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44화 (44/116)

바빌론의 강물 (5)

10. 바빌론의 강물 Rivers of Babylon (5)

한때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이라 불렸던, 그리고 주님의 곁으로 가기 전까지는 결코 다시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 교황 요한 23세는 의자에 차분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린란드의 시그리드를 만났을 때 말했던 바는 모두 진실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에 황금으로 살 수 없는 비밀은 없다는 것.

공의회주의자들은 다시금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제르송과 시그리드의 계획을 주변에 이야기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혹한 이들 여럿이 모여들었고, 개중에는 혹한 시늉만 하면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어찌하면 가장 후한 값을 받고 토설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시그리드가 교황을 갈아치우겠노라 공언한 것이 일시의 광기에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음험한 – 요한 23세 입장에서는 – 계획으로써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피사를 넘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밝혔던 둘째 진실. 그가 작정하기만 하면 교회의 힘으로써 시그리드의 신대륙 이주에 거하게 훼방을 놓을 수 있다는 것.

이단에게 굴복한 지기스문트를 탄핵하기 위해서라도 시그리드의 마녀 혐의는 유지되어야 했다. 하물며 당당하게 제 앞에 나타나 그런 무엄한 언사를 내뱉었음에랴.

“지금껏 들려온 바가 모두 사실이라면, 굳이 공식 석상에서 마녀의 증언을 더 들을 것도 없겠소.”

무거운 공기 사이로 차가운 요한 23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결정을 기다리던 측근들,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 여기면서도 그 개혁의 대상이 자신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 이들, 그저 분열과 대립 사이에서 저의 잇속만 챙기고자 하는 이들 등. 모두가 교황을 올려다 보았다.

“물론 형식은 중요하니, 마지막으로 그 마녀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요구하는 그런 구색은 갖춰야 하겠지.

그러나 이틀 전 그 자리에 이 사람과 함께했던 그대들이라면, 그 마녀가 저의 해악과 거짓 가득한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능히 미루어 짐작하리라 믿소.”

그날 저녁 시그리드가 무엇을 말했는지, 요한 23세의 새 측근과 오래된 측근들 모두 공공연히 떠들곤 했다.

처음에는 은근히 방심한 이들도 있었다.

피사 반대편에서 시그리드를 맞이했던 공의회주의자 노인들이, 일그러진 이단 대신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한 여인의 모습을 접하고 경계심을 풀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소문의 마녀가 결코 현실의 범주를 벗어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갸냘픈 여인일 뿐임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경악하게 되었다.

조금 아리땁다는 것을 제하면 평범한 여인에 불과해 보이는 시그리드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세속의 군주나 상인, 교회에 버금가는 이 유럽 땅의 세력자들과 손잡는 대신, 저와 저를 따르는 이단자들, 유럽의 낙오자들과 버려진 자들을 모아 바다 건너에 ‘자유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발상.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교황도 갈아치우겠다는 위협.

그들의 귀에, 그것은 장차 대양 건너편에 거대한 만마전Pandemonium을 건설하겠노라는 말 외에 다른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를 단죄할 것을 다시금 천명하는 칙서를 다시금 발하고자 함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요.”

“성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그릇된 것은 엄준히 꾸짖고, 나머지 양떼에 거짓이 퍼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법이지요.”

호응하는 메아리 사이에서 요한 23세는 근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른바 빈란디아Vinlandia라고도 알려진 바다 건너의 땅은, 아직 교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 우상숭배자와 이교도, 악마의 추종자들로 가득 메워져 있는 땅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온 유럽에 경고해야 할 것이오. 우리는 그 죄악의 땅을 바빌로니아Babylonia라 명명할 것이오. 그 죄악이 사라지기 전 대탕녀 바빌론의 유혹에 넘어가 바빌로니아로 향하는 자 또한 죄악을 거드는 자와 다름없소.

그리고 그 땅을 두고 ‘새로운 시작’이니, ‘좋은 희망’이니 망령된 이름을 퍼뜨리며, 이 대륙의 모든 이단을 모아 아무 간섭 없이 그 신대륙을 삿됨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자, 그리고 그자에게 협력하거나 찬동하는 모든 자는 교회의 적이자 인류의 적이오.”

이미 대탕녀 바빌론이니, 적그리스도니 하는 말은, 아비뇽의 교황과 로마의 교황이 서로 비난하면서 남발된 탓에 그 무게가 너무나 떨어져 있었다.

