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4화 (54/116)

이민자의 노래 (5)

12. 이민자의 노래 Immigrant Song (5)

다음날 아침, 시그리드는 좋은희망과 그 건너편 야영지 사이 공터에 서서 사람들을 모았다. 가을이 찾아오자마자 해안을 오가는 바스크 어선과 ‘교역의 강(세인트로렌스 강)’ 탐험대의 배를 얻어타고 모여든 원주민 부족들이 한쪽에 모이고, 좋은희망 정착지에서도 당장 급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모여앉아 시그리드에게 귀를 기울였다.

오늘의 모임은 어디까지나 개척민 모두를 대표하는 시그리드가 원주민들에게 제안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좋은희망 개척민들은, 오늘 어떤 제안이 나올지 그럭저럭 언질은 들은 상태였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는 이들, 어떻게 하면 이방인 또는 야만인들을 이용해 이익을 취할지만 고심하는 이들, 그저 선물만을 바라는 이들과 얼른 저 야만인들이 이 땅의 풍족한 숲을 양도하고 멀리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기만 바라는 이들.

그들 모두를 돌아보며 시그리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얀 후스 등, 동녘정착지에 아직 남아 있는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합의안은, 사실 그 자체로는 딱히 거창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먼저 몇 가지 원칙.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고 믿습니다. 비록 생김새가 다르고, 쓰는 말과 풍습이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서 같은 권리를 지닌다고요.”

유럽의 교회 사람들부터 멀리 테노치티틀란과 그 주변의 사제들까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는 데 익숙한 – 그리고 특히 저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다 싶은 이들은 아래에 깔아버리는 데 더욱 익숙한 – 사람들이 듣는다면 기함할 소리.

그러나 이는 너무나 상이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플레톤과 후스가 여름 내내 머리를 싸쥐고서 찾아낸 최소한의 공통분모이기도 했다.

혈통이나 언어, 종교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순간, 로마인들부터 그린란드 바이킹들까지, 그리고 이제는 이누이트와 니놀리노 등 원주민까지 엮이게 된 이 공동체는 그대로 분해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거나 목축에 쓸 권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물건을 소유하고, 정당한 거래를 통해 그것을 양도할 권리를 지닌다고 보아야 하겠지요¹.”

권리라는 낯선 표현에도, 원주민들은 금방 그 말의 함의를 이해했다.

‘그대들과 언제든 교역에 응하겠다. 대신 우리가 숲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저 서쪽 사람들처럼 경작을 하는 것을 용납해 달라.’

아베나분처럼 이 이방인들을 미덥잖게 여기던 이들이 술렁였다. 전체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규모였다.

“그렇지만 막연히 정당한 거래나 개척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조만간 한쪽은 정당하다 여기지만 다른 쪽은 부당함을 호소하며 부딪히는 일이 꼭 벌어질 겁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과 같은 모임을 앞으로도 계속 열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중대한 사안이나, 우리들 사이의 갈등을 다룰 수 있도록요.”

“모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정확히는 모든 성인이요.”

유럽인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시그리드의 존재 때문에라도, 플레톤과 후스는 ‘모든 남자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다.

남녀간에 분별을 둘지언정 상하를 나누지는 않는 – 보다 정확히는, 그렇게 남녀를 분간짓기에는 일손 하나하나가 중했던 것이었지만 – 원주민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에는 누구든지 참석할 수 있지만, 발언권과 결정권을 지니는 것은 각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제한하려 합니다. 그 ‘부족’에는 우리 좋은희망쪽 개척자들도 포함되고요.”

처음 이 얘기가 좋은희망 사람들 사이에서 돌 때만 해도 꽤 볼멘소리가 나왔더랬다.

‘저들 원주민들은 고작해야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 부족으로 쪼개져 있지 않습니까? 부족마다 결정권을 준다고 하면 우리 쪽이 너무 불리한 것 아닙니까?’

그런 허점을 놓칠 플레톤은 아니었기에, 그가 작성한 초안을 받아든 시그리드 역시 당황하지 않고 답해줄 수 있었다.

“모든 부족에게 한 명의 대표는 보장하되, 사람의 수만큼 더 많은 대표들을 보낼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물론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각 부족의 인구를 어떻게 검증할 것이냐는 절차적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확실한 우두머리가 없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하나 이상의 대표를 보내기가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좋은희망과 푸른들판 쪽에서는 바로 코앞에서 열릴 모임에 언제든 대표를 보낼 수 있는 상황.

