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27화 (27/116)

보헤미아 광시곡 (4)

6. 보헤미아 광시곡 (4)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피사에는 실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모였고, 또 날마다 더 모이고 있었다.

위로는 새로이 선출된 교황과 ‘자진 사임’하여 추기경이 된 전직 교황들. 아래로는 온갖 귀빈들을 위해 이런저런 재화와 용역을 제공코자 모여든 상인들까지. 피사 토박이들은 작년부터 도시의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비뇽과 로마 교황 양측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던 나라들은, 모두 어떻게든 결정 과정에 끼어들어 한몫씩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튜튼 기사단국의 전쟁이라는 또 다른 안건에 있어서도, 칼마르 동맹부터 헝가리, 한자 동맹 등등 온갖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했다.

공의회주의자와 유명론자nominalist들의 총아 장 제르송Jean Gerson 박사는 스승이자 벗인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 대주교와 더불어 교회가 다시 분열되는 것을 막아낼 방안을 밤새 논의했다.

로마인들의 황제 마누일 2세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학자 겸 외교관 마누일 흐리솔로라스는, 어떻게 하면 저들의 미약한 주권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도 서방교회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심하며 이런저런 사교모임을 누비고 다녔다.

튜튼 기사단이 독일 본토와의 연줄로 끌어모은 신성로마제국 최고의 신학자들은, 폴란드 왕 요가일라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의 이단, 배교 및 여타 범죄 혐의에 대해 언성을 높였고, 그들 곁에서 기사단 사람들이 찬동할 때면 폴란드 사람들은 슬그머니 다가가, ‘그래서 지금 마리엔부르크에는 누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소이까?’ 넌지시 묻곤 했다.

한편, 남의 도움을 바라기보다는 남의 청원을 듣는 쪽에 가까웠던 권력자 몇몇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잘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던 것이다.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추기경과 대주교들 – 그러니까, ‘충분히 귀가 트인’ 이들만 – 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세속의 이익과 천상의 올바름이 이처럼 합일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상서로운 조짐이 아닐까, 본인은 감히 이렇게 말하겠소.”

“어찌 그 말씀이 그릇되었다 하겠습니까.”

성직자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폴란드는 기사단국과 자국의 갈등이 화해의 형식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즉 기사단 쪽에서 자신들이 조금이나마 과오를 저질렀음을 먼저 인정하고, 폴란드는 그에 응해 처음 제시한 터무니없는 항복 조건 일부를 자발적으로 철회하는 것이었다.

반면 기사단국은 교회와 황제가 법적으로 개입해 이 갈등을 끝내기를 바랐다. 그룬발트에서 전력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최소한 한 세대 동안은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상대할 수 없게 된 지금, 교회와 황제가 기사단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형태를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등장으로 유럽 동쪽의 세력균형이 깨지길 원치 않았던 지기스문트에게도 기사단을 통해 요가일라와 그 후계자들을 견제한다는 발상은 꽤 매력적이었다.

지기스문트는 나날이 실추되어가던 교회의 권위를 되살릴 방안을 찾던 추기경들을 설득해, 이 발상에 그들을 끌어들였다.

“기사단이 바라는 형태를 갖추어주되, 요가일라에게는 실익을 약속하고, 어느 한쪽도 지나치게 몰아세우지 않으며 중용과 균형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이 사람이 생각하는 올바른 방도요.”

“다만 이단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미 이단자 위클리프와 그 추종자들을 정죄할 것을 교황 성화와 우리 공의회의 이름으로 전 유럽에 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장 유감스럽게도 폐하의 형제분께서 다스리시는 보헤미아만 하더라도...”

“이 사람이 앞서 이익과 정의의 합일을 거론하지 않았더이까? 그에 대해서도 해결할 방편이 있으니, 귀를 기울여주기 바라오.”

지기스문트는 재능보다 야심이 더 큰 군주였으나, 그것은 오직 야심이 너무나 거창한 탓일 뿐,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종종 그 차이를 잘못 이해한 이들이 지기스문트를 업신여겼다가 낭패를 보곤 했음을, 대개는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인 추기경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대가 말하려던 것처럼, 보헤미아는 안타깝게도 이단의 소굴이 되고야 말았소. 그렇지만 때로는 그런 방식으로도 섭리가 작동하는 것 아니겠소이까?”

