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강물 (4)
10. 바빌론의 강물 Rivers of Babylon (4)
프라하의 이단들에 대한 정죄 선고를 철회하고, 그들뿐 아니라 유럽의 어지간한 이단과 이교도들이 모두 신대륙으로 떠나 저들만의 세상을 꾸리는 것을 허용해줄 교황.
만약 요한 23세가 그런 교황이 될 수 없다면, 이 공의회에서 세력을 모아 새로운 교황을 추대하자는 것이, 장 제르송과 시그리드가 피사로 오기 전 피렌체에서 사흘간 논의한 끝에 합의한 작전이었다.
“... 그렇게 일신한 공의회에서, 이단과 이교도를 셋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군주, 그리고 무고한 백성 모두에게 명백한 해를 끼치는, 비단 교회뿐 아니라 세속의 관점에서도 즉시 단죄해야 할 무리. 그들은 지금보다도 더 단호하게 정죄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당장은 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에는 해가 될 수 있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단으로서 배격하되, 만약 스스로 교회의 품을 벗어나 다른 땅으로 가려 한다면 이는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자동적으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의 신대륙 개척 계획을 제르송이 소개한 현안 그대로 승인한다는 것을 뜻했다.
“마지막으로 이단임은 분명하지만, 굳이 기독교 세계 바깥으로 몰아낼 만큼은 아니요 차근차근 대화와 소통으로 개심시킬 수 있는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그들과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면서, 우리 교회의 덕성과 영성으로써 그들을 다시금 우리 품으로 끌어안아야 하겠지요.”
제르송의 이야기가 청산유수처럼 이어진 데는, 그 특유의 말솜씨도 한몫했다. 허나 그보다는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이들이 너무나 지적할 곳이 많아 차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마냥 듣고만 있던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제르송이 마녀를 독대했다가 무슨 몹쓸 주술에라도 걸린 것은 아닌가¹ 의심하는 이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를 가장 오랫동안 알아왔고, 한때는 제자로서, 그리고 지금은 벗으로서 연을 이어가고 있는 다이이 추기경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이러한 일들을 모두 이루려면, 결국 새로운 공의회를 열어야 하겠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새 교황을 선출해야 할 것이고.”
요한 23세를 폐위시키는 것은, 명분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 시절부터 그는 많은 물의를 빚어 왔으니까.
이미 지기스문트의 힘이 한풀 꺾였기에, 요한 23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퇴위를 강제할 힘이 없다는 것 또한 이들 추기경이 논할 바는 아니었다. 그것은 지기스문트와 시그리드가 고민할 문제였으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고 싶은 겐가?”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공의회주의자들 자신의 손으로 기껏 합쳐놓은 교회를 도로 둘로 쪼개버리는 짓이라는 점.
애시당초 그들이 왜 이곳 피사에 모였던가. 지기스문트의 속내를 알면서도 왜 그 하수인 노릇을 해주었는가. 교황 둘을 폐위시키고, 프라하의 이단들을 강경하게 정죄한 까닭은 또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제르송은 단호하게, 저의 옛 스승이자 지금의 벗을 마주 보았다.
“그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지 않기 위해 이런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마녀’ 시그리드와도, 혐오스러운 이단 수괴 후스와도, 아니, 설령 더 극악한 이단 수괴 위클리프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다 할지라도 기꺼이 손을 잡겠습니다.”
이단 수괴 두 사람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경악하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주변 곳곳에서 났다.
“이단은 올바른 구원의 길 대신 외지고 삿된 길을 스스로 택하는 자들,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따라서 너무나 그릇된 자들이오. 그들의 손을 잡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나이 지긋한 기욤 필라스트르 추기경이 근엄하게, 그러나 한 점의 온기도 없이 물었다.
하지만 제르송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다.
“다르기에 그릇된 자들이라.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다름’을 대해온 방식이었지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신앙이란 진리였다.
