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22화 (22/116)

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4)

5. 부서진 심장을 어떻게 고칠까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4)

기사 디폴트와 파울 주교가 스크렐링, 아니, 칼라알릿 사람들과 평화협정을 맺기 몇 달 전, 1409년 늦가을 마리엔부르크에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참관’하러 온 칼마르 동맹, 그리고 튜튼 기사단국 사이의 평화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확철이 다가왔기에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는 자신들의 군대 대부분을 해산했고, 다만 기사단이 섣불리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각지 요새에 봉신들을 보내 감시하고 있었다.

반면 농사와는 거리가 있는 용병들은 급여를 기다리며 – 기사단이 지불하는 포로 몸값은 용병들 급여로 직행하게 되어 있었다 – 마리엔부르크나 그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린란드 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리엔부르크 성 곁에는 노가트 강이라는, 비스툴라로 흘러드는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천연 해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공성전이 벌어지게 되면 농성하는 기사단에게 긴요한 보급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성이 허무하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앞에서 백기를 든 지금은 딱히 의미가 없는 사실이었다.

반면 높으신 분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노가트 강의 효용도 있었는데, 바로 빨래를 하기가 매우 편하다는 점이었다. 암내 심한 독일인 상전들을 모시는 성 아랫마을 사람들, 특히 그들의 빨래를 도맡아 하는 아낙네들에게 (그럭저럭) 맑은 물이 꾸준히 근처를 흘러간다는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냄새나는 것은 끔찍이 싫어하는 그린란드 사람들은 나머지 백송고리 용병단 사람들을 매일같이 쪼아댔으므로¹, 코펜하겐 출신 용병단원들도 그런 빨래하는 아낙네들에게 신세를 져야만 했다. (시그리드의 잔소리와 스베인의 근육이 조합되면, 실로 강력한 설득력이 발생하곤 했다.)

“헌데 아가씨는 여기서 뭐 하고 계셔요?”

그런 빨랫감을 한가득 짊어지고 강가 빨래터로 향하는, 딱 봐도 억척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아낙네 하나가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따라와 봤어요.”

“무에 궁금할 게 다 있다고.”

“아이고, 이 아지매 보소. 귀하신 분 앞에서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요. 여기 이 사람이 좀 입이 험합니다.”

이 은발 소녀가 높으신 나리들과도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던 것을 먼발치서 보았던 곁의 다른 아낙네가, 퉁명스러운 저의 빨래터 동무 대신 변명을 하고 나섰다.

“저 별로 귀한 몸 아닌데요.”

“세상에, 겸손하기까지.”

아낙들의 상식으로 판단컨대 한없이 높고 귀하신 분들과 어깨 나란히 하는 사람이면 똑같이 높고 귀한 사람이었다. 헌데 곁의 소녀는 생긴 것이 특이할 뿐, 그런 귀한 기색은 잘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때마침 백송고리 리프가 어디서 생쥐 한 마리를 잡아와서는 저의 주인 곁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쥐 하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농부農婦들은 좋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야, 잘 먹는다. 영특도 하지.”

“어디서 이런 새를 데려다 키우게 되셨대요?”

“아, 그게 말하자면 긴데요...”

그렇게 서로 말문이 트이니, 그때부터는 아낙네 수다의 홍수가 시그리드의 귀를 덮쳤다.

허나 애초에 이곳 빨래터에 온 까닭이 바로 그 수다 속에 배어나오는 주변 사정을 듣기 위함이었으므로, 시그리드는 하등 불만 없이 ‘그렇죠.’ ‘세상에나.’ 추임새 넣어가며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니, 피사에서 급히 열리고 있는 공의회니, 사모기티아에 닥친 기근²이니 하는 말은 아낙들의 언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세계는 마리엔부르크와 그 주변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낙들의 대화는 그 무엇보다도 세계의 거울,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속살, 그 종기와 진물 가득한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았다.

이웃의 친척이 어느날 어디어디 장터에 가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걸 보았다더라. 이러다가 삼 년 전보다도 심하게 배곯이하는 것 아니냐. 아이고, 큰일이다 큰일은. 뭐 별 수 없지 않느냐... 등등.

(물론 도중에 종종 걸쭉한 음담패설도 섞여나오곤 하여, 시그리드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했다. 아낙들은 그걸 보고 귀엽다면서 또 저들끼리 까르륵 웃고 떠들곤 했지만.)