시그리드와 이단자들의 위협을 제대로 이해하는 몇몇 성직자들은 이 점을 탄식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의 머릿속에서 교회의 권위는 아직 수습 가능할 정도까지만 실추되어 있었고, 따라서 신대륙 개척 계획을 준엄하게 꾸짖는 글은 온 유럽을 진동케 하면서 마녀의 계획을 가로막게 될 것이었으므로.

곧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¹’라 불리게 될 교황 칙서가 곧 온 유럽을 향해 반포되었다.

이 칙서가 자칫하면 그린란드 회사를 후원하는 덴마크까지 걸고 넘어질 것을 우려한 로스킬데 주교 페데르 로데하트²는, 사본을 받아보자마자 급히 궁정으로 달려왔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오?”

그리고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던 중, 느닷없이 나타난 에릭과 맞닥뜨렸다.

“폐, 폐하! 저, 저는 그저...”

그가 아는 에릭의 성품이라면, 보나마나 ‘엄연히 국왕은 나인데, 어찌 마르그레테부터 찾느냐’하는 비꼼이 들려올 법도 했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폭풍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이래 에릭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아직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의 지체 높은 이들은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가 물밑에서 꾸리고 있는 파벌에 몸담고 있는 귀족은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도시의 상인과 장인들, 하급 기사들 등등, 잃을 것보다 얻고자 하는 것이 더 큰 무리들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거소만 로스킬데에서 지척인 코펜하겐에 있을 뿐, 에릭과 그 외의 다른 접점은 거의 없던 로데하트 주교는 그 파벌에 들지 못하였다.

“괜찮소. 괜찮아. 이 ‘포메라니아의 에릭’은 워낙 고집불통이니, 나 대신 마르그레테 폐하께 간언하려는 그 심정을 어찌 모를까.”

그러므로 에릭이 불평하거나 호통치는 대신 얌전히 비꼬면서 주교의 어깨를 다독이자, 주교는 오히려 움찔하였다.

“나 역시 마르그레테 폐하를 뵙고자 하는 참이었소. 그대가 무엇을 가지고 왔든, 내가 대신 전해드리면 그만일 테지.”

“그, 송구하오나...”

“왜, 그 손에 교황 칙서 사본이라도 들려 있소? 요새 그림자 사이에서 유독 그 얘기가 많이 나오던데, 어디 구경이나 해 봅시다.”

주교가 뭔가 대꾸하기도 전에, 번갯불처럼 칙서 사본을 낚아채는 에릭이었다. 빠르게 그 내용을 살핀 에릭은 곧 폭소하였다.

“크하하! 멍청한 놈들! 아주 거하게 우리 시그리드를 도와주는구나!”

“‘멍청한 놈들’이라 하심은...”

“그야 우리의 경애하는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과 그 일파들 아니겠소? 아주 그냥 시그리드의 이름값을 올려주지 못해서 안달이 났구만그래. 장담컨대 빈란드 이주 계획을 홍보하는 데 있어 ‘프라하 3부작’보다도 이 교황칙서가 더 효과적일 게요. 그대들 성직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교회는 민심을 많이 잃었거든.”

주교에게는 어떻게 에릭이 그것을 아는지 물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설령 물어보았다 한들, 시그리드의 뒤를 쫓아, 그리고 그 뒤에 남은 미래 지식의 부스러기를 찾아 그룬발트에서 마리엔부르크까지, 마리엔부르크에서 프라하까지 에릭의 수족들이 샅샅이 모든 단서를 탐문했다는 답을 듣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내가 어머니를 뵈러 온 것도 사실 이 건 때문이었소. 그러니 이 칙서 사본도 내가 전달드리도록 하겠소. 옌스!”

푸른사자 용병단의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 여럿이 에릭의 명에 따라 나타났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로스킬데 주교 예하를 코펜하겐까지 ‘잘’ 모셔다 드리게.”

‘잘’의 뜻이 명료하게 전달된 모양인지, 곧 기사 둘이 주교의 양팔을 붙잡았다.

“아, 그리고 만난 길에 하는 얘기인데, 조만간 코펜하겐 시를 공식 수도로 선포할 생각이오³! 돌아가서 도시를 양도하는 문서나 미리 준비해 두시오!”

