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24화 (24/116)

보헤미아 광시곡 (1)

6. 보헤미아 광시곡 Bohemian Rhapsody – 퀸 (1975) (1)

1409년 성탄절을 보헤미아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맞이한 시그리드는 백송고리 용병단과 지슈카의 보헤미아 용병들 – 편의상 다들 ‘그린란드 연대’로 자처하고 있었다 – 과 함께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행과 함께 폴란드 국경까지 가고 있던 노장 진드람이,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던 중 저녁노을 드리운 들판 멀리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이 길을 따라 반나절만 더 가면, 오데르Oder 강이 보일 게야. 그곳부터는 우리 브와디스와프(요가일라) 폐하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단다.¹”

진드람은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의 명에 따라, 시그리드가 요구했던 칙서 – 각 마을 당 이민자 한 가구씩을 모집할 권리를 명시한 증서 – 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시그리드 일행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제왕들 간의 복잡다단한 정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그저 우직하게 왕관에 충성을 다할 뿐인 진드람은 이 임무에 제격이었다.

움직이는 내내 시그리드는 자신의 새 길동무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그치지 않았고, 진드람도 그중 하나였다.

시그리드 덕에 그룬발트에서 입은 부상에서도 쾌유하고 마리엔부르크 입성의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던 진드람은, 그새 저의 손녀뻘 되는 이 소녀에게 제법 정을 붙였다. 주고받는 말투만 들어서는, 마녀로 의심받는 소녀와 그 감시역으로 따라온 궁정의 신료 사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무인다운 단순한 세계관 속에서 기사단은 악이었고, 그러므로 그 악인들이 마녀라고 몰아붙이는 소녀가 진짜 마녀일 리는 없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 발밑에 보이는 저 마을이 국경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네 말대로란다. 저 마을에서 이별하면 될 게다.”

이 무렵의 국경이란, 이방인 욘이 말했던 베를린 장벽이나 한국의 DMZ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느슨하고 모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어느 마을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분명히 갈려 있었으므로, ‘폴란드 국경’이라는 것은 제법 잘 정의될 수 있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신의를 지켜주신 것도 고마운 일이고요. 마을로 들어가는 대로 그 증서를 경께 드릴게요.”

요가일라는 마리엔부르크에서 했던 약속을 지켰다. 물론 시그리드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의 영지에서만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지나온 마을에서만 한 가구씩 단치히로 갔다 하더라도 신대륙의 소문이 퍼지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그러니 이제는 시그리드가 약속을 지킬 때였다.

“저 역시 경 같은 분을 알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은 내 몫이었소, 트로츠노브의 얀.”

(본인도 하급귀족이긴 하지만) 귀족이란 자들에게 꽤 자주 당했기에 인식이 썩 좋지만은 않던 지슈카도, 간만에 만난 사람다운 귀족에게 경의를 표했다.

“요 다음부터는 보헤미아 국왕령인가요?”

언덕길 내려가면서 시그리드가 지슈카에게 물었다.

“아니, 글로가우Glogau 공국이다. 거기서 다시 야우어Jauer 공국을 지나고, 조그만 강 하나를 건너서 히르슈베르크Hirschberg 시까지 가야 보헤미아 왕국이란다. 거기도 사실 십수 년 전에 합스부르크의 아그네스가 죽으면서 왕국에 영지가 귀속되기 전까지는 또 다른 공국이었지.”

보헤미아 남쪽에서 폴란드까지 저의 용병단을 이끌고 오는 길에 이쪽을 거쳐왔던 얀 지슈카가 상세히 설명했다.

“거 참, 뭔 나라가 그렇게 많은지. 유럽 사람들은 참 힘들게도 사는 것 같소. 그냥 하나로 합치면 안 되나.”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을 욘에게서 종종 들어보았던 시그리드가 기억을 뒤지며 갸웃거리는 사이², 옆에서 스베인이 – 이 무렵에는 다른 그린란드 사람들도 저지독일어를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었다 – 툴툴대었다.

“지금 있는 제국이 다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 아니겠소이까. 대개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럴듯한 생각치고 현실에서까지 그럴듯한 것은 별로 없습디다.”

