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안개 (5)
11. 보랏빛 안개 Purple Haze (5)
그날 연회에서 벌어진 대화가 처음에는 암암리에, 그리고 점차 공공연히 퍼져나가는 동안에도 공의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없을 리 없었다.
이 공의회에서 서방의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과 안면을 트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여 있던 마누일 2세의 아들들은 연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을 신대륙으로 보내려는 아버지의 결정을 성토했다.
허나 요안니스와 안드로니코스, 테오도로스 중 그 누구도, 어린 콘스탄티노스 대신 차라리 저를 신대륙으로 보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렇게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했음을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이렇게 하면 훗날 투르크인 공동황제 – 그리고 어쩌면 저들의 아버지까지 – 를 쳐내고 훨씬 영토가 넓어진 제국의 주인이 될 초석을 다질 수 있으리라 믿으며 목소리만 높일 뿐¹.
그 모든 시끄러운 소란에서 불쌍한 아들을 잠깐이나마 떼어놓고자, 황제 마누일과 헬레나 드라가슈 황후는 어린 콘스탄티노스가 틈만 나면 밖으로 쏘다니는 것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어린 황자와 은발 여인,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백송고리는, 도시에 들이닥친 서방인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어땠소? 말 한 마디로 불화의 씨앗을 아주 거하게 심은 내 술수가? 마누일 어르신이 그나마 여기 이 꼬마 황자를 버림패로 쓴다는 명안을 그 자리에서 내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또 한 차례 내전이 터졌을 게요.”
지난번처럼 평복을 하고 나와, 시그리드에게 다가와서는 웃음을 흘리는 메흐메트였다. 옆의 환관에게 눈길을 보내 콘스탄티노스의 두 귀를 막게끔 한 시그리드는, 곧장 메흐메트 코앞까지 바짝 다가가 따져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요?”
“왜 쫓겨날 황자 앞에까지 찾아와 구태여 이런 얘기를 늘어놓냐고? 그야 재밌으니까.”
동녘정착지 기준으로나 평범한 체구지, 이곳 기준으로는 어지간한 사내만큼 키가 큰 시그리드가 정색하며 저를 내려보는데도 메흐메트는 태연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태연한 대꾸 속에서, 시그리드는 세상에 대한 증오나 악의가 아닌 체념을 읽었다.
“조만간 내 영지에서 거하게 반란이 터질 것이오. 내 아우의 개종은 그만한 명분이 되거든.
그대가 넘겨준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로 모조리 진압하고, 그 다음에는 남은 봉신들을 제압하고, 그 봉신들의 잔당을 부추길 여지가 있는 이들까지 쳐부수고, 종국에는 내 모자란 아우 ‘모이시스 1세’를 두고 그 어떤 무슬림도 왈가왈부하지 못하도록 두 성지의 수호자 자리까지 꿰차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아마 다시 바다를 넘어 루멜리아로 진격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번 공의회로 형성된 거대한 연합. 동서방 교회의 통합과 로마인과 투르크인의 연대. 메흐메트는 그것이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판돈을 걸 작정이었다.
언제고 이 도시의 팔레올로고스 사람 중 누군가가, 투르크 공동황제를 모실 수 없다던가, 바다 너머로 쫓겨난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원한을 갚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전을 일으킬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조상들이 그러했듯 어느 한 쪽에서는 기꺼이 바다 건너의 투르크인들을 끌어들이고자 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이미 투르크인 황제를 섬긴 경험이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투르크인이면서 무슬림인 황제를 모시라고 설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저들보다야 내가 낫지 않으냐, (그때쯤이면 다시 분열될) 교회 입장에서도, 서방에 맞서 그대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이라면 이교도 임금이라도 모실 만하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는 솔깃하게 들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메흐메트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 터. 그의 남은 생은 이제 아나톨리아와 그 너머의 적들과 싸우는 데에만 써야 하리라.
“남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야만 할 내가 마지막 재미를 찾는 것까지 두고 뭐라 하면, 글쎄, 참 억울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군.”