버둥대며 끌려나가는 주교의 뒤에 대고 에릭이 외쳤다.

그리고는 후련함을 느끼며 돌아섰다.

여왕의 총신에게 그 영지를 내놓으라 통보하는 것은, 몇 년 전의 에릭이라면 상상만 할 수 있던 일이었으리라. 아니, 실제로도 비슷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곧장 마르그레테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고 주교에게 사과하면서 저의 통보를 철회해야 했겠지만.

그러나 오늘 그는 마르그레테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고, 오늘의 모임이 어떻게 끝나든 로스킬데에는 한 사람의 왕만 남아있게 될 터였다.

곧 복도의 끝에 도달한 에릭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리지도, 시종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에릭, 이 무슨 일이냐?”

지난 이삼 년 사이 부쩍 늙은 마르그레테.

수십 년 동안 세 나라의 완고한 귀족들과 기사단과 한자 동맹,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 심지어 기승을 부리는 해적들까지, 형편없는 국력과 더 형편없는 중앙집권 수준으로 그 모든 것의 균형을 맞추어 왔던 마르그레테였다.

그러나 수십 년간의 노력은 은발 소녀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무너져내리곤 했다.

기사단국은 믿었던 지기스문트마저 힘을 잃어버리면서, 이제라도 한 번 더 전쟁에 운을 걸어보자는 쪽과 요가일라의 보다 너그러운 – 사실 이쪽이 처음부터 줄곧 폴란드의 본의에 가까웠지만 – 협상안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갈려 자중지란에 빠져 있었다.

한자 동맹은 현상유지 그 이상을 바라는 상인들과 그렇지 않은 상인들로 갈려 싸웠다.

그리고 이제는, 마르그레테가 평생 노려왔던 슐레스비히 땅과 그 주변마저도 지기스문트의 지지자와 반대파 사이의 다툼에 휘말려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주변을 물려도 괜찮으실지요.”

“물론이란다.”

그나마 마르그레테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그 은발 소녀가 지나간 이래 에릭이 그 고집을 버리고, 조용히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국무회의에 건성으로 참여하며 엉뚱한 이야기나 늘어놓던 시절은 지났고, 명민하면서도 조용히 모든 것을 관찰하며 마르그레테의 뒤를 잇고자 하는 모습만이 보였다.

간혹 소소한 일탈을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마르그레테에게 먼저 승인을 받았고, 마르그레테는 마지못해 하면서도 ‘이만하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허락해주곤 했다.

그러므로 마르그레테는 에릭이 난데없이 나타나 접견을 청했음에도 딱히 불쾌한 기색 없이 저의 후계자를 맞이하였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에릭이 칙서 사본을 건네주며 말했다. 범상치 않은 문장이 칙서 서두부터 나왔으므로, 마르그레테의 침침한 눈은 금방 휘둥그레졌다.

“피사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우리의 시그리드가 또 한 건 벌였더군요. 지기스문트 폐하를 둘러싼 제국의 내분이 더욱 볼만해질 겁니다.”

동서교회의 통합. 이미 일백 하고도 삼사십년쯤 전 열렸던 제2차 리옹 공의회부터 여러 차례 논의되었던 주제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직까지 분열이 지속되고 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그리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에릭은, 시그리드가 그 ‘도시들 중의 여왕’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 이상 무언가 해괴하고도 경탄스러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기스문트 또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저의 사촌 욥스트와 합스부르크 가문 등 반대파에게 쉽게 패배하지 않을 터였다. 에릭은 당연히 승리가 예상되는 쪽의 편을 들 작정이었으니까.

“끝내 제 손을 잡진 않은 게 영 아쉽기는 합니다. 뭐, 애초에 주어진 난관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면 시그리드가 온 유럽을 시끄럽게 만들 일도 없었겠지만요.”

“잠깐, 지금 무어라 했느냐?”

“제 손이라 했습니다. 이래 봬도 어머니 폐하 모르는 사이에 이것저것 일을 많이 벌여놨거든요.”

광인의 망상은 미래 지식의 단편이라는 디딤돌을 딛고서, 광기의 강물 그 너머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 미래는 아름다웠고,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그리드의 모습만큼 매력적이었다. 에릭으로 하여금 그 성정을 죽이고서, 한동안 충실한 마르그레테의 후계자 시늉을 하게끔 만들기에도 족했다.

