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흔들어라 (3)
13. 배를 흔들어라 Rock the Boat (3)
“이 책이 바로 그 ‘검은 책’이랍니다.”
혹여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시그리드는 저의 책을 좌중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들어보였다. 다행히, 다들 최소한 소문만은 들어보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든 성호를 긋든 하고 있었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슨 사악한 지식이나 주술이 담겨 있는 책은 아니에요. 우리가 무사히 신대륙에 닿은 것도 모두 이 책 덕분이랍니다.”
“그 이방인 욘이라는 이가 품고 있던 지식을 담아낸 책이겠구려.”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고작 오 년 전에, 프라하 외곽의 한 여관에서 욘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얀 후스가 말했다.
“네, 맞아요. 그때는 차마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진실을 모두 밝히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시그리드는 욘에 대한 진실을 밝혔다.
그가 모종의 사유로 거의 육백 년 뒤의 미래에서 1406년의 그린란드에 떨어진 장교였으며, 그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 일들을 가능케 했던 지식을 제게 전해주었다고.
“제가 지금까지 유럽에서 행했던 그 모든 일들은, 많은 분들의 도움 외에도 이 책의 지식 덕분에 가능했답니다. 마법이나 저 자신의 지혜가 아니고요.”
“그렇다면 그 옛날 극북으로 향했던 수도사들의 지식이 아니란 말이오?”
“수도사? 하! 로마인들에게도 그런 지식은 없었소. 그들은 그저 훗날의 무슬림처럼 우리 헬라스의 위대한 지혜를 베껴내는 데 급급했을 뿐.”
헬라스 사람들이 모르는 지식이 이 세상의 것일 리가 없었다. 화약조차 이미 실전된 ‘그리스의 불’의 일종이라 굳게 믿는 고집불통 플레톤이었지만, 엉겁결에 진실에 닿은 셈이었다.
“자, 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마저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그리드는 뒤이어, 자신이 왜 여태껏 이곳 신대륙에서 그토록 공존을 외쳤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위해 지난날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진솔히 밝혔다.
누군가에게 좌우되지 않고,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하고자 미래의 지식을 꺼냈고, 휘둘렀으며,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종국에는 한계에 봉착했고, 오해와 불만을 샀으며, 급기야 오늘의 난국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진실을 밝히고, 여러분과 함께 이 지식을 나누고자 합니다. 더 이상 저 혼자만 아는 목표를 위해 여러분을 강압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해본들 제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으니까요.”
“지식을 나눈다고요?”
그저 들러리로 참석한 줄만 알았던 – 심지어 본인조차 – 자크 다르크가 무심결에 물었다.
“네. 물론 제가 어떻게 이 지식을 얻었는지는, 밖의 다른 이들에게 선뜻 밝히기는 어렵겠지만요.”
그 지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당연히 확언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곳 신대륙에 멀쩡히 도착해 있다는 사실부터가 나름의 증거인 셈이었다.
얼마 전 마침내 공의회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제관을 받은 지기스문트를 비롯해 그 수많은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일개 시골 소녀에게 농락당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보다는 그나마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저 홀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지만 뛰어난 학자와 장인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물건도 분명 있을 거에요. 개중에는 정말로 이 신대륙을 우리 모두의 이상향으로 만들어나가는 기반이 되어줄 것도 있을 테고요.”
시그리드의 해명이 끝나자마자 책을 낚아채고서는 후다닥 읽어내려가고 있던 플레톤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헌데 이 책은 그 자체로 지식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지식을 지닌 사람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간략한 단서만을 추려놓은 듯하군.”
“네, 맞아요. 저 혼자만 내용 모두를 해석할 수 있지요. 물론 충분한 시간과 여력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겠지만요.
제가 약속드리는 것도 이 점입니다. 저 자신이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지니게 된 권한과, 이 검은 책의 지식에 접근할 권한. 이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대로 정착지가 커져나간다면, 언제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통치 구조에 손을 대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가지고 있던 이들도, 이 갑작스러운 선언에 잠시 놀라 말을 잃었다.
