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엔 드러눕자 (1)
8. 오늘 밤엔 드러눕자 Get Down Tonight (1) – KC & 선샤인 밴드 (1975)
다사다난했던 1410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늦가을은 조금씩 겨울로 접어들고, 엊그제는 첫눈이 내렸다.
프라하의 노인들은 이렇게 일찍 첫눈이 내리는 건 몇십 년만이라며, 그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를 두고 입방아를 찧었다.
그 첫눈을 뚫고 멀리서 찾아온 객이 있었으니, 바로 언짢은 심정을 감추는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덴마크 기사 옌스였다.
하기야, 불과 2년 전에 코펜하겐의 뒷골목에서 계집이 무슨 용병단장이냐며 깔보았던 옌스로서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럽 정세에 불어닥치는 폭풍을 몰고 다니게 된 시그리드를 대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테다.
허나 옌스에게도 눈은 있었다. 그의 국왕 에릭이 시그리드라는 여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런 눈길로 바라보는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해 에릭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아는 옌스로서는, 어쩌면 다음 왕비가 될지도 모르는 이를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린란드의 파울 주교가 여사님께 전해달라 부탁한 서한입니다. 이 서한을 곧장 이곳 프라하까지 전달케 하신 에릭 폐하의 호의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그리드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옌스가 시그리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러 온 스베인이 먼저 반색했다.
“오, 파울 그 양반이 그린란드에서 편지를 보냈다고?”
“네, 읽어드릴까요?”
“거 좋은 생각이다. 어이, 콜그림! 군나르! 가르다르에서 편지가 왔단다! 와서 같이 듣자꾸나!”
옌스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지만, 스베인은 –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시그리드도 –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읽을게요. ‘시그리드 보아라...’”
그리고 편지는 서두부터 낭보로 시작하고 있었다.
“‘지난 6월, 쾨커리츠의 디폴트와 기푸즈코아의 미콜라스, 칼라알릿 사람 이갈리코 등이 이끄는 탐험대가 붉은머리 에이릭의 아들딸들이 닿았던 그 빈란드 땅에 닿았다.’”
“이야! 해냈구나!”
빈란드 이야기가 나오자 그린란드 사람들 모두가 환호했다.
“하하! 우리 파울 샌님, 일처리 솜씨가 제법인데!”
“잠깐, 더 있어요.”
그린란드 회사 소속 노블 함 ‘아마추’가 발견한 작은 만에는, 어느새 조그만 전초기지가 세워졌다. 겨울이 되어 항로가 막히기 전에 서둘러 사람을 더 보냈고, 전초기지에서는 시험 삼아 벌목한 목재를 동녘정착지로 보냈다.
그린란드 회사 내부 방침으로, 신대륙의 모든 지명은 사람이나 어떤 지방의 이름 대신, 어느 나라 말로든 번역할 수 있는 일반적인 낱말로만 짓기로 했다. 벌써부터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바스크, 덴마크, 잉글랜드, 독일, 칼라알릿 등 온갖 사람들이 섞인 회사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전초기지에는, ‘좋은 희망Good Hope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북방어 고다르보나로 말하든, 저지독일어 구테회펜으로 부르든, 라틴어 보나스페이아로 쓰든 그 뜻은 똑같았다.
이듬해 여름에 더 남쪽으로 탐사를 떠날 때 이곳은 훌륭한 거점이 될 것이었으며, 만약 주변에 더 좋은 곳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신대륙 남쪽과 그린란드 사이를 잇는 중계 기지로서 개척자들을 받기 시작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 개척자들이 제때 대양을 넘어오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겠지만, 단치히로 몰려드는 기사단국 출신 이민자들은 적어도 ‘좋은 희망’ 같은 전초기지 몇 곳을 더 세우기에는 충분한 정도라고 하였다.
“‘추신: 그 리프트라사라는 별명은 참 잘 지은 것 같구나. 콜그림에게 그 내력에 대해 입단속 잘 하라고만 전해다오.’
그렇다고 하네요.”
“피, 내가 뭘 입단속을 할 게 있다고.”
콜그림이 투덜대자, 스베인이 가볍게 – 스베인 자신 기준으로 - 그 뒤통수를 탁 쳤다.
