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56화 (56/116)

배를 흔들어라 (2) -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13. 배를 흔들어라 Rock the Boat (2)

멀리 남쪽에서 상상도 못한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돌아온 시그리드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는 새 정착지 곳곳에 세워질 교회에 부임할 사제들을 인솔해 좋은희망으로 건너온 파울 주교였고, 다른 하나는 좋은거래 정착지에 스베인과 함께 있었어야 할 콜그림이었다.

“아이고, 아씨!”

“때맞추어 왔구나, 시그리드. 상황이 썩 좋지 않단다.”

스베인이 개척을 도와준 곰사람들의 편을 들어 긴집사람들과의 싸움에 나선 이후, 상황은 예상할 수 있듯 악화일로를 걸었다.

활과 활의 싸움에만 익숙하였던 모호크 전사들은, 큼직한 도끼와 급조한 나무 방패를 들고 ‘발할라’를 외치면서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건장한 북방인들의 돌격에 당황하여 줄행랑을 쳤더랬다¹.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한 번 매운맛을 본 놈들은, 아예 주변 숲에 진을 치고서 툭하면 기습하는 것을 일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탓에 제대로 먹거리도 못 구하고, 목책 안에 갇힌 셈이 되어버렸습죠.

다행히 테웨론 추장이랑 카나스탓시 아씨 덕에 한참은 굶주리지 않고 버텼습니다만, 그것도 곧 어려워질 겝니다.”

시그리드의 검은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욘의 세상에서 몬트리올을 개척하려다 난관에 부딪혔던 프랑스인들에 비하면 스베인네의 사정은 훨씬 나은 축에 들었다².

아직 근처에는 우호적인 부족 여럿이 남아 있었고, 모호크 측에는 화약무기가 없었기에, 낮에 기회를 보아 근처에 테웨론네 부족이 묻어둔 비상식량을 캐내러 가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서 테웨론네 부족이 무너지면 그 다음 차례가 될 주변의 부족들에게 식량을 지원받으러 나갈 수도 있었다.

허나 목책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의 수는 개척자들과 테웨론네 부족의 생존자들을 다 합쳐 이백을 넘겼다. 인근 부족들로서도 이들의 식량을 마냥 대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도저히 저희만으로는 이 포위 아닌 포위를 풀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스베인 대장은 저를 여기로 보냈습니다. 테웨론 어르신이 붙여준 길잡이와 함께 배를 타고 하류로 향했는데, 도중에 습격을 당해서 그만 좌초하고 말았지요.”

이곳 좋은희망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났건만 여전히 초췌한 콜그림의 얼굴은 그간 겪은 천신만고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습격이라고요?”

“네, 아씨. 교역의 강 하구에, 그 긴집사람들 편으로 돌아선 부족 몇몇이 있습니다. 아예 놈들의 전사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여, 상전처럼 모시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좋은희망 의회’의 등장은, 강 상류의 긴집사람들과 강 하류의 미크막족 양쪽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던 부족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원수가 멀리 있는 앙숙보다 더 밉고 무섭기 마련이니, 테웨론의 부족을 돕기로 한 그 주변 이로쿼이계 부족들과 같은 논리로, 강력한 이방인들과 손잡은 미크막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강 하류의 부족들은 긴집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배라고 해보아야, 칼라알릿 사람들의 카약만 못한 정도니까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한 호위 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그 목적은 달성하는 셈일 것이라고 디폴트 경은 말하더구나.

게다가 그 긴집사람들은 전쟁뿐 아니라 정치에도 꽤 능숙한지, 그 강가 부족들 사이에 아예 사절을 보내서 저들의 주장을 주변에 알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 주장이란 대체로 이러하였다.

‘건너온 사람들’은 평화와 공존을 말하지만, 공존은 결국 힘이 대등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상막하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난 뒤 그 힘을 바깥으로 돌리기 시작한 긴집사람들 연맹의 다섯 부족이 그 증인이었다.

