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3화 (53/116)

이민자의 노래 (4)

12. 이민자의 노래 Immigrant Song (4)

세줄기불꽃 의회의 둘째, 오다와 사람들의 한해살이는 대개 이른 봄에 시작했다.

오가는 철새가 봄의 도래를 알리면, 그때부터는 땅을 갈고 고기를 잡았다. 첫눈이 내리고 기나긴 겨울이 찾아올 무렵부터는 사냥감을 찾아나섰다.

이처럼 봄과 여름, 겨울에는 각각 할 일이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농사일을 마치고 사냥을 준비하는 가을은 조금 한산하다는 뜻이었다. 먹거리나 털가죽 등을 들고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기에는 이때가 적기였다.

가장 능수능란한 상인인 오다와 사람들이 이처럼 가을에 선물과 교역 물자를 들고 주변을 돌아다녔으므로, 그 오다와 사람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알공킨계 부족들)들의 땅에서 교역의 계절이란 곧 가을이었다.

유럽인들이 1413년이라 부르는 해의 가을.

시그리드가 제안한 것은, 바로 이때 사람들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모두를 그렇게 이곳 좋은 희망에 모아서 묻는 거에요. 앞으로 우리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쪽 사람들이 제안할 공존의 방도에 동의하는지 그 여부를 말이죠.”

공존의 방도. 유럽인들은 해안과 강변을 개간해 개척지를 만들고, 이 땅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이 새 이웃을 받아들인다.

유럽인들은 저들과 생김새도, 믿는 바도, 언어도 다른 이들을 또한 이웃이자 이 땅의 터줏대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교역하며, 그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해준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이 땅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해준다.

언뜻 듣기에는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이 땅은 넓었고, 사람이 살 곳은 많았으니까.

허나 아베나분을 비롯한 니놀리노 사람들에게는, 굳이 따라야만 할 필요는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균형을 지키며 잘 살아왔는데, 굳이 이 낯선 이방인들의 말을 듣고 삶의 방식을 바꿀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러니까 가을이 오기 전까지 주변을 돌면서 알리는 것이지요. 이런 두 의견이 있으니, 그중 무엇에 동의하는지 뜻을 밝히고 싶다면 올 가을에 좋은 희망으로 오라. 배편은 이쪽에서 제공해 주겠다. 이렇게요.”

아베나분의 마을을 비롯해, 니놀리노족 취락은 대부분 연어와 해산물을 구하기 쉬운 강 하류 근처에 있었고, 숲속의 취락들도 물을 구하기 쉬운 강을 주변에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배를 타고 그 주변을 오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이 반드시 그 ‘좋은 희망’이라는 곳으로 모인다는 보장은 없지 않소?”

“그러니까 선물을 나눠줘야지요.”

“잠깐, 설마 선물로 환심을 사서 그대들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오?”

“그렇게 환심을 사는 건 비겁한 짓이지요. 그냥 이러이러한 논쟁이 불거졌으니 이쪽으로 찾아와 고견을 들려달라. 쇠로 만든 도구들을 선물하면서 이렇게 주변에 알리는 거에요. 가을에 찾아오면 또 한 번 이런 선물을 주겠노라 약속하면서요.”

물론 그렇게 주변에 홍보하고 다니는 것은 아베나분이 아니라, 이쪽 좋은희망의 개척자들일 것이다. 당연히 여론은 선물을 주는 쪽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금권선거가 아니라 그냥 선거 홍보활동이었다. 약간의 금품金品 - 황금이 아니라 쇠붙이라는 차이가 있긴 했다 – 을 쓸 뿐.

적어도 욘이 말해준 20세기 미국 정치의 원리에 따르면 그러했다.