에릭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 것이 얼마만의 일이었던가? 새삼스레 마르그레테는 시그리드를 만났던 그날 이후로 에릭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으론 부족합니다.

어차피 시그리드가 지기스문트의 편을 들어준 이상... 아니, 정확하게는 지기스문트가 시그리드의 편으로 끌려왔다 해야겠지요. 좌우지간 그렇게 된 이상 독일 땅의 내분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흐름에 휩쓸릴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선도해 나가야겠지요. 그러니 이제는 두 사람의 왕을 모시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앞으로 달려나가려면 몸은 가볍게 하고, 눈은 정면에 고정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한 사람의 왕이라면... 얘야,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게냐?”

마르그레테는 등에 돋는 소름을 애써 가라앉혔다.

“제가 앞서, 많은 일들을 벌여놓았노라 하지 않았던가요? 코펜하겐 모처에서 말비욤을 시험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곳 로스킬데와 코펜하겐에서 저를 따르는 요인들은 이미 몇 번의 실험을 거쳐 안전이 검증된 방식으로 말비욤을 접종받았지요.

어머니 폐하와 폐하의 측근들은 그렇지 않고요.”

그 말비욤 이야기는 마르그레테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학술적 가설이라고만 여겼건만, 벌써 그것을 이런 용도로 쓴다는 말인가.

탄식과 더불어, 에릭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음모를 실행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이제는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다는 자각이 마르그레테에게 깃들었다.

에릭의 말 한 마디면, 아직도 기근과 내란으로 고통받는 기사단국에서 유행하는 흑사병 ‘독소virus’를 머금은 벼룩이 이 로스킬데 궁정에 던져질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도, 필리파 그 아이도 그렇게 처리하고 싶었지만... 저는 어느새 어머니를 존경하게 되었거든요.”

“존경이라.”

“예,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왜 어머니께서 그토록, 언뜻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무한한 원무를 추셨는지요. 어머니는 그저 기다리셨던 겁니다. 우리 허약한 세 나라가 무언가를 스스로 도모할 힘을 얻을 때까지.

그렇지 않습니까?”

에릭은 이제 알았다. 마르그레테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았음을. 그저 시그리드를 만나기 전의 자신보다 훨씬 현명하고, 훨씬 신중했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 다가올 시대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그렇기에 칼마르 동맹을 형성코자 물밑에서 더러운 짓도 기꺼이 감수했고, 삼국 귀족들을 견제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세력을 곳곳에 꽂아넣으려 하고 있었으며, 균형과 평화를 사랑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덴마크의 영토를 남쪽으로 넓히고자 도모하고 있었다.

“어머니 폐하, 그러니 제안드리겠습니다. 퇴위하십시오. 말뿐인 퇴위 말고, 진짜로 이 로스킬데를 떠나 한적한 수녀원이든, 시골의 장원이든, 어디로든 물러나 주십시오.

제가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지금껏 꿈꾸는 줄도 모르면서 꾸었던 그 꿈을, 제 손으로, 그리고 시그리드의 지식으로 이루어내겠습니다.”

에릭이 그간 준비해온 일들은 그 외에도 여럿 있었다.

마냥 썩히기엔 아까운 흑사병 암살법. 그 내용을 담은 쪽지는 이미 런던의 모 의원에게 넘어가 있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내전을 기폭시키기 위해 머스킷을 넘겨주는 것, 그리고 곧 시작될 전쟁에 덴마크 보병대를 참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웨일스공 헨리에게 에릭이 약속한 항목이었다.

그러니 곧 헨리 4세가 흑사병으로 병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올 것이요, 헨리 5세로 등극할 지금의 웨일스공 헨리는 저의 누이동생 필리파가 억울하게 이혼을 당했다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당해도 쌌다는 성명을 교황청 앞에 부칠 것이었다.

아무래도 ‘급병으로 사망한 왕비’보다는, ‘사악한 국왕에게 억울하게 미움을 받아 쫓겨난 왕비’가 조금 더 귀족들의 동정을 받을 테니까. 그래야 스웨덴 귀족들이 마구잡이로 봉기를 일으킬 테고, 제 발목을 잡았음 직한 놈들에게 죄다 탄환을 박아넣어줄 좋은 명분을 에릭에게 줄 테니까.

