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버티다 (1)
9. 살아서 버티다 Stayin’ Alive (1) – 비 지스 (1977)
스베인과 그린란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지기스문트의 진영으로 향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지기스문트의 십자군 본대가 하루 거리까지 다가왔다는 소문이 돌면서, 프라하 시의 거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설움과 활력으로 동시에 북적이던 성벽 밖의 난민촌조차 오늘은 조용해진 듯했다.
그저 무작정 비트코프 언덕으로 달려왔을 뿐인 선발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
프라하 주변을 에워싸고 불태우며 도시의 숨통 자체를 조여오는 그 기동에, 프라하의 모두는 자신들이 비단 지기스문트 한 사람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나아가 그들이 아는 온 세상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프라하 점령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또 삶의 터전을 잃든, 제국이나 교회의 그 누구도 그들을 옹호해주지 않을 것이요, 누구 하나 나서서 지기스문트를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파문당한 이단 수괴와 먼 북쪽에서 온 마녀였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정의와 도덕이 무엇인지 규정해왔던 이들은 모두 지기스문트의 편에 있었으므로.
마냥 즐거운 분노에 가득 차, 교황 특사 장 제르송과 그 일행에게 오물과 돌을 던지던 군중들조차, 저들이 행한 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체감하며, 혹자는 두려워하고 혹자는 허탈함에 빠졌다.
“지슈카 대장의 민병대가 한 번 싸워서 이기면 금방 해결될 문제 아니겠소? 지난번에도 한 번쯤은 더 그런 압승을 거둘 수 있다고 장담을 하였던 것 같은데.”
프라하 시의회 의원들과 민병대 간부들은 대책을 논하기 위해 시청에 모였다가, 프라하 동쪽의 자유도시 쿠트나 호라에서 급한 연락이 당도하는 바람에 잠시 회의를 멈추게 되었다.
시그리드와 얀 후스, 얀 지슈카 등이 모두 전령의 얘기를 들으러 회의실 곁의 작은 방에 들어가 있다 보니, 남은 의원들은 그저 불안을 숨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비트코프 언덕에서 무찌른 적보다 고작 열 배 남짓 많을 뿐이오. 지슈카 대장이라면 할 수 있을 게요. 듣자하니, 비셰흐라트에서 선보였던 그 호우프니체라는 화포는 쓰지도 않고 머스킷과 마차만으로 싸워 이겼다는데.”
비단 비트코프 언덕뿐 아니라, 지기스문트의 군세가 프라하 주변을 에워싸는 과정에서 벌어진 소소한 교전에서도 민병대는 피해 없이 적을 구축하곤 했다. ‘고작 열 배’라는 말에 담긴 자신감이 아예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허나 보후슬라프 경이 말했다지 않았소? 지슈카 대장이 나가서 지기스문트의 군세를 무찌른다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더 큰 규모의 십자군이 다시 일어나 프라하로 쇄도하게 될 것이라고.”
“그건 그때 고민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계속 싸워 이긴다면 뭔가 길이 나타나지 않겠소? 헝가리를 경계하는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서 국왕을 한 분 모셔 올 수 있게 된다던지.”
“지기스문트 폐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느 간 큰 사람이 보헤미아 왕위를 빼앗으려 하겠소? 차라리 시그리드 여사더러 무슨 마법 같은 술수를 부려서 우리 프라하를 그 신대륙이라는 곳으로 옮겨달라고 하는 게 낫겠소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이라도 펼쳐보는 이와, 대책 없는 비관론으로 거기에 대꾸하는 이들.
그러나 두려움에 떨면서도, 몰래 달아나는 대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얀 후스와 시그리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낙관론자든 비관론자든 매한가지였다.
둘로 갈린 채 검은 죽음 앞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했던 프라하를 구하고, 그 이후로 닥친 온갖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낼 수 있도록 도시를 이끌었던 이들이라면, 그만큼의 신뢰는 받아야 마땅했으므로.
시그리드와 두 명의 얀이 쪽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얀 지슈카가 담담하게 말했다.
“쿠트나 호라가 십자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하오. 플젠에서 벌어진 일을 재현하겠노라 윽박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물자와 인력을 내어주게 되었다더군.”