그리고 ‘건너온 사람들’은 쇠붙이를 독점하고 있으니, 이쪽에서는 모피를 독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로 가치 있는 물건을 독점하게 되어, 비로소 공존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저들 이방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 중 한 무리를 이끌던 추장 스베인이, 이쪽의 제안을 거절하고 외려 무섭게 달려들어 전사들 몇몇을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따라서 이럴 때야말로 더욱 하나로 뭉쳐서, 저들 이방인들이 이쪽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쪽에도 그런 주장이 전해지고 있나 보군요.”

“간혹 강을 건너서는, 마을 근처까지 와서 그렇게 외치고 간다더라.”

그렇다면 스베인 또한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 곧 좋은희망에도 번질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

시그리드 입장에서는, 이 땅에 발을 붙인 이래 공존과 화합을 말하면서 행한 일들이 고스란히 역풍이 되어 돌아온 격이었다.

공존 따위 거창한 소리를 하며, 잔뜩 주변에 쇠붙이 흩뿌리면서 원주민들의 환심을 산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검은 책에 언급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모피 교역 이야기에 혹하여, 성급하게 교역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교역 기지를 차린 것은 또 어떻고.

거기에 처음부터 시그리드와 함께 해준, 항상 곁을 지켜준 스베인이 교역의 강 상류에 사실상 포위당해, 그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

순간 닥치는 아찔함에, 한두 발짝 뒷걸음질치며 겨우 벽에 등을 기댔다.

“아씨!”

“시그리드야!”

시그리드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전 괜찮아요. 계속 배만 타고 다녔더니 때늦은 멀미가 닥쳤나 봐요.”

두 사람의 걱정하는 눈빛을 외면하며, 시그리드가 우선 할 일 몇 가지를 정리했다.

“콜그림, 이곳 좋은희망이랑 푸른들판에 있는 용병단 단원들을 모아주세요. 파울 주교님께서는 혹시 괜찮으시다면, 우리가 스베인을 구하러 갈 경우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발생할지를 계산해주시고요.”

“스베인을 구하러 간다면...”

지슈카를 따라다니며 그럭저럭 배운 가락이 있던 시그리드였기에, 어지러운 가운데에도 비교적 말끔하게 가능한 군사적 대응책을 셋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아마 셋 중 하나로 귀결될 거에요.

첫째, 아예 좋은거래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것. 이것만 해도 꽤 많은 배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야 할 거에요. 스베인만 데리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만 해도 이미 시그리드가 허울뿐인 데스포이나 작위 외 다른 권위 없이 개척을 지휘하는 데 불만을 품은 이들에게는 비판할 거리가 될 것이다. 개척자들 본인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그들을 마냥 탓할 수도 없으리라.

“둘째, 어떻게든 지원군과 식량을 계속 강 상류로 올려보내, 거점을 유지하는 것.”

당장은 비용이 적겠지만, 문제는 언제까지 저들과 대치하고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긴집사람들 입장에서도, 강가 부족들 상대로 신생 세력에게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명분을 내세운 이상, 그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쉽게 물러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셋째는, 아예 작은 군대를 소집해 좋은거래 정착지를 구원하고, 여세를 몰아 긴집사람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겠지요.”

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좋은거래 주변을 에워싼 적의 수는 고작해야 이삼백이고, 충분한 자원만 투입할 각오를 한다면 지금껏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위명 혹은 악명을 떨쳐온 긴집사람들에게 동쪽의 새 이웃들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두 번째 방안보다도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방안일 지도 몰랐다.

푸른들판을 비롯한 신생 개척지에서 목축이든 농경이든, 빠르게 자급자족 혹은 그에 준하는 태세를 갖추어야 비로소 바스크 어부들과 몇몇 원주민 부족과의 교역에 겨우 의존하는 불안정한 상황을 면할 수 있을 터.

일손 하나하나가 급한 마당에 수십에서 일백여 명은 될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가는 것은 실로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었다. 당장 굶어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긴 –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 해야 할 테니까.

“시그리드 네게 배운 욘의 회계술 덕에, 계산을 하려면야 할 수는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괜찮겠느냐?”

