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흔들어라 (4)
13. 배를 흔들어라 Rock the Boat (4)
긴집사람들 연맹을 이루는 다섯 부족은, 공통된 믿음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죽은 자는 세상을 떠돌면서 유족들을 괴롭히는 망령이 된다는 믿음.
그러므로 이 망령을 달래기 위해서는, 포로를 잡아 그로 하여금 망자의 빈자리를 채우게끔 만들어야 했다. 자식이 죽었다면 포로가 새 아들딸이 되었고, 아버지가 죽었다면 포로는 새 고모나 숙부가 되었다.
그런 풍습이 없는 북쪽이나 동쪽의 이민족들은, 결국 그게 노예 잡아오는 것과 뭣이 다르냐며 비꼬곤 했지만.
여하튼 전쟁으로 죽은 자의 빈자리를 채우려면 새로 전쟁을 일으켜 포로를 잡아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졌고, 큰 물(오대호) 동남쪽의 비옥한 숲과 들을 차지한 다섯 부족들은 저들끼리 싸움을 그칠 수 없었다.
‘위대한 중재자¹’가 나타나 평화의 법을 세우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다섯 부족 모두가 거의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어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실로 치밀하고도 정교한 법으로써 부족들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런 치밀한 법도를 세워야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전까지 얼마나 다섯 부족들이 심하게 다투었는지를 반증하는 근거였지만, 여하튼 이 위대한 평화의 법은 긴집사람들이 저 북쪽의 세줄기불꽃과 같은 엉성한 모임을 넘어, 마치 하나처럼 단합하는 효험을 보여주었다².
그 덕에 연맹의 다섯 부족들은 연맹 내 이웃들의 배신이나 급습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전사들을 모아 연맹의 테두리 바깥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곳 기준으로는 엄청난 대군인 이삼백 명 전사들이, 사시사철 숲을 누비면서 적의 사냥터와 마을을 습격하니, 긴집사람들에게 적대하는 부족들은 그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우리 교역소 정상영업합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그들 말로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
다섯 부족들 중 하나인 카니엔케하카(모호크)의 전쟁 추장War chief 아욘와에스Ayonwaeghs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를 따르는 젊은 전사들 앞에서는 진중한 모습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아욘와에스라는 이름의 무게였다³.
“오늘 밤에 놈들을 칩시다!”
“맞습니다! 우리가 우리 명예를 지키지 않는다면, 기껏 기를 죽여놓은 강가 놈들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강 맞은편에서 아욘와에스와 함께 이방인들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시하던 젊은 전사들은 하나같이 격앙되어 있었다.
물정 모르는 그들이 보기에, 저토록 당당하게 물자를 옮기는 것은 곧 그 자체로 도발이었다.
그리고 딱히 틀리지도 않은 판단이었다. 강 하류에서부터 따라왔는지, 벌써부터 강가의 몇몇 부족들이 띄운 조그만 배들이 속속들이 접안하고 있었으니까.
긴집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쉽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며, 긴집사람들이 모피를 독점하는 것을 좌시하지도 않겠다는 선언.
벌써부터 그득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생선 – 민물 생선이 아니라, 저 이방인들의 신통한 재주로 먼 바다에서 잡은 거대한 생선이었다 – 부터, 그리 양은 많지 않으나 어쨌든 이곳에선 구할 길 없는 쇠붙이 도구들까지.
정말로 교역소 앞에 장터 비슷한 것이 차려지고 있었고, 배에서 내린 적은 마치 쳐들어올 테면 얼른 와보라는 듯 당당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눈에 띄는 여인 하나.
“저 기묘하게 생긴 여인이 저들의 우두머리라는 ‘젊은 노파’일 겁니다! 저 여인만 붙잡으면 이방인들 또한 굴복하게 될 겁니다.”
