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2)
5. 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2)
백송고리 용병단과 주보상인들, 이발사들, 그리고 인근 그룬발트와 타넨베르크 마을 주민들까지 몰려나와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광경은, 얼핏 보기에는 어지간한 전투가 끝난 뒤의 모습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은발 소녀와 애꾸눈 사내, 그리고 물 끓이는 연기처럼 몇몇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을 뿐.
“그래도 정성이 갸륵하니, 나중에 급료를 계산할 때 더 얹어줄 심산이오. 물론 지금 논할 일은 아니지만. 듣자하니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며 구호를 했던 모양이더군.”
전투 이튿날 아침, 향후 계획을 논의코자 막사를 찾아온 비타우타스에게 요가일라가 가볍게 말했다.
“그렇지. 지금 논할 일은 따로 있지 않소이까. 이 사람의 입장은 변함 없소, 아우님 폐하.”
시그리드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비타우타스는 부상자들을 우선 후방에 남겨놓고, 가용한 병력만 대동하고 강행군을 하여 하루라도 빨리 기사단의 총본부가 있는 마리엔부르크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요가일라는 우선 병력을 최대한 수습한 뒤에 마리엔부르크로 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들 또한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사단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겨우 꺾일 기미를 보이는 기사단의 항전 의지를 다시 북돋으리라 보았던 것이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병력만으로는 마리엔부르크를 함락시킬 수 없을 게요.”
“그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아직 정확히 모르지 않소. 어찌 그리 단언하시오?”
그러한 추산은 진드람 경의 몫이었는데, 그 진드람조차 크라쿠프 연대기를 두고 기사단과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부상을 입은 터였다.
“그대야말로 이 사람이 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전장을 누벼보았지 않소? 전상자들 태반은 결국 죽기 마련이고, 나머지도 힘을 되찾기까지는 적어도 여러 달이 걸리기 마련이오.
그대의 군대도 자칫 진짜가 될 뻔한 거짓 후퇴를 하면서 많이 상했지 않소? 중앙에 있던 용병들도 울리히 그놈의 돌격을 몸으로 받아내느라 꽤 죽고 다쳤소이다.”
“하지만 이 전쟁, 애시당초 기사단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시작한 것 아니었소?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때 꺾지 않는다면...”
그때, 두 사람의 막사에 뛰쳐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폐하! 기적입니다!”
머리와 어깨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진드람이었다.
잔뜩 흥분해서 뛰쳐들어온 진드람은, 그제야 자신이 저의 주군과 그 제일가는 봉신 겸 숙적 겸 동맹의 중요한 논의에 끼어들었음을 깨닫고 저의 무례를 사과했다.
무례에 사과하고 용서하는 상투적 인삿말이 오간 뒤, 요가일라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이 기적이라는 말인가?”
“저 그린란드인들의 비방祕方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로 엄청난 효험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왕 폐하를 위한 열정과 충심이야말로 그들을 일으켜 세운 진정한 힘일 것이나, 족히 석 달은 앓아누웠어야 할 상처가 고작 하룻밤만에 나았으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숱한 전장을 누비면서 그에 상응하여 부상도 많이 당해본 진드람이었다. 물론 그가 입은 부상이 다 나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전투 다음날 늘상 느껴지던 고통, 진물이 새어나고 환부가 불타는 듯한 그 아픔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완치되었다 착각하기는 충분했다.
“그 시그리드라는 소녀, 아니, 용병단장이 제게 건네준 자료 또한 경이롭습니다. 경상자와 중상자, 곧 사망할 자를 나누어 수치로 적었는데, 한 번 보십시오.”
그 종이 한 장을 받아본 요가일라가, 처음 보는 기묘한 양식 - ‘표’ - 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소녀의 설명 한 번에 그것을 능히 이해한 진드람은 저의 주군에게도 이 지식을 나눠주고자 곁에서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덩치가 작지 않은 진드람 탓에 어깨너머로 보려다 번번이 실패한 비타우타스가 문득 물었다.