전국의회는 지기스문트의 결의, 어떻게든 보헤미아를 복속시키고 황제로서 우뚝 서겠노라는 그 고집을 과소평가했다. 온 보헤미아가 황폐해지는 것은 양측 모두 바라지 않았지만, 전국의회와 달리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보헤미아의 일부가 불타는 것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 비보를 들고 달려오던 전령이 십자군에게 길을 가로막혀 엘베 강변까지 돌아서 와야 했다는 점이오. 그마저도 십자군 척후로 보이는 이들과 몇 번이고 마주쳤다더군.”
“그 말씀은...”
“길어야 사흘이면 프라하는 완전히 포위될 것이오. 지금까지는 프라하 근교를 불태우며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제는 그런 단계를 넘어 직접 군대로 도시를 에워싸려 할 듯하오.”
시의원 중 젊은 축에 속하던 이가 혈기를 못 이기고 치기어린 말투로 외쳤다.
“이건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시그리드 여사와 후스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했습니다! 온 보헤미아에 우리 대의를 알리고, 우리와 함께 저들에게 맞서도록 이끌었고, 거기에 기사와 평민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지기스문트의 수작도 막아냈잖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지기스문트가 설령 프라하를 함락시키고 이번 반란에 동참한 모두를 붙잡아 죽인다 한들, 십자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고개를 숙였던 전국의회 사람들 모두의 뜻을 꺾을 수는 없을 터였다.
얀 후스의 이단 선고도, 십자군 선포도,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모든 일도 결국 교회와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무리수였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오늘의 원한을 잊지 못해, 몇 년 안으로 또 다른 건수가 생기는 대로 다시금,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날 것이다.
허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기스문트는 후과 따위 나중에 생각하면 그만이라는 양, 프라하를 모조리 불태울 기세로 당장 문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는데.
암만 억울하다 여기서 소리쳐본들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 마음이 십분 이해되어 다른 시의원들도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귀에, 시그리드의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지기스문트 왕은 이미 도박을 한 것과 다름없어요. 어떻게든 이 프라하를 무너뜨리고, 반란을 엄중히 다스린다는 핑계로 온 보헤미아의 기선을 제압하려 하겠지요.
그렇지만 이 프라하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왕이 십자군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 아닙니까? 설령 이번에 이긴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지기스문트 왕이 보헤미아 쪽으로 고개 돌릴 엄두도 못 내도록 호되게 망신을 주면 되지요.
방금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이 길의 끄트머리까지 거의 다 왔어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됩니다.”
얀 후스가 시그리드 옆에서 말을 이어받았다.
“여러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이 프라하 전체를 함정으로 삼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 또 프라하 시민들이 응해주신다면, 노회한 지기스문트 왕조차 속아넘어갈 만큼 정교하고도 은밀한 함정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함정에 빠져든 뒤에야, 지기스문트 왕은 비로소 우리와 마주앉을 준비가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우리의 이해가 서로 맞닿는 점을 확인하고, 협상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도시가 포위되기까지 길어야 사흘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흘 동안 밤을 새워가며 준비를 마쳐야겠지요. 한 번 들어봐 주세요...”
잃을 것 없는 시그리드와 얀 후스, 그리고 우직하게 저를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얀 지슈카 세 사람이, 엊그제 ‘진실’ 제2판 수백 부를 받아들고 보후슬라프가 떠나간 직후부터 머리 맞대고 마련한 계책.
시그리드가 그 뼈대를 이야기하고, 종종 부족한 부분은 후스와 지슈카가 거들며 설명을 마쳤다.
다른 도시 이야기라면 무슨 미친 생각이냐며 헛웃음짓고 말 계획이었으나, 이 자리에 모인 시의원들에게도, 그리고 시청 바깥에서 조용히 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프라하 시민들에게는 희망의 불꽃과도 같은 계획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다시 몇 시간 뒤.
“이거 영 떨립니다그려.”
프라하 성벽을 넘어, 도시에서 코앞인 호르젤리체 마을에 세워진 지기스문트의 진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린란드 사람들은, 무장한 십자군 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불편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린란드 사람이 독일왕이자 사실상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만나뵙는 것은 붉은머리 에이릭이 브라타흘리드를 개척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나 험악한 적진에 사실상 무방비로 들어가게 된 지금, 콜그림으로서는 그런 사실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역시 긴장 역력한 스베인이 억지 웃음을 지었다.
