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안개 (1)
11. 보랏빛 안개 Purple Haze (1) - 지미 헨드릭스 (1967)
도시들의 여왕이자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의 수도는, 이제는 도시 하나와 몇몇 속령만 남은 채 멸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황제는, ‘왕들의 왕basilues ton basileuonton’이라는 거창한 별칭이 무색하게, 투르크 왕이 부를 때마다 찾아가 고개를 조아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동쪽의 투르크인들은 이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그곳에 루멜리아 - ‘로마의 땅’ - 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쪽의 라틴인들¹이 선심 쓰듯 보내온 ‘십자군’은, 마치 자신들이야말로 세계 최강의 군대라는 양 당당하게 그 루멜리아로 향하더니, 니코폴리스에서 투르크인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한때 그토록 이 도시를 번영케 해주었던 무역은, 이탈리아인들이 흑해 곳곳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돌이킬 수 없이 쇠퇴했다.
그러나 그토록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이교도들은 마치 신의 징벌과도 같은 괴인, 절름발이 티무르 앞에서 무너져내렸다².
연일 몰락만을 두려워하던 중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상황.
“이 사람의 주군이시자 지극히 현명한 군주이신 마누일 폐하께서는, 신의 은총으로 잠시나마 평화와 안정을 되찾은 지금이야말로 서방 교회와의 통합을 이룩할 때라고 판단하셨소.
이 사람이 피사로 오기 전 받든 밀명 또한 그러한 내용이었소. 이 공의회의 동향을 살피고, 만약 여건이 조성된다면 동서교회 통합이라는 안건을 신중을 기해 내밀라는 것이었지.”
피사의 숙소에 들이닥친 그린란드 사람들을 떨떠름하게나마 맞이하는 마누일 흐리솔로라스의 설명이었다.
거의 사백 년간 이어져 온 동서교회 분열을 끝내는 것이 그와 그의 주군 마누일 2세의 목표였으니, 그것을 함께 이루자며 찾아온 수상쩍은 이방인들의 손을 내칠 이유는 없었다.
고작 ‘신대륙’ 개척을 위해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인다는 게 어째 본말전도처럼 들렸기에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마누일 폐하께서는 왜 굳이 그런 임무를 은밀히 내리셨던 건가요? 혹시 선생님의 나라 안에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건가요?”
서방의 어지간한 군주와 성직자들은 쌍수 들어 환영할 동서교회 통합³에 대해 굳이 ‘밀명’을 내렸다는 것은, 서방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안쪽에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뜻일 테다.
그 점을 시그리드가 날카롭게 짚자, 흐리솔로라스는 이 마냥 천진난만해 보이는 여인이 마녀 소리를 들을 만큼 먼 북쪽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웠고, 심지어 그 위세등등한 지기스문트조차 무릎 꿇렸다는 점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잠깐 고심하던 흐리솔로라스는, 장탄식을 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곳 피사의 모든 서방인들 중, 눈앞의 여인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과 한편이 된 공의회주의자들만큼 (비교적) 순수한 의도로 동서 교회 통합을 원하는 이들은 없었다. 제국의 비참한 처지를 고려하면 이만한 우군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정확하게 짚으셨소. 실은 상당히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으로서 함부로 꺼내기에는 영 안타까운 이야기라오.”
동방정교회와 서방 보편교회의 교리해석 차이는 사실 신학적 소양이 없는 이가 보기에는 한없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앙고백을 할 때 ‘또한 성자聖子에게서filoque’라는 구절을 포함하느냐, 삭제하느냐.
영성체에 쓰이는 빵에 효모를 넣느냐, 마느냐.
그러나 언뜻 사소하거나 심지어 실없게 들리는 이러한 논쟁은 실제로는 족히 교회를 둘로 쪼개고, 두 교회가 서로 상종할 수 없는 이단이라 선포할 만한 것이었다.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느냐, 수태고지 당시 성 요셉의 나이는 얼마였느냐 같은 논제들이 신학자들에게는 중요한 논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논쟁을 해소함에 있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지, 그 문제가 가장 컸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서방 교회가 훨씬 세력이 크지 않나요? 서방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당연히 신학적인 문제는 잠시 세속적인 고려에 자리를 내주어도 될 것 같은데요.”
