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버티다 (2)
9. 살아서 버티다 Stayin’ Alive (2) – 비 지스 (1977)
어슴푸레한 박명 사이로 샛별이 떴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돌리니, 프라하를 둘러싼 십자군 군영에서 피운 불빛과 연기가 보였다.
그리고 아직 잠자고 있는 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도 잠 못 이루고 있을 프라하 시의 전경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계획된 대로 스베인과 백송고리 용병단 사람들은 서쪽 성문을 열어줄 것이다.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밀물처럼 프라하의 거리로 밀려들어올 것이요, 그 선두에 있을 지기스문트는 곧장 이곳 프라하 성을 향해 행군해 오리라.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걱정할 시간은 지났다. 시그리드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자신이 탑 위에 들고 올라온 장비들을 점검했다.
오늘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자신의 마녀 악명에는 더한 비난이, 비열함이라는 더 큰 오명이 씌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프라하 시민과 민병대원들의 손에 묻을 피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곳 보헤미아에 남을 이들에게 돌아올 원한을 대신 자신이 짊어질 수 있다면, 그 정도 오명이야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각오를 다지며, 시그리드는 곧 열릴 성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성 밖의 십자군 진영에 성문 열어줄 준비가 다 되었노라는 말을 전하고서 돌아온 스베인은 성문을 지키던 백송고리 용병단원을 한 군데 모았다.
“아마 지금 바로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오진 않을 게요. 내 보니까 뭐 이것저것 준비들 한답시고 분주합디다.”
“당연한 일이오. 설령 함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밤중에 도시로 대군을 이끌고 들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보급관 헤니히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슈카 어르신이랑 그새 매일같이 맥주잔 기울이시더니 병법에도 통달하셨나 봅니다?”
묵직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 심산으로 한스가 농지거리를 던졌다. 허나 그룬발트 이후로 더욱 과묵해진 헤니히는 재미없는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폴란드에서 보지 않았냐. 대군이 움직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큰일이다.”
무거운 갑옷과 시야를 좁히는 투구를 쓴 수만 명 사내를 거느리고 어디 한 군데로 향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린란드 사람들뿐 아니라 코펜하겐 출신 한량들도 깜짝 놀랄 만큼 거대하고 번화한 도시가 프라하였다. 그런 도시에, 야음을 틈타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들어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인영을 식별할 수 있는 새벽녘이 될 때까지 입성을 미루는 것은 딱히 현명하다고까지도 할 수 없는, 상식적인 수순이었다.
“어르신 말씀대로요. 언뜻 듣기로는 동틀 즈음에나 나타날 것 같더군.”
“알겠소. 그렇게 주변에도 전하지.”
그러면서, 스베인이 십자군 진영을 다녀오는 사이 가지고 온 궤짝과 물통을 건네주는 헤니히였다.
“어젯밤에야 완성된 물건이오. 시그리드 단장 지시를 받아 프라하에서 가장 솜씨 좋은 대장장이 여럿이 달라붙어 만들었지.”
지난 사흘 동안 프라하의 모든 공방은 여분의 총기를 만드는 데 바빴다. 허나 지금 스베인과 콜그림 손에 넘어가고 있는 물건은, 일손 하나하나가 아쉬운 판에 몇 명이나 되는 대장장이들을 따로 떼어내 일감을 맡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쓰는지 까먹진 않았겠지?”
“헤헤, 잊어먹을 게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물건이 완성되기 전, 대충 만든 모형만 가지고 연습한 것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스베인과 콜그림 모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 나머지 사람들도 임무 잊지 마시오. 그리고 죽지도 말고.”
“덕담 같지도 않은 소리군.”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도, 시그리드 다음으로 막중한 임무를 맡은 스베인에게 악수를 청하는 헤니히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이놈아, 그거 그렇게 만지지 마라.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지루함을 못 이기고 헤니히가 전달해준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콜그림을 공연히 구박하는 스베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왜, 시그리드 아씨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방인 욘이 살다 온 세상에 유명한 극단이 있었다고.”
코펜하겐에서 무대극이라는 걸 처음 본 콜그림은 금방 거기에 빠져들어서, 언제고 자기 머릿속에 있는 오래된 신들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려볼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시그리드는 콜그림이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종종 욘의 세상에 있던 ‘호랑가시나무숲hollywood 극단¹’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하늘을 걷는 루카스 성인 이야기도 그 극단이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렸다던가.