그렇게 벌목장을 습격한 니놀리노족을 이끌던 아베나분과는 얼추 합의가 이루어졌고, 덕분에 작년과 달리 올해는 딱히 습격을 걱정하지 않고 벌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인과 그린란드인, 몇몇 아이슬란드인 개척자들이 새 고향으로 삼을, 좋은희망 맞은편 맑은바다 섬의 ‘푸른 들판’ 정착지 건설은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허나 불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가을에 뵙겠습니다. 잊지 마세요! 저희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 그만큼 숲은 사라지겠지만 대신 서로 교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답니다. 지금 선물로 드린 이런 주머니칼도 언제든지 얻으실 수 있게 될 거에요.”

“잘 알겠소. 내 가을에 꼭 찾아뵈리다.”

아베나분의 소개를 받아 찾아간 꽤 큰 규모의 마을에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벌써 인근 부족의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꽤 우호적인 듯했다.

그로 인해 준비해 간 철제 도구 대부분을 넘겨주어야 했지만, 발품을 덜 팔게 되었으니 딱히 손해를 보는 기분은 아니었다. 더구나 공짜 선물을 받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 지역의 상식 덕에, 시그리드가 타고 온 배에 가득 비버 털가죽이 실리기도 했다.

“자, 이제 이쪽 해안은 다 방문했고... 이제는 남쪽만 남았네요.”

맑은바다 섬에도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니놀리노 사람들과도, 칼라알릿 사람들과도 거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¹. 몇 번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그들은 딱히 교역에 관심이 없었다. 푸른들판 정착지가 막 첫삽을 뜰 무렵에는 아예 그 근처를 얼쩡이던 사냥꾼들도 사라진 뒤였다.

“개척만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미크막Mi`kmak족이라고 하던데², 이쪽 니놀리노 사람들하곤 사이가 썩 좋진 않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일라 사람들과 부딪힌 적도 없다고 하니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아요.”

대충 그린 작은 지도 한쪽에 체크 표시를 한 시그리드가 수첩을 닫았다.

이 마을은, 아베나분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야트막한 만을 내려다보는 숲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당연히 항구로 쓸 의도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타고 온 작은 배가 정박하기 적합한 곳은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숲길이 끝나고 들판을 따라 내려가는 길. 묵묵히 시그리드 곁을 지키던 디폴트가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해 말을 꺼냈다.

“지나치게 저들 야만인들을 배려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오가고 있습니다.”

보안관 업무가 한산해져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어째 불편한 듯한 디폴트였다. 필시 그 ‘몇몇 사람들’ 중 디폴트도 포함되어 있을 터.

“물론 모든 이들을 형제처럼 받아들이고, 우리가 떠나온 땅에 있던 대립과 갈등은 모두 과거에 남겨놓는다는 우리의 대의는 정당한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당장 ‘오토네 벌목장’ 주인 오토만 하더라도, 니놀리노 부족의 습격에 사촌동생 아돌프를 잃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 습격에서 총에 맞아 죽은 전사의 가족들도 슬픔과 분노를 품고 있겠지만.

그 오토를 설득하려 몇 번 시도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진 못했던 시그리드였기에, 디폴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은 독일인이나 보헤미아인들에 비하면 야만인처럼 보이겠지요. 그리고 보헤미아인은 로마인들 눈에는 딱히 다를 것 없는 야만인이고요.

문명과 야만을 함부로 가르는 것은 자칫하면 우리 모두를 갈라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더구나, 우리가 유럽에서 모은 개척자들이 모두 넘어올 무렵부터는 슬슬 유럽에도 소문이 퍼질 거에요. 새로운 땅, 아직 개척되지 않은 비옥한 농지와 엄청난 자원이 가득한 대륙 이야기가, 그저 이상한 촌구석 소녀 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지요.

우리가 저 남쪽 어딘가에 있을 황금의 땅에 닿은 다음에는 더욱 그럴 거고요.

그러니 유럽의 군주들이 이쪽에 손을 뻗칠 때가, 늦든 이르든 언젠가는 닥칠 거에요. 그때까지 우리들 개척자들의 수는 일만을 넘기면 다행일 테고요. 결국 우리는 이곳의 원주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워야 하는 처지랍니다.”