“이 덩치만 큰 무식한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이 그 계획 얘기를 듣자마자 사절 노릇 하겠노라 자원하고 나섰을 때 왜 좋다고 따라나왔는가. 그게 후회되는 모양이로구만.”
“아이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시그리드 아씨가 우리네 큰일 하는 데 필요하다 하신다면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겠지요.”
덴마크에서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못 알아들을 그린란드 북방어로 대화가 오가자, 그들을 감시하던 기사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허나 스베인이나 콜그림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우리로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니까.”
따지고 보면, 이 무모한 계획, 그러니까 고작 프라하 하나를 두고 벌이는 계획 말고 온 유럽과 신대륙이 얽혀 들어가는 그 원대한 계획에 끼어들게 된 이들은 그런 점에서는 형제와 같았다.
애시당초 배부른 작자들에게 손 안 벌리고 그런 사람들만 모아 신대륙으로 가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붉은머리 에이릭의 후손이라는 데 평생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스베인에게, 그런 시그리드의 꿈은 곧 저의 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두렵긴 하잖습니까. 우리가 뭐 엄청 배움이 깊은 것도 아니고, 파울 어르신처럼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놈아, 오히려 그래서 우리가 더 적임자인 게다. 세상의 헛똑똑이라는 놈들은, 딱 봐도 무식쟁이인 것들이 저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들 않으니까.
왜, 시그리드도 그런 얘기 하지 않았더냐. 욘이 알던 어느 나라 궁정의 간신배가 했다던 말이었는데...”
“그거 기억 납니다. ‘한 가지 거짓말만 계속 반복하면 알아서들 믿는다¹’ 뭐 그런 소리였던 것 같은데요. 그놈 이름이 고베였나 고이벨인가 그랬다지요.”
처음 스베인이 자원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만류하던 시그리드였지만, 그 뜻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게 된 이후에는 어떻게든 조언을 하려고 안절부절못하며, 검은 책까지 뒤져가면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더욱 스베인과 그린란드 사람들이 이 위험천만한 임무에 나서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 그거였다. 우리는 딱 그 한 가지에 대해서만 거짓부렁을 늘어놓고, 나머지는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이 지기스문트라는 작자는 알아서 제 꾀에 속아넘어갈 테니.”
평생 동녘정착지의 삶을 나름 복잡한 것이라 여기며 살아갈 줄만 알았던 스베인의 머리로 이 유럽 대륙의 어지러운 정세는 감당하기 벅찼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소박한 생각으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프라하 안에서 내통자가 나타난다면 의심하지 않는 쪽이 외려 바보스러울 것 같았다.
허나 괜찮았다. 아니, 의심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로웠다.
지기스문트가 의심 가득 담아, 곳곳을 뒤적이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애쓸수록, 그의 눈에는 그린란드 사람들의 내통 제의가 진실이라는 (미리 잘 준비된) 증거만이 들어갈 테니까.
곧 처음 그들이 진중에 찾아왔을 때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피포 스파노가 다시 나타났다. 딴에는 구면이라고 스베인이 친한 척을 했다.
“거 한세월 걸리는구만. 폐하께서 많이 바쁘신 모양이오?”
스베인의 억양 강한 독일어를 알아듣기도 고역이었거니와, 이 야만인이 자신과 면식 있는 티를 내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스파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앞에서는 그 입을 단속하는 게 좋을 게다.
독일왕이시며, 헝가리, 달마티아(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국왕이신 지기스문트 폐하께서 네게 접견을 허락하셨다.
우선 몸에 지닌 무기를 모두 꺼내 이 탁자 위에 올려놓아라. 만약 무기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된다면 너희는 암살자로 취급되어 모두 즉결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워, 워. 알겠소. 알겠어. 다 서로 좋자고 찾아온 건데 암살은 무슨. 자, 여기 도끼 보시오.”
다 들으라는 것처럼, 저의 허리춤에 차인 도끼를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는 스베인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보시오. 이게 바로 잘난 당신네들 기사들을 몇 번이나 골탕먹인 머스킷이오. 보고 잘 연구하시라고 이렇게 들고 왔소. 선물이라 생각하시오들.”
