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흔들어라 (1)
13. 배를 흔들어라 Rock the Boat (1) - 더 휴스 코퍼레이션 (1974)
원래대로라면 한참 뒤에 허드슨 강이라 불리게 될 강어귀에서, 시그리드는 이로쿼이 연맹과의 전쟁이라는 금시초문 이야기에 당황하고, 사정 모르는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저를 따라온 학자들과 더불어 새 정착지 이름을 ‘제3의 로마’로 하는 건을 두고 논쟁을 벌이던 1413년 여름.
그로부터 석 달 전, 교역의 강에는 막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한줌에 불과한 좋은거래 개척자들은 대개 그린란드 연대 출신들. 그중 보헤미아나 덴마크 출신들은 ‘교역의 강에도’ 봄이 찾아왔다 하겠지만, 스베인과 콜그림 등 동녘정착지 사람들에게는 아직 봄이 낯설었다. 그들이 겪은 제대로 된 봄은, 아직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벌써 꽤 따뜻하구만.”
망루에 올라 봄바람 쐬던 스베인이 영 시적이진 못한 단평을 남겼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춥다고 난리인뎁쇼.”
예나 지금이나 스베인의 심복인 콜그림이 대꾸했다.
“민병대 때가 좋았지. 그땐 날씨 따위 신경 안 쓰고 잘만 견뎠잖아.”
“대신 그땐 우리가 더위에 고역을 치렀잖습니까.”
이 개척지는, 오다와 사람들은 ‘처음 멈춘 곳Mooniyaang’이라 부르고 강 주변의 원주민들은 ‘나뉘는 곳Tiohtiake’이라 불리는 널따란 하중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쪽 면은 강을 마주하고, 다른 한 면은 하중도 가운데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만 도랑이 해자 노릇을 해 주고 있었으며, 나머지 두 면은 작년 겨울, 땅이 얼기 직전에 겨우 세운 나무 벽과 급조한 목책이 방어의 전부였다.
그런 방어 대책을 마련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 콜그림이 하고 있는 것처럼 차례로 망루에 올라 주변을 감시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강 건너편 어딘가에 있는 긴집사람들 연맹 때문이었다.
“진짜로 강 건너 놈들이 쳐들어오긴 할까요?”
“뭐, 어차피 날 풀릴 때까진 딱히 할 일도 없었잖냐. 시간 때운다 생각하면 될 일이다.”
이 하중도 터줏대감은 아티그나완탄, 즉 곰사람들Attignawantan이라 불리는 부족의 일파였다. 개척자들이 동쪽에서 만난 니놀리노나 오다와, 미크막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오다와 사람들은 이 섬 사람들이 저 ‘못된것들Irnokue¹’ 무리 중에선 그나마 선량한 축에 든다고 딴에는 선의어린 소개를 해준 바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선량한 축에 들기는 했다. 다짜고짜 공격해온 니놀리노 부족들에 비하면 꽤 정중하기까지 했다.
지난 겨울, 그들을 이곳에 정착하라고 초대했던 부족의 우두머리 테웨론Tehwehron이 식량과 오예아우그와(담배)²라는 약초를 선물로 들고 찾아와서는 공용어로 더듬더듬 밝히기를,
‘우리가 그대들 이곳에 초대한 것, 다른 생각 있어서였소.’
하였던 것이다.
딱 정착지 공사가 한창일 때 나타나 그렇게 속내를 밝힌 것을 보면, 나름 선을 지키면서도 꾀를 쓴 셈이었다. 이제 와서 그간 공들인 것을 버려두고 물러나기는 영 아까웠으니까.
‘설마 우리를 댁들 싸움에 끌어들이려는 게요? 저 니놀리노인가 뭔가 하는 놈들처럼?’
스베인이 따져묻자, 추장은 진솔하게 답해주었다.
‘그대들 속일 생각은 없소. 저 긴집사람들(이로쿼이 연맹)과 싸우는 것은 우리 몫이오. 그러나 우리는 교역을 원하오. 교역을 해서 좋은 무기 얻기를 원하오. 그러면 우리 힘으로 이 땅을 지킬 수 있소.’
이미 긴집사람들은 강 남쪽의 어지간한 부족들을 모두 쫓아내거나 없애버렸고, 이제는 강이 흘러가는 모든 주변 땅을 차지할 심산으로 이곳 근처까지 다가왔다고 하였다.
