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버티다 (3)
9. 살아서 버티다 Stayin’ Alive (3)
때이른 정오의 종소리와 더불어, 온 프라하에는 포성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유독 죽은 듯한 침묵이 내린 곳이 있었으니, 바로 프라하 성의 안마당이었다.
기독교도 왕이 애꾸눈 신과 망치의 신을 믿는 야만인에게 납치당하는, 오백 년쯤 전에나 있었을 법한 일을 목도하게 된 지기스문트의 신하들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저들의 두 눈을 의심하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중압감 때문은 아니요, 허튼짓을 한다면 지기스문트에 앞서 저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임을, 몇 번 더 남쪽 종탑에서 날아온 경고사격의 영향이 더 컸다.
그렇게 지기스문트는 스베인에게 붙들려 종탑으로 끌려가고, 탑 안쪽에서 기다리던 그린란드 연대 출신 보헤미아 용병들은 귀한 손님이 들어오자마자 종탑 문을 후다닥 걸어잠갔다.
종탑의 계단을 한참 오른 뒤에야 겨우 꼭대기에 닿았다.
한쪽에 수북이 쌓인 라이플과 화약, 탄환. 그리고 그 너머로 총을 겨누고 마당을 감시하는 ‘하얀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이런 비열한 수법으로 내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기스문트가 딴에는 근엄하게 말했다. 만약 숨만 헐떡이고 있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근엄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을 단언이었다.
(매일같이 피요르드 주변을 오가던 스베인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높은 사람이었던 지기스문트에게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일은 제법 낯설고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폐하의 부하들도 그럴까요?”
여전히 저의 ‘궁니르’를 들고서 아래를 감시하던 시그리드는, 개머리판에서 뺨을 떼지 않고서 답했다.
“뭐라고?”
“저기 아래를 보세요. 누구 하나 꼼짝 못하고 마당 한가운데 가만 서 있잖아요.”
만약 지기스문트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모두가 그의 원수를 갚는 시늉이라도 해줄 것이다. 독일왕 자리를 노렸던 그의 혈육, 모라비아 변경백 욥스트부터 시작해서, 지기스문트가 지금껏 일궈놓은 모든 것을 뜯어먹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단자에게 복수를 외치면서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차지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기스문트가 이 괘씸한 야만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던 첫 번째 사실이 바로 이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대면하게 된 ‘하얀 마녀’는 그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폐하께서 만약 여기서 죽게 되신다면 – 저희가 정말 폐하께 해를 끼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가정해보자는 거에요 – 수많은 사람들이 폐하의 원수를 갚겠노라 나서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폐하를 충실히 따라왔던 저 사람들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자들, 얼른 갈아치워야 할 자들로 전락하겠지요.”
그제야 시그리드는 저의 라이플을 스베인에게 넘겨주었다.
“사람에게는 쏘지 말고, 만약 아래쪽에서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면 그 옆의 바닥을 쏘세요.”
“알겠다. 어차피 나는 너만한 명사수도 못 되니까, 사람 맞추려고 해도 어려울 걸.”
콜그림은 재빨리 근처에 놓인 다른 라이플들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여기 스베인이 챙겨온 맥주도 있답니다. 시장하거나 목이 마르시면 드셔도 좋아요.”
시그리드는 스베인이 챙겨온 작은 가죽 부대를 지기스문트에게 건네주었다. 잠깐 사양하려던 지기스문트는, 이런 짓까지 벌인 자들이 굳이 술에 독까지 탈 필요는 없으리라는 점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네 함정이 제법 기상천외했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마녀 시그리드.”
맥주를 얻어마신 지기스문트의 말투가 아주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지기스문트 역시, 어쩔 수 없는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허나 이런 방식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 너와 네 곁의 이단자, 그리고 야만인들이 모종의 함정을 준비했을 가능성까지 대비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네가 잘못을 참회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며 나를 이렇게 억류하고 있는 동안에도, 십자군은 이 타락한 도시 곳곳을 점령해나가고 있느니, 바로 능히 그리할 수 있는 자만을 선별하여 이 도시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분노에 떨며 악다구니를 퍼붓지도, 두려움에 떨며 무엇이든 다 뜻대로 해주겠노라 애걸복걸하지도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철히 판가름하는 지기스문트였다¹.
