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26화 (26/116)

보헤미아 광시곡 (3)

6. 보헤미아 광시곡 Bohemian Rhapsody (3)

베트남전 패배 이후 미 육군과 공군은 핵무기의 사용 없이 재래식 전력만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에도 대비해야 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에 맞는 교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 공군 내에서 심각하게 제기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제한된 국지전 상황에서도, 간첩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감행할 경우 굳이 핵무기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전방 비행기지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캄란, 오산, 람슈타인 등, 냉전 최전선의 어지간한 기지는 다 돌아다니며 복무한 존 윌슨 중령은, 그러므로 그런 생화학 위협의 성질과 대응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¹.

“먼저,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여러분께서 잘 알고 계시는 의학 지식과는 아주 상이하고, 또 이 자리에서 사실임을 증명할 방법도 마땅치 않음을 짚고 넘어갈게요.”

그런 지식의 일부를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 앞에서 소개하게 된 시그리드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서두를 뗐다.

후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의대 교수들도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느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이오?”

“제가 소 고름으로 천연두를 막아보려던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에요. 흑사병 백신을 만들 생각입니다.”

후스가 처음 변호를 거부하고 여관을 떠난 이후, 황망하게 도시를 벗어나는 이들의 소문으로 흑사병 얘기를 들은 시그리드는, 그렇게 떠들며 마차 끌고 떠나가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항생제는 만들 수 없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완비하고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것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백신을 만드는 것이 쉬워보일 만큼.

“백신vaccine? 암소vacca를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려는 것이오?²”

“이름이 백신일 뿐, 이 흑사병 백신은 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없을 거에요, 아마도. 저도 원리만 알 뿐이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잘 알지 못하거든요...”

절로 움츠러드는 목소리. 그러나 후스는 시그리드를 응원해주었다.

“우리는 이미 그대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소. 암만 사리에 닿지 않는 듯하게 들릴지라도, 지금은 어떤 대책이든 귀를 열고 들어야 할 시국이니.”

“네, 고맙습니다. 그러면 우선 흑사병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요...”

흑사병 병원균이 정확히 무어라 불리는지, 어떤 특성을 띠는지까지는 모르고, 그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통해 옮겨진다는 것만 알던 시그리드였다.

그렇지만 다른 생물의 피를 거치며 스스로 불어나는 독virus으로 흑사병이 발병한다는 이야기는, 언뜻 터무니없을지언정 상상과 가설의 영역에서는 겨우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에 들었다.

“... 그 독을 약화시킨 다음 미리 몸에 넣어서, 그 독을 이겨내는 성질을 북돋는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로군.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다면 감기는 왜 매년 겨울마다 걸린다는 말이오?”

“그야 감기 같은 사소한 병은 독소가 아니라 체액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겠지요. 그러니까 약을 따로 먹지 않아도 건강한 사람들은 절로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어허! 일단은 후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열린 마음으로 듣도록 하십시다.”

그만큼 프라하 대학에서 후스의 인망은 대단했다. 보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과 대립하던 모든 이들이 이미 프라하를 떠났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³.

“백 번 양보해서 그대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독소가 병의 원인이라 칩시다. 그것을 어떻게 막겠다는 말이오?”

“먼저 어떻게든 방역 대책을 세워서 흑사병이 프라하에 다가오는 것을 늦춰야 해요. 그사이에 프라하 시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백신을 만들어내야지요. 그게 끝나면 프라하의 모두에게 백신을 접종하고요.”

“허나 그대의 이야기대로라면, 결국 요점은 딱 적당한 만큼 약화된 독을 적당한 분량만큼 체내에 집어넣는 데 있을 것이오. 그런데 듣자하니 여기에 대해 그대가 아는 바는 없는 것 같군.”

앞서부터 사사건건 시그리드를 비판하던 나이 지긋한 교수가 또 트집을 잡았다.

“... 네, 맞습니다. 그건 백신을 만들면서 어떻게든 알아내야겠죠.”

“우선은 알겠소.”