마녀로 지목된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보헤미아로 향해, 그 땅의 이단 수괴 얀 후스와 힘을 합쳐 뭔가 기묘한 짓을 하였다는 보고를 막 받아본 지기스문트였다. 흑사병을 기이한 주술로써 막아내려 했다나 뭐라나.

그러나 그런 주술 혹은 이교도 의술이 행해졌던 말던 그리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느냐였다.

이미 요가일라가 보낸 대표단은, 당당하게 그룬발트에서 벌어졌던 일에서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증서를 내보였다. 만약 그 전투에서 사술邪術이 쓰였다면, 이는 오로지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범한 잘못이었다.

불똥이 튀기 전, 덴마크의 에릭이 보낸 사절단은 그린란드의 가르다르 주교좌가 거의 30년간 공석이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러므로 기사단 편을 들어, 법적으로 발트해 동안의 상황을 중재하되, 요가일라가 지나치게 두려워거나 원한을 품지 않도록 마녀와 결탁한 혐의에서는 풀어준다. 그 마녀 역시 어지간하면 그 무지를 근거로 삼아 가벼운 처벌만을 가하고, 나머지 잘못은 보헤미아 이단들에게 씌운다.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로 알려진 ‘하얀 마녀’ 곁에 보헤미아 용병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보헤미아 왕 벤첼의 명으로 사면을 받은 얀 지슈카라는 사내도 있었다고 했다.

이 꼬투리를 잡아, 지기스문트는 어리석은 벤첼을 압박해 다음 독일왕 선거에서 자신을 뽑도록 만든다². 그리고 끈 떨어진 보헤미아 이단들은 새로이 통합된 교회가 그 권위를 드러내는 좋은 상대가 되어준다.

지기스문트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한 계산이 딱딱 짜 맞추어지고 있었다.

“실로 현명하십니다.”

“폐하의 말씀이 과연 틀리지 않았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이 해결책 속의 지혜를 꿰뚫어보시게 되면 크게 기뻐하시며 따르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이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를 되돌려놓는 일. 그들의 대의가 이러하였으므로, 누구 하나 찬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그것이 내가 이곳 프라하에 오게 된 까닭이란다.”

장 제르송이 말을 마치곤 저의 곁에 있는 통역에게 손짓을 했다. 독일어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제르송은, 자신이 했던 논리정연한 말이 저 거칠고 투박한 언어로 바뀌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허나 어찌하리오. 가장 거룩한 성좌로부터 받은 임무가 임무인즉, 감수해야 할 불편이리라.

“그린란드의 시그리드, 내 말을 들어라. 네게는 아주 큰 혐의가 씌워졌지만, 그 혐의 대부분은 네 마음가짐에 따라 벗을 수 있는 것이란다.”

한 달 전, 그는 프라하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곳의 대주교가 소임을 다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 애초에 성직매매로 아무런 자격 없는 자가 대주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불편한 사실은 피차 거론치 않았다 - 성좌와 공의회를 대신하여 그곳에서 이단을 정죄하는 일을 맡으라는 특명이었다.

이단 정죄라는 것도 사실 그렇게까지 가혹하거나 단호한 것은 아니었다. 후스에게 자신의 이단적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는 강론이나 저작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는 것. 그리고 그린란드의 시그리드로부터 그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서약서를 받아내는 것. 이 두 가지만이 목표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두 사람뿐 아니라 그 추종자들까지 붙잡아 뒷말이 생길 여지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런 추종자들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일깨우고, 그들이 추종하던 이단자들이 죄를 뉘우쳤음을, 혹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고 더 큰 악으로 빠져드는 길을 택했음을 단단히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르송은 지기스문트의 군사들과 함께 흑사병이 할퀴고 지나갔다기에는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프라하로 달려왔다.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의 친서를 비셰흐라트의 벤첼 왕에게 전달하자, 그는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마지못해 저의 군사를 내어주었다.

그들과 함께 프라하 안으로 들어온 제르송은 아직 프라하 대학 안에 머물던 이단 혐의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이곳 성 비투스 대성당으로 끌고 왔다.