“그 극단이 상연하던 연극에 여기 이놈 가지고서 멋들어지게 큰일 벌이는 작품도 꽤 있었다지요.”
콜그림이 어설픈 몸짓으로 그 ‘큰일’ 흉내를 내보였다.
그 옛날 가르다르의 누추한 집에서 겨울밤 보낼 적, 어린 시그리드에게 욘이 나무토막으로 어설프게 만든 소품으로 장난삼아 보여주던 연기. 그것이 몇 년 지나 시그리드를 거쳐 다시 콜그림에게 전해졌으니 더욱 우스꽝스러웠다.
허나 선입견 없이 그 연기를 보는 그린란드 사람들 눈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 호랑가시나무숲 극단은 욘이 살던 곳에서는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심지어 그 극단 배우 하나는 왕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 나름 있어보이는구만. 하기야, 오늘 우리가 벌일 일은 어떻게 끝나든 오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 멋을 조금 챙겨봐도 나쁘진 않겠지.”
그때, 스베인 귀에 뭔가가 느껴졌다. 종일 박명에만 의지해야 하는 동녘정착지의 겨울에 익숙해 있던 그린란드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인기척을 느끼는 데 나름의 재주를 갖추고 있던 것이다.
“왔구만. 그거 숨겨라.”
“예, 대장.”
그사이 스베인은 몸을 일으켜, 피포 스파노를 맞이하러 나갔다.
“뭐 하다 이리 늦었소? 안 오시는 줄 알고 걱정했소.”
알프스 이북은 모조리 야만스러운 족속의 땅이라 여기는 스파노에게, 그린란드라는 세상 끄트머리, 그것도 제멋대로 참된 신앙까지 거부한 족속들은 금수에 가까웠다. 그나마 야만인이라는 표현조차 자제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미 비트코프 언덕에서 그런 망신을 당한 입장이었기에, 어떻게든 프라하 점령의 선봉에 서서 굴욕을 만회해야만 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이곳 성문까지 온 것도, 똥 씹은 표정으로 스베인에게 일일이 말대꾸를 해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네놈이라면 의심하지 않겠느냐? 이미 이 이단자 역도들에게 한두 번 당한 게 아닌데, 당연히 뭔가 함정이 있을 경우에 대비할 수밖에.”
“대비라?”
“그렇다. 그 대비의 일환으로, 너희는 지기스문트 폐하께서 입성하시는 즉시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폐하를 따라 프라하 성으로 향해야 한다.”
“오, 인질이다, 그런 얘기로구만.”
‘야만인치곤 예리하군’ 같은 빈말조차 아깝다는 양, 콧방귀 한 번으로 대꾸를 갈음하는 스파노였다.
유럽의 어지간한 군주들처럼, 지기스문트 또한 자신이 무척 신실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그들의 악덕은 죄악 가득한 지상을 다스리는 권좌에 얽힌 숙명일 뿐, 저들 자신의 영혼이나 양심과는 무관했다.
그러므로 지기스문트에게 신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황금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약속 이면에는 배신의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요, 사람들은 제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가차없이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마련이었다.
이십년 조금 넘는 세월을 제후와 귀족들과 다투며 보낸 지기스문트는, 그 이상의 신뢰는 바라지도 않았고, 또 누군가를 그 이상으로 신뢰하지도 않았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폐하.”
“좋다. 이대로 진입한다.”
간밤에 세운 프라하 진압 계획은 이러하였다.
프라하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독일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블타바 강 서안의 ‘작은 구역Mensi mesto²’과 동안의 ‘옛 구역Stare mesto’, 그리고 옛 구역 바깥으로 확장된 ‘새 구역Nova mesto’.
프라하 성은 이중 ‘작은 구역’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야만인 스베인이 도시 서쪽의 성문을 열면, 그곳으로 빠르게 진입해 우선 블타바 강 위에 놓인 다리⁴를 확보한다.
그리고 후속부대가 다리 너머, 보헤미아 역도들이 거하는 옛 구역과 새 구역을 장악하는 사이, 지기스문트가 친히 이끄는 부대는 프라하 성까지 진격해 이단 수괴 후스를 사로잡는다.