지슈카가 농담으로 맞받았다.

한참 혼자서 고민하던 스베인이 시그리드라는 반례가 있지 않느냐며 막 떠올린 항변을 지슈카에게 제기하려던 때에는, 이미 마차 행렬이 마을 초입에 닿고 있었다.

기분 좋게 행렬 위를 뱅뱅 맴돌던 리프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시끄럽게 울면서 시그리드 곁에 내려앉았다.

허나 암만 똘똘한 리프라도 사람 말은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라느냐?”

스베인이 물었다.

“그걸 왜 제게 물어보세요?”

“그, 아니다. 너쯤 되면 매가 하는 얘기도 알아들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그제야 행렬 선두에 있던 시그리드 눈에도 뭔가 이상한 게 들어왔다.

“진드람 경, 혹시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라고 미리 기별을 넣으셨나요?”

“아니, 그런 적은 없는데...”

마을 초입에 사람 여럿이 서 있었다. 석양빛을 등진지라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딱 보아도 개중 성직자나 기사는 없고 그냥 촌부들만 모인 듯했다.

“아이고, 저기 오신다.”

농민 여럿이 우르르 몰려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허나 애써 모여든 게 무색하게, 쭈뼛대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용건을 말하지 못했다.

“저기, 혹시 그... 시그리드 마나님 되십니까요?”

“이놈아, 마나님은 결혼하신 나이 지긋한 귀부인한테나 붙이는 말이다.”

“그러면 마녀님인가?”

“마녀는 나쁜 거랬는데.”

“이런 무식한 놈들! 뭣들 하는 게냐?”

뒤편에서 호통치는 소리가 나더니 촌로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흠흠, 다름이 아니오라, 시그리드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다는 소문이 있기에, 저희 마을의 모자란 천것들 중에 감히 무엄한 청을 올리려고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무엄한 청이라뇨?”

“아이고, 말할 것도 못 됩니다요. 바라건대 그저 잊어주시기를...”

그러나 사람 본능이, 알려준다고 하면 귀찮아서 귀를 닫지만 네게는 안 알려주겠다 하면 기를 쓰고 들으려 하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촌로가 노렸던 것도 그 점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 시그리드에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니, 우선 말씀이라도 들어보지요. 어차피 이 마을에서 하룻밤 신세 지게 될 텐데, 정말로 제가 뭐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야.”

“정말 하찮은 일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고작해야 소 몇 마리가 앓아누웠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귀하신 분을 귀찮게 하려고 이렇게들 모여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어찌 민망하고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요.”

소가 앓아눕는다는 얘기를 듣자, 시그리드 머릿속에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한 번 보기라도 하겠습니다. 저는 소문처럼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일 재주는 없어서, 아마 못 도와드릴 공산이 훨씬 크지만요...”

그렇게 일행은 조그만 마을치곤 꽤 대단한 환대를 받으면서, 촌로 – 알고 보니 촌장이었다 - 와 방앗간 주인네 집, 헛간, 그리고 창고 등지에 각각 짐을 풀었다.

약속대로 진드람에게 요가일라의 인장이 찍힌 증서를 건네준 뒤, 시그리드는 그린란드 사람들과 함께 문제의 소들이 있다는 외양간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떻게 네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을까?”

등불 들고 마을 사람 안내를 받아 가는 길에 스베인이 물었다.

“저도 의아해서, 아까 진드람 경이랑 지슈카 아저씨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꽤 그럴듯한 설명을 들었어요. 뭐, 내일 오데르 강을 건너가봐야 알겠지만요.”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한 용병들 중에는 이곳 실레지아 출신도 꽤 많이 있었다. 폴란드계 사람들은 대개 요가일라 편에 참전했지만 – 만약 그린란드 연대가 꾸려지지 않았더라면, 얀 지슈카 역시 그런 이들과 섞여서 전투를 겪게 되었을 터였다 – 독일계 용병들은 대개 기사단 편에 서곤 했다.

