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1화 (51/116)

이민자의 노래 (2)

12. 이민자의 노래 Immigrant Song (2)

신대륙의 해안이 눈앞에 다가온다. 두터운 바다안개를 뚫고.

시그리드의 뒤에 남은 문제는 아직 산더미요, 앞길에 버티고 있는 장애물 또한 서녘정착지 코앞까지 내려온 빙하마냥 막대했다.

신대륙 개척이 수지 맞는 장사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닥쳐올 구대륙의 탐욕스러운 손길.

이미 시작된, 너무나 다양한 이민자 집단 사이의 갈등.

그러나 지금 시그리드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러한 수많은 골칫거리를 잠시 내려놓기에 족하였다.

“빈란드...”

스베인과 콜그림은 오는 바닷길 내내 부르던 노래를, 새로운 힘을 실어 불렀다.

“적의 무리와 싸우며, 노래하고, 소리 지르도록, 신들의 망치는 우리 배를 새 땅으로 인도하누나!”

“발할라여, 내 그리 가노라!”

‘이민자 공용어’는 벌써 그냥 ‘공용어common tongue’라 불리고 있었는데, 북방어에 이미 익숙하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인들, 그리고 문법이 쉽다는 데 이끌린 바스크인들과 칼라알릿 부족민들 사이에선 꽤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물론 많은 경우는 공용어의 탈을 어설프게 쓴, 북방어와 영어의 혼합에 가까웠지만, 졸지에 라틴어나 헬라스어 같은 ‘고상한’ 언어 대신 야만적일만큼 단순한 언어를 정비하게 된 동녘정착지의 학자들의 손에서 체계가 잡혀가고 있으니 정말 제대로 된 언어가 탄생하기까진 그리 머지 않을 것이었다¹.

“거 좀 조용히 합시다!”

시그리드에게 배운 ‘공용어’ 가사로 흥겹게 노래 부르는 그린란드 사내들. 다들 노래 실력이 출중하진 못했던지라, 그들이 지금 바다안개 가운데서 길을 잃고 나머지 배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듣기에 썩 좋진 않았다.

“조금만 봐주세요.”

볼멘소리하는 바스크인 함장을 시그리드가 타일렀다.

“어차피 해안까진 왔잖습니까. 거의 다 온 셈이지요.”

작년 가을, 마지막 배를 타고 동녘정착지로 돌아왔던 칼라알릿 사람 이갈리코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곳 ‘빈란디아’ 동해안은 참으로 지형이 특이하여, 해안선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느냐, 남북으로 쭉 뻗었느냐, 아니면 완만하게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가느냐만 보아도 대략 어디쯤인지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앞에 펼쳐진 해안은, 북에서 남으로 내닫던 해안이 갑자기 남서쪽으로 굽어지는 듯한 구간. 이는 이곳이 좋은 희망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린란드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이어졌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너희의 이토록 푸른 들판은.”

잿빛 안개와 회색 바위 너머로, 마침내 푸른 숲과 중간중간의 들판이 눈에 들어올 무렵 스베인이 선창하였다.

“우리가 너희의 지배자로다!”

브라타흘리드 출신의 스베인네 패거리는, 육 년 만에 재회한 저들의 우두머리를 따라 외쳤다.

저들의 조상들이 남긴 행적을 바탕으로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의 음유시인들이 부른 노래가락.

문득 시그리드의 귀에, 그 가사가 그저 노랫말이 아닌, 신대륙을 향한 선포인 것처럼 느껴졌다.

먼 옛날, 바이킹들은 온 바다를 누비며, 교역을 원할 때면 교역을, 약탈을 원할 때면 약탈을, 정착을 원할 때면 정착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만 하리라. 바다의 무법자이자 공포였던 바이킹에서, 무언가 다른 존재, 다른 이들을 위해 앞서나가며 운명을 개척하는 자들로 변해나가야 하리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불태운 바이킹이 아니라, 욘의 세상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아 화성에 착륙한 바이킹처럼².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버둥거리기를 멈추고,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리라!”