“바로 그것이 마누일 폐하께서 이 사람을 보내신 까닭이오. 허나 여기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소이다. 그중에는 참으로 훌륭하고 고매한 성직자들도 많이 계시오. 그분들의 탁월한 식견이 외부 세계의 정세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투르크인들. 그들이 신의 징벌을 당하고 술탄의 아들들끼리 나뉘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마누일 2세는 지금이야말로 동방 정교회가 그나마 나은 조건으로 서방과의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적기라 판단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거기 동의하지 않았다.
외적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이제 드디어 마음 놓고 내분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오백 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대부터 내려온 로마의 유풍遺風이었으니, 참된 로마의 후예라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였다.
로마인보다는 그 로마를 불태운 야만인들에 혈통상 더 가까웠던 시그리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기도 했다.
이미 내분과 황위 다툼으로 지금처럼 몰락한 제국이었다⁴.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열심히 나라의 미래를 팔아먹었는데도 제국은 어쨌든 망하지 않았고, 도시를 지키는 테오도시오스의 삼중성벽은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불장난을 벌여서 권력을 쟁취해도 괜찮지 않을까?
만약 마누일 2세가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니라, 막 그 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형 안드로니코스 4세가 나라의 미래를 팔아넘겨가며 내전을 벌이던 시절의 황자였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을 것이었다.
계속 아픈 부분에서는 말을 줄이고, 생략하고, 빙빙 돌리는 마누일 흐리솔로라스였지만, 이미 욘에게서 동로마의 멸망에 대해 그럭저럭 전해 들었던 시그리드는 얼추 그런 전후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게 될 곳은 그런 곳이로군요.”
“미안하지만... 그렇소.”
피사를 떠나, 베네치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가게 될 일행 중에는 공의회주의자 성직자나 신학자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엄연히 그들 손으로 뽑은 교황 요한 23세가 버티고 있는 판에, 공의회 바깥에서는 별다른 권위가 없는 그들이 공공연히 동방 교회에 접촉할 수는 없던 것이다.
대신 제르송과 다이이, 필라스트르가 각각 장문의 서한을 건네주었고, 시그리드도 속성으로 동서 교회의 신학적 차이와 그외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공의회주의자들 중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문턱쯤은 밟을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높은 이도 없지 않소. 더구나 로마의 ‘교황’ 대신 공의회를 매개로 하는 교회 통합이라면 우리 정교회 쪽에서도 받아들이기가 훨씬 낫겠지.
허나 그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난관이 적지 않을 것이외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굳이 신학적 논쟁에 휘말릴 것도 없이, 이미 시그리드 자신이 선보인 미래 지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만 모아서 그들에게 지식 몇 가지만 넘겨주면, 족히 통합에 찬성하는 파벌의 힘을 북돋아줄 수 있지 않겠는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복잡하디 복잡하게 꼬인 내부 사정을 말로만 접했던 시그리드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품었다.
이 무렵 프라하에서 찍혀 나온 책들은, 그 맨 마지막에 적힌 인쇄술 비법 덕에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지기스문트에 반대하는, 이른바 ‘피사파’와 그를 지지하는 ‘프라하파’ 사이의 다툼에서 가장 이익을 보는 것은 가장 먼저 출판업에 뛰어든 이들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마냥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다. 기껏 프라하에서 다시 받아온 ‘진실’ 판본을 피사파에게 빼앗기자, 저를 따라준 기사들의 무고함을 입증하고자 아예 인쇄소를 차려버린 슈반베르크의 보후슬라프처럼 벌써 큰돈을 만지게 된 이도 꽤 있었던 것이다.)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 그리고 그린란드 연대의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발목을 잡히는 경우도 생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후다닥 갔다가 후다닥 돌아올 심산으로, 통 크게 그린란드 연대 전체를 대동하고 ‘그 도시⁴’를 다녀올 작정이었던 – 어차피 비용은 지기스문트가 대는 것이었으니까 – 시그리드는, 뱃사람들이 기겁하면서 용선을 거절하자 계획을 수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지기스문트의 팔만 대군조차 와해시킨 그린란드 연대가 고작 수천 병력끼리 투닥거리고 있는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 전선에 나타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열된 투르크인 소왕국과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구도가 딱 장사하기에 적절한 평형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로서는, 그 구도를 깨뜨릴 게 뻔한 그린란드 연대의 동방행에 과도하게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의 협박에 가까운 요청과 단호한 거절이 피사와 베네치아를 오간 뒤, 마침내 (안타깝게도, 지기스문트의 본진 헝가리에서 조금 더 가까웠던) 베네치아가 먼저 뜻을 굽혔다.