눈앞의 앳된 여인이, 그 태연함에 조금 놀라는 것을 본 지기스문트는 소소한 만족을 느꼈다. 그 미모만큼이나 순진한 여인은, 세속의 권력자라면 누구나 익히곤 하는 저의 속내를 감추는 기술에는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네 부관 말마따나, 사람인 이상 살기를 바라는 법 아니겠느냐? 내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음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하면 내 화형만은 면하게 해주고, 또 오늘 일도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다. 네가 고집만 꺾는다면, 우리 모두가 신으로부터 받은 목숨을 소중히 간직한 채 오늘의 석양을 맞이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번에는 지기스문트가 놀랄 차례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저희는 협상을 위해 폐하를 여기까지 모셔온 것이니, 당연히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에 이르고서 이 탑에서 멀쩡하게 내려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아직 준비가 다 된 건 아니랍니다. 고작 폐하 한 분 납치한다고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지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시그리드의 시선은, 멀리 성문 위에 어느새 휘날리고 있는 그린란드 연대의 깃발에 닿아 있었다.
멀리 성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곳곳에서 화약의 폭음이 들려오자,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서쪽을 지키던 십자군 기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에 나섰다.
“역시 지기스문트 폐하의 말씀대로였군!”
“가자! 함정을 판 이단들에게 값진 교훈을 심어줄 때가 왔다!”
“저쪽 골목이다! 나, 간더스하임의 알브레히트가 앞장서겠다! 나를 따르라!”
곧 황제로 즉위하게 될 지기스문트에게 저의 이름을 알리기에 이만한 전장이 또 있겠는가? 미리 준비한 도끼와 망치를 앞세우며, 기사들은 기쁘게 골목으로 향했다.
이단들도 나름의 준비를 한 듯, 그 악명 높은 수레로 골목 한쪽을 막고서 버티고 있었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신앙과 정의, 질서의 이름으로!”
기사들은 딴에는 최후의 저항이랍시고, 끝까지 망동으로 일관하는 이단들을 비웃듯 외쳤다.
저들의 의도는 이미 모두 간파되었다. 이미 민병대 대부분은 그 얀 지슈카라는 자를 따라 프라하를 떠났다고 하였다.
도시의 성벽 안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감히 기사와 맞먹으려 하는 어리석은 평민들. 그들보다도 더욱 비천한 프라하 근교의 농민들. 그런 자들로만 이루어진 오합지졸이, 어찌 그들 십자군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단 진영에 저 그룬발트에서 날뛴 용병들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비트코프 언덕과 비셰흐라트 성에서 당한 패배는, 이단의 간교한 술수, 그리고 거기에 찬동한 사악하지만 어쨌든 정예에 가까운 용병들로 인한 것이었을 테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선발대라는 자들은 말이 십자군이지 사실은 이단의 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최근 그 ‘진실’이라는 허무맹랑한 책자가 퍼지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설명이었다.)
“저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신실한 자들이여, 주님의 적을 쳐 죽여라!”
“돌격!”
그렇게 호기롭게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던 맨 앞의 기사들에게, 드디어 무언가가 보였다.
골목을 틀어막은 수레 위에 얹혀 있는 무언가.
“대포?”
비셰흐라트 성이 함락될 때, 그 슈반베르크의 보후슬라프라는 겁쟁이가 적이 ‘무수한 수의 대포’를 가져와 포격을 퍼부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되었다는 변명을 둘러대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포라는 것은, 야전에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쓰거나, 공성전에서 적의 보루를 무너뜨릴 때 쓰는 물건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맨앞에 선 이들의 생각이 거기에 미칠 무렵, 폭음이 울렸다.
포구에서 튀어나온 유리 조각에 난자당하고 자갈에 난타당해, 피멍 든 채로 쓰러지는 기사들은, 차가운 바닥에 자빠질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진실은 승리한다Veritas vincit!”
운 좋게 정신을 겨우 부여잡은 채로 쓰러져 허우적거리던 몇몇 기사들의 귀에는, 수레 뒤편에서 일제히 울리는 전투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수레 너머로 올라오는 쇠대롱. 제멋대로 불을 뿜는 총구.