“애초에 저는 결백한데, 무슨 혐의가 있겠어요?”

제르송은 하얀 마녀의 정체가 백발 소녀라는 이야기를 피사에 머물던 튜튼 기사단원에게 들은 바 있었다. 허나 눈앞의 사람은 소녀라기보다는 여인에 가까워 보였다. 생김새는 앳되었지만, 그 눈빛과 표정에 서린 결의는 여인은 물론이요 어지간한 사내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바로 그 태도가 문제란다.

들어보거라. 사람들은 네가 그 어떤 수도원이나 교회, 대학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술법으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이적을 일으켰다고 하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네가 악마와 계약하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식을 손에 넣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진지한 믿음과 학식을 겸비한 이라면, 그것은 악마가 세상을 죄악으로 몰아넣는 방식이 아님을 알기 마련이다. 악마라는 것은 촌부들의 헛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정령 따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곁에서 죄악을 부추기는 그림자니까.”

이 세상에 예비된 종말이 닥쳐오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는 많은 식자들과 성직자들이 동의하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말일末日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하수인, 거짓 예언자로서 삿된 이적을 드러내 보일 것이요, 그리 될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진리와 믿음에서 멀어져 어리석음과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 마녀 소동이 오로지 시그리드 한 사람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합리적인 신앙의 사람이라 자부하는 제르송 또한 공의회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그리드야, 공의회를 위해 모인 훌륭한 사람들은 너에 대한 고발을 종합적으로 검토했고, 네가 어떤 악의를 품고서 우상숭배나 미신을 부추기지 않았음을 꿰뚫어 보았다.

네가 행한 바는 기실 무지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너로 인해 일어난 소위 이적이란 속임수와 거짓을 퍼뜨리고자 하는 이들의 간사한 마음을 거치며 부풀려진 데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지 않아요. 당장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나, 이곳 프라하에서 백신, 아니, 말비욤을 만들어냈던 교수님들의 증언을 들어보시면...”

통역이 말을 옮기기도 전, 제르송은 손을 들어 시그리드의 말을 끊었다.

“그린란드라는 벽지에서 온 네가, 정녕 이 땅의 가장 훌륭한 교수와 박사조차 알지 못하는 지식을 지니고 있을 리 없지 않으냐?

백 번 양보하여 그 땅에 진실로 고대의 지식이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 지식을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참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대학과 교회 측에 넘기는 것뿐일 테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적을 남겼거나, 아니면 지닌바 지식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보낸 공의회에서는 네가 그 이상의 허물을 짓지 않았다고 본다. 나머지 모든 것은 이 도시 프라하에 팽배한 이단으로 인한 것이니 이방인인 너의 잘못이 아니다.”

제르송은 창밖의 햇빛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파리 대학 시절 그와 원한이 있었던 프라하의 예로님을 상대하는 것부터, 보헤미아 이단의 진정한 수괴 얀 후스를 대면하는 것까지.

그러므로 제르송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려무나. 이러한 기회는 한 번 걷어차면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테니. 너의 혐의를 인정한다면, 너와 너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사히 프라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웅장한 성 비투스 대성당의 위층에 위치한 이 좁은 방이 본디 심문이나 감금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넓은 유리창을 통해 봄날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따사한 햇빛을 두 손의 살갗으로 느끼면서 시그리드는 생각에 잠겼다.

시그리드는 제르송의 말을 믿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할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프라하 사람들이 보고 듣는 앞에서 자신을 데리고 이곳 대성당으로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정말 진심으로 자신의 ‘자백’과 ‘참회’를 받아낼 심산이었을 것이었다.

당장 제르송이 다른 이들을 심문하러 간 지금도, 벽 너머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것만 들려올 뿐이었다. 언뜻 들어도 썩 호의적인 대화는 아닌 듯했음에도, 비명이나 고성은 전해지지 않았다. 제르송은 정말로 이곳에서 아무런 피를 흘리지 않고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듯했다.

“제가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자면... 제르송 박사님은 정말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도, 제안도 모두 진실된 것이니, 부디 한 순간의 의심으로 큰 실수를 범하지는 마시지요.”