그것이 원주민들에게도 나은 길일 것임을 시그리드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신대륙을 ‘정복’한 유럽 군주들은, 말비욤 접종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요, 저들과 믿음이 다른 이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퍼뜨린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그 개종 대상자들을 노예로 부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나라가 무엇인지, 군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믿음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당연한 원칙이라고 믿는 것들조차 저들 사이에선 통용되지 않을 테고요.”

한참 시그리드의 말을 심사숙고한 끝에, 멀찍이 그들이 타고 온 쪽배가 눈에 들어올 무렵에야 디폴트는 시그리드에게 반박했다.

“만약 저들이 기꺼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다면, 저는 보안관으로서 기꺼이 그들을 목숨 바쳐 지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저들을 노예나 짐승으로 대접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우리와 같게 대접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꼭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당장 좋은희망에 남아 보안관 대리를 해주고 있는 우리 스베인 아저씨도 그렇고, 동녘정착지에 남아 있는 후스 선생님이나 플레톤 선생님도 비슷하지 않나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다면 설득하고 서로 가르친 뒤에는 반드시 서로 협력하고 신뢰할 수도 있을 거예요.”

뜬구름 잡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뜬구름 잡는 소리에서 구체적인 현실의 이야기로 끌고 오는 것이 시그리드 마음속의 목표였다.

만약 저들을 신뢰할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교류하고 서로 알아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저들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고, 저들이 가져올 모피를 바다 건너편 유럽에서 값지게 팔 수 있으며, 훗날 언제고 전쟁이 벌어지면 든든한 전우로서 함께 머스킷과 장창을 들고 맞설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제 행보에 대해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어요. 아베나분 할머니가 종종 우리 배에 함께 타서 돌아다니는 것을 막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대륙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그때는 제 목표를 정식으로 발표하고 사람들의 동의를 구할 생각이랍니다. 지금처럼요.”

“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함구하고, 주변에도 그리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올 가을에 저 야만, 아차, 원주민들을 한데 모아서 의견을 취합하는 것만 해도 큰일이니, 그쪽에 집중하는 게 낫겠지요. 그것만 해도 문제가 산적해 있으니까요.”

같은 땅에 살면서도 그저 부족끼리 간혹 교역하거나 뭉쳐서 싸움에 나설 뿐, 전체가 하나로 모여서 뭔가를 해본 적은 없던 니놀리노 사람들이었다. 개척만 반대편에 새로 바스크 어부들이 전초기지를 세우려 부지를 물색하는 와중 접촉하게 된 미크막 사람들도 아마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을 좋은희망 근처, 벌목장 공터에 모으는 일만 해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아베나분이 직접 나서서 같은 니놀리노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는 것만은 막겠노라 해주었으니 다행이었다.

“또 한 번 조심스레 주제넘은 말을 꺼내자면... 거기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꼭 야만인들을 무작정 쳐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여기는 이들 중에도, 과연 그들과의 평화적인 공존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고개 갸우뚱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어디 보자, 대체 저들과 어떤 조건으로 협약을 맺을 것인가, 그걸 걱정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선물을 흩뿌리다가 우리가 쓸 도구마저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새삼스레 눈앞의 여인이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디폴트였다.

“네, 맞습니다.”

“협약으로 말하자면, 아마 지금쯤 동녘정착지에 남아 계신 플레톤 선생님이 후스 선생님과 함께 열심히 초안을 작성하고 있을 거랍니다.”

지난해 겨울 동안 대서양 건너편 기푸즈코아와 비스카야의 조선소에서는 노블 세 척이 새로 취항했는데, 저지대의 한자 동맹 도시들 중 에릭의 환심을 사려던 이들이나 진지하게 신대륙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 중 그린란드 회사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인들이 꽤 있었던 덕이었다.