그런 사정을 이실직고하면서, 일손을 보내오고 근처에 쓸 만한 목재가 있는 곳도 안내해주는 등, 개척지가 고작 반 년만에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는 데 큰 도움까지 주었으므로, 개척지 민심은 – 고작 일백 명 전후한 개척자들을 두고 ‘민심’ 논하는 것도 좀 우습긴 했지만 – 꽤 테웨론에게 우호적이었다.
“그 긴집사람들인가 하는 놈들, 꽤 악질이라더구만. 저들 머릿수 많은 걸 믿고서, 주변 부족들이 한창 바쁠 때를 노려서 공격을 해 온다더라.”
콜그림을 비롯한 개척민들이 번갈아 이곳 망루를 지키면서 강 너머를 감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니 다들 지루하게 개척지 주변에만 머물고 있었다. 오죽하면 스베인조차 콜그림이 번을 서고 있는 망루에 찾아와 이렇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겠는가.
“시그리드 말로는 여기 사람들이 모두 교역에 응할 거라고 했다. 그 긴집 뭐시기 놈팽이들도 우리가 여길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싸움박질 때려치우고 돈벌이나 하러 올지도 모르지.”
원 역사의 북미 동부 원주민들이 모피 교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는 것을 아는 시그리드의 단언이었다.
“여하튼 놈들이 나타나면 일단 대화부터 하고 보는 거다. 총 가지고 있다고 나대지 말고.”
작년 가을, 막 강 상류로 출발하는 스베인을 붙잡고 시그리드가 신신당부한 바 있었다. 세줄기불꽃이든 긴집사람들이든, 이왕이면 공동의 이익을 명분삼아 모두 데리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니, 최대한 평화적으로 교역과 대화를 시도하라고.
“시그리드 아씨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요새 아씨를 미덥잖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디다.”
“언제부터 남들 떠드는 얘기도 듣고 다녔냐? 항상 떠벌거리느라 그 귓구멍 열 겨를도 없는 줄 알았다.”
“요새 좀 생각이 많아서요.”
콜그림은 이야기 재주는 있었지만, 듣는 재주는 부족했고, 생각하는 재주는 더욱 부족했다.
그러나 온갖 소동을 다 겪고 이곳 빈란드에 도착하면서부터는 홀로 떨어져 생각할 시간이 꽤 늘어났다.
이방인 욘이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동녘정착지의 불만 많은 사람들은 오래된 신들을 몰래 섬김으로써, 다른 이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일 수 있었다.
그 쓰임새가 다한 지금,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에 심취한 나머지, 그들의 벗이자 웃어른 같은 신들이 교회의 막연히 지켜보는 신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된 콜그림은 어느새 브라타흘리드의 같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조금 동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큰겨울 핌불베트르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금방 도래할 줄만 알았던 라그나로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프라하에서 시그리드가, 멸망도 구원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그린란드 사람들이야, 시그리드 덕에 이곳까지 왔으니 함부로 험담이라도 하는 놈이 나오면 바다코끼리 잡듯 족쳐버려야 하겠지만.”
“하기야, 그렇겠죠.”
허나 스베인은 시그리드가 아니었고, 그런 콜그림 속마음을 헤아리는 재간도, 굳이 그런 데 신경 쓰는 섬세함도 없었다.
화제가 시그리드의 근래 행적 쪽으로 빠지려던 차, 멀리서 ‘텀벙’ 물소리가 났다.
“어, 또 왔습니다.”
“그러게.”
테웨론의 딸 카나스탓시Kanahstatsi가 망루에서 잘 보이는 강가에서 작살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카나스탓시는 잊을 만하면 이렇게 개척지 근처에서 얼쩡거리곤 했다.
상이한 미의식의 장벽을 넘어서는 카나스탓시의 맵시에 홀랑 넘어간 좋은거래 정착지의 남정네들은, 필시 테웨론이 이방인 개척자들을 불신하여 감시를 붙인 것이니, 매의 눈을 지닌 자신에게 저 야만인 여인을 감시하는 중임을 맡겨주십사 간청하곤 했다.