“경상자라는 것은, 그대와 같은 자를 말하는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당장 어제와 같은 전투를 한 번 더 치르라 해도 능히 치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비타우타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되었군! 아우님 폐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소? 당장 진격하십시다!”
그러나 빠르게 결론을 내린 비타우타스와 달리, 요가일라는 그들이 이대로 진격해 마리엔부르크를 완전히 함락시킬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사단국의 존립 근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금인칙서, 그리고 그 이전, 성지 근처의 아크레에서 창립되었을 때 교황 클레멘트 3세에게 받은 설립 허가.
따라서 기사단이 완전히 붕괴하게 된다면, 그 잔존 세력들은 반드시 교회와 제국 양측을 움직이려 할 것이다. 둘로 쪼개진 교황청에게 폴란드는 그들의 흔들리는 권위를 다잡기에 만만한 상대가 될 것이며, 통합된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위협을 달갑게 바라보지 않을 제국의 군주와 유력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곧 요가일라의 머릿속 저울은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어차피 기사단의 척추를 부러뜨린 어제의 전투로 말미암아, 그들은 곧 격렬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선 기사단을 완전히 짓밟아 후환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곧 마음이 정해지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역사는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종이를 비타우타스에게 건네주며 요가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드람 경! 그대는 그린란드의 시그리드에게 찾아가, 행군이 가능한 군사와 그러지 않은 군사를 속히 나누도록 명을 전하시오. 중상자들과 포로는 근처의 마을에 수용토록 하고, 나머지는 금일 정오를 기해 마리엔부르크로 진격할 것이오.”
그렇게 폴란드-리투아니아군 본대는 진격을 재개했다. 그렇지만 그린란드 연대는 피해가 컸던 몇몇 연대와 함께 후방에 남겨졌다.
마리엔부르크 공략에 요긴할 백송고리 용병단의 소총수들에게, 대신 그룬발트와 타넨베르크에 남아 중환자 구호와 포로 관리에 힘쓰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은, 이미 너무 많은 눈길을 끈 ‘악마의 불꽃’이 지금보다도 더 주목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한 요가일라의 조치였다.
금방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경상자들은 모두 본대를 따라 떠났다. 실제로는 그저 익숙한 염증 반응이나 진물이 나오지 않았을 뿐, 제대로 회복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그리드를 비롯해 그 누구도 그런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학지식은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남은 것은, 포로들과 중상자들, 그들을 지키는 그린란드 연대와 몇몇 용병들, 그리고 어영부영하다 낙오한 몇몇 사람들.
한산해진 틈을 타, 어깨너머로나마 제대로 된 – 그러니까, 이 시기 기준으로 – 의학 교육을 접했던 몇몇 이발사와 종군의사medicus들은, 연금술사들이 증류주를 ‘생명의 물Aqua vitae*’이라 부르는 것과 그들이 며칠간 겪은 놀라운 치료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입방아를 연신 찧어댔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렇게 퍼져나가는 것일 테다. 비록 처음의 몇 단계 순서는 바뀌었지만, 어쨌든 경험을 통해 이 지식의 유용성을 깨우쳤으니, 지식이 부족할 뿐 지성이 부족하지는 않은 이 시대의 사람들도 곧 알코올을 이용한 소독법을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성과는, 아이슬란드나 덴마크에서와는 달리, 국왕 요가일라와 어깨 나란히 하며 교섭한 끝에 얻어낸 것. 그러므로 시그리드로서는 여러모로 보람을 느낄 일이었다.
그룬발트 마을 초입의 담장 위에 앉아, 자신이 검은 책에서 얻은 지식이 이렇게, 세상을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것을 둘러보던 시그리드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난 며칠간의 과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이 시골 마을에는 거울이 몇 개 없었기에 시그리드는 이를 알지 못했다.