그 덕에 올해는 작년보다도 더 활발하게 사람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북대서양을 오가고 있었다. 올 여름에는 미콜라스 본인이 선장으로 탄 ‘아마추’ 호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기항하지 않고 바로 대서양을 건너는 항로를 개척하는 항해에 나설 예정이기도 했다.

“아, 며칠 전 그린란드로 향한 배편에 편지를 부치신 모양이로군요.”

“네, 이렇게 보냈답니다.

‘이러이러하게 되었으니 우리 개척자들과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개척과 교역에 관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제도를 구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들의 지혜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답니다.’

하고 추신으로 이렇게 덧붙였지요.

‘참고로 고안해주신 공용어는 이곳에서도 잘 쓰이고 있습니다. 원주민 젊은이들이 금방 배우고 있어요.’”

즉 자존심 높은 플레톤의 눈에는 ‘제 말대로 공용어를 쉽게 만드니까 여기서 잘 통하더라고요?’로 읽힐 추신이었다.

그런 도발을 당했으니, 어찌 이번에야말로 헬라스의 지혜를 보여주겠노라며, 자신이 들고 온 서적과 머릿속에 담고 온 지식을 총동원해 밤샘을 하지 않겠는가.

후스와 롤라드파 학자들처럼, 대학 생활을 학생과 교수로서 모두 경험해 본 이들은 그 순수하면서도 악랄한 계책에 혀를 내두르고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 옛날 지기스문트를 도발했을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던 재능이었다.)

그러나 차남으로 태어나 딱 기사가 될 만큼의 유산은 물려받을 수 있던 디폴트는 대학 문턱을 굳이 밟지 않았던지라, 시그리드가 그렇다 말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길 뿐이었다.

“아, 그리고 그 길에 쇠붙이 도구 확보하는 방법도 적어서 부쳤어요. 아마 원주민들과의 협약 조문을 다듬는 것보다 더 먼저 해결되지 않을까 싶네요.”

14세기 말부터 노르웨이 북부와 루스인들의 땅을 강타하던 추위는 점점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나머지 유럽에 모피를 공급하며 큰 부를 축적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떠오르는 강자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도저히 모피 장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모피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만약 그린란드 회사가 제때 모피만 공급할 수 있다면 떼돈을 벌 길이 열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³.

그렇다면, 미래의 이익을 담보로 지금 미리 자산을 차입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조치 아닐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불편을 참으시면 큰 이익이 돌아올 것입니다.”

대서양 건너편의 함부르크 시 외곽. 신대륙 개척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이들이 만든 작은 천막촌.

‘영감탱이 말을 믿고 온 내가 바보지’ 소리에 시달리는 자크 다르크는, 제게 찾아온 이 상인을 한참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아니, 멀쩡한 상인들을 내버려두고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러십니까?”

오는 길에 만난 독일인 젊은이를 통역으로 세워두었지만, 들려온 제안이 영 터무니없어 몇 번이고 이 젊은이의 독일어 실력을 의심해야 했다.

“대장장이 길드가 우리가 쇠붙이를 사 모은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죄다 값을 올려버렸지 뭡니까. 다행히 우리 회사의 뛰어난 중진들은 다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뛰어난 계획이라는 게, 우리들에게서 쇠붙이 가재도구를 빼앗아 가겠다는 겁니까?”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빌리는 것입니다. 어차피 서쪽 해안에 닿으면 이미 정착한 사람들에게 한동안 신세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땅에 넘쳐나는 도적들도 거긴 없을 테고요.

굳이 집집마다 식칼이니, 호신용 단검이니, 고덴닥Goedendag⁴이니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는데, 그걸 처분해 돈벌이까지 할 수 있으니 남는 장사지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빈란디아 개척이 ‘교리상 문제 없음’ 판정을 받은 이래로, 신대륙 개척의 소문은 이전보다도 더 유럽 곳곳에 퍼지게 되었다.

그전에는 프라하 3부작을 읽은 식자들끼리 논의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교회의 강론에서도, 장터의 수다에서도 그 이름이, 죄악의 땅 바빌로니아든 기회의 땅 빈란디아든 계속 오르내리게 되었다.