처음 이 땅을 개척할 때의 긴장이 가시자, 자연스럽게 마음은 남녀 간의 그런 쪽으로 다가갔다. 하물며 봄이 찾아온 지금은 어떻겠는가.
그나마 딸을 둔 부모들이 바다 너머에서 하나둘씩 넘어오기도 하고, 지난날 좋은희망에서의 협의 이후에는 호기심 혹은 야심에 찬 니놀리노 사람 몇몇이 선뜻 다가와 혼사를 제의하기도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로마인들의 옛 지혜 – 그러니까, 플레톤식 지혜 말로 사비니 여인들 약탈하던 로물루스 시절 지혜 – 를 언제 재발견했다 한들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대장도 새장가 들어야죠.”
시그리드네 부모와 함께 아이슬란드로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스베인의 전처는 남편과 사이가 도탑지도 않았고,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재혼 생각 막 하려던 차에 이방인 욘이 사라져버렸고, 어어 하는 사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네놈이나 아내 맞을 생각을 해라. 브라타흘리드 더부살이 시절도 아니고, 지금은 결혼쯤은 감당할 수 있지 않냐. 일전에 스타이눈인가, 그 아이슬란드 유부녀한테는 잘만 집적거리드만.”
“거 참, 옛일 꺼내시기는.”
“아니면 모처럼 그 귓구멍 열고 다니는 김에, 우리 시그리드 배필이나 수소문해보든가. 지금이야 여기저기 쏘다니드라 바쁘지만, 언젠가는 정착하지 않겠느냐.”
“그 정도라면야 당연히 해야지요. 우리 아씨한테 어울릴 법한 사내가 어디 있을까 싶긴 합니다만.”
콜그림은 자신이 스타이눈 꼬드기던 얘기로 화제가 돌아갈까 살짝 걱정되었는지 딴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진짜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걸까요? 저 여자 말입니다.”
“카나스탓시가 우리를 감시한다고? 그렇다기보다는 어떻게 우리랑 잘 해 보려는 심산이겠지.”
듣자하니 이 동네에서도 정략결혼을 그리 많이 한다고 했던가. 이곳 개척지에 시커먼 남정네만 그득 차 있는 것을 알게 된 테웨론이, 어떻게 혼맥으로 이 강력한 이방인들을 엮어볼 심산으로 저의 딸을 일부러 잘 보이는 곳을 오가도록 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저쪽이 뭔 수작을 부리든 안 넘어가면 그만 아니겠느냐.”
“엥, 저기 보십쇼.”
생선을 가득 바구니에 담고도 아직 모자란 듯 작살질을 하던 카나스탓시가, 어느덧 자리를 떠나 스베인과 콜그림 있는 망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스베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예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저렇게까지 부르는데, 내려가서 인사나 하고 오마.”
망루에서 내려간 스베인은, 나무 벽 안쪽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오른 뒤, 대충 저의 키 정도 높이인 벽을 넘어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 화끈한 이동 방식은 상상을 못 했는지, 한참 멍하니 스베인을 바라보던 카나스탓시는, 스베인이 제 앞에 설 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저의 바구니에서 어떻게 그 안에 잘 들어가 있었는지 궁금할 만큼 큼직한 월척 한 마리를 꺼내 내밀었다.
“스베인. 선물이에요. 생선 맛있어요.”
“엇, 고, 고맙소.”
그러고는 한참을 서로 엉거주춤.
“잘 먹겠소.”
“아, 네. 그, 구워서 드시면 맛있어요.”
당연히 상하기 전에 잘 먹을 것이요, 당연히 생선을 구워서 먹지 날로 먹지는 않을 터였으나, 어차피 오가는 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어버버 하다가 하나는 저의 마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망루로 돌아왔다.
“아이고, 퍽이나 수작에 안 넘어가시겠습니다그려.”
“시끄럽다.”
“남들은 요새 저들 근무 설 때 저 여인네 안 보인다고 시덥잖게 궁시렁대던데, 대장이 망루에 올라오기만 기다렸나 봅니다.”
“여인네가 아니라 카나스탓시다.”
“예, 예.”
봄날이었다.
그 봄날도 저물고, 강물 위를 비추던 마지막 박명도 사라진 지 오래. 동틀녘 즈음하여 스베인은 망루에 다시 올랐다.
