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2화 (52/116)

이민자의 노래 (3)

12. 이민자의 노래 Immigrant Song (3)

거창하든 사소하든, 모든 이상은 현실과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타협의 압박을 받기 마련이다.

신대륙 빈란디아에서 지명을 정할 때, 모든 언어로 옮길 수 있도록 일반명사로만 이름을 짓는다는 그럴듯한 원칙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빈란디아’라는 이름부터가 고유명사 아니던가.

일례로, 좋은 희망 주변의 벌목장들은 딱히 엄청나게 큰 거주지도 아니고, 조금 쓰다 떠날 곳이라는 핑계로 그냥 그 벌목장 책임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다. 모든 벌목장에 멋들어진 이름을 붙이기엔, 독일인 개척자들의 작명 실력이 너무 일천했던 것이다.

(당장 독일인 중 귀족이라는 자들도, 프리드리히니 빌헬름이니 대대로 똑같은 이름을 이어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곤 했으니, 평민 출신 개척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오토네 벌목장’은 그중 하나로, 시그리드가 니놀리노족 전사들과 마주쳤던 그 벌목장 근처에 있었다. 함정을 파기엔 딱 좋은 입지기도 했다.

“덕분에 잘 붙잡기는 했습니다만... 정말로 말이 통할는지요.”

가뜩이나 피곤한 판에, 자청해서 그 매복을 지휘하기까지 하느라 밤샘까지 한 디폴트는 끝내 말하는 도중 하품을 참지 못했다.

“안 통하면, 통할 때까지 하는 수밖에요.”

어제 저녁, 니놀리노족 전사들은 오토네 벌목장을 덮쳤다. 그들 딴에는 꽤 큰 무리인 수십 명 전사와 사냥꾼을 모아놓고서 정작 북쪽 ‘날고기 먹는 사람들Eskimo¹’과 한통속인 ‘큰 섬을 타고 오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못했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돌아가서 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들이 동쪽으로 올 때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벌목장에 사람 몇몇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야음을 틈타 기세 좋게 이방인들의 ‘통나무 울타리 안의 집’에 들어선 전사와 사냥꾼들은, 바스크 어부들에게 빌려온 그물이 사방에서 날아들자 금방 제압당하고야 말았다. 대부분은 도망쳤지만, 재수 없게 맨 앞에서 목책을 뛰어넘었던 이들 몇몇은 손목과 발목이 꽁꽁 묶인 채 이곳 좋은 희망까지 끌려왔다.

“어디 보자... 아마 지금쯤이면 되겠네요.”

지금 그들을 가두어놓은 창고에 스베인과 이갈리코 패거리가 들어간 지 한 10분쯤 지났다.

시그리드가 그리는 그림은 이러했다.

저들이 미워하는 칼라알릿 사람과 그들 편인 듯한 유럽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기분 나쁘게 툭툭 치기도 하고, (살짝 힘을 빼고서) 손찌검이나 몽둥이질도 몇 번 한다.

그렇게 시달리던 전사들 앞에, 먹거리가 가득 차려진 쟁반을 든 생면부지의 여인이 나타난다.

여인은 방금 전까지 전사들을 괴롭히던 무리들에게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못된 이방인들은 자못 못마땅한 기세를 풀풀 풍기며 물러난다.

그리고 여인은 ‘나는 시그리드’부터 시작해서, 손짓발짓으로 소통을 시도하고, 적진 한가운데서 그나마 저들 편을 들어주는 듯한 이 – 그것도, 시커먼 사내들에게만 둘러싸여 있던 와중에 나타난 여인 – 앞에서 니놀리노족 전사들도 조심스레 그 시도에 응하게 된다...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이 시대에는 나름 미래지향적인 방법에 속할 것이다. ‘말을 들을 때까지 후려팬다’나, ‘말을 듣는 놈이 나올 때까지 계속 포로를 잡아 노예로 팔아넘긴다’보다야 훨씬 문명인답지 않던가.

그리 생각하며 쟁반을 들고 들어간 시그리드는 대략 한 시간만에 의아한 표정 가득한 채 창고를 나왔다.

“어찌 되었습니까?”

“그... 너무 성공적인데요?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저들을 풀어주고 같이 저들 우두머리를 만나러 가자고 하는 것 같은데요.”

“말도 안 통하는데?”

디폴트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던 스베인이 물었다.

“‘괜찮다. 거기 가면 통한다’라고 하더라고요.”

“영 미심쩍은데.”