“저의 독단 때문에, 우리는 지금 좋은거래 정착지와 그곳을 지키는 개척민들, 그리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원주민들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틈을 타고 이어지는, 시그리드의 겸허한 발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슨 말이냐’, ‘그대는 최선을 다했소’ 같은 말이 선뜻 나오지는 않았다. 시그리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침묵으로서 질책하는 것인지.
허나 시그리드는 설령 후자일지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서 이 자리에 섰다.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완벽한 세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중 가장 자신에게 덜 귀한 것을 먼저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책임 소지조차 분명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테고요.
이에 저는 대표 여러분께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견을 모아주시기를 청합니다.
첫째, 좋은거래 정착지를 구원하러 갈 지원군의 문제. 그리고 둘째, 우리 정착지들 모두를 다스릴 정부의 문제에 대해서요.”
첫째 문제는 당장 모두의 먹고사는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얼마나 큰 예산 – 아직은 돈보다는 식량 등 현물로 계산되겠지만 – 을 이번 작전에 투입할 것이냐에 따라, 당장 수많은 이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세 가지 방안을 남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장단점까지 충실히 설명해가며 거론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부연이 필요하겠군.”
플레톤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시그리드 그대는 엄연히 우리 제국의 전제군주, 데스포이나 아니오? 그 직위에 엄청난 내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땅의 군주나 그 비슷한 것을 자처할 최소한의 권위는 되는 것이외다.”
“그렇지만 이 땅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권위는 아니지요. 당장 그린란드만 해도 명목상의 왕만을 섬기고 있는 판인데요.
물론 제 손에 어쩌다 보니 들리게 된 권력이 존재하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 권력은 어떤 합의에 의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제 힘이나 재주로만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 홀로 어떤 이상을 바란다고 그 권력을 휘두른다 한들, 제 뜻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그저 플레톤과 후스의 제안대로,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관리하는 동시에 이쪽의 의견 또한 때때로 관철시킬 수 있도록 머릿수를 채우는 데 의의가 있던 대표단.
“만약 이런 소임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부담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돌아가셔서 새 대표에게 맡기셔도 괜찮습니다.
원래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고, 이 역시 저의 경솔한 점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땅에 찾아온 사람들이 장차 어떤 정부를 꾸릴지에 대해 개척자들의 뜻을 모으는 데는 대표 선생님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니까요.”
누군가는 깊게 고민에 빠지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이 없었음에도 돌아가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생각에 귀를 활짝 열었다.
솔직히 말해, 당장 시그리드가 이 자리에서 사임을 하겠노라 한다면 막상 그 험담을 하던 이들도 조심스레 반대하긴 할 것이었다. 애초에 데스포이나 직위 외에 공식적인 직위 하나 없었을뿐더러, 오직 시그리드 하나로 인해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신대륙에 발을 딛게 된 판에 시그리드 대신 그들 모두의 지도자로 세울 만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괜찮으시다면, 저는 적어도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을 구출하는 일까지는 지휘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일개 개인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검은 책의 내용을 활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여러분의 총의에 따르겠습니다.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 몇 가지 안을 이곳에서 선정하고 각각 정착지로 돌아가셔서 민의를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의를 모으는 방법은, 각각의 대표분들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시그리드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의자도 없고, 그저 텅 빈 궤짝 하나를 옮겨온 데 불과했지만, 그 옛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연회에서 앉았던 고급스러운 의자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정적을 깬 것은, 저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자리에서 발언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이, 프랑스 정착민 대표 자크 다르크였다.
“그, 정말로 순순히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고작해야 촌장을 해본 것이 전부였던 자크로서는, 시그리드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암만 알량한 권위라도 함부로 내려놓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약 개척자 분들이 그리 바라신다면요.”
“그런데 마님, 아니, 여사님, 아니, 전하...”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니, 그게 됩니까... 에, 여사님께서는 분명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화묵하게 지내는 게 최고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만약, 예를 들어 정말로 못된 놈들, 그러니까 저 부르고뉴파 같은 놈들이 나와서는 반대파는 모조리 숙정한다고 나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것도 여사님의 저 마법책grimoire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가뜩이나 긴장한 데다가, 한두 번 기사나 귀족들 대화에서 얻어들은 게 전부인 어려운 낱말을 섞어 쓰다 보니 종종 틀리기까지 하는 자크였다.