마음 같아서는 메흐메트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일 것 같던 시그리드도, 그 체념하는 눈빛 앞에서는 머리에 쏠린 피가 살짝 식는 것을 느꼈다.
이 자리에 스베인이 서 있었다면야,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도 이만하면 족하지 않냐며, 무슬림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할 기회를 주는 셈치고 왼뺨과 오른뺨을 골고루 후려갈겼겠지만.
“뭐, 정 싫다면야 그대나 황자 앞에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지. 그것 말고도 재밌는 일은 꽤 있을 테니까. 예컨대, 이 신대륙 유배에 우리의 마누일 어르신이 없는 살림에 얼마나 많은 지원을 베풀어주실지 같은 것 말이오.”
도시의 전력을 끌어모은다 할지라도 군사 수천을 - 그것도 절반은 용병으로 - 마련하는 것이 전부일 만큼 몰락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런 도시의 힘을 애써 그러모은다면, 한 일백 명 남짓한 개척자들 정도는 겨우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조차 온 도시가 신대륙 개척을 위해 한마음으로 나선다는 전제 하의 일이었다.
공의회의 허울 좋은 통합. 그 허울이 들춰지는 것을 늦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내몰린 콘스탄티노스 황자.
훗날 공의회의 대의가 휴지조각이 되고 다시금 내전의 전운이 드리울 때 트집 잡힐지도 모르는 사안을 위해, 불우한 콘스탄티노스 황자 곁에 설 개척민을 모아줄 귀족이나 성직자는 거의 없을 터였다.
“그 정도인가요?”
시그리드가 반신반의하며 콘스탄티노스 곁의 통역 겸 수행원에게 묻자, 슬프게도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사마르칸트에 억류된 동안 성품 배배 꼬인 메흐메트는 그 비뚤어진 마음을 웃음으로 표출하며 유유자적 사라지고, 그제야 다시 귀가 트인 콘스탄티노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천진난만한 물음을 툭툭 던졌다.
멀찌감치서 생면부지 노인과 함께 척척 걸어오는 그린란드 사람들이 시그리드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어이, 시그리드야, 뭔 일 있었느냐?”
“아, 그게...”
그러나 시그리드가 답하기도 전, 그들과 함께 온 노인이 먼저 우렁차게 인사를 올렸기에 그만 대화의 맥이 끊기고야 말았다.
“오오, 콘스탄티노스 황자 저하! 저하께서 품으신 큰 꿈에 이 노인은 실로 감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리 찾아뵙게 되었은즉, 부디 저의 청을 받아들여 주십사 고개 조아릴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당연히 알아들으리라 믿는 듯, 유창한 라틴어로 시그리드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바로 소문 자자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겠군그래! 반갑네! 미스트라에서 조그만 학당도 운영하고, 겸사겸사 전제군주despot께 이런저런 자문도 드리며 소일하는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일세! 그냥 플레톤이라 부르게나².
자네도 황제 폐하를 뵙게 되거들랑 꼭 이 이름을 기억해주게나! 이 플레톤을 황자님과 함께 바다 건너로 보내주십사, 그리 전해주게!”
시그리드가 ‘죄송한데요, 못 알아들어요’라며 끼어들 때를 찾지 못해 난감해하는 동안에도 플레톤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자, 그러면 왜 내가 신대륙으로 가기를 바라는가? 바로 그곳에 위대한 현인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세울 작정이기 때문이지.
모레아 땅에는 왜 이 침울한 도시와 달리 삶의 활력이 넘치는가? 그곳이 우리 선택받은 민족, 헬라스인들의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스스로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라네.
나는 연일 모레아 사람들에게 외쳤네! 그대들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양손으로 부여잡아라!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인들의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이 일어나라! 허나 안타깝게도 주변 모두는 지독한 근시에, 멀쩡한 이들 눈마저 가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네!