시그리드가 심경의 변화를 맞이할 때에 대비해 방에 남아 있던 독일어 통역관이 물 한 잔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

“그, 처음에 길게 설명하셨던 피사 공의회 얘기 있잖아요... 그것도 모두 참일까요?”

“어찌 제가 함부로 그런 엄청난 이야기의 진위를 논하겠냐만, 저같이 변변찮은 사람의 귀에도 그런 비슷한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제르송 박사님께서는 그런 부분에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시기도 하고요.”

아마 허투루 그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 유럽의 질서와 평화가 이 이단 혐의 자백에 달려 있다는 압박. 그리고 제르송 딴에는 온건하다 여겼을 이 제안을 거부했을 경우 들이닥칠 후폭풍에 대한 암시. 그것을 위해 초장부터 피사 공의회에서 오가고 있는 제왕과 추기경들의 회담을 언급한 것일 테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이 시대 기준으로는 사소한 형벌이 따를 것이다. 화형을 면한 게 어디냐면서, 보헤미아나 신성로마제국 전체에서 추방하는 정도로 그칠 테다. 시그리드에게 몰수할 영지나 재산이 따로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면 이곳 보헤미아로 온 목적 중 하나도 달성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공의회까지 나서서 저의 마녀 혐의를 해소해주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목적, 이단이든 무엇이든 여러 이유로 유럽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이들을 규합해 신대륙으로 나아갈 세력을 만들어낸다는 그 목적을 생각하면, 보헤미아를 벗어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암만 세력을 만든다 한들, 다른 유럽 군주들의 철퇴에 무너져내릴 세력이라면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욘이 종종 말하던 것처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시그리드는 자신이 그토록 가볍게 자백 한 줄로 마녀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얀 후스가 이단의 우두머리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말비욤을 위해 죽은 사람들도.’

자신의 헛소리로 말미암아 온 프라하가 흑사병 앞에서 우행愚行을 범한 것이 된다면, 말비욤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일곱 사람들 역시 헛되이 삶을 저버린 게 되는 셈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한 번 미치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결정했습니다. 제르송 박사님을 불러주시겠어요?”

“예,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면담이 끝나는 즉시 이곳으로 찾아오실 겁니다.”

그리고 정말 통역관의 뜻대로 제르송은 금방 나타났다. 시그리드는 문득,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긴 한 모양이라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 마음을 정했느냐?”

“네, 박사님.”

“자백을 할 준비가 되었다니 다행이로구나.”

“아니요. 저는 제 혐의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제 말에 따라, 그리고 저와 함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프라하 사람들은 다 함께 죽음을 무릅썼어요. 흑사병을 무찌를 길을 찾기 위해 일곱 명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내던졌고요.

제가 만약 무지와 오해로 인해 마녀 행각을 저질렀다고 자백하게 되면, 그들의 죽음도 무의미한 게 되겠지요. 그들 곁에서 함께 죽음에 맞선 모두의 공로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시그리드야. 네 다음 말을 잘 생각해서 꺼내거라.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너로 인해 온 세상이 뒤틀린다면,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한 그런 혼란이 닥친다면 너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너무나 단호한, 번역조차 필요치 않은 대답.

“네.”

일곱 명의 사람들. 그들의 슬픈 미소를 떠올리며 시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제르송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을 뿐.

“휴. 조금 쉽게 갈 수 있을까 했더니만, 안 될 모양이로구나.

그린란드의 시그리드, 잘 들어라. 지금 이곳 대성당에는 비단 너 한 사람뿐 아니라 다른 이단 혐의자들도 모두 붙잡혀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너의 마녀 혐의가 참이라고 증언할 수도 있어.

너를 죽일 이유가 없기에, 나는 너를 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너를 굳이 살려야만 할 이유도 없단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정녕 네 혐의를 부인하려 하느냐?”

“예. 변함 없습니다.”

그리고 한 발 늦게, 방금 전 제르송이 말한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만요. 다 잡아들이셨다고요?”

“그래. 원래 조사라는 건 그렇게 하는 법이니까.”