시그리드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긍정의 뜻이 아님을 콜그림과 파울 모두 금방 헤아릴 수 있었지만, 딱히 군말 붙이지 않고 시그리드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었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허술한 나무 문 너머로 들려왔지만, 두 사람 모두 들은 척은 하지 않았다.

욘의 미래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 이것은 욘 본인부터가 몇 번이고 강조한 사실이었다.

그저 소일거리로 떠벌떠벌 풀어놓은 지식을 가지고서, 그린란드 사람들을 지금 모습 그대로 살려보겠노라며 나선 것은 순수하게 시그리드 본인의 뜻에 따른 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대신, 기존 질서의 허만 찌르면 그만이었던 동쪽 유럽에서는, 그런 허술한 단편적 지식으로도 꽤 큰 울림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침반부터, 북대서양 원양어업, 화약 무기, 위생과 소독, 이제는 말비욤이라 불릴 백신. 활자 인쇄술까지.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시그리드에게 동조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 신대륙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새 출발을 위해 이곳으로 온 이들을 하나로 묶어, 지금껏 없었던 무언가를 꾸리려는 시도. 공감하는 이들 없이 고작 단편적인 지식 한두 조각으로 이루어내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시도였다.

첫 발짝은 무사히 내딛었지만 그뿐.

그다음 발짝부터는 곧장 어려움에 부딪혔다. 어찌 보면 시그리드 자신이 초래한 어려움이었다.

‘어쩌면 책에 답이 있을지도 몰라.’

자기 자신을 애써 설득하면서, 시그리드는 리프의 새장 – 리프는 태평하게 좋은희망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 을 들춰내고 그 아래 깔린 궤짝 깊은 곳에서 검은 책을 꺼내 펼쳤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의 이로쿼이 연맹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일까? 합리적으로 그들과 공존할 방법은?

그러나 그 어디에도 긴집사람들에 대한 그런 답은 없었다. 그저 미국 건국사의 한 단락에 짤막하게 적혀 있는 것이 전부.

‘당연하지. 굳이 공존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디선가, 수상쩍게 에릭의 것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로쿼이 연맹이 이토록 빠르게 유럽인들의 도착에 반응한 것은, 주변 모든 부족을 한데 모아 두둑한 선물과 함께 평화와 공존을 외쳤기 때문이었다.

만약 쇠붙이 대신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를 선물로 주었더라면, 스베인이 처한 곤경은 금방 알아서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마저 일부 참고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고도로 발전된 정치 체제를 갖춘 이로쿼이 연맹이었다지만, 그래본들 문자는 없었고, 지혜와 지식을 전승해줄 이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그만큼 그들의 체제는 겉으로든 속으로든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보다 다른 나라 출신 유럽인들과 싸우는 데 열중하며 신나게 원주민들에게 철제 무기와 머스킷을 팔아먹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로쿼이 연맹은 미국 건국 시점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막 신대륙에 도착한 개척자들이 볼멘소리를 할 때의 대처 방안도, 당연히 나와 있지 않겠지.’

원 역사에서 개척자들은 후원자들에게 목줄을 잡혀 있었으니까. 신대륙의 주인처럼 군림하던 콩키스타도르들도 그들의 진짜 주인인 스페인 국왕에게는 꼼짝 못했고, 후원자 없이 개척을 시도했던 메이플라워 호의 청교도들은 절반 넘는 수가 첫 번째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다.