이만하면 당분간은 그럭저럭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플레톤은 단언했고, 시그리드 역시 동의했다.

“이 모임은, 더 나은 형태로 공고하게 새 의회가 세워지기 전까지 좋은희망 정착지, 그리고 정착지와 교역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 공통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의회 내지는 법정으로 기능할 겁니다.”

독일인 개척자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였지만, 아직도 팅그를 열고 있는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출신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세줄기불꽃 의회에 속한 오타와 부족 출신 상인 겸 구경꾼들도 ‘이방인들이 뭘 좀 아는구만²’하며 찬동했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니놀리노와 미크막 사람들은 금방 그 고개의 운동 방향을 좌우에서 상하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이 모임에 모든 걸 맡기기에는, 개척자들과 원주민 사이의 차이가 너무나 크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곳 좋은희망에 학교를 세울 생각입니다.”

말이 학교지, 멀리 유럽의 대학이나 욘의 세상에 있었다는 초등학교와는 크게 다를 것이었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쁘다는 점에서는 처지가 일치하는 개척자들과 원주민들이 한가롭게 학문을 궁구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대신, 그나마 서로 한가로운 가을 한 철에 속성으로 공용어를 교습하고, 꼭 필요한 몇 가지 개념들 정도는 – 당장 ‘권리’라는 말조차 자칫하면 악용될 소지가 많지 않던가 – 숙지할 수 있도록 강의를 열 생각이었다.

“제 제안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자리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의 결정을 겸허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그리드는 언뜻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적어도 원주민 쪽에서는, 어제 아베나분 노파가 전해준 것과 비슷한 반응이 두드러졌다.

마치 팅그에서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표결 없이 번갈아가며 의사를 표명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니놀리노 사람들뿐 아니라 미크막, 이누이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모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뒤이어 이렇게 생각하노라 의견을 밝히고...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차가운 가을 바닷바람을 견디고자 피운 모닥불 주변에 부족별로 나뉘어 앉아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모임을 시작할 때, 간혹 불어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견디고자 피운 모닥불이 거의 재만 남을 무렵, 해가 서쪽으로 기운 뒤에야 결론이 내려졌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또 사안에 직접 얽혀 있었던지라 사람도 가장 많이 모였던 니놀리노족을 대표하여, 아베나분 노파가 석양을 뒤로 하고서 일어나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갈음하여, 짠물 건너 땅에서 온 시그리드에게 밝히겠소.

이 땅에서 태어나 이곳의 숲과 들에서 자란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자 하오. 바라건대 하늘과 땅, 숲의 모든 사람과 정령이 오늘의 일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이 맹세를 저버리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1413년 가을 한 철에만 이백 명 남짓한 개척자들이 좋은희망에 발을 디뎠다.

그 대부분은 이미 꽤 그럴듯하게 세워지고 있는 해협 맞은편 푸른들판으로 향했고, 몇몇은 좋은희망을 처음으로 개척한 바스크인들과 함께 개척만 남쪽, 미크막인들의 땅에 새 어업 전초기지를 세우러 나갔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도착해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아베나분 노파의 속은 수심으로 가득 찼다.

아베나분은 저들이 ‘공용어’라 부르는 말을 배우면서, ‘천’이라는 개념을 금방 익혔다. 아마 니놀리노 사람들 모두를 다 합하면 몇천 명쯤은 될 것이므로, 꽤 큰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언제고 말했다. 저들이 바다라 부르는 거대한 짠물 건너편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기를 기다리는 자들만 해도 그 정도 숫자는 된다고.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땅, 유럽이라는 그곳의 인구는 천의 천, 백만 단위로 세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받은 충격을, 새로운 지식에 대한 흥미로 오해한 것인지, 시그리드는 한참을 신나게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유럽 땅에 대해 떠들었다.

그 땅에서 벌어졌던 경이로운 일들과 경악스러운 일들. 모든 땅을 정복하고 수십만 군사를 거느렸던 대추장과, 그런 대추장마저 무너뜨린 새로운 부족들, 그리고 그 부족들을 침략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시그리드의 조상들.