어디선가 아옹다옹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생명의 물’을 냉큼 내오란 말이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부상은 심하지 않지만 다소간 거동이 불편한 이들, 예컨대 팔다리가 부러져 막 부목을 댄 이들이 모여 있는 헛간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의외의 구면이었다.
“콘라트 레츠카우 경?”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한 해 전, 로스킬데 궁정에서 마주쳤던 단치히 시장 콘라트 레츠카우였다. 보나마나 그사이 기사단 쪽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콘라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이고, 시그리드 여사님Dame, 귀하신 분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쾌유를 앞두게 되었습죠!”
“아, 네. 고, 고맙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치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서 함께 생사고락이라도 몇 번 나눈 듯한, 반가우면서도 넙죽 엎드리는 말투. 그 넉살 좋은 인사에, 오히려 시그리드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그것이, 이 생명의 물이 그토록 용한데 이 돌팔이 천것들이 제게는 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루하루가 급한데 말입니다.”
콘라트의 계획, 그러니까 덴마크와 기사단국 사이에서 전쟁을 일으켜, 어느 쪽이 이기든 단치히는 이익을 취하게끔 한다는 그 계획은 어쨌든 성과를 보이게 되었다.
이제는 얼른 요가일라 앞으로 나아가, 저는 우리의 브와디스와프 폐하께서 참된 신앙에서 털끝만큼이라도 벗어나셨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으며, 항상 그 명망과 미덕을 듣고 흠모해 왔고, 다만 간악한 울리히의 손아귀를 벗어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어쩌고저쩌고... 늘어놓으며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기를 자처할 차례였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낙마할 때 부러진 다리는 금방 낫지를 않고, 그사이 요가일라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리엔부르크를 향해 홀라당 가버렸으니, 하루라도 먼저 찾아가 엎드림으로써 새 주군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던 레츠카우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알코올, 그러니까 생명의 물은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난 사람들한테만 효험이 있어요. 다리만 부러지셨다면, 술을 들이켜서 고통을 잊는 용도가 아니고서는 별 쓸모가 없답니다.”
그랬더니 또 언제 역정을 냈냐는 양, 호탕한 척 껄껄 웃는 것이었다.
“아아, 그랬군요! 이 콘라트, 오늘 또 이렇게 엄청난 교훈을 배워갑니다! 하하!”
결국 시그리드는 단도직입으로 캐묻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변의 이발사와 조수들을 물린 뒤, 시그리드는 콘라트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직하게 답해주세요. 대체 왜 저를 이렇게 어렵게 대하시는 건가요?”
“그야, 그렇게 대접해드려야 할 만큼 우리를 둘러싼 정황이 뒤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기사이기에 앞서 상인입니다. 기사에게는 주군만이 윗사람이지만, 상인에게는 돈 될 거리를 쥐고 있는 모두가 윗사람이지요. 뭐,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제게 있는 돈 될 거리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이 놀라운 ‘생명의 물’ 비법이며, 그 총이며, 여사님의 인맥이며...”
“인맥요?”
시그리드가 요가일라의 이름을 운운하며 환자들을 분류하던 것을 멀찌감치서 눈여겨본 콘라트였다. 더구나 콘라트를 비롯한 많은 포로들은 며칠 전 전투에서 이 은발 소녀가 어떤 전공을 올렸는지도 훤히 보았다.
“네, 이 전쟁이 끝나면 어딘가에 정착하실 것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그 뭣이냐, 보다 여성다운 자리로...”
그리고 콘라트는, 이 이름도 못 들어본 벽지에서 온 소녀가 무엇을 위해 용병 노릇을 하는지 얼추 알고 있다고 (저 홀로) 자부하고 있었다. 단치히로 돌아가자마자 베르겐과의 연줄을 동원해, 그린란드가 어디 붙어 있는 땅인지 조사를 해보았던 것이다.