“이놈아, 네놈 엊그제도 민병대 신병들한테 뭔 발할라 타령을 하지 않았었냐. 그거 수습하려고 시그리드가 딴 얘기 꺼낸 것 기억 안 나냐?”
이단까지야 그렇다 쳐도, 진또배기 이교도까지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보헤미아 사람들이었다.
시그리드는 콜그림이 꺼낸 신화 이야기가 그냥 북쪽 지방에 전해지는 케케묵은 옛이야기일 뿐이라고 둘러대고는, 주의를 돌리기 위해 욘이 긴 겨울밤에 종종 해주었던 다른 이야기를 한참 풀어내어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하여간 풀어져가지고.”
“죄송합니다요.”
(다행히, 애써 안 듣는 척하고 있는 옌스는 발할라가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 교리도 잘 모르는, 뼛속까지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파울의 편지를 조심스레 접는 시그리드 무르팍에, 그 서한 뒤에 따라붙은 작은 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 작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밀랍 인장으로 봉인된 봉투였다.
“이건 뭔가요? 파울 주교님 인장은 아닌 것 같은데.”
“에릭 폐하께서 보내시는 밀서입니다. 이 자리에서 읽으시고 제 눈앞에서 불살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변도 좀 물려주시고요.”
스베인이 눈치껏 주변의 그린란드 사내들을 데리고 나갔다.
봉인을 뜯자, 고급 양피지에 적힌 간략한 문장 여러 줄이 드러났다.
‘네가 프라하에서 펴낸 그 유용한 책자는 가르다르 주교에게도 전달해 주었다. 기껏 서쪽의 거대한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정착민들이 돌림병으로 몰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그 외에도 너희 회사의 노력이 모두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드러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다.’
얼핏 읽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행간까지 읽고 나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프라하에서 흑사병을 막아낸 소식을 듣고 눈이 벌게졌을 파리나 볼로냐, 옥스퍼드의 교수들이라면 모를까, 보통 그런 일에 일국의 군주가 이토록 빠르게 관심을 표할 일은 없었으니까.
‘내 짐작하기로, 너는 전쟁보다는 한 편의 거대한 희곡을 연출하려 하는 듯하더구나. 행운을 빈다. 나는 가장 열렬한 관중으로서 침묵을 지키며 관람하겠다. 관객석에 조용히 앉아, 이번에는 어떤 신이 기계에서 내려와Deus ex machina² 모습을 드러낼지 기대하면서.’
에릭은 마리엔부르크에서 헤어질 때 주고받았던 약조 아닌 약조, 둘 사이의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은 상생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칼마르 동맹은 그린란드 회사를 계속 물밑에서 지원하면서, 회사가 시그리드가 일으키는 파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돕는다. 시그리드는 저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계속 미래 지식을 쓸 수밖에 없고, 에릭은 그것이 나오는 족족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 형국이 마음에 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에 만족해야 할 터였다.
‘이 밀서를 보낼 옌스에게, 프라하로 향하는 길에 십자군의 동정을 살피도록 지시해두었다. 네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라 명해두었으니,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물어보도록 해라.’
그것으로 밀서는 끝이었다.
에릭이 쓴 글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옌스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이미 십자군이 소집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독일과 헝가리의 국왕 지기스문트가 직접 이끄는 군세에 앞서, 먼저 영예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선발대를 꾸리고 있지요. 그리고 이곳 보헤미아 안에서도 모두가 이 이단, 아니,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이단에 반대하는 보헤미아 귀족들도 개인적으로 기사들을 거느리고 그 선발대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미 지기스문트 폐하도 병력 수백을 보태면서 그들 모두를 이끌 지휘관까지 선임하였다더군요.
늦어도 열흘 안으로 이곳 프라하 근처에 닿을 것입니다.”
이미 그런 선발대가 소집되고 있다는 소식은 시그리드와 프라하 사람들도 들은 바 있었고, 그에 맞추어 준비하면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열흘이라는 구체적인 기한은 금시초문이었지만.
“그리고 그들끼리 쉬쉬하며 주고받는,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는 소문이 있더군요.”
“제가 비트코프 언덕에서 일백 명 농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말인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정말 그 소문이 참이란 말입니까?”
그런 무모한 도발을 정말로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옌스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대뜸 묻고야 말았다.
