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말 한 필 (2)
14. 이름 없는 말 한 필 A Horse With No Name (2)
얀 후스를 따라 신대륙으로 넘어갈 보헤미아인 이주민들 대부분은 아직 보헤미아 땅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땅에 기반이 닦인 이후에 얀 지슈카의 지휘 하에 짜임새 있게 넘어간다는 것이, 처음 시그리드와 지슈카가 합의한 대강이었다.
비록 지기스문트가 ‘관대한 아량으로서’ 보헤미아 전국의회와 합의한 바에 따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있긴 했지만, 그 재산 대부분은 일만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신대륙으로 넘어가고 정착하기 위한 준비에 쓰이고 있었다.
(그 덕에 멀리 서쪽의 바스크인 조선공들은 뜻밖의 호황에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야근에 시달리는 도제들까지 동의할 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서 지슈카와 그의 곁에 남은 그린란드 연대원들 – 정작 그린란드 사람은 빠진 – 은 용병업으로 이주민들의 생활비를 벌어들이곤 했다. 이미 보헤미아에 남기로 한 전직 프라하 민병대원들이 용병으로 나서서 신성로마제국 내전에서 활약한 바 있었기에, 지슈카의 용병단도 일감이 떨어지는 일 없이 유럽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그것도 끝이겠지. 신대륙으로 곧 떠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1415년 봄. 큰돈을 풀어 보헤미아 용병들을 고용한 덴마크 국왕 에릭은, 궤짝 가득 담긴 노블 금화를 지슈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간 용병을 파견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이렇게 그대를 찾았소.”
마침내 이민자들은 보헤미아 땅을 떠나 함부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지슈카는 먼저 도시에 도착해, 이민자들이 선단이 도착할 때마다 길게 기다리지 않고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플랑드르에 머물던 에릭이 직접, 금화 궤짝과 함께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약속한 보수에 전리품과 몸값에서 그대들의 몫에 해당하는 금화까지 얹어서 이렇게 준비하였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도 괜찮소이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 이 자리에서 일일이 확인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지슈카의 부하들이 나서서 궤짝을 옮겼고, 에릭을 수행하던 재무관은 지슈카의 부관에게 상세한 목록을 건네주었다.
그런 실무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에릭은 지슈카 앞에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는 과연 새 시대의 전법을 창안한 명장다웠소. 우리 보병대가 유럽 최고일 줄 알았건만, 막상 함께 프랑스의 전장을 누벼 보니 누가 누구를 모방했는지 역력히 드러나더군.”
“저는 그저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저를 따라온 모든 부대원들과, 우리 모두를 보살펴주시는 주님의 공이지요.”
지슈카는 경계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으며 겸허하게 답했다.
에릭은 자신이 시그리드 덕에 얻은 이 화약무기의 위력을 독점할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 짧은 시간에 얻는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보헤미아 용병대를 고용했다.
이것이 헨리 5세가 등극하며 다시금 불 붙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 보헤미아 용병들이 참전하게 된 사연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룬발트에서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한쪽에는 영광이요 다른 한쪽에는 참극인 일들이 숱하게 프랑스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기사들 중의 기사라 불리던 부시코 원수가 이끌던 프랑스군은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전멸했다¹.
스코틀랜드의 지원군과 이탈리아 용병들까지 끌어모아 결전에 나선 아르마냑파는 오를레앙에서 다시 한 번 참패했다. 프랑스 왕실에 남은 마지막 후계자, 왕자 샤를은 자신의 본거지 시농으로 도망쳐 그곳의 성벽에 의지하려 했으나, 기사의 갑옷을 자비없이 꿰뚫은 화약의 힘이 성벽이라고 가만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대가 아무리 겸양한다 할지라도,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오. 그대의 용병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고작 3년 안에 프랑스의 절반을 점령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었겠지. 하다못해 그 위대한 이교도 카이사르조차 갈리아(프랑스의 옛 이름)를 모두 제압하는 데 8년이 걸렸는데 말이지!”
아르마냑파 세력이 전멸하고 왕실의 마지막 구심점 도팽마저 사로잡히자, 부르고뉴파는 살아남은 저들의 승리가 되었다며 때이른 기쁨에 취했다.