고작해야 한줌인 개척민들 사이에서 대장이니 말단이니 나누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스베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의 차례가 되면 이렇게 경계를 서곤 했던 것이다.
허나 콜그림 이하 그 누구도 적적한 오밤중 말동무 노릇을 해주진 않고 있었다.
“나는 저들 번 설 때 말동무 해주었는데, 나쁜 놈들.”
곤히 새벽잠에 빠진 콜그림이 이 혼잣말을 꿈결에라도 들었다면,
‘오밤중에 그 처자가 또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원래 밀회는 둘이서 해야 밀회지요. 그러고 보니, 혹시 저랑 말동무하려고 망루에 올라온 것도 저 처자 만나려고 댄 핑계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응수했을 터. 뒷부분 절반은 사실이었기에, 스베인은 딱히 부정도 못하고 부들대기만 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베인은 카나스탓시 생각을 억지로 끊어내고, 대신 앞서 콜그림과 얘기 나누던 중 나왔던 시그리드 얘기에 집중했다.
확실히 콜그림의 말이 맞았다.
시그리드가 없었더라면, 그들 중 누구도 이 땅에 살아 도착하진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동녘정착지 사람들을 제외하면, 꼭 이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그리드야 욘의 이름과 검은 책을 근거로 내세우겠지만, 그것도 동녘정착지 사람들 사이에서나 먹힐 것이다. 그 다음은 말비욤의 덕을 본 프라하 사람들일 테고.
허나 같은 보헤미아 사람들 중에도 흑사병 이후에 후스의 이름을 듣고 모여든 경우도 많았고, 따지고 보면 시그리드에게 피해를 입은 쪽에 드는 기사단국 출신 독일인 이민자들도 있었다. 성직자들의 사탕발림 혹은 금전적 설득에 넘어가 이역만리로 오게 된 로마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기랄. 이런 고민은 파울 그 샌님의 몫인데.”
투덜거린다고 해서 그런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그리드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겠노라 했지만, 시일이 흐를수록, 점점 다양한 사안을 마주하게 될수록, 이런 질문이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쪽이 앞인가?’
‘누구 맘대로 그 앞이라는 방향을 정하는가?’
‘그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굳이 저 말도 안 통하는 야만인 무리들을 함께 끌어안고 가야만 하는가?’
냉정히 말하자면, 시그리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아랫돌 빼어 윗돌 괸 것에 불과했다. 잠시 저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뒤에는 자유와 번영이 있을 것이라 말로든 행보로든 역설하면서.
공용어가 영어를 본따 만든 ‘새 언어’로 정해질 때, 시그리드는 이미 북방어에 익숙하던 그린란드인들과 어려운 문법에 질색하던 칼라알릿 부족, 바스크인들의 힘을 빌려 보헤미아인과 로마인들을 억눌렀다.
저들을 공격한 야만인들에게 보복하는 대신, 함께 번영하자며 손을 내밀었을 때, 시그리드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조차 동녘정착지 어딘가의 서생들이 만들어낸 초안을 그들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다루는 데는 일말의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이런 불만 역시 즉각 해소하기보다는, 정신없이 넘어오기 시작한 개척민들과 함께 각지에 새 정착지를 세우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시일이 지나면, 자신이 드러내보일 결과가 곧 자신이 내놓은 답에 대한 근거가 되리라 믿으면서.
허나 시그리드에게야 그것이 정답이겠지만. 그것이 정답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시그리드 하나뿐이었다. 그 어떤 역경과 유혹 속에서도 바라지 않은 그 순진함은 어쩌면 독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시그리드를 위해, 시그리드가 믿는 그 대의를 위해 언젠가는 시그리드의 반대편에 서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답 외에는, 암만 고민해봐야 뚜렷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오, 머리야.”
그렇게 간만의 고민으로 분주히 머리 굴리던 스베인은 어느새 슬쩍 졸았다.
다시금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동녘이 조금씩 밝아올 때였다. 그러나 스베인을 깨운 것은 슬그머니 트는 동이 아니요, 바로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연기?”
어슴프레한 가운데, 강의 이쪽 편, 테웨론과 카나스탓시가 사는 곰사람들 마을 쪽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기에는 너무나 진하게, 무언가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함성과 비명.