“네, 사실 약간의 과장이 섞여있긴 한데요, 일백 명 전부가 농노 출신은 아니고 몰락한 하급귀족이나 도시에서 품팔이하던 사람들도 꽤 섞여 있답니다.”
“선발대라고 하지만, 그 수효가 적어도 삼사천은 될 것입니다. 그 종자들과 용병들까지 합한다면 더 많을 테고요. 그들을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일백 명으로 막는다는 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블타바 강을 가운데에 끼고 세워진 프라하 시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먼저 강을 끼고 있는 프라하 주변의 다른 언덕들을 점령해야 했다. 비트코프 언덕은 비셰흐라트 성과 더불어, 프라하를 동쪽에서 에워싸기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거점이었다.
그런 거점을 고작 일백 명으로 지키고 있겠노라며 도발했으니, 영예에 눈이 멀어 달려온 선발대들이 이를 가만 내버려둘 리 없었다.
“막을 수 있고, 또 막아야만 한답니다.”
이 전쟁이 온 보헤미아를 파멸로 몰아넣지 않고, 에릭이 말한 것처럼 한 편의 희곡처럼 끝나기 위해서는, 유혈이 무대 너머까지 적시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양측 모두 가능한 한 적은 피해만 입으면서, 지기스문트는 최대한 큰 망신을 당하게끔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여기까지 먼길 와주신 것도 고맙고요.”
시그리드의 부드러운 말이 사실상의 축객령임을 옌스는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걱정한다 한들 딱히 바뀔 것도 없고, 돌이켜보면 굳이 자신이 걱정할 일도 아니었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돌아갈 채비를 할 뿐.
지기스문트의 측근인 드래곤 기사단 단원 피포 스파노는, 프라하를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한 번 그 도시로 향하게 되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지난번에는 피사에서 곧장 프라하로 왔지만 이번에는 작센 방면에서 동남쪽 길을 타고, 기사와 보병 등을 합쳐 총 7천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프라하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는 길이 유쾌하였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보헤미아와 작센 사이 국경을 지날 때부터, 계속 찜찜한 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제길... 차라리 지난번에 그 마녀의 목을 조르든지 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하면서도, 스파노는 내심 자신이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그런 짓은 못 했을 것임을 자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마녀’가 자신이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의 가장 비합리적인 직감은, 시그리드가 시운을 잘 탄 필부의 두 손으로 함부로 해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마녀 시그리드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적 없던, 보헤미아 귀족 보스코비체의 올드리히는 그런 속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그때 해치워 버리시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이 모든 난리를 겪을 필요도 없고, 경께서는 교황 성하께 큰 포상을 받으셨을 텐데요.”
“말이야 쉽지. 그 마녀에게는 뭔가 기묘한 힘이 있소. 어쩌면 우리 범인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힘을 빌린 것일지도. 당장 이곳까지 행군하는 길에도 우리는 그 힘의 작용을 목격하지 않았소이까?”
“그건 프라하의 역도들로부터 해로운 영향을 받아, 저들의 분수를 잊고 기고만장해진 자들의 우행에 불과합니다. 지나친 해석은 삼가시지요.”
그들이 오는 길에 지나쳤던 소도시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예정된 승자를 맞이하는 공손함은 없었다.
‘어차피 프라하를 반란의 중심이라 여기고서, 그리로 직행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십자군의 앞길을 막지 않을 테니, 십자군 또한 저희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값만 제대로 치러주신다면 물자도 판매해드리도록 하지요.’
‘무어라? 반란에 동조한 혐의를 벗기 위해 물심 다 바쳐 우리의 대의를 거들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무엄함이라니!’
그러나 이미 이들은 프라하에서 출간한 불경스러운 책을 보고서, 거기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뭐,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야 그 무기를 들어 저희를 죽이고, 이 도시를 약탈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온 보헤미아가 십자군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실체를 폭로한 사람이 바로 경이라는 것도 알게 되겠지만요.’
(그런 불손함이 한참 전부터 이들 보헤미아인들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다가, 쿠트나 호라에서 열린 전국의회에서 그런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저들 혼자만이 아님을 깨닫고서 마침내 우르르 발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피포 스파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지나친 해석을 하지 않으려 해도 차마 금할 수가 없소이다. 어째 이미 그 마녀의 농간에 우리 모두가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단 말이지. 당장 우리 눈앞에 보이는 저 비트코프 언덕만 해도 그렇고.”
