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63화 (63/116)

물 위의 연기 (1)

15. 물 위의 연기 Smoke on the Water (1) – 딥 퍼플 (1972)

틀라콰나틀록. 신과 인간이 함께 이룩하는 세계의 멸망이라는 ‘좋은 소식evangelion’은 불길처럼 와스테카 땅 너머로 퍼져나갔다¹.

“사제도, 제물도 필요 없다!”

“이 삶에서 투쟁한 자, 전사로서 신들과 함께하리니!”

누군가는 이 불길을 이용해 적들을 불태우려 하였으나, 순수한 신앙심에 의거하여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보려 헛되이 애쓰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어찌 그런 불경을 범하느냐! 희생의 제의를 바치지 않는다면, 대체 너희가 말하는 공경이란 무엇이냐? 무엇으로 제물을 바치려 하느냐?”

그러나 이미 민중의 마음은 돌아서 있었다.

신들 앞에서 인간은 제물이요 힘없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제들의 말보다, 신들은 항상 인간을 돕고자 하며, 안온한 내세와 세상에 대한 복수를 보장하려 한다는 나그네와 행상들의 말이 더욱 감미로웠던 것이다.

“우리의 제물은 우리 마음 속 믿음이요, 영혼이다!”

“신들의 뜻을 왜곡해 잇속을 차리는 너희야말로 불경스럽다!”

또한 틀라콰나틀록 신앙을 퍼뜨리는 이들은 이렇게 떠들곤 하였다.

투슈판 시에는 시와코아틀Cihuacoatl 여신이 강림하였는데, 젊은 여인이지만 머리는 백발이요, 그 백발은 사실 흰 뱀으로 이루어져 있고, 벼락을 일으키는 창을 다루며, 또한 살아 있지만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하다 하였다.

실은 시그리드라는 이름이 나와틀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끝에 생긴 오해였다. 흰 뱀 머리칼이란 것도 북방 사람들 하는 대로 땋은 머리칼을 보고 착각한 데 불과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순례자들은 그 여신이 조금 다르게 생기고 꽤 아리땁긴 할지언정 여하튼 한낱 사람에 불과함을 깨닫고 슬쩍 실망하곤 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저들의 새 신앙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사제를 마주치게 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투슈판에서 시와코아틀 여신을 보았소! 여신과 같이 창백한 거인 사제에게, 곧 틀라콰나틀록이 온다는 것을 또한 들었소! 믿지 못하겠다면 그대가 투슈판에 가서 직접 보시오!”

새 교리에 따르면 어차피 신들은 백성의 편이요, 그 이름 슬쩍 빌리는 것쯤은 하등 문제될 바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소문이 돌면 돌수록 그 근원을 찾아가는 이들도 늘어나곤 했으므로, 모든 것을 잃고 목숨 하나만을 건져 달아나는 소년 왕자 하나가 신분을 숨기고 투슈판까지 가는 길은 비록 멀지언정 험난치는 않았다.

투슈판 시에 부쩍 방문자들이 늘어난 것은 비단 시와코아틀 여신과 틀라콰나틀록 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은 섬을 방불케 하는 큰 배를 타고 온 이방인들은, 아나왁 내륙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가축들의 수를 불리고 주변에 대한 정보를 모을 목적으로 겨울을 투슈판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 신비한 이방인들과 겨울을 거치면서 수가 불어난 가축들을 구경하고, 여차하면 한두 마리 구해 돌아갈 심산으로 찾아오는 이들의 행렬은 겨울 내내 이어졌다.

돼지야 아직 멀었지만, 닭은 온난한 날씨 덕에 벌써 꽤 수가 불었고, 현지 적응이 과했던 수탉 몇 마리는 벌써부터 투슈판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아직 태양을 상서롭게 여기는 믿음이 남아 있었으니, 해가 뜰 때 우렁차게 우짖는 새에게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리라.

“아아, 이방인의 현명한 지도자여, 무슨 수가 없겠소이까? 이단이 겉잡을 수 없이 퍼지니, 일평생 경건하게 신을 모셔온 우리 사제들은 한숨으로 밤을 지새고 있소이다.”