그래야만 에릭을 따르는 이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줄 감투가 생길 것이다. 에릭 또한 충성스러운 신하들, 피와 강철, 화염의 힘을 기꺼이 그에게 바칠 이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그레테는 그 모든 일들을 짐작할 힘도, 재주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에릭의 말을 듣고서야, 그간 자신이 해 왔던 모든 것들 뒤에 존재하던 어두운 그림자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평화와 번영, 질서만을 바랐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겁니다. 적이 사라지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요, 귀족 대신 상인의 시대가 열리면 번영이 찾아오겠지요. 질서야, 칼로 세우는 질서든 총으로 세우는 질서든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타이르는 말이 더욱 더 소름을 돋게 만든다는 말인가.

이미 피로함을 느끼던 마르그레테는, 그 사이에도 몇 년은 더 늙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언젠가 시그리드, 저 신대륙 바빌로니아에서 여왕이든 참주든 하고 있을 시그리드 또한 저와 어머니가 옳았음을 깨닫게 되겠지요. 그때까지 제 곁은 비어 있을 테고요...”

지난 몇 년 간 공식 석상에서 자제하느라 꾹 눌러왔던 에릭의 이야기. 그 섬뜩하면서도 천진난만한 확신과 악의로 가득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마르그레테는 언제부턴가 항거할 힘조차 찾을 수 없었다.

프라하 시 전체보다도 적은 인구를 겨우 부양하는 척박한 섬 아이슬란드.

그런 섬에 갑자기 막대한 인구가 유입된 지금,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단국의 혼란이 이어지면서, 맨 처음 시그리드와 요가일라의 비밀 합의에 따라 단치히에서 배를 타고 온 오백여 명 이후로도 이민자 행렬은 꾸준히 이어졌다.

아직 ‘좋은 희망’ 기지 근처에 벌목장 몇 곳을 세운 게 전부인 상황에서는, 그들 모두를 빈란드로 보낼 길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흑사병의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아이슬란드에는 빈집이 적지 않았다. 벌써 삼천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허나 들어가 살 빈집이 있다 하여 텅텅 빈 뱃속을 절로 채울 길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총독께서 여기서 소임을 다해주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레이캬비크에 들린 가르다르 주교 겸 그린란드 회사 사장, 할바르드의 아들 파울이 레이캬비크 주변을 둘러보며 소감을 남겼다.

“별 말씀을요. 이게 모두 주교 예하와 국왕 폐하의 덕 아니겠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이미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지간한 어선들은 그린란드 회사의 깃발을 달고 있었고 – 덴마크 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데 굳이 달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 그런 이들과 함께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아이슬란드 주민 또한 적지 않았다.

더구나 간혹 이 이민자 행렬에 불만을 품는 자들이 있다 한들, 그런 불만을 하나로 모아 그럴듯한 일을 벌일 만한 유력자들은 간간이 전해지는 시그리드의 위명을 듣고서 죄다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박대하였던 은발 소녀가, 어느새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두 사람의 발길은, 레이캬비크 한 구석에 생겨난 잉글랜드인 구역으로 향했다. ‘구역’이라고 부르기엔 레이캬비크 자체가 그렇게까지 촘촘한 도시가 아니었던지라, 그냥 영국인들이 사는 집 몇 채가 들판에 듬성듬성 서 있는 정도였지만.

“하다못해 베르겐 상인들과 유착 관계가 있던 유력자들도, 그 베르겐 상인들이 뒷배로 삼던 한자 동맹이 에릭 폐하의 편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죄다 입을 꾹 닫았지 뭡니까. 하, 얼마나 통쾌하던지!”

그러나 파울의 눈에는 비그푸스 총독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비그푸스는 이 땅에 너무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이 섬의 모든 이들과 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방인들을 적대하는 아이슬란드인들. 아이슬란드인들을 경계하는 독일인들. 바스크인을 질투하는 잉글랜드인들.

“아, 어느새 다 왔군요. 주교 예하, 이 집입니다.”

“고맙소.”

브리스톨 사람 리처드가 매입하여, 지나가다 들리는 잉글랜드인들을 위한 여관처럼 쓰고 있는 롱하우스longhouse였다.

파울 주교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을 메우다시피 하고 있던 잉글랜드인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에게 예의를 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될 만큼 본토에서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역관이 있소?”