“다들 일어나라! 비상이다, 비상!”
스베인은 있는 힘껏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지 사람들이 눈 비비며 몰려나왔다.
“밤사이에 강 건너 잡것들이 이쪽으로 넘어온 모양이다! 어떻게 풀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모두 무장을 하고서 내 지시를 기다려라!”
시그리드는 이 땅의 원주민 모두를, 공존과 번영의 이름으로 함께 품고 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허나 암만 그래도, 만약 저들이 먼저 이쪽을 향해 활을 겨눈다면, 그때는 당연히 필요한 수단으로써 스스로 보호해야 할 것이었다.
망루에 올라 불타는 마을 쪽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까. 곧 섬 중앙의 마을과 이곳 개척지 사이의 숲속에서 사람들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스베인은 욕지거리를 삼키곤 외쳤다.
“문 열어라! ‘생명의 물(알코올)’ 준비하고, 얼른 강물 떠와서 끓여!”
대열 맨 앞에 있는 것은, 화살 여러 대를 맞고 축 늘어진 아버지 테웨론을 업고서 달려온 탈진 직전의 카나스탓시.
카나스탓시와 함께 도망쳐온 여인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고 달려오고, 누군가는 부상을 당해 쓰러진 저의 형제와 남편을 업고 왔다.
일찍이 스베인이 처음 여기 닿았을 때 만났던 테웨론의 아들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도록 흩어져 시선을 끌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목숨을 잃었으리라.
테웨론의 부족이 저들을 일부 이용해먹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런저런 호의와 편의를 베풀어주었음을 잘 아는 개척자들은 스베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다친 이들과 지친 이들을 겨우 바닥에 다 누일 무렵,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온 긴집사람들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임무가 있으니만큼, 일단은 저쪽 얘기를 들어보아야 하겠지. 저쪽에 우리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군.”
테워론이나 카나스탓시를 억지로 데려와 통역을 시키긴 저어되었던 스베인이 말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저쪽 전사들 중에는 어떻게 익혔는지는 몰라도 짧은 공용어를 하는 자가 있었다.
“이방인들, 들으시오!”
스베인은 망루 위에 올라, 저에게 말을 건 긴집사람들 연맹 측 전사를 내려다보았다.
“듣고 계신다.”
“우리는 카니엔케하카Kanienkehaka 전사요! 평화를 위해 왔소!”
카니엔케하카, 즉 ‘부싯돌 사람들’은 긴집사람들 연맹을 이루는 다섯 부족 중 가장 동쪽에 있는 부족이라고 했다.
“딱히 평화를 위한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평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긴집사람들, 좋은희망 의회가 세워진 것 축하하오!”
긴집사람들이 유별나게 잘 짜인 체제를 갖추어서 그렇지, 사실 세줄기불꽃 의회를 비롯해 주변의 부족 연맹이라는 것은 딱 ‘때때로 만나서 중요한 것을 함께 논의하고, 선물도 주고받자’ 하고 약속한 부족들 모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지난 가을 좋은희망에서 시그리드가 니놀리노와 이누이트, 미크막 사람들을 한데 모은 것도 나름 건국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주민 기준이었지만.
“하여, 이곳에 평화를 가져오고 그대들과 같은 자리에 서고자 하오!”
저쪽 전사의 짧은 공용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던 내부 사정은 이러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좋은희망 의회에서 선물로 흩뿌린 철제 도구들이었다. 대개는 바다 건너에서 헐값에 수매한 식칼이나 자귀, 단검 따위였지만, 그것만 해도 이곳에서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여러 용도로 쓰이지만 교역할 때는 화폐처럼 기능하는 왐품wampum³을 바닷가 사람들이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저 동쪽에서 온 이방인들이 세운 연맹과 동등하게 교섭하려면, 우리 또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꽉 쥐고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긴집사람들 연맹의 수뇌부가 빠르게 내린 결론이었다. 저들이 교역의 강이라 부른다는 그 큼직한 강. 그 주변의 모든 부족을 복속시키거나 쫓아낸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었다. 이미 연맹은 그쪽으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므로, 조금만 더 열심히, 약간만 더 힘을 실어 정복에 나서면 그만이었다⁴.