‘태양이 뜨는 쪽에서 찾아온 영험한 새’에 대해, 무지렁이 평민들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막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여야 했던 사제들이 입을 모아 시그리드에게 간청했다.

시그리드가 졸지에 여신 소리를 듣게 된 데는 이런 모습도 일조했다. 사정 모르는 쪽에서 보면 틀라토아니와 사제들이 시그리드에게 굽신거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허나 평민들에게 끌려다니며, 졸지에 평민들의 목자 노릇을 하게 된 사제들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못할 만큼 이 모든 게 고역스러웠다. 원래 사제라는 것이 그런 직업이라 여기던 시그리드와 지슈카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충이었지만.

“저 올라카틀 사제님 같은 분들은 즐겁게 잘 지내시던데요.”

차바누샤아 노인과 함께 뜨뜻한 코코아 음료²를 마시던 시그리드가 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콩키스타도르들과 달리 딱히 황금을 독점할 생각은 없던 시그리드였지만, 그렇다고 코코아 같은 사치를 아예 사양하지는 않았다.)

올라카틀은 그사이 공용어까지 익혔고, 심지어 콜그림의 말까지 빌려 타고서 주변 마을을 돌면서 설교를 하곤 했다.

“그 상것, 아차, 그분처럼 백성들과 사이 도타운 이들도 물론 있지만...”

이쯤이면 인신공양을 되살리기도 쉽진 않을 것이라 판단한 – 물론 사제와 귀족들이 평민들의 공물 없이 순수하게 사재를 털어 전쟁을 벌이고 포로를 잡아온다면야 아직 가능은 하겠지만 – 시그리드는, 병 준 마당에 약도 주기로 마음을 먹은 지 오래였다.

“실은, 콜그림 아저씨가 퍼뜨린 믿음을 제압한 신앙이 제 고향 땅에 있긴 한데요.”

“아니, 그게 참말이오?”

“필시 올바르게 신을 공경하는 믿음이겠구려!”

사제들의 귀가 번뜩 뜨였다. 그 신앙으로부터 뭔가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비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 신앙을 따르는 사제들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우리 고향의 사람들은 황금을 가장 좋아하거든요. 우리 고향에서 사제들을 구하려면 황금을 많이 마련해야 합니다.

저희가 이 땅에 찾아온 것도 황금 때문이었고요.”

시그리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지금 신대륙 연합 쪽에 있는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도 선교사를 구한다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황금을 매개로 빠르게 무역을 활성화하는 길이었다.

지금쯤 유럽의 교회는 시그리드가 떠나기 전에 비하면 많이 개혁되어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우한 이교도들을 위해 성직자와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 하는 것보다는 ‘가진 건 황금뿐인 불우한 이교도들을 위해 성직자와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 하는 쪽이 훨씬 울림이 클 터.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콜그림은 딱히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유럽인들이 도착하면 벌어질 일이라는 시그리드의 설득에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훗날 유럽의 경쟁자들이 선교를 명목삼아 이 땅에 뭔가 못된 짓을 벌이는 것을 차단하려면, 그런 방법으로 아예 빠르게 교회를 세워버리는 쪽이 나을 터였다. 물론 그 교회는 엉뚱한 경쟁자를 상대해야 하겠지만.

“황금이라 하셨소?”

헌데 귀족들의 반응은 영 미묘했다.

“그건 좀 곤란할 수도 있는데...”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에서 막대한 황금을 챙겼다는 것만 알고 있던 시그리드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틀라토아니 콰우테목이 조심스레 말했다.

“황금은 우리에게도 귀한, 신성한 물질이오. 저 멀리 서쪽의 푸레페차Purepecha 땅이나, 역시 멀리 떨어진 남쪽 와샤칵(멕시코 남부 오아하카 일대)의 바위산과 개울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오³.”