허나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기에, 저의 제자들이 낱말을 잘못 쓰는 것은 참지 못하는 후스와 플레톤마저도 ‘화묵’이니 ‘숙정’이니 하는 오류를 짚지 않고 시그리드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저도 진지하게 나서야겠지요. 물론 폭력이나 강압 말고,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서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다시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야 하겠지만요.”
그 차이가 무엇인지 갸우뚱하는 자크 다르크를 위해 후스가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그러니까, 선출되는 군주, 그것도 법의 제약을 받는 군주같은 무언가가 세워지길 바라신다는 말씀이시구려.”
“네, 맞습니다. 이왕이면 임기도 정하는 게 좋겠지만, 그것까지 지금 논의하게 되면 완전히 논점을 벗어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선의를 믿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탄압과 궁핍함을 피해 새 세상으로 나아오셨듯, 다른 이들도 그런 불행을 면하기를 바란다고 믿고 싶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한 가지에 있어서는 이 자리에 선 이들이 모두 같은 처지였다. 그 탄압의 주체가 교회든, 가난이든, 기후변화 그 자체든 간에.
시그리드가 위기를 앞두고서 이렇게 중지를 모을 수 있는 것은, 아직 그만큼 정착지들의 규모가 작은 덕도 있었다. 당장 좋은희망과 바다 건너 맑은바다 섬의 개척자들과 뱃사람들만 모아도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이가 채워질 테니까.
허나 암만 그렇다 한들, 앞으로도 정착지가 그렇게 작은 채로 유지될 리는 없었다. 아무리 시그리드가 직간접적으로 모은 이주민의 수가 적다 한들, 보헤미아와 독일, 아이슬란드 등지에 남은 수를 모두 합하면 이만은 족히 넘을 것이고, 어쩌면 시그리드의 구상이 이루어져 주변 원주민 가운데서도 저들의 마을을 나와 개척지에 합류하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었다.
고작 십여 호 사는 작은 마을에서도 촌장은 있기 마련이요, 그 촌장은 촌장으로 남으려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그리드가 저의 암묵적인 지도자 자리까지 내걸고 좋은거래 구원을 위한 여론을 모은다고 하자, 금방 모두의 이목이 여기에 쏠리게 되었다.
세상에 닳고 닳은 끝에, 그 세상을 냉소하는 법을 깨달은 이들이라면 이렇게 지적할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냥 미래의 권력을 담보로 거래를 벌인 것 아닌가?’
어찌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몇 번의 경솔한 결정이 누적되고, 끝내 제 앞가림도 못하고서 큰 위기에 처하게 된 지금, 시그리드가 다시금 지지를 끌어모으고 저의 친우이자 친위대인 그린란드 연대 출신 개척민들을 구하려고 그런 수를 부렸노라고.
사실 유럽에서도, 저의 권세가 미약하게 된 군주들이 신하나 영주들에게 권위를 나누어주고, 앞으로는 모든 신민(‘내게 칼을 겨눌 만한’이라는 말이 앞에 생략되어 있겠지만)의 의사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겠노라 공언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던 것이다.
허나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지금 당장 시그리드를 몰아내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린란드 회사의 입김이 너무 셌고, 그 그린란드 회사의 중추를 이루는 바스크 어부들은 그간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린란드인들과의 협업을 이어가야만 했기에, 정착민들이 더 도착하고 개척촌들이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¹.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정착민들을 가득 실은 배를 얻어타고 남쪽에 간 ‘필라델피아 전제군주국’(플 아무개와 ...톤 선생 등 미련 남은 몇몇이 ‘우애’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대표들과 따뜻한 환영대표들까지 돌아오자, 대표들은 마침내 일전의 창고에 시그리드를 불러냈다.
그사이 시그리드 또한 시일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 들고 왔던 총기를 도로 챙기고, 화약 재고를 털고, 탄환을 새로 녹여 만드는 등 원정 준비에 바빴다.