블타바 강 너머, 눈 덮인 조그만 언덕이 보였다. 카를 4세 시절에 조성했다는 포도원을 조망하는 자리에 세워진 작은 첨탑과, 그 주변에 구축된 보잘것없는 보루.
이 거리에서는 저 언덕 위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는지 헤아릴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엄청난 대군이 운집하여 빽빽하게 창대와 깃발을 세우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이곳 블타바 강 반대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함정이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그러면 함정이 없겠소? 상대는 그룬발트의 마녀요. 오는 길에 그룬발트에서 살아남은 튜튼 기사단원들과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나눠보았더라면 그자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될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허나 우리가 고작 여인 하나의 글을 두려워하여 저 언덕을 들이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지기스문트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저 언덕에 일백 명의 군사밖에 있을 리는 없지 않소? 적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는 것이야말로 바보짓이오.”
두 사람이 옥신각신 다투는 사이, 딱히 얀 후스나 전국의회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저 이쪽이 보헤미아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기에 십자군에 합류한 또 다른 귀족 슈반베르크의 보후슬라프가 보다못해 중재안을 제시했다.
“비트코프 언덕을 공격하되, 반대편에서 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반대편이라?”
“프라하 남쪽으로 우회해 블타바 강을 건너, 남쪽의 비셰흐라트 성을 먼저 점령하는 겁니다. 그 다음 비트코프 언덕으로 진격한다면, 우리가 강을 도하하리라 예상하고 있을 이단의 후미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도시를 포위하려면 비트코프 언덕은 점령해야 했다. 설령 비트코프에 어떤 함정이 준비되어 있어 첫 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다 한들, 이미 비셰흐라트를 점령한 뒤라면 여유를 가지고 다음 공격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계산을 마친 두 사람은 보후슬라프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튿날 정오, 텅 빈 비셰흐라트 성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잘 풀려가는 듯하였다.
“하하! 다들 꽁무니를 뺐군! 하기야, 우리가 이토록 빠르게 프라하로 직행하리라곤 예상을 못 했을 테지!”
“이럴 때가 아니오. 저들이 우리의 급습을 예상치 못한 것이 분명하니, 조금이라도 대비를 하기 전에 비트코프 언덕까지 마저 점령해야 하오.”
“옳은 말씀이시오! 아직 해가 지려면 꽤 남았으니, 아예 비트코프 언덕을 점령하고 거기서 곧장 프라하 성문까지 진격해도 되겠구려.”
피포 스파노는 마치 언제 마녀 생각을 하며 께름칙하게 여겼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떠들고, 올드리히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이 기동을 입안한 보후슬라프 본인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제지하고 나섰다.
“무언가 수상합니다. 우선 이곳 비셰흐라트를 지키면서 주변 정황을 더 탐색하는 쪽이 어떻겠습니까?”
“뭐라? 차라리 여기 눌러앉아 지기스문트 폐하의 본대를 기다리자 하지 그러시오?”
“그대의 계획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 않소? 이제 계획의 나머지를 마저 실행하고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함께 맛볼 때요.”
그러나 보후슬라프는 저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보후슬라프와 군사 4천을 비셰흐라트에 남기고 남은 3천 군세만을 이끌고 비트코프로 향했다.
굴러들어온 영예를 제 발로 걷어차겠다는데, 굳이 만류까지 할 게 있겠는가? 당장 이 3천 명 부대에 어떻게든 끼어보려고 사정사정하는 기사들만 해도 한가득이었는데.
그렇게 이번에는 프라하 동쪽에서, 성벽을 멀리감치 두고서 북상한 끝에 마침내 비트코프 언덕 기슭에 닿았다.
“자, 이대로 진격해 언덕을 점령한다! 이단자들이 있다면 있는 대로 쳐부수고, 없다면 없는 대로 놈들의 비겁함을 비웃어주자꾸나!”
올드리히가 기세 좋게 저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차.
“앗, 올드리히 경! 언덕 위를 보십시오!”
누군가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를 가리키며 외쳤다.
