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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바이킹-33화 (33/116)

오늘 밤엔 드러눕자 (2)

8. 오늘 밤엔 드러눕자 Get Down Tonight (2)

고지를 차지한 시그리드는, 한동안 가만 서서 비트코프 언덕 위로 달려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백송고리 용병단 대부분은 다른 임무를 맡아, 얀 지슈카와 함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시그리드 곁을 지키고 있는 그린란드 사람들을 제하면, 나머지는 모두 프라하 시와 주변에서 모인 민병대였다.

언덕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흙을 쌓아올리고 나무를 덧댄 어설픈 축대 위로도 그대로 전해졌다. 하나둘씩 긴장하고, 누군가는 기도문을 외웠다.

“잊지 마세요. 오늘 우리는 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이 위에 올라온 게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룬발트에 이어 이곳에서도 그 위선 가득한 일을 자처하게 된 시그리드는, 비단 주변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기사들을 가능한 한 굴욕적으로 패주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죽은 자는 모욕을 느낄 수 없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씨.”

그간 익힌 짧은 보헤미아 말로도 한 번 반복하자, 다들 결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답했다.

한 편의 희곡 같은 전쟁이라고 에릭은 말했다. 과연 그것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욘이 해준 ‘별들의 전쟁’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기사들은 언덕 중턱을 넘어 가까이 다가왔다. 선두의 몇몇은, 마냥 우스워보였던 언덕마루의 축대가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에 놀라는 듯했으나, 그 놀라움은 대열 뒤편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전원, 사격 준비!”

시그리드가 지슈카에게 배운 발성법을 이용해 우렁차게 외쳤다.

그룬발트에서 만난 튜튼 기사단에 비하면, 어딘가 어설프고 훨씬 둔해 보이는 기사들. 그러나 지금껏 저런 기사들을 상대로 무기를 들 것이라 상상조차 못 해봤을 프라하 민병대에게는 충분히 두려운 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민병대 사이에서 하사관 노릇을 하는 이들이 각각 거총을 지시하자, 누구 하나 멈칫하지 않고 절반 가량은 총을 들고, 나머지는 창과 도리깨를 꺼내들며 힘차게 복명복창을 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얘기한 대로 말만 노리세요!”

마침내 꼭대기 근처까지 올라온 기사들이, 땅이 얼기 전 미리 파두고 짚단 따위로 가려두었던 참호 첫 줄에 빠지기 시작했다.

“으억!”

“땅이 꺼진다!”

“조잡한 함정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그리드는 외쳤다.

“사격 개시!”

구덩이에 빠진 기사들 바로 뒷열의 군마를 노린, 오십 정 머스킷의 일제사격.

낙마하는 이들의 아우성, 말들의 비명.

재수 없는 몇몇은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쓰러진 말에 발 걸린 다른 군마와 기사들이 덩달아 넘어졌다.

“돌격! 돌격! 신의 정의와 지기스문트 폐하의 명예를 위해!”

“이단에게 죽음을! 마녀에게 죽음을!”

시그리드는 저의 궁니르 – 망가질 때마다 새로 갈았으니, 이건 아마 궁니르 5호쯤 될 것이다 – 를 들어, 가장 시끄러운 자가 탄 말을 노렸다.

숨을 들이쉬고, 방아쇠를 당기고, 이제는 익숙해진 반동을 어깨로 받아냈다.

“억!”

“올드리히 경!”

그사이 저들이 빠진 구덩이에서 기어나온 선두의 기사들은, 코앞에 있는 그들의 목표, 비트코프 언덕 정상을 둘러싼 축대 바로 아래에도 꽤 깊은 참호가 파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덕을 일백 명의 농노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며 달려온 기사들은, 그제야 저들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넘어가라! 넘어서 올라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크헉!”

뭔가를 붙잡고 올라가려 애쓰던 이는 위로부터 날아드는 뭉툭한 창날에 밀려 거꾸러지고, 휘두르는 도리깨에 머리를 맞고서 자빠졌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빨리 앞으로 가라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뒷열에서는, 그저 기세 좋게 뛰쳐올라간 선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고서 아우성을 질러대었다.