그런 이들에게 짠! 하고서, 신대륙에서 번영하는 새로운 헬라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어떻겠는가? 그제야 그들은 저들의 형편없는 단견에서 벗어나 헬라스인 생득生得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야!”
듣다 못한 통역관이 나서서 그 입을 막으려 들었다.
“어르신, 어르신의 말씀 속에 담긴 지혜를 누가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때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만한 적기가 또 어디 있다고?”
“아, 거 참! 여기 시그리드 양은 라틴어를 모른다고요!”
“그래? 그러면 자네가 번역해주면 되겠군그래. 처음부터 다시 하지. ‘자네가 그 소문 자자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이러지 마시고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이보게, 내가 이래 봬도 마누일 폐하의 은덕을 많이 입은 몸인데, 이 정도 기회는 내게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선생님의 글이 보이는 족족 불태우겠노라 서원한 성직자 분들도 한둘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어지러운 시국에, 제발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그사이 정신 차린 시그리드는 스베인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콜그림한테 물어봐라. 나는 모른다.”
어깨 으쓱하며 콜그림 어깨를 붙잡아 앞으로 내미는 스베인이었다.
“대장! 이러깁니까?”
“왜? 사실은 사실이잖느냐?”
갑자기 이방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롭게 생긴 일자리가 있었으니, 바로 – 미래의 표현을 빌리면 – 관광 가이드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던 그린란드 연대 사람들 또한 그런 가이드들과 함께 시내 구경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이 플레톤의 대중강연을 곁다리로 듣게 된 것이었다.
‘인간의 보편적 이성으로써, 무엇이야말로 진리이며 참된 신앙인지를 능히 분별해낼 수 있는 법이오! 우리는 동서 교회의 통합과 기독교-이슬람 화해를 넘어, 보편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외다!’
‘그 신앙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당연히 우주의 원리 그 자체인 지고의 신과 그 하위 원리인 신들을 이르는 것 아니겠소? 그 신은 곧 원리요, 창조자이자 주재자이니, 우리의 지극히 현명한 조상들은 그 원리로서의 신들에게 각각 이름을 붙였소이다!’
‘신’이 아닌 ‘신들’이라는 표현에, 금방 주변은 발칵 뒤집혔고, 플레톤을 따라 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에서 찾아온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이야기다’라는 되도 않는 변명으로 어떻게든 격앙된 이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예컨대 그중 으뜸인 제우스를 이야기해 봅시다. 옛 헬라스 민중들 사이에는, 신들의 왕이자 번개의 신, 숱한 아들딸과 사생아를 남긴 신이라 알려졌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중 사이에 구전되며 와전되고 퇴색한 것이고, 실제로는 원리 그 자체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이 마땅할 터...’
그 열띤 – 솔직히 말하면 난리통에 가까운 - 강연이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콜그림은 가이드에게 통역을 청했다.
가이드라고 딱히 엄청난 교양이 있는 것은 아닌지라, 강연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진 못하고 ‘번개의 신 제우스’ 대목만 겨우 옮겨주었지만, 그것만 해도 콜그림에게는 충분했다.
‘번개의 신? 와, 토르 아시는구나!’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데 격렬한 기쁨을 느낀 콜그림은, 사실은 번개의 신이 아니라 그 아비인 애꾸눈 신이 주신主神이며, 어차피 그들 모두 곧 닥칠 라그나로크 앞에서는 죄다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을 열심히 떠들었다. (가운데 낀 가이드만 고역이었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천상의 원리 그 자체인 포세이돈과 원리와 물질의 관계 자체인 헤라가 거론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로키의 수많은 괴물 자식들 얘기가 나오는, 듣는 이의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대화가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그린란드 얘기가 나오고, 시그리드 아씨랑 신대륙 얘기가 나오고, 불쌍한 황자님 얘기도 나오고... 그러더니 갑자기 이 노인네가 이럴 때가 아니라며 시그리드 너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닦달을 하지 뭡니까.”