콜그림과 군나르가 건네주는 머스킷을 자랑하듯 들어보이며 스베인이 말했다.
“거기, 저놈 허리춤에 있는 저건 뭔가?”
스파노가 군나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스베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군나르에게서 문제의 물건을 받아 들여보였다.
“아, 이걸 깜빡할 뻔했네. 이건 보헤미아 말로 호루라기pistala라고 하는 물건인데, 우리는 그냥 피스톨이라고 부른다오. 보다시피 머스킷을 귀엽게 줄여놓은 놈인데, 사거리가 짧아서 그렇지 가까이서는 사람 하나 무난하게 도륙할 수 있는 물건이라오.”
계속 나오는 화약무기의 향연에, 비트코프 언덕의 소문을 들었던 주변의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없소. 이게 무슨 마법 지팡이도 아니고.
원리로 말하자면 그냥 대포랑 다를 것도 없소. 여기 뒤편 심지에 불을 붙여둔 다음에, 이 대롱 안쪽으로 화약이랑 탄환을 밀어넣고 단단히 다지기까지 한 뒤에야 쏠 수 있지, 지금은 암만 까딱거려도 사람은커녕 벼룩 한 마리 못 죽이는 빈 대롱이라오.”
스파노가 나름 솔선수범하여, 탁자 위에 놓인 머스킷과 피스톨을 만져보았다. 이 쇠대롱에서 ‘악마의 불꽃’이 나온다는 튜튼 기사단 몇몇의 주장과는 달리, 대롱 안쪽을 들여다본다고 사람이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댁들이 프라하를 점령하면, 이 총을 만들어낸 장인들도 모조리 댁들 뜻대로 부릴 수 있게 될 것이오.”
“고작 이 정도로 우리의 환심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해선 안 될 것이다.”
“올라간 입꼬리부터 도로 내리고 그리 말씀하시오.”
스파노는 못 들은 체하며, 그린란드 사람들을 인솔하여 지기스문트가 징발해 거처로 삼고 있는 군막으로 향했다.
지기스문트가 그린란드에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사내들을 만나게 된 데는 이런 내막이 있었다.
당연히 제대로 예를 표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기스문트는 이 야만인들의 무례를 잠깐 참아주기로 했다. 무례에 맞는 벌을 주는 것은 야만인들의 쓰임새가 다한 뒤로 미루어도 괜찮았다.
“그래, 너희가 마녀 시그리드의 하수인이라 하였더냐?”
“하수인까지는 아니지만, 백송고리 용병단에 속해 있으니 같은 패거리는 맞소. 아니, 맞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또한, 너희 우두머리에게 어떤 죄목이 씌워져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 스스로 그 혐의를 입증했는지를 알 것이다. 그런 마녀의 구명을 청하며 찾아왔으니, 필시 내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만큼 유익한 제안을 들고 왔을 터.”
“그렇소이다. 들으셨겠지만, 우리 시그리드의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기꺼이 프라하 성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딴에는 정중함을 갖춘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예법과는 거리가 먼 말투가 제멋대로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나 정말 이들이 그린란드라는 세상 끝에서 온 야만인이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너희가 마침내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되어, 살길을 찾아나선 것은 기특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어찌 너희의 말을 가볍게 믿겠느냐?”
즉 성문을 열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 경위부터 시작해, 프라하 안쪽의 사정을 상세히, 그러니까 지기스문트가 만족할 때까지 고하라는 말이었다.
예상대로의 질문이라, 스베인 역시 흔들림 없이 답했다.
“폐하의 군대가 닥쳐온 것을 깨달은 후스 그 샌님과 도둑놈 지슈카 둘이서 작당해서 세운 계책이 있습니다. 내 그것을 여기서 까발려 드리겠습니다.”
“계책이라?”
“예. 조만간 지슈카와 후스 두 사람이 거하게 싸우는 시늉을 할 겁니다. 한쪽은 프라하를 사수하자고 하고, 다른 한쪽은 도시가 다 에워싸이기 전에 무리를 이끌고 어디 남쪽 숲속에 들어가 항전하자고 하면서 말이오.
그렇게 해서, 지슈카는 그 패거리를 이끌고 아직 포위가 안 된 쪽으로 뚫고 나가고, 후스만 남아서 프라하를 지킬 겁니다.”