“예, 예하. 저입니다. 다만 저는 이 이단들과 딱히 상종하는 사이가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브리스톨 출신의 상인 하나가, ‘돈 때문에 한다’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곳에 모여 파울 주교를 기다리던 이들은 바로 롤라드파Lollardy, 얀 후스에게 영감을 준 원조 이단 수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었던 것이다.

프라하의 얀 후스는 자신과 함께 온 유럽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직접 찾아와서는, 파울을 만나보고자 청한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대는 이 자리에서 비켜주는 게 낫겠구려. 총독, 대신 통역을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예. 제 영어는 좀 부족하긴 합니다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브리스톨 상인이 툴툴대며 나가자, 파울 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여러분은 후스 선생의 연락을 받고 이곳 아이슬란드를 찾아왔다 하였습니다. 그게 참인지요?”

파울의 말을 저들의 신분에 대한 의심으로 받아들였는지, 그중 번듯한 생김새의 학자 하나가 저들의 각양각색인 모습을 옹호하고 나섰다.

“예, 예하. 저희 중 절반 가량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학자들이고, 나머지는 다양한 계층 사람들입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단과 이교도까지 모두 품기로 한 마당에 고작 신분을 따지겠습니까.”

교회의 주교라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 후스의 서한을 받고서 얼추 이 파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 영 이상하여, 다들 저의 귀를 의심하거나 통역하는 비그푸스를 의심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도까지 보여드리겠지만, 이미 우리 회사는 신대륙 동쪽 해안 곳곳에서 농사를 짓기 좋은 땅 여럿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곳에 출신에 따라 나뉘어서 개척촌을 세우는 것이 지금의 계획입니다.

그곳 중 어디에 여러분을 받아들일지는, 여러분 중 이주를 희망하는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따라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비그푸스의 통역이 끝나자, 안도하는 이들 여럿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이것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파울 역시 후스로부터 글을 받아보았다. 보헤미아인들 쪽의 사정이 상세히 적힌 글.

그리고 그 뒤에는 시그리드로부터의 편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자유로운 나라. 이방인 욘의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그들 손으로 만들어나가는 나라.

그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이곳 아이슬란드에서부터도 다양한 출신들 사이에서 갈등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고, ‘좋은 희망’ 주변 기지에서도 원주민들과 조금씩 충돌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파울은 시그리드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미 역경 앞에서 다시는 비겁하게, 죄를 지으며 도망치지 않겠노라 맹세한 파울에게, 그러한 갈등은 극복해나가면 그만인 무언가였으므로.

그렇다면 이제는 그 다음을 생각할 때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오셨다는 분들은, 나중에 따로 저와 얘기를 나누시지요. 함께 논의할 바가 많습니다.”

지금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그린란드 회사와 덴마크 왕국의 협력.

그러나 유럽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건대, 그들 사이가 앞으로도 이렇게 꾸준히 이어지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신대륙에 조금씩 더 많은 개척촌이 생겨날수록, 협력은 더욱 어려워지고, 종국에는 파탄에 이르게 되리라.

결국 시간과의 싸움은 이미 시작된 셈이었고, 파울은 시그리드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 준비를 마쳐둘 심산이었다.

--- *** ---

1. 교황 칙서Papal Bull는 교황이 교회 전체에 보내는 서간문의 형식을 띈 선언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황 칙서에 비해 15세기 무렵의 칙서는 훨씬 세속적이거나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반포되곤 했는데, 중세 교회가 얼마나 속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황 칙서는 본문의 서두에 있는 몇 단어를 제목 비슷하게 취급하여 서로 구분하곤 하는데, 작중 등장한 가공의 칙서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 ‘주여, 일어나소서’는 1520년 6월, 마르틴 루터에게 ‘이단적’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파문을 불사하겠노라는 내용의 위협을 담은 칙서였습니다.

2. 페데르 옌센 로데하트 주교는 마르그레테 1세의 측근으로서, 칼마르 동맹의 형성과 마르그레테의 왕권 강화 정책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칼마르 동맹 헌장 또한 그의 손으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 한참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본디 코펜하겐은 로스킬데 주교가 자신의 영지에 세운 무역항에서 기원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416년 에릭에 의해 왕실 소유로 양도(강제)되었고, 이후  1445년 로스킬데에서 코펜하겐으로의 천도가 공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