이단자 역도들이 골목을 틀어막고 저항할 경우에 대비해, 시내로 진입하는 기사들은 나무 방벽이나 수레 따위를 금방 허물 수 있는 큼직한 도끼와 망치를 마련했다³. 산발적이건 체계적이건, 저항이 있을 경우에는 곧장 달려들어 진압하면 그만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다들 잘 준비해주었군. 능력 있는 지휘관들의 공이다.”
성문 안으로 차례로 들어가는 군사들의 대열을 바라보던 지기스문트가 주변에 공치사를 돌리자, ‘감사합니다, 폐하!’ 소리가 잇따랐고,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하는 자들도 나왔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그런 주변의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자신 앞에 놓인 것이 함정일 가능성을 다시금 고려하였다.
그리고 자문자답의 끝에는, 그 전 몇 번을 숙고했을 때와 다름없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 활짝 열려 있는 저 성문과 그 안쪽에서 유혹하듯 모습을 드러내는 시가지 전체가 거대한 함정이라 한들, 프라하의 역도들은 곧 쥐덫으로는 사자를 잡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야만인 스베인과 다른 척후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프라하를 탈출한 얀 지슈카는 저의 민병대 대부분을 함께 데려갔다.
설령 그 전부터 후스가 따로 저의 민병대를 꾸리고 있었다 한들, 고작 사나흘 훈련한 게 전부일 오합지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본대가 프라하에 입성하는 틈을 노리고 지슈카가 포위망의 후방을 치려 한다면, 그는 황망히 놀라 달아나는 십자군 대신 기다렸다는 듯 도시 성문을 열고 달려나오는 십자군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오히려 함정이었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보헤미아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할지라도 누구 하나 반발하지 못할 것이요,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가 내려야 했던 무리한 지시들 또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지기스문트의 귀에, 야만인 스베인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리 깐깐하시오? 단검도, 도끼도, 화약통도 모두 넘겨주었잖소? 이거 하나가 얼마나 하는지 아시오?”
“시끄럽다! 이 권총 또한 무기가 아니냐!”
“이 사람 이거, 나중에는 노인네 지팡이도 쇠바늘 박으면 창이 된다면서 빼앗으려 들겠구만! 아니, 보쇼. 화약통도 없고, 불씨도 없는데 이걸로 뭔 짓을 하겠소?
그리고 댁들이 보고 연구할 권총 견본은 진작에 넘겨드렸잖소? 교회의 신을 믿는다는 작자들이 남의 재물을 탐내는 꼬락서니가 참 보기 좋구만.”
옥신각신하는 피포 스파노와 스베인 사이에 지기스문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대로 두게. 저들만 데리고 성으로 향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폐하...”
“이 정도의 관용은 보여줄 수도 있는 법이지. 훗날 오늘의 일이 어찌 기록될지, 그것을 염두에 두게.”
저의 주군이 헛되이 관용을 베풀지 않음을 상기한 스파노는 입을 닫았다.
필시, 저들 그린란드인들의 쓸모가 다하고 대신 그들의 죽음에 효용이 생길 때, 이 일로 트집을 잡아 처형의 명목으로 삼을 심산이리라.
“자, 야만인 이교도여, 길을 안내할지어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으니.”
스베인 또한 그 권총을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기스문트 주변의 그 누구도, 저 권총이 맨 처음 십자군 진영에 다가와 건네준 ‘견본’ 피스톨과 살짝 다르게 생겼다는 점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중천까지 떠오른 태양은 따사로운 봄 햇살로 프라하의 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나 한때 지기스문트의 아버지 카를의 치하에서 번영을 누렸을 이 ‘작은 구역’의 대로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정말로 내분이 있긴 했던 모양이로군.”
수행원들과 경호원, 그리고 야만인 한 무리와 함께 산책하듯 천천히 프라하 안쪽으로 들어가던 지기스문트가 문득 말했다.
이곳은 유복한 독일 상인들과 하급 귀족들이 주로 거하던 구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한때 보금자리로 삼았을 제법 번듯한 건물 곳곳에 급히 도망치거나 약탈한 듯한 흔적이 완연했다.
문이 통째로 뜯겨나간 건물도 제법 있었는데, 흘깃 보이는 안쪽은 하나같이 황폐하여 귀중품들을 모조리 약탈했든, 급히 챙겨서 도망쳤든 한 것 같았다.