십자군 대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이미 무너질 대열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갈과 유리 따위를 구겨넣어 쏘는 산탄 사격에, 맨 앞 열이 통째로 휘말렸던 것이다.
그들이 승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리고 그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십 가지는 능히 댈 수 있던 십자군은, 그 믿음이 화약의 힘에 깨어지는 순간 공황에 빠졌다.
고작 사흘 연습한 솜씨로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머스킷 사격, 심지어 그 총마저도 부족해 급히 무기고에서 꺼내온 쇠뇌까지 섞인 시민과 피난민들의 마구잡이 공격이었건만, 이미 그들 앞에서 도끼 들고 나아가던 기사들이 우르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뒷열의 십자군의 전의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제발 명령을!”
“알브레히트 경! 어디 계십니까!”
“알브레히트 경은 맨앞에 계신... 계셨...”
좌우로 어지럽게 흔들리던 십자군 기사들의 시선은, 어느새 뒤로 향했다.
후퇴라는 말을 누구 하나 꺼내지도 않았건만, 하나둘씩 뒷걸음질을 치고, 서넛씩 등을 돌리고, 마침내 돌아왔던 길로 우르르 달려나갔다.
아직 이성을 부여잡고 있던 몇몇은 이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뭔가 수가 나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대다수는 그저, 방금 전 그들 앞을 휩쓸고 지나간 것, 아직 그것을 지칭하는 말조차 프라하 바깥에는 없는 산탄 사격²이 언제 저들 자신에게 향할까 두려워하며 도망칠 뿐.
“하하, 못 지나간다!”
“밀어라! 얼른 밀어!”
하지만 그들 앞에 또 다른 마차 여러 대가 나타나 길을 막자, 후퇴하는 십자군의 발길은 다시금 가로막히고야 말았다.
“항복해라! 싫다면 또 한 번 산탄 맛을 보여주마!”
십자군 대열을 덮친 산탄은, 자갈과 유리조각을 대충 구겨넣은 것에 불과했다. 프라하를 지킬 급조 민병대에게 지급할 총기와 탄환을 만들기도 버겁기도 했고, 정말 쇠구슬까지 넣어 쏘게 되면 지나친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시그리드가 프라하 시의회와 민병대의 강경한 이들을 설득한 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 구해보겠다는 그 뜻을, 산탄 뒤집어쓴 쪽에서는 알 수 없는 노릇. 오히려 죽지 못하고 그저 피범벅으로 쓰러진 이들의 비명과 신음이 거리를 뒤엎었기에, 포위된 십자군들의 사기는 한층 더 꺾이게 되었다.
훗날, 때맞춘 구호 덕에 눈 하나, 귀 하나쯤만 상하고 목숨은 건진 전투의 생존자들은, 이 모든 게 마녀의 흉계였다며 이를 갈게 되었다. 허나 시그리드는 처음부터 보답을 바라고 사람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설령 그런 사정을 바다 건너에서 알게 되었다 한들 딱히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야, 정말 해내고들 있구만.”
스베인이 성문을 열고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이 물밀듯 들어오는 틈을 타, 성벽 주변에 몸을 숨긴 백송고리 용병단원들은 조용히 탄성을 내뱉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기세 좋게 달려드는 십자군의 전투 함성과, 거리 곳곳에서 울리는 포성.
그리고 포성이 지나간 뒤의 비명 소리와 항복하라며 소리 지르는 프라하 시민들의 목소리까지.
온 프라하가 거대한 함정이 되어 십자군을 옭아매고 있었다.
지기스문트와 십자군 지휘관들 모두, 그 덫이 고작해야 쥐덫이리라 예상하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알량한 상식, 그리고 저들의 앎에 대한 과신은 덫의 정체가 맹수 여럿을 거뜬히 잡을 거대한 함정임을 몰라보게끔 만들었다.
고작 사흘만에 그럴듯한 민병대를 새로 육성할 수는 없었다. 허나 총을 쥐어주고 대충 겨냥해 쏘게끔 만드는 정도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만큼 어설픈 훈련을 받았다면, 작정하고 달려드는 십자군 몇몇을 막는 게 전부일 테지만, 이쪽에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화력. 비셰흐라트에서 보후슬라프의 항복을 받아낼 때 썼던 화포로 쏟아붓는 산탄이 있었다.