코 큰 이방인들이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각각 다른 말을 쓰는 여러 부족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이미 떠벌이 오다와 상인들을 통해 이곳저곳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도 유난히 덩치가 크고,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얼음의 땅에서 왔다는 거인 무리가 있었다. 그 ‘발할라’ 소리에 당해본 전사들은 하나같이 거인들의 무용에 찬사를 보내곤 했다. (그래야만 그들 앞에서 냅다 도망친 자신들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인들의 추장이자 이방인 모두의 추장인 자는 소녀의 얼굴과 노파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도 하였는데, 더욱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으나 좋은희망이라는 곳을 다녀온 이들이 하나같이 참이라 증언하는 소문이기도 했다.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아욘와에스는 전사들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저들이 들고 있는 천둥 대롱을 보아라.”
“그 천둥 대롱이란 것, 물론 무섭기는 하지만 무적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거기에 다섯이나 당했습니다. 원혼을 달래려면 오히려 맞서 싸워서 포로를 잡아야지요.”
저 나무 벽 안쪽의 ‘발할라’ 거인들 중에는 천둥 대롱을 다루는 자도 하나 있었다. 화살과 달리, 그 천둥 소리에 맞은 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바로 죽어버리곤 했다⁴.
“족히 일이백 명은 살 수 있을 큰 마을에 고작 하나 있는 게 천둥 대롱이었다. 그것을 지금 열 자루 넘게 들고 나타나지 않았느냐?”
이방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이는 그들의 생김새와 쇠붙이라는 기묘한 물건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할 때는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들 모두에 유의하며 접근해야 했다.
“만약 저것이 놈들의 전력이라면, 지금 들이쳤다가 자칫 저 이방인 모두와 원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교역이고 뭐고 끝장이다. 만약 저것이 이방인들의 전력이 아니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예컨대, 저 천둥 대롱이 땅에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가서 이방인의 비법 주술을 부리면 언제든 캐낼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렇다면 공존이고 무엇이고 포기하고, 긴집사람들이 이방인의 지혜를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는 잠시 굴종하는 시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만한 먹거리를 들고 왔음에도, 막상 우리를 더 도발하거나 습격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와 협상을 원하는 것일지도.”
정확하게는, 저들이 협상을 원하는 경우 외에 지금 아욘와에스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자체가 없었다.
천둥 대롱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저만큼 식량이 풍족하여 주변과 교역할 수 있어도 문제. 긴집사람들을 압박하기 위한 허세에 저만큼의 식량을 가져올 만큼 각오가 탄탄하다 해도 문제.
타고난 고결한 혈통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으로 부족 어머니들의 간택을 받아 전쟁 추장이 된 아욘와에스는, 금방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배를 띄워라.”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허세에는 허세로 응해야지. 지금 바로, 모든 전사를 모아 천천히 강을 건넌다. 그러나 싸우는 대신 대화를 나눌 것이다.”
강 너머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음에도, 시그리드 뒤를 따라 좋은거래에 찾아온 주변 사람들은 딱히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정말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은 아닐 테다. 이처럼 든든한 세력이 새로이 나타나 저들과 교역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어, 긴집사람들 또한 저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끔 하려는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머스킷, 천둥 대롱도 팝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물건이 아니에요! 오늘 딱 세 정만 팔 겁니다!”
작년 가을처럼 유럽에서 긁어모은 철물을 흩뿌릴 여건은 되지 않았다. 대신 생선과 옷감, 갓 만든 치즈, 동녘정착지에서 막 들어온 바다코끼리 상아 등을 마련했고, 그것만으로는 영 부족하다 싶어 통 크게 머스킷까지 판매 대상에 올렸다.
“천둥 대롱? 그게 참말이오?”
꽤 유창한 공용어로 추장인 듯한 이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대들이 모피를 귀하게 받는다는 소문은 들었소. 어느 정도면 교환할 만한 값이 되겠소?”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나요?”
처음 거래되는 물건에 시세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추장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이왕이면 다른 분들이랑 논의를 해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어떤 분은 고작 생선 몇 마리에 모피를 왕창 넘겨주시는데, 어떤 분은 그보다 더 적은 모피만 가지고 상아 장신구나 이 머스킷과 바꾼다면 훗날 다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것은... 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소.”
