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61화 (61/116)

이름 없는 말 한 필 (3)

14. 이름 없는 말 한 필 A Horse With No Name (3)

보헤미아에서 몰수된 교회 재산으로 새로 건조한 노블 두 척과 그리고 좋은희망의 조선소에서 건조한 보다 작은 배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신대륙 기준 사상 최대의 함대.

같은 이치로 신대륙 북쪽 최강의 군사집단이라 할 수 있는 그린란드 연대원 2백 명과, 시그리드와는 구면인 아욘와에스가 이끄는 긴집사람들 전사 1백 명. 그리고 시그리드와 그 부관 겸 군 지휘관 지슈카, 시그리드의 부관 콜그림을 위한 말 몇 필.

이중 그린란드 연대원들은 시그리드와 얀 지슈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기꺼이 나섰으며, 아욘와에스의 전사들은 강가 부족들을 안심시키고 서쪽 이방인들의 환심도 사고자 한 추장들의 결의에 따라 – 그리고 몇몇은 개인적 호기심에 이끌려 – 옥수수 강을 타고 내려와 합류했다.

(그리고 말 세 필은 주인 잘못 만난 죄로, 겨우 바다를 건너오자마자 인간들이 만든 ‘배’라는 나무 감옥에 또 한 번 갇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남쪽 사람들에게 선물할 돼지와 닭, 자질구레한 교역품 약간을 싣고서 탐사대는 출발했다.

플로리다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죽 남하하고, 오지 않을 미래에 마이애미라 불릴 곳 근처에서 서쪽으로 꺾어 멕시코 만을 횡단하는 것이 처음 세운 계획이었다.

식수 확보를 위해 잠시 정박한 플로리다에 ‘악어습지 반도’라는 새 이름까지 붙일 무렵까지는 만사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에버글레이즈Everglades 대습지를 보고 붙인 이름이었다.)

작은 배를 타고 민물이 나올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현지에서 벌목한 땔감으로 아예 물을 깔끔하게 끓이기까지 한 다음 돌아오는 탐사대원들을 바라보던 시그리드는, 어째 제 곁에 있어야 할 콜그림이 조용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콜그림 아저씨, 괜찮으세요?”

“네? 아, 네. 네.”

어째 말수가 줄어든 콜그림은, 멍하니 수평선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얼마 전 득남한 스베인은 카나스탓시와 함께 좋은거래에 남았기에, 이 탐험에 따라온 그린란드 사람들 중 최선임은 콜그림이었다.

헌데 그 옛날 동녘정착지나 프라하 등지에서 그 수다스러움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콜그림답지 않게, 요 몇 달은 내내 조용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플레톤 선생님하고도 출발 전까지 계속 뭔가 이야기를 나누시던데.”

“아, 그게... 우리 탐험이랑은 별 관련 없는 얘기입니다. 그냥, 그 뭣이냐, 세상만사에 대해 조금 회의가 들어서요.”

‘회의’라는 말을 가르쳐준 것은 아마 플레톤일 테다.

플레톤이 진지하게 제우스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콜그림은 한동안 그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 ‘제우스’가 힘들여 일하는 자들의 신, 번개와 망치의 신 토르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우주 원리의 표상일 뿐이라는 것을 (간신히) 이해한 이후로는 다소 관심이 식었더랬다.

그러나 어떤 일에서인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로 다시금 플레톤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회의라고요?”

“별 일 아닙니다.”

“에이, 지금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좀 알려주시면 어디 덧나나요.”

시그리드가 저렇게 초롱초롱하니 저를 쳐다볼 때면, 옛 신들의 이야기를 해 달라며 조르던 그때의 그 귀여운 소녀 모습이 겹쳐 보였다.

“옛날에 해드리곤 했던 그런 이야기랑은 많이 다른,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콜그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우리네 사람들이 오래된 신들을 다시 믿기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큰겨울 핌불베트르가 닥쳐와서 그랬던 것 아닌가요?”

“네. 바로 라그나로크 얘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그나로크가 약속하는 희망 덕분이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만요.”