그러고는 후스를 돌아보며, 잠시 의논할 시간을 달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의논은 정말 ‘잠시’라 부를 만한 짧은 시간 사이에 끝났고, 결론은 이 못 미더운 대책을 한 번 따라보자는 쪽이었다.

“우리는 이 생소한 가설을 믿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소.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거려니와, 무엇보다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 모두가 주야 막론하고 환자들에게 고약을 바르고 피를 뽑는 것보다도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얀 후스 선생의 인망과 판단력을 믿기로 하였소.”

어차피 의과대학 사람들은 저들의 명성 때문에라도, 흑사병 치료와 방역에 나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처지였다. 다른 이들처럼 병을 두려워하며 전원으로 도피한다면, 제 앞가림도 못하는 무능한 의원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될 테니.

그들이 실패했을 때의 책임은 후스가 질 것이고, 성공했을 때의 성과는 그들 모두가 누리게 될 터였다. 이방인 소녀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묘한 지식보다는, 프라하 대학 교수의 이름으로 펴내는 학술서가 훨씬 더 권위가 있을 것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저들 보헤미아 사람들을 욕하며 저 라이프치히나 하이델베르크로 떠나간 거만한 옛 동료들의 코를 눌러줄 수 있으리라.

... 여기까지가 사람의 선량함과 더불어 이기심도 동시에 믿는 시그리드가 추정한 교수들의 속마음이었다. 실제로는 개중 정말로 후스를 따르는 마음에, 또는 프라하 시민들과 보헤미아인들을 위하는 마음에 따라나선 이도 있을 테고, 그런 이타적 동기와 이기적 동기가 뒤섞여 저의 마음속에서도 확실히 구분짓기 어려운 자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이제 중하지 않았다.

목전의 과업은 딱 하나.

흑사병이 프라하를 덮치기 전에 먼저 그 흑사병을 무찌르는 것.

그 이후로는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시그리드는 자신이 생각보다 사람들을 잘 이끈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 후스와 지슈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은 덕이겠지만.

의대 교수들이 이 전대미문의 대업을 위한 준비를 하는 사이, 의학 면에서는 쓸모가 없는 다른 교수들도 시그리드와 후스의 말에 따라 여전히 혼란에 휩싸인 프라하 거리를 쏘다녔다.

그 한가운데 차려진 본부에서 시그리드와 두 명의 얀은 프라하와 주변 지도를 펼쳐보고, 사람을 모으고,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마치 도둑이나 첩자를 막을 때처럼 프라하 주변을 방비하면 흑사병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듯합니다.

군사만 얻을 수 있다면, 어디 보자. 북쪽은 엘베 강에서 막고, 서쪽은 베로운Beroun에서 차단하고... 좌우지간 그렇게 차단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시장 그이를 만나고 오겠소. 남부에서 명성을 떨친 얀 지슈카라면 시장도 기꺼이 군권을 위임할 터.”

“급선무는 성 바깥 호젓한 곳에 큼직한 창고를 빌리는 거에요. 지금 우리로서는 도저히 벼룩이나 쥐를 박멸할 수 없으니, 백신을 다루다가 주변에 옮기는 일을 막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어제만 해도 황량했던 교정은, 지금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교수와 조교들 – 당연히 후자가 수적으로도 더 많고 훨씬 달음박질 속도도 빨랐다 – 그리고 그들을 경호하는 그린란드 연대 용병들로 가득 찼다.

“이리 교수님, 국왕 폐하께 허락을 받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미 비세흐라드 왕성은 텅텅 비었소!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시장과 대주교 두 사람한테 넘겼다는데, 성 비투스 대성당 쪽에 가보니 대주교도 도망친 지 오래더군!”

“시장이라면 내가 아까 성 바깥에 그 ‘백신’ 만들 부지 알아볼 때 만나고 왔소. 저의 사전 검토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전권을 위임하더이다!”

“시그리드 여사님! 저 마티아시 조교입니다! 흑사병 창궐이 확인된 주변 마을 취합하는 일 마쳤습니다!”

“네! 저기 벽면 지도에 도식해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바쁜 오전을 보내고 나면 더 바쁜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겠는가?”