며칠간 시그리드에 대해 더 수소문한 바까지 합쳐지자, 얼추 윤곽이 드러났다.
간혹 제국의 작은 영지를 물려받은 영주들이, 저의 궁벽한 영지를 부흥시키고자 용병업에 나서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저 시그리드는 장정들에게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나 범상치 않은 지식을 지닌 것으로 보아 귀한 집안 출신일 테고, 어쩌다 보니 집안에 사내의 씨가 말라 저 홀로 영지의 명운을 짊어지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 입장이라면, 용병 노릇으로 적당히 명성과 재산을 쌓아올린 뒤 후처를 찾는 조금 성향 독특한 영주와 혼인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었다. 콘라트는 당장 포메라니아와 실레지아 일대의 영주 중에서도 그런 후보 여럿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폴란드 국왕 아래의 자유도시가 될 단치히에는 어쨌든 꽤 중요한 인맥이 될 터였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네?”
이번에는 콘라트가 당황할 차례였다. 자신이 세상의 알아야 할 만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대개 그 환상이 깨지면 이렇게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그 틈에 이 기회를 어떻게 쓸지 생각을 마친 시그리드였다.
“제 앞길 얘기는 관두도록 하고, 말 나온 길에 사업 얘기를 좀 해보는 게 어떨까요?”
“사업이라 하셨습니까?”
“네. 아까 지나가듯 총 얘기를 하셨는데요...”
어차피 머스킷이든 라이플이든, 총의 제조법 자체는 백송고리 용병단을 꾸릴 때 코펜하겐의 대장장이들을 통해 다 퍼져 있었다. 미니에 탄이나 머스켓에 쓸 네슬러 탄Nessler ball 같은 비법만 시그리드 일행이 고이 간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이번 전투로 소진한 화약이며, 망가진 총이며, 다시 보충해야 할 물자도 많았다.
“도시 입장에서도 이런 총이 있다면 굳이 비싸게 용병들을 쓰는 대신 자경단을 운용할 수 있을 거에요. 총이 얼마나 유용한 무기인지는, 엊그제 싸움뿐 아니라 한참 전 로스킬데에서도 목격하셨을 테고요.”
자유도시라면 자유를 지켜야 하는 법. 그리고 자유를 지키는 데 가장 쓸모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미국 수정헌법 2조가 잘 말해주고 있었다.
“흠... 그러니까 이 총의 제조법을 저희 쪽에 넘겨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단, 조건이 있어요.”
군인이나 기사로서의 재능이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레츠카우도, 엊그제 전투 이후 저 총이 지니게 될 가치가 어떠할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추장스러운 아첨은 모두 걷어치우고, 순수한 상인의 마음가짐과 눈빛으로 돌아온 레츠카우는 시그리드의 말을 경청했다.
“첫째로, 저희 용병단이 이번에 소진한 만큼의 총과 화약을 무상으로 공급해주세요.”
“그 총이라는 병기의 단가를 말씀해주시면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조건은 무엇인지요?”
“둘째로, 이게 더 중요한 부분인데, 그린란드 회사의 선박들이 개척자와 이주민들을 싣기 위해 단치히에 기항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개척자와 이주민이라... 그건 무슨 말씀이시지요?”
“장담컨대 이 전쟁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될 거에요. 사실 그 전에도 썩 삶이 윤택하지는 못했겠지만, 이제는 더 심해질 테니까요.”
당장 포로로 잡힌 이들의 몸값만 해도 기사단으로서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보기에, 기사라는 사람들이 썩 현명하게 그 재정적 부담에 대처하지는 않을 듯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섭리의 일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괴로운 사람들, 그럼에도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해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함께 빈란드로 향하려고 하고 있거든요.”
물론 기사단뿐 아니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여느 영주도 그 신민들이 영지를 벗어나는 것을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허나 지금도 농노들이 심심찮게 도시로 도망치고 있는 판이었고, 시그리드가 짚은 것처럼 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프로이센 땅을 벗어나 도시로 도망쳐오는 이들이 꽤 늘어날 터였다.