개중에는 저지 실레지아의 욀스Oels 공작 콘라트 7세처럼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실레지아 출신 용병들은 전투 당일, 융잉엔의 울리히의 지휘 하에서 돌격했다가 정면에서는 머스킷 세례를 받고 후방에서는 비타우타스의 리투아니아군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전멸했는데, 말이 전멸이지 대개는 살아서 포로 신세가 되었다.

(반면 그 시점까지 진짜로 멀쩡했던 양익의 기사단원들은 본진까지 후퇴했다가 진짜로 죽어나갔으니, 인생사 묘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리고 그런 용병들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 알아서들 몸값을 내고 풀려나 고향 실레지아로 돌아왔다. 즉 이 일대에는 하얀 마녀가 벼락을 내리쳐서 기사들을 죽이는 것과, 기묘한 물약vodka³으로 치명상 입은 이들을 살려낸 것을 직접 본 증인 수천이 있는 셈이었다.

“야, 이거 잘못하면 골치 아파지겠는뎁쇼.”

앞에서 등불 들고 가던 콜그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안심하세요. 그룬발트에서 그렇게 당했는데 설마 우리 앞을 군대로 막으려 하지는 않겠지요.”

보헤미아와 폴란드 사이에 끼어 있는 실레지아의 영주들로서는, 시그리드가 마녀든 성녀든 제발 조용히 저들 땅을 지나가주면 고맙다는 심정일 테다. 시그리드의 여정에 훼방을 놓든, 반대로 이왕 오신 길 안녕히 지나가시라 환대를 하든, 어떻게든 엮인다면 훗날 어떤 화근이 될지 알 수 없을 테니.

“반대로 생각하면 장차 네가 하는 일에 꽤 큰 힘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만큼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네 일거수일투족에 촉각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벌써 꽤 많아졌다는 것 아니냐?”

스베인이 제법 예리하게 지적하자, 시그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아마 우리가 프라하에 도착해서 후스 교수님을 만난다면 더욱 그렇게 되겠지요.”

배편을 마련하지 못해 스칼홀트 성당 앞에서 나침반을 팔던 시절이 고작 이삼 년 전. 광대 무리라 조소를 받으며 푸른사자 용병단 뒤를 따라 폴란드 땅으로 가던 것은 아직 만으로 한 해도 되지 않은 일.

그리고 지금. 폴란드 국왕의 권세가 닿는 땅을 떠나, 보헤미아 왕의 봉신들이 다스리는 크고 작은 영지로 막 접어들려는 차, 시그리드와 그 일행은 어느새 유럽 전역을 잘만 하면 뒤흔들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 자리가 썩 안정적이지도 않고,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딱 좋은 자리라는 게 문제겠지만, 여하튼 시그리드로서는 나름 성과라 여길 만한 일이었다.

누구의 지시도, 후원도 받지 않고, 오로지 세상의 작은 사람들만을 모아 일구어 나가는 미래. 그 이상을 머릿속에 그린 시그리드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입니다, 마님.”

‘마나님’이나 ‘마님’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사이 외양간 앞까지 일행을 안내한 농부가 문을 열었다.

추운 그린란드에서 소와 양은 이제 실내에서만 키울 수 있는 가축이었다. 그러므로 외양간을 가득 메운 악취는 (독일인들의 암내와는 달리) 깔끔함을 좋아하는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익숙한 냄새기도 했다.

“요 소들이, 아 글쎄, 며칠 전부터 하나둘씩 앓아눕지 뭡니까. 개중에는 요렇게 흉하게 물집이 잡히기도 하고요.”

농부가 젖소의 흉하게 부어오른 젖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귀하신 분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저희 보잘것없는 마을에 요 젖소들은 나름 귀한 재산입니다요.”

저들의 살림살이에 대한 일이었으므로, 농부는 처음 시그리드를 어려워하던 것과 달리 나름 열의를 담아 통사정을 했다.

맨입으로 무턱대고 저들 소를 고쳐달라 청하는 것은 꽤 뻔뻔한 짓이었지만, 호의를 받을 수 있을 때 받지 않을 만큼 고지식해서는 이 궁핍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 번 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하는 일이 책잡힐 수도 있거든요. 혹시...”