그러나 그 바깥의 사람들에게 신앙이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삶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궁극적인 답이요,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울타리요, 그들 등을 비수로부터 지켜주는 보증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을 벗어난 자, 울타리 바깥에 있는 자는 어찌 대하든 무관했다. 힘이 있는 자라면 어떤 간계를 써서라도 끌어들여도 좋았다. 힘이 없는 자는 말하는 짐승, 노예로 부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야만인으로 대해도 괜찮았다.
그것을 믿었기에, 다름을 미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같음을 향하는 진심이라 착각했기에, 교회의 개혁을 말하는 이들 중 누구도 그 개혁이 얼마나 시급한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파리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다가오는 말일末日 앞에서 어떻게든 하나로 묶으려 했던 세상에는 빠르게 금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일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도, 시일은 촉박합니다. 이단이 분열을 조장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이단이든, 이교도든, 누군가 나타나 대신 구원을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제르송은 자신이 파리에서 본 것들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제르송을 의심하고, 그들 중 가장 총명하고 진실되었던 사내가 광기로 물들었다고 은연중 한탄하던 이들도,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 앞에 제르송이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놓는 논거 앞에서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금 온 교회를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그때는 우리 대신 이단들이 나타나 대신 교회를 개혁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교회가 하는 모든 개혁은, 고작해야 이단들에게 성급하게 대처하기 위한 움직임, 때늦은 발버둥, 반反종교개혁이라 불리게 되겠지요.”
이미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가 나타났다. 그중 후스는 마녀로 선포된 시그리드의 손을 잡고 왕의 뜻을 꺾어버리는 엄청난 일을 벌였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인쇄술의 힘과 후스의 전례를 본 이단들, 정말 순수하게 자신이야말로 개혁을 이끌어야 한다 믿는, 한없는 선량함으로 한없는 해악을 일으킬 자들이 나오기까지, 어쩌면 수 년, 잘해봐야 수십 년이면 족하리라.
“그러므로 저는 이단의 손을 잡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의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대륙은 우리 교회 모두를 개혁으로 이끌 경종이 되어줄 것입니다.”
정말로 시그리드가 말하는 그 ‘연방’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지,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믿어도 될 사람과 배신하고 노예로 삼아도 될 금수를 분간케 해주던 그 구분을 극복할 수 있을지, 제르송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단 중 몇몇이 그들 곁에 남고, 몇몇은 당당하게 신대륙으로 건너간다면, 그리고 그것을 유럽의 모두가 알게 된다면, 교회의 가장 완고하고 어리석은 성직자조차 깨닫게 되리라.
이제 그들 또한 변해야만 한다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례성사로 삶을 시작해 종부성사로 삶을 마치던 시절, 모두가 교회의 그늘 아래 있었기에 조금 게으르게, 조금 부정하게 신도들을 이끌어도 괜찮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의 교회는, 우리가 알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 교회가 딛고 있던 유럽 땅 또한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주님께서 제게 내려주신 이성으로써, 감히 단언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동하지 않을 때의 교회보다는, 지금 우리가 무언가라도 해보고 난 뒤의 교회가 나을 것이라고요.”
심판의 날을 알리는 천사가 일곱 번째 봉인을 뜯었을 때처럼, 무거운 침묵이 좌중에 내렸다.
그러나 이들 중 그저 눈치만 보면서 시간을 끄는 자는 없었다. 이미 대세가 지기스문트와 공의회주의자들에게서 돌아섰음이 명백한데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면, 그저 시세에 영합하려 공의회주의의 기치 아래 선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들 제 나름대로, 한참 고뇌하고 사색한 끝에. 마침내 다이이 추기경이 정적을 깨뜨렸다.
“주님, 부디 제게 용기와 지혜를... 내 자네에 대한 사사로운 정으로 눈이 가려지지 않았노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차마 자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군그래.”
조심스레 그 뒤를 이어, 제르송과 시그리드의 개혁에 찬동하겠노라는 이들이 손을 들었다.