오늘 아침, 강 건너편 멀찍이서 보았을 때와 달리, 지금 이들은 언덕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므로 언덕 꼭대기에 나란히 선 사람들의 대열을 비단 올드리히뿐 아니라 모든 기사들이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고작해야 백 명 남짓한 수의 사람들. 초겨울 햇빛에 번뜩이는 갑옷 한 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 힘껏 외쳐야 겨우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임에도, 그들 귀로 생생히 들려오는 마녀의 목소리.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고작 백 명인데, 그쪽은 왜 그리도 많이 오셨나요? 이게 그 기사도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요?”
조금 눈 좋은 이들은, 마녀 – 멀리서도 그 하얀 머리가 보였다 - 가 저의 입가에 뭔가 고깔 비슷한 것을 입가에 대고서 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면 그만큼 눈이 좋지 못한 이들은, 이 무슨 사이한 주술인가 싶어 급히 성호를 그었다.
“저런 하찮은 속임수에 당황할 것 없다! 마녀가 저기 있다! 마녀를 죽여라!”
저부터 당황했던 올드리히는, 마치 질 수 없다는 양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마녀를 죽여라!”
하루종일 프라하를 빙 우회하고 블타바 강을 도하하느라 몸만큼이나 마음도 지쳐 있던 기사들은, 그 말을 듣고서 무작정 언덕을 치달렸다.
정말 저의 말을 지켜서 일백 명 농노와 함께 나타나 언덕을 지키는 여인을 상대로, 중무장한 기사 삼천이 달려드는 것의 불합리함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언덕 위에서’ 백 명과 함께 기다리겠노라 했을 뿐 언덕 기슭에 병력을 배치해놓지 않겠노라 단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여력 또한 누구에게도 없었다.
전쟁은 멋지지 않다. 사내의 가슴을 뛰게 하는 멋들어진 영웅담은, 고귀한 가문의 기사 나리들께나 허락된 것이었으므로.
평범한 자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한 궁핍한 농노의 고된 일 년을 하루로 뭉쳐놓은 것만큼 비루하고 고된 일이었다. 돈이야 먹고살 만큼 벌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할 때도 많았고, 어지간히 운수대통하지 않고서야 계속 진흙탕과 시체더미 사이에서 굴러야 하는 법이었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프라하에 사는 저의 먼 친척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더부살이하다가 이 민병대에 자원하게 된 얀 차페크Jan Capek는, ‘백송고리 둥지’라는 별명이 붙은 민병대 진지에 처음 찾아간 날 선배 용병들로부터 그 사실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프라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머나먼 북방에서 온 은발 여인은 달리 말했다.
이번 전쟁은 다를 것이라고.
사람을 죽이고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를 위한 전쟁. 모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몇몇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릴 때까지만 두들겨주는 전쟁이라고.
그 말이 얼마나 진실을 담고 있는지, 차페크는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전쟁을 일으키고 또 이끌게 된 그 여인이, 귀하신 분들로 하여금 천하게 바닥을 구르게끔 만들 생각에 기뻐하는 저의 몇몇 동료들과 달리 이 전쟁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름의 비장한 각오와 함께 이 싸움에 나섰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자신의 진실됨을, 프라하 시민들과 함께 흑사병에 맞서 싸우면서 이미 스스로 증명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닥친 불의에 분노하여 성 비투스 대성당을 휩쓴 군중 사이에 차페크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차페크는 깨달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자신의 삶을 바칠 만한 것이고 무엇이 그저 허깨비 망상에 불과한지, 시그리드와 얀 후스 선생이 프라하를 뒤흔든 이후로 언제부턴가 자신이 자신의 판단으로 헤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느낌은, 그 자유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러므로 차페크는 이 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새 땅이 울리고 있었다. 저 언덕 아래에서. 독일어로 온갖 구호를 외치면서 달려오는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일 테다.
“자, 다들 정신 차려라! 지난 몇 달간 이날을 위해서 그토록 내가 너희를 굴렸던 거다. 가장 중요한 날에 실수하면 어지간히 억울하지 않겠냐?”
다들 두려움에 젖는 사이, 그간 그들을 정말 열심히 괴롭혔던 선배 용병, 그룬발트라는 곳에서 시그리드와 함께 싸웠다는 슈체판 병장이 말했다.
“총병들은 심지에 붙일 불씨 준비해라. 다른 데 옮겨붙지 않게 조심하고.”
그 지시에 충실하게 따른 –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동작을 알고 있었다 – 차페크가, 슈체판에게 물었다.