“아이고, 물론입죠. 당장 비켜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농부가 후다닥 자리를 비우고, 그린란드 사람들과 젖소만 남은 뒤, 시그리드가 조용히 물었다. (보나마나 그 농부는 어디 벽에 눈 대고 훔쳐보고 있겠지만, 그래본들 그린란드에서 쓰는 억양 강한 북구어를 알아듣지는 못할 터였다.)

“저기, 스베인 아저씨. 우리 동녘정착지에 마지막으로 천연두⁵가 돈 게 언제였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옛날에 종종 돌림병으로 사람 여럿 죽곤 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애초에 동녘정착지에 의사라는 게 없어진 지 꽤 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역병이었는지 어찌 알겠냐.”

“그러면 우리 중에 천연두 걸려본 사람도 없는 거고요.”

“그렇지?”

두창이라고도 하는 천연두. 신대륙 인구를 십분의 일로 줄였다는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 욘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박멸했다던가.

“아이고, 큰일날 뻔했네요, 우리 모두. 자, 자. 다들 이리로 오세요.”

시그리드 머릿속에만 있는, ‘신대륙으로 가기 전 챙겨야 할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우두cow pox였다. 사람을 구할 지식을 지니고 뻔히 지니고 있으면서 사람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심성은 도저히 되지 않는 시그리드였다.

더구나 신대륙에 유럽 군주들의 손이 뻗어오기 전 어떻게든 세력을 구축하려면, 유럽 이민자만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천연두 백신을 마련해서, 저들 유럽인들이 몇십 년 일찍 발을 디디는 바람에 그만큼 일찍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원주민들을 구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이제 생각해보니 당장 그린란드 사람들부터가 천연두 면역이 없었던 것이다. 시그리드 마음이 철렁하며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소 고름을 우리 몸 안에 넣어야 해요. 콧구멍에 넣으면 되려나?”

“뭐? 대체 왜?”

“어... 그래야 천연두에 안 걸릴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저의 말은 다 따라올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린란드 사내들이 시그리드를 따르는 데도 한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보헤미아 사람들 얘기 듣자하니 그 천연두라는 거, 그냥 어린애들이 한 번 앓고 끝나는 병이라던데. 이런 짓을 굳이 해야 하겠니?”

“그건 유럽 사람들 얘기고, 우린 다르다니까요? 자, 피하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얼른!”

“너부터 해라!”

“에휴, 알았어요, 알았어.”

그런데 막상 나서고 보니, 시그리드도 우두에 걸리면 천연두에 면역이 생긴다는 것만 알았지, 그 접종이라는 것을 얼마나,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시그리드는 바늘을 꺼냈다.

영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아내고 거사를 치른 뒤, 다들 이리로 오라고 막 하려던 차.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던 콜그림이 물었다.

“시그리드 아씨, 이방인 욘이 미래에서 온 기사 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사분께서 암만 박학다식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까지 알고 계셨을까요?”

“야, 콜그림. 네가 뭘 안다고...”

스베인이 순간 그들이 같은 편임을 망각하고 습관에 따라 시그리드 편을 들고 나섰다.

“아니, 들어보십쇼. 만약에 저 고름 덕으로 죽을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야 무슨 역한 짓이라도 하긴 해야겠지요. 헌데 사람이 걸리는 병도 엄청나게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이 소가 걸린 병이 꼭 그런 효험 있는 병이라는 보장이 있습니까요?⁶”

“그야... 엥, 잠깐. 그러게요?”

의외로 타당한 지적이라, 시그리드는 숨을 쉴 때마다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생각에 빠졌다.

시그리드는 콜그림과 스베인을 데리고 함께 급히 헛간 구석으로 가서는, 하나는 망을 보고 하나는 등불을 들고 있게끔 한 뒤, 미리 보따리에 챙겨온 검은 책을 꺼내 들춰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백신이 어쩌고, 에드워드 제너가 저쩌고 하는 얘기는 많이 나와 있었는데, 정작 천연두를 막아준다는 우두의 증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사실, 취미가 독서였을 뿐인 미 공군 중령에게 그런 지식까지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양심 없는 짓일 테지만.)

“뭐, 어쩔 수 없지요.”