“‘큰 섬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게 목표였다고 하는데, 제가 그 ‘큰 섬’ 사람들 중의 우두머리니까 저를 마을로 초대하면 목표를 이루는 셈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어떤 경고일까? 시그리드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아마 일라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경고가 아닐까 싶었다.

저들 눈에는 이갈리코와 칼라알릿 사람들 역시 일라 사람들로 보였을 테고, 따라서 굳이 그 키미크라는 사람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자연스레 개척자들은 일라 사람들과 동패인 것으로 오인을 받았을 것이었다.

“오해를 풀 기회지요. 이 기회에 제대로 교역도 트고, 우리네 계획에 동참시키기까지 할 수 있다면, 우리를 이용해서 저쪽 사람들 - ‘니놀리노’라고 하더라고요 – 을 몰아내려던 괘씸한 일라 사람들도 골탕먹일 수 있을 테고요.”

물론 그들 중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외부인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물건들을 들고 왔다는 것의 함의를 어슴푸레 알아챈 사람이 있어, 어떻게든 이 미지의 사람들이 품고 온 저의를 파악하고자 전사들을 보내 찔러본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시그리드의 신대륙 개척 계획은, 어차피 이곳 원주민들을 배제하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까.

“이민자로서 원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건 당연한 도리겠지요.”

물론 시그리드는 욘의 조상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 같은 것을 선물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베다분Abedabun 노파는 오늘도 볕 좋은 곳에 앉아, 지난 며칠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 동쪽으로 간 전사와 사냥꾼들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숲의 정령Manitou들이 보살펴주기를 청하면서.

큰 섬을 타고 온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위티카Wittikka(웬디고)²처럼 숲을 먹어치웠다.

숲의 참된 사람들에게는 자작나무 껍질과 간혹 숲속에서 스스로 쓰러진 나무 정도면 충분했다. 숲과 사람 사이에는 균형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큰섬 사람들은 나무를 통째로 베어버리곤 했다. 숲의 시체로 그들은 집을 만들고, 높은 울타리를 세웠다. 큰섬들이 짠물 위를 오갈 때면,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내리곤 했고, 큰섬은 그 대신 통나무를 먹어치우곤 짠물 너머로 사라지곤 했다.

그것이 벌써 두 해 째. 자신의 부족 젊은이들에게 큰섬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베다분  노파는, 그 못된 버릇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녀노소 모두 위티카에 들린 못된 족속들이 또 있지 않더냐?’

아베다분은 어느날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날고기 먹는 족속들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런 족속들이 길잡이 노릇을 했기에 큰섬 사람들 또한 못된 짓을 따라하는 것일 게야.’

처음 큰섬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베다분 노파의 부족을 비롯해 주변 곳곳에 그들이 전했던 선물의 소문은, 벌써 멀리 서쪽까지 퍼졌다.

‘세 줄기 불꽃 의회Council of Three Fires/Niswi-mishkodewinan³’에 속한 부족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거래에 관심이 많은 ‘둘째’ 오다와Odawa 사람들이 그 선물, ‘쇠붙이’라는 것을 수소문하며 이 숲 근처까지 기웃거릴 정도였다.

‘날고기 먹는 자들의 품성을 이 늙은이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균형을 깨뜨리는 자들을 방치한다면, 우리 숲의 균형마저 무너지게 된다.’

‘사냥꾼들을 모을까요?’

‘그래야지.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게야. 저들 큰섬 사람들은 한편으론 어린아이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없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더냐? 천둥을 부리는 것과 그 ‘쇠붙이’ 다루는 재주... 모두 잘만 쓴다면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니놀리노 사람들은 서쪽의 부족들과 달리, 인구가 수백에 달하는 큰 마을을 이루지도, 땅을 억지로 파헤쳐 먹거리를 내놓도록 강요하지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혈맥을 바탕으로 세상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을 만들지도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산과 숲, 골짜기 사이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위그웜wigwam 움집에 살면서, 세상 만물, 그리고 세상에 가득 찬 정령들과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뿐.

그러므로 니놀리노 사람들 사이에는 정해진 우두머리도 없었고, 꼭 피로 이어져야만 같은 부족으로 받아들이는 풍습도 없었다. 오다와나 오지브웨 사람들이 살아가는 서남쪽과 달리, 이곳의 숲은 관대한 만큼 가혹했고, 마을이 균형을 잃으면 겨울을 나지 못하고 마을 전체가 사라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흩어진 생존자들은 다른 마을에 합류하곤 했고, 마을 사람들 또한 그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또한 언제고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머나먼 땅에서 가족과 함께 도망쳐 온 이이우 사람 아베다분 노파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귀를 모을 수 있던 것도, 심지어 주변 마을에서도 종종 그 조언을 들으러 찾아오던 것도 그 덕이었다⁴.