어느새 시그리드를 조금은 편하게 대하게 된 후스가 물었다.

“일이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교수님 혼자 부담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후스가 몇 년째 강론을 하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후스 추종자들의 중심지가 된 베들레헴 성당. 그 앞마당에 후스는 큼직한 연단을 세웠다.

곧 프라하에 닥쳐올 흑사병에 대해 중대한 발표를 한다는 소식이 빠르게 프라하 거리에 퍼졌다.

슬슬 해가 저물 무렵에는, 대체 제가 뭐기에 그런 발표를 하느냐 투덜대는 독일인부터 – 아마 돌멩이 하나쯤 소매에 숨기고 있을 것이다 - 후스 선생님이시라면 꿈에 천사가 내려와 흑사병을 막을 기적의 방도를 가르쳐주셨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보헤미아인들이 끼리끼리 모여들었다.

“정말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엊그제 대학까지 들어가는 길에는 잘 몰랐는데.”

그때야 시그리드 뒤에 그린란드 연대 용병들이 있었으니, 서로 미워하든 드잡이질을 하든 우선 시그리드의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명성을 얻게 된 이래로 어떻게든 이 갈등을 끝내보려 노력했지만... 뜻대로는 안 되더구나.”

온 세상의 다툼이란 대개 다 그러했다. 언제부터인가,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붙어버린 싸움. 그러므로 스베인과 파울은 음모를 꾸몄고, 기사단과 리투아니아는 싸웠으며, 프라하에서는 독일인과 보헤미아인들이 다투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겠지요.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올바른 신앙의 길만 보여주면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신앙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니까.”

그러나 하늘 아래 처음으로 형제라는 것이 생기자마자 형은 아우를 쳐 죽였다. 그것이 인간의 죄 많은 삶이었다. 후스가 바랐던 것은, 그저 보헤미아인들이 이 도시와 왕국의 영광에 기여하는 만큼의 복락을 누리는 것뿐이었는데.

허나 지금은 회한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머리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린 후스는 단상에 올랐다.

“프라하 시민 여러분!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 아름다운 도시 문턱까지 검은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벌써부터, ‘회개하라!’와 ‘보헤미아 이단 놈들!’ 소리가 각각 다른 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신을 공경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분의 종이자 여러분 모두의 형제로서 저는 모두가 이 어려움 속에서 죄를 뉘우치고 더 깨끗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검은 죽음 앞에서 또 무엇을 논할 게 있다는 말인가? 후스의 말 한 마디만 떨어지면 서로 찢어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두 부류의 청중들은 모두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미 검은 죽음은 프라하에서 사나흘 거리까지 왔습니다! 우리와 우리 아버지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 대부터 겪어본바, 우리는 검은 죽음을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음을 압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후스는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곤, 아마도 이단의 지식일 시그리드의 제안을 입에 올렸다.

이어서 시그리드가 후스의 소개를 받아 단상에 올랐다.

먼저 오해의 여지를 최대한 줄이면서 쉽게 간추린 저의 접종 계획을 설명했다. ‘하얀 마녀’ 운운하며 웅성이는 이들은 애써 무시하면서.

일말의 거짓 없이 담담하게, 이 계책이 성공할 지는 알 수 없으며, 그 효능이 어떠할지도 그들의 지식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음을 밝혔다.

“낯선 이야기임을 저도 잘 압니다. 이름도 못 들어본 땅에서 온 이방인의 헛소리라 치부하는 분도 분명 계시겠지요. 하지만 저와 여러분의 처지는 알고 보면 그리 다르지 않답니다.

저는 머나먼 북방, 모든 것이 얼어붙으며 영원한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그린란드에서 왔습니다. 가만 앉아 파멸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개척하길 원했기에 고향을 떠나 유럽의 절반을 거쳐 이곳 보헤미아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 프라하에서, 저는 똑같이 가혹한 운명을 기다리는 여러분을 봅니다. 성공을 확답할 수는 없지만, 우리 손으로 무언가 해볼 수 있는 바가 있음을 알기에, 저는 기꺼이 마녀라 불릴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역병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게 있어야만 할까요? 언제고 한 번쯤은, 다 함께 손 잡고 일어나, 저 무정한 죽음을 향해 당하고만 있지 않겠노라 외쳐봐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 후스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도 더 많은 독일인들, 그리고 적지 않은 보헤미아인들이 고개를 저으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래, 저이의 말이 옳다! 이단이든 마녀든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하냐?”