“우리는 협력할 수 있소! 싸울 필요 없소! 다만 이 벽 뒤로 숨은 자들만 돌려주시오! 평화를 위해서는 그들이 우리에게 복속해야 하오!”
전사가 이어서 외쳤다.
제멋대로 쳐들어와 사람 죽여놓고선 복속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스베인의 조상들도 많이 하던 일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싫다면 어쩔 테냐? 이곳 부족들은 이 개척지가 세워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로선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슬프게도 우리와 그대들은 아직 공존할 준비가 안 된 것이오! 그때까진 우리도 힘을 써야겠지!
해가 머리 위에 뜰 때 다시 찾아오겠소! 그때는 잘 답해야 할 것이오!”
그러고는 전사들은 등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대낮에 다시 찾아올 때는, 지금보다 훨씬 수가 늘어나 있으리라.
망루에서 내려온 스베인에게, 조심스레 콜그림이 물었다.
“대장,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기는.”
고민을 한다면야 꽤 오래 끌 수도 있으리라.
시그리드가 저를 이곳에 보낸 까닭은, 원주민들과 성급히 충돌하는 일 없이, 좋은 관계를 구축하라는 뜻에서였다.
검은 책 속의 미래 지식은, 이곳의 끝없이 펼쳐진 숲속에서 구한 모피가 멀리 유럽에서 비싸게 팔릴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고, 또 그 막대한 이익 앞에서 유럽인들과 원주민들이 손을 잡았음을 말해주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부족들 간의 다툼에 끼어들어 어느 한 편을 든다면, 그로 인해 한동안 ‘좋은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고 처절한 싸움만 벌어진다면 시그리드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터져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시그리드를 따랐던 충실한 부관이 항명을 한 셈이니, 설령 스베인에게 그런 항명의 의도까지야 없었다 한들 이미 불만을 품은 이들은 이를 전례 혹은 계기로 삼을 터.
“지금 우리 숙소 안에 누워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이고, 더구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아녀자와 부상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저놈들 손에 넘겨주어서야 되겠느냐.”
‘생명을 아끼는 여인’ 리프트라사의 별명을 스스로 택한 시그리드가 이 자리에 서 있다 한들,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번영이니 평화니 하는 것도, 결국에는 시그리드의 가장 중요한 대의, 사람의 삶을 가능한 한 짓밟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그 뜻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스베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몇 시간 뒤, 정말 약속대로 돌아온 긴집사람들 전사들은 예상대로 수가 훨씬 불어나 있었다.
그래본들 일이백에 불과하였지만, 그것만 해도 이 지역의 싸움에서는 나름 대군이었고, 백 명에 채 미치지 못하는 개척자들보다 수가 많았다.
더구나 저들은 언뜻 보아도 이곳의 싸움에 도가 튼 무리. 그러지 않고서야 밤중에 몰래 강을 건너 마을 하나를 쓸어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이방인들, 결정하셨소?”
망루 위에 스베인이 서 있는 것을 본 일전의 전사가, 다시 한 번 다가와 물었다. 이번에는 홀로 나아오는 대신, 언제든 시위 당길 채비를 한 전사들 여럿과 함께 다가와 있었다.
그들 모두를 돌아보며, 스베인은 말했다.
“그렇다. 부상자들과 아녀자들 모두, 들어와서 마음껏 데려가도 좋다.”
공용어를 아는 전사가 주변에 빠르게 말을 옮겨주었다.
그리고 안도와 함께 퍼지던 웃음은 금방 멎었다. 스베인 입가에 서린 험악한 냉소가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제 뛰어내렸을 때와 비슷하게, 그러나 어딘가 무서운 동작으로 스베인은 금방 망루에서 내려와 목책을 넘었다.
벼락 같은 움직임, 그리고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그 덩치에, 전사들의 눈에도 조금씩 두려움이 서렸다.
“단, 데려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전사들이 막 시위에 화살을 매기려던 차.
저의 도끼와 급조한 나무 방패를 들어올리며, 스베인은 외쳤다.
“자, 가자! 발할라가 기다린다!”
“발할라!”
문이 발칵 열리며, 그린란드 사내들 또한 달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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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 서술한 것처럼 ‘이로쿼이’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뱀 같은 놈들’, ‘못된 놈들’, ‘방울뱀 같은 것들’ 등, 그들과 대립하던 알공킨계 부족들이 쓰던 멸칭 중 하나가 기원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모호크 족의 이름도, 알공킨계 부족들이 쓰던 ‘식인종’이라는 뜻의 멸칭에서 유래했습니다.)