그 불행을 일으키는 데 자신이 일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자책, 그리고 그들에게 살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희망이 함께 시그리드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 무렵.

이번에는 정말로 ‘나 귀한 사람이오’ 하고 말하는 듯한 복장의 중년 사내가 빨래터 초입에 나타났다.

“그, 혹시 그린란드의 시그리드 여사께서 여기 계십니까?”

“전데요.”

시그리드 한 사람뿐 아니라 빨래터의 모든 아낙들 눈길이 저에게 닿은 것을 뒤늦게 깨달은, 암만 보아도 책상물림인 듯한 사내는 부담스러움을 가득 담은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흠흠, 크라쿠프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파벨 브워드코비치올시다. 다름이 아니라, 근래 제기된 몇몇 외교적 문제에 대해 증언을 받고자 하여...”

“외교적 문제라고요?”

시그리드는 리프와 함께 빨래터에서 일어나 교수 곁으로 선뜻 다가가 물었다.

“그, 있지 않습니까. 몇몇 사람들이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말을 붙임으로써 발생한 논쟁 말입니다.”

“제가 한 일을 두고 ‘마법’이라고 몰아가는 사람들 말씀이시군요.”

“예. 거기에 대해서 빨리 해명을 마련해야 할 판국입니다. 피사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이번 전쟁과 평화조약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주군이자 국왕이신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 폐하의 명을 받아 이곳 마리엔부르크에 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긴밀히 상의하기 위함인데, 논의해야 할 사안 중에는 여사님께 제기된 몇몇 혐의의 진상에 관한 것도 있지요.”

“알겠어요. 그러면 교수님을 따라가면 될까요?”

“아니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용병단 모두를 소집해 주시지요.”

사실 브워드코비치는 시그리드와 그 부관이라는 스베인 라그나르손인가 하는 덩치 큰 사내, 그리고 그 동업자라는 보헤미아 사람 얀 지슈카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막 마리엔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평화협상 때문에 역시 이 성에 머물고 있던 어느 귀빈으로부터 공의회에서 벌어질 언어적 (때로는 비언어적) 난투극에 대비하려면 만전을 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귀띔을 받았다.

그 귀빈의 말에 따라 모든 용병단원을 따로 불러내어 각각 증언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고작해야 삼백 명이고, 하급자들이라면 그냥 조수들을 시켜 스물, 서른씩 묶어서 증언을 받게끔 하면 될 테니 그리 품이 많이 들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질문 공세에 시달린 시그리드는 지친 발걸음으로 저들이 머무는 숙소로 돌아왔다.

본디 기사단에 방문하는 외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객관은, 용병단 사람들이 살던 집보다 훨씬 정갈하면서도 편안했다. 시그리드뿐 아니라 스베인과 몇몇 운 좋은 병장들까지 독방을 쓸 수 있을 만큼.

“오, 단장님 오셨습니까.”

짐을 지키고 있다가 나중에 부르면 오라고 해두었던 몇몇 단원들이 시그리드를 반갑게 맞이했다.

“심문이 잘 끝난 것 같군. 다행이오.”

그리고 개중에는, 단치히에서 막 화약과 새 총을 가지고 돌아온 보급관 헤니히의 얼굴도 있었다.

“헤니히 아저씨! 아차, 보급관! 돌아오셨군요!”

그 와중을 못 참고 옆에서 한스가 참견을 했다.

“제가 뭐랬습니까. 심문도 아니고, 그, 뭣이냐, ‘지리’인가 ‘질의’인가 하는 거라니까요. 폴란드 사람들은 우리 편이라고요. 다 우리가 이단이니 뭐니 무고 안 당하게끔 대신 변호해주려고 우리 증언 듣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던 한스가 느닷없이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그 사이에 단장님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딱 봐도 기사 같은 사람이랑 같이 와서는 단장님을 찾기에, 잠시 기다리라 했더니 진짜로 구석에 가서 기다리더라고요... 엥? 잠깐, 그 사람 어디 갔지?”

“이놈아, 그걸 놓쳐? 도둑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헤니히가 한스 뒤통수를 한 대 훅 쳤다.

“아니, 먼길 돌아오시자마자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다들 그 질의에 응하러 자리를 비웠으니까 경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애시당초 이 건물, 창문이 좁아서 그리로는 못 나옵니다. 우리 짐 털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면 저기 저 계단으로밖엔 못 내려온다고요. 그러니 제 발로 함정에 걸어들어간 거지요.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제가 이래 봬도 코펜하겐에서는 제법 그런 짓으로 밥벌이한 몸입니다. 제 말 믿으십... 어? 단장님?”