거리 곳곳에는 부서진 집기가 즐비했고, 골목 어귀에서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가 십자군이 나타나면 후다닥 사라지는 얼굴이 종종 보였다.
어쩌면 정말로 이 모든 것이 함정이고, 다만 자신의 준비가 생각보다 철저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기스문트는 유쾌한 상상을 잠시 자신에게 허락했다.
곧 그들 앞에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났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다리가 지기스문트의 아버지 카를 4세가 세운 그 대교임을 모두가 알았다.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저것 하나뿐이었으므로⁴.
강 건너편 ‘옛 구역’을 점령할 부대와, ‘새 구역’을 점령한 뒤 얀 지슈카가 기습해올 경우 문을 열고 나가 역습할 부대가 차례로 다리를 건너갔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지기스문트는, 흡족한 표정으로 주변에 말했다.
“이만큼 병력이 진입했으면, 이제 적들이 어떤 간계를 마련해두었다 한들 이 도시의 함락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그렇습니다, 폐하.”
지기스문트 주변에 세워진 사람의 벽을 타고 동조하는 메아리가 울렸다.
(다들 지기스문트를 바라보느라, 그 사람의 벽 너머에 있던 그린란드인들이,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오묘한 표정을 감추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제 성으로 향한다. 독 안에 든 쥐를 잡으러 갈 때다.”
지기스문트는 도시 외곽을 포위할 병력을 충분히 남겨놓고서 프라하에 입성했다.
더구나 프라하 성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들에 대해서는 지기스문트 본인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성을 고쳐 쌓은 카를 4세가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했거니와, 언제고 무능한 형 벤첼을 체포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프라하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된 이들은, 후스를 붙잡는 영광이라도 저들에게 떨어지길 고대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도시의 다른 성문들과 비밀통로 출구 근처를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기스문트도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아마 저 언덕 위에서 이단자 후스는 저에게 닥쳐올 심판에 전전긍긍하고 있거나, 아니면 망집에 가득 차 최후의 순간 구원이 내리리라는 헛된 희망만을 부여잡고 있을 것이다.
프라하 성은 ‘작은 구역’과 그 너머 프라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언덕 주변을 통째로 두른 저 성벽 전체가 ‘프라하 성’이겠지만, 보통은 그 안마당에 세워진 성 비투스 대성당 곁의 성채 겸 왕궁만을 프라하 성이라 불렀다.
언덕을 오르는 도중 종종 뒤돌아 이제 자신의 것이 될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는 여유를 즐기며, 지기스문트는 곧 저의 것이 될 그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성 앞의 광장을 거쳐 대문과 작은 안뜰을 지나자, 성 앞 광장만큼 넓은 안마당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이 비로소 그 웅장한 전모를 드러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대성당들을 본 바 있던 측근들조차 탄성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아직 공사도 다 끝나지 않은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모조리 깨져 있다는 사실에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프라하를 동쪽의 파리로 만들고자 노력한 카렐 4세의 아들 지기스문트 곁이기에 더욱 강렬한 형태로 표출되는 감정이었다.)
미리 성 코앞까지 가서 주변을 정찰한 기사 여럿이 돌아와 고했다.
“폐하, 성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으나, 안쪽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단 수괴 후스는 모습을 드러냈는가?”
“그 또한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창문이 가구로 틀어막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광장 같은 안마당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서, 이단자 후스를 어떻게 하면 가장 멋들어진 방식으로 무릎 꿇릴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남쪽 종탑의 종이 울렸다.
“벌써 정오란 말인가?”
그러나 급히 하늘을 우러러 본 지기스문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 마저 상승을 마치지 않은 태양. (그리고 저의 머리 위를 맴도는 듯한 매 한 마리의 그림자.)
종이 스스로 울리지는 않았을 터. 무언가를 알리는 신호일 것이다.
“하, 결국 함정이었는가? 오히려 잘 되었구나.”
저 종탑에 있는 자와, 성 어딘가에 숨어 있을 후스 모두의 눈앞에서, 함정으로 그들을 이끈답시고 프라하 성문을 활짝 열어준 야만인들을 벌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야만인들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아직 종소리가 다 잦아들지 않았기에, 지기스문트는 고함치듯 명령을 내려야 했다.
아니, 이제 다시 들어보니 미처 잦아들지 않은 종소리가 아니라, 때맞추어 도시 곳곳에서 울리는 화약의 폭음이었다.