지금의 개척지에서는, 그린란드 회사가 바로 그 후원자였다. 그린란드 회사는 그저 개척자들에게 배편을 마련해주고, 신대륙 무역과 어업에서 얻는 수익 일부를 개척지에 재투자하는 정도의 창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그 어떤 개척지에서도 회사나 시그리드의 방침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겉으로까지 나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으로 이들 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개척지의 식량 공급은 자급자족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빈자리를 그린란드 회사 소속 어부들이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회사에 딸린 어부들이 잡은 생선을 직접 섭취하든, 주변 부족들과 교역하든 해서 식량 부족분을 메꾸고, 거기에 개척에 필요한 온갖 물자도 공급받고 있었으니, 개척자들의 목숨줄은 아직 회사에 잡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검은 책에 있는 지식으로 아직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하지만 검은 책에도 없는 것을, 이 책 한 권의 내용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게 답인지, 아닌지, 남들에게 설득시킬 자신도 없지 않으냐? 너 자신조차 이제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당연히 자신이 생각해낸 길이 옳으리라, 적어도 원래의 역사보다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그리드는, 뒤늦게 그 순진한 독단의 무게가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새로운 미래를 강요받는 것은 똑같지 않느냐며, 조용히 사라져가던 아베나분 노파.

시그리드 자신의 독단과 판단착오로 인해 진퇴유곡에 빠졌고, 결국 자신의 명령에 항거한 것과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버린 스베인.

어떤 나은 미래를 만들어낸다 한들, 그것이 강요된 미래, 결과로써 사후에 정당화될 미래라면, 그 잘난 원칙이, 유럽의 군주들의 손길을 쳐내면서까지 내세워 왔던 그 원칙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득 시그리드는 염증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비단 어두운 방에서 검은 책의 글귀를 지나치게 뚫어저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책 안에 적힌 지식은 그저 텍스트 조각일 뿐. 그리고 거기에 맥락을 부여해줄 수 있는, 욘과 나누었던 대화의 기억은 오직 시그리드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다.

남의 눈에는, 그저 기묘한 기호와 ‘공용어’ 몇 구절이 적힌, 호기심을 자아내긴 하지만 딱 그뿐인 책으로만 보일 터.

어쩌면 그런 시선이야말로 더 적절하지 않을까. 저 책 한 권만을 가지고, 혼자만의 머리로 하나의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은 만용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막막함과 회의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눈가를 적셨다.

바깥에서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악, 들켰다.”

아직도 ‘제3의 로마’냐 ‘새로운 영원’이냐를 두고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로마인 및 프랑스인 정착지는 정말로 첫삽만 뜬 수준이라, 도저히 황자가 기거할 곳이 되지 못하였다.

허나 그렇다고 동녘정착지가 마냥 따뜻한 남쪽 출신 소년에게 좋은 곳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콘스탄티노스는 지난 여름, 그나마 날씨가 온화하면서 최소한의 안락함은 보장이 되는 이곳 좋은희망에 넘어와 있었다.

공용어 할 줄 아는 집사 겸 경호원 겸 가정교사 딱 한 사람만 제 곁에 남아 있었으니, 간만에 돌아온 시그리드를 보러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그리드 누나한테 힘든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와 봤어요.”

다들 시그리드가 어쩌고, 스베인이 저쩌고 하고, 누군가는 군대 얘기를, 누군가는 우두머리의 잘못을 운운하니, 순수하고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쯤은 짐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더라고요.”

파울 주교와 콜그림이 용건 다 보고 떠나길 기다리면서, 육포 조각으로 꼬드긴 리프의 보드라운 깃털을 쓰다듬던 콘스탄티노스는, 선객 두 사람이 극히 심각한 표정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뭔가 자신이 위로라도 해주면 나아질까 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몰래 다가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별 일 아니랍니다.”

“피, 거짓말.”

그 마음씨가 기특하기도 하고, 또 저 때문에 황자도 이 고생에 휘말려 들었다는 생각에 안쓰러움까지 느낀 시그리드는, 눈물을 감추면서 다른 얘깃거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허나 마음이 온통 심란하니 떠올린다는 딴 얘기도 결국은 한탄이라.

“실은 고민거리가 좀 있긴 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고민거리를 가지고 사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게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래요. 플레톤 선생님이 그랬어요.”

물론 플레톤은 그 다음에, ‘허나 완벽에 근접하는 것은 가능하고, 그 방법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도 말했지만.

“그러니까 뭔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내려놓는 게 속 편하지 않겠어요?”

“그건 왠지 플레톤 선생님 말씀같진 않은데요.”