그리하여 연대원 중 오백 명 정도만 시그리드와 함께 동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얀 지슈카의 지휘 하에서 지기스문트의 군사와 합류해 피사의 교황을 포함해 다른 이들이 딴짓을 못하도록 감시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시그리드와 엮인 적 있던 기사들은, 애꾸눈 사내는 물론이요 백송고리가 날아다니는 것만 보아도 질겁을 하곤 했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녀오는 사이에 공의회를 질질 끈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꽤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시그리드가 밝혔다는 신대륙 구상을 듣고서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얀 지슈카를 뒤로하고, 그렇게 그린란드 연대의 이제 꽤 유명해진 깃발은 동쪽으로 향해갔다.
석 달 뒤, 배를 타게 되면 비좁은 선실 안의 더 비좁은 새장 안에 있기보다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어머니’ 뒤를 따라다니길 좋아하는 – 그리고 저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무력행사도 불사하는 – 리프의 눈에는 인간들이 다르다넬스 해협이라 부르는 가느다란 바닷물의 띠가 들어왔다.
흑해와 지중해 사이를 잇는 좁다란 바다. 그 흑해 쪽 끄트머리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있었고, 반대편 지중해 쪽에는 투르크 말로는 겔리볼루, ‘로마’ 말로는 갈리폴리Gallipoli라 부르는 항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항구에는 오스만 가문에 충성하는 해군 비슷한 무언가⁴가 있었고, 찰리 베이Cali Bey는 그 지휘관이었다.
갈리폴리의 오스만 해군이 ‘해군 비슷한 무언가’로 끝나버린 것은 신이 내려보낸 재앙, 절름발이 티무르 때문이었다. 그가 (일단은)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무사Musa 첼레비가 루멜리아의 술탄으로 우뚝 서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제대로 된 해군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찰리 베이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낯선 천장이다.’
아니, 천장이 아니라 배의 갑판이었다. 그는 지금 갑판 아래 선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자신은 이 배에서 눈을 뜨게 되었는가?
찰리 베이는 엄습하는 두통을 견뎌내며, 지난 몇 시간의 일을 회상하려 노력하였다.
“아, 일어나셨군요. 어디 크게 다치셨을까봐 깜짝 놀랐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서 본 듯한 은발 여인이 있었다.
그 말을 잽싸게 ‘로마’ 말로 번역해주는 학자풍의 노인.
“아악!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나 노인이 번역을 마치기도 전, 그 은발 여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지난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 떠올랐던 찰리 베이는 결국 신음과 함께 제 머리를 쥐어뜯기에 이르렀다.
그가 차라리 꿈이었기를 바란, 지난 몇 시간 사이의 사정은 이러하였다.
술탄의 자리를 두고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오스만 가문의 내전. 해협 양쪽에 걸친 오스만 집안의 강역 중 서쪽 루멜리아는 이제 무사 첼레비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반면 동쪽 아나톨리아는 메흐메트 첼레비에게 복속되었고, 그간 무사와 메흐메트가 동맹을 맺고서 협공하고 있던 쉴레이만 첼레비는 올 초(1411) 모든 것을 잃고 로마인들에게 망명하다가 객사하였다.
이제는 딱 둘만 남은 상황.
내전으로 많은 것을 잃은 오스만의 후예들에게는, 로마인들처럼 미약한 세력조차도 꽤 큰 우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무사는 쉴레이만을 도왔다는 핑계로 로마인들을 압박해, 그 황제인 마누일에게서 협조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찰리 베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사정이었다. 어쨌든 해군은 그의 손에 있었고, 가장 강한 자로서 정당하게 술탄의 지위에 오른 자에게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었으니까.
막 코스탄티니예,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는 시늉을 하러 출정하던 무사 첼레비로부터 지시가 내려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서방 기독교인들이 동쪽으로 밀사를 보내오고 있다. 그 밀사는 놀랍게도 여인이며, 로마인 학자 마누일 흐리솔로라스와 함께 오고 있다고 한다.