그러나 이렇게 외치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독일인과 보헤미아인을 막론하고.

역병이 돌 때마다 여력 되는 이들은 미리 도시를 떠나거나 의사를 부르고, 그러지 못한 이들만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 이를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할 것인가?

어차피 이 도시 안에 갇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몸이라면, 뭐라도 해보고, 발버둥이라도 쳐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씩 웅성대는 소리가 거세지던 와중, 군중 가운데 재치 있는 이가 있어 이 순간의 격앙을 담아 선창했다.

“죽음에게 죽음을!”

“죽음에게 죽음을!”

후스와 시그리드, 그리고 군중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이 무렵 조금씩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민란과 크고작은 소요도 대개는 이런 생각에서 시작하곤 했다.

시그리드의 연설 속에, 인간이 감히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한다는 지나친 교만과 아집, 정말로 이단적인 무언가가 들어 있음을 그제야 후스는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모두를 힘 닿는 한 구해내는 수밖에. 저도 모르게 이단에 빠진 소녀든, 그 소녀의 설명할 수 없는 지혜에 매달리게 된 프라하 시든.

후스가 자신의 명망으로 불안에 떠는 프라하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고작 연설 한두 번으로는 봉합될 수 없는 사이였던 독일인과 보헤미아인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그사이 지슈카가 군사를 이끌고 방역을 지휘하고...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지나고, 검은 죽음의 그림자는 조금씩 프라하에 드리웠다.

“잊지 마세요! 벼룩을 조심해야 합니다!”

“걱정 마시오. 환자와 접촉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는 것쯤은 상식이니까.”

이미 환자와 많이 접촉하면 병에 옮는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전염병이 판치는 곳으로 가는 의사와 조수들은 두텁고 긴 가죽옷을 차려입곤 했다.

프라하 성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 만에 하나 흑사병이 퍼져나가도 당장 프라하가 위험해지지는 않을 곳으로 본부를 옮긴 시그리드는, 프라하 시의 자원자들을 모아 방역복을 만들었다.

기존의 역병의사 옷과 별로 다르지는 않지만, 벼룩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지자루와 소매, 옷깃을 동여맨 가죽옷이었다.

겨울철이 아니었더라면 제법 고역이었을 그런 옷차림으로, 프라하의 의학 교수들이 이끄는 크고 작은 무리는 이미 흑사병이 덮친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벼룩 포획을 위한 신형 쥐덫, 그리고 흑사병 환자들의 부어오른 물혹⁴에서 고름을 채취할 주사기 – 모두 시그리드가 제작을 의뢰한 것이었다 – 로 무장한 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붙잡아 격리하고,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는 이들은 따로 수용하는 정책 덕에 지슈카의 방역선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와 흑사병 소문 탓에 행인의 교통량이 줄어든 덕이었다.

최외곽의 방역선이 무너질 무렵, 바깥으로 나갔던 의사들이 시료와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순간, 아직 천연두에 대한 인두법이 막 태동하고 있던 시대에 흑사병 백신을 만든다는 무모한 시도를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단계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흑사병이 덮친 마을에서 데려온 쥐들은 따로 모아놓으세요. 벼룩 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쥐들은 흑사병 병원균을 증식시키는 데 필요하니까, 이전에 프라하에서 잡아놓은 녀석들과 함께 모아놓아야 해요. 참빗으로 벼룩을 걸러내는 건 조금 뒤의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시그리드를 비롯해 본부 사람들도 모두 방역복을 입어야만 했기에, 시그리드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크게 외쳤다.

“그리고 모아온 고름은 한군데 모아서 절반으로 나눌 거에요.”