겨우 플레톤을 돌려보낸 콘스탄티노스의 수행원들은 콜그림의 부족한 설명을 보충해주었다.
그 학식은 존경할 만한 이지만, 견해가 이곳 사람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해괴한지라 진작에 모레아로 쫓겨나다시피 했고, 그러다가 이번 공의회 때문에 돌아와서 저 난리를 피우고 있다던가.
그 얘기를 들은 시그리드 뇌리에, 뭔가가 번뜩이며 떠올랐다.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신대륙행을, 이름만 그럴듯한 희생양으로서 유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신대륙 개척으로 만들어낼 방안이었다.
세속적인 일들이 얼추 마무리된 뒤에도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안건은 많이 남아있었다.
아니,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아무 내실 없는 교회 통합에 어떻게 그럴듯한 내용을 가져다 붙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의 문장을 쓰면서도 최대한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많이 붙일 수 있는가?
동방 교회 성직자들은 마지못해, 이런 분야에 있어서는 서방의 사변적인 신학자들이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요새 도시 사람들 모두의 화두로 오르내리고 있는 불우한 콘스탄티노스 황자 이야기를 조용히 주고받으며 내일을 기약하려던 무렵.
“게미스토스, 그 불경스러운 자 소식 들으셨습니까?”
“게미스토스? 그치가 우리 도시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귀를 기울여봤자 괜히 불미스러운 소리만 들려올 듯해 관심을 끊고 있었네.”
“글쎄, 그자가 콘스탄티노스 황자와 함께 빈란디아로 가겠노라 공언했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와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며 저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데요.”
“허 참. 공의회에서 신대륙에 관한 결론이 내려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걸 악용하는 자가 나오다니.”
마음 같아서야 당장 마누일 2세에게 그자의 추방을 청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콘스탄티노스 황자와 함께 신대륙으로 가겠노라며 나선 이가 플레톤 하나뿐인 것은 엄연한 사실.
더구나 이단과 이교도들까지도 신대륙 개척에 나서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공의회의 결론이었으므로, 이제 와서 공의회의 정당성을 훼손시켜가면서까지 플레톤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영 무엇하였다.
“시그리드 그 여인은 무어라 한답니까?”
“아예 황제 폐하를 뵙고서 허락까지 받아온 모양이오. 게미스토스 그 작자 곁에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는데.”
“내가 방금 막 그 거리 지나온 참이오. 아직도 거기 있더이다.”
게미스토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들은 이들이, 삼삼오오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냥 사람만 찾는다고 외치는 게 아니었소. 시그리드 그자가 모은 이단들, 그리고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데리고서 저의 그 이상사회라는 것을 꾸리고자 하니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모이라고 떠들더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몇몇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이것이 예사롭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 참, 큰일입니다.”
엄연히 제국의 황자인 콘스탄티노스 홀로 신대륙으로 가게 할 수는 없으니, 그가 무사히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부 하나쯤 – 그리고 그에 딸린 일꾼 몇몇 – 은 같이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정도가 동방 교회 사람들이 공유하던 암묵적인 의견이었다.
그런데 말 많고 탈 많은 플레톤이 신대륙에 건너가, 그 ‘헬라스’ 타령으로 온통 주변을 뒤집어놓는다 생각하니, 고작 신부 한둘로는 어림도 없다는 결론이 금방 나오고야 말았다.
“서방 교회 사람들도, 이단들뿐 아니라 독일 땅의 빈민들도 많이 신대륙으로 건너가고 있는지라 그 땅에서 신부와 선교사들을 뽑아 바다 건너로 보내려 한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플레톤 그자의 입을 막을 만한 성직자들을 몇 명 더 보내는 게 어떨지요.”
키예프 근처에서 온 주교 하나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 악명은 흑해 너머까지도 전해져 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레아에서 플레톤을 직접 상대해본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범한 신부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가장 먼저 그 언변에 넘어가 ‘태양 만세!’ 같은 이상한 소리나 떠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플레톤을 상대할 만큼 관록과 언변, 학식을 두루 갖춘 이를 보내자니, 그만한 재간을 지닌 이가 이 땅에서의 성직을 포기하고 제 발로 그 미지의 땅에 갈 리 없다는 문제가 생겼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격이로구만.’