믿을 만한 정보에 따르면 그 밀사는 내 승리에 기여할 획기적인 신무기 제조법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해협을 봉쇄하고, 밀사가 탄 함대가 당도하면 나포하여 신무기 제조법을 알아낸 뒤, 그대로 서쪽으로 돌려보내도록.’
찰리 베이는 그 지시에 따랐다. 몇 시간 전, 해협 초입에 베네치아 상선 세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는 즉시 함대를 거느리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베네치아 배들은 순순히 정선 지시에 응했고, 찰리 베이는 작은 배를 타고서 직접 베네치아 배에 올랐다.
‘지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나의 주군이시자 루멜리아 땅의 술탄이신 무사 폐하에게 포위당해 있을 것이오. 그대들이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한들 도시에는 닿지 못할 터.’
그러고는 약간의 간계를 담아 거짓 제안을 했다.
‘그러니 저 갈리폴리 항에 내려서 잠시 쉬는 것은 어떻겠소. 어쩌면 그사이 포위가 풀릴 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랬더니, 저쪽의 밀사라는 여인이 – 종종 노예시장에 팔려나오는 체르케스나 루스 여인들보다도 하얀 은발이었다 – 당돌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건 곤란한데요.’
‘그대가 어찌 생각하든, 본관으로서는 그대들을 통과시킬 수 없소. 그대들이 포위된 로마인들의 도시에 모종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이번에는 베네치아인 선장이 항의했다.
‘각하, 제가 알기로, 우리 공화국과 각하의 나라는 해협을 지나는 우리 공화국 배를 가로막거나 공격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고, 무사 폐하 역시 이를 재확인해주셨습니다. 이는 조약 위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이 밀사만 갈리폴리에 내려놓고 가시오. 엄연히 내 주군으로부터 받은 명령이란 말이오.’
그러자 서방인들은 저들끼리 뭐라 수군대기 시작했다.
순간 찰리 베이는, 자신이 이 배에서 신의 곁으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덜컥 걱정했다. 술탄의 힘을 아는 서방인들이라면 감히 자신을 함부로 해코지하진 못하겠지만, 이 밀사들은 어째 자신이 아는 그런 서방보다도 더 먼 곳에서 온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필 그때, 지금껏 찰리 베이가 본 누구보다도 거대한 장사가 나타나 여인 곁에 섰으므로 더욱 그 걱정은 심해졌다.
그러나 찰리 베이는, 이 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의 배들과 갈리폴리 항구에 남아 있는 서른 남짓한 전함을 믿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태수Bey님, 정말로 저희를 통과시켜줄 의향이 없으신가요?’
‘다시 반복하지만, 그대들, 그러니까 이 배에 탄 승객들을 절대 해협 너머로 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소이다. 그대들이 순순히 여기 응한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내일 해를 볼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야... 주변을 둘러보시오. 이 해협에서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겠습니다. 정 그렇다면야... 스베인, 부탁할게요.’
‘스베인?’
그렇게 거대한 그림자가 찰리 베이를 덮쳤고, 졸지에 찰리 베이는 붙잡힌 몸이 되었다.
수행원 몇몇이 기지를 발휘해, ‘태수께서 붙잡히셨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덕에 찰리 베이의 함대는 금방 베네치아 상선 앞을 가로막았다.
처음 출동할 때부터 무력을 동원해야 할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각각의 배에는 이쪽으로 넘어와 칼부림을 벌일 병사들이 꽉 차 있었다.
‘하, 이제 알겠느냐! 너희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라도 나를 풀어주고 용서를 빈다면, 그때는 사정 감안하여...’
그러나 찰리 베이의 말을 옮겨주는 이는 없었다.
은발 여인은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곧 선창에서 우르르 병사들이 몰려나왔다. 갑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무기라는 건 고작해야 우스꽝스러운 쇠대롱 하나가 전부인 자들이었다.