“절반은 ‘생명의 물’과 섞어서, 다른 절반은 막 끓인 물과 섞어서 각각 독성을 억누른다고 했었지. 그대로 진행토록 하겠소.”

시그리드의 발상에 가장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던 노교수가 의외로 덤덤히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생명의 물’의 효능은 이미 소식 밝은 이들의 귀에는 들어가 있었다. 그룬발트에서 그토록 큰 효험을 보였으니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겠소?”

그때 지슈카가 동원한 프라하 시의 병사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시그리드 여사님! 서쪽 성문 지척에서 환자가 발생했답니다! 얀 지슈카 선생께서는 성문까지 후퇴하는 걸 건의하셨습니다!”

“이놈! 순서를 지켜라!”

노교수가 호통으로 그 입을 막았다.

“저기 저놈이 방금 떠든 것처럼, 이미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소. 얼른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건...”

중세 기술로 만든 불활성화 백신. 욘의 시대에는 그 어떤 제정신 박힌 나라에서도 허가를 내주지 않겠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는 기적의 산물로 불릴 만한 무언가였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정확히 어떻게 백신을 제조해서 얼마나 접종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시그리드는 백신으로 흑사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것과 그 백신의 원리만을 알 뿐, 쥐를 이용해서 배양한 페스트균과 환자에게서 채취한 페스트균, 알콜로 불활성화시킨 페스트균과 열처리를 가한 페스트균 중 무엇이 백신으로서 효능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실험을 해야지요. 사람에게...”

처음에는 죄수들을 동원하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고작해야 채무 상환에 소홀했던 빚쟁이나 손버릇 나쁜 잡범들 몇몇일 뿐인 감옥의 죄수들을 그런 일에 끌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⁵

그렇다면 결국, 무고한 사람들, 자원자들에게 실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후스는 프라하 성벽 안에 남아, 점점 처음의 열기가 가시고 다시금 불안과 갈등이 치솟는 시 안의 민심을 다독이느라 불철주야 바쁜 상황. 결단의 부담은 시그리드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암만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본부로 쓰이는 교외의 창고 바깥에 나와 한숨을 쉬던 시그리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시그리드 여사님?”

후스와 시그리드의 연설을 듣고서 이 과감한 시도에 자원하고 나선 시민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여기 계셨군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간 우리가 고생한 모든 게 다 허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꼴은 못 보지요, 암.”

“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아니겠습니까? 죽음에게 죽음을!”

“하하, 얼굴도 아리따우신 분이 왜 그리 눈물 흘리십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가지 방식, 환자의 림프선에서 채취한 시료로 만든 백신과 참빗으로 긁어낸 벼룩을 눌러죽인 뒤 체액을 희석해 만든 백신⁶ 모두,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예방효과를 지닌 것이 확인되었다. 시일이 촉박했으므로 두 방식 모두 이용해, 최단시간 내 접종을 진행키로 결론이 났다.

접종하는 백신의 양을 제대로 계측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다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서 백신을 주입하게 되면, 백신으로 예방하려던 흑사병에 그대로 걸려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으므로, 프라하의 의사와 그 조수들은 적어도 그런 선 하나만은 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선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공인지, 시그리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또 기뻐하느라 바빴으니, 시그리드 한 사람만은 기억해야만 했다.

1410년 봄. 보헤미아 전역을 동시다발적으로 할퀴고 지나간 검은 죽음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아 국경을 넘어가고 있었다.

프라하에 돌아온 이들, 그리고 흑사병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득달같이 찾아온 상인들은 한입으로 말했다. 이번 흑사병은 그 퍼져나가는 기세에 비하면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고.

고작해야 열에 하나쯤 죽어 나갈 뿐이었고, 그마저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렁뱅이나 무지렁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그러나 프라하에 남아 있던 이들은 자랑스레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 되어 견뎌내었고, 도시에 남은 오만 명 조금 안 되는 이들 중 고작 일천여 명이 죽었을 뿐이었다고.

보헤미아 사람들과 독일 사람의 구분은 조금은 흐려지고, 대신 도시에 남았던 이들과 도시를 떠났던 이들 사이의 구분이 새롭게 생겨났다.