아무리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할지라도, 어느 한쪽도 녹록한 상대는 아닐 것이었다. 비트코프 언덕에서의 참패를 명분삼아 오합지졸 십자군을 저의 군령에 철두철미하게 따르도록 만든 바 있던 지기스문트 본인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들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쪽의 힘이 둘로 쪼개진 걸 알게 된 폐하는 좋다고 프라하를 들이칠 테지요. 그 틈을 타서 지슈카는, 남쪽으로 가는 시늉만 하다가 잽싸게 돌아와서 폐하의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갈기는 겁니다.”
“이쪽은 팔만 대군이고, 하나하나가 신앙의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정의로운 군대다. 고작 민병대 따위가 뒤를 급습한다 한들 무너질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기스문트가 스베인을 떠보며 물었다.
“허나 폐하의 군대가 무너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후스가 프라하에서 도망칠 만큼의 틈은 만들어줄 수 있겠지요.
내가 폐하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놈들은 우리 시그리드를 미끼로 프라하 시내에 남겨놓고 갈 작정이라 합디다.
놈들은 우리 그린란드 놈들은 무식쟁이에 미련퉁이라서 귀가 없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아니거든. 그래서 이렇게 폐하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너희는 이단자 후스를 따르지 않더냐?”
“우리는 이단이 아닙니다. 후스와는 그저 협력하는 사이였을 뿐이었고, 이제 그 협력이 끝났으니 지켜야 할 의리도 없는 셈이올시다.”
“그것을 어찌 입증할 테냐?”
“입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소. 우리는 이단이 아니라, 그, 폐하네 사람들이 쓰는 말을 빌리자면 이교도걸랑.”
“뭐라고?”
“십자가를 밟아보라 하시면 산산히 즈려밟아 조각내보이겠소.”
그러자 그 뒤의 그린란드인들도 하나같이 껄껄 웃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암, 그렇지!”
“우리가 이래 봬도 저 그린란드에서는 교회 여럿 불태우려 공모한 놈들이랍니다.”
“교회만 불태우려 했나? 그 땅까지 죄다 뺏으려고 했지.”
“내가 여기 묠니르 부적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보시렵니까?”
지기스문트뿐 아니라 주변 모두가 깜짝 놀라고, 개중에는 성호를 긋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야만인들이 떠드는 말이 진실되다 믿게 된 것도 여기서부터였다.
암만 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저런 무도한 폭언을 태연히 내뱉을 수 있는 이단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었으므로.
“좋다. 너의 말이 진실되다 쳐 보자꾸나. 내가 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만약 내가 지금 프라하 성문을 연다면, 폐하의 군대는 후스와 지슈카 두 사람의 무리를 모두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며칠을 기다렸다가, 지슈카가 빠져나간 뒤 문을 열어드리겠소. 그리하면 폐하의 군대는 프라하를 빠르게 점령하고서 후스까지 사로잡고, 프라하가 벌써 함락되었으리라곤 꿈도 못 꾸고 희희낙락하며 기습을 준비하던 지슈카에게도 거하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게 폐하께서는 이단 패거리가 세운 계책을 역으로 이용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실 수 있으실 테고, 우리는 우리 대장 시그리드 목숨을 구할 수 있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기스문트는 피포 스파노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그 제안이 그럴듯하다고, 당장 받아들이겠노라 확언은 하지 않더라도 고려는 해봄직하지 않겠냐고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나만 더 묻겠다. 대관절 그 시그리드가 너희에게 무엇이기에 배신자 노릇을 자처하느냐?”
“그 아이의 피에는 프레이디스의 저주와 구드리드의 축복이 동시에 흐르고 있소. 그 아이의 힘으로 우리 그린란드는 파멸을 피했고, 동시에 이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되었지.
축복의 덕을 보았으니, 저주의 뒷감당도 해주고자 할 뿐이오.”
대체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알 수는 없었으나, 지기스문트는 이 야만인의 답변에서 오직 진실만을 느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지기스문트는 결론을 내렸다.
“좋다. 너의 말을 믿어보겠다. 어차피 우리가 당장 프라하를 포위할 수는 없으니.