“장전 완료!”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

“사격 개시!”

또 한 차례 총성이 울리고, 또 한 차례 나동그라지는 기사들의 비명이 언덕 비탈에 울리던 차.

약조했던 대로 언덕 양옆에서 민병대가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힘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개중에는 그런 엉뚱한 구호를 외치는 무리도 하나 있었는데, 그게 꽤 있어 보이게 들렸는지 주변에서도 뒤늦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스파노 경!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올드리히 경이 낙마하여 혼절하셨습니다! 스파노 경, 부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 와중 비탈길 한가운데에서, 목청 높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달려가는 곳에는, 어째 구면인 듯 익숙한 풍채의 기사 하나가 있었다. 필시 얼마 전 프라하에 십자군 선포 사실을 알리어 온 피포 스파노일 테다.

콜그림이 제법 숙달된 솜씨로, 시그리드에게 장전된 라이플을 건네주었다.

또 한 번, 겨냥하고, 쏘았다.

“스파노 경!”

말이 그대로 놀라 쓰러지면서, 그 위에 타고 있던 스파노도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후퇴! 후퇴하라!”

전공을 탐내며, 비트코프 언덕에 무슨 함정이 있을지 살피지도 않고 달려갔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아니면 그저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는 데 당황하여 외친 것인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양옆에서는 조금씩 쥐어짜이며 우왕좌왕하던 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외쳤다.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그리드가 손짓하자, 약조된 대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포도원 양옆에서 차근차근 기사들을 압박하고 있던 민병대는 그것을 신호 삼아 재빨리 기동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후퇴한다! 퇴로를 막아라!”

민병대를 이끄는 장교와 부사관들 – 대개는 지슈카를 따르던 용병 출신들 – 은 비단 아군뿐 아니라 십자군 선발대에게도 다 들리도록, 보헤미아 말과 독일 말로 번갈아 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후퇴라고?”

“제길, 주변에 누구 상급자 없나?”

“나를 따라라! 퇴로를 뚫어야 한다!”

후퇴가 아니라, 그저 퇴로 확보 내지는 다른 방향으로의 돌격임을 주장하며, 아직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더 심한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 몇몇 기사들은 방향을 틀어 달려나갔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함정에 호되게 당한 기사들의 후퇴는 많이 느려져 있었다. 포도원 곳곳의 바닥에 조그만 요철이나 짚더미라도 있으면 놀라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진짜 돌이나 구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빠지기도 했다.

“정지! 추격을 멈춰라!”

“우리 목표는 포로를 잡는 것이지, 적을 전멸시키는 게 아니다! 언덕 기슭으로 돌아간다!”

후퇴하는 기사들에게는 다행히도, 언제부턴가 민병대는 그들 뒤를 쫓는 것을 멈췄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기사들은 황망히 비셰흐라트로, 또는 무작정 프라하 반대편으로 도망쳐갔다.

언덕 위와 기슭의 민병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처음 비트코프 언덕 위로 달려나갔던 기사들의 절반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은 도망치는 기사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비트코프 언덕의 전투는 시작한 지 고작 반 시간만에 끝났다. 다친 말들은 울부짖고, 낙마한 기사와 거기 휩쓸린 용병과 종자들은 자빠져 일어나지 못하거나, 말의 시체에 깔린 채로 곳곳에서 신음하였다.

“댁은 기사요, 용병이오?”

반쯤 망가진 포도원 곳곳을 뒤적이는 민병대원들은, 곳곳에서 창날과 총구를 겨누면서 이런 문답을 던졌다. 십자군 태반은 독일인이었고, 그러지 않더라도 독일어가 통용되는 곳에서 왔기 때문에 언어의 문제는 없었다.

“용병이외다. 헤센에서 왔소.”

얼굴 절반에 피멍이 든 용병이, 답답함을 못 이기고 투구를 내던지며 답했다.