물론 이 땅과 그 너머로 긴밀히 짜여 있는 무역망을 통해 어떻게든 황금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 이방인과의 교역을 독점하길 원하였던 콰우테목으로서는 썩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열심히 변명거리를 찾던 콰우테목에게는 다행히도, 마침 구차하지 않을뿐더러 타당하기까지 한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푸레페차든 와샤칵이든, 결국 아나왁의 가장 비옥한 땅인 호숫가 일대(멕시코 분지)를 거쳐야만 하오.”

“거치면 그만이지 않나요?”

“문제는 그곳에서 가장 유력한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이,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를 칭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이오.”

소문에 따르면 나이가 백 살을 넘는다는 테소소목은 교활하면서도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의 긴 치세 동안 테파네카인들의 도시 아스카포찰코는 호숫가 땅 전체와 그 너머까지 아우르는 크나큰 영향력을 얻었다⁴.

“그리고 그 테소소목은 우리 도시에서 시작된 이단을 주변 땅을 제압하고 더 쥐어짜는 빌미로 삼았다고들 하더이다. 그런 이가 가운데 버티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대들이 만족할 만큼 황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이 땅에 흔한 다른 특산품을 대가로 받으면 어떻겠냐며 넌지시 역제안을 던지는 투슈판의 틀라토아니 쿠와테목이었다.

시그리드는 잠시 생각해보겠노라 답한 뒤, 다 식어버린 코코아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설탕이 없는지라 씁쓸한 맛만 있었지만, 진한 향과 그 뒤에 솟는 힘에는 그 씁쓸함을 덮고도 남는 매력이 있었다. 이 땅에서는 코코아 콩을 화폐로도 쓴다고 하였다던가.

이 땅에서도 황금이 귀하다고 하지만, 결코 유럽에서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겨울 동안 도시의 귀족들이 내어준 거처 곳곳에 보이는 황금 장식품과, 사제와 귀족들이 착용한 황금 장신구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였다.

그러나 쿠와테목은 어리석지는 않았다. 없는 이야기를 꾸며 시그리드를 속이려 하진 않았을 터. 이 땅에서는 황금이 화폐로 쓰이지 않으니, 시그리드 일행의 눈에 들어온 황금이 이 도시에 있는 금의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 땅의 내륙으로 진입해, 정세에 개입해야만 할 것이다. 아스카포찰코 시의 테소소목을 만나 그 마음을 돌리든, 아니면 그를 꺾고 황금 교역을 중개해줄 다른 이를 세우든.

고민하며 여기저기 배회하다 보니, 어느새 발걸음은 부둣가의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그리드네 탐사대 대부분이 머물고 있는 곳은 이쪽이었다. 잠자코 정박해 있는 그들의 배와도 가깝고, 이들 한줌 이방인들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깨우친 귀족들도 저들의 거처 근처에 그런 강력한 무리가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방인’들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보헤미아인이든, 그린란드인이든, 카니엔케하카 사람이든, 귀족이나 사제보다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평민들이 더 대하기 편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시장 한쪽에서는 보헤미아 사람 몇몇이 능숙한 손짓발짓 흥정으로 코코아와 달걀을 교환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콜그림이 막 시골에서 돌아온 올라카틀과 함께 설교를 하고 있었다.

(겨우내 이곳의 유능한 외과의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콜그림은 두개골에 구멍 하나가 뚫린 것을 제하면 뇌진탕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⁵.)

그런가 하면, 앞으로도 이 이방인들이 종종 투슈판에 들릴 것을 짐작한 몇몇 야심찬 상인들은 그린란드 연대원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공용어를 배우곤 했다.

어쩌면 그들이나 그들의 자식들이 이방인들을 따라 바다 너머의 더 넓은 세상을 오가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는 일이요, 그날이 오게 되면 평민들 중 가장 높은 상인들 중에서도 이방인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은 더욱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테니까.

또 그런가 하면, 아직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소동이 시장 한쪽에서 일어나고 있기도 했다.

“으악! 물! 물!”

이번에는 불량배 한스가 불행한 장난의 희생자가 된 듯했다. 지나가던 이들 몇몇이 손을 입으로 가리며 낄낄 웃었다.

“케켁, 단장, 단장님! 보헤미아 놈들이 독이 든 열매를 제게 먹였습니다!”