시그리드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어차피 저 바다를 넘어올 운명이었다. 이미 몇백 년 전, 시그리드와 피가 이어진 조상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모임이 끝나고 제게 다가와, 짧은 니놀리노 말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시그리드를 본 아베나분은, 그러므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대의 뜻대로 되었구려.”

“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신 덕입니다.”

“그대가 이끄는 개척민들 중에는 그리 생각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더구려.”

“그야, 원주민 분들은 쇠붙이 도구라는 눈에 보이는 이익을 금방 취했지만 개척민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장담컨대 몇 년 안으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 거에요.”

“어찌 그렇소?”

“조만간 불만을 품을 겨를도 없이 바빠질 테니까요.”

자신의 이야기가 아베나분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어디일지 짐작도 못하는 시그리드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저의 개척 계획을 늘어놓았다.

바다 너머에서 이주만을 기다리는 이들. 내년에는 올해보다도 더 많은 수가 바다를 넘어올 예정이라 하였다.

“이 주변은 물론 어장이 풍족하고 목축에도 좋긴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농사짓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라서요. 여기 개척만을 떠나 더 남쪽으로 향할 예정이랍니다.

마침 지난 여름에 만을 벗어나 더 남쪽 해안을 발견한 탐험대가 괜찮은 부지 몇 곳을 찾기도 했고요.

그런 곳에 흩어져 각각 개척촌을 이루고 살게 되면, 그만큼 주변의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에요. 그리고 오늘 남은 선례에는 점점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게 될 테고요.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견고하게, 그리고 더 나은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 만족시킬 새 제도를 세울 수 있겠지요.”

뒤이어 시그리드는 설명했다.

오늘의 합의, 고작해야 수천 명 원주민들과 수백 명 개척자들 사이의 합의에 불과한 것이 가지게 될 의미. 훗날 이 땅의 사람들에게 남기게 될 귀중한 선례의 무게에 대해서.

이 땅에 수많은 민족들을 아우르는 자유로운 ‘나라’를 세우고, 설령 저 바다 건너편의 추장들이 수만 군대를 거느리고 넘어온다 한들 힘을 합쳐 막아낼 수 있는 든든한 세력을 일구겠다는 말.

“실은... 그래서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이곳에 남아 주세요. 이곳에 남아서, 니놀리노 사람들이 원래 누구였는지, 어째서 그렇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기억을 남겨 주세요. 다툼이 벌어질 때면,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니놀리노 사람들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되어 주시고요.”

오늘의 임시변통 합의를 초석 삼아 훗날 제대로 된 정부가 세워지고 의회가 만들어질 때, 이 모든 과정에서 항상 합리적인 반대를 하면서 더 나은 대안을 내놓도록 하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사람들이 기억하게끔 해 달라는 청.

받아들인다면야,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시그리드는 오늘의 모임에서 또 한 번 엄청난 선물을 흩뿌렸다.

이만한 선물을 흔쾌히 나누어줄 수 있는 이라면, 실로 엄청난 힘과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추장이 새롭게 꾸린 연맹의 소문은 금방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숲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이방인들과 만난, 그리고 그 선량한 이방인들과 처음 협력한 니놀리노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큰 강 건너편에서 무섭게 힘을 키우고 있다는 긴집사람들. 그 다섯 부족도 원래는 그저 저들끼리 다투는 데만 바쁜 하찮은 부족들에 불과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늙은이야말로 고마워해야 마땅할 것 같소.”

답변의 운이 떨어지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는지, 시그리드도 숙연하게 경청하였다.

“그대의 땅에 있다는 수많은 추장들, 땅과 바다를 저의 것이라 우기면서 백만이 넘는 부족민들을 제멋대로 다룬다는 그이들보다는, 시그리드 그대가 이곳에 와서 우리와 협약을 맺어준 것은, 어쩌면 모든 정령들이 우리를 가호해준 덕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이다.

그 덕에 우리의 아이들은 이 땅에서 그대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지. 숲의 균형이라는 것은, 그 숲을 베어내고 땅을 갈아가며 더 많은 먹거리를 얻어낼 방도를 몰랐던 어리석은 노인들이 만들어낸 헛소리라 말하면서.