저의 ‘동맹’들을 환영하며 파리 성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 부르고뉴 공작 무외공 장의 마지막 패착이 되었다. 뒤이은 부르고뉴파 숙청 끝에, 잉글랜드와 덴마크는 북프랑스와 저지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1412년부터 1415년 초까지, 불과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그대가 바라기만 했더라면, 그대는 기꺼이 나 에릭이나 잉글랜드의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엄청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오. 아마 온 유럽의 용병대장들은, 저들이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얀 지슈카라는 사내가 되어있기만을 바라고 있을 테요.
허나 그대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없는 듯하군. 역시 시그리드 때문이겠구려. 그렇지 않소?”
에릭의 눈빛은, 온 세상을 우습게 내려다보는 시선. 그러나 그 표정은 시그리드의 이름이 거론되자 묘하게 뒤틀렸다.
“시그리드가 그대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오. 그리고 어차피 내가 안다 한들 도저히 약속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했겠지.”
지슈카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에릭은, 짐짓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그대는 바빌로니아든 빈란디아든 그 신대륙으로 떠나면 이 땅과의 연을 끊을 수 있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 땅의 미련이란 그리 쉽게 가시지 않는다오.”
에릭이 꺼내보인 책은 바로 『멋진 신세계』였다. 작년 말, 함부르크에 그린란드 회사의 배가 닿자마자 금방 인쇄에 들어갔던지라 지슈카도 구해서 읽어본 바 있었다.
시그리드가 ‘약간의 도움을 받아’ 썼다고 밝힌 서문에는, 로마인들의 황제 마누일 2세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가 적혀 있었다. 어린 콘스탄티노스가 희망과 활력 가득한 새 세상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서문.
이 책이 이토록 유익하니 얼른 사서 보라는 식의 내용은 전혀 없고, 정말 정직하게 인사의 목적만을 다하는 그 글은, 설령 시그리드가 직접 쓰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됨이 진솔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허나 막상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신세계』는 그대가 읽어보았을 그 원본이 아니오. 바로 이것이 널리 유통되고 있는 판본이지.”
완전히 엉뚱한 서문부터 시작해, 신대륙에 넘쳐나는 황금과 아직 남편이 없는 여주인 이야기까지. 정복되기를 바라는 여인과 황금이라는, 시그리드를 아는 이라면 다분히 역하다 여길 만한 거짓이 가득하였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런 글을 만들어냈단 말입니까?”
“나도 궁금하게 여겨서 조금 사람을 풀어보았소. 다른 건 몰라도 시그리드에 대해서라면... 나도 미련이 있거든. 헌데 막상 밝혀진 범인은 의외로 내 진영 안에 있더군.”
원 역사와 달리 왕세자(도팽Dauphin)도 되지 못하고 포로 신세가 된 샤를은, 포로가 되기 전만 해도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잉글랜드와 덴마크 사이를 갈라놓으려 여러 공작을 벌인 바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신대륙 선동이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는 일전에 아르마냑파를 속여 기옌Guyenne 지방을 손에 넣은 바 있소. 그곳 해안의 바스크인들도 피레네 반대편 동포들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배를 잘 만들고, 원양어업에도 꽤 많이들 종사하고 있지.”
신대륙이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나름 살 만한, 그리고 팔아먹을 만한 산물도 있는 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가장 동요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도시들이었다.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며 향신료 가격을 마음대로 부풀리던 베네치아는, 만에 하나 서쪽에서 향료의 땅 인도로 가는 직항로가 발견될까 두려워했고, 베네치아에게 동지중해 패권을 잃고 절치부심하던 제노바는 어떻게 하면 혼란스러운 지브롤터 너머로 뻗어나갈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².
따라서 그중 누군가는 기옌을 획득한 헨리에게 접근할 터였다. 기옌 지방의 조선소와 항구를 빌려달라. 그리하면 신대륙의 이익을 그대와 공유하겠다.
어찌 저 못난 에릭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작 홀슈타인 하나 점령하지 못하여 애를 먹던 보잘것없는 나라의 군주가 신대륙 이익을 독점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의 주인이 될 헨리 또한,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꼭 헨리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 에릭을 견제하려는 이들은 늘릴 수 있겠지. 마치 내가 그린란드 회사를 내세워 신대륙의 황금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같잖은 술수를 부리던 샤를은 붙잡혔지만, 이미 그의 하수인들은 저들의 주군에게 받은 명을 충실히 이행한 뒤였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내가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느냐고?
