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안개 (3)
11. 보랏빛 안개 Purple Haze (3)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성벽 앞에서, 그 성벽을 절로 무너뜨리기에 족한 발언을 하고 돌아온 무사 첼레비는, 시그리드에게 닿기도 전 그 발언의 저의가 무엇이냐 캐묻는 저의 부하들에게 휩쓸리고야 말았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것은 우리의 대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너무 심하셨습니다!”
아나톨리아 끄트머리의 일개 영주였던 에르투으룰의 아들 오스만. 그가 빠르게 세력을 넓혀 마침내 ‘오스만 집안의 나라’라 불릴 만한 무언가를 이루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가지Ghazi를 칭했기 때문이었다.
가지란, 이슬람의 영역Dar al-Islam을 지키고 넓히기 위해 거룩한 싸움에 나서는 전사. 즉 오스만의 가문에 정당성을 주는 것은 바로 올바른 신앙과 정복 전쟁 (그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짭짤한 전리품)에 있었던 것이다.
“저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잠깐 술수를 부린 것뿐이다! 저들이 정말로 나를 황제로 모신답시고 성문을 열어줄 리도 없지 않느냐!”
그런 판에 개종을 운운했으니, 비단 바다 건너편의 메흐메트와 여타 토후들뿐 아니라 지금의 부하들에게도 꼬투리를 잡히기 딱 좋은 일이었다.
허나 바다 건너편과 달리 이쪽의 부하들은, 좋으나 싫으나 (메흐메트로부터 더 좋은 조건으로 교섭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무사와 함께 가야 하는 사이. 결국 건성으로든 진심으로든 무사의 필사적인 항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 루멜리아에 오래 있다 보니 저놈들도 로마인들의 풍습에 물들었나.”
“고생하셨어요.”
“누구 때문에 하는 고생인데... 휴, 약속이나 지키시오.”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골치가 아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어길 생각까지는 없던 시그리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사의 부하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와 대화를 끊고 보고했다.
“그... 폐하, 성문이 열렸습니다.”
무사는 나갈 것만 같은 정신을 애써 움켜잡았다.
그러나 시련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라는 뜻으로 시그리드와 마누일 흐리솔로라스까지 대동하고서 사절들을 맞이했는데, 각각 평범한 귀족과 사제의 복식을 하고 찾아온 두 사절 중 구면이 있었던 것이다.
사절의 정체에 당황한 무사는 그만, 그 옛날 아버지 바예지트의 가신으로서 부르사에 ‘머물던’ 시절¹의 호칭으로 로마인들의 황제를 부르고야 말았다.
“아니? 어르신께서 왜 여길 다 오셨습니까?”
“폐, 폐하!”
마누일 흐리솔로라스 또한 놀라 까무러치고, 에릭 뒤통수도 후려치고 지기스문트 관자놀이에 권총도 들이대 본 스베인과 그 모든 것을 사주한 마녀 시그리드만 멀뚱멀뚱 서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남의 귀와 입으로 전언을 주고받던 도중 누설되는 바람에 생긴 것 아닌가. 한 번 범한 실수를 또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소. 하물며 다른 것도 아니요 제위가 거론된 마당에.”
그렇다면 그 옆에 따라온 평범한 노사제도 실은 비범한 인물일 공산이 컸다.
좌중의 눈길이 쏠리자 노사제는 ‘흠흠’ 헛기침을 했고, 마누일은 때맞춰 그를 소개해주었다.
“같은 이유로 총대주교도 설득해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소.”
“주님의 종, 에우티미오스요.”
“이렇게 귀한 곳에 누추한 분들이, 아니, 누추한 곳에 귀한 분들이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대 곁의 이방인, 서방에서는 하얀 마녀라 부른다는 그이가 여기 있지 않소. 헝가리 국왕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 무사 그대 곁에 있다면, 이렇게 두 사람만 찾아와도 괜찮을 만큼 나름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을 터.”
즉 시그리드 역시 여차하면 무사를 제압하고 도시로 달아날 준비를 해두었을 테니, 그 준비를 믿고서 안심하고 이렇게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과연 평생 내우외환을 벗삼고 살아왔던 황제다운 판단력에 시그리드는 감탄하고, 그 헝가리 국왕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데 새삼스레 놀란 무사는 고작 그 정도에 감탄하는 시그리드에게 더 놀랐다.