특히나 프랑스나 독일 내 피사파 제후들의 영지가 더욱 시끌시끌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요한 23세는 여기저기 돈을 풀어 반反 빈란디아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모이시스 오토마니코스의 개종 소식이 지닌 파급력을 고려하면 가망 없는 발악에 불과했지만.)

또한 저와 사이 좋지 않은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길 기대하며, 역풍이 불어올 때를 감안치 않고 바람잡이를 풀어 신대륙 이주를 선동하는 어리석은 영주들도 적잖이 있었다.

허나 평민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저들끼리 남부여대하고 무작정 바닷가 도시로 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다렸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특별해 보이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출발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무리가 신대륙으로 향한다 떠들면서 마을을 지나가기를.

사기꾼이든, 도둑이든, 머릿수가 많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법.

마침내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북프랑스 전역에서 폭발하자, 때가 왔다며 동레미를 떠난 자크 다르크 일행이 바르 공작령을 떠나마자자 숱한 동행을 거느리게 된 까닭이었다.

자크 다르크로서는 얼떨결에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섞인 농민 이십여 가구의 우두머리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함부르크에 도착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보헤미아에 남은 개척 대기자들은 얀 지슈카의 지휘를 받으며 한 번에 함부르크로 향할 예정이었으므로, 지금 함부르크 외곽에서 기다리는 이들은 대개 독일 곳곳에서 모인 어중이떠중이들.

개중 아예 독일인도 아닌 자크 다르크가 가장 식견 넓은 사람이었으니, ‘프랑스에서 오신 대단한 분’이자 ‘파리 대학의 그 장 제르송 박사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자크 다르크가 이 천막촌의 임시 우두머리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있다는 그린란드 회사의 배편 – 아직 노블의 수가 적었던지라, 비교적 익숙한 아이슬란드-독일 항로에는 코그Cog 선을 쓰고 있었다 – 을 기다리던 차, 회사에서 나왔다는 이 상인을 만나게 되었다.

“믿기 어려우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쇠붙이 따위를 빼앗아 팔아본들 이곳 유럽에서 변변한 이득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여기 증서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신대륙에 넘어가면 우리에게 넘겨주신 쇠붙이 이상의 값을 보상해드린다는 증서입니다.”

상인이 초록색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 선명한 녹색을 보십시오. 빈란디아에서 나오는 염료로 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신대륙 바깥에선 그냥 종잇조각일 뿐이니, 누가 위조하지도 않을 테고요.”

싸움에 나설 때 얼굴을 칠하는 것을 시작해, 자연이 제공하는 온갖 염료를 폭넓게 쓰던 니놀리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얻은 녹색 염료라는 것을 말단 직원이 알 리는 없었다.

결국 한참 고민하던 자크 다르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자크 다르크는 또 한 번 아내에게 왕창 혼이 나고야 말았다.

덜컥 짐을 풀어 쇠붙이를 모조리 내놓으라 하는 것부터도 미친 짓이거니와, 덥석 받아든 그 녹색 증서에는 떡하니 영어가 쓰여 있던 것이다.

자크의 아내 이사벨은 알파벳 정도는 알고 있었고, 증서에 쓰인 ‘of’라는 게 프랑스어 ‘de’에 해당한다는 것쯤도 알고 있었다.

맨 위 라틴어로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Nostra sponte’라 적힌 것을 제하면 증서의 나머지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하나로 뭉친 빈란디아의 모든 사람들United Nations of Vinlandia⁵’의 이름으로 쇠붙이 값에 이자까지 붙여 지급할 것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유나이티드 네이션스’의 뜻을 알 리 없는 파울 주교가, 그저 시그리드의 계획을 듣고서 막연히 ‘그린란드 회사가 보증한다’라고 하면 왠지 상인들을 불신하는 평민들의 의심을 살 듯해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을 쓴 것에 불과했지만. (덤으로 찍혀 있는 그린란드 연대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이왕 신대륙에서의 삶이라는 도박수를 던진 판에 곁가지로 소소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쯤은 딱히 뭐라 할 일도 아니잖으냐 항변하던 자크였지만, 불에 기름 부은 격이었다.