“다 막지는 못한 것 같은뎁쇼.”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잖으냐.”
몇몇 골목에서는 산탄 사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기도 했고, 포수들의 솜씨가 어설프거나 십자군 지휘관들이 재빨리 부대를 수습하기도 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음을 입증하듯, 저들만 아는 소로小路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민병대원들이 백송고리 용병단원들 눈에 띄었다. 도시에 남아 싸우기로 한 프라하 시민들이, 피난민 출신 민병대원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이 도시가 암만 번화하다지만, 몇 군데만 점령하면 누구도 어디 못 가게 꽁꽁 틀어막을 수 있지. 프라하 토박이들이라면 그런 곳을 콕 짚어내는 건 일도 아닐 게다.”
예컨대, 지금쯤 특별히 화포 여러 문을 동원한 공세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을 블타바 강의 다리 방면이라든가.
그때, 성벽 턱밑 골목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이, 덴마크 사람들! 깃발 올려도 좋소!”
이곳 성벽 근처의 십자군 소부대를 모조리 무력화하든, 오는 길을 물샐틈없이 꽁꽁 틀어막았다는 뜻이었다.
“알겠소! 고생들 했소이다!”
보급관 겸 분견대 임시 지휘관 헤니히는 그렇게 성벽 아래의 민병대에게 치사하고는, 한스 어깨를 툭툭 쳤다. 속히 성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첨탑으로 달려가 그린란드 연대기를 세우라는 뜻이었다.
프라하 성의 남쪽 종탑 꼭대기에 있는 시그리드와 지기스문트, 그리고 성벽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숲속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얀 지슈카에게 모두 잘 보이는 깃발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함정일 가능성에 대비해, 지기스문트는 프라하 외곽을 포위한 부대 태반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프라하 성에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의 출구를 지키고 있는 지기스문트의 직속 부대 몇몇을 제외하면, 이들은 지기스문트와 함께 프라하에 입성하는 영예를 허락받지 못할 만큼 어딘가 결격사유가 있는 무리였다.
지기스문트가 대비한, 지슈카가 급습해올 경우란 이런 것이었다.
프라하가 버티고 있으리라 예상하며, 지슈카의 민병대가 포위망 후방을 덮친다.
그리고 포위망은 우르르 무너지고, 잔뜩 신이 난 민병대는 그대로 성벽 앞까지 달려온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암만 애타게 호출해 보아도, 그들의 동지들이 문을 열어주거나,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사이 프라하 시내를 경유해 다른 쪽 성문으로 나온 십자군 정예부대와 쿠만인 용병들, 그리고 포위망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비대들이 지슈카 민병대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한다.
따라서 포위망을 계속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들은, 그저 기습이 가해지면 놀란 척하며 후퇴하는 것이 맡은바 임무의 전부였다.
“적입니다! 적이 후방에 나타났습니다!”
프라하 남쪽을 지키던 십자군 부대의 지휘관들은, 성벽 위에 수상쩍은 깃발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갸우뚱하고 있던 차 그런 급보를 받아들었다.
“지기스문트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군! 전원, 철수한다! 잊지 마라! 후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술적인 철수다!”
하품이나 하면서 기다리던 군사들은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 어떤 오합지졸 군대도 후퇴, 아니, 전술적 철수는 성심성의껏 수행하기 마련.
블타바 강을 맨몸으로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강 동안에 있던 부대는 북동쪽으로, 서안에 있던 부대는 북서쪽으로 각각 물러났다.
반격은 도시 안쪽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는 정예부대, 그리고 한참 외곽에서 지기스문트의 출동 지시만 기다리고 있을 예비대의 몫이었다.
그렇게 질서정연한 철수를 한참 하던 무렵.
“반격이 늦네?”
십자군 지휘관 한둘은 그런 의문을 품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반격을 가하는 십자군 군세를 통과시키는 대신 굳게 닫혀만 있었고, 척척 다가오는 민병대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야 할 예비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다 지기스문트 폐하의 신묘한 책략이겠지요.”
“그것도 그렇군.”