처음 그에게 창을 겨누었던 민병은 겨누었던 창날을 아래로 내렸다.

“자, 일어나시오. 그대에겐 볼 일 없소. 돌아갈 노잣돈 필요하면 우리 본부로 가서 일감 찾아보시면 되오. 거기 옆엔 누구요?”

막 손을 내밀면서, 그 용병 곁에서 말에 깔려 끙끙대고 있는 이를 가리키며 묻자, 지목당한 본인이 먼저 발끈해 민병대원들이 바라던 답을 내놓았다.

“이놈! 말을 삼가라! 나는 로젠베르크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기사 나리다 그 얘기구만.”

“일단 좀 맞고 시작합시다. 이런 좋은 때 기사를 줘 패보지 또 언제 때려보겠소.”

“댁들 쓰고 다니는 그 양철 투구 볼 때마다 항상 두드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여기 쇠몽둥이도 있겠다, 잘 되었구만.”

저의 머스킷을 슥 들어 보이며 짓궂게 웃는 민병대원이었다.

그제야, 충격으로 흐려진 기사의 머릿속에서도, 이미 마녀와 한통속으로 몰리고 십자군에게 토벌당해야 마땅한 이단자로 몰린 이들에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들에겐 몸값이 필요하지 않았다.

새로이 발견한 아랫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게 다가오는 민병대원을 바라보던 기사의 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세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 목소리 주인을 알 것 같았다.

“아이고, 저흰 그저 겁만 좀 주려고 했습니다요.”

“암요. 그리고 이렇게 두텁게 갑옷도 차려입은 양반이 천것들 주먹찜질 좀 당한다고 어디 상한 티나 나겠습니까?”

말투로 보나, 영 아쉬워하며 개머리판 휘두르기 위해 거꾸로 잡은 총을 제대로 고쳐잡는 모습으로 보나, 그 진실성이 의심되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기사의 눈에는, 목소리 주인의 머리카락 색깔과 앳된 얼굴만이 들어왔다.

“하얀 마녀...!”

“왜 다들 이렇게 기겁부터 하고 보는지 모르겠네요. 아까 어떤 기사님은 아예 혼절까지 하시더라고요. 그룬발트에서 제가 총으로 사람 쏜 것만 기억하고, 전상자들 목숨 구해준 건 기억들을 못 하나봐요.

자, 일어나세요.”

마녀 곁을 지키던 덩치 큰 북방인들 여럿이, 기사의 하반신을 덮고 있던 군마 시체를 옆으로 밀쳐냈다.

“이놈이 귀에 총을 맞았나. 일어나라 하셨으면 퍼뜩 일어나야지.”

“내게 포로의 권리를 보장해주려는 것이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지켜져야지요.”

‘포로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단련된 이성을 갖추지는 못한 기사였다.

“몸값은 따로 요구할 생각이 없지만, 대신 해주셔야 할 일이 좀 있습니다.”

“해줘야 할 일이라니?”

“어허, 이 사람 보소. 몰매맞기 전에 구해준 분께 꼬박꼬박 말대꾸하기는.”

기사가 답을 듣기도 전에, 저 옆에서 매타작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의 투구를 두들겨 보고 싶다는 욕망은 한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지, 청명하니 금속 두들기는 소리도 들렸다.)

“이봐, 멈춰! 작전계획 들을 때 네놈들은 졸고 있었냐?”

덩치 큰 북방인 여럿이 먼저 달려가고, 하얀 마녀도 그 뒤를 따랐다.

“자, 어쩌시겠소. 매타작 한 번 당하시렵니까, 아니면 순순히 따라오시렵니까?”

결국 기사는 몸을 일으켜, 너저분해진 갑옷에서 진흙을 털 겨를도 없이 민병대를 따라 나섰다.

잔류대를 이끌고 비셰흐라트 성을 지키던 슈반베르크의 보후슬라프에게 충격적인 패배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아직 해가 서쪽으로 다 지지도 않았을 때였다¹.