시그리드가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앞으로 지나가다가 아픈 소가 보이면, 보이는 족족 고름을 짜내서 우리네 코에 넣어보는 수밖에요. 그러다 보면 하나쯤 운 좋게 얻어걸리지 않겠어요?”

“야, 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콜그림을 다른 이들이 째려보았다.

이튿날 아침, 시그리드는 자신도 딱히 소들을 고칠 방도가 없었다고 촌로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초에 맨입으로 무턱대고 부탁한 입장에서 함부로 무어라 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진드람 경과도 작별인사를 하고 마을을 떠나자, 시그리드 예상대로 그들을 기다리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길잡이를 보내주고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협력해줄 테니, 제발 아무런 탈 없이 조용하게만 공국 땅을 지나가 달라는 글로가우 공작의 간곡한 전언을 받들고 온 무리였다.

졸지에 악명 높은 ‘마녀’와 동행하게 된 이들 마음이 두려움에 가득 휩싸이건 말건,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연대는 남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린란드보다도 훨씬 따뜻하고, 더구나 한겨울인데도 해가 멀쩡히 뜨곤 하는 기분 좋은 겨울을 누리면서.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겨울철 들판이나 숲속에서 노숙하는 대신 운 좋게 마을에서 묵을 수 있게 되는 행운을 누릴 때도 없지 않았다.

헌데 그럴 때면 오히려 그린란드 사내들은 하나같이 똥 씹은 표정을 짓곤 했는데, 심지어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 찌푸림이 더 심해질 때도 있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나머지 그린란드 연대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런 크고 작은 소란 속에서도, 그린란드 연대의 발걸음은 조금씩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편, 그로부터 반 년 전인 1409년 가을.

이탈리아의 피사에 모인 추기경들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의 후원 덕에 자신들의 공의회에 대한 아비뇽과 로마 교황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피사의 추기경들은 아비뇽과 로마 양측에 서한을 보내, 피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쪽의 교황을 대립교황Antipope으로 선포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피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평소 자신과 수하들이 적그리스도라 비난해 마지않던 꼴보기 싫은 상대편만 같잖은 자존심에 발목 잡혀 공의회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절로 자신이 정통 교황이 되는 셈 아니겠는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비단 신성로마제국 제위뿐 아니라 폴란드 견제를 위해서라도 이번 공의회에서 교회통합을 이뤄야 하는 입장임을 잘 알던 두 교황은 그런 희망어린 생각을 품고서 곧장 피사로 향했다.

그리고 피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자진’해서 퇴위할 것을 요구받았다. 순순히 물러난다면  추기경직을 보장하겠다는 ‘제안’, 그리고 이미 모든 성문은 지기스문트의 군사에 의해 막혀 있다는 친절한 안내와 함께.

두 교황이 크게 감명받아 물러나고자 하는 뜻을 밝히니, 공의회 좋고 황제(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걸림돌이 사라진 공의회는 곧장 밀라노 대주교 피에트로 필라르고를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추대했다.

그리고 곧 교회의 개혁과 이단의 정죄, 폴란드 왕의 이단 혐의에 대한 조사 등등 많은 안건들이 공의회를 거치게 되었는데, 개중에서도 특히 이 공의회의 권위에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된 것은 이 무렵 전 유럽의 대학가에서 힘을 얻고 있던 존 위클리프의 이단적 사상이었다.

이는 그 위클리프의 사상에 크게 감명을 받아 그 저작을 보헤미아 말⁶로 옮기고 또 인기 많은 자신의 대중강연에서도 종종 인용하곤 하던 프라하 대학의 얀 후스 교수에게는 실로 나쁜 소식이었다.

프라하 대주교 즈비네크 자이츠에게는 즉시 시내에 있는 모든 위클리프의 저작을 불사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이단자들을 단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저작을 가장 많이 들여오고 유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후스와 그를 추종하는 젊은 학생들이었다.

젊은 나이에 아무런 신학적 소양도 없이, 그저 대주교직을 권력과 재물로 사들였을 뿐이었던 즈비네크 대주교는, 그간 멋모르고 후스의 주장에 좋다고 찬동하고 있다가 그제야 어마뜨거라 하고 후스에 대한 모든 지지를 철회했다.