혹시나 변심했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던 제르송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시그리드는 그것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흑사병을 몰아냈을 때, 보헤미아인과 독일인, 후스에게 찬동하는 이들과 돌 던지는 이들의 구분 없이 다 함께 기뻐했던 프라하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비단 후스뿐 아니라, 그때 방역을 주도했던 모든 이들을 다 체포해서 이곳 대성당으로 데려왔다면? 그것도 대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들은 이단 혐의를 받은 자들이라 외쳐대면서?

제르송도, 그 아랫사람들도 딱히 엄청난 주의와 세심함을 기울여서 체포를 진행할 만큼 이곳 프라하 사정에 밝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설령 국왕 벤첼이나 자이츠 대주교라 할지라도 잘은 알지 못했을 테다. 흑사병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그들은 부리나케 프라하에서 도망쳤으니까.

아니, 애시당초 그 어떤 권력자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을까? 머나먼 피사에서 그들이 아는 온 세상의 일을 재단하면서, 그저 그들의 뜻에 따라 질서가 세워지고 모두가 순응할 것이라 예상했을 테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래왔고, 설령 벗어나려는 자가 있다 한들 제풀에 쓰러지곤 했으니까.

“박사님, 당장 사람들을 석방하셔야 해요.”

“누구를 말이냐?”

“저나 후스 교수님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이라도 당장 풀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왜 내가 그들을...”

그때, 창문이 깨졌다.

“시그리드를 풀어줘라! 이놈들! 흑사병 닥칠 때는 어딨다가 이제 와서 엉뚱한 사람을 괴롭히느냐!”

날아든 돌이 낸 구멍을 타고 우렁차게 들려오는 외침은, 스베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비슷하게 돌덩이 날아오는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후스 선생님을 풀어줘라!”

“네놈들이 우리에게 무얼 해주었다고, 우리가 한 일을 재단하느냐?”

그러나 제르송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벌떡 일어나 깨진 창문 바깥을 노려보았다.

“이런 고약한 이단들 같으니! 추종자들이 저리 날뛸 때까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마치 후스의 추종자들이 이 폭동의 원인인 양 노기를 표하는 제르송에게, 시그리드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뭘 하고 있었기는요. 말릴 만한 사람들은 죄다 여기 잡아들이셨잖아요.”

파리 대학의 저명한 학자이자 뛰어난 논변가인 장 제르송은 그 답변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곧 아래층에서 뭔가 묵직한 것이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욕지거리 내뱉으며 끙끙대는 사내들 소리와 함께.

이미 대성당의 육중한 문에서는, 어떻게든 뚫으려는 힘과 막아내려는 힘이 경합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각하! 큰일입니다!”

한 발 늦게, 제르송과 함께 프라하로 온 군사들을 이끌던 지휘관이 뛰쳐 올라왔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진땀과 황망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 참 놀라운 소식이로군그래! 여기서도 훤히 잘 보이네! 대체 자네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저희로서도 막아보려 애썼습니다만, 워낙 많은 수가 한 번에 예고 없이 우르르 몰려들다 보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저 아래를 보게! 이미 대성당의 문 주변은 모두 폭도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그들 발 아래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와 사람 여럿 쓰러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분노 어린 환호성이 한꺼번에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멈춰라! 너희 이단의 무리... 꾸엑!”

“이단? 그래, 너 말 잘했다. 아예 이교도 노릇도 해주마!”

살벌한 북방 말로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대성당 곳곳에 울려퍼졌다.

“시그리드! 거기 위에 있느냐? 내 오딘께 맹세코, 그놈들이 네게 손 하나라도 대었다면 피의 독수리blood eagle³ 여럿을 만들고야 말 테다!”

피의 독수리에 대해서는 시그리드도 종종 들어는 보았다. 무슨 형벌의 일종이라고 했는데, 스베인이나 콜그림에게 물으면 ‘아직은 몰라도 된다’라며 화제를 급히 돌리곤 했다. 분명 사람을 곱게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짓일 테다.

그리고 스베인쯤 되는 이가 그런 얘기를 공공연하게 꺼낼 정도라면, 아래층을 휩쓸고 있는 분노한 군중은 고작 말 한두 마디로 말릴 수 있는 정도가 아닐 터였다.

“이를 어쩐다... 박사님, 혹시 지금이라도 제게 하신 말씀이랑 다른 분들께 씌운 혐의에 대해서 입장을 철회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 정도쯤은 되어야 저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법한데요.”