먼발치서도 패잔병임을 알아볼 수 있는 피폐한 모습으로 나타난 생존자들은, 곧 비셰흐라트 성내로 들어와 그들이 겪은 일을 과장 섞어 마구 떠들어대었다.

차마 저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돌진한 끝에 미리 잘 준비된 함정에 빠졌음을 인정할 수 없던 이들은, 패배의 원인을 수적인 열세와 ‘마녀의 간악한 술법’에 돌렸다.

기세 좋게 비트코프 언덕을 오르던 선발대는, 언덕 전체를 뒤엎고도 남을 무지막지한 수의 적에게 에워싸여 전멸하고야 말았다. 그런 어마어마한 수의 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마녀가 술수를 부렸다는 증거라고 그들은 떠들었다.

“이제라도 입단속을 시켜야 할까요?”

부관이 묻자, 보후슬라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버려 두어라. 이미 늦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이곳 비셰흐라트는 비단 왕성일 뿐 아니라, 유사시 프라하를 지키거나 공략하는 거점으로도 딱 적합한 곳이었으니까.

“그치들을 불러모아, 그 무슨 주술 타령 대신 진짜로 일어난 일들만 술회하도록 해라. 반란군이 곧 이 성까지 닥쳐올 테니, 그 전까지 지기스문트 폐하께 급보를 보내 그 언덕에서 벌어진 일을 사실 그대로 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는...?”

부관이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필시 ‘비트코프 언덕에서 벌어진 일이 곧 이곳 비셰흐라트에도 닥쳐올 텐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는 물음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었다.

“지기스문트 폐하가 이끄는 팔만 본대가 한두 달 안에 도착할 것이다. 보급을 줄이고, 여차하면 군마와 짐말을 잡아먹는 식으로 견디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 ‘십자군’이 정녕 정의로운 군세인지, 보후슬라프는 자신하지 못했다. 두 명의 교황이 서로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대립하는 현실을 접해보았던 식자라면, 대개 비슷한 반응일 테다.

그러나 보후슬라프에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아무리 얀 후스와 ‘하얀 마녀’가 온 보헤미아의 힘을 모으려 한다 할지라도, 독일왕이자 사실상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지기스문트를 막아낼 수는 없으리라는 것.

“대신 성 안의 모두에게 전해라. 우리가 이곳에서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견뎌야만 프라하 시민들이 흘릴 피도 줄일 수 있다고.”

“예, 알겠습니다.”

이 십자군에 동참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모두 기회주의적으로 지기스문트와 전국의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자들뿐인 것은 아니었다. 보후슬라프처럼, 정말로 이것이 유혈을 최소화하는 길이라 여겼기에 따라나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².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던 차, 막 나갔던 부관이 황급하게 도로 들어왔다.

“보후슬라프 경! 적이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벌써?”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반란군이 가용한 전력을 모두 비트코프 언덕에 투입했으리라 여겼던 보후슬라프는 – 당장 이곳 비셰흐라트도 텅 빈 채로 넘겨주지 않았던가 –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만한 병력을 동원해 격전을 치렀다면, 적어도 하룻밤은 쉬고 내일 아침쯤에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또 예상이 빗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전력은 얼마나 된다 하느냐?”

“기사로 보이는 이들만 족히 이삼천이요, 그 주변에 민병들도 합세해 있다고 합니다!”

“기사들이 그리도 많이 반란에 합류했다는 말인가!”

탄식하던 보후슬라프는, 이러고 있을 계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지기스문트 폐하께 보낼 글을 서둘러 완성해라! 드러난 병력만 그 정도라면, 이미 그 이상이 성을 포위하려 기동하고 있을 것이다! 반 시간 내로 보고를 완성해, 암문으로 전령을 내보내야 한다!”

그러고는, 우선 저의 두 눈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고자 성벽 위로 향했다.