이쪽의 기묘한 모습을 보았는지, 찰리 베이의 부하들이 약속된 승리를 예감하고 득의양양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뒤면, 딱히 누구를 살상한다기보다는 그저 견제하기 위해 쏘는 화살 몇 대가 날아올 것이요, 그 다음이면 배와 배가 폭력적으로 접안하는 ‘우지끈’ 소리가 울릴 것이며, 그 다음에는 짧지만 격렬한 육박전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그때 갑자기 그의 귀를 찢는 듯한 천둥 소리가 났고, 그는 그만 혼절하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게요?”
짧은 탄식과 함께 찰리 베이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이 여기 남아 있는 꼴을 보면, 그 싸움에선 패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저희 쪽 사람들이 일제사격하는 소리에 놀라서 기절하셨던 것 같아요. 놀라 넘어지시면서 머리를 부딪히셨고요.”
“일제사격?”
“아, 그러니까 그 쇠대롱이 사실은 작은 대포 같은 거였거든요.”
그것이 바로 무사 첼레비가 말했던 ‘신무기’일 테다.
“태수님 편을 조금 들어드리자면, 혼비백산한 게 태수님만은 아니었어요. 그 일제사격 한 번에 태수님 배들도 모두 놀라서 그대로 달아났거든요. 그 거리에서라면 사람이 그리 많이 다치진 않았을 테니, 어느 쪽 신의 가호든 가호는 맞나봐요.”
찰리 베이는 ‘제독Reis’대신 ‘태수Bey’라는 칭호로 불리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물보다는 뭍에서의 싸움에 더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 덕에 화포라는 물건을 종종 접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까이서, 그토록 많이 한 번에 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만 민망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으리라.
그리고 그나마 육상전을 겪어본 찰리 베이와 달리, 그의 부하들은 이름만 해군인 해적 출신이었으므로 혼비백산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었다.
은발 여인이 손뼉을 ‘짝’ 쳤기에, 찰리 베이는 움찔하며 잡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갈리폴리를 벗어났고, 지금 열심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고 있답니다. 태수님 말씀대로라면 곧 도시 근처에서 무사 님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뭐, 뭘 말씀하시는 것이오?”
때맞추어 저를 붙잡았던 그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찰리 베이는 더욱 위축되었다.
“뭐겠어요. 어쩌다 저희를 가로막게 되었는지, 왜 하필 저희를 나포하게 되었는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다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셈 아닐까. 시그리드라는 이 여인보다는, 여인 뒤편의 거한 허리춤에 매인, 코끼리 머리통도 자를 수 있을 법한 큼직한 도끼로 향하는 저의 눈길을 억지로 돌려세우며 찰리 베이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후... 알겠소.
실은, 도시 안쪽에 우리 무사 폐하와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이 조금 있소. 첩자까지는 아니고, 그냥 공동의 이해를 위해 간혹 소통하는 사이랄까...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들을 통해 얘기가 새어나오지 않았을까 싶소이다.”
구구절절 얘기하는 찰리 베이의 말을 옮겨주면서, 흐리솔로라스는 종종 주석 비슷하게 설명을 첨부하곤 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습격을 둘러싼 전후 사정은 아마 이럴 것이었다.
지금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세력을 꼽자면 얼추 이러했다.
일단은 외부 세력인 이탈리아 상인들을 제외하면, 딱 넷.
황제 마누일과, 동서교회 통합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
총대주교 에우티미우스와, 동서교회 통합이든 마누일의 황제 노릇이든 아무튼 어딘가에 반대하는 세력.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까지 살펴보면,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루멜리아의 술탄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하고 있는 무사 첼레비.
그리고 이왕이면 해협 동서 양쪽의 유일한 술탄이 되기를 바라는, 소아시아의 메흐메트 첼레비.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는, 금방 우호와 적대가 뒤바뀌고, 연대는 배신으로, 배신은 새로운 동맹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니까... 지금껏 지지하던 쉴레이만 첼레비가 몰락하자, 황제 폐하께서는 메흐메트를 지지하게 되셨고...”
“아마 무사 첼레비는 그 뜻을 뒤집기 위한 무력 시위로서 도시를 포위하려 했을 것이오.”
흐리솔로라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총대주교께서 직접 관여하셨는지, 아니면 그 곁의 다른 누군가가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황제 폐하를 뵙고서 교회 통합을 이루는 걸 원치 않는 누군가가 제 얘기를 무사 첼레비에게 누설했고...”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겠지. 후우, 면목이 없소.”