별 건 아니오. 그대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었을 명예와 권력을 내팽개치고, 시그리드와의 약속에 따라 신세계로 떠난다면, 곧 이런 헛소리에 선동된 승냥이들을 상대해야 될 것임을 알려주었을 뿐. 그리고 승냥이들을 내몬 뒤에는 진짜 맹수들이 찾아오기 시작할 테고.”
그리고 이렇게까지 해명해주었으니, 만약 지슈카가 자신의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신대륙으로 간다면 알아서 시그리드에게 잘 설명해줄 것이기도 했다.
영입에 성공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실패할지라도 최소한 그놈의 ‘미혼. 구혼자 기다리는 중’이라는 문구가 절대 에릭 자신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시그리드에게 알릴 수 있으니, 지슈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 땅에 남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 얘기였소. 지금은 굳이 묻지 않고서도 그대의 답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지만... 만약 떠나기 전에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함부르크의 시장에게 말 한 마디만 전해주시오. 그자 역시 내 사람이니.”
그 말을 끝으로, 에릭은 더 구질구질하게 설득하지 않고 차분히 물러났다.
대신 함부르크의 시장이 찾아와 에릭의 손을 잡을 것을 권하는 귀찮은 일이 자주 일어났지만.
대체 왜들 이렇게 에릭이라는, 그저 운 좋게 기회를 일찍 잡았을 뿐인 군주에게 열광하는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돌아왔지만, 그가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지닌 인기를 경계한 헨리의 견제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장 제르송이, 유럽을 떠돌다 우연히 얀 지슈카를 만나 한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공통의 지인, 시그리드가 한 말이 있었소. 호랑이의 등에 탄 기세라고 했던가.’
후대인들이 중세라 부를 이 시대에는, 명분과 실제, 대의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나날이 넓어져가고 있었다. 더 이상 교회는 과거의 교회가 아니요, 기사들 또한 과거의 기사들이 아니었건만, 심판의 그날까지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져가리라는 그 편리한 믿음만은 계속 이어져갔다.
그러한 괴리가 있었기에, 유럽 땅에서는 종종 해괴망측한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기독교인을 보호해야 할 기사단이 기독교인을 붙잡아 노예로 판다던가, 교회의 수장 교황이 둘로 쪼개져 서로 적그리스도라 비난한다던가.
그러므로 이 땅에는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도덕과 권위가 붕괴한 자리에서는 제멋대로 날뛰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들에게 예속된 백성들 또한 도를 넘어 날뛰는 통치자들을 상대로 들고 일어났다.
‘저 에릭 왕은 새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소. 비록 광기와 집착의 산물이긴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새로운 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오직 절대적인 군주인 국왕과 그를 섬기는 국민이 존재하는 나라.
에릭은 검은 책에서 흘러나온 지식을 되짚은 끝에 그런 답을 추론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답이라 굳게 믿는 것을 그 집착하는 성격으로써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상인과 백성들은 에릭이 스웨덴 귀족들을 몰살하고 그 권리를 주변에 나누어주는 데 열광했고, 한자 동맹의 사람들은 에릭이 말하는, 마치 지금의 귀족들처럼 상인들이 우뚝 설 날 이야기에 열광했다.
‘허나 그래본들 프랑스나 폴란드, 헝가리가 아닌 덴마크의 국왕일 뿐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가 말하는 이상이 한 번이라도 현실에 부딪혀 멈추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에릭은 비참하게 몰락하게 될 것이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운명이리라, 나는 그렇게 보고 있소.’
군주가 아닌 광대. 광대라기보다는 위험한 놀이에 심취한 광인.
그러나 그 광인이 저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며, 저들에게 이익이라는 달콤한 약속을 해주기에, 사람들은 계속 에릭에게 열광할 것이었다. 무대의 막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신대륙에 손을 뻗치려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지금이야 그 손이 허공을 허우적대고 있다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대륙 개척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더욱 그 손길은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리라.
얀 지슈카는 보헤미아에 사람을 보내, 그간 용병대가 애용하던 화포들을 가급적 모조리 챙겨올 것을 지시하였다. 그것만으로 그릇된 손길을 모두 내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그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적잖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1415년 늦봄, 보헤미아의 교회에서 압수된 자금으로 새로 건조된 이민선 함대가 함부르크에서 닻을 올릴 때까지도, 함부르크 시청이나 코펜하겐의 궁정 그 어디에도 얀 지슈카의 전언은 전해지지 않았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치는 대신 유럽에서 그대로 대서양을 건너는 직항로.