“너희 비록 많은 것을 잃었을지언정, 평화와 신뢰로써 새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니!”

“우우, 우우!”

시그리드의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갑판 위에서는 후렴구를 외치는 소리가 저쪽 해안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와 교차했다.

“우우! 우우!”

허나 다시 들어보니 메아리라 하기에는 어째 이상했다.

“엥, 저기 숲에 사람 있는 거 아닙니까?”

“에이, 그럴 리가.”

“듣자하니 이 동네 도깨비들, 아차, 그, 뭣이냐, 원주민들이 꽤 말썽을 부린다던데. 혹시 그놈들은 아닐까요?”

콜그림이 습관처럼 ‘도깨비’라는 말을 썼다가, 한때 도깨비라 칭해졌던 칼라알릿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고쳤다.

그러나 이갈리코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작년 여름께에 이곳 근처에 벌목장 하나를 새로 세웠소. 아마 저기 저 만 안쪽일 텐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화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좋은 희망 근처의 숲은 태곳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목 투성이. 파울 주교와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는, 이곳의 질 좋은 목재를 그린란드 재개발에만 쓰기엔 아깝다는 결론에 금방 다다랐다.

좋은 희망에서 레이캬비크까지의 거리는 얼추 레이캬비크에서 함부르크까지의 거리와 비슷했고, 더구나 독일에서도 좋은 목재를 구하려면 이제 루스인들의 땅이나 흑림Schwarzwald 깊은 곳까지 가야만 했다³.

그러므로 작년 여름, 그린란드 회사는 작정하고 많은 독일인 개척민을 좋은 희망으로 보냈다. 유럽 근해와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풍족한 어장 덕에 식량 조달 걱정은 없었고, 좋은 희망의 인구는 여름에 들리는 바스크인들을 제하더라도 벌써 오백에 근접하고 있었다.

“물론 도깨비들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새로 만난 우리 친척들⁴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더군. 애초에 도깨비들 없는 곳이라 하기에 저곳에 벌목장을 세운 것이오.”

가르다르에 머물면서 그간 좋은 희망 개척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샅샅이 살핀 시그리드도 얼추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

탐험 과정에서 몇몇 바스크 어선들은 더 풍부한 어장을 찾아 북쪽으로 향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이갈리코를 비롯한 칼라알릿 사람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칼라알릿 말로 그들을 ‘일라’, 즉 친척들이라 불렀기에 자연스럽게 개척민들도 그들을 일라 인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간혹 사냥을 위해 좋은 희망 근처까지 오가던 이들도 있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칼라알릿 사람들이 유럽인들 사이에 섞여있다는 점만으로도 꽤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도깨비’라니요?”

가만 듣던 시그리드가 물었다.

“도깨비라는 게, 그러니까 사람 괴롭히는 못된 놈들, 비열하고 모자란 족속을 부르는 말이잖소? 우리 칼라알릿 사람들이나 이쪽 해안에 있는 우리 친척들은 도깨비가 아니지만, 이쪽 근방에는 진짜 도깨비들도 있소.

숲속에 숨어 있다가 몰려나와 우리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우리 물건을 훔쳐가는 못된 종자들이지.”

일라인들과 달리, 좋은 희망 쪽 원주민들은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아 맨 처음 손짓발짓으로 선물 약간을 교환한 게 상호작용의 전부였다.

더구나 작년부터는 사냥이나 벌목을 위해 개척촌 목책 밖으로 나온 이들이 습격당하는 사례까지 나왔으므로, 그들을 야만인이니 도깨비니 칭하는 이갈리코 말에 좋은 희망에서 여름이나 겨울을 보낸 적 있던 다른 선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다면... 저쪽 벌목장 사람들을 습격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숲을 지나가고 있던 건 아닐까요?”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여기 스베인에게 말한 것처럼, 이쪽엔 도깨비들이 안 산다고 했습니다.”

사소한 논쟁이 벌어지려던 차, 선장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개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시그리드 각하.”