이대로 지기스문트가 밀려나면서 덩달아 교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한때 세웠던 대의가 무너지는 꼴을 보느니, 무언가 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단자 후스나 마녀 시그리드에 대해 어떤 사견을 가지고 있든, 다들 그런 생각에 하나둘씩 닿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필라스트르가 ‘들어오라’ 나지막하게 말하자, 문 사이로 빼꼼 은발 여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 혹시 이야기가 다 끝나셨는지요?”
프랑스어로 오가던 이야기를 문 너머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시그리드였다.
“오, 무사히 찾아왔구나.”
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머리통의 정체를 깨달은 이들이 저들끼리 수군대는 사이, 제르송이 시그리드에게 아는 체를 했다.
“네, 덕분에요.”
시그리드는 아직도 그 귀를 의심하고 있을 요한 23세와 그 측근들을 뒤로하고, 미리 제르송이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왔다.
“아직 결론이 안 내려지셨다면 조금 더 기다릴게요. 아무래도 바깥 사람들이 있으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시긴 어려울 테니까요.”
제르송은 두 추기경을 필두로 좌중의 공의회주의자들에게 고루 눈길을 돌렸다.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든, 입 벌려 ‘좋소’라는 모양을 만들든 하였다.
“들어와도 좋다. 내 훌륭한 스승님과 선배, 동료들 모두가 우리 계획에 동의하였단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제 그 계획을 어떻게 이룰지를 논해볼 차례겠군요.”
문이 활짝 열리고, 시그리드와 그린란드 사람들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덤으로 지기스문트도.
“엇.”
“아니?”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국왕이며, (아직까지는) 독일왕인 군주가 ‘덤으로 지기스문트’로 취급되는 현실에, 방 안의 모든 성직자들은 앞서 제르송의 제안을 들었을 때에 약간 못 미칠 만큼 당황했다.
그 덕에 성직자들의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던 시그리드는 자연스럽게 방 안에 녹아들 수 있었다. 설령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 마음껏 찬탄할 수 있는 속세 사람들 사이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그런 시그리드보다 지기스문트에게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중간에 마침 폐하께서 머무시는 처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는 길에 데리고 왔어요. 어차피 한배를 탄 사이니까요.”
시그리드가 태연하게 설명하자, 지기스문트를 따라온 통역관은 – 그 눈치가 프랑스어 실력만은 못했던지라 - 시그리드의 엉터리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옮겨주었다.
지기스문트는 너무나 당당히 처소에 들어와 ‘잠시 따라와 주시죠.’ 하는 시그리드에게 그만 끌려나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하필 다른 일정도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프라하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그린란드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데 대한 심리적 저항의 문턱이 낮아진 면도 분명 있을 터였다.
심란한 지기스문트와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의를 가벼운 손뼉 한 번으로 환기한 시그리드가 말했다.
“자, 아직 지기스문트 폐하나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못 들으셨을 테니, 나머지 작전을 이쯤에서 마저 설명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단들의 신대륙 이주를 공인할 것이냐가 관건이었지, 그 다음에 어떻게 교황을 바꾸고 교회 개혁이라는 대의를 어떻게 실천할지는 많은 공의회주의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어떻게’라는 물음에 관심을 먼저 가질 만큼 세속적이고 권모술수에 밝은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끈 떨어진 공의회주의자들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저희가 세운 작전대로라면, 기껏 통합한 교회가 다시 쪼개지는 일 없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대강은 이렇습니다. 우선은 공의회를 길게 끌어주세요².”
신학자에게 장광설을 요청하는 것은, 동녘정착지에서 얼음 구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일이라, 굳이 청할 것도 없이 절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여기까진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 사이에 새로 공의회를 열거나, 새 교황을 선출하거나 할 만한 명분을 쌓아야 하겠군. 허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기스문트가 지적하자, 일리 있는 말이라 여긴 성직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 안의 세력 다툼은 속세의 그것에 비하면 많이 문명적이었다. 툭하면 병장기에 호소하여 수많은 인명으로써 결투재판을 벌이는 속세 영주들과는 달리, 태양 아래서는 신학적 논쟁으로 다투고, 밤의 그늘에서는 황금으로 겨룰 뿐.