시그리드의 말을 듣고, 그 시선 끝에 역시 비슷하게 흥정을 하고 있는 다른 이웃 부족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 추장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한 걸요.”
“곧 다시 돌아오리다. 저 방해꾼들 앞에서 당당하게 우리 부족이 천둥 대롱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주려면 얼른 얘기들 나눠야 하겠구만.”
‘방해꾼’이란 이제 막 배를 띄우기 시작한 강 건너편 모호크 족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좀 편히 쉬라는 시그리드의 강권에도 꾸역꾸역 나와서 곁을 지키던 스베인이 물었다. (멀리서 아버지 테웨론과 함께 이웃 부족 사람들과 얘기 나누고 있는 카나스탓시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그사이 오간 대화를 이해 못했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 스베인이었다.)
“머스킷 말씀이신가요? 어차피 머스킷 총열이 몇 발 쏘면 망가지는 건 변치 않잖아요. 더구나 화약이랑 탄환은 별매고요. 물론 이런 점도 다 잊지 않고 상기시킬 생각이지만요.”
“아니, 그것 말고. 이 구상 말이다. 왜 나 빼곤 다 이해하는 것 같지?”
“그야, 스베인 아저씨랑 정착민 분들이 갇혀 있는 사이에 주변 부족들은 죄다 긴집사람들 쪽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모피를 독점해, 대등한 입장에서 그들과 교역하자는 것이 긴집사람들이 내세운 논리였다.
그러나 강가 부족들에게는 이방인들만큼이나 긴집사람들 또한 앙숙.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강가와 그 근처 숲속 사람들끼리 뭉친다면, 저들과 협의 없이 함부로 긴집사람들이 제멋대로 모피 교역을 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늘 이 교역소에서 대놓고 장사판을 벌인 건, 말하자면 주변에 널리 신호를 보여준 셈이지요.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또한 기꺼이 교역에 응하고, 필요하다면 식량이나 무기도 자유롭게 팔겠다고요.”
한 세력이 뭔가를 독점하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경쟁자를 만드는 것.
교역을 명분삼아 막대한 물자를 이곳 교역소에서 푼 것은, 일정한 구심점 없이 이합집산하던 일대의 부족들이 적어도 모피 교역에 있어서만은 하나로 뭉칠 수 있게끔 하는 계기이자, 일종의 초기 투자가 되어줄 터였다.
“그러면 긴집사람들이 가만 있진 않을 텐데.”
물론 강가 사람들과 담합해서 과점을 사실상 독점으로 바꾸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긴집사람들 또한 강가 쪽에 나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힘으로 모피 교역로를 빼앗으려 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니까 반대급부로 뭔가 다른 교역을 약속해야지요. 다른 이들 말고 딱 긴집사람들만 할 수 있는 뭔가로요.”
“허. 그런 생각을 그 와중에 다 해냈단 말이냐?”
“제 생각은 아니였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 욘 덕분이겠지.”
“아니, 다른 분들 도움도 받았어요. 후스 선생님이랑 플레톤 선생님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에서 오신 백스터W. Baxter 씨네 도움도 받았고...”
“아, 맞다. 다른 사람들이랑 논의했다고 했지.”
임시의회에서 좋은거래 구원과 시그리드의 유임이 결정된 직후, 시그리드는 어떻게 좋은거래 정착지를 구출할지를 두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 거창한 장터를 차리기 위해 정착지의 개척민 모두가 배를 곯을 각오를 해야 했으므로, 그들의 의견을 듣고 검토를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단번에 이로쿼이 연맹의 위협을 해결하고 그들과의 평화에 이를 수 있을지 곧장 뾰족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후스나 플레톤, 파울 모두 나름 지성인이기는 했지만, 이런 외교나 교역 문제는 그들의 전공 분야가 아니었으니까.
노퍽의 평범한 목수로서 독점과 얽힌 갈등을 몇 번 겪어본 적 있던 롤라드파 사람 윌리엄 백스터⁵가 조심스레 손을 든 것은 그때였다.