문제의 비트코프 언덕과 마찬가지로, 비셰흐라트 역시 블타바 강가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비트코프 언덕에 비하면 훨씬 경사가 가팔랐기에 방어에는 더 유리했지만, 숲이 언덕 주변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어 적이 은밀히 움직이기에도 유리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적의 허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사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오늘도 제법 아름답게 진 노을이 블타바 강물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무는 태양을 맞아가며, 언덕 위로 올라오는 길 한복판을 꽉 채우면서 성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저들이 바로 그 ‘이삼천 기사와 그 일행’일 것이었다.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어도, 그 투구와 갑옷까지는 알아볼 수 있을 법한 거리에서 기사들의 행렬은 멈췄다.

그 갑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이가 보후슬라프 혼자만은 아니어서, 성벽을 지키는 이들 사이에서도 술렁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분명 비트코프 언덕에서, 마녀의 술수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기습이든 반란군에게 당해 전멸했다던 선발대. 그 선발대에 속했던 이들이 이리도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대열 한쪽에서 사람 몇몇이 떨어져 나오더니, 말 달려 성문 앞까지 나아왔다.

그 은발이 석양에 붉게 물들었기에, 기수 중 적어도 한 사람의 정체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술렁이는 소리가 한층 더 커져 저 아래까지 들릴 지경이 되자, 보후슬라프는 주변에 엄명을 내려 입단속을 시켰다.

“그대가 그린란드의 시그리드요?”

“네, 맞아요. 예상하셨겠지만, 항복을 권유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생존자 몇몇이 언급한, ‘수상한 깔대기’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시그리드가 외쳤다. 무슨 술수인지, 정말로 목소리가 훨씬 크게 불어난 채로 성벽 위에까지 들려왔다³.

“보시다시피, 저희는 항복한 이들에게 인도적인 대우를 하고 있어요. 저희가 만약 어떤 강압이나 폭력을 행사했다면, 이분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이곳까지 걸어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아직 ‘인도적’이라는 말은 알프스 이남에만, 그것도 인문주의 학풍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시그리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보후슬라프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과연 저 대열 어디에도 무기를 들고 있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쇠고랑이나 여타 구속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포로를 해치지 않는 명예로움은 높이 사는 바이나, 우리는 지기스문트 폐하와 십자군의 대의를 배신할 수 없소이다!”

“재고를 청합니다! 이곳 비셰흐라트는 이미 포위되었어요! 인명이 무익하게 살상되는 것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대가 그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무기를 내려놓고 지기스문트 폐하께 자비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이 아름답고도 부유한 보헤미아 땅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기 전에!”

“어차피 이 성은 함락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괜히 이 성을 그대로 넘겨준 게 아니랍니다! 다 되찾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 대꾸할 말을 찾으면서도, 시그리드의 저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 한편으로 따져보는 보후슬라프였다.

그러나 결론은 ‘허세일 것이다’ 쪽이었다. 지기스문트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비셰흐라트를 함락시킬 만한 병력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포로가 된 기사들을 그들 앞에 대령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할 것도 없이 우직한 힘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어디 한 번 해 보시오! 이 성의 방벽이 우뚝 서 있는 한, 우리의 깃발 또한 비셰흐라트에 계속 휘날릴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

보후슬라프가 그 말의 의도를 헤아릴 여유도 주지 않고, 시그리드는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석양은 박명으로 변해갔다.

보후슬라프는 적이 야습을 가해오리라 여기진 않았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적이 비트코프 언덕에서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녀의 술수라기보다는 누군가 뛰어난 전술가가 하나쯤 있어 아주 정교하고도 교활한 매복을 준비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귀족들이 벤첼 왕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국왕의 편에서 활약한 유명한 용병 하나가 이단 수괴 후스의 편에 섰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보후슬라프 본인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거창한 식사 대신 죽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며 성벽 위를 지켰다.

점점 어둠이 드리우고, 동쪽에서 달이 떠올랐다.

영 배가 허하다는 것을 애써 잊으며 주변을 감시하던 보후슬라프의 귀에, 기사 몇몇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포로들을 잘 대해주는 모양인데.”

“그럴 리가 있나?”