시그리드를 가까이서 잘 알게 된 이들, 그리고 애초에 바깥 세상을 잘 모르던 칼라알릿 사람들과 달리, 먼발치서 그 이름만을 들었던 사람들은 시그리드를 꽤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상식으로는 그게 더 맞았다. 하얀 마녀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의 반의 반만 사실이라도, 결코 가볍게 대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늘 하루는 근처에 정박해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벌목장에 가까이 가보는 것이 어떨지요?”

벌목장은 대개 배를 쉽게 댈 수 있는, 항구로 쓰기 좋은 곳에 지어지고 있었다. 베어낸 목재를 옮기기엔 그쪽이 가장 편했기 때문이었다.

스베인은 어깨 으쓱해 보이고, 이갈리코는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가까이 가 보지요.”

“의견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장이 고개 한 번 꾸벅 숙이곤 물러나, 주변에 바스크어 짙게 섞인 ‘공용어’ - 이것도 아직은 영어보다는 바스크어와 아이슬란드어의 혼합에 가까웠다 – 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서쪽으로 향하는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만이 나왔고, 그 만 초입에 접어들자 벌목장의 전경이 갑판 위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린란드 해안에 비하면 훨씬 완만하지만, 어쨌든 평평한 유럽 땅 기준으로는 꽤 험준한 피요르드. 그 안쪽 그나마 평평한 곳에 작은 부두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쪽에는 작업철 인부들의 공동 숙소와 식당을 겸하는 큼직한 나무집 한 채, 창고 한 채와 나무 쌓아놓는 마당, 그리고 이 모두를 에워싼 목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인적은 없었다.

“아직 작업할 철이 안 된 건가?”

“그러면 그 숲에서 들었던 소리는 뭐겠습니까?”

“이거 어째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

“스베인!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시그리드가 스베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목책 너머, 벌목장을 짓는 데 쓰였을 법한 나무 밑둥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우우’ 괴성을 지르며 몰려나왔다.

머리엔 깃털을 꽂고, 얼굴은 검붉은 물감 위에 흰색 문양으로 화려하면서도 섬뜩하게 꾸민 이들. 언뜻 보아도 그 의도가 평화로워 보이진 않았다.

부두 근처까지 달려나온 이들은, 곧 위협적인 동작을 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곧, 그 뒤에 숨어 있던 사냥꾼들이 시위를 당겼다.

“놈들이 활을 쏜다!”

‘쐐액’ 소리가 뱃전까지 들려왔다. 다행히 아직 배가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는지, 나무나 사람의 살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 대신 허무한 ‘퐁당’ 소리만 이어서 들렸지만.

“각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침착하세요! 저쪽의 활은 여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스베인, 콜그림! 라이플 준비해주세요!”

“알았다!”

이곳 신대륙에서는 부서진 라이플과 머스킷 보충은 당분간 언감생심이요, 화약의 수급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귀한 화약과, 15세기 야금술의 한계로 인해 짧을 수밖에 없는 총열의 수명을 소모할 필요가 있었다.

곧 라이플을 든 시그리드는, 프라하에서 지기스문트의 군마를 노렸던 그 솜씨로 ‘도깨비’들 사이의 이끼 낀 땅을 노렸다.

“와아!”

“놈들이 도망친다!”

효험은 매우 좋았다.

총성이 울리고 이끼가 튀어 그들 발에 닿자, 위협을 이어가던 전사와 사냥꾼들은 금방 대경실색해 무어라 떠들면서 숲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그리드는 홀로 미간을 찌푸렸다.

총성이 들리자마자 천둥인 줄 알고 두려워하며 엎드리거나, 충격에 뒤로 자빠지는 일은 없었다. 이는 곧 총의 위력을 겪어보았다는 뜻.

즉 이러한 충돌이 이미 일어났으며, 좋은 희망 정착지에 있던 머스킷이 최소 한 번 이상은 사용되었다는 뜻이었다.

스베인을 필두로 한 선발대는 조심스레 작은 배를 타고 내려 벌목장 안쪽을 확인했다.