“우선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오.”
마누일의 속뜻은, ‘대체 무슨 하시시hashish를 먹으면 투르크인을 로마의 황제로 추대할 생각을 할 수 있느냐’일 것이었다.
마누일뿐 아니라 에우티미오스에게서도 그런 시선을 받자 무척 억울하게 된 무사는 시그리드를 쳐다보고, 결국 시그리드는 처음부터 모든 곡절을 풀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멀리 그린란드에서부터인데요...”
이교도고 기독교도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치던 동녘정착지. 그들 중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살아서 신대륙으로 건너갈 작정으로, 어떤 군주의 손도 빌리지 않고 낯선 땅을 개척할 힘을 얻고자 그린란드 사람들은 유럽으로 넘어왔다.
이교도 소리에 잠깐 격앙된 티를 낸 에우티미오스 한 사람을 제외하곤 아직까진 다들 잘 따라오는 듯했다.
“그래서 폴란드랑 보헤미아를 거쳤고요, 겸사겸사 지기스문트 폐하와도 어떻게 잘 타협을 했고요, 이제 교회의 동의만 받으면 신대륙 개척을 가로막을 사람은 당분간 없게 되는 셈이랍니다.”
그 마지막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온 교회가 홀라당 넘어갈 만한 거대한 ‘이벤트’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동서교회 통합이었다.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시그리드. 무사와 마누일, 에우티미오스 세 사람은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어어’ 하며 마저 듣다가 종국에는 질려서 차마 말을 못 꺼내게 되었다.
“... 그래서, 공동의 적이 있다면 동서교회 통합에 반대하는 여론도 좀 사그라들지 않을까 해서 소소한 연기를 기획한 것이었답니다. 도시 안에서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지요.”
“허.”
“그, 이제라도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교회 통합에만 찬성해주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당연히 불가한 일이었다.
“서방 공의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소. 허나 ‘로마 총대주교’의 수위권을 벗어나 교회 통합을 달성한다 한들, 교리에 있어 서방 이단의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면 통합의 의미가 없는 셈이오. 우리의 교리를 저들이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저 완고한 이들이 쉽사리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고.
공의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차기 공의회를 통해 차차 견해차를 좁혀나가자는 식으로 결론을 지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는 공허한 결론에 불과할 뿐더러, 언제고 결국 서방 이단들의 논리에 올바른 교회가 잠식당하는 결과로 치닫게 될 것이오.”
눈앞의 여인에게 도시의 문명인들을 상대할 때처럼 은유와 교훈으로 가득한 말투를 썼다가는 언제 엄한 오해를 살지 모른다는 것을 깨우친 에우티미오스는 평이한 어조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면 정말로 여기 무사 폐하를 공동황제로 추대하는 건 어떨까요?”
만약 마누일이 자신의 궁전에서 서방 국가의 사신을 정식으로 맞이할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금방 ‘무엄하다!’ 하는 호통이 돌아왔을 것이었다. 허나 시그리드는 제대로 된 밀사도 아니었고, 이 자리는 그런 겉치레 위엄을 차릴 필요가 없는 자리였으므로, 마누일 또한 에우티미오스와 비슷하게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주었다.
“허울뿐인 공동황제 자리가 될 것이다. 도시의 여론이 벌써부터 그... 유세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부심 높은 – 솔직히 말하면 그것 하나만 남은 - ‘로마인’들이 투르크인 황제를, 선대에 제국에 귀부한 투르크계 귀족도 아니요 진짜 술탄의 아들인 무사를 진심으로 모실 리 없었다.
밤새도록 성벽 안쪽에서 토론을 나누고 있을 지식인들과 성직자, 평민들 모두 여기서는 의견이 일치할 터였다. 그저 그들의 황제 마누일이 독단적으로, 민의를 무시하고 서방 교회와 굴종적인 통합을 강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상징적 존재로서 공동황제 추대를 고려하고 있을 뿐.
야만인에게 껍데기뿐인 제관을 씌워주고, 루멜리아라는 실속과 제국의 명예는 꼼꼼하게 챙기겠다는, 참으로 로마인답게 탐욕스러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이 이토록 영락한 데는, 그런 마음가짐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옛적의 심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을 터였다.