하루하루 살아남으며 어떻게든 버텨보았자, 겨울은 계속 혹독해지고 세상은 더욱 가혹해진다.

그딴 세상이라면 멸망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들이 설령 세계수 위그드라실과 아홉 세상과 더불어 잿더미로 화할지라도, 그들의 자손만은 살아남아 더 나은 시대, 발두르가 다스리는 황금과 정의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저 같은 무식한 놈에게도, 세상이 그 자체로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씨를 따라 더 넓은 세상을 보면서 더욱 그 점은 분명해졌지요.

아씨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전쟁과 기근, 역병... 고작 사람 한두 사람의 악의 때문이라고 보기엔 이 세상 자체가 너무나 그릇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씨는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지슈카 대장도 그렇고요. 마치 오래된 신들 본인이 강림한 것처럼, 교회며 황제며, 온갖 난관을 다 뚫고 온 세상을 누빈 끝에 우리 모두를 이 땅까지 인도해 주셨지요.”

그룬발트의 전장. 시체가 그득한 그곳에서 보았던 오딘과 리프트라사의 모습을 콜그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붙여준 ‘리프트라사’라는 별명 뒤에 그런 고민이 있었을 줄 꿈에도 몰랐던 시그리드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신은 없었잖습니까? 교회의 신도, 우리의 오래된 신도요. 만약 신이 있다면, 아씨처럼 선한 일을 하는 이에게 뭔가 보태주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파울이나 후스라면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였다고.

그러나 콜그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위업을 이루어낸 것은 오로지 사람의 힘이었다. 대체 그 어디에 신의 가호가 있었단 말인가? 오히려 콜그림에게 그러한 논리는, 신의 부재를 감추고자 허겁지겁 가져다 붙이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고민스러웠습니다. 이 신대륙은 물론 아씨가 약속한 것처럼 풍족하고 우리 모두를 먹여살리기에 차고 넘치는 땅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고난이 사라지는 것도, 궁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아씨는 이 땅에서 좋은 일을 행하고 있는데도요.”

플레톤은 콜그림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먼 옛날 에피쿠로스라는 이교도 학자가 고안했다는 논변¹.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함께 존재하는가?

만약 신이 악을 제거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럴 재간이 없다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신이 악을 제거할 능력은 지니고 있지만 그럴 의지가 없다면, 신 자체가 악한 것이다.

신이 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다면, 신을 섬길 이유가 없다.

여기에 대해 플레톤은 말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는 진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그런 선악은 없으며, 오직 인간을 초월한 우주의 원리만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플레톤과 달리, 유럽에서 버려진 얼어붙은 변방에서 힘겹게 반평생을 살아왔던 콜그림에게는 플레톤이 말하는 원리로서의 신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였다. 고작 이딴 세상 따위를 지탱하는 원리라면, 그것은 신으로 불릴 자격이 없었으니까.

“... 그래서 요새 고민이 많았습니다. 뭐, 냉정하게 말한다면야 신대륙에 닿은 뒤로 살만해지니까 그런 배부른 고민도 하는 것이겠지만요.”

별 생각 없이 사는 줄로만 알았던 콜그림에게서 의외로 깊은 고뇌가 흘러나온 데 놀란 시그리드는, 한동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어느새 식수를 보충하러 떠났던 이들은 돌아왔고, 탐사대는 다시금 닻을 올려야 했다.

악어습지 반도의 끄트머리를 지나, (곧 새 이름이 붙을) 멕시코 만을 횡단하려던 차. 선단은 철모르는 폭풍에 휘말렸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시그리드의 패착이었는데, 이미 그 옛날 아이슬란드에서 한 번 허리케인을 만나 곤경에 처했다는 데서 교훈을 얻었더라면 20세기 중후반의 기후를 바탕으로 한 욘의 기후 상식은 이 시대에 잘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해낼 수 있었을 것이기 떄문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폭풍에 휩쓸리기 직전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낀 바스크 선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해변에 정박했기에,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배 한 척 침몰하지 않고 멀쩡히 폭풍을 버텨낸 것이 기적이라 해야 하리라.