“자네도 보지 않았나? 성문 앞까지 걸어온 우리 동료들 말일세.”

“그게 우리 동료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냥 포로의 갑옷을 벗겨서 입고 나온 이단자 무리일지도 모르지!”

“에이, 설마 기사에게 그런 모욕까지 가했겠는가?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들이 이 성을 함락시킬 것이라 단언하는 시그리드의 모습에 다들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부디 그것이 허세였기를, 지기스문트의 본대가 구원군을 보내오기까지 이 성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보후슬라프는 슬슬 눈을 붙이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

“쏴라! 사격 개시!”

성벽 아래 숲에서 호각소리와 함께 외침이 들려왔다.

“적습이다!”

“당황하지 마라! 몸만 잘 숨기면 된다!”

그룬발트에서 시그리드의 군세가 사용했다는 그 소형 화포 얘기를 일찍이 들어 알던 보후슬라프가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굉음이 울리고, 성벽 한쪽이 산산조각났다.

파편과 먼지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대포다! 놈들이 사석포를 가져왔다!”

“제기랄! 대체 어디서 구해왔담!”

당황하는 이들이 성벽 곳곳에서 외치고 있었다.

“좋아, 잘 겨냥했다! 이대로 계속 쏘아라!”

그리고 성벽 아래쪽 숲속에서는 연신 포화가 날아들었다.

성벽이든, 첨탑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대는 탄환.

“보후슬라프 경! 피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우선은 성벽 아래쪽으로 피하시지요!”

그때, 제대로 조준 못한 대포 하나에서 목표보다 조금 높은 각도로 발사된 탄환이 성벽 위 기사들의 머리를 지나 첨탑 위의 깃발에 맞았다.

“엇, 어어?”

분명 자신은 성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저 깃발이 휘날릴 것이라 단언했건만, 어찌 깃발은 저리도 쉽게 꺾인다는 말인가.

얼떨떨한 채로 성벽 안쪽으로 몸을 숨긴 보후슬라프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았다.

저들이 쓴다는 소형 화포로는 이런 위력을 낼 수 없을 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오직 숙련된 포수들만이 저토록 정확하게 목표를 맞출 수 있는 법이지.”

탄환이 성벽 곳곳의 방어물을 정확히 맞춰 무너뜨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보후슬라프가 말했다.

그런 숙련된 포수들을 저리도 많이 데려왔다. 그들이 맘껏 쏠 수 있는 만큼의 대포와 함께.

보후슬라프의 상식에 비춰볼 때, 그렇다면 정말로 성 밖에 있는 것은 엄청난 대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군이 고작 하루만에, 비셰흐라트 성의 방어자들 눈에 띄지 않고 숲까지 다가왔을 리는 없었다. 어떤 술수를 썼든, 그들이 블타바 강을 넘어 이 성을 점령하기 전에 이미 그곳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을 테다.

“정녕 함정이었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저의 눈앞에서 꺾이던 깃발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런 대군이, 그것도 칠천 군세가 눈앞에서 지나가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은밀함을 지킬 수 있는 정예한 군사가, 철저한 대비를 하고서 이 성을 에워싸고 있다면...

그들이 이 성에서 전원 목숨을 바친다 한들, 그 희생에 어떤 값어치가 있겠는가?

그날 밤, 잊을 만하면 울리는 대포 소리에 비셰흐라트 성의 방어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또 한 번 성문으로 다가온 시그리드에게도 보후슬라프의 충혈된 두 눈이 그대로 보인 모양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냐고 인사를 드린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못된 짓이겠지요?”

“장난은 되었소! 대체 얼마나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온 게요?”

“항복하시면 알려드릴게요!”

보후슬라프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이미 마음이 꺾여버린 기사들. 성전이 가져다줄 명예와, 누구도 부정 못할 제국 제일의 실권자로 우뚝 설 지기스문트가 베풀 보상을 바라며 의기양양하게 비셰흐라트에 입성할 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어제 저녁에 드렸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답니다!”