“같은 목수들끼리 일감을 두고 다툼이 벌어질 때면, 보통은 관할하는 구역을 나누어서 해결을 보곤 하였다더라고요. 그러고도 해결이 안 되면, 누구는 수레바퀴를 만들고 누구는 수레축대만 만드는 식으로 타협하곤 했고요.”
시그리드가 한참 전, 아이슬란드에서 친노르웨이파와 친잉글랜드파 사이 다툼에 휘말렸던 시절 비교우위론을 꺼낸 이후로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검은 책의 ‘경제학’ 관련 부분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랑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까 훨씬 답이 빨리 나오는 것 같고 좋더라고요.”
대신 그만큼 미래의 지식을 제멋대로 써먹기는 어려워졌지만, 시그리드는 애초에 그 지식이 저의 것이라 여기지 않았으므로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그런데 목수 노릇이야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게 많으니까 그렇게 나눌 수 있다지만, 모피는 그렇지 않을 텐데? 네 말마따나 저들에게 뭔가 다른 교역을 제안해야 할 텐데, 딱히 뭔가 없을 듯한데.”
“천만에요. 꽤 좋은 교역품이 있지요. 스베인도 이미 그게 뭔지 알고 있지 않나요?”
“내가?”
“네. 처음에 좋은희망으로 연락 주셨을 때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그러나 시그리드의 말은 허리춤에서 끊기고야 말았다.
“놈들이 옵니다!”
마침내 준비를 마친 모호크 사람들이 일제히 강을 건너오고 있다는 외침.
놀란 이웃 부족 사람들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교역소 주변을 지키던 그린란드 연대 사람들은 저들의 무기를 고쳐 잡았다.
“습격...은 아니군.”
“네, 대화를 하러 오는 것 같네요.”
곧 작은 가죽배가 차례로 이쪽 강안에 닿고, 건장한 전사들이 우르르 내리는 가운데 유독 백발 성성한 이가 그 가운데 서서 교역소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여기까지 와 주었으니, 그쪽에서도 여기 강안까지는 나오라는 암묵적인 표현.
카나스탓시가 눈치껏 통역을 자처하며 나서자, 시그리드 역시 눈치껏 스베인을 데리고 함께 긴집사람들을 향해 나아갔다. (카나스탓시는 스베인과 몇 달을 동고동락하며 제법 이쪽 말 솜씨가 늘었는데, 두 남녀 간에 오가는 시선을 보면 공용어 실력 외에도 두터워진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카니엔케하카 사람들의 전쟁 추장, 아욘와웨스요.”
카나스탓시는 유창하게 통역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저 전쟁 추장이라는 직위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여기서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은 없으나, 추장들 앞에 나아가 이쪽의 제안을 전달할 만큼의 권한은 가지고 있다던가.
“그러니 말해보시오, 이방인 추장이여. 이런 짓을 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내 우리 카니엔케하카의 추장 타카리호켄 님과 다른 훌륭한 추장들, 그리고 부족의 어머니들 앞에 무어라 전해야 하겠소?”
“뭐긴요, 평화와 공존이지요.”
“우리의 뜻에는 변함이 없소. 그대 이방인들은 분명 강력하고, 우리 중 가장 현명한 이들조차 모르는 비법과 주술, 지혜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오. 그대들이 말하는 공존을 이룩하려면, 우리 또한 무언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수를 손에 넣어야 하지.
정녕 그대들이 이 땅에 원래 살던 이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한다면, 이제라도 우리를 먼저 공격한 데 사과하고, 우리 긴집사람들의 앞길을 막지 않겠노라 약조해야 할 것이오. 그리하면 우리와 그대들은 진정한 이웃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곳 좋은거래 주변의 주민 분들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반면 그쪽의 전사들은 먼저 이쪽을 공격해 왔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긴집사람들과 공존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앞으로 평화를 약속해 주시고, 이 강 주변 부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노라 공언해 주신다면, 다른 교역을 제안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대들의 말을 믿겠소?”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다짜고짜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이들을 공격해 온 이들을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우리와 모피를 교역할 이들을 그쪽에서 급습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반박하는 시그리드였다.