스스로 농민들보다 잘났다 여기는 도시민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일. 그런 자들을 바다로 보내버릴 수 있다는 것은 단치히 시장의 귀에는 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단치히로 돌아가 시의회 사람들과 더 논의해봐야 하겠지만요.”
“물론이지요. 심사숙고할 시간은 드려야 마땅하겠지요. 아, 그리고 만약 총의 설계도를 받아가기만 하고 요구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신다면, 그때는 주변 모든 도시에 같은 설계도를 다 돌려버릴 거예요.”
너무나 태연하게 나오는 협박에 콘라트는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이 당돌한 소녀의 제안이 가져다줄 이익을 생각하면, 호탕하게 웃어넘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하하! 역시 우리 여사님이십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폴란드 국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단치히로 돌아가면 가능한 한 빨리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회 사람들에게도 가급적 긍정적으로 이 사업 제안을 검토해보도록 말을 전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콘라트 레츠카우가 부목 덧댄 다리를 절뚝거리며 사라질 무렵, 시그리드의 귀에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나요?”
이론상 포로지만, 지체 높은 신분이다 보니 이곳 그룬발트 마을 안에서는 운신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 쾨커리츠의 디폴트였다.
디폴트는 시그리드의 라이플에 맞아 구멍이 뻥 뚫린 어깨를 매만지며, 들킬 줄은 몰랐다는 듯 쭈뼛대며 풀숲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민망하게 되었소이다.”
스베인보다 조금 작은 덩치에, 딱 보아도 기사겠거려니 싶은 인상. 그런 사람이 좀생이처럼 수풀 뒤에 숨어 있다가 들키기까지 했으니, 부끄러워할 일이 맞기는 했다.
“실은... 후... 그, 빈란드라는 땅을 개척한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대해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소?”
신의 뜻에 따라 정의가 승리하리라 철석같이 믿었던, 그리고 그전에도 멋들어진 기사의 꿈에서 한 번도 깬 적 없이 살아왔던 디폴트였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알게 된 것은, 그의 맞은편 ‘병상’에 누워 저를 노려보는 중년 사내가 바로 저들의 기사단장을 쏘아 죽인 뤼베크의 헤니히라는 사실.
디폴트는 용기를 내어, 헤니히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토록 그들 기사단을 증오하는지.
옛날 같았더라면 그저 불한당의 헛소리,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이라고 단정했을 이야기였지만, 세상에 대해 지금껏 지녀왔던 믿음이 탄환 한 발로 부서진 지금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 이후,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고뇌하며 기분 전환차 산보라도 하려 나온 디폴트의 귀에, 콘라트 레츠카우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넌지시 언급하는 소녀의 목소리.
민망함을 무릅쓰고 직접 묻자, 소녀는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요. 새로운 삶을 원하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땅인 걸요.”
그렇게 시그리드가 새로 계약을 맺고, 또 인연을 맺고, 그렇게 자신의 첫 전쟁 경험을 – 그러나 결코 마지막은 아닐 것이었다 – 마무리하는 사이, 나머지 세상은 가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쿨름 방면을 지키던 중 그룬발트의 비보를 접한 플라우엔의 하인리히는, 자신이 생존해 있는 기사단의 지휘관 중 최선임임을 깨닫고 즉시 마리엔부르크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마리엔부르크는 압도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앞에 절망하여 항복한 뒤였다.
어지간하면 군사적 수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 기사단의 통례였지만, 그런 수단이 동이 난 지금은 비로소 그 외교라는 것을 시도해볼 때였던 것이다.
플라우엔의 하인리히가 살아남은 다른 고위 기사들과 함께, 어떻게든 요가일라와의 협상을 질질 끌어가려 애쓰는 동안, 신성로마제국과 두 교황청에 저들이 당한 수난을 호소하는 기사단의 서한이 전해졌다.