기푸즈코아 사람 미콜라스가 개척한 이 항로를, 물고기나 모피, 고래 기름이 아닌 사람을 싣고 건너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헤미아인 개척자들의 본대 제1진이라 할 수 있는 사백여 명 이민자들과 함께 따뜻한환영에 도착한 지슈카를 기다리는 것은, 여독이 풀리기를 기다려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긴급히 논의할 바가 있으니 북쪽 좋은희망으로 와 달라는 시그리드의 전언.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런 청을 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기에, 지슈카는 순순히 좋은희망으로 향했다.
그들이 타고 온 배들도, 어차피 모피와 담배 – 짝퉁 『신세계』에도 담배 이야기는 누락되지 않았던지라, 벌써 유럽에서 꽤 잘 팔리고 있더랬다 – 를 싣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향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의 자비 덕분인지, 지슈카는 평생 바다구경 못해본 보헤미아 사람들 중 뱃멀미에 시달리지 않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그 좋은희망이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시그리드는 보이지 않았다.
“엥, 벌써 오셨소?”
어째 저를 닮은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원주민 여인과 함께 그를 맞이하러 나온 스베인이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스베인, 오랜만이오.”
“아직 정정하신 듯하니 참 다행이오. 시그리드는 어르신께서 좀 쉬시다 오실 줄 알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소.”
“다른 일?”
“무슨 시럼인지 실험인지를 한다고 했는데... 저 남쪽의 ‘열대’라는 곳에서 지내려면 꼭 필요하고, 여기서도 꽤 쓸모가 있는 그런 물건이 있다지 뭐요. 그래서 여기 뒤편 숲속에 들어가 있소. 우리 불쌍한 콜그림까지 데리고 갔지.
같이 가십시다. 후스 선생을 비롯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그쪽에 모여 있을 게요.”
마을을 거쳐 숲으로 가는 길.
자신이 떠나온 대륙과 놀랍도록 식생은 비슷하건만, 사람들 면면은 참으로 특이하였다. 타타르인과 닮은 사람들. 마치 그들이 평생 저들의 이웃이었던 것처럼 태평하게 그들과 영어 비슷한 말로 노닥거리는 주민들.
“참 평화롭구려.”
“뭐, 얼마 안 된 일이오. 몇 년 전만 해도 저기 저 교역하러 오는 놈들은 우리네 나무꾼들을 습격하곤 했고, 당장 나랑 내 아내도 작년에 한 번 죽을 뻔했다오.”
너무나 태연하게 이 땅에서 겪은 놀라운 일들을 술회하는 스베인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여럿으로 쪼개지진 않은 신대륙 개척자들. 바벨탑이 세워진 이래 이토록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이 한데 모인 적이 있을까 싶은 그 모습을 보는 지슈카는, 자연스레 그 옛날 시그리드가 보헤미아를 거쳐 함부르크로 가던 길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대로 가면 유대인들이나 무어인들도 받아들이겠군!’
너무나 다양한 그 행렬을 본 지슈카가 반농담조로 말하자, 시그리드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온다고 하면 막을 것도 없겠지요?’
‘유대인도? 신대륙에 무슨 독을 풀려고?’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 같은 것만 하는 게 그들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반대지. 그런 죄를 지을 만큼 비루한 족속이니까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 아니오?’
‘닭이냐 달걀이냐 같은 문제긴 하지요.’
유대인들이 주님을 박해했듯 이 땅에서 박해받은 지 벌써 천 년이 훌쩍 지났다. 세상이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유대인 또한 사랑받기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미움을 면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또한 유대인을 미워하였다.
‘하지만 그 사슬을 신대륙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이렇게 옛날의 켜켜이 쌓인 인연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할 곳이 신대륙 말고 또 어디 있겠어요?’
지금껏 자신의 가문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 철석같이 믿어 왔던 – 그와 비슷한 처지의 몰락 하급귀족들 사이에선 상식이었다 - 지슈카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논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까지 시그리드는 자신이 내세웠던 그 공존의 기치를 놓치지도, 버리지도 않은 듯했다.
숲속에 들어선 지슈카의 외눈에, 얀 후스를 비롯해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 사람씩 들어가 있는 기묘한 천막도.
“저게 다 무엇이오?”