패주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인 이상, 객기를 부리며 달려들었다가 비트코프 언덕에서 벌어진 추태를 반복하는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비트코프 언덕 전투를 명분삼아 오만 군데서 다 모여든 십자군을 하나로 묶어낸 지기스문트의 수완이 엉뚱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제길, 어디까지 끌어들일 심산인가! 전군, 더 물러난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블타바 강입니다!”
“그러면 강을 건너면 그만이지!³ 놈들이 코앞까지 온 뒤에 황급히 건너는 것보다는 여력이 있는 지금 물러나는 게 낫지 않으냐!”
한편, 프라하 서쪽을 지키던 부대들은 더욱 황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 멍청한 놈들. 멋모르고 성문으로 향하는 꼴 보라지!”
곧 저 어리석은 이단들이, 믿었던 보루 프라하가 십자군의 대의 앞에서 여리고 성 무너지듯 무너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며 어느 기사가 비웃었다.
“성문이 열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성문은 열렸건만, 요격을 위해 힘차게 달려나오는 십자군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외려 기다렸다는 양 자연스럽게 도시로 들어가는 지슈카의 민병대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람?”
“잠깐, 설마...”
난데없이 종소리가 울린 직후 한참 벌어졌던 시끄러운 전투의 소리는 성벽 바깥까지도 잘 전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였고, 지금은 잠잠해져 가끔 멀리서 총성이 한두 번씩 간간이 울릴 뿐이었다.
이 모든 일이 함정일 경우, 그 계략을 역이용해 이단들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폭음이 마구 일어났다가 잦아들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당연히 지기스문트의 계획이 딱 맞아떨어져, 이단들이 제 꾀에 넘어갔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헌데 지금 저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함정을 역이용한다는 계략은 무위로 돌아가고, 그냥 함정에 곧이곧대로 걸어들어간 꼴로 끝나버렸다면?
프라하 시로 들어간 저들 중의 정예부대들이 죄다 몰살을 당했다면?
지기스문트도, 그를 따라갔던 드래곤 기사단 단원들도 누구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하다못해 그들의 명령을 받았다며 뭔가 새로운 지시를 전하는 전령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또 한 번의 시련이 우리에게 닥친 모양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임이 기사의 도리일 터.”
‘프라하 안에 들어간 이들이 전멸한 듯하니, 우리끼리라도 도망쳐서 명을 부지하자’라는 말의 운을 퍽 엄숙하게 떼는 십자군 지휘관이었다.
블타바 강의 다리 서쪽이 점령당하고, ‘작은 구역’ 곳곳의 대로도 통제당해, 그 어떤 지시도 도시 안팎으로 전해질 수 없게 되었다는 진상을 짐작해낸 이는 없었다.
그나마 진상을 파악할 겨를이 있던 블타바 동안의 십자군들은 간헐적으로 민병대에게 반격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지휘계통이 완전히 마비된 지금, 전력을 다해 부딪혀도 못 이길 지슈카의 민병대를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권총을 사용한 인질극만큼이나 이 시대에는 낯설던 시가전.
얀 지슈카가 프라하 시의원들 앞에서, 시그리드가 내놓은 놀라운 지식의 힘을 빌리면 딱 한 번은 더 거둘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던 경이로운 승리가, 그렇게 봄과 더불어 프라하에 찾아오고 있었다.
“폐하! 큰일입니다! 즉시 명령을 내려주십...”
급히 성 비투스 대성당이 있는 프라하 성 안마당으로 뛰쳐들어오던 전령은, 총성이 울리고 저의 발치에 돌조각이 튀자 까무라치기 직전까지 갔다.
“거기, 잘 오셨소! 손 들고 마당 한가운데로 가서 가만 앉아있으쇼! 댁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사정을 알아서 잘 설명해줄 게요!”
지금까지 용케 시내 곳곳의 전투마차 봉쇄선을 뚫고서 전령이 달려올 때마다 라이플 난사로 그 입을 틀어막았던 스베인은, 벌써 약간은 지루해진 듯한 말투로 그렇게 외쳤다.
“콜그림, 장전.”
“예, 예.”