“네, 이건 스베인 아저씨가 한 얘기에요. 우리가 막 함부르크에 다가갈 무렵에 콜그림 아저씨한테 그렇게 말했는데요...”

시그리드도 대충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찮은 일을 저의 부하에게 떠넘길 때 댄, 핑계라고 하기도 무안한 소리였을 테다.

생각이 다른 쪽으로 새면서, 피식 하는 따뜻하면서도 가벼운 웃음도 함께 입 밖으로 샜다.

그리고 떠오르는 무언가.

“뭔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라...”

“엇, 또 뭐 떠올랐나 보다. 스베인 아저씨가 또 이런 말도 했어요. 누나가 이런 표정 지으면 근처의 군주 누군가가 꼭 수난을 당한다고...”

지금 ‘근처의 군주 누군가’에 해당하는 게 이름뿐인 빈란디아 전제군주인 자신이라는 점은 떠올리지 못하고서 콘스탄티노스는 마냥 떠들었는데, 시그리드 귀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신대륙에 자신이 원하는 이상을 그리는 것은, 그것이 그저 빈궁함에서 자유로운 풍족한 삶이든, 아니면 어떤 거창한 대의의 구현이든 간에, 어떤 선에서는 현실과 타협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타협이란, 결국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 이상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뜻을 대신 받아들이는 것.

하지만 타협을 피할 수 없다 할지라도, 어떤 부분에서 타협할지는 충분히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그리드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것. 그리고 내려놓아도 무방한 것.

두 가지를 곰곰이 생각하던 시그리드는, 금방 결론을 내렸다.

연신 고맙다면서, 영문 모르는 콘스탄티노스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무엄을 범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뭐라 할 콘스탄티노스는 아니었지만.

좋은희망과 맑은바다의 두 정착지, 그리고 따뜻한환영까지 합하면 벌써 바스크인 제외 상주인구만 삼천 명.

그나마 이곳의 어장이 풍족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만큼 그물만 던지면 고기가 잡히는 수준이고, 차차 목장과 농장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벌써 기근이 한두 번쯤은 닥쳤을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위기에 처한 좋은거래 정착지를 구하기 위한 지원군이 소집되고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좋은희망 유일의 여관 겸 주점 겸 양조장(올해부터 시작했다) 겸 잡화점(간혹 들리는 원주민들이 고객이었다) 주인 노릇을 하는 전직 보급관 헤니히를 비롯해, 당장 좋은희망과 푸른들판만 해도 그린란드 연대 출신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을 모으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손은 사라지고 풍족하다곤 말할 수 없는 식량은 군량으로 지출될 판. 이미 가뜩이나 시그리드의 개척 방침을 두고서 말이 나오는 상황에, 썩 좋은 이야기만이 나오진 않았다.

아직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지원군이 무엇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갈지, 좋은거래 사람들을 구출한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 등 어느 하나 밝혀진 바가 없음에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각 정착지 대표들과 긴히 논의할 사항이 있으니, 가을에 예정된 원주민 부족과의 회의를 미리 준비하는 셈 치고 다들 모여달라는 시그리드의 소환이 주변에 전해졌다.

좋은희망에서 꽤 떨어진 마나하탄 섬의 정착지와 따뜻한환영에도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서 이주민을 싣고 오가는 배편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소환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모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고기잡이철에 들리는 바스크인들까지 합하면 인구 오백에 달하여 주변 최대의 마을이 된 좋은희망.

가장 널찍한 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임의 장소가 되곤 하는 헤니히네 상점 겸 주점 겸 여관 뒤편 창고에 스무남은 명 사내들이 모였다.

원주민들과의 정기 회의에서 이쪽 개척민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선출된 대표들.

그러나 사실 원주민들과의 대화에서 딱히 엄청난 토론이나 강연이 이루어질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았으므로, 대개는 그저 딱히 대단치는 않지만 부족한 것도 없는 사람들, 다른 이들 망신 시키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뽑히곤 했다.