누군가는 그 쇠붙이로 덫을 놓아 짐승의 씨를 말리고, 누군가는 그대들과 똑같은 영혼을 품고서, 숲의 시체로 만든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겠지.”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부족은 없을 것이며, 그들이 새로 사귄 친구로부터 얻은 지식은 그들 모두를 굶주림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어쩌면 그때의 니놀리노 사람들은, 바야흐로 자신들이 행복해졌노라 선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위대해지고 행복해진 니놀리노 사람들은, 더 이상 아베나분이 알고 또 아꼈던 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대들의 땅에서 벌어진 옛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흐린 눈에는 그대들의 조상처럼, 그리고 종국에는 지금 그대들의 땅에 있다는 추장처럼 변해갈 내 부족 사람들이 선하게 보이는 듯하였소.”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대가 옳기를 바랄 수밖에.

제안은 고맙소. 그대들이 어떻게 그 ‘문자’라는 것으로 기억을 영원히 남기는지는 잘 알고 있다오. 절반만 받아들이겠소.”

그해 겨울, 아베나분은 정말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죽은 나무의 껍질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책’에 쏟아부어 주었다. 먼 훗날, 균형이 깨진 삶에 지친 후손 누군가가 발견하고 조상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고 봄이 되자 저의 마을로 돌아간 뒤, 이누이트 피가 섞인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멀리 북쪽의 숲으로 떠나갔다.

이민자들의 노래. 이 땅에 평화와 공존을 위해 왔으며 함께 번영하기 위해 기꺼이 협력할 것이라는 그 이야기가 퍼지는 가운데, 너무나 멀리 보았기에 너무나 먼저 근심하게 되었던 한 노파의 소문은 조용히 묻혀 사라졌다.

1413년 가을, 기푸즈코아의 미콜라스가 직접 키를 잡은 노블선 ‘아마추’는 사백 년만에 처음으로 신대륙에 닿은 선박이라는 기록에 이어, 기항지 없이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선박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시그리드가 니놀리노와 미크막 마을들을 돌며 선물을 뿌릴 때 답례로 받은 모피들은 처음으로 유럽 시장에 풀렸고, 지금껏 조금씩 단치히와 함부르크에서 아이슬란드로 넘어가 신대륙을 밟을 차례를 기다리던 개척민들은 마침내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척민들은 그 출신에 따라 각각 다른 곳으로 향했다.

교역의 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던 탐험가들에게 선뜻 먼저 접근한 원주민들은, 더 나아가면 급류가 흐르고, 거기서 더 올라가본들 거대한 폭포(나이아가라 폭포)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발길이 막힌다며 차라리 저들 사는 곳 근처에 교역소를 세울 것을 권했다.

뭔가 미심쩍다 여기면서도, 귀한 모피 교역의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던 시그리드와 회사 중진들은 강물이 급류로 변하는 지점 코앞의 하중도에 ‘좋은 거래’ 개척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원 역사의 ‘국왕의 산Montreal’보다야 나은 이름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면서 문제가 생길 때에 대비해, 이 땅에서도 먹히는 분쟁 해결법(거대한 덩치와 그만큼 거대한 도끼)의 달인인 스베인이 잠시 그곳의 새 촌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마추 호의 놀라운 항해와, 바다 건너편의 경이로울 만큼 풍요로운 어장³ 소문을 들은 바스크인들도, 고작 배를 만들고 포경과 원양어업의 이익을 누리는 데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건너오기 시작했다. 맑은바다 섬 남쪽, 원주민들도 간혹 들릴 뿐인 섬 한 곳을 차지한 그들은 여기에 ‘풍족한 앞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척자들이 새로 향하게 된 곳은, 교역의 강 상류가 아니라, 좋은 희망에서 다시 배로 한참 남하한 끝에 마침내 찾아낸, 농경에 적합한 부지들이었다.

왐파노악Wampanoag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반도(케이프 코드Cape Cod) 바로 북쪽에 세워진 ‘따뜻한 환영 (보스턴)’에는 헨리 5세의 탄압을 피해 그린란드 회사의 도움을 청한 롤라드파 사람들과 보헤미아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왐파노악 사람들도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 판이니, 따뜻한환영에 아직 보헤미아에서 얀 지슈카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이주민들 모두를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보헤미아인들에겐 딱 좋은 날씨에도 픽픽 감기로 쓰러져나갈 로마인들, 어찌 된 일인지 독일인 이민자들 사이에 콕 끼어 있던 북프랑스 출신 농부 몇몇들까지 받아들이려면, 더 남쪽에 새로 개척촌을 세워야만 했다. 당장 동녘정착지에서도 매일같이 추워 죽겠다는 곡성이 들려온다고 파울이 불평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1414년 봄이 되자마자 시그리드는 더 좋은 부지를 물색하려 배를 타고 나섰다. 더 남쪽에서도 니놀리노 사람들의 말이 어느 정도 통한다는 작년 탐험대의 말을 믿고, 이제는 좋은희망을 자주 들락거리게 된 공용어 구사자 한 사람을 통역으로 대동한 채로.