“어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예하!”

“이보게. 나는 솔직히 신학에 대해 잘 모르네. 하지만 정치는 잘 알지. 내 말 믿게. 이것이야말로 그대를 위한 길일세.”

즈비네크 대주교는 비록 무학에 가까운 젊은이였지만, 적어도 그에게 직접 전해지는 공의회로부터의 서한을 통해 피사의 상황이 대략 어떤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껏 후스와 대립하다가 끝내 지난해 프라하를 대량으로 떠난 독일인 학생과 교수들이, 이곳 프라하에서 퍼지고 있는 이단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가득 퍼뜨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이단의 수괴로 후스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

또한 대주교는 후스가 지금까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지금껏 소외되어 있던 보헤미아의 평범한 민중을 다시금 교회가 끌어안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을 뿐더러 직접 발 벗고 뛰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후스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를 지지하는 프라하 시민들의 여론이 심상치 않다는 것도.

“당분간 이곳 프라하를 떠나지 말고, 강연이고 뭣이고 모두 끊게나. 이러다 한 몇 년 지나면 알아서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후스는 포기를 모르는 사내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피사로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억울함을 소명할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과 통합을 위해 모인 분들이라면, 어찌 저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안 된다니까. 어휴, 이 사람... 만약 자네가 피사의 성문에 발을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는다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할 것이란 말일세! 지금 분위기가 그렇다고!”

“제 억울한 사정을 국왕 폐하께 전한다면 안전한 여행을 보증하는 증서쯤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라하 시민들에게 호소하면 오가는 길에 저를 보호해줄 용병들은 쉽게 구할 수 있을 터. 이 후스, 잘못이 있다면 회개할 것이로되 거짓 앞에서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후스는 꿋꿋하게 저의 뜻을 내세우며 대주교좌 성당인 성 비투스 대성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 무슨 신의 섭리인가! 정말로 그가 찾던 듬직한 용병이 떡하니 그 앞에 나타나, 도움을 청하는 것 아닌가.

애꾸눈 얀 지슈카라면 그 역시 한두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던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억울하게 마녀로 몰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 하는 것이었다.

그 소녀, 그린란드의 시그리드라는 그 이름은 후스도 들어본 바 있었다. 독일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보헤미아 사람으로서, 자연히 튜튼 기사단보다는 그 반대편에 심정이 기울 수밖에 없기도 했다.

화약을 쓰는 것이 악마의 주술이라면, 사석포를 썼던 기사단 또한 악마와 거래한 것 아니겠는가? 죽은 자를 악마의 물약으로 살려냈다는 것도, 보나마나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할 터였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으니까.

대주교가 위클리프의 저작을 몰수하고 분서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프라하 시내는 거의 한판 내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팽팽한 상황이었기에, 소녀와 나머지 용병들은 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후스는 착잡한 마음도 돌릴 겸, 기꺼이 이 얀 지슈카를 따라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 후스를 맞이하는 것은-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우두 같다니까요? 이리 와서 고름 좀 맞으세요들!”

“으아악! 저리 가라! 저리 가! 싫다니까?”

“야, 시그리드야. 나는 지난번에 그 고름 코에 넣었더니 열이 나더라. 이만하면 된 것 아니겠느냐... 저리 비켜라! 그거 치워!”

무슨 막대기를 들고 돌아다니는 소녀 하나와, 그 소녀를 필사적으로 피해다니는 덩치 산만한 사내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지슈카 또한 경악하여, 스베인을 붙잡고 물었다.

경황이 없어 지슈카 곁의 후스를 보지 못한 스베인은, 그만 이실직고를 하고야 말았다.

“아, 그게, 천연두를 막는답시고 시그리드 저 아이가 소의 고름을 우리네 코에 넣겠다고 하고 있다오. 그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고 있으니 여간 고역이 아니오... 엥, 그런데 옆의 샌님은 누구쇼?”

독일어를 비롯해 어지간한 유럽의 언어에는 통달해 있던 후스는 이미 그 말을 다 알아들은 뒤였다.