어떻게 배교자 왕 요가일라가 이교도 군세와 함께 선량한 농민들을 짓밟으며 진군했는지, 그의 사악한 군세에 맞서기 위해 온갖 불리함을 무릅쓰고 진격한 융잉엔의 울리히가 어떻게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저의 목숨을 바치게 되었는지.
그러나 연합군에 대한 비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부풀리고 또 부풀린 ‘증언’ 끄트머리에는, 사악한 주술로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망자를 되살리는 백발의 마녀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것이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과 두 교황의 주의까지 끌게 된 사연이었다. 따지고 보면 유럽의 동쪽 절반의 세력균형을 뒤흔들었으니, 억울한 일이라고 하소연하기는 무엇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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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역사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당대 폴란드 측에서는 자신들의 피해가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전투의 전개 과정을 보았을 때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리투아니아군과 용병들 역시 정황상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거의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기사단측에 비하면 훨씬 적은 피해였겠지만요.
한편, 그룬발트 전투 승전 후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의 군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동을 보입니다. 북서쪽의 마리엔부르크로 직행하는 대신, 동쪽으로 빙 우회하는 경로로 느리게 행군하며, 곳곳의 기사단 요새들의 항복을 일일이 받아냈던 것이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그 이전까지의 진격 속도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대략 4~5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을 거리를 열흘에 걸쳐 주파하는 사이, 기사단은 마리엔부르크에 소집 가능한 모든 병력을 모으는 한편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등에 외교적인 개입을 요청했고, 몰살당한 지도부 대신 새로운 지도부를 빠르게 선출합니다.
이 짧은 지연으로 인해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마리엔부르크 공격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결과 맺어진 제1차 토룬 평화협정은 기사단이 대패를 당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기사단 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됩니다. 원 역사에서 전쟁의 원인이 된 사모기티아 지방은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 사후 환수한다는 조건으로 할양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점령한 모든 기사단 영토를 돌려받은 것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포로의 몸값 지불에만 어마어마한 재정지출이 발생했기 때문에, 기사단 입장에서는 망하기 직전에 겨우 한숨 돌린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폴란드는 기사단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이후 수십여 년에 걸쳐 몇 차례의 전쟁을 더 벌여야만 했지요.
그룬발트 전투 직후의 이 치명적인 지체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시도된 바 있습니다. 예컨대 승리에 도취된 요가일라가 마리엔부르크로 도주한 기사단 잔여병력도 곧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이라 단정했다는 설이나, 기사단국이 완전히 붕괴할 경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신성로마제국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해 고의적으로 행군을 지연시켰다는 설 등이 있지요.
그런데 만약 그룬발트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수습을 위해 행군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면, 요가일라의 이러한 행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근거가 부족한 만큼, 어디까지나 가설의 수준을 넘지 못하겠지만요.
* 증류주 제조법이 유럽에 널리 퍼지기 전부터, 이미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아랍 세계를 통해 순수한 에틸알코올을 얻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14세기경부터 알코올 용액을 ‘생명의 물’이라 지칭하게 되었고, 이 연금술 용어는 독한 증류주를 뜻하는 표현으로 유럽 각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위스키, 아쿠아비트, 그리고 ‘생명의 물’에서 ‘물’ 부분만 남기는 했지만 보드카까지 그런 예에 들어갑니다.)
* 그룬발트에서 대패한 뒤 겨우 마리엔부르크를 지켜낸 기사단은, 외교적 수완을 총동원해 신성로마제국과 교회 등 거의 전 유럽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칩니다. 예컨대 그룬발트 전투에 대해서는, 부도덕한 요가일라가 진격로 일대의 민간인을 학살했기에, 불리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회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지요. 이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깎아내리기 위해 온갖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었던 원 역사의 행적을 생각하면, 시그리드가 마녀로 몰리게 된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