‘무릎 꿇고 살려만 달라 싹싹 빌어라’ 하는 말을 어떻게 하면 완곡하게 돌려 말할까 고민하며 시그리드가 물었다.

허나 제르송은 자신의 신념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완전히 안 된 것인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양심에 맹세코 그것은 불가한 일이야!”

분노한 발소리는 벌써 계단통까지 울려왔다.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이들의 애원에 가까운 소리는 그 사이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면 탈출시켜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탈출이라고? 어디로...”

그제야 제르송은 눈앞의 소녀가, 아니, 여인이 자신과 창문, 그리고 그 바깥을 번갈아 살피고 있음을 깨달았다.

깨진 쪽에서 맞은편 창가 너머, 그러니까 광장 쪽에서 꺾여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 한쪽에 오물을 수거하는 수레가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대성당까지 오는 길을 막고 있던 듯한 병사들이, 나 살려라 하고 골목 곳곳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마구 달려가다가 수레와 부딪히는 바람에, 수레를 덮고 있던 천이 들리며 그 안에 (다행히도) 꽉 차 있는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만, 저쪽 수레로 떨어지도록 노력해 보시겠어요?”

제르송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뭐? 무슨 수레?”

“주변에 박사님이 데리고 온 병사들도 있으니까, 그들과 함께라면 프라하를 벗어나실 수 있으실 거에요.”

딱 그때, 마침내 분기탱천한 군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보아도 시그리드 혼자 설득해선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듯한 기세.

“저놈을 죽여라! 저놈이야말로 악마다!”

맨 앞의 노기등등한 스베인과, 그와 마찬가지로 눈이 뒤집힌 사람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조금이라도 군중으로부터 멀어지려 뒷걸음질 치다가 뒷골목 쪽 창문을 등지게 된 제르송 사이를 재빨리 살핀 시그리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박사님,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제르송의 몸을 들이받았다.

“엇, 어어? 아아아악!”

유리창이 깨지고, 호리호리한 제르송의 몸은 그대로 창틀 너머로 사라졌다. 비명소리가 멀어지고 대략 2초 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부드러운 것에 닿는, 어째 악취가 느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바로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Defenestration of Prague⁴의 전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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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제르송은 원 역사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도 활약한 저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모순 속에서 나타난 위클리프주의 같은 도전적 사상에 맞서, 새로운 논리로써 기존 질서를 옹호하면서 온건한 방식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공의회주의자로서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가 이전의 피사 공의회와 다르게 확실한 성과를 내게끔 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 원 역사에서 1410년 봄 독일왕 루프레히트가 병사하면서 열린 선제후 회의에서 보헤미아 국왕 벤첼은 사촌동생이자 후계자인 지기스문트 대신 사촌형인 모라비아 변경백 욥스트를 지지합니다. 그 결과 4:3으로 지기스문트 대신 욥스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지요. 그러나 고작 3개월만에 욥스트는 급사하는데, 정황상 지기스문트가 그를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상의 황제 자리인 독일왕 왕위에 오른 지기스문트는,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1433년 로마에서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3. ‘피의 독수리’란 여기 쓰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한, 인간 신체를 창의적으로 변형시키는 무시무시한 혹형입니다. 과연 그런 처형법이 실제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적어도 그런 처형 방법에 대한 구전 전통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4. 프라하는 예로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창문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창문 바깥으로 떨어지다defenestration’라는 단어 자체가 프라하에서 종종 발생하던 창문 투척 사건을 서술하면서 생겨날 정도였지요. 가장 잘 알려진 것은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린 1618년의 제2차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이지만, 1419년의 제1차 창문투척 사건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이단으로 화형당한 이래 점차 후스파 탄압이 거세지자, 후스파 사제 얀 젤립스키가 이끄는 분노한 군중은 시청 앞으로 나아가 체포된 후스파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한 군중은 그대로 시청 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시장을 포함한 7명의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 죽여버립니다. (반면 제2차 창문투척 사건 때 던져진 세 사람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고, 그중 하나는 훗날 ‘높은데서떨어짐Hohenfall 남작’으로 서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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