와 오물을 뚫고 홀로 빛나는 듯한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콜그림은 깨달았다.

“리프트라사Lifthrasa!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라그나로크를 뚫고 살아남는 이, 새로운 세상의 선두를 여는 이는 여인 리프와 그의 배필 리프트라시르가 아니었다. 삶을 사랑하는 여인 하나였다.

삶을 아끼는 여인. 생명을 사랑하는 여인. 라그나로크를 뚫고 마침내 새 세상을 열 사람의 이름.

시그리드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별명을, 그리고 어쩌면 시그리드의 참된 이름을 자신이 지어주었다는 뿌듯함에, 자신이 처음 파울 신부에게 맹세했던 것 – 이교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절대 내지 않겠다는 것 – 은 까맣게 잊고 신나서 뛰어가는 콜그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 뛰어가려다가 여전히 저의 뒤에 짊어지고 가는 방패에 사람 실려 있음을 깨닫고 알아서 자제하기는 했지만.

뒤늦게야 콜그림은 자신이 방금 전 제 뇌리를 스친 그 깨달음을 너무 크게 외친 것은 아닌가 내심 걱정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 시점에서 자신이 죽이고 또 살린 수많은 목숨으로 말미암아 시그리드가 마녀로 몰릴 운명에 처해져 있었음을 깨달은 뒤에야 콜그림은 그런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무렵에는 그것 외에도 걱정할 거리가 훨씬 많이 늘어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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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역사의 그룬발트 전투 종막에서도 본진까지 후퇴한 기사단원들은 이러한 전술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훗날 전투에 참전한 얀 지슈카가 전투마차 운용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그룬발트 전투에 대한 당시 기록은, 전장에서 쓰러진 기사단원보다 이렇게 본진의 자중지란 속에서 사망한 단원들이 더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기사단국이 그룬발트 전투 이후 오십 년에 걸쳐 몰락해간 것의 전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사단은 신성로마제국 및 교황청과의 연줄을 총동원해, 전쟁 패배로 인한 타격을 최소화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철군을 이끌어냈지만, 이 전투에서 붕괴한 군사력 재건을 위해 무리한 징세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기사단 내 도시와 영지들이 연합하여 폴란드의 봉신이 되기를 청하면서 기사단국은 무너지게 됩니다.

* 잘 알려진 것처럼, 근대까지도 유럽에서 외과의surgeon는 내과의physician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존재였습니다. 물론 중세 후기부터는 내과의보다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제도화된 교육을 받은 외과의도 등장하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지요. 외과의의 격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은 전장에 나선 ‘귀하신 분’들도 부상과 사망의 위험에 자주 노출되게 된, 화약의 시대 이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 전장에서 대부분의 의무지원은 주보상인들을 따라다니는 야전 이발사feldsher들과 그 조수들의 몫이었지요.

* 전투 후 부상자 처치에 최초로 근대적인 의무지원 및 환자 선별(트리아지) 체계가 도입된 것은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때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명 구호의 목적보다는, 화기의 발전으로 중무장한 기사들까지 부상을 자주 입게 되자 신분이 귀한 이들이 가장 먼저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게 컸습니다. (당시 장교로 복무할 수 있을 만큼의 교육과 경험을 지닌 인적자원의 희소성을 고려하면, 이 역시 완전히 불합리한 처사는 아닐 것입니다.)

군 복무자 및 현대 의료인에게 익숙한 형태의 환자 선별 체계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전설적인 군의관 도미니크장 라레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신분에 무관하게, 오로지 부상의 심각성과 회생 가능성만을 따지고 환자를 선별하는 방식이었지요. 장교층의 저항 없이 라레의 개혁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라레 본인이 숙련된 외과의로서 절단수술 세계기록 보유자였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 리프트라사Lifthrasa는 리프트라시르Lifthrasir의 여성형 형태입니다. 리프와 리프트라시르에 대한 이야기는, ‘별사람(5)’ 편에 등장하는 스노리 노인의 상상 속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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