어린 딸 잔이, 엄마와 아빠 싸우는 통에 짐에서 꺼내둔 채로 내버려 둔 식칼을 들고 재밌게 놀고 있는 것을 자크가 뒤늦게 발견한 뒤에야 싸움은 임시 휴전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다행히 누구 다치는 일 없이 어린 딸 손에서 빼앗은) 이사벨 로메의 혼수 식칼과 자크 다르크가 이 빠진 쇠스랑 날로 급조한 고덴닥을 포함해 온갖 철기가 좋은희망으로 차곡차곡 넘어오게 되었다.

시그리드가 개척만 주변 부족들을 돌며 모은 털가죽은 시험 삼아 보내본 것치곤 꽤 괜찮은 벌이가 되었고, 비단 철기뿐 아니라 주변에 선물로 뿌릴 다른 장신구 등 다른 물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축들이 차례로 넘어왔다.

개중에는 프라하 대학에 남은 의학 교수들이 우두로 확인해준 병을 앓고 있는 소도 있었다. 중간에 계속, 고의로 다른 멀쩡한 소에게 옮기는 식으로 억지로 ‘바이러스’를 살려두느라 꽤 고역을 치렀더랬다.

좋은희망이 위치한 작은 만 맞은편에는, 이번 ‘선거’를 위해 모여든 니놀리노와 미크막 사람들, 흠씬 얻어맞은 채 북쪽으로 쫓겨난 키미크 대신 찾아온 일라 사람들, 그리고 뭔가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데다가 귀한 선물까지 준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오다와 사람들까지, 주변의 거의 모든 원주민 부족에서 모인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저들을 먹이기 위해, 올 여름 내내 바스크 어부들은 유럽에서 꽤 비싸게 팔릴 저들의 수확 상당 부분을 희생해야 했다. 난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처음 맛보는 생선 대접에 저들 모두가 기뻐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내게는 슬프지만, 그대에겐 기쁜 소식이라오.”

그 마을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시그리드와 마주친 아베나분 노파가 담담하게, 느릿느릿한 공용어로 말했다.

“그대가 처음 약속한 대로, 저들의 마음을 사들이고자 선물을 마구 흩뿌리진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렇지만 그대와 그대의 사람들은 사람 마음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더군. 아마 사람으로 온 땅이 들어찰 만큼 서로 뒤섞이고 다툰 끝에 그대들의 고향에서 여기까지 넘어왔기 때문이겠지.”

한데 모인 적 없던 사람들 이삼백이 한 곳에 모여 있건만 아직 싸움 한 번 나지 않은 것은, 이 모임이 파투라도 나게 되면 약속된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합리적 예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언성 높아지는 곳마다 신출귀몰 나타나던 아베나분 노파의 공도 컸다.

니놀리노와 미크막, 오다와 사람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작정하고 느릿느릿 말한다면 통역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과는 언어가 다른 이누이트들은, 아베나분에 소싯적 저의 의사에 반해 배우게 되었던 그들 말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곳곳을 누비며 중재하는 동안, 아베나분 노파는 틈틈이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모임의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대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대들 이방인들, ‘유럽인들’이 약속하는 이익에 이끌려 우리 사람들은 그대들의 손을 잡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소.”

담담함 이면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균형을 지켜왔노라, 그로써 이 관대하면서도 때때로 냉정한 대자연의 마니투들과 평화를 이루며 살아왔노라 자부했건만, 같은 니놀리노 사람 중에서도 그 균형의 가치를 아베나분만큼 중히 여기는 이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대들의 땅에 넘쳐나는 사람. 그대들의 땅에서는 도저히 균형을 이루지 못할 만큼 늘어났기에 부득이하게 이곳으로 넘어오는 사람들로 이 땅이 가득 차게 되면, 그때 가서 우리 사람들은 후회하게 되겠지. 때늦은 후회겠지만.