누구 하나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개중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통달한 누군가가 – 하도 게미스토스가 플라톤 타령을 하는 바람에 반발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게 되었음은, 신의 곁에 가기 전까진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 제안했다.
“그자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이 있을 듯합니다.”
“그런 방도가 있다면야 우리가 진작 택하지 않았겠소?”
뭔가 비상한 논쟁이 오가고 있음을 깨달은 에우티미오스 2세도 그들 뒤에 나타나 귀를 기울였다.
“아니, 들어보십시오. 그자가 참으로 박식하고 언변도 유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보아야 속인이요, 책상물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하면, 우리가 굳이 그를 언변으로 이기려 할 것도 없이, 신대륙에 독실한 장인들을 여럿 보내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교사, 관료, 석공이나 대장장이, 그리고 그 외 신대륙 개척에 꼭 필요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지위 고하 막론하고 모으는 겁니다.
아무리 게미스토스 그자가 이상사회니 뭐니 떠들어도, 결국 도시를 세우고 길을 내는 것은 일꾼들의 몫이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게미스토스는 기껏 신대륙에 건너가 보았자 말만 요란하고 실제로 하는 것은 없는 퇴물 신세가 될 겁니다.”
“허나 그렇게 모은 장인들이 게미스토스의 요설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소?”
“그러니까 아주 후한 조건으로 개척자들을 모아야지요. 미안해서라도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 좋은 생각이로군. 모레아의 골칫덩이를 물리치고, 동시에 우리 황자께서 삿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예방도 할 수 있겠구려.”
가만 듣던 에우티미오스 2세가 이 임시 회의의 결론을 내리자, 좌중 모두가 그 자리에서 동의를 표했다.
벼랑 끝에서 이제 막 안도하려는 찰나인 도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많은 개척자를 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 재주가 뛰어난 이들만 모은다면 소수 정예로도 게미스토스 한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이, 신대륙에서 ‘로마인들’이라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를 일이 없는 퇴물로 만들 수 있으리라.
“황제 폐하께도 나아가 건의드리도록 하겠소. 그분 또한 우리의 이 제안을 쌍수 벌려 환영하실 터.”
그렇게 황제와 교회의 협력 하에, (은근슬쩍 끼어든 플레톤의 제자 몇몇을 포함해) 물경 이백에 달하는 개척단이 꾸려졌다.
일천 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누적된 지혜. 그중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도시를 꾸리는 것과 관련된 가용한 모든 서적을 베끼고, 베끼기 어려운 것들은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은 개척단.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허울만 좋은 공의회의 대의명분이 무너지는 것을 늦추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아비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신대륙 개척의 대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를 빈란디아의 데스포테스, 전제군주로 임명하노라.”
그렇다고 해서, 출항을 며칠 앞둔 지금, 금지옥엽과 같은 일곱 살 아들에게 이름뿐인 데스포테스 작위를 하사하는 마누일의 눈가에 눈물이 어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를 공동 전제군주, 빈란디아의 데스포이나Despoina(데스포테스의 여성형)로 임명하니, 황자를 도와 그 땅에 질서와 번영을 이룩하도록 할지어다.”
이 역시 이름만 거창한 직위임을 잘 아는 시그리드였다. 그러나 마누일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받아들일 뿐.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의식을 준비하였건만, 이미 공의회를 준비하느라 가용한 재정을 소진하였던지라 환송 연회는 조촐하였다.
“미안합니다, 폐하.”
마누일의 곁에 다가간 시그리드의 첫 마디였다.
“저만 아니었더라면...”
“그만.”
마누일이 점잖게 시그리드의 말을 끊었다.