배가 흔들리면서 여기저기 쏠리는 짐에 몇몇 사람들이 부상을 입긴 했지만, 그 외의 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 부상을 입은 사람 중 하나가, 하필 짐을 고정하는 밧줄 상태를 손수 점검하다가 그 짐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콜그림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괜찮으세요?”

“으으... 시그리드 아씨?”

사고 이틀 뒤, 바닷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콜그림을 갑판 위로 데리고 나온 시그리드는 금방 그 효과를 직감할 수 있었다.

“네, 저예요. 정신이 드셨나 보군요.”

“여기가 어딥니까?”

“악어습지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온 해안이에요. 언제 또 폭풍이 닥쳐올지 몰라서, 이렇게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로 결정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즈텍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중간중간 기항하면서 찾아보고요.”

그 말이 아예 허황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듯, 언제 폭풍이 몰아쳤냐는 양 말끔한 하늘 아래 해안가 언덕에는 마을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마을에 찾아간 탐사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다고요?”

“네. 사람이 안 산지 몇십 년은 된 것 같던데요. 그리고... 좀 께름칙한 얘기인데, 버려진 솥 안에 인골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맙소사.”

그러나 역겨움을 호소하며 당장 돌아가자고 독촉하는 이들은 없었다². 그 다음에 마주친 마을들도 대개 상황은 비슷했던 것이다.

그저 사람 고기를 탐하여 먹었다기보다는, 엄청난 기근 앞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인육에 손을 대었고, 그러고서도 끝내 버티지 못해 전멸했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그나마 타당한 설명이었다.

그러니, 불길한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계속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수밖에.

뇌진탕 탓인지,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쓰러지거나 헛소리 하기를 반복하는 콜그림을 시그리드가 간호하는 동안에도, 탐사대는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탐사대는 옥수수 강이나 교역의 강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거대한 강 – 아마 미시시피 강일 테다 - 의 어귀에서, 홀로 살던 어느 원주민 노인을 만났다.

정확히는, 그 노인이 먼저 해변까지 달려와 펄쩍펄쩍 뛰면서, 이쪽에 필사적으로 손짓을 하기에 궁금해서라도 만나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손짓발짓으로 시작한 의사소통은 놀랍게도 금방 공용어 의사소통으로 발전했다. 마치 다른 언어를 몇 번 익혀본 사람처럼, 노인은 능숙하게 기본적인 문구 몇몇을 배우곤, 그것을 응용해 저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불과 사흘 만에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해졌는데, 노인의 사연을 들은 시그리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멀리 강 북쪽에서 온 상인이오. 아니, 상인이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

노인은 대대로 교역을 업으로 하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고향은 한참 북쪽, 거대한 두 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도시라 불릴 만한 무언가가 있었고, 강과 평원을 따라 많은 물건들이 교역품으로서 오가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도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삭은 더 이상 패지 않았고, 구름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소. 신들이 노했다고 누군가는 말했소. 그러나 오십 명 – 내 딸도 그중 하나였소 – 사람을 제물로 바쳤건만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았소.

불행은 우리에게만 닥친 게 아니었소. 교역이 끊기자, 모두가 남의 것을 탐하기 시작했고, 곧 모두가 모두를 죽이기 시작했소. 사람이 열의 열의 열의 열보다 많이 살던 나의 고향은 그렇게 무너져내렸소.”

그때 노인은 도시의 멸망을 막을 기발한 발상을 해냈다. 어떻게든 교역망만 되살릴 수 있다면, 교역에 최고의 입지를 지닌 그의 고향도 부흥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종종 서쪽의 부족들과 교역하곤 했소. 그럴 때면 종종 머나먼 남쪽 아나우악Anahuac(멕시코 분지 일대)에서 온 상인들과도 마주치곤 하였지. 나와틀Nahuatl이라는 그들의 말도 나는 익힌 적이 있소. 그대들의 말을 이토록 빨리 익힌 것도 아마 그 덕일 테요.”

노인의 고향에서 아나우악까지의 거리는, 사실 아나우악에서 서쪽 부족들까지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고향에서 아나우악까지 가려면 사막과 호전적인 부족들의 땅을 거쳐야 했을 뿐³.