(그 부작용으로, 추기경과 대주교들은 속세 군주들에 비해 독살당하는 비율이 조금 더 높았다. 이는 많은 성직자들이 수상쩍게도 자신과 닮은 ‘조카’들 여럿을 두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명분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여기서 요한 23세와 제국 내의 지기스문트 반대파는 한 발 앞서 있었다. 위세 좋게 시그리드와 후스를 단죄하겠다고 나선 것도 공의회주의자들이었고 – 거기에 응해 십자군을 선포한 것은 전 교황 알렉산데르 5세였지만 – 그 십자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이름뿐인 성공을 거둔 것은 지기스문트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제르송이 제안한, 이단과의 타협과 제한적인 공존이라는 발상 역시, 이미 교회 개혁에 뜻을 둔 동지들이라면 모를까 공의회 전체를 움직이긴 부족했다. 아니, 오히려 논박을 당해 그나마 남아 있던 지지까지 잃기 딱 좋았다.
“그러면 명분을 구해오면 그만 아니겠어요?”
“그런 명분을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더냐? 성지라도 수복해 온다면 모를까.”
“실은, 처음 보헤미아로 올 때부터 생각해둔 ‘플랜 B’가 있었거든요.”
이방인 욘이 종종 쓰곤 했던 현대 영어 표현이 중세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옮겨져 많은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교황 특사 이력 덕에 시그리드의 이력과 보헤미아에서 벌였던 일들에 대해 그나마 잘 알고 있던 제르송이 물었다.
“계획 B? 그러니까 이단 수괴, 아니, 얀 후스 교수가 너를 변호해주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이야기니?”
“네, 맞아요. 마침 가진 게 명분뿐인 나라가 있잖아요. 거기서 어떻게 이단 혐의 벗을 방법을 알아볼 작정이었지요. 그때에 비하면 완전히 주변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만요.”
지기스문트는 잠시 그 ‘가진 게 명분뿐인 나라’라는 말이 신성로마제국을 이르는 것인가 싶어 흠칫하고, 이 무렵에는 딱히 그보다 사정이 나을 것도 없는 처지로 전락했던 프랑스 왕국 사람들인 공의회주의자들도 잠시 놀랐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그런 그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허술하고, 정말로 빛깔 좋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있다는 데 모두의 생각이 금방 닿았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말한 ‘명분’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성지보다야 가깝지만... 그래도 먼 길을 떠나야 하겠구나.”
“암만 멀어봤자 그린란드에서 코펜하겐까지 가는 길에 비하면 지척일 걸요.”
시그리드의 ‘글로벌’한 지리 관념을 당찬 농담이라 여긴 이들 여럿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만약 요한 23세처럼 세상에 닳고 닳은 사내가 문밖에서 엿듣고 있었더라면, 기껏 얻은 권세를 놓지 않으려 혈안이 된 공의회주의자들이, 어느새 그들이 한때 이단이요 마녀라 매도했던 바빌론의 탕녀와 한통속이 되었노라며 냉소를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자리에 동석하였더라면, 똑같은 냉소도 조금은 덜해졌을 것이었다. 세상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두를 사랑하지는 않던 이들, 그런 이들의 눈에도, 정말 세상 모두를 사랑하는 것만 같은 앳된 여인에게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였던 것이다.
마녀에 대한 경계, 이 모든 파란의 근원에 대한 분노, 격의 없는 무례에 대한 언짢음을 잠시 내려놓게 될 만큼.
뛰어난 고전학자로서, 어떻게 이 기회에 플라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을 구해보려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 마누일 흐리솔로라스에게 접근한 바 있던 기욤 필라스트르도 거기에 속했다³.
“마침 잘 되었구려. 돌아오자마자 또 떠나야 할 처지에 처한 내 벗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좌우지간 그이에게 이야기하면 쉽게 배편을 구할 수 있을 게요.”