아베다분 노파는 소싯적에 그 에스키모들에게 납치당해 아이까지 낳았고, 그 아이들과 자기 본래 가족들의 힘을 합해 에스키모들에게 복수했으며, 보복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쳐왔던 것이다. 그만큼 일대의 니놀리노 사람들 중 가장 식견이 넓고, 또 그만한 배짱과 지혜가 있었으므로, 모두가 그 말을 따른 지 벌써 수십 년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숲의 시체로 지은 집들을 들이치되, 만약 그들 중 우두머리가 보인다면 대화를 시도해 보거라. 저들이 날것 먹는 무리들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더냐? 나도 소싯적 고생으로 그들의 말을 익혔으니, 그 우두머리를 어떻게든 데려올 수만 있다면 설득할 수 있을 게야.’

아베다분은 에스키모들이 쓰던 그 날카로운 무기를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기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강한 쇠붙이를, 처음 이 땅에 닿은 큰섬 사람들이 선물로 주변에 주었다는 것도.

그러므로 큰섬 사람들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것이다. 그들의 재주를 익혀 이곳의 균형을 지키는 데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멀리서 ‘큰섬이 온다’ 하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짠물에서 조금 떨어진 산비탈에 있는 이 마을의 가장자리에서는, 땅 안쪽으로 푹 들어온 짠물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

그 안쪽으로 큰섬이 둥둥 떠 오고 있다는 얘기일 터.

그렇다면 동쪽으로 떠난 젊은이들이 뜻한 바를 이룬 것일까? 그들의 우두머리를 설득하여, 저 못된 날것 먹는 사람들의 손 대신 이쪽의 편을 들어주도록 만든 것일까?

“어르신, 어찌할까요?”

“만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어야겠지만, 어쩌면 저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말을 듣는 대신 날고기 먹는 자들의 편을 들어, 우리를 공격하러 온 것일 수도 있어.

아이들과 여인들, 노인들더러 숨으라고 해라.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모으고.”

마침내 큰섬에서 작은 배가 내려오고, 백발 흩날리는 노파가 마을 젊은이들과 함께 뭍에 올랐다.

아니, 이제 다시 보니, 새 한 마리를 어깨에 얹은 젊은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의 색이 노인과 같을 뿐.

어딘가 비범해보이는 그 모습에, 아베다분 노파 곁에 모여들어 큰섬 사람들과 돌아온 저들 동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마을 젊은이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딱 봐도 에스키모처럼 생겼지만 행색은 어째 조금 다른 사내도 하나 있었다. 젊은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지만, 아베다분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겼다.

저 우두머리를 만나러 간 젊은이들은, 통역으로 에스키모를 데려오라는 말도 어떻게 잘 전한 모양이었다. 에스키모들의 저주받을 말을 이런 데서 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반갑소. 이 마을에서 다른 이들에게 조언하는 것으로 맡은바 몫을 다하는 늙은이 아베다분이라오.”

아베다분이 오랜만에 쓰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저쪽 여인이 놀랄 차례였다.

“그린란드에서 온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저쪽의 여인은 금방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아베다분이 무어라 말을 꺼낼 틈을 주지 않고 이어서 물었다.

“선물을 겸해서 준비해 온 게 있답니다. 여기서 펼쳐 보여도 괜찮을까요? 제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것을 보면서 설명드리고자 하는데요.”

아베다분은 저쪽 여인을 설득할 생각을 했지, 반대로 설득을 당할 생각은 없었다. 허나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도리는 지켜야 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처음 보는 기묘한 문양이 크게 그려진, 나무의 껍질 같기도 하고 짐승의 가죽 같기도 한 무언가가 곧 그들 앞에 펼쳐졌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지도를 크게 옮겨 그린 거예요.”

‘지도’가 무엇이냐 물으니, 어디 먼 곳을 갈 때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땅의 모양새를 그린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기가 동쪽, 여기가 서쪽이고요... 바로 여기가 제 고향 그린란드랍니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유럽이고, 이쪽에 있는 게 이 대륙, 저희 입장에선 새로운 땅이라서 신대륙이라 부르는 곳이랍니다.”