아마 끝내 도시에 남은 몇몇 민병대가 최후의 저항을 시작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 머스킷이라는 무기가 결코 ‘마녀의 불꽃’이 아님을 지기스문트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소형 화포에 불과했고, 사거리가 더 길고 갑옷을 더 잘 뚫는다는 점을 제하면 석궁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도시 곳곳을 점령한 기사들 또한 모두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운 없이 첫 기습에 당한 몇몇을 제하면 별다른 사상자도 없이 모든 저항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
곧 야만인 스베인과 그 패거리들이 지기스문트 앞에 나타났다.
저들이 모든 무기를 압수당했다는 것만 믿고서 너무 경비를 허술하게 했던 것은 아닌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그런 생각을 억누르며 지기스문트가 뭔가를 지시하려던 차.
“지기스문트! 항복하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안마당에 울렸다.
“이런 무엄한!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남쪽 종탑⁵입니다!”
그리고 지기스문트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촌음 뒤에 울려온 총성이, 저의 군마가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쓰러졌음을 뒤늦게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폐하를 지켜라!”
“남쪽 종탑! 이단이 저기 있다! 이단을 죽여라!”
그리고 그 사이 묻혀버린 외침.
“앗, 거기 서라! 야만인들을 잡아라! 폐하를 지켜... 으억!”
정신을 겨우 차린 지기스문트의 귀에, 어지럽게 외치는 독일어 사이로 낯선 북방어가 들려왔다.
“그 양반 이름이 뭐라 했더라? 욘 베윈?
“존 웨인이었을 겁니다.”
“뭐, 이름이야 어쨌든, 이만하면 그놈보다 멋지지 않겠느냐?”
“어째 생각만큼 멋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시그리드 아씨 말로는, 존 웨인이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니라 주로 그 존에게 격퇴당하는 싸구려 악당들이 이런 짓을 한다고...”
“시끄럽다.”
야만인 여럿이 그를 부축해 세워주고 있었다. 그것이 순수한 호의에 의한 게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닿아 있다는 것도.
“이봐! 다들 들어라! 네놈들이 이제부터 손 하나 꼼짝한다면, 여기 이놈 머리통에는 구멍이 하나 새로 뚫릴 것이다!”
“거짓말이다! 저 피스톨이라는 무기는 그렇게 작동하는 게 아니야!”
피포 스파노가 외쳤다.
그리고 비웃기라도 하듯, 콜그림이 제 품에서 또 다른 피스톨 한 정을 꺼내 스파노가 탄 말을 쏘았다.
“보통은 그렇지만, 이 권총은 나름 특별하거든.”
딱 이번에 몇 발 쏘고 버릴 각오로 제작한, 후장식 플린트락 피스톨.
서너 발 쏘면 알아서 펑 터지고, 뒤로 새는 가스를 막지 못해 사거리도 형편없이 짧았지만, 지금은 중요치 않은 문제였다.
처음 시그리드가 종탑 위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마를 저격했을 때, 모두가 당황한 틈을 타서 잽싸게 장전을 마친 스베인과 콜그림은 – 종이 탄피에 싸인 탄환은, 품에 고이 숨겨두어도 들통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 그대로 달려들어 지기스문트를 붙잡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댄 상태라면 목표를 놓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석궁수! 석궁수!”
몇 달 만에 또 한 번 총 맞고 낙마하는 불운에 처한 스파노 대신 다른 측근이 외쳤다.
그리고 그렇게 외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그 어깨에서 피가 튀고, 종탑 위에서 한 발 늦은 총성이 들려왔다.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 우리 용병단원들이 지기스문트 폐하를 제가 있는 이곳 종탑 꼭대기로 옮길 것입니다!”
종탑 위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종탑 위에서 폐하와 협상을 마치고, 가급적이면 무사히 폐하를 돌려보내 드릴 것입니다! 그사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면, 독일과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는 왕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사이 스베인은 지기스문트에게 이죽대며 말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고심 끝에 찾은, 폐하와 우리의 이해가 겹치는 부분이었다오. 우리나 폐하나, 사람인 이상 계속 살아있기를 바라기 마련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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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랑가시나무, 보다 정확히는 서양호랑가시나무ilex aquifolium는 유럽 전역에서 문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수목입니다. 종교적 제의에 호랑가시나무를 사용하는 풍습은 로마뿐 아니라 켈트 및 게르만 문화권에서도 폭넓게 존재했고, 기독교가 퍼진 이후에도 크리스마스 트리의 형태로 남게 됩니다.