“돌아오자마자 또 떠난다니요?”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그대 때문이라오. 마누일 흐리솔로라스 선생이 이곳 피사에 온 공식적인 이유는 그들이 ‘서방’이나 ‘라틴인’이라 칭하는 우리들 사이의 일을 그 주군인 로마인들의 황제에게 고하기 위함이었소⁴.
헌데 그대가 워낙 엄청난 일을 많이 일으키지 않았소이까? 서한으로 쓰면 조잡한 위조라는 누명을 쓰기 딱 좋은 그런 일들 말이오.”
“그... 칭찬이라고 들어도 괜찮을까요?”
“하하, 마음대로 하시구려. 중한 것은, 오늘 밤에 그대가 교황 성하 앞에서 했을 그 말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기 제르송 박사에게서 들은 제안도, 일전에 프라하에서 벌어진 일만큼이나 대면 보고를 요하는 일이라는 점이지.”
그 ‘프라하에서 벌어진 일’의 당사자였던 지기스문트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이 모임에서 최연장자에 가까웠던 필라스트르 추기경의 침침한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 전에 돌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조만간 또 한 번 피사를 벗어나 베네치아로 가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될 것이오. 그 편에 함께 가면 서로 편하고 좋지 않겠소?”
“아, 정말 그렇겠네요. 감사합니다.”
이단이란 무릇 세상에 대한 뒤틀린 원한만을 품고 있는 악질 종자라 단정해 왔던 이들도, 손녀뻘 되는 시그리드의 미소를 따라 조심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껏 이단이라는 자는 세상에 대한 뒤틀린 원한을 품고 있는 악질이라고만 여겨왔던 이들,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밝고도 순수한 미소였다.
흐리솔로라스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저로 하여금 예순을 넘은 노구를 끌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피사 사이를 몇 번이고 왕복하게끔 만든 당사자가 그런 미소를 지어도 되느냐며 한 소리 할 법한 미소기도 했다.
기껏 열린 공의회를 다른 데로 옮겨서 열든 아예 물갈이를 하든 하고, 겸사겸사 교황까지 갈아치울 수 있는 무지막지한 명분.
그것은 바로 동서 교회의 통합이었다.
제정신 박힌 성직자라면, 피사 공의회를 내버려 두고 새로이 열릴 공의회에서 동서교회 재통합이 선언된다는 소문을 듣고서 즉시 행장을 싸고 싶어질 것이었다. 설령 그 공의회가 피사나 근처의 루카가 아닌, 세계의 끝 그린란드에서 열린다 할지라도.
특히나 그 자리에 참석했을 때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길 만큼 유력한 성직자라면 더욱 그러하리라. 물론 시그리드나 제르송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위치 선정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허나 동서 교회의 통합은 서쪽에서는 아직 ‘그렇게 되면 좋겠다’ 내지는 ‘언제고 그리될 수도 있겠다’ 정도의 영역에 머무는 관념이었다.
반면 동쪽, 제2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어떻던가?
동서교회의 통합이란, 처음 그 소식을 들은 흐리솔로라스가 급히 파발을 보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가장 빠른 배로, 중간에 모레아나 테살로니키 같은 다른 곳에 기착하는 일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 소식을 먼저 부쳐야 할 만큼 중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외적 앞에서, 아니, 외적 앞일수록 더욱 열심히 편을 갈라 싸웠던 ‘로마인’들답게, 당연히 그 편지는 모레아와 테살로니키에서 각각 다른 이들의 손으로 베껴지게 되었다.
자신이 무시무시한 야만인 추장 족제비 로베르와 그 아내 시켈가이타를 피해 달아나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황제라 상상하며⁵ 교육 담당 환관들을 피해 황궁 곳곳을 쏘다니던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황자조차, 곧 주랑 곳곳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로부터 귀동냥으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물론 여섯 살배기 황자로서는, 동서교회 통합이니, 부황 마누일이 흐리솔로라스에게 내렸던 밀명이니, 세계총대주교 에우티미오스 2세의 반발이니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녀 시그리드가 이 도시에 발을 디디면 무언가 재밌는 일, 놀랍고도 즐거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이답게 과자와 말과 모험이 범벅된 그런 상상을 하며 돌아다닐 뿐.