얼마나 많은 비용을 투입할지와는 별개로, 일단 어떤 식으로든 좋은거래를 구원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결과, 이제는 비용 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떠날 채비가 되어 있었고, 그 결과 창고는 지난 번보다도 더 너저분했다.
아직 국명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이 공동체의 첫 번째 대의민주주의 의사결정이 벌어지기에는 참으로 누추한 배경.
그러나 그 누구도 이를 불편하게 여기지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시그리드의 진솔한 해명과 제안에 감동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좋은희망에 많은 사람 모일 만한 건물이 아직 여기 하나뿐이기 때문인지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마다 해석이 갈릴 일이었지만.
“먼저 첫 번째 사안, 좋은거래 구원 안건입니다.”
졸지에 ‘법을 말하는 사람’ 혹은 의장 노릇을 하게 된 파울이, 자신이 ‘사장 목소리’라 명명한 말투로 제 손에 들린 양피지를 읽어 내려갔다.
“좋은거래를 구원하고 긴집사람들 혹은 이로쿼이라 불리는 원주민 세력과의 평화를 달성하는 데 있어, 우리 팅그, 아니, 개척자 임시의회는 최대한의 비용을 감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내년 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최대한의 비용. 즉 어떤 형태의 무력개입이든 기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최대한 식량 소비를 줄이겠다는 각오였다.
그것이 ‘미워도 다시 한 번’ 심정으로 시그리드에게 권한을 허락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두 대안 – 즉각 철수와 무기한 대치 –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 덕에 이쪽 대안을 지지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머릿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시그리드와 눈이 맞닿은 후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보헤미아인들 사이에서는 전자였던 모양이었다.
“두 번째 사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요른의 딸이자 빈란디아의 공동 데스포이나인 시그리드 리프트라사는 지금과 같이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나, 대신 중대사에 있어서는 본 신대륙 연합 임시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원래는 원주민들과 공존한다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대충 사람 끌어다 모은 데 불과했으나 사정 여차하여 그중 개척민들만 따로 뽑아서 의사결정을 하기로 한 의회’라고 부르기엔 영 불편하였기에, 파울은 자신이 전에 써먹었던 문구를 살짝 고쳐 ‘신대륙 연합 임시의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고안했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뒤인 1419년, 정식으로 의회를 열고 여기서 향후의 정부와 이 땅의 개척민들이 따를 통치 제도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별한 탄핵의 사유가 없는 한, 본 의회는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그때까지 신대륙 연합의 지도자로서 유임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 뒤의 향방에 관한 결정은 1419년의 의회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팅에서 쓰던 말을 그대로 표현만 공용어의 라틴어식 어휘로 바꾸었더니, 제법 욘이 했을 법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물론, 자신에게 한 번의 유예를 더 허락해준 모두에게 감격한 시그리드에게는, 저 ‘신대륙 연합’이라는 임시 국명만큼이나 머릿속에 잘 남지 않는 소소한 사실이었지만.
봄에 시작된 포위 아닌 포위는 벌써 여름을 훌쩍 넘겼다. 하지는 진작에 지났는지 조금씩 해가 짧아지고,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저 북쪽 숲속 어딘가에서는 슬슬 장사꾼 오다와 사람들이 올해는 동쪽의 코 큰 이방인들이 무슨 묘한 보물을 가져왔을까 궁금해하며 먼길 여행을 준비할 무렵.
좋은거래 정착지에는 그런 활기도, 수확의 기쁨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합니까?”
“쉿, 조용히 하세요. 우리 모두 최선을 다 하고 있잖아요.”
의외로 먼저 지친 것은, 카나스탓시를 따라 나무 방벽 뒤에 몸을 숨긴 부족민들이었다.
저들의 놀라운 의술 – 스베인은 그것을 ‘생명의 물²’이라 불렀다 – 덕에, 긴집사람들 전사들의 급습에 부상을 입은 전사들 대부분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마을로 돌아가 농사를 할 수도, 숲을 누비며 사냥을 할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이방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재빨리 배를 띄워 고기를 잡거나, 몰래 숲에 가서 묻어놓은 보존식만 빠르게 파헤쳐 돌아오거나, 인근 마을에 손을 벌리는 게 전부였다.