북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 바로 에스키모들이 점령한 이이우의 옛 땅이었다 – 서쪽에는 세 줄기 불꽃과 긴 집의 사람들이 경계로 삼는 거대한 물(오대호)이 있었다. 금방 이 ‘지도’라는 것을 이해한 아베다분은, 이 지도가 적어도 완전한 거짓만을 담고 있지 않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베다분의 마음속 한 편에서는, 처음으로 이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 끝없는 듯한 바다 너머에는 거대한 땅이 있었고, 눈앞의 이방인 여인은 그 땅에서 이쪽까지, 저 ‘큰 섬’을 타고 넘어왔다고 하였다.

그런 재주를 지닌 자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와야 했다면, 대체 무슨 재앙이 그들 뒤에 도사리고 있던 것일까?

어쩌면 이들은 날고기 먹는 자들과 한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의 동류, 아니, 그들을 부리는 자들로서 이 땅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저들의 그 무시무시한 힘, 천둥조차 불러올 수 있는 힘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을 농단하기 위해.

이미 한 번, 낯선 땅에서 온 자들의 낯선 힘에 무너져 유린당한 끔찍한 기억을 지니고 있던 아베다분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솟구쳤다.

“내 한 가지 물어도 괜찮겠소?”

“네, 물론이지요.”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땅까지 온 것이오? 대체 무엇을 위해?”

처음부터 묻고자 했던 질문이, 새로 배어나온 두려움으로 인해 조금 더 날카로워진 채로 아베다분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지요.”

여인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대들은 숲을 부숴 없애고 있소. 나무 한두 그루를 베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숲을 없애버리겠다는 양 베어버리고 있지.

그것이 그대들이 살아온 방식이오? 그렇게 산 끝에 그대들 고향이 죽어버렸기에, 스스로 초래한 재앙과 분노한 정령들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오? 만약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대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소.”

“숲을 모두 베어낼 생각은 없어요.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베어내고 말 생각이랍니다. 목초지를 만들고, 집을 짓고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만요.”

“그 ‘필요한 만큼’이 얼마인지, 우리가 어찌 알겠소? 그리고 이 숲을 터전으로 삼는 모두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귀한 균형이 깨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그대들이 어찌 알겠소?”

“숲 바깥에서 식량을 얻으면 그만 아닐까요?”

“이 세상에 그러한 이치는 없소.”

“지금까지 이 숲에서 홀로 살아야 했던 입장에서는 그랬겠지요. 하지만 앞으로도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랍니다.

이곳의 숲에서 나오는 가죽은, 바다 건너에서는 아주 귀하게 팔 수 있어요. 숲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목초지와 농지를 만들면, 숲에서 사냥과 채집만 할 때보다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고요.”

시그리드의 머릿속에 이제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지식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지식 중에는, 바로 이 아베다분과 주변의 부족들을 비롯해 일대의 모든 원주민들이 곧 유럽인들과의 모피 교역에 열렬히 뛰어들게 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아베다분은 알지 못했다.

“왜 균형을 그토록 중히 여기시는지, 저도 조심스럽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땅의 겨울도 제 고향만큼은 아니지만 꽤 가혹하다고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지나치게 사람의 수가 늘어나거나 지나치게 많은 사냥감을 잡게 되면 모두가 위태로워졌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더 나은 길이, 우리들 중 그 누구도 혼자서는 찾아낼 수 없던 길이 있을 거에요.”

그러나 그 길을 끝까지 걷게 되면, 그 끝에 남는 것은 지금 아베나분이 알고 있는 니놀리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 껍질을 뒤집어 쓴 누군가일 뿐.

문득 아베나분은, 여인의 맑은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자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미리 아는 것처럼, 이해하는 듯한 눈.

그러나 아베나분은 그 시선을 뿌리쳤다.

“이 늙은이는 그저 다른 이들에게 조언하는 처지일 뿐, 무언가를 함부로 결정하지는 못 하오. 허나 그대의 제안을 도저히 좋게 볼 수는 없소. 누군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서서 반대할 것이고.”

그러자 의외로 조용한 대꾸가 뒤따랐다.

“혼자서 결정하실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갑자기 들이닥쳐 이런 제안을 던지면서 단번에 결정을 내려주시길 기대하는 것도 안 될 일일 테고요.”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여인은 제안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이 지역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묻는 거에요. 정말 하나하나 찾아가 물을 수는 없으니까, 이곳의 울창한 숲 곳곳에 사는 부족에서 다른 이들을 대신해 결정하거나 조언해주는 사람들의 의사를 모두 모아보는 거지요.”