“모기장이라 하더구만. 남쪽에는 역병이 많이 도는데, 그게 다 모기랑 더러운 물이 옮기는 거라고 합디다. 시그리드의 그 검은 책에 그리 나와 있댔소.”
엄밀히 따지면 헛수고기는 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개척자들이 말라리아 원충이 기생하기에는 너무나 기후가 한랭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온 통에 말라리아는 아직 신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황열병 역시, 콩키스타도르들이 천연두로 전멸한 카리브해 원주민 대신 부려먹을 흑인 노예를 서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 일이 없었기에, 이 또한 괜한 걱정이었다.
“악! 물렸다! 아씨, 이제 그만 하면 안 됩니까?”
“벌써부터 노인을 이리 학대하다니, 우리 신대륙은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 되겠소?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는? 아, 신대륙의 앞날은 어둡도다!”
“에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요.”
다양한 재질로 만든 모기장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슬슬 모기가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절이 되자마자 시그리드는 임시의회 사람들과 함께 직접 숲속으로 와서, 하루종일 앉아 있으면서 누가 가장 많이 모기에 물리는지를 체크하고 있었다.
오목 실력이 가장 형편없던 콜그림. 자신이 3·3을 반칙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깜빡하고 제 손으로 반칙을 범해버린 플레톤. 이렇게 두 사람은 대조군으로 선정되어, 하나는 맨몸으로 앉아 있고, 하나는 구멍 숭숭 뚫린 천막에 들어가 있었다.
“앗? 지슈카 선생님! 오셨군요!”
한 발 늦게 지슈카의 등장을 알아챈 시그리드가 반갑게 맞이하려 벌떡 일어나다가 그만 모기장을 북 찢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실험은 흐지부지 끝나고, 시그리드가 그럭저럭 괜찮게 나온 실험 결과를 빠르게 정리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모기가 드문 양지바른 들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지슈카가 그간 겪었던 일과, 『신세계』 사건에 대한 에릭의 진술을 옮겨주었다. 모기 물렸다고 불평하는 이들을 비롯해 모두가 한결 진중한 표정으로 회의에 임하게 되었다.
“... 하여, 이 땅에 닿게 되었소.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시그리드 그대가 이곳에서 이루어낸 모든 일에 찬사를 표하는 바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반신반의하긴 했소이다.”
“감사합니다.
이 자리의 모든 분들도 짐작했거나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이대로라면 곧 다른 이들이 신대륙에 도착할 거에요. 우리로서는 그들을 막을 수단도 없고, 또 도리상 그들을 막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제 생각은 이렇답니다.”
검은 책에 적혀 있는 아즈텍에 대한 내용은, 사실 ‘코르테스가 도착하기 전에는 이랬는데, 지나간 다음에는 이렇게 되었다’ 정도가 끝이었다. 그로부터 일백여 년 전인 지금 그 땅이 어떤 상태일지는 순전히 상상의 영역.
“그렇지만 우리가 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해요.”
인구를 다 합쳐봐야 수만에 지나지 않는 긴집사람들이나 세줄기불꽃과는 달리, 남쪽의 아즈텍은 족히 인구 수백만은 달하는 거대한 고대국가.
하다못해 쇠퇴 기로에 접어든 지 오래일 유카탄 반도의 마야조차, 어지간한 도시 하나의 인구가 현재 개척자들 전체보다 더 많을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함부로 다른 유럽 사람들이 이 대륙을 오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동시에 이 땅의 사람들이 같은 유럽인들에게 학대당하거나 학살당하는 것을 방관해서도 안 될 거예요.”
따라서, 남쪽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유럽인들에 대해 알게 하고, 유럽인들에게 굴복하지도, 적대하지도 않게끔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령 아즈텍과의 교역을 두고 유럽 국가들과 경쟁해야 한다 할지라도, 신대륙 연합 쪽에 승산이 있었다.
“더구나 미래를 생각하면 더 남쪽까지 갈 필요가 있어요. 그곳에도 황금이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작물들이 있거든요. 이것 역시 현지인들과 협력해서 육로를 이용할 권리를 얻은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중 하나인 퀴닌quinine은, 말라리아가 아직 신대륙에 넘어오지 않았기에 쓸모가 없겠지만, 그 외에도 남미에서 들여올 수 있는 귀중한 작물은 많이 있었다.
코코아, 고무, 땅콩, 고구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자.