방벽 둘러쳐진 도시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던 보헤미아인들이나, 일 년의 절반 가까이를 추위를 피해 굴 같은 집 속에서 견뎠던 그린란드인들보다, 건장한 부족 전사들이 먼저 이 ‘나무 방벽’ 안에서의 삶에 질려버렸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한철 싸움이었고, 무시무시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언제든 일이백 명씩 무리지어 이 땅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긴집사람들 같은 적을 상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시의 혈기를 못 이기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남은 것은 몇 번의 습격으로 조금 줄어든 이방인들과 그들보다 더 많이 줄어든 부족민들 뿐이었다.
“곧 원군이 올 게요.”
이제는 이쪽의 말도 몇몇 단어쯤은 알아듣게 된 스베인이 주변을 감시하며 말했다.
“또 그 말씀이십니까.”
“그럼 다른 수가 있나요? 이대로 버티면 결국 저쪽도 나가떨어지지 않겠어요?”
일부러 스베인 들으라고 공용어로 말하는 카나스탓시였다. 그러면서도 매의 눈으로 수면을 쫓는 것은 잊지 않았다.
투덜대던 전사도 작살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속으로야, 이 덩치 큰 괴물 같은 작자의 무엇이 좋다고 이 참한 카나스탓시가 홀라당 넘어갔는가 불평을 했지만.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몇 번이고 방벽을 두고 벌어지던 싸움에서 이 스베인이 보여준 경이로운 완력과 그 ‘발할라!’ 외침에 경탄하곤 했지만.)
그때였다.
“쉿!”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이 일대에선 익숙하지 않은 새소리가.
“무슨 일이오?”
“새인데요... 무슨 매 종류인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저쪽 놈들이 교신할 때 쓰는 그런 소리는 아니네요.”
잠시 긴장하며 작살을 내려놓았던 카나스탓시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뭐? 어디?”
그리고 스베인 눈에도 보였다.
“야! 리프다!”
“네?”
“리프! 우린 살았다! 하하! 시그리드, 믿고 있었다, 이 녀석!”
지붕 씌운 망루에서 강가를 감시하느라 새를 볼 겨를은 없던 망루 위에서도, 그 ‘리프’ 소리에 반응이 있었다.
“대장! 농담 마십쇼!”
“이놈아! 지금 망루 위를 돌고 있으니까 안 보이지! 잔말 말고 하류 쪽이나 보고 있어라! 시그리드가 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저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물결 가르는 소리는 들려오지만, 그토록 잽싸고 조용히 강을 건너와 습격하곤 하는 긴집사람들 전사들의 모습은 반대편 강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스베인의 눈에도 보였다.
“스베인! 저 왔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이야! 시그리드!”
그리고 그 뒤에 잔뜩 따라오는 다른 거룻배.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거룻배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게 다 뭐냐?”
“읏차! 뭐긴요. 개척민 모두의 총의지요.”
익숙한 동작으로 땅을 밟은 시그리드가 스베인을 한 번 포옹하곤 답했다.
(순간 시그리드와 스베인의 관계를 오해한 카나스탓시의 표정이, 마을이 불탔던 날 다음으로 어두워질 뻔했으나, 다른 이들 눈에는 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스베인이랑 개척자들을 여기로 보낸 걸 비롯해서, 그간의 실수에 책임을 지고 오 년 뒤에 물러나기로 했답니다.”
“아니, 뭐? 너는 또 그런 얘기를 왜 만나자마자...”
“반대로 생각하면 오 년 동안 성과를 내면 재선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그리드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곧 닥칠 겨울에 배를 곯을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먹거리, 그리고 먹거리와 교환할 물자를 넘겨주던 개척민들의 모습을 본 이상.