네 말대로 지슈카의 무리가 프라하를 빠져나가게 되면, 즉시 나를 다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비단 너희가 그토록 중히 아끼는 시그리드뿐 아니라 너희 그린란드 족속 모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야만인 스베인은 일말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튿날부터 프라하 시내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다.
“싸우는 소리 같지는 않고, 정말로 총만 쏘고 말았습니다. 함성이나 비명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성 코앞까지 접근한 정찰병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보고했다.
“안에서 내분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리를 속이려는 수작이었나. 과연, 그 야만인이 말한 대로군.”
정찰병들의 보고를 취합한 피포 스파노는 그렇게 단정하며 저의 주군 지기스문트에게 이를 보고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성벽 바깥에 천막을 치고 지내던 피난민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비트코프 언덕 방면에는 마차 행렬이 나타났다. 마차마다 가득 짐이 실려 있고, 피난민으로 보이는 무리도 함께하고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시험삼아,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소부대 여럿을 보내 그 주변을 얼쩡거리도록 하였다.
그들 중 살아 돌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그간 프라하 주변에서 저들과 맞섰던 민병대들이 그 마차 행렬을 지키고 있었노라 증언했다.
마녀 시그리드가 그사이 사람을 복제하는 재주를 익히지는 못했을 테니, 민병대들이 빠져나간 만큼 프라하 시내의 방비는 허술해졌을 것이었다.
“그 야만인들이 우리를 함정에 몰아넣으려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으니, 설령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단단히 방비해두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그날 저녁, 야만인 스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지휘관들을 소집한 지기스문트는 이렇게 말했다.
“함정이라 하시면, 무엇을 뜻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아버지 카를의 대에 저 프라하 시는 보헤미아, 아니, 제국 제일의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귀관들 중 프라하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 이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프라하 시내에는 번듯한 대로와 좁다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저 역도와 이단들의 배은망덕함을 고려하면, 그런 골목에 숨어 있다가 대로 곳곳을 틀어막고 우리를 급습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민병대 주력이 이미 도시를 떠났으니, 고작해야 빈약하게 무장한 폭도들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않고, 대열을 이루어 찬찬히 밀어내면 그만이다.”
비좁은 골목 곳곳에서 폭도들이 튀어나온다면, 기사 한둘이서는 암만 무용이 뛰어나다 한들 결국 자빠져 싸구려 단검에 목숨을 잃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잘 훈련된 군대만의 특권인 탄탄한 전열을 갖추어, 마치 빗질하듯 폭도들을 밀어낸다면, 설령 저들이 정말 어떤 마녀의 주술에 힘입어 악마적인 힘을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야만인 스베인이 약속대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고 부관 하나가 군막에 들어왔다.
“이미 저의 동료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다며, 폐하께서 말씀만 내려주시면 문을 열어보이겠다 하였습니다.
또한 무엄한 언사로써 덧붙이기를, 이단자 후스가 마녀 시그리드를 데리고 프라하 성을 점거하고 있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얼른 들이닥치시라 권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카를이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군림하였던 프라하 성.
지기스문트는 후스가 그곳을 점거했다는 소식에, 분노와 더불어 기쁨을 느꼈다.
이단자로부터 보헤미아의 정당한 왕위를 되찾았음을 세상에 알리기에, 그만한 무대도 없지 않겠는가?
마침내 지기스문트는 결단을 내렸다.
“이것이 신의 역사하심이라면, 인간은 마땅히 따라야 하리라! 자, 가자! 이대로 프라하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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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미권에는 ‘계속 거짓말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한국에는 ‘100%의 거짓보다 99%의 진실과 1%의 거짓의 배합이 더 효과적이다’ 등으로 와전된 괴벨스의 이 말은, 본디 1941년 1월 자신의 라디오 선동 연설에서 처칠의 대국민연설을 비꼬면서 남긴 말이 계속 인구에 회자되며 왜곡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영국인들은 거짓말에 대해 한 가지 원칙을 지킨다. 거짓말을 한다면, 그 거짓말은 아주 거대한 거짓이어야 하며, 그것이 참이라는 주장을 고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저들의 거짓부렁을 줄곧 늘어놓는다.” (Goebbels, 1998[1941], “Aus Churchills Lügenfabrik” (12 Jan 1941). Trans. Rnadall Bytwerk. “Churchills’ Lie Factory.” Calvin University German Propaganda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