한스가 열심히 변명을 주워섬기는 사이에, 시그리드는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검은 책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시그리드가 알기로 이 유럽 대륙에는 없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모르는 법. 들키지 않는 게 최상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이층 복도에 올라서자마자 시그리드 눈에 들어온 것은, 저의 방 앞을 지키고 있는 구면, 기사 옌스였다.

“여긴 무슨 일이시죠?”

살짝 노기까지 띈 날선 질문에, 옌스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코펜하겐 뒷골목에서 여자가 무슨 용병단장이냐며 비웃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 그룬발트 전투를 겪어본 이라면 이제 시그리드를 옛날처럼 쉽게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악마의 힘을 다룬다는 ‘하얀 마녀’의 소문까지 도는 판이었다.

그러므로 옌스는 감히 비아냥거리는 대신, 꾹 닫힌 시그리드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폐하, 시그리드가 왔습니다.”

“들라 하라.”

들려오는 것은 칼마르 동맹의 명목상 국왕 에릭의 목소리.

“그, 에, 우선 들어가시지요. 저는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어색한 공손함으로 시그리드에게 인사하는 옌스 곁을 확 지나, 시그리드는 방 안으로 뛰쳐들어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지식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조차 부족하군그래.”

검은 책의 책장을 조심스레, 마치 그 안에 담긴 지식의 무게를 인식하는 것처럼 닫는 에릭의 모습이었다.

“코펜하겐에서는 라이플을 훔쳐가시더니, 이제는 제 책까지 훔쳐보시는군요.”

노기에 이어 경계심까지, 잔뜩 가시 돋힌 시그리드의 목소리.

“진정하거라, 그린란드의 시그리드. 그래도 코펜하겐에서도 나름 값을 후하게 쳐주지 않았더냐. 그리고 여기서도, 저 책을 훔쳐본 대가는 톡톡히 치르고 갈 심산이다.”

에릭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묵직한 검은 책을 건네주었다.

“아이슬란드 상인 토르스테인 그자가 딱 소시민 그 자체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고 무슨 신념에 따라 끝까지 함구했더라면 나도 이런 책이 네게 있을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책에 담긴 지식이 대단하다는 건 그냥 지레짐작해서 던진 말이다. 그림 몇 개 빼곤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더구나.”

빼곡히 들어찬 도형, 잉글랜드 인들의 언어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상이한 말로, 짤막하게 요점만 끊어 쓴 문장.

그러나 그 지식이 지니는 무게는, 굳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책의 존재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네가 만든 그 총도, 그룬발트에서 네가 망자를 일으켰다는 얘기도, 실은 모두 그 책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겠지.”

이 책에 조그맣게 적힌 글 한 줄, 그림 하나가 그린란드에서는 번개를 불러내고, 코펜하겐에서는 기사들의 목숨값을 농노 하나와 같게 만드는 신무기를 만들어내었으며, 그룬발트에서는 죽어야 했을 이들의 운명을 뒤바꾸었음을 에릭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엄청난 지식이 책에 더 담겨 있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시그리드 하나만이 그 모든 지식을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벌써 그로 인해 온 유럽이 진동하고 있단다. 시그리드 네가 짐작하지 못할 만큼 말이야.”

에릭은 의자를 시그리드에게 양보하곤 벽에 기대어 말을 이어갔다. 세 나라 왕관을 쓴 자의 귀에 들어오는 온 유럽의 정세를, 일체의 가감 없이 나열하는 에릭. 그 긴 이야기가 자신이 말한 ‘책 훔쳐본 대가’의 일부임을 직감한 시그리드 역시 분노와 당혹감을 잠시 억누르고 귀를 활짝 열었다.

지금의 유럽에는 교황이 둘이고, 황제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들 사실상의 황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허울뿐인 독일왕 루프레히트도, 선제후들을 구슬려 루프레히트 사후 어떻게든 독일왕 지위를 물려받으려 계획하고 있는 모라비아 변경백 욥스트도 아니요, 바로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룩셈부르크 가문의 사람이자 선대 황제 카를 4세의 아들인, 야심만만한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였다.