결국 이미 원군이 도착했을 때부터 저들의 입지가 불리해졌음을 내심 알고 있던 아욘와에스가 먼저 한 발 물러났다.
“알겠소. 그렇다면 우선 그대의 제안을 마저 듣겠소. 그 다른 교역이란 무엇이오?”
“여기서는 오예아우그와라고 하는 약초입니다.”
그제야 스베인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금방, 그 약초가 대체 무슨 쓰임새가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
하기야, 여기서 약초로 쓰는 그 풀이 바로 온 세상을 풍미하게 될 (혹은 온 세상을 너구리굴로 만들) 담배라는 것은 검은 책에만 담겨 있는 지식이었으니까.
“뭐라? 오예아우그와? 그것은 우리가 조상과 신령들을 기릴 때 쓰는 영험한 약초요.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마치 왐품 넘겨주듯 팔아넘기자고?”
“그러면 모피 독점하려고, 평화니 공존이니 떠들면서 여기 테웨론 어르신네 마을을 짓밟은 건 말이 되고요?
들어보세요. 강 남쪽에서도 모피는 나지만, 솔직히 강가와 그 북쪽의 울창한 숲에 비할 만한 건 아니겠지요. 그쪽에서 이곳 주변을 모조리 정복할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모피 교역만으로는 이곳 강가 주민들과 세줄기불꽃 쪽 사람들과 경쟁할 수 없을 거에요.”
생각보다도 이 땅의 지리에 밝은 듯한 시그리드의 이야기에, 비단 아욘와에스뿐 아니라 주변 전사들도 흠칫 놀랐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젊은 노파니까 뭔가 특이한 게 있겠지’ 하고 넘겨짚고 넘어갔지만.
“하지만 농사짓기에는 남쪽 땅이 훨씬 더 유리하지요. 그리고 남쪽 바닷가 부족들에 비해, 긴집사람들은 내부적으로 훨씬 평화롭다는 장점이 있고요.
오예아우그와, 담배를 재배해 우리와 교역하는 데 있어서는, 긴집사람들만큼 유리한 입지에 있는 이들이 없는 셈이에요. 설령 모피를 독점할 수 있는 입지에 있다 할지라도, 차라리 그 힘으로 담배 농사를 짓는 쪽이 낫겠지요.”
아이슬란드에 이어 다시 한 번 등장하는 비교우위론이었다.
“그대의 말에 담긴 뜻을 다 이해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게요. 허나 최대한 기억에 담아두었으니, 이대로 돌아가 추장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소.
단, 그사이 약속해야 할 것이오. 이 틈을 타서, 이렇게 대화의 장을 연 우리의 성의를 저버린다면, 그때부터는 우리 사이의 미약한 신뢰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외다.”
아욘와에스로서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돌아왔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래 봬도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입장은 아니거든요. 대신 그쪽에서도 우리 쪽 유권자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아야 하겠지만요.”
그로부터 석 달 뒤, 급히 모인 긴집사람들의 추장들과 그 어머니들은 이 새로운 평화 제안에 동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모피에 이어 기묘한 약초까지 신대륙에서 넘어오자, 유럽 대륙의 군주와 상인들 중에는 점점 죄악의 땅 바빌로니아가 실은 황금 가득한 기회의 땅이 맞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이들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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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로쿼이 연맹의 설립은 통상적으로 16세기경으로 추정되곤 했지만, 아직까지 전해지는 구전 전통에 따르면 연맹의 설립은 대략 1190년대였다고 합니다. 이때 ‘위대한 중재자’ 테카나위다 – 이로쿼이 연맹 사람들은 테카나위다를 크게 존경해, 그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 와 ‘부족들의 어머니’ 지군사세, 그리고 숙련된 외교술을 지녔던 테카나위다의 대변인 히아와타 등 삼인방이 이로쿼이계 부족 다섯을 하나로 뭉치고 ‘위대한 평화의 법Kaianerekowa’을 세움으로써 긴집사람들 연맹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구전되는 이로쿼이 연맹 설립사입니다.