그러나 노인의 고향 곁을 흐르는 큰 강에서 사람들은 배를 타고 교역에 종사하곤 했다. 강이 끝나는 곳이 있다는 큰 짠물이라고 배를 못 띄울 건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직접 아나우악 땅까지 갈 수만 있다면, 끊어진 교역을 되살리고 무너지는 고향을 되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이 큰 짠물, 푸른 바다를 향해 일가를 거느리고 옮겨왔소. 이름도 ‘푸른 사나이’, 차바누샤아Tsabanushaa로 바꾸었소.”

하지만 노인은 상인일 뿐이었고, 그가 아는 배의 전부인 나룻배는 이 막막한 큰물 앞에선 장난감에 불과했다. 돌아갈 고향은 사라지고, 목표를 이룰 재간은 없고, 그렇게 수십 년을 그저 기적만을 기다려 왔다.

씁쓸하게 해변 한쪽, 아무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큰 배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실패한 흔적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구석을 가리키는 노인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죽거나 흩어지고 나만 남았소.”

그리고 씁쓸하기만 하던 차바누샤아의 얼굴에는 갑자기 광기가 서렸다.

“그러던 차에 나는 그대들을 보았소. 이 큰 배를!

내 부탁하겠소. 내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모두 해내리다. 부디 이 배를, 마치 떠다니는 섬과도 같은 이 배를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보내주시오! 저 남쪽 아나우악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살고, 또 엄청나게 많은 부가 있소. 내 그대들을 안내해주리다!”

이미 약간의 교역만으로는 되살릴 수 없을 만큼, 이 땅에서 막 싹을 틔운 문명은 시들어 사라져버렸다. 설령 이곳에 몇백 명쯤 사는 교역 거점을 만든다 한들, 이미 뿔뿔이 흩어져 사라진 노인의 고향 사람들을 되살릴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누구도 차바누샤아 노인에게 이 점을 지적해줄 수는 없었다. 저들이 이 슬픈 노인을 이용하는 꼴임을 알면서도, 우연히 나와틀어 통역사를 얻었다는 점 한 가지에만 만족하는 수밖에.

차바누샤아 노인이라는 통역을 얻은 탐사대는, 해안선이 서진을 넘추고 남쪽으로 돌아서는 곳을 지나 다시금 남하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떠다니는 섬’에 경악하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복식을 갖춘 사내를 발견했다.

복식이 그럴듯한 사람이 나타나 소문을 확인하러 왔다는 것은, 최소한의 공권력은 존재한다는 뜻.

그 판단이 옳음을 증명하듯, 탐험대는 마침내 그 근처에서 도시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투스판Tuxpan⁴에 온 것을 환영하오, 먼 땅에서 온 이들이여!”

스스로 후아스텍Huastec 혹은 테넥Tenek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도시 투스판. 그 도시를 대표하여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제는 제법 반갑게, 그러나 딱히 경외에 휩싸이진 않은 표정으로 시그리드 일행을 맞이했다.

무릇 신비로운 현상이란 몇몇 사람들에게만 잠깐 보여야 신비로운 법.

해안을 따라 쭉 내려오던 이 ‘떠다니는 섬’의 사람들은 어느새 그 신비로움을 상당 부분 잃은 뒤였다. 그저 조금 다르게 생긴 신기한 사람으로 볼 뿐.

특히나 그들 가운데, 저들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본 이후로는 더욱 그러하였다. 무릇 사제라면 평민들 앞에서 함부로 경외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이방인들과 대화함으로써 저들의 권위를 보인다면 모를까.

다른 사제들을 대신해 이 이변을 조사하러 나왔다가, 졸지에 이방인들을 맞이하게 된 사제는, 이방인들을 구경하러 나온 도시 사람들 모습에 한껏 고취되어 자신이 아는 바를 계속 떠벌렸다.

“아즈텍? 아, 메히카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런 자들이 저 내륙에 있다곤 들었소. 꽤나 강력한 야만인 용병들이라는데, 살 곳이 없어서 호수 한가운데에 도시를 세워서 거기 머문다더군! 그 도시 이름이 테노치티틀란이라고 했던 것 같소.”