샬라파Xalapa 상인들이 저들 동네에서 흔히 재배하는 식재료 겸 향신료라면서 한 번 맛보시라 건네준 작은 열매가 있었는데⁶, 그것을 잔뜩 구해다가 동료들에게 먹이는 못된 장난이 겨우내 한가하던 연대원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그 옛날 군기 잡는답시고 나대다가 소소한 원한을 좀 샀던 한스는 좋은 목표였다.

“아니, 그러니까 왜 주는 대로 먹어서는... 제가 일전에 고추 함부로 먹으면 탈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조그만 게, 헥, 헥. 고추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 한스와 시그리드 사이에 끼어들어 천연덕스레 물을 건네주는 소년이 있었다.

“아저씨, 여기 물이요.”

“헥, 헥. 고맙다!”

억양 강하지만 알아들을 만은 한 공용어. 소년의 복장을 보니, 아마 공용어를 배우려고 이곳 부둣가 시장을 들락거리는 상인의 아들인 듯했다. 시그리드에게는 초면이었지만.

“아, 처음 만나셨겠구나. 이 녀석은 아숄로틀Axolotl(도롱뇽)이라고, 석 달쯤 전에 여기 눌러앉았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금방 공용어를 익혔는데, 그 이후로 종종 우리네 소소한 용돈벌이를 도와주고 있지요.”

소소한 용돈벌이라면, 대민사고도 막고 할 일 없는 이들에게 소일거리도 줄 겸 탐사대원들에게 허락한 부업을 말하는 것일 테다. 말을 구경시켜주거나 달걀을 파는 일 등등.

그런데 소년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엎드리며, 시그리드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시와코아틀 여신이시여! 부디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당황한 시그리드는 손사래를 쳤다.

“그, 나는 그냥 사람이란다. 조금 다르게 생기긴 했지만. 그러니 네 소원도 마법처럼 이루어줄 수는 없어.”

그리고 한 발 늦게서야, 소년이 엎드리기 전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광신이나 절망, 혹은 아련한 희망이 아니라, 냉정하게 시그리드를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너,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거구나?”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우며 시그리드가 캐물었다.

저를 여신이라 믿지 않으면서 굳이 추켜세운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시그리드를 시험해보았다는 뜻일 테다.

그리고 이 주변에서는 함부로 대하는 이 없게 된 시그리드를 시험할 만큼 대담하거나 지체 높은 이라면...

“정말 지혜로우십니다, 시그리드 각하. 아숄로틀은 제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상인의 복장도, 도망쳐 나올 때 챙겨 나온 패물로 마련한 변장이지요.

제 이름은 네사왈코아틀, 테츠코코의 왕자입니다⁷.”

한스가 소란을 벌일 때부터 이쪽을 주목하던 상인들은, ‘네사왈코아틀’과 ‘테츠코코’라는 말을 알아듣자마자 기겁하였다.

누군가는 눈을 황급히 돌리고서 귀만 쫑긋 세우고, 누군가는 저들의 좌판 곁에 왕의 아들이 있었다는 데 놀라 허둥대었으며, 달걀 사러 나온 틀라토아니 쿠와테목네 하인 하나는 그 귀한 달걀도 내팽개치고 후다닥 저의 주인께 이 일을 고하려 달려갔다.

“각하를 시험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야만 했습니다.”

외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그 힘을 빌리려는 자는, 항상 그 외세에 의해 파멸하기 마련이었다. 그 비옥함으로 인해 숱하게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곤 했던 아나왁의 심장부에 전해 내려오는 지혜였다.

정체를 숨기고 이곳 도시에서 이방인들의 말을 배운 것도, 만에 하나 시그리드가 어떤 의도를 품고 그 여신 이야기를 퍼뜨린 것은 아닌가 검증하기 위해 일부러 그 앞에 엎드린 것도, 모두 이 경이로운 이방인들을 이끄는 여인의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제 네사왈코아틀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황금을 필요로 한다면서 굳이 주변에서 강탈하지 않고, 앞으로도 이 땅 사람들의 이웃이 되겠다는 듯 평화롭게 겨울을 보내던 이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이단을 퍼뜨리면서도 그것으로 다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지 않던 이들.