“더구나, 공동황제의 제관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정석이다.”
“아.”
시그리드는 차마 마누일이 이야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이곳까지 오면서 흐리솔로라스에게 들었던 설명으로써 헤아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공동황제의 제관은 마누일의 장남 요안니스의 몫이었다².
물론 제국의 그 어떤 법에도 차기 황제를 미리 공동황제로 선점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숙부와 조카가 제위를 두고 내전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꼭 필요한 조치기도 했다.
루멜리아 확보와 제국의 안보를 위해 공동황제 지위를 무사에게 넘긴다면, 요안니스 – 그리고 그에게 따라붙을 온갖 모리배와 불만 세력들 – 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사의 지위가 정말 허울뿐임을 명백하게 해야 할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공의회를 열어서 교회 통합을 논의해본들 허울뿐일 것이고, 정말 여기 무사 폐하께서 개종까지 하고 공동황제에 오른다 한들 이 역시 허울뿐일 것이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마누일과 에우티미오스가 모두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무사 본인 혹은 그 근처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안락하지만 작은 군막 안의 그 누구도, 자신들이 어느새 이 은발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면 허울 좋은 일을, 엄청나게 크게 벌이면 되는 것 아닐까요?”
오스만 투르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 시그리드는 그 거미줄 바깥에서 뜬금없이 날아온 새 한 마리와 같았다.
거미줄에 이미 얽힌 이들이 떠올릴 수는 있어도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발상을 거리낌없이 꺼내고, 또 다른 이들도 그것을 고려나마 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덕이었다.
“‘엄청나게 크게’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러니까...”
아무리 허울뿐인 행사라 한들, 가장 그럴듯한 허울, 중세 유럽 최대의 스펙타클을 꾸며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내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욘도 말하지 않았던가. 쇼 비즈니스만한 비즈니스도 없다고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베네치아인 거류지는, 단순한 거류지가 아니라 도시 안의 월경지, 작은 베네치아에 가까웠다.
무사 첼레비가 도시를 포위하고, 요즘 유럽 정세 변동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하얀 마녀가 무사의 진영 뒤편에 도착하고, 이윽고 무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그 모든 일들의 전후사정은 상세하게, 일반인들은 알지 못할 내막까지 최대한 담은 채로 다음 배편으로 베네치아의 의사결정기관인 10인회에 보고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무사의 선언 이후 도시는 발칵 뒤집혔고, 그 사이를 틈타 조용히 귀빈으로서 시그리드의 그린란드 연대가 도시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황제 마누일 2세는 자신이 무사와 메흐메트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노라며 나섰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사뿐 아니라 바다 건너의 메흐메트도 선뜻 배를 타고 건너왔다.
총대주교 에우티미오스는 연락이 닿는 모든 정교회 주교들을 소집하였고, 그 명에 따라 모스크바와 키예프, 모레아와 테살로니카 등지에서 성직자들이 모였다.
그 와중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천재적 학자이자 절세의 기인인 게미스토스 플레톤³은 모레아에서 건너와, 이제 그리스도와 무함마드의 시대가 끝나고 온 인류가 단일한 신비 아래서 화합할 날이 올 것이라며 여기저기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지닌바 군사력도, 재력도 형편없고 오직 그 천혜의 입지와 알량한 자부심만 남은 늙은 제국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도중에 누설된 사실의 조각을 기운 끝에 진상을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게 된 베네치아인들은, 그 즉시, 내용의 상세함이고 뭣이고 생략하고서 본국으로 급보를 보냈다.
1412년 봄, 여느 때처럼 갑론을박이 오가던 10인회지만, 오늘은 도제와 10인 위원들 외에도 몇몇 학자들과 선장들까지 증인으로 들어와 색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가장 뛰어난 지리학자들의 계산을 바탕으로 추측해보면, 서쪽 대양 너머에 신대륙이 존재할 가능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저희가 포섭할 수 있던 바스크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린란드인들은 이미 몇백 년 전에 그 신대륙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좋은 희망’이라는 개척지도, 그때의 항로를 따라간 끝에 닿을 수 있었다더군요.”
“하지만 그 땅에 무언가 엄청난 재보가 있었다면 우리 또한 진작에 알고 있었지 않겠습니까?”