“그 지기스문트가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에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의회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어떻게든 피사에서 교회 대분열을 마무리짓고 새 교황을 선출케끔 하려 한다더구나.³”

공의회주의가 무엇인지, 교회 대분열의 종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그리드는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부끄러움 없이 물었다. 지식은 힘이고, 지금 시그리드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힘이었으니.

“쉽게 정리하면 이렇단다. 기사단국 문제를 다룬다는 강력한 명분을 휘두르며 공의회에서는 교황을 선출하게 될 거야. 공의회주의자들은 공의회가 교황권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니까, 만약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이 통합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숫제 새 교황을 뽑아버리겠지. 그리고 그 교황은 자신의 선출을 도와준 지기스문트를 지지할 테고.

루프레히트 사후의 독일왕은 지기스문트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기스문트는 로마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 몇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지 -황제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기스문트는 폴란드가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고, 이번에는 자신이 새로 얻은 권위로 폴란드를 견제하면서 이득을 취하려 할 거야. 요가일라 또한 어떻게든 지기스문트로부터 압박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겠지.”

“그 말씀은...”

“시그리드, 요가일라에게 너는 아무런 비용 없이 버릴 수 있는 패다.

요가일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있다가, 기사단이 너를 마녀로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새삼스레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겠지. 그리고 너와의 모든 연을 부정하고, 어쩌면 저의 무고함을 역설하면서 가장 앞장서서 너를 정죄하려 들 수도 있다. 호들갑을 떨면 떨수록, 기사단이 자신을 공격하는 근거는 약해질 테니.”

요가일라는 폴란드의 군주고, 군주로서 (신앙 다음으로) 폴란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명분으로 보나 실익으로 보나, 시그리드가 마녀로 몰린다면 옹호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가장 거세게, 가장 그럴듯하게 시그리드를 내친다면 모를까.

시그리드가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의 남은 군대와 함께 아직껏 마리엔부르크에 머물고 있는 것도, 자신에게 흠 잡힐 구실을 안 남기고 깔끔하게 관계를 청산하기 위함일 테다.

적어도, 에릭은 그렇게 보고 있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제 책을 훔쳐본 대가로는 영 부족하다 싶긴 하지만요...”

“그렇지, 부족하고말고. 본론은 이제부터다, 시그리드야. 나는 네게 제안을 하러 왔다.”

그러고는, 저 역시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인지 크게 숨을 들이키는 에릭이었다.

“시그리드, 나는 네가 좋다. 네 아름다움을 아낀다. 하지만 이제는, 네가 설령 세 나라에서 가장 손가락질 받는 추녀라 할지라도 기꺼이 너를 내 배필로 삼고 싶다.”

처음으로 받는 고백, 그것도 세 나라의 왕관을 쓴, 젊은 미남 국왕에게 받는 고백.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다면 거짓일 테다.

그러나 이어지는 에릭의 고백을 들으며, 시그리드는 그렇게 확 올라온 열기가 차가운 소름으로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 폐하께는 이미 왕비가...”

“필리파? 필리파가 무슨 대수냐. 분명 그 책 속의 지식이라면 사람 하나쯤은 그 어떤 명의도 진단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방도도 있을 터.

이 검은 책의 지식을 네가 어찌 얻을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네가 무슨 악마의 술수나 눈속임 따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지식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너 하나뿐이라는 것도.”

너무나 태연히 아내의 죽음을 거론하는 에릭의 두 눈에서는 무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그리드야, 이 세상은 병들었다. 심장이 썩어들어가고, 멈추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모두들 그저 한밤 중의 소경처럼 앞을 더듬거리면서,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계속 갈 뿐이다. 왕은 마치 평소처럼 귀족들을 찍어누르면 뭐라도 알아서 이루어질 줄 알고, 귀족은 평소처럼 저의 영지만 늘어나면 그만일 줄 알지. 이단들은 저들이 교회의 개혁을 말하기만 하면 절로 거룩해지는 줄 알고.

하지만 시그리드야, 너의 그 검은 책 속에는, 답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시그리드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릭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앞을 더듬거리면서, 숱한 사람의 불행과 고통, 번민 끝에 중세는 근대로 나아갔으니까.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실수투성이로, 많은 이들을 저도 모르는 새 더 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뒤늦게 후회하며 잘못을 만회하려 애쓰기도 하고, 그 도중에 더 큰 잘못을 범하기도 하면서.

그 모든 실수와 잘못, 딴짓을 넘어서는 지식이 시그리드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시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릭은 폭소하였다.

“역시! 내가 맞았구나!”