원 역사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을 수 있던 방법 또한 이러했다. 도저히 지금은 정복할 수 없을 파나마 지협은 깔끔히 포기하고, 멕시코를 지나는 육로를 통해 두 대양을 오가는 것.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알 길이 전혀 없으니, 우선은 대화를 원칙으로 하되 나름의 무장은 갖추어야 할 거예요. 지슈카 선생님께서 도착하시길 기다린 것도 그 때문이고요.”
“대화를 원칙으로 한다... 하기야, 지금까지 공존을 말해 왔고, 우여곡절은 있을지언정 잘 해 왔으니.”
“그렇지요. 그 사람들이 인신공양이랑 식인을 하곤 있겠지만...”
그 말을 들은 지슈카는 경악하고, 다른 이들도 금시초문인 얘기에 발칵 뒤집혔다.
“아니, 뭐라고?”
“식인종? 검은 책의 내용을 설명할 때 그런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잖소?”
“아니, 아니. 들어보세요. 그게, 제가 일부러 언급을 안 한 게 아니라, 우리가 가서 도와주면 금방 없어질 풍습이라서 그런 거였거든요.”
시그리드 입장에서야, 당장 검은 책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바쁜 판에 아즈텍의 전통 문화까지 깊게 다룰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제가 알기로는, 그 사람들이 식인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먹을 게 없어서에요. 여기서 오래 지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대륙에는 닭도, 돼지도, 양도, 말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서 돼지랑 닭을 건네주면 금방 풍습도 바뀔 거에요. 솔직히 사람보다야 가축이 더 낫지 않겠어요? 먹기도 편하고요.”
존 M. 윌슨 중령은 같은 공군 기술장교 중에서도 유별나게 박식하고 학술적 관심이 풍부한 축에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학구열에 불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아직 나오지조차 않은 학설을 미리 공부할 수는 없는 노릇.
고작해야 『황금가지』에 언급되는, 인류 보편적인 인신공희에 대한 이야기와, 1970년대에 종종 언론이나 잡지에 나오곤 하던, 아즈텍 인신공양 풍습은 단백질 부족 때문이라는 가설이 이방인 욘이 아즈텍의 이 논쟁적인 풍습에 대해 아는 바의 전부였다³.
그러나 그런 점을 알 리 없는 1415년의 신대륙 연합 임시의회 사람들로서는, 그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러한 지식이 ‘완전히 올바른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일부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회의 하에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먹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다른 먹거리를 주고, 겸사겸사 황금 가득한 우호적 관계도 맺는다는 목적으로 남부 탐험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허리케인이 멕시코 만을 휩쓰는 계절 동안 준비를 마치고,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긴집사람들 연맹의 전사들까지 꼬드겨 인력을 채운 탐험대는, 마침내 남쪽으로, 어딘가에 있을 황금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돛을 펼쳤다.
1415년 8월의 일이었다.
--- *** ---
1. 원 역사의 헨리 5세도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한 끝에, 부르고뉴파의 손을 잡고 프랑스 침공을 시작합니다.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부르고뉴파 역시 파죽지세로 파리까지 진격하지요.
그러나 원 역사에서는 샤를 7세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일시적으로나마 부르고뉴파를 잉글랜드의 편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그 외에도 온갖 공작을 펼쳐 잉글랜드의 앞길을 막았지요. 결국 잉글랜드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헨리 5세는 급사하고, 오를레앙이 함락 직전까지 몰린 1429년에는 바로 잔 다르크가 등장합니다.
허나 작중에서는 시그리드가 일으킨 나비효과로 그런 일이 전혀 벌어지지 못했고, 샤를 7세는 왕세자 책봉도 받지 못한 채 포로 신세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2. 실제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존 캐벗 등 대항해시대 초기의 탐험가들 상당수는 이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숙련된 뱃사람들인 동시에 사업가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인들 중에는, 항해만큼이나 벤처 사업의 성격도 지니고 있던 신대륙 탐험을 주도하는 데 있어 최적의 인재들이 많았지요.
3. 아즈텍 인신공양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규모와 목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즈텍 본인들과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 훼손,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멕시코 민족주의까지 얽히면서 아직까지도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지요.
작중 언급된 단백질 부족설은, 이미 당시부터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나름 설득력 있는 가설로 여기저기 인용되곤 했지요. 특히 1977년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여기에 반박하면서, 역설적으로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