조금씩, 후스를 욕하는 독일인에게 같은 독일인이 시비를 걸고, 후스 선생의 모범을 따라 타락한 독일계 성직자들을 성토하는 보헤미아 신부에게 보헤미아인이 손가락질하며 그러는 당신은 그간 어디 계셨느냐 따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지금 시그리드가 앉아 있는 대학의 한 강의동 옥상에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언제 이 땅 위를 검은 죽음이 휩쓸었냐는 듯, 들판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동녘정착지에서는 꿈도 못 꿀 만큼 화사한 햇볕 받아 블타바 강물의 윤슬이 반짝이며 그 자태를 뽐냈다.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쪽 성문에는, 오늘도 피난처에서 돌아오는 마차 행렬이 줄을 서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군.”

시그리드가 어디 있는지 한참 수소문한 후스가 옥상에 올라왔다.

“시그리드 양, 내 곧 피사로 다시 서한을 보낼 심산일세. 아직도 내 변호를 원한다면, 그 이야기도 함께 담아서 피사에 전하겠네.”

그사이에도 공의회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교회의 통합과 향후 분열 방지를 위한 대책 수립, 적당한 선 안에서의 교회 개혁, 이단 정죄, 공의회의 후원자 지기스문트가 요구한, 폴란드와 기사단 사이의 분쟁 해결 등등, 그토록 산적한 안건들이 고작 한두 해 사이에 모두 처리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단, 조건이 있음이야.”

그제야 햇살 가득한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그리드가 후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조건이라고요?”

후스는 말했다. 아니, 말하려다가 멈추고야 말았다.

‘만약 자네가 지금까지 했던 이단적인 언설을 사람들 앞에서 철회할 의향이 있다면 말일세.’라는 조건.

그러나 과연 그런 조건을 시그리드에게 요구하는 것이 합당할까?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저, 흑사병이 지나갔으니 시그리드의 쓰임은 다했다는 천박한 생각 때문에, 저의 보신을 위해 그런 조건을 덧붙이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내 실언을 했네. 설령 자네에게 무슨 혐의가 있다 한들, 이곳 프라하에서 이루어낸 이 백신의 기적을 알게 된다면 누구든 그 혐의를 물려주지 않겠는가.”

자신과 보헤미아인들에게 씌워진 이단 혐의보다도 더 시그리드의 마녀 혐의는 무고에 가깝다고 어느새 여기게 된 후스였다.

“백신이 아니에요. 다른 이름으로 불렀으면 해요.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시그리드는 다른 쪽에 마음을 쏟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무어라 불러야 하겠는가?”

“이 기적을 위해 일곱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니 아무런 의미 없는 이름 대신, 그들을 기리는 이름을 지어야 해요.”

이미 지난날 역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며, 이번에야말로 역병에게 복수하겠다며 나섰던 미할.

시그리드를 위해 방역용 가죽옷을 만들어주면서, 한쪽에 실로 ‘시그리드’ 이름을 수놓아준 침모 안나.

다리가 불편한 만큼 손재주는 좋다고 항상 자랑하던, 그리고 번번이 저의 자랑만큼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곤 하던 절름발이 렌카.

항상 남들보다 먼저 고되고 역한 일을 도맡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상냥한 바츨라프.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둔하지만, 쥐덫 다루는 데는 당해낼 사람이 없던 야네크.

보헤미아 잡것들이 모든 영광을 독점하게 할 수 없어서 나섰다던, 전직 하숙집 주인 오토.

일을 할 때면 콧노래든 휘파람이든 흥얼거리고, 툭하면 노래까지 부르던 자칭 음유시인 미쿨라스.

“말비욤MALVJOM이라고 불러주세요.”

인체실험에 자원해서 나섰다가, 다른 모두를 위해 죽어간 일곱 사람의 이름을 순서대로 떠올리며 시그리드가 말했다.

일곱 사람의 이름 첫 글자로 이루어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낱말에는, 이제 새로운 의미가 깃들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 또한, 이 낱말이 쓰이기를 멈추는 날까지 기억되리라.