“저 시그리드가 그토록 당당하게 우리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보면, 그리고 덴마크의 에릭 왕이 그 천박한 독일 놈들을 모조리 끌어들인 것을 보면, 신대륙에 분명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없지.”
“어쩌면 지리학자들의 계산은 틀렸고, 그들이 발견한 소위 신대륙이란 인도나 카타이Cathay 땅의 반대쪽 끝일지도 모릅니다. 백만의 사나이Il Millione(마르코 폴로)가 말한 그 땅 말입니다.”
“자, 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오. 그 신대륙에 무엇이 있든 우리가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리학자들의 계산에 따른다면, 굳이 그 북쪽의 빙해氷海를 거칠 것도 없이 여기서 서쪽으로만 직행해도 신대륙에 닿을 수 있지 않겠소?
포르투갈과 사라센인들 중 어느 한쪽, 아니, 양쪽 모두의 손을 잡은 다음 그 너머에 거점을 마련하고...”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발칵 열린 것은 그때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의 급보입니다!”
이 10인회에서 오가는 논의의 중요성을 아는 베네치아인이라면, 하찮은 안건을 들고서 급보라며 회의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도제 미켈레 스테노Michele Steno는, 마저 얘기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하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연명으로 교회 통합을 위한 공의회 주최를 추진하고 있답니다. 곧 피사 공의회에도 공식 초대 서한이 닿을 것이라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연다는 말인가?”
황금의 힘을 빌어 집안에서 주교나 추기경 한둘 이상씩은 배출하고 있던 10인회 위원들은, 신학 그 자체에는 문외한일지언정 교회통합에 얽힌 사안들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부디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주십사 탄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 무슨 이상한 짓이란 말인가.
더구나 저들의 본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열겠다는 말은, 곧 교리에 있어서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 그런 공의회라면 설령 서방 성직자들이 찾아간다 한들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대체 무슨 속내란 말인가? 그것만으로는 공의회가 열릴 리 없음을 황제든 총대주교든 모르지 않을 터.”
“그, 그것이... 투르크인의 왕이 공의회가 열리고 신앙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기꺼이 개종하고 저의 땅을 제국에 바치겠노라 공언했답니다. 뜬소문이 아니라, 무사 첼레비 본인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안에 들어와 그렇게 말했다는 확실한 증언이 있습니다.”
“뭐라고?”
“아니,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는 것인가!”
“이보게, 그거 거짓은 아니겠지? 제노아 놈들이 가운데서 농간을 부리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엄숙하고 근엄하게 돈벌이 계책을 논의하는 10인회 회의실이 순식간에 장터처럼 변해버렸다.
“다들 조용히!”
도제 미켈레 스테노가 불편한 다리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통을 친 뒤에야 겨우 흥분이 가라앉게 되었다.
스테노가 팔을 뻗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전해진 편지가 곧 그의 손 위에 올려졌다. 딱 보아도 급히 휘갈긴 듯한 필체.
요지는 이러하였다.
투르크인들의 개종이 아닌, 바예지트의 아들 무사 개인의 개종. 루멜리아와 거의 도시 하나만 남은 동로마의 통합.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오랜 다툼을 매듭짓고, 화해와 공존을 이끌고자, 나 무사는 기꺼이 루멜리아를 제국에 바치겠소.’
‘비록 믿는 바가 다르다지만 우리는 공존할 수 있고, 이는 일찍이 그대의 아버지의 궁정에 수많은 기독교 봉신들이 모였던 데서 입증되었소. 나 마누일은 기꺼이 그대를 공동황제로 임명하겠소.’
누구도 진심이라 믿지 않을 거짓부렁이었지만, 그 거짓부렁이 동서 교회통합을 위한 공의회 개최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 위에서 상연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무사를 배교자라 낙인찍고, 마치 기독교인이 파문을 당하는 것처럼 그를 도외시할 무슬림들조차, 그만큼 엄청난 요식행위 속에서 개종이 이루어진다면 ‘도시 하나를 얻고자 신과 예언자를 저버렸다’라고만 마냥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형제인 메흐메트조차, 동로마로부터 연공을 받고 갈리폴리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공의회 참석에 응했다던가.
그러니 투르크인과 ‘로마인’ 사이의 평화, 종교 간의 공존을 위한 것이라는 그 거창한 명분이 위선에 불과하다 문제삼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개종을 미끼로 공의회를 개최한다.