스물남짓한 평생, 에릭은 저의 뜻대로 굽혀지고 펴지는 세상을 꿈꿔 왔다. 그 꿈은 그러나 그저 꿈일 뿐이라고 세상은 그에게 외쳐대었다. 세 나라가 하나로 뭉친들 한자 동맹 하나 어떻게 못 하는 처지라고. 당장 마르그레테의 그늘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허수아비가 꿈은 뭐 그리도 거창히 꾸느냐고.

그러므로 에릭은 그 그늘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무작정 움켜쥐고자 하였다. 그 빛이 그룬발트에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일으켰는지 알고 있었고, 오늘 검은 책에 빼곡히 적힌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보면서 그룬발트에서 벌어진 일은 고작해야 책이 지닌 힘의 편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러니 시그리드야, 나의 왕비로서, 함께 세 나라를 더 나은 앞날로 이끌어 나가자꾸나. 네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은 내 곁이다. 내가 아니고서 그 누가 너의 비밀을 알고 있겠느냐? 또 누가 네 말을 믿어주겠느냐? 우리 약소한 세 나라야말로, 네가 그 어느 나라보다 마음껏 쥐고 흔들 수 있는 곳 아니겠느냐?

너와 나의 꿈이 어찌 다르겠느냐? 한 나라, 그 정상에 선 두 사람의 손에 쥐어진, 이 세상의 부서진 심장을 갈아끼울 수 있는 힘. 그로써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대! 아아, 시그리드야, 상상만 해도 나는 즐겁다!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않겠느냐?”

하지만 시그리드는, 바이킹의 후예였다. 자유를 찾아 머나먼 서쪽 바다로 떠난 바이킹, 거기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더 서쪽으로, 세상 끝을 향해 나아간 바이킹의 후예.

그러므로 시그리드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답변은, 비록 엄청난 장고를 거쳐야 했을지언정 이미 정해져 있던 것과 다름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의 꿈과 폐하의 꿈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저의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양, 한참 침묵하던 에릭은 조용히 물었다. 일말의 괘씸함도, 노여움도 느껴지지 않는 사뭇 건조한 말투에, 도리어 시그리드는 다시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정녕 내 손을 뿌리치려 하는구나. 무슨 뜬구름 잡는 이상을 위해, 고난의 길로 걸어들어가기를 자처하느냐?”

“그 고난의 길이 제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이라면, 딴길로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폐하, 저의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불청객의 시간은 이제 끝났습니다.”

“알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 이 제안은 언제든 네게 열려 있을 것이다.”

국왕에게 축객령을 내린다는 제법 대담한 짓을 한 시그리드는,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등이 침대에 닿았다.

에릭은 미래의 지식으로 강력한 나라를 만들 것을, 그리고 그 힘으로써 새 시대를 열어갈 것을 제안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귀천상혼이니 무어니 하면서 반발할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귀족들은, 화약의 힘으로 모조리 무찌르고 그 옛날/미래 스탈린의 방식대로 숙청해버릴 수 있을 테다.

그러고는, 신대륙의 황금을 끌어오고, 유럽의 경쟁자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 황금으로써 패권을 굳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바이킹들이 온 유럽을 휩쓸었던 것처럼, 그 영광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 시그리드가 그린란드를 유지시키고자 한다면, 오직 동녘정착지에 마치 한 사람의 관상용 화초같은 개척지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머지 세상도 가만 있지 않을 테니, 그들보다 한 발 앞서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 가속하는 부국강병 끝에는-

시그리드는 욘이 말하던 미래의 어둠을 기억한다.

시그리드의 손에 들린 미래의 지식은, 결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욘이 살던 미래의 과거인들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선조들의 실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때로는 그들의 피로 대가를 치러가며 얻어낸 것이었다.

제국주의. 쇠고랑을 찬 세상. 더 많은 식민지를 위한 전쟁. 수천만 명이 죽어나가는 두 번의 세계대전. 둘로 나뉜 세계. 상호확증파괴를 위해 서로 겨냥하는 육만여 기의 핵탄두.

어쩌면 그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그리드가 이 미래의 지식을 지금 이곳 유럽에, 그리고 나중에는 (희망컨대) 신대륙에 퍼뜨린다면, 결국 인류의 앞날은 그렇게 정해지는 것일지도.