이로쿼이 연맹의 설립 시점을 16세기로 잡는 근거는, 연맹 설립 직전까지 다섯 부족들이 치열한 상쟁을 벌였다는 구전과 더불어, 이 시기에 이로쿼이 부족들이 실제로 이전보다 더 주거지를 공고하게 요새화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발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치열한 요새화의 시기는 사실 16세기뿐 아니라 12세기에도 있었고, 더구나 16세기의 요새화와 부족간 군사충돌 격화는 소빙기에 따른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지요. 작중 이로쿼이 연맹이 형성된 지 꽤 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판단에 따랐습니다.
한편, 작중 묘사된, 포로를 잡기 위한 전쟁은 이로쿼이 연맹 내에서는 ‘추도의 전쟁Mourning war’이라 불리곤 했습니다. 이로쿼이 사람들은 그렇게 잡아들인 포로를 정말로 새 가족처럼 대하곤 했지만, 그것이 꼭 인도적인 취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풍습은 정복당한 부족들을 빠르게 흡수하는 효과가 있었고, 17세기 무렵 전멸한 세인트로렌스강 유역 부족들 중 오대호 북쪽으로 도망치지 못한 부족들은 대개 이런 운명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이로쿼이 연맹의 정치체제는 제도적으로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달성한, 원시 민주주의의 ‘끝판왕’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이로쿼이 사람들의 지혜가 반영된 결과지만, 동시에 그만큼 지혜를 짜내야 했을 만큼 부족들 간의 전쟁이 치열했음을 방증하기도 하지요.
연맹의 최고 의사결정권은 50명(18세기에 투스카로라족이 연맹에 가입한 이후로는 56명)의 추장Royaner/hoyaneh들에게 있었습니다. 또한 부족의 군권은 각 부족의 추장들이 아닌 부족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전쟁 추장들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전쟁 추장은 각 부족의 추장과 부족 어머니회의 합의에 따라 선출되었으며, 추장들과 달리 의결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이들을 선출할 권리는 추장 계승권을 보유한 각 부족의 어머니Clan mother들에게 있었고, 이들 어머니들은 추장과 전쟁 추장들을 선출하거나 탄핵하고, 그들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3. 이로쿼이 연맹을 이루는 각각의 추장과 전쟁 추장은 직위를 계승하는 즉시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그 추장직의 이름으로만 불렸습니다. 예컨대 모호크 추장들 중 최선임자는 타카리호켄Takarihoken이라는 이름을 대대로 이어받았지요. 아욘와에스 역시 모호크 전쟁 추장들이 대대로 계승하던 이름입니다.
4. 원 역사에서 모호크 족이 처음 화기를 경험한 것은 1609년, 알공킨-휴런 연합군과의 전투에서였습니다. 이때 알공킨-휴런 연합군에는 이들과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려 했던 프랑스인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렝 일행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샹플랭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그는 직접 화승총을 들고 모호크 추장 둘과 전사 하나를 쏘아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거꾸로 생각하면 고작 총성 한두 번에 놀라 패주할 만큼 모호크 족 전사들의 조직력이 허술하지 않았음을 방증합니다.
프랑스인들이 알공킨계 부족들과 교역 관계를 구축하면서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으로의 북상이 일시 저지되자, 이로쿼이 연맹은 대신 동쪽 허드슨 강 무역을 독점하는 쪽으로 팽창 방향을 바꿉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개척자들과 교역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고, 그들로부터 빠르게 화기를 도입해 다시금 퀘벡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게 되지요.
5. 윌리엄 백스터와 그 아내 마저리는 헨리 5세 등극 이후 롤라드파가 이단으로 단죄당하는 와중에도 계속 공공연히 교회의 부정을 비판하였다가 처벌당한 이들입니다. 1429년, 백스터 부부는 위클리프와 다른 롤라드파 학자들의 저술을 유통하고, 심지어 교회 예배 중에 당당하게 교회 교리를 비판하는 등 공공연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로 인해 윌리엄은 화형, 마저리는 채찍형 4회라는 처분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