왐파노악 사람들이 거주하는 곶을 넘어,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해안선을 따라 항해한 시그리드는 마침내 바다를 향해 뻗은 길쭉한 섬과, 그 섬과 본토 사이로 느릿느릿 빠져나오는 강물, 그리고 강어귀에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나 있는 하중도를 발견했다.

“하하! 언제쯤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환영하오! 이곳 마나하탄Manahahtaan 섬 남쪽을 비워두었으니 정착만 하시면 된다오.”

그들이 탄 배를 보자마자 조그만 가죽 보트를 타고 직접 배 위에 올라온 추장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섬의 이름을 들은 시그리드는, 저곳이 바로 욘이 말한 뉴욕의 심장부, 맨하탄 섬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가, 그게 궁금한 것이오? 좋은 이웃이자 벗이 되어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야 우리 참된 사람들Lenni Lenape⁴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격이지!”

어느새 한참 북쪽 좋은희망에서 벌어진 일의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진지하게 따진다면, 우리도 그 교역에 참여하고 싶소이다. 이곳의 숲은 저 북쪽만큼 울창하진 않다고 하지만, 대신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세 자매Three Sisters⁵가 있다오. 그대들이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으니, 아마 우리의 보배이자 땅이 주는 선물인 이 곡식들을 모르는 것이겠지. 기꺼이 우리의 작물을 그대들의 도구와 바꿀 의향이 있소.

더구나 그대들이 저 내륙의 못된 이로쿼이 놈들과 한판 붙는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져 왔소이다. 그러니 어찌 더더욱 그대들을 환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추장이 또 한 번 사람 좋게 웃었다.

금시초문인 소식에 시그리드는 뜨악할 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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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뜻 한참 뒤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주장했을 법하게 들리는 이러한 논리는, 원 역사의 플레톤이 제안한 개혁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레아의 모든 토지를 몰수한 뒤, 토지 공개념에 입각해 실제 경작자들에게만 농지 보유를 허락하고, 공익을 위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지대rent 추구를 금지하는 과격한 개혁안을 주장한 바 있지요.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개혁안은 금방 묵살당했습니다.)

2. 세줄기불꽃 의회와 긴집사람들(이로쿼이) 연맹은 모두 고도로 정례화된 원시적 민주주의 기반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중대사를 논의하는, 의회와 비슷한 절차 역시 양쪽에 모두 존재했지요. 이는 비단 북미 원주민만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세계 곳곳의 고대 인류 곳곳에서 발견되는 보다 보편적인 요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뉴펀들랜드와 그 대륙붕인 그랜드 뱅크 일대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어장입니다. 래브라도 해류와 멕시코 만류가 만나 이루는 조경수역에는, 대구를 비롯해 많은 한류성 어류와 랍스터 등 갑각류, 그리고 이들을 먹이로 삼는 대형 해양 포유류들이 지천으로 분포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남획에 따른 어장 고갈이 심각해졌고, 결국 1993년 캐나다 정부는 이 지역에서의 어업을 금지하게 됩니다.

16세기부터 이 일대를 누볐던 바스크 어선들은 뉴펀들랜드 섬 남쪽에도 전초기지를 세웠는데, 이 어업 기지의 후신이 바로 북아메리카 일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프랑스 영토, 생피에르 미클롱Saint-Pierre et Miquelon입니다.

4. 지금의 뉴잉글랜드 해안 지방 대부분에는 알공킨계 언어를 구사하는 원주민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농경생활을 주로 했지요. 레나피족은 델라워어Delaware족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의 뉴욕 시 일대를 비롯해 뉴저지와 델라웨어 만 일대에 거주했습니다.

5. ‘세 자매’란 북미에서 농경에 종사하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전통 농법으로, 호박과 옥수수, 콩을 섞어서 재배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척박한 농지에서도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었기에, 북미 동부의 부족들이 더 북쪽의 다른 부족들과 달리 농경 위주의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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