“슈체판 병장님, 그런데 우리는 전투 구호 같은 것 없습니까?”
“전투 구호라니?”
“저 기사들은 뭐라도 한 마디씩 외치고 전장에 뛰어들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지슈카 어르신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지요.”
“뭐, 나쁘진 않은 생각이다. 헌데 뭐라고 외치고 싶으냐? 나는 그런 쪽으론 머리가 안 돌아가서.”
얼마 전, 시그리드를 따라다니는 그린란드라는 까마득한 북방 출신 사람들이 ‘발할라’라는 것에 대해 떠들 때 차페크도 우연히 그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그 발할라라는 건 케케묵은 이야기라며, 자신이 더 재밌는 얘기를 안다고 나섰을 때, 차페크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곁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오래 전, 머나먼 땅에서 있었다는 하늘을 걷는 루카스Luke 성인 이야기를 떠올린 차페크는, 그 이야기 속에 나오던 구호를 기억에서 꺼냈다.
교회를 따르든, 후스를 따르든, 독일인이든, 보헤미아인이든, 누구든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외칠 수 있을 법한 구호.
곧 구덩이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가 오가고, 언덕 위쪽에서는 총성과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정해진 신호였다.
“자, 가자!”
오늘의 전투는, 기사의 창이 아니라, 대장장이가 만든 총과 상인이 모아들인 화약, 그리고 농부가 든 삽으로 이기게 될 것이었다.
그간 파두었던 참호를 위장하고 있던 덮개를, 창병들이 일제히 걷어치웠다. 일사불란하게 구덩이 밖으로 나와, 거대한 선형진을 만들었다³.
비트코프 언덕을 막 오르다가, 곳곳에서 푹푹 빠지는 말발굽에 당황하고 또 저들 생각보다 훨씬 높은 언덕 위의 방벽에 놀라며, 그 위에서 마구잡이로 쏟아붓는 탄환에 어찌할 바 모르고 허둥대던 기사들의 양 옆이 순식간에 에워싸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뭐라 황망한 외침이 나오건 말건, 속보로 척척 나아가는 선형진 한쪽에서는, 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외쳐지는 전투 구호를 내뱉는 한 패거리가 있었다.
“힘Force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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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망’은 원 역사에서 18세기 개척자 겸 선교사 한스 에게데가 서녘정착지 터 근처에 세운 정착지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좋은 희망’이라는 뜻의 고트호프로 개칭되고, 1979년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설립된 후에는 다시 칼라알릿어 누크Nuuk로 개칭됩니다.
2. 어감이 멋지기에 오늘날까지도 종종 대중문화에 인용되는 ‘기계에서 나오는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은, 고대 그리스 희곡의 결말부에서 갑자기 신이 나타나 모든 갈등을 해결해주곤 하던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면서 관용어구처럼 쓰이게 되었습니다. 신적 존재로 분장한 배우가 크레인 같은 기계장치에 매달린 채 무대 위에서 나타나는 형식으로 주로 연출되었기에 그런 표현이 사용되었지요.
3. 원 역사에서도 비트코프 언덕은 십자군과 후스파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진 장소였습니다. 작중 서술된 것처럼, 프라하 북동쪽 방면을 감시할 수 있는 요지였기에 프라하 공략을 위해서는 이곳을 점령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놀랍게도 원 역사에서 얀 지슈카는, 작중에서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작 26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로만 이루어진 민병대는 7~8천에 달하는 십자군 기사들을 상대로, 몇 정 되지 않는 핸드캐논과 도리깨만을 가지고서 버텨냈고, 그사이 역시 일백을 넘지 않았을 기습부대가 포도밭을 통해 기사단 후미를 급습하여, 암만 후하게 쳐도 이백이 넘지 않는 민병대 상대로 5백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고 기사들이 패퇴하는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얀 지슈카가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십자군이 타보르파 진압에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는 전투라 하겠습니다.
4. 존 윌슨 중령은 시그리드를 만난 시점에서 ‘하늘을 걷는 루카스 성인’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정체까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타워즈』 (아직 ‘새로운 희망’이라는 부제가 달리기 전입니다.) 개봉은 1977년, 『제국의 역습』 개봉은 1980년이기 때문이지요. (몇 개월 차이로 『제다이의 귀환』까지는 보지 못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