“모두의 의사를 모은다? 그게 가능하겠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이 지역 사람들의 말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말을 배울 사람들을 몇 명만 붙여주세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만약 사람들이 반대한다면 저희의 제안도 철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벌목장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요.”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온갖 무시무시한 술수가 오가는 현대 미국의 지혜를 물려받은 사람이 눈앞에 있음을 아베나분은 또한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받아들일 만한 제안을 먼저 내밀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면서, 고맙게 선물을 받아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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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놀리노와 이이우족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퀘벡과 래브라도 지방이 개척될 때는 각각 산악족Montagnais과 나스카피Naskapi족으로도 불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대호 북부에서 뉴잉글랜드 북부까지 넓게 분포하던 알공킨어파 언어를 구사했고, 특히 래브라도 남부 – 작중 좋은 희망 근처 – 에 거주하는 니놀리노인들은 보다 내륙의 알공킨족과 오다와Oddawa족이 형성한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지요.

오늘날 이들 두 부족은 통합하여 그들 언어로 ‘사람’을 뜻하는 ‘이누Innu’ 족이라는 새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 것은 (당연히) 근대 이후의 일입니다.

‘에스키모’라는 표현은 본디 알공킨Algonquin어로, 이누이트인들을 ‘날고기 먹는 사람’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시선이 반영된 표현으로 전해집니다. 알공킨어파에 속한 언어를 쓰는 여러 부족들, 특히 알공킨과 오타와족은 바스크인과 프랑스인들이 퀘벡과 래브라도에 도착하자 빠르게 모피 교역에 뛰어들었고, 심지어 바스크인들에게 배운 짧은 프랑스어를 그 후에 도착한 프랑스인들에게 써먹을 만큼 민활한 면모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 결과, 북미 북동부의 많은 지명과 종족명에는 알공킨어의 흔적이 많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술할 이로쿼이 연맹의 ‘이로쿼이’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도 – 정설은 아직 없지만 – 알공킨어 멸칭이 어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2. 알공킨어를 쓰는 여러 부족들은 대체로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이들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에서는, 그렇게 만물에 깃들어 있는 정령이자 자연 현상 그 자체인 힘을 마니투Manitou라 칭하곤 했습니다. 또한 모든 혼령이 선량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사람이나 정령의 혼이 탐욕이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타락할 경우 나타나는 악령 웬디고Wendigo가 있습니다. 웬디고는 북미 북동부에 닥치는 가혹한 겨울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자연재해 및 부족집단 내 발생하는 갈등을 상징하는 악령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3.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오대호 북부에는 알공킨어족에 속한 언어를 쓰는 부족(이하 알공킨계 부족)들의 ‘세 줄기 불꽃 의회’가, 남부에는 이로쿼이어족에 속한 언어들을 쓰는 부족들(이하 이로쿼이족)의 ‘긴 집 사람들 연맹’(이로쿼이 연맹)이 각각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였지요. 그리고 유럽인들이 도착한 후에도, 알공킨 쪽은 프랑스, 이로쿼이 쪽은 영국의 편을 들어 모피 교역 이권을 두고 경쟁하게 됩니다.

세 줄기 불꽃 의회는 흔히 ‘삼형제’라고도 불렸는데,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오대호 북부 곳곳에 흩어져 살던 오지브웨Ojibwe(혹은 치페와)족이 장남, 주로 오대호 북동부에 거주하던 오다와Odawa 족이 차남, 그리고 오대호 서쪽 대평원에 거주하던 포타와토미Potawatomi족이 막내에 각각 비유되곤 했습니다. 이중 오다와족은 툰드라부터 대평원까지 거의 3천km에 걸쳐  복잡하고도 효율적인 교역망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데, 애초에 오다와라는 이름부터가 ‘상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그리고 그 오타와를 흐르는 오타와 강의 지명에 남아 있습니다.

4. 보다 짜임새 있는 사회를 이루고 살았으며, 환경이 허락할 경우에는 농경을 하기도 했던 ‘삼형제’ 부족들이나 알공킨족 등과는 달리, 니놀리노족은 보다 느슨한 수렵채집 위주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로쿼이족들이 대체로 모계중심 사회였던 것과 달리 알공킨계 부족들은 여성의 발언권이 높긴 하지만 부계중심 사회에 가까웠는데, 니놀리노족은 그런 뚜렷한 정치구조 없이 각 마을을 이루는 씨족의 유력자들이 협의하여 통치하는 체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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