지금껏 대중계몽에 힘쓰면서, 거짓된 술수로 대중을 현혹하는 못된 사이비 수도사들과, 반대로 선량한 사람을 제멋대로 마녀로 몰아가는 못된 무리들을 여럿 보았던 후스였다.

“그... 러니까 저 소녀가 진짜 마녀가 아니라고 변호를 해달라는 말씀이지 않소이까? 소의 고름으로 뭘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암만 생각해도 영 미심쩍은데.”

이렇게 후스와 시그리드의 첫만남은 거의 최악에 가까운 방식으로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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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점에서 시그리드 일행이 지나고 있는 곳은 라틴어로 실레시아, 독일어로 슐레지엔이라 불리는 지방입니다. 중세부터 2차대전 시기까지, 독일과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사이에서 계속 주인이 바뀌었던 땅이지요. 14세기 초까지 폴란드의 피아스트 왕가 방계들이 각각 조그만 공국을 세우고 할거하고 있던 이 일대의 종주권은, 1335년 보헤미아 국왕이 폴란드 왕위 승계권을 완벽히 포기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로 넘어갑니다.

2. 본디 11세기 초 스위스 산골의 백작가로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이라는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꾸준한 결혼동맹으로 물밑에서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특히 룩셈부르크 가문과 계속 혼맥을 구축했고, 그 결과 작중에서는 아직 헝가리 왕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국왕까지 겸하게 되는 지기스문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간 룩셈부르크 가문이 구축한 세력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꿀꺽 삼키게 됩니다. 그 이후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권좌를 사실상 독점하며 유럽 최대의 세력 중 하나로 자리잡지요.

3. 15세기 초에 알콜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생명의 물’이라 불렀다는 것은 이전 화에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 반면 물voda의 지소형指小形 표현인 보드카vodka는 이 무렵에는 연금술 시약이나 화장품 같은 ‘물약’을 뜻하는 말이었지요. 시그리드가 ‘보드카’를 찾는 것을 이 무렵 누군가가 들었다면, 마녀가 물약을 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 딱 좋았을 것입니다.

4. 천연두는 1980년 공식적으로 박멸이 선언되기 전까지,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를 계속 괴롭혀 온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흑사병과 마찬가지로, 천연두는 시대에 따라 그 치명성과 전염성 등이 변해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컨대 서기 2세기경 로마제국을 덮쳤던 안토니누스 역병은 유럽에서 최초로 대유행한 천연두로 추정되는데, 이때의 치명률은 약 25%로 추산됩니다. 반면 15세기경의 천연두는 어린아이들만 앓는 비교적 경미한 질병에 불과했는데, 훗날 매독이 들어오자 매독이 ‘큰 두창’으로 지칭되고 천연두는 ‘작은 두창smallpox’이라 불렸던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그린란드의 경우에는 10~11세기경 몇 번 천연두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후로는 외부 세계와의 인적 교류가 간헐적이었기 때문에 거의 유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5. 이는 원 역사에서도 에드워드 제너가 자신의 성과를 널리 전파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현대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우두 바이러스는 천연두 바이러스와 근연종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내부에서도 매우 큰 유전적 다양성이 존재하였고, 더구나 제너의 시대에 우두를 진단할 수 있는 수의학적 소양과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겸비한 인재는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로 인해 제너가 자신의 발견을 발표한 직후, 이를 재현하려던 유럽 각지에서의 시도는 종종 실패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6. 보헤미아라는 이름은 고대에 이 일대에 거주하던 켈트족 일파인 보이Boii족에서 유래한 것인 반면, 체코라는 이름은 한참 후대인 7~8세기 슬라브족 대이동으로 현 체코 일대로 옮겨온 슬라브계 체히족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의 시대 이전부터 체코인들은 ‘체히Čechy’로 자국을 지칭하곤 했지만, 동시에 라틴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는 체코인 자신들도 보헤미아라는 표현을 쓰곤 했습니다. 폴란드를 ‘폴란드’라 부르고 리투아니아를 ‘리투아니아’라 쓰는 것처럼, 작중에서는 계속 보헤미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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