어쩌면 그것은, 막상 시그리드를 몰아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이야기까지 언급되자 괜스레 미안해진 데서 말미암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순간적인 정에 이끌린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아등바등 성장하는 식민지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잠깐의 고난을 겪은 뒤 나중에 시그리드와 그린란드인들을 볼멘소리 듣지 않고 몰아낼 심산으로 동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시그리드는 괜찮았다. 어쨌든 한 번은 더 믿어보겠노라. 그간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공이 더 많으니, 우리는 그대 뒤를 밀어주겠노라, 다시 한 번 나아가 해결해보라. 그런 눈빛이 훨씬 더 많다고 느꼈으므로.
그리고 자신에게 걸어준 희망을 두 번 다시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자신이 그 희망을 배신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더 이상 홀로 고민할 필요도, 저 혼자 검은 책을 안고 끙끙 앓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으므로.
“그건 그렇다 치고, 어째 원군보다 물자가 더 많은 것 같다?”
“그야, 진짜로 물자가 더 많으니까 그렇지요. 원군이라는 건 이 물자를 중간에 안 뜯기려고 데려온 이들이고요.”
뒤이어 하나둘씩 닿는 배에서 한스, 헤니히 등 익숙한 얼굴들이 내렸기에, 스베인은 한참 뒤에야 다시 캐물을 수 있었다.
“자! 다들 준비해 주세요!”
“그런데 이 물자를 가져와서 다 뭘 하려고?”
“일단은 과시용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이 개척지에 많은 비용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 고작 일이백 명으로 포위하는 시늉 하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그토록 순순히 모피 교역을 독점하는 것을 받아들일 의사도 없다.
그리고...”
“그리고?”
“이건 사실 저 혼자였으면 떠올리지 못했을 계책인데, 다른 분들이랑 검은 책을 같이 보면서 이런저런 내용을 소개해주고, 또 제 이전 행적도 되짚고 하다 보니까 나온 방법이었답니다.
긴집사람들이 이곳이랑 저 너머를 점령하고 모피를 독점하려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미리 이쪽 인근의 모피를 사재기해버리면 그만이지요. 연까지 미리 트고요.”
모피와 바꿔줄 만한 철기는 없었지만, 대신 올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건어물과 이런저런 생필품을 모아 이곳까지 왔다.
“자, 외쳐주세요!”
시그리드가 배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기 전 미리 익혀두었던 이 일대의 말, 강을 거슬러 오면서 외쳤던 그 말이 곧 모두의 입에서 외쳐졌다.
“우리 교역소 정상영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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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뜻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작중의 신대륙 개척은, 원 역사의 북미 개척에 비하면 거의 최첨단 군사작전 수준으로 정교한 축에 듭니다. 예컨대 완전한 실패로 끝나거나 거의 실패 직전까지 갔던 16세기 말~17세기 초의 뉴잉글랜드 개척 사례들 – 제임스타운, 포펌Popham, 로어노크 등 –을 보면, 농사 경험이라곤 정원을 가꾸어본 게 전부인 소시민들을 무턱대고 모아서 보낸다던가, 여행 도중에 소비되는 식량 계산을 잘못해서 종자로 쓸 곡식까지 선상에서 먹어치운다던가 하는 등 실책의 연속이었지요.
초창기에 교역과 어업으로 식량 수요를 충당하면서 전초기지를 마련하고,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추어진 뒤 농경과 목축으로 넘어가는 작중의 개척 과정은, 그린란드에서 출발하는 경로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했지만 원 역사에 비해 훨씬 매끄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다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아는 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지요.
2. 다양한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했던 북미 원주민들은 정작 알코올은 그리 널리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농업이 발달했던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맥주를 양조한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외에도 태평양 연안이나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에서 과실주를 담가 먹었던 흔적이 있지만, 북미 북동부의 경우에는 휴런 족이 보존식의 일종으로 맥주 비슷한 죽을 만든 것을 제외하면 딱히 알코올 음용 흔적이 없습니다.
이는 초창기 이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이 술의 해악을 멀리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추었다고 착각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지요. 물론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개척자들은 잘만 원주민들에게 도수 높은 증류주를 팔았고, 몇몇 경우에는 일부러 취하게 만든 다음 훨씬 우호적 조건으로 교역을 하는 꼼수도 부렸습니다. 그 결과 18세기부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알콜중독 문제가 널리 보고되기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