내심 조금 더 격렬한 반응을 기대했던 시그리드로서는 영 심심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방인게 이렇게 친절하게 주변 사정을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했다.

듣자하니 아직 아즈텍 제국은 없고, 그저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여기저기 퍼져 저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는 것이 전부인 듯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시그리드 일행이 걱정했던 것처럼 무작정 사람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항구 – 고작해야 자그만 어선들이 드나드는 게 전부였다 – 에는 갓 잡힌 생선이 꽤 많이 보였고, 주변의 건물들도 지금껏 북쪽에서 보았던 곳들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멋들어져 있었다.

“여하튼 잘 찾아와 주셨소! 우리 도시를 지켜주시며 우리 인간 모두에게 비를 내려주시는 관대하고도 위대한 틀랄록Tlaloc 신께 바치는 제사가 한창인 지금, 이렇게 큰 물을 건너온 이방인들이 도착했으니 어찌 길조가 아닐까!”

항구와 맞닿은 도시 안쪽으로 일행을 이끌면서 사제는 계속 입을 놀렸다.

정말 사백 명 전사들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 여기는 건지, 아니면 그들에게 익숙한 흑요석 무기를 들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에 안심하는 건지, 시그리드 일행에게 여차하면 이 도시를 불태울 무력이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치 않는 듯했다.

“우리 도시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이 세상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신 신들을 위하여, 또 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얼마나 훌륭하게 제의를 치르고 있는지, 부디 머나먼 땅까지 남김없이 전해주시길 바랄 뿐이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 제의가 저들의 힘을 과시하는 장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생면부지 이방인들에게 제의 현장부터 구경시켜주겠다는 것도 딱히 비합리적인 처사는 아니리라.

물론, 어디까지나 이들의 사고체계 내에서만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 제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오, 신비로운 여인이여, 그대 또한 사제입니까? 과연, 젊으면서도 늙은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비범하다 여기긴 했지.

우리의 제의는 실로 짜임새 있으면서도 웅장하여, 제물을 바침에 있어 가히 신들께 부끄러움 한 점 없다 자부할 수 있소이다.”

“그 제물이라는 건 사람이겠지요?”

“보통은 그렇지. 가끔은 옥수수 반죽으로 사람 모양 인형을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오.”

“그게... 실은 저희가 사람 말고도 먹을 만하고 또 제물로 바치기에도 좋은 짐승들을 데려왔는데요. 맛도 좋고 자라기도 잘 자라고, 무엇보다 사람이 아니라는 장점이 있답니다.”

“짐승이라? 당연히 짐승을 바쳐야 하는 제의에는 조건만 맞다면 짐승을 바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을 바쳐야 하는 제의는 또 다른 이야기지 않겠소? 생각해보시오. 신들부터가 스스로 희생하여 이 우주를 유지하였는데 어찌 사람이 신의 전례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시그리드가 어떻게 하면 이 사제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

마침내 일행은 도시 가장 중심부의 높다란 제단에 닿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제단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코는 제단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에 각각 향했다.

신을 위한 제물이자, 죽고 부활을 반복함으로써 영생하는 신 그 자체가 된 신인神人들. 그들의 시체와 피, 그리고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인신공양의 모습.

시그리드의 입은 떡 벌어지고, 악랄한 식인종들과 ‘위대한 중재자’ 이야기를 떠올린 긴집사람들 전사들은 분개하고, 얀 지슈카는 외눈을 질끈 감고, 몇몇 비위 약한 이들은 토악질을 하고...

두 발로 겨우 걷고는 있지만 아직 상태가 불안정하여, 어지간하면 이곳에 머물며 요양토록 할 심산으로 데리고 내린 콜그림은, 그저 눈 동그랗게 뜬 채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우친 차바누샤아 노인이 먼저 사제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네었다.