하지만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방인 욘이라는 한 친절한 사내가 베푼 호의를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비록 아직 소녀의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 사람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서 피어난 것일지라도, 더 나은 다른 길의 꿈을 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마음을 단단히 바로잡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계단 아래로, 그리고 숙소 밖으로 향했다.

에릭은 곧 자신에게 닥칠 새로운 고난을, 시대에 맞지 않는 지식을 만인 앞에서 선보인 대가가 닥쳐올 것임을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암만 임박했다 한들 미래의 일이었다. 마치 필연적으로 닥쳐오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그린란드의 파멸처럼.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날뛰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교황이니 공의회니 하는 말에 겁을 먹고 마냥 위축되어 있기에는 너무나 바이킹스러운 시그리드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받았는가?”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는 브워드코비치 교수를 불러들여, 이 골치아픈 마녀 고발에 대처할 방안을 막 논의하던 차였다.

“폐하,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마녀나 이단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당장 악의적으로 논리를 풀어낸다면,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선 것부터가 남장의 죄를 범한 것이고...”

바로 그때, 시종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문제의 인물,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본인이 접견을 청한다고 시종은 고했다.

요가일라가 결코 거절할 수 없을 제안을 함께 들고 왔다는 시그리드의 전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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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유럽인들의 위생 상태가 열악해진 것은 14세기 말, 도시 인구가 기존의 인프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기 시작한 뒤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중세 도시에서 청결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중변소와 상하수도 시설, 공중 목욕탕 등 기반시설도 존재했지요. 그러나 이런 중세 유럽인 기준으로도 북유럽인들은 유별나게 위생에 신경 쓰는 축에 들었는데, 토요일을 ‘목욕하는 날’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노르웨이 시골 어촌을 방문한 어느 이탈리아 상인이, 그런 궁벽한 마을에도 목욕탕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록도 있지요. 이는 다른 건 몰라도 깨끗한 물 하나는 쉽게 확보할 수 있던 북유럽의 자연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2. 15세기 초 발트해 동안을 덮친 기근은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자 결과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원 역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과 기사단국 사이의 전쟁 사유casus belli가 된 것은, 요가일라가 기근이 닥친 사모기티아 지방에 보낸 구호 물자를 기사단이 가로챈 사건이었지요. 원 역사에서는 1411년 제1차 토룬 조약 자체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몇 번이나 후속 전쟁이 더 벌어졌고, 그 와중에 양측이 각각 청야전술과 초토화 전술을 동원하면서 더욱 기근 피해가 커졌습니다. 일례로 기근 전쟁Hunger War(1414)이 끝난 뒤 닥친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사망한 정식 기사단원은 86명에 달했는데, 그룬발트 전투에 동원된 정식 기사단원 총원이 2백 명을 조금 넘겼음을 감안하면 당시 이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이전에 간접적으로 몇 번 언급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이 무렵에는 아직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인 룩셈부르크 가문은 이 무렵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고, 보헤미아의 왕관 또한 지기스문트의 형제인 바츨라프(웬체슬라스/벤첼)에게 있었지요. 원 역사에서 1410년 루프레히트가 사망한 후, 이미 선제후 셋을 포섭해두었던 지기스문트를 견제하기 위해 남은 네 선제후들이 똘똘 뭉쳐 선출한 다음 독일왕도 – 곧 지기스문트에게 암살당했다고 추정되는 – 같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모라비아 변경백 욥스트였습니다.

독일왕(또는 로마왕)이라는 지위는 신성로마제국의 복잡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혼란을 야기하는 직위 중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직위는 선제후(선거권을 지닌 유력한 제후) 선거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교황에 의해 황제로 임명받지는 못한 ‘사실상 황제’의 자리였으나, 이미 황제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사실상의 차기 황제가 지니는 자리이기도 했지요.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황제로서의 독일왕과 그 후계자로서의 독일왕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체제는 이후 점점 교황권이 약화되고 근세에 접어들면서 사라지고, 로마왕은 진짜로 황태자만이 오르는 자리가 되었지요.

원 역사에서의 1409년 피사 공의회는, 아비뇽과 로마 교황청의 통합을 위해 모였지만 정작 양측 교황들이 동시에 참석을 거부하면서 피사에까지 새로 교황과 교황청이 생기게 되는 – 즉 교황이 셋으로 늘어나는 - 막장스러운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폴란드가 일으킨 파급효과가 훨씬 크기에,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가 보다 일찍, 보다 강력하게 공의회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다음 열리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이루어졌던 서방교회 분열의 종식이 몇 년 일찍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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