싸움의 흔적은 없었고, 대신 사람 한 무리가 들어와 벌목장 안쪽을 여기저기 뒤진 듯한 흔적은 아직 잘 남아 있었다.

아마 ‘도깨비’들은 이미 한 번 벌목장에서 허탕을 치고서, 혹시 숲에 개척민들이 있나 싶어 여기저기 뒤져보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바다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던 것이리라.

배에 돌아온 스베인이 자랑스레 늘어놓는 추리는 그러하였다.

앞서 족히 수십 명은 될 ‘도깨비’들과 충돌을 빚은 판에, 벌목장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할 만큼 담이 큰 사람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그리드 일행은 하룻밤을 꼬박 배 위에서 지새야 했다.

“각하, 천만다행입니다. 안개가 개었습니다.”

그나마 전투를 겪어본 덕에 그런 불안을 뒤로하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던 시그리드와 달리, 평생 뱃사람이었지만 고작 해적 몇몇을 먼발치서 본 게 전부였던 선장은 정말로 밤을 샌 모양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동이 트자마자 찾아온 선장의 말에, 시그리드는 출항을 허락했다.

곧 드러난바, 일행이 봉변을 당했던 벌목장은 좋은 희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남은 안개를 마저 걷어낼 즈음에는, 좋은 희망의 목책과 나무집들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잘 말라가고 있는 생선들이 이곳 어장의 풍족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풍족한 목재 덕에, 고작 이삼 년 사이에 꽤 번듯한 모습으로 지어진 가옥들.

조그만 고기잡이배나 거룻배 정도는 건조할 수 있는, 공방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지만 어쨌든 갖출 건 다 갖춘 조선소.

심지어 한창 친영파와 친노르웨이파로 아이슬란드가 갈려 있을 떄 너무 많은 적을 만든 탓에 그린란드로 도망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제가 있는 조그만 교회까지.

신대륙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듯한 모습에, 감탄이 헤픈 이들은 ‘히야’ 탄성을 내지르고, 시그리드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작지만 활기 넘치는 개척촌의 모습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사하신 걸 보니 정말 다행이에요.”

“하하, 다 단장님과 파울 주교님 덕입니다.”

부두에 시그리드를 맞이하러 나온 쾨커리츠의 디폴트가, 저의 소박한 숙소 겸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보고를 시작했다.

“오시는 길에 보셨겠지만, 다른 배들은 어제 다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개척과 탐험을 시작하려면 어느 한 척 안 중요한 배가 없거든요.”

“그리고... 이갈리코 그이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갈리코는 가장 먼저 배에서 내렸다. 디폴트에게 소식을 전하고, 아직 이 개척지 안 어딘가에 있을 저의 ‘친척’을 찾아갔다.

아마 지금쯤이면, 언뜻 조용하게 들리는 칼라알릿 말로 엄청난 언쟁이 좋은 희망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습격이 자주 있었나요?”

시그리드가 단도직입으로 묻자, 디폴트 역시 감춤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작년 가을, 벌목장 한두 곳이 습격을 당했고, 올 봄에 다시 작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인부들 중에서는 사망자까지 나왔지요.

딱 한 정 있는 머스킷은 작년 가을, 마지막 배가 떠난 직후에 총열이 터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제가 직접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지만... 저 혼자서는 한계가 있고, 민병대를 꾸려본다 한들 숲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저들 원주민 상대로는 목책을 지키는 게 고작이지요.

결국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곳부터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맑은 바다 쪽 원주민들은 교역에도 관심이 많고, 우리를 딱히 경계하지도 않아서 그쪽에 새로 벌목장과 전초기지를 짓고 있지요.”

곧 그쪽에 벌목과 어업이 위주인 이쪽 좋은 희망과는 달리 목축 위주의 개척촌이 차려질 예정이었다. 시그리드가 타고 온 배 한 척을 제외한 모든 배들이 조난당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으니,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예, 원주민 상황은 어떻게든 해결할 필요가 있겠지요.”