‘왕으로 선출된 호랑가시나무 극단 배우’란 1981년에 미 대통령으로 당선된 할리우드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을 뜻합니다. 여담으로, 할리우드라는 지명은 19세기 말 그 부지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농장주의 아내 데이다 윌콕스가 붙였다고 전해지는데, 대체 왜 호랑가시나무가 자생하지도 않거니와 기후 특성상 자라기도 어려운 곳에 ‘호랑가시나무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아직도 호사가들 사이의 얘깃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2. ‘프라하 시의 작은 구역’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작은 쪽Mala strana’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구역은,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 외에도 볼거리들이 즐비하여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구역입니다.
카를 4세가 블타바 강의 다리를 정비하고, ‘작은 구역’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프라하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 이 구역만 따로 떼어 ‘성 주변Hradcany’이라고도 부릅니다 – 자연스럽게 ‘작은 쪽’은 강 동안과 달리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변모했습니다. 그 결과 후스파 전쟁 초기에 급진파들과 프라하의 하층민들이 중심이 된 민병대들에게 ‘작은 쪽’은 여러 차례 약탈당하게 되었지요.
3. 얀 지슈카에게 번번이 당한 십자군은, 지슈카의 전투마차 전술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여럿 마련했습니다. 그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제법 효과적이었던 것은, 도끼와 대형 망치를 들고 달려들어 직접 전투마차를 부수거나 전투마차 사이를 잇는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얀 지슈카가 사망한 직후 소집된 제4차 후스파 십자군은 아우시히Aussig 전투에서 이런 방식으로 전투마차 진형을 거의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즈음에는 후스파 역시 도리깨로 무장한 농민 무리 수준을 넘어 제법 강력한 기병까지 운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고작 전투마차 전술을 파훼하는 것만으로 후스파를 패퇴시킬 수는 없게 되었지요. 일례로 아우시히 전투에서도, 기껏 전투마차 대열을 돌파한 십자군은 때맞추어 도착한 후스파 기병대가 후미를 급습하면서 또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4. 전하는 민담에 따르면, 이 카를 대교에 놓인 첫 번째 돌은 다리 착공식에 친히 참석한 카를 4세 본인이, 정확히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에 놓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아직 ‘분’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만큼 이 카를 대교가 프라하 시민들에게 지녔던 중요성과 카를 4세에 대해 보헤미아인들이 지녔던 존경심을 방증하는 민담이라 하겠습니다.
45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1402년에야 완공된 카를 대교는, 이후 근대까지 블타바 강 양측을 잇는 유일한 다리로 기능했습니다. 그때까지 ‘프라하의 다리’나 ‘돌다리’라 불렸던 카를 대교는, 다른 다리들이 놓인 뒤에야 구분을 위해 ‘카를의 다리Karluv Most’라 불리게 되었지요. 45년의 기간에 거쳐 공을 들여 석재로 지은 다리답게, 카를 대교는 격동의 근현대를 거치면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5. 성 비투스 대성당의 부속건물로 현존하고 있는 남쪽 종탑은 1406년 준공되어 작중에 등장하게 된 종탑과는 다른 건물입니다. 1541년 대화재로 종탑은 큰 손상을 입었고, 종 역시 추락해 크게 파손되었지요. 이후 1549년 ‘지크문트Zikmund’라는 이름이 붙은 다른 종이 완성되어, 최신식 시계와 함께 재건된 종탑 위에 올려져 지금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6. 작중 언급된 것처럼, 19세기 중반까지도 대부분의 화약무기가 전장식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발상의 한계가 아닌 기술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대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4세기에 이미 후장식 대포가 등장한 바 있었고,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후장식 화포 중 한 형태는 오스만 투르크에서 포르투갈을 거쳐 명과 조선까지 전해지게 되지요.
하지만 전근대 기술로는 화포 뒤로 장전을 하면서도 완전히 밀폐된 구조를 만들 수 없었기에, 화약 폭발시의 가스가 뒤로 새어 나가면서 화포의 수명과 성능이 크게 감소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근대의 후장식 화약무기는 널리 보급되기는 했지만 그 비중은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