투르크인들이 어떤 자들인가. 불과 십오 년 전,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칙서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을 니코폴리스에서 완파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왕이 – 물론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 왕관이 둘로 쪼개져 있음을 잘 알았으나, 나머지 유럽은 그렇지 않았다 – 하나된 공의회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공의회주의자들의 승리를 뜻했다.
설령 공의회가 고담준론만 주고받으며 공허하게, 동서 교회의 통합을 말로만 선언하고 끝난다 한들, 투르크 왕의 세례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게 될 것이요, 공의회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스테노의 뒤를 이어 그 서한을 돌려본 이들이 하나같이 탄식하였다.
처음 베네치아 배들을 그 하얀 마녀에게 빌려주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누구 하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때때로 겹치곤 하는 법이지. 그저 중재해줄 사람이 없기에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 말하지 못할 뿐.”
그러나 대체 누가 투르크인과 동로마 제국, 동방 교회와 서방의 공의회주의자 사이에서 중재를 하면서, 그것도 단순히 의견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거창하고도 해괴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겠는가.
기존의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누군가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저 엄청난 일을 터뜨리려는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임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나간 일을 두고 굳이 왈가왈부하며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피사에 전령을 부치시오.”
“무어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이렇게 전해야 하오. 그간 다소간의 무례가 있었을 지도 모르나 이는 본의가 아니었고, 보다 건설적인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고 말이오. 제노아인들보다 무조건 먼저 전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피사 쪽에는, 이번 공의회를 위해 우리 공화국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모든 성직자에게는 운임을 면해줄 것임을 통보하시오. 그들 하나하나가 귀중한 정보원이 되어줄 테니.”
“하면 교황 성하께는...”
“교황 성하? 요한 23세는 이제는 없는 사람과 매한가지요.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과 우리 공화국 사이에 남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즉시 장 제르송 박사와 지기스문트 폐하의 호의를 사야 할 것이오.”
물론 세상에 닳고 닳은 스테노는 이 믿기 어려운 일, 이 공전절후의 사건이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로 끝나리라 예상하지는 않았다.
거창한 명분 뒤에는 아직도 오랜 상흔이 여럿 남아 있었고, 아무리 화해를 시키고 중재를 시킨다 한들 어쩔 수 없이 갈라설 수밖에 없는 원수지간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 어설프리만큼 낙관적인 해결책이 가져올 이익만큼이나, 그 뒤에 남을 분란 또한 일을 벌인 사람들의 몫이었다.
허나 그것이 지금의 베네치아에 무엇이 중하겠는가? 스테노를 포함한 모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해결하지 못할 앙금보다는, 당장 그들이 어떻게든 이 사태 가운데서 이익을 취할 방도를 마련하는 데만 마음을 쏟기로 했다.
1412년 봄 한 철 동안, 아드리아해에서 에게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배편은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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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와 발칸 곳곳에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세력은 여러 반독립적인 봉신들과의 연합으로 형성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오스만의 술탄은 많은 기독교도 봉신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동로마 황제는 그중 제일가는 위치에 있었지요.
1390년 마누일 2세는 조카 요안니스 7세에게 축출당하자 부르사로 도망쳐 잠시 바예지트의 가신으로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소아시아에 남은 마지막 동로마 영토 필라델피아 공략전에서 오스만 편으로 참전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지요. 이때 부르사 궁정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가 바예지트의 아들들 간의 내분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며 제국의 수명을 연장하게끔 해주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2. 원 역사에서 마누일 2세의 장남 요안니스 8세는 장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동황제에 올랐습니다. 그가 1392년생임을 감안하면, 아마 작중 시점에서 1~2년 전후로 제위를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3.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동로마 최후의 대학자로, 100세에 가깝게 장수하며 그리스 고전이 서유럽으로 넘어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그는 원 역사에서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에 동로마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해 플라톤의 저작들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또한 원 역사에서 그는 지금의 펠레폰네소스 반도인 모레아에 머물면서, 동로마를 벗어나 새로운 ‘그리스’ 국가로서 모레아에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지요. 그의 그러한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 독창적인 견해들은 이탈리아로 전해져 르네상스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그의 사상적 면모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더 다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