그리하여 보헤미아인들은 덜컥 때이른 소집령이 떨어지자, 정말로 뭔가 중대한 사안이 논의될 경우에 대비하여 저들의 진짜 지도자인 후스를 보냈고, 로마인들 중에는 자연스럽게 플레톤이 좋은희망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독일인들은 보안관 디폴트를 찾아가 동행을 청했다.

(그리고 가장 시끄러운 플레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나머지 로마인들은 ‘로마’가 보통명사라고 우기면서 ‘제3의 로마’라고 정착지 이름을 정하자고 우겼던 플레톤의 안을 각하하고 그냥 ‘우애의 도시’ - 헬라스 말로는 필라델피아 – 로 지명을 정했다.)

그 외에도 아직은 고작 열댓 가구가 전부지만 차마 잉글랜드인들도 보내는 대표를 안 보낼 수는 없던 ‘우애 시’의 프랑스인들도 자크 다르크를 보냈고, 그 외에 롤라드파 잉글랜드인들과 상주인구는 아니지만 아직 농경만으로 자급자족이 안 되는 개척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바스크 사람들도 대표를 보냈다.

그런 식으로, 이미 온갖 사람들이 모였고 앞으로도 더욱 각양각색이 될 신대륙 개척민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듯한 대표들이 한곳에 모였다.

마침내 그린란드인 대표 스노리 – 아직 정정히 살아 있는 스노리 노인과는 동명이인이었다 –와 칼라알릿 대표 이갈리코와 함께, 시그리드와 파울이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은, 시그리드나 파울이 아닌, 시그리드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무언가’에 꽂혔다.

시그리드가 곧 자신이 준비해온 말, 저도 모르는 사이 지니게 되었고 또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었던 권력을 내려놓고자 한다는 말을 꺼내게 된다면, 금방 시그리드가 들고 온 검은 책에서 그 책 주인에게 도로 쏠리게 될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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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북미 원주민의 이미지 상당 부분은,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의 모습입니다. 예컨대 북미 원주민 전사 하면 떠오르는, 손도끼 겸 투척무기 토마호크를 들고 머스킷을 등에 맨 채, 말 위에 올라 평원과 숲을 누비는 그런 모습은 화약과 금속 무기, 말이 모두 부재했던 접촉 이전의 원주민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남미 원주민들과 달리 흑요석 무기조차 사용하기 어려웠던 북미 동부 원주민들은, 주로 투창과 활 등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교전하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이 17세기 초, 뉴잉글랜드 해안 개척을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빠르게 화약무기를 도입하고 금방 이를 북쪽의 알공킨계 부족들과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사용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붉은머리 에이릭의 사가』에 기록된 바이킹들과 빈란드 원주민들의 전투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모피 무역을 시도하던 바이킹들을 포위한 원주민들은 능수능란한 기만전술과 더불어, 멀리서 투창과 화살을 퍼붓는 전술로 바이킹들을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뜨렸지만, 에이릭의 딸 프레이디스가 앞장서서 칼을 빼들고 돌격하자 원주민들은 그대로 패주하였다고 하지요.

2. 원 역사에서도 몬트리올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이로쿼이 연맹의 비버 전쟁에 엮이면서 한동안 난항을 겪었습니다. 몬트리올은 교역의 중심지가 될 만큼 교통이 편리한 입지에 있었고, 17세기 초 일대의 원주민을 모조리 축출한 모호크족은 해당 지역을 사냥터 겸 주변 알공킨계 부족들을 공격하러 갈 때의 주 진격로로 사용하고 있었지요.

더구나 퀘벡 일대의 초기 개척자들은 작중 시그리드와 비슷하게 모피 교역을 위하여 주변 부족들과 친선을 다지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는데, 이는 프랑스 개척자들이 엉겁결에 알공킨계 부족들과 이로쿼이 연맹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1611년 개척자들이 몬트리올에 처음 세웠던 교역 전초기지는 모호크 족의 꾸준한 습격을 이기지 못하고 방기되었고, 한참 뒤인 1639년에 다시금 세워진 정착촌은 거의 60년에 걸쳐 모호크 족과의 다툼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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