디폴트는 보안관이자 그린란드 회사의 중진으로서, 시그리드의 신대륙 이주 계획이, 단순히 이쪽 해안에 개척촌 몇 곳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칼라알릿 사람과 말이 통하는 북쪽의 일라인들과 달리, 이쪽의 원주민들은 겨우 몸짓으로 교역 시늉을 내는 게 전부입니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원인불명인 적대 관계를 해소하기 전까지는 재개할 엄두도 못 내겠지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협상을 할 수도, 개척민들을 적대하는 원인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서로 교역을 하지 않으니, 상대의 언어를 배울 수도,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포로라도 잡아보아야 하겠군요.”

“지금까지는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당장 겨울 나기에도 바빴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포로를 잡을 것이며, 또 어떻게 그 포로를 움직여 저들에게 협력하게 만들 것인가? 난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튀어나왔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바깥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개중에는 이갈리코와 스베인의 익숙한 목소리도 있었다.

“이 개자식! 우리를 이용해먹다니!”

“말씀 잘 하셨소! 이놈 이름이 키미크인데, 정말 ‘개’라는 뜻이라오!”

일라 사람들은 저들이 사냥한 털가죽과 그것을 꿰어 만든 가죽옷이, 멀리 얼음 바다를 건너왔는데도 방한 대책이 부실한 ‘코 큰 사람들’에게 꽤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다니는 금속 도구와 무기가, 지극히 귀한 쇠붙이라는 사실도⁵.

따라서 일라 사람들, 스스로는 이누이트라 부르는 이들 중 약삭빠른 몇몇은 털가죽을 한가득 실은 카약을 타고 바다로 나와, 북쪽 어장을 오가는 바스크 어선들을 얻어타는 식으로 좋은 희망을 오가곤 했다.

지금 이갈리코와 스베인에게 목덜미 잡혀 온 일라 사람 키미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말씀대로입니다. 이놈이 우리를 이용해 먹었어요!”

키미크의 시퍼렇게 부어오른 눈덩이가, 혐의 인정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증언하는 듯했다.

“시그리드야, 아니, 이 죽일놈이, 우리를 이용해서 여기 도깨비들을 쳐죽일 생각으로 그곳 벌목장 부지를 여기 이갈리코에게 추천했다지 뭐냐?”

언제부턴가 매서워지기 시작한 겨울 앞에서, 칼라알릿과 이누이트의 조상들은 그저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칼라알릿 사람들이 서녘정착지에 닿을 무렵, 이누이트들은 이이우Iyiyiw라 자칭하는 이들과 그들 남쪽의 니놀리노Neenolino 사람들을 마주쳤다.

겨울과 굶주림 앞에서는 싸움을 불사해야 할 때도 있기 마련. 고래잡이를 할 때 여러 씨족이 힘을 합하는 전통이 있던 이누이트에게, 먹거리 풍족한 이이우와 니놀리노 마을을 습격하기에 충분한 머릿수를 확보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누이트들이 지금껏 몰아낸 어리석은 거인들(도싯Dorset 인)과 달리, 싸움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무리였다. 결국 이누이트의 남하는 멈추었고, 그들은 다가오는 추위 앞에서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바다 건너에서 그들의 동족들이 기이하게 생긴 무리와 함께, 도저히 카약이라곤 볼 수 없는 거대한 나무 고래를 타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이방인들은 실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혈족도 아니지만 수백씩 몰려다녔고, 카약으로는 갈 엄두도 못 내는 난바다에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건져올렸지만,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턱없이 무지했다.

그리고 이누이트인들은 그런 무지함을 이용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도, 이용하지 않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 그래서 우리를 일부러 그쪽으로 유인했다는 말인가요?”

“네. 그쪽 숲이, 이곳 놈들이 자주 찾는 사냥터였다지 뭡니까. 충돌이 발생하면 우리와 놈들 사이에 싸움이 붙을 테고, 놈들의 전사들이 죽어나가는 만큼 일라 놈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답니다.”

짜증과 분노를 제쳐놓고 생각하면, 감탄할 만한 계책이기는 했다.