“아, 그대들의 땅에는 이런 제의가 없다고? 하하! 걱정 마시오. 그대들이 신들께 불경을 범하여도 괜찮소. 우리가 그대들 몫까지, 이토록 신실하게 공경을 다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어찌 저 태양이 운행을 멈추고 저 구름이 비를 거두는 일이 벌어지겠소?”

진심어린 자부심을 담아, 사제가 말했다.

“우리가 이처럼 이 다섯 번째 세상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이상,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여섯 번째 세상이 열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은 유지될 것이외다.”

이것이 바로 우아스테카의 위대한 도시 투스판이,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슬쩍 자부컨대 다른 도시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세상을 위해 행하고 있는 의무의 현장.

그것을 사제가 간결하게 정리해 말하니, 인신공양뿐 아니라 이방인 행렬도 구경하려 모여들었던 평민들은 이 거룩한 말씀에 감탄하며 이방인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를 살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람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 때문이었구나!”

이 장면을 보기 전부터, 플로리다 인근에서 허리케인을 만났을 때부터 살짝 풀려 있던 콜그림의 눈은, 이제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허나 동시에 무언가 다른 것으로 불타고도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콜그림의 머릿속에서 짜맞추어졌다.

어찌하여 신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신들조차 이 잘못된 세상의 일부였기에, 도저히 세상의 틀 안에서 세상을 고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인신공양 끝에 오딘은 라그나로크의 미래를 예지하고, 발키리들을 풀어 에인헤랴르를 모았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지상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괴수와 망령과 싸움으로써, 그 다툼 속에서 마침내 이 잘못된 세상을 송두리째 불태울 수 있도록.

그래, 그것이 전능하지는 못하되 전지한 오딘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품고 있던 마지막 의문. 오딘이 저의 운명을 알고 있었는데도 담담히 파멸을 대비하던 까닭.

그리고 지금쯤 닥쳐오고도 남았어야 할 파멸이 아직도 오지 않아, 이 땅의 초인들이 그토록 노력하는데도 그들에게 정당한 보상은 주어지지 않고, 세상의 난관은 비켜서기는커녕 외려 첩첩산중으로 버티고 있는 까닭.

“너희들 때문에 이 잘못된 세상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거였어!”

공용어도 아닌 날것 그대로의 북방어로 포효하며, 콜그림은 사제의 멱살을 잡았다.

“너희만 아니었다면, 핌불베트르가 처음 닥쳤던 육십 년 전에 이미 라그나로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고!

너희 때문에! 너희 때문에! 이 잘못된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려고 인간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너희 개새끼들 때문에!”

춥고 배고픈 동녘정착지의 겨울. 누추한 집에 웅크려 굶주림을 참으면서 진심으로 라그나로크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내는, 광기에 사로잡힌 채 그간의 울분을 토해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은 진작에 망했어야 했어! 너희가 감히, 너희 잘난것들 좋자고 멸망을 제멋대로 늦췄단 말이냐?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알기는 하느냔 말이다!”

조금 더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니, 꼭 이성적이진 않더라도 뇌진탕으로 고통받지는 않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비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허나 이미 늦었다.

엄숙한 제례를 지키던 이들이, 멱살 잡힌 저들의 사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고, 시그리드와 지슈카는 무장할 것을 지시하며, 콜그림과 사제 주변을 둘러싸고.

그리고, 차바누샤아 노인과 주변의 구경꾼들은, 이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대체 무슨 이유로 저 이방인이 저토록 분노하며 사제의 멱살을 잡았는지 궁금해하고.

세상을 유지한다면서 그 세상을 살아갈 사람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던 이들의 종교가, 세상의 파멸을 기다린다면서 그 세상을 마음껏 짓밟으며 즐겁게 살아가자 말하던 종교와 맞닿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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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의 주제 중 하나인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이 에피쿠로스의 역설을 고안한 사람이 진짜로 그 철학자 에피쿠로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인격신 개념을 부정하면서, 우주의 운행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는 초월적이고 불멸하는 신의 개념을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플레톤이 그리스의 옛 신들을 우주의 여러 원리에 대응시키면서 그리스 다신교의 부활 내지는 재해석을 주장한 것과도 맞닿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반대로 작중 콜그림이 말하는 북구신화 세계관은, 플레톤이 직접 글을 써서 반박하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론, 즉 신조차 우주의 일부라는 관점에 더 맞닿아 있습니다.