흐리솔로라스의 탄식에는, 나라꼴이 엉망이라는 점과, 그 엉망인 모습을 암만 선량할지언정 어쨌든 야만인인 시그리드 앞에서 보였다는 점 양쪽에 대한 부끄러움이 모두 들어있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어느새 조금은 정을 붙인 흐리솔로라스 앞에서 차마 ‘하하, 엉망이네요.’하면서 넋 나간 웃음을 지을 수는 없던 시그리드가 그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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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멸망 이후까지도 한동안 동로마 제국의 국민들은 스스로 ‘로마인’이라 여겼고, 서방의 유럽인들은 ‘라틴인’ 또는 ‘프랑크인’이라 낮잡아보곤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눈으로 보면, 서유럽인들은 1453년 전까지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불태웠던 – 그보다 한발 앞서 동로마인들이 베네치아인을 학살한 것은 다들 편리하게 잊곤 했습니다 – 앙숙이었고, 제국의 마지막 혈로인 흑해-지중해 무역망을 침탈하는 자들이었으며,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미덥잖은 주제에 동로마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낮잡아보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당대의 역사가 두카스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메흐메트 2세의 군세를 보고 절망하던 시민들의 반응에 관해 이런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락을 직감한 시민 한 무리가, ‘차라리 그리스도와 성모를 섬기는 라틴인들에게 도시가 함락되는 것이 나았을 텐데’라 탄식하자, 그 곁의 다른 무리가 ‘투르크인들의 손에 함락되는 것이 프랑크인들의 손에 함락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동로마 민중과 교회에 있어 최후의 순간까지 서유럽은 이처럼 미덥잖은 존재, 도저히 같은 기독교 문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었고, 베네치아와 제노아 등 동로마와 주로 관계를 맺던 서유럽 세력에게도 동로마는 그저 허울뿐인 제국, 그들의 무역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와 균형을 맞출 때 사용하는 균형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을 때,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로마 제국의 멸망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 있던 고전 문헌의 소실을 더 개탄했다는 것은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져 있던 양측의 사이를 방증하는 또 다른 일화일 것입니다.
2. 네 차례에 걸친 팔레올로고스 내전의 결과로 멸망이 거의 확정된 동로마가 거의 수십 년 넘게 명을 부지할 수 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 덕이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을 제압하며 발칸 반도에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만을 앞두고 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가 직접 이끄는 원정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그 결과 술탄 바예지트 1세와 처자식 모두가 포로 신세가 되었고, 겨우 복속시켰던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계 봉신국들은 모조리 독립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바예지트 1세가 포로 생활 중 사망하면서 그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게 되는데, 작중 시점에서는 그 내전이 거의 끝나가며 최종 결전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1413년 최후의 승자로 우뚝 선 메흐메트 1세가 겨우 혼란을 진압하고, 그 아들 무라트 2세의 대에 차근차근 기반을 다진 뒤 마침내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대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이루어내지요.
3. ‘그 도시(The City, 이 폴리)’는 실제로 동로마와 투르크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부르던 별칭이었습니다. 이 별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이 코스탄티니예로 바뀐 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도 계속 쓰여, 오늘날 ‘이스탄불’의 어원이 됩니다.
4.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요해지 갈리폴리는 1354년, 흑사병과 팔레올로고스 내전, 그리고 대지진으로 황폐화되면서 허무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갑니다. 이후 갈리폴리는 반세기에 걸쳐 발칸 반도로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방면으로 확장해나가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지요.
불운한 명군 바예지트 1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갈리폴리를 해군의 중심지로 삼아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양분하고 있던 동지중해 해상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붙잡혀 사마르칸트로 끌려갈 무렵에는, 40척 규모의 제법 그럴듯한 함대가 갈리폴리에 주둔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후 이어진 혼란과 내전 속에서 이 신생 해군은 금방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1416년 오스만 측 사략선들의 베네치아 무역선 및 식민지 약탈에 항의하고자 방문하던 사절단 함대를 덮친 갈리폴리의 오스만 함대는, 10척 대 32척이라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중 27척이 나포되고 4천 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겪었지요. (반면 베네치아 사절단측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찰리 베이는 이 참패에서 오스만 측 해군을 지휘한 장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