“그대는 최선을 다했소. 그대 덕에 지난 몇 달간, 내 평생을 바쳐도 이루지 못할 엄청난 성과를 이룩하게 되었으니, 어찌 불평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야말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오.”
이미 마음은 정리했다. 그가 이 은발 여인 덕에 지난 몇 달 사이 얻은 것에 비교하면, 여인으로 인해 잃은 것은 무시할 만큼 적었다.
군사적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을 루멜리아. 그 땅에 이미 뿌리를 내린 투르크인들과 공존할 가능성. 형편없이 쪼그라든 나라를 다시금 둘로 쪼갤 각오를 하지 않고선 이룩하지 못할 것만 같던 동서 교회의 통합.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의 벽도, 계속 발버둥치며 틈을 찾다 보면 넘어갈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도 그 운명을 헤쳐나갈 길을 먼저 찾는, 그리고 같은 운명에 처한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 시그리드의 모습에, 마누일 또한 무언가를 느꼈다.
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지만,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를 신께 기원하는 수밖에.
그러므로 마누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그리드 곁에 어색하게 선 저의 사랑하는 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건강하게 자라다오. 그리고 이 아비를 원망할지언정 세상은 미워하지 말아다오. 이 세상에는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 있으니.”
“빈란디아에 멋진 도시를 만들고 나면 꼭 돌아올게요.”
신대륙의 이름뿐인 군주는, 울먹이며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린란드에서 시작해 온 유럽을 뒤집어놓으며 유럽의 반대편 끝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향했던 시그리드는, 헤르욜프스네스를 떠난 지 만으로 오 년만에 귀로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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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 언급된 것처럼, 작중 시점의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만 남은 본토, 그리고 제국의 속령이지 완전한 일부는 아니었던 테살로니키와 모레아(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전제군주령despotate은 공동황제로서 제위 계승을 준비하는 장남 외의 다른 황자들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작중 시점에서는 마누일의 차남 테오도로스가 모레아를, 삼남 안드로니코스가 테살로니키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질은 아버지 마누일에 미치지 못했고, 오스만 투르크가 내부 혼란에 종지부를 찍자마자 다시금 발칸 방면 확장을 시작하는 동안에도 딱히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다가 추방당했고, 콘스탄티노스의 아우들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는 모레아의 공동 통치자가 되자 저들끼리 내분을 –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 벌여 동로마의 마지막 불꽃이 허망하게 꺼지는 결과를 초래했지요.
2.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그리스 민족주의의 효시가 된 인물이자 그리스 다신교의 부활을 주장한 인물 정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플레톤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안으로, ‘헬라스인’들의 통일된 종교로서 주창한 다신교는, 실재했던 고대 그리스-로마 다신교와는 다른, 오히려 후대의 이신론에 근접한 무언가였습니다. 우주의 창조와 유지에 관여되는 원리 그 자체를 신으로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12개조로 정리한 우주의 원리 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만 붙인 종교 체계를 수립했던 것이지요.
또한 그는 ‘로마’가 아닌 ‘헬라스’, 즉 그리스인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가를 일신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이 머물던 모레아를 그 부활의 기틀로 삼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4세기 말에 이르게 되면 이미 ‘로마’라는 거창한 이름과 동로마의 현실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대신 그리스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지만, 플레톤만큼 이를 과감하게 내세운 이는 없었지요.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가 ‘플레톤’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은 것도 플라톤을 흠모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의 남은 정체성뿐 아니라 동방정교회까지 거리낌없이 건드리던 그의 과격한 주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렸고, 그 결과 그는 거의 평생을 모레아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역작 ‘법률의 책Nomoi’을 비롯한 많은 글은 정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누일 2세를 비롯해 많은 황족들이 자문을 구할 만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훗날 피렌체 공의회에도 동로마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지닌 위상이 대단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1460년 모레아 함락 직후 그의 유해를 이탈리아 리미니로 이장한 시기스문도 말라테스타는, 그의 묘비명에 ‘철학자들 중의 군주’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