2. 식인에 대한 금기는 지금까지 등장한 북미 동부 원주민 사이에도 널리 존재했습니다. 식량 생산의 한계로 종종 식인이 벌어졌다는 증거도 농후하지만, 그와 동시에 적대하는 부족에 ‘식인종’이라는 멸칭(모호크)을 붙인 알공킨족의 사례나, ‘위대한 중재자’가 식인종들을 참회시키고 이로쿼이 연맹에 가입케끔 설득하였다는 이로쿼이 전설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런 식인 행위를 금기시하였다는 것도 명확히 알 수 있지요.

3. 북미 최대의 강인 미시시피 강 유역은 농경과 교역에 유리한 지역이었고, 대략 8세기부터는 성읍국가들이 강 유역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농경문화는 공통적으로 매우 불안정하였고, 국가에 가깝게 발달한 몇몇 구심점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다가 14세기 말엽부터는 전반적으로 빠르게 쇠퇴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결국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미시시피강 유역은 이전 문화의 생존자 몇몇과 북쪽에서 남하한 다른 부족들 몇몇만이 거주하고 있는, 무주공산에 가까운 상황이었지요.

작중 등장한 차바누샤아 노인의 고향 카호키아Cahokia 역시 그런 운명을 맞았습니다. 지금의 세인트루이스에 있었던 카호키아는 13세기 최전성기에는 인구 1만에 달했던, 북미 기준으로는 엄청난 대도시였지요. 그러나 13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도시는 빠르게 몰락했고, 1340년에서 1460년 사이 어떤 시점에 도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쇠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확실히 단정할 수 없지만, 대체로 기후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력 소모가 극심한 옥수수라는 주력 작물은, 야금술이 부족하고 대형 가축 또한 부재하던 중남미 원주민 사회와는 아주 상성이 좋지 않았지요. 천재지변에 취약할 수밖에 없던 중남미 농업의 특징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세계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정됩니다.

3. 오늘날의 멕시코 중부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고대부터 한참 북서쪽에 있는 뉴멕시코-애리조나 일대 원주민들과 교류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 원주민들은 다시 미시시피 문화권 원주민들과 교역하곤 했고, 그런 중계무역을 통해 미시시피 문화권에도 다른 중남미 문화와 유물이 유입되곤 했지요.

그런데 정작 미시시피 문화에 속한 부족들은 직접 중앙아메리카 부족들과 교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텍사스를 지나 멕시코 만 해안을 따라가는 육상교역로, 이른바 ‘길모어 회랑Gilmore Corridor’이 존재하였고, 실제로 그곳에서 교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고고학적 흔적도 발견되었지만, 정작 대부분의 교역은 미국 남서부를 경유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요.

또한 마야인들이나 카리브해의 타이노인들이 작은 나무배를 타고서도 소금이나 터키석 같은 귀중품 무역을 종종 행했던 것과 달리, 미시시피 문화나 멕시코 원주민 사이에서 해상무역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전무합니다. 작중 등장하는 차바누샤아 노인은 그러므로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 태어난 괴짜인 셈이지요.

4. 투스판은 우아스텍인들의 도시 중 하나로, 멕시코 만에 접하고 있었습니다. 테네크(이곳 사람들)라고도 자칭하던 이들은 지금의 베라크루스 등, 멕시코 중부 동해안 일대에 기거하고 있었지요. 이들은 기원전에 유카탄 반도에서 이주해온, 혈통이나 언어상으로는 마야에 조금 더 가까운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즈텍을 비롯한 멕시코 분지 일대에서 쓰이던 나와틀어가 이미 공용어로서 통용되고 있었고, 종교나 문화 면에서도 거의 동화된 상태였기에, 나와틀어가 통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우아스텍은 아직 독립 도시국가들 여럿이 병립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1450년경에는 공격적인 확장을 거듭한 아즈텍에게 정복당해 아즈텍의 봉신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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