만약 자신이 그 옛날 시그리드에게 비프로스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방인 욘의 오해를 사는 일도, 파울 주교에게 무고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지금처럼 이렇게 라이플 장전만 전담하는 일꾼 신세가 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게 되는 콜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시그리드를 따라다니며 겪은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떠올리곤 그런 생각을 접었다. 막 라이플 장전에 집중하려던 찰나, 콜그림 눈에 또 인영 하나가 들어왔다.
“엇, 저기 또 옵니다.”
“알았다... 엉?”
헌데 그 모습이 어째 익숙했다. 안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하릴없이 종탑만 바라보던 지기스문트의 측근들이, 안마당에 새로 나타난 이의 모습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본 스베인은 그제야 시그리드에게 말했다.
“시그리드야, 우리가 해낸 것 같구나. 지슈카 그이가 안마당에 나타났다.”
“아, 마침내 해냈군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무렵에는 얼추 짐작하게 되었던 지기스문트는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종탑 구석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체념한 흉내만을 내고자 했건만, 어느새 흉내는 사라지고 진짜 낙담만이 가슴을 채웠다. 물론 그러면서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계산하는 것은 그치지 않았지만.
“자, 끝났습니다, 폐하.”
“아직 이 도시에는 신실한 십자군이 가득하다.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이 허세라는 것은 시그리드와 지기스문트 모두 알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모두 구호할 거고요 – 그룬발트에서 벌어진 일의 진상은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요 – 멀쩡히 남아서 도시 곳곳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대로 각개격파를 당하거나, 아니면 제 발로 프라하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끔 할 생각이에요.
자, 이제 내려가시지요. 아무리 저희가 예를 모른다지만, 진지한 협상을 이곳 종탑에서 할 만큼 우악스럽진 않거든요.”
도시의 북동쪽 끝 프라하 대학 교정에 숨어 있던 후스와 시의원들이 곧 이곳 시청으로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시그리드는 주저앉은 지기스문트에게 손을 건네주었다.
차마 전투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여, 그저 프라하 유수幽囚로 알려지게 될 동란이 벌어진 바쁜 하루.
그 정신없는 하루의 끝을 알리는 석양을 맞으며,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에 붙잡힌 신세가 된 왕은 잃을 것 하나 없기에 여기까지 달려온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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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 자신의 권력 확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이 시대의 귀족 가문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후사 생산에 실패한 지기스문트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이룬 모든 것을 숙적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겨준 실패한 군주로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설었고, 체코인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며, 헝가리인들에게는 오스만 투르크의 부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로 기억되었지요.
이후 중세 후기와 근세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붕괴로 국경의 벽을 넘어선 역사 연구가 가능해지게 되면서 지기스문트 역시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는 숱한 실수와 실패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세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강렬한 야망을 지닌 권력자였지요. 본인의 능력과 시대 양측의 한계로 인해 그 야망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룩셈부르크 가문의 혼인동맹 덕에 갓 성인이 되자마자 헝가리 왕위를 물려받은 지기스문트는, 청년기 전체를 헝가리 귀족들과의 암투에 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이나 귀족들에게 억류당하기도 했지요. 작중 역사상 최초로 권총으로 협박당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쥐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이런 소중한(?) 경험 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화약무기 전술을 빠르게 발전시킨 원 역사의 후스파도, 소형 화포인 호우프니체에 산탄을 넣어 쏘는 방식으로 전투마차를 파괴하기 위해 하마하여 근접전을 시도하는 십자군을 막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산탄 사격 – 그리고 한참 뒤에 등장하는 포도탄grapeshot 사격 – 은 밀집한 보병 대열이 포병에게 근접하는 상황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화약무기가 보편화된 이후로는 한동안 거의 쓰이지 않다가 18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종종 쓰이게 됩니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례로는, 179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왕당파 시위대가 파리 시내를 점거하자 포도탄 사격으로 이를 진압해 명성을 얻게 된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3. 근대에 치수가 이루어지기 전만 해도 블타바 강의 유량은 (한국의 강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유동적이었고, 때로는 말에 탄 채로 건널 수 있을 만큼의 깊이까지 얕아지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원 역사의 비트코프 언덕 전투에서 십자군은 언덕 코앞에서 블타바를 도하했고, 정신없이 패주하는 도중에 물이 깊은 쪽으로 들어갔다가 익사한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