15세기 초 몬트리올 지역을 포함한 세인트로렌스강 일대에는 아직 이로쿼이 연맹에 참여하지 않은 이로쿼이계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이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점차 동쪽이나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1535년 유럽인 중 처음으로 세인트로렌스 강을 탐험한 자크 카르티에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고작 몇몇 거점에서 마지막 부족들이 저항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마저도 17세기가 되기 전 전멸했고, 세인트로렌스 강과 오대호 일대는 이로쿼이 연맹과 알공킨계 부족들의 패권다툼 무대가 됩니다.
따라서 이로쿼이 연맹이 이 일대를 점령하기 전에 해당 지역에 어떤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조차 전하지 않아, 그저 ‘세인트 로렌스 일대 이로쿼이계 부족’이라는 모호한 통칭을 쓰는 실정이지요.
이로쿼이계 부족이던 ‘곰사람들’은 15세기경 북상하는 이로쿼이 연맹에 대항해 ‘줄사람들Attigneenongnahac’과 연합하여 ‘반도의 사람들Wendat’이라 불리는 작은 연맹을 이루는데, 이 연맹에 속한 이들을 프랑스 개척자들은 휴런Huron 족이라 통칭했습니다. 이들의 한 일파가 연맹에게 밀려나기 전 몬트리올 일대에 거주했다는 것은 작중의 창작이지만, 나름의 개연성은 있는 추측이라 감히 자평해봅니다.
2.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재배된 담배는,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교역망을 통해 북아메리카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비교적 농경에 적합한 오대호 일대에서도 담배 농사는 활발히 이루어졌고, 약용이나 의례 용품, 교역 상품 등으로 널리 쓰였지요. 일례로 이로쿼이 연맹의 팽창에 밀려나 소멸한 오대호 인근의 한 부족은,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기에 프랑스 탐험가들에게 담배족Petun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3. 왐품은 조개껍질을 연마해 만드는 염주 형상의 장신구입니다. 북미 동북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쓰인 왐품은, 실제 염주나 묵주처럼 종교적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거래의 수단으로 더 널리 쓰였습니다. 17세기 초 유럽인들이 뉴잉글랜드 지방에 도착했을 때, 왐품은 알공킨계 부족들과 이로쿼이계 부족들을 막론하고 일종의 화폐로 쓰이고 있었지요. 아직 유럽인 식민지가 원주민 공동체를 압도할 만한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심지어 유럽인 식민지 내에서도 왐품이 화폐로 쓰이곤 했습니다. 예컨대 1705년 버지니아에서 최상급 왐품 1야드는 영국 돈으로 1실링 6펜스로 환전될 수 있었습니다.
왐품이 가치를 지녔던 한 가지 이유는, 왐품의 원료인 조개껍질을 구한 다음 석기를 이용해 가공하는 과정이 까다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인들을 통해 철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왐품의 가치는 급락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17세기를 거치면서 내륙의 알공킨계 부족들과 이로쿼이 연맹이 모피 교역에 뛰어들면서 왐품의 가치는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모피 본위제가 형성된 셈이지요. 그 덕에 왐품은 비교적 희소한 조개껍질로 만든 것을 고액권으로 삼는 등의 방식으로 화폐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다양한 조개껍질을 활용해 왐품을 안데스 산맥의 결승문자처럼 기록매체로 사용하려는 시도까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4.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이미 유럽인 도래 전부터 이로쿼이 연맹은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으로 확장을 해나가고 있었고,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고, 모피 교역의 등장으로 새로운 수입원까지 얻게 되면서 이러한 팽창에는 새로운 원동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 결과가 1609년부터 1701년까지 약 백 년에 걸쳐 벌어진 정복전쟁, 비버 전쟁Beaver Wars(모피 전쟁이라고도 합니다)이었습니다. 북미 내륙과 해안의 유럽인 식민지 사이 교통로를 점거해 무역을 독점하려는 의도로 북상하기 시작한 이로쿼이 연맹은, 결국 한동안 오대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여 영국과 프랑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역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