“정말 못된 발상이네요.”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시그리드는, 애시당초 왜 이곳의 원주민들이 개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언뜻 알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심증에 그칠 게 아니라, 직접 증인을 확보해 증언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이놈 때문에 우리가 여기 도깨비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 아니겠느냐, 시그리드야? 이놈 머리통을 잘라서 저쪽에 넘겨주면 화해할 수 있을지도...”

어느새 주변에는 꽤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순간의 격정에 가득 차, 대체로 스베인의 과격한 발상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 이갈리코는, 세심하게 그 말을 키미크에게 번역해주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아뇨, 제가 보기엔 그게 문제가 아니었을 것 같네요. 여기 이 키미크라는 사람은 불길에 장작을 던져넣었을 뿐이지, 근본 원인은 따로 있을 거에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곁에서 함께 사정을 듣던 디폴트가 물었다.

“저쪽 사람들과 완만하게 대화로 풀어 가야겠지요? 저는 사람이라면 모두 나름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요. 당장 여기 키미크가 부린 술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던가요?”

시그리드가 키미크와 스베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서 통하는 방법으로 합리적으로 타이르면, 이곳의 원주민들과도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다른 세상은, 구대륙 유럽이 아니라 미래의 신대륙 미국일 것이고, ‘합리적으로 타이르는’ 방법으로 시그리드가 떠올린 발상은 오지 않을 미래의 미국에서는 ‘굿 캅 배드 캅’ 전략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어쨌든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태어났고 거의 차이 없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먹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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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유럽어는 시일이 지날수록 전반적으로 문법이 단순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바이킹 침공을 겪은 영어나 적은 인구로 넓은 남아프리카 서부에 흩어져 살게 된 네덜란드 개척민(보어인)들의 아프리칸스어처럼 역사적 계기가 있는 경우 이런 단순화가 훨씬 더 가속되곤 했습니다.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인위적·체계적으로 문법의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작중의 공용어는, 원 역사의 영어나 아프리칸스어에 비하면 학습자를 곤란케 하는 불규칙한 문법에서는 다소 자유로울 것입니다. 특히 굴절어가 아니라 포합어인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나, 대부분의 유라시아 언어와 달리 능격-절대격 언어인 바스크어를 모어로 삼는 학습자에게 이러한 점은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2. 1976년 7월 20일과 9월 3일에 각각 화성에 착륙한 바이킹 1·2호는 처음으로 화성 표면에서 제대로 된 관측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한 탐사선이었습니다. 최초의 화성 착륙은 1971년 소련의 마스 3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마스 3호뿐 아니라 그 후속기들도 착륙하자마자 연락이 두절되거나 아예 화성 궤도를 이탈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기에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착륙은 바이킹 1호와 2호가 처음이었습니다.

3. 아이슬란드의 삼림자원은 그린란드보다는 풍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넉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작중 시점에서는 거의 목재가 고갈되었고, 15세기 후반 아이슬란드 곳곳에 독일인 정착촌이 생길 무렵에는 멀리 독일에서 목재를 직접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훨씬 삼림자원이 풍부한 노르웨이에서 직접 나무를 들여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당시 노르웨이의 열악한 무역 여건 때문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4. 이전에 종종 언급된 것처럼, 이누이트인들의 조상인 툴레Thule 인들은 본디 알래스카 북해안에 주로 거주하였으나, 12세기경부터 빠르게 동진·남진하여 15세기 중후반에는 캐나다 북부와 그린란드 등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즉 작중 시점에서 칼라알릿 부족민들과 바다 건너편의 다른 툴레 인들은 갈라진 지 약 1~2백년이 지났을 뿐인 상태입니다. 언어가 서로 통하는 것도 전혀 이상치 않겠지요.

5. 툴레 인들은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원시적인 야금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즉 철광석을 채굴하진 못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철기나 운철(운석에서 얻는 철)을 다루는 수준의 기술은 가지고 있었지요. 이들은 동시베리아에 거주하는 퉁구스계 민족들과의 교역이나, 해류를 타고 알래스카로 밀려오는 동아시아 선박들에서 얻는 금속을 다루는 과정에서 야금술을 익혔다고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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