(그리고 그렇게 상상에 빠져 방심한 나머지, 끝내 뒤를 따라온 환관들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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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에 휘말려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도는 신세가 된 장 제르송은, 원 역사에서도 점차 다른 방향의 신학적 접근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기존의 사변적 신학이 불러온, 일반 대중과 교회 사이의 이반 현상을 문제시하고, 보다 직관적이고 당대인들이 체감하는 삶의 고통을 해소해줄 수 있는 신비주의적 접근을 주창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경향은 그가 파리 대학에서 한창 위클리프파를 논박하는 활동을 펼쳤을 때부터 배태되어 있었지만, 그가 떠돌이 신세가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체험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르송은 자신이 시몽 카보슈의 폭동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데 성 요셉의 가호가 있었다고 확신했고, 그를 찬양하는 저작 여럿을 남기기도 했지요.
2. 온갖 논제들을 다루었을뿐 아니라, 후스의 화형이나 요한 23세의 도피행각 등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던 원 역사의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만약 작정하고 공의회를 길게 끌려고 할 것 같으면, 충분히 몇 년쯤은 공의회를 질질 이어갈 수도 있는 셈입니다.
3. 기욤 필라스트르는 원 역사에서도 장 제르송, 피에르 다이이와 더불어 서방교회의 통합에 힘썼던 공의회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경험을 적은 일기장은 지금도 귀중한 사료로서 널리 참고되고 있지요.
또한 그는 신학자인 동시에 인문학자 겸 지리학자이기도 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서적들을 프랑스에 유통시키는 한편 그의 지도를 일부 보충하고 최신화하여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마누일 흐리솔로라스가 콘스탄츠 공의회가 막 열릴 무렵 사망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없었지만, 이러한 필라스트르의 관심사를 생각하면 작중에서 두 사람 사이 인연이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4. 이전 화에 지나가듯 언급된 마누일 흐리솔로라스는, 르네상스 시기 인문학 부흥을 이끌었던 동로마 학자 중 선두주자에 속하는 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랍 세계를 거쳐 번역된 라틴어 서적에 의존하는 게 전부였던 이탈리아 인문학계에 직접 고전 그리스어를 가르침으로써 열렬한 인기를 얻기도 했지요.
그는 학자인 동시에 외교관이었고, 처음 그가 서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학술적 목적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원군 파견을 호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의 외교적 노력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헝가리-프랑스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무산되지만, 그 직후 오스만 투르크가 티무르의 침공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리면서 그 소기의 목적은 절로 달성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이탈리아 도시들을 돌면서 그리스어 고전을 강독하는 동시에, 마누일 2세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지를 주유하며 모종의 외교적 접촉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 개최가 확정되자, 그는 동방정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대표로서 공의회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상당한 고령이었기에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5. 11세기 지중해 세계 곳곳을 들쑤셨던 노르만 족의 풍운아 로베르 기스카르(‘족제비 같은’ 혹은 ‘여우 같은’이라는 뜻의 별명입니다.)는 1081년 젊은 후처 시켈가이타와 함께 동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발칸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이때 침공하는 노르만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친정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황제는 기록적인 대패를 겪고 목숨만 건져 겨우 도망치게 되지요.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그중 하나는 직접 전투에 나서서, 도망치는 노르만 전사들의 귀가 멀 만큼 호통을 치면서 전투를 지휘한 시켈가이타의 활약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시켈가이타는 작중 설정상 시그리드의 모계 조상인 프레이디스와 더불어, 그 활약이 기록된 몇 안 되는 방패처녀기도 하지요.
이러한 패배를 어린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즉 후에 최후의 동로마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딸 안나 콤니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잔뜩 추켜세우는 논조의 역사서를 남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