그 사연을 들은 후스도, 이야기를 마친 시그리드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봄날의 햇볕 비추는 들판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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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에도 종종 페스트는 발병하곤 하지만, 수도와 위생이라는 훨씬 좋은 예방책과 항생제라는 치료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백신까지 접종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조건이 미비한 상황, 예컨대 2차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투입된 미군의 경우에는 대부분 백신 접종을 받곤 했지요.

작중 언급되는 흑사병 백신 관련 내용은, 베트남 전쟁 당시 보고된 페스트 백신 접종 효과에 관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Meyer (1970), “Effectiveness of Live or Killed Plague Vaccines in Man,” Bulletin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42(5)). 당시 미 육군은 USP 사에서 개발한 사백신을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 대상으로 접종하고 있었는데, 위 논문에서는 이 백신이 당시 남베트남 일부에서 접종되던 생백신보다 더 예방효과가 뛰어났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 실제로 백신의 어원은 우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백신을 어원 그대로 풀이하면 ‘암소에게서 나온 것’이 되지요.

백신으로 페스트 유행을 막아보려는 시도는 원 역사에서도 19세기 말 우크라이나계 프랑스 의사 발데마르 하프킨Waldemar M. Haffkine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그는 콜레라나 페스트처럼, 당시 이미 인도 등 후진국에서만 유행하게 되었던 질병을 백신으로 막아내려 시도했습니다. 1896년 겨울 봄베이(뭄바이)에 선페스트 유행이 들이닥치자, 그는 열악한 시설에서 임시로 세운 연구소에서, 과로에 시달리고 자기 자신에게까지 인체실험을 한 끝에 3개월만에 백신을 개발해냈지요. 자료의 미비로 인해 그 효과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효능은 보인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물론 현대적 기준으로는 예방효과와 부작용 양측에서 모두 기준 미달이겠지만요.

3. 작중 시점의 프라하 대학교는 『해리 포터』에 비유하면 호그와트의 네 기숙사 중 그리핀도르 하나만 남아 있고 교수 8할은 사표를 낸 상황입니다. 13세기 후반을 거치며 점차 보헤미아인들과 독일인들은 학생과 교수를 막론하고 대립하기 시작했고, 후스를 중심으로 한 위클리프주의 연구 모임은 이런 갈등을 폭발시켰지요. 국왕 벤첼 4세가 1409년 초의 쿠트나 호라Kutna Hora 칙령으로 대학 내 보헤미아인들에게 특권을 허락하자, 약 2만에 달하는 독일계 교수와 학생들은 프라하 대학을 떠나 독일의 다른 대학들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한때 룩셈부르크 가문의 후원으로 빠르게 유럽 유수의 대학 중 하나로 부상했던 프라하 대학은 한동안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4. 벼룩에 의해 전염되는 선線페스트는 그 이름 그대로 림프선이 부어오르는 증상을 보입니다. 이 부어오른 형상을 ‘bubo’라 칭한 것이 선페스트의 영문명 bubonic plague의 기원이지요.

5. 중세 감옥에 중범죄자가 갇히는 일이 드물었던 까닭은 별것 없습니다. 그런 중범죄자는 감옥에 수감되거나 노역형에 처해지는 대신 곧장 처형당했기 때문이지요. 경범죄자들 위주로 채워졌던 중세 후기의 감옥의 수감 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인도적이었고, 많은 죄수들은 자유롭게 면회나 외출 등 권리를 누리곤 했습니다.

6. 페스트균은 중간숙주인 벼룩의 체내에서 대량으로 증식하면서 박막(바이오필름)을 형성해 벼룩의 소화기관을 틀어막습니다. 이로 인해 벼룩은 제대로 피를 빨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더욱 공격적으로 다른 숙주 – 쥐부터 인간까지 – 를 찾아 흡혈을 시도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벼룩이 흡혈을 시도할 때마다, 페스트균은 다른 숙주로 옮겨가게 됩니다. 즉 벼룩 역시 흑사병의 피해자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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