그런 후회가 오는 날이 조금이라도 늦춰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조그만 만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좋은희망과 원주민들의 천막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시그리드는, 아베나분을 마주보며 그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하지만 그날이 오면,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우리 유럽 사람들만이 아닐 거에요.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 땅에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들이 함께 서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리고, 내일 제가 저분들 앞에서 발표하고 동의를 구할 이 제안이 그 첫발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요.

아직 동녘정착지에 남아 있는 플레톤이 듣는다면, ‘밤샘은 내가 했는데, 멋은 왜 네가 다 부리느냐’ 하며 핀잔을 줄 법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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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주민들에 대해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래브라도 본토와 달리, 유럽인 도착 전 뉴펀들랜드의 인구와 문화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린란드와 캐나다 북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섬에도 도싯Dorset 인들이 정착했지만, 대략 8~9세기경부터는 쇠퇴했지요. 10세기에 바이킹들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할 무렵, 바이킹들과 적대한 원주민들이 도싯 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집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후 16세기 초, 바스크인들과 영국인들이 뉴펀들랜드에 닿을 즈음에는 베오툭Beothuk 인들이 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부터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유럽발 질병에 시달리고 북쪽에서 이주해오는 이누이트와 해안 곳곳에 정착한 유럽인, 그리고 남쪽에서 넘어온 미크막인들에게 밀려나기까지 하면서 그 수가 더 줄어들었습니다. 마지막 베오툭 생존자가 19세기 초에 사망해버렸기에, 그 언어나 혈통, 기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유럽인들의 도래에 빠르게 적응하고, 그들과 교역을 시작한 아메리카 본토의 다른 알공킨계 부족들과는 달리, 이들 베오툭인들은 유럽인들이나 다른 원주민들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하자 싸우는 대신 내륙 깊숙한 곳으로 후퇴하곤 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도 역시 가설만 있을 뿐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요,

2. 오늘날 캐나다의 남동쪽 끝부분인 뉴브런즈윅(미국 메인 주 동쪽에 있습니다)과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남부 등지에 거주하던 미크막인들은 지금도 17만 명 가까이 남아 있고, 그 언어 역시 끊어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3. 모피 무역은 원 역사에서도 북미 개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7세기에 절정에 달한 소빙기 덕에 모피가 중요한 무역 상품이 되었다면, 작중에서는 15세기 초 러시아를 덮친 기근과 정세 불안이 비슷한 효과를 낳고 있지요.

이미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알공킨계 부족들과 이로쿼이족은 빠르게 이 모피 무역에 뛰어들었고, 이는 이들의 사회와 정치에도 불가역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교역을 통해 재화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그저 겨울을 나기 위해 수렵에 의존하던 생활 양식은 사라지고 보다 전문적인 사냥이 시작되었지요. 또한 무역 이권이나 수렵 영역을 두고 부족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 물론 후술하겠지만 유럽인 도착 전이라고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것은 아닙니다 – 유럽 상인들이 판매한 금속 무기와 화약무기는 더욱 큰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반대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큰 세력을 구축한 이로쿼이 연맹 같은 세력이 한참 동안 유럽인들의 침투에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요.

4. 직역하면 ‘좋은 하루’, 의역하면 ‘안녕하살법殺法’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고덴닥Goedendag은 14세기 플랑드르 지방에서 유래한 호신용 무기입니다. 곤봉 끄트머리에 짧은 창살이 박혀 있는 형태로, 특별한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서도 꽤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였지요. 왜 하필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합니다.

5. Nation은 오늘날에는 민족 혹은 민족국가nation-state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어, 흔히 근대 민족주의 그 자체와 동격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중세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전에 등장한 보헤미아처럼,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원시적인 민족의식이 태동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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