결국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대신, 보후슬라프는 외치고야 말았다.

“알겠소! 단, 조건 하나가 있소!”

그간 벌어진 일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항복할 수밖에 없던 사정에 대해 지기스문트에게 마지막으로 전령을 보내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뭔가 이견이 있었는지, 대략 한 시간쯤 지난 뒤에야 시그리드는 애꾸눈이 돋보이는 용병대장 하나와 함께 성문 앞으로 돌아왔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알겠소! 그러면 정오에 전령을 내보내고, 동시에 성문을 열고 나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보후슬라프는 약조를 지켰다.

무기를 내려놓고 포위자들의 진영에 도착한 보후슬라프에게, 시그리드는 대뜸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약속을 지켜야겠지요?”

얼마나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왔냐고 보후슬라프가 물었던 것을 잊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곧 밝혀진바, 진상은 보후슬라프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별 것 없으면서도 기상천외했다.

사람 여럿이서 옮길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수레에 실린, 대포大砲라 하기에는 영 작고 귀여운 화포 수십 문. 그것이 바로 어젯밤 비셰흐라트 방어군을 괴롭혔던 ‘놀랄 만큼 정확하고 매서운’ 사석포의 정체였다.⁴

“그러면 어제의 기사들도...”

“네. 포로를 학대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순순히 우리 지시에 따를 것 같지도 않아서요. 대여료 대신 몸값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더니 다들 알아서 갑옷을 벗더라고요.”

기사의 명예라는 것도 결국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의 일종이었던 모양이었다.

시그리드의 설명은 그 뒤로도 죽 이어졌다.

칠천 명에 달하던 십자군 선발대가, 비셰흐라트로 도망친 대신 아예 프라하에서 멀리 도망친 몇몇을 제하고 모조리 포로로 잡히는 동안, 반란군이 입은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비트코프 언덕에서 전사자가 셋. 부상자 일곱.

그리고 비트코프와 비셰흐라트를 합쳐서, 화포 제조술이나 운용 중 어느 한쪽의 문제로 화포가 터져서 화상을 입은 이들이 열하나.

그 설명을 들은 보후슬라프는,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의 수완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모욕을 당한 지기스문트가 어떻게 나설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가 아는 지기스문트라면, 이 모욕에 진심으로 격분하는 대신, 오히려 냉정하게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고심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기스문트에게 보헤미아는,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불태워도 괜찮은 땅이었다.

--- *** ---

1. 작중 언급되는 비트코프 언덕과 비셰흐라트 성 등은 모두 지금은 프라하 시가지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만큼 지척이라고 생각하며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비셰흐라트 성은 지슈카가 이끄는 타보르파의 공격에 함락됩니다. 이때 작중에서와 달리 비셰흐라트 방어군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슈카는 금방 대포병사격의 개념을 떠올리고 정확한 타격으로 방어군측 대포를 무력화시켰다고 전해집니다.

2. 지난화에 등장한 얀 차페크, 피포 스파노, 보스코피체의 올드리히 등과 마찬가지로. 슈반베르크의 보후슬라프 역시 실존인물입니다. 원 역사에서 그는 후스파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교회의 편에서 후스파와 대립했고, 네크미르 전투 등에서 얀 지슈카를 상대했다가 번번이 패배했지요.

지기스문트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후스파와 대립하던 보후슬라프는 결국 포로로 잡히는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아예 후스파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것도 그냥 전향한 것이 아니었는지, 투항하고 고작 반 년만에 타보르파 지휘부는 그를 자신들의 본거지 타보르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얀 지슈카 사후에 잠시 타보르파 지휘권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합니다.

3. 깔때기 형태의 확성기가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이 존재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확성기가 유럽에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인 17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4.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후스파 무적 전설의 배경에는 바로 화약무기가 있었습니다. 작중에 등장한 조그만 화포는, 원 역사에서도 (조금 더 원시적인 형태긴 했지만) 후스파가 houfnice(곡사포howitzer의 어원)라 부르며 애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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