이런 이방인들이라면, 적어도 지금은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가 드린 말씀 중 일부는 참이었습니다. 제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각하께는 그 소원을 이루어줄 힘이 있고요.”

딱 그 무렵, 소식을 들은 지슈카와 쿠와테목이 각각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아무래도 대화는 다른 장소에서 마저 이어가야 할 듯하였다.

네사왈코아틀의 ‘소원’이란 사실상 동맹 제안에 가까웠다.

“제 선친께서는 메시카인들과 은밀히 교류하고 계셨습니다. 메시카인들은 노회한 테소소목이 쓰임이 다한 자신들을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서, 테소소목에게 원한이 있는 주변 도시들에 밀사를 파견하고 있었지요.”

그것을 알면서도 마땅한 명분이 없어, 일망타진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테소소목은 틀라콰나틀록 이단이라는 좋은 핑계가 나타나자마자 금방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메시카인들 혼자서는 강대한 아스카포찰코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제 도시를 되찾을 수 없지요. 아스카포찰코에 불만을 품은 도시들도, 저들 혼자서 테소소목의 군대를 상대할 엄두는 못 내고 있고요.”

“그래서, 우리들의 힘을 빌리길 바란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각하. 제가 들은 바가 맞다면 – 몰래 각하의 부하 분들을 염탐한 데 뒤늦게 사과드립니다 – 각하의 땅에서는 황금을 코코아 콩처럼 쓴다고 하였습니다. 황금이 지니는 가치는 이 땅에서보다 각하의 땅에서 더 크겠지요.

아스카포찰코의 패권이 무너지면, 저는 메시카인들의 도시 테노치티틀란과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설득해 이 교역에 함께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아직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왕자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냉정하면서도 꼼꼼한 제안. 안락한 궁정을 벗어나 겪은 지난 몇 달의 경험과, 그 전부터 갖추고 있던 명군의 자질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리라.

“왕자님이 겪은 고초와 불행에는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함부로 왕자님을 믿기가 어려운 걸요.”

“그렇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선왕의 아들이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런 차에, 신들의 은총으로 지니게 된 총명으로써 공용어를 익히게 되었지요. 각하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이만한 대리인도 없지 않겠습니까?”

시그리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네사왈코요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우리가 전하의 편을 들어 정당한 왕위를 되찾게 도와드린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곧장 평화가 찾아오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테소소목 왕이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 아나왁 땅에서 전쟁은 일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메시카와 각하의 군대가 힘을 합한다면, 그리고 그 깃발 아래 다른 도시들까지 하나로 뭉친다면, 적어도 균형과 안정은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균형은, 필시 거의 같은 힘을 지닌 여러 도시들 간의 경쟁으로 지탱될 것이다.

메시카의 힘과 아스카포찰코의 남은 힘, 그리고 테츠코코가 끌어들인 이방인들의 힘의 균형.

하지만 시그리드는 그 균형이 오래 유지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그 한줌 병력으로 메시카인들이 세운 강대한 제국을 무너뜨린 방법.

몇 년이든, 몇십 년이든, 반드시 이 땅에 발을 디딜 다른 유럽인들. 그들이 균형에 불만과 원한을 품은 세력에게 더 많은 화약과 더 많은 강철, 더 많은 전마戰馬를 약속하는 순간, 이 균형은 무너지고 시그리드가 이 땅에 일구려 노력한 교역 관계는 금방 무너질 것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다른 방법이라 하시면...?”

“전쟁 자체를, 적어도 몇십 년간은 없애고 모두가 평화롭게 교역에만 열중케끔 만들 방법 말이지요.”

신대륙 연합과의 관계가 너무나 깊어져, 신대륙 연합보다 훨씬 부유하지만 대신 훨씬 덜 자비롭고 덜 관대한 이들이 나타났을 때, 당당하게 당신들과는 교류하지 않겠노라 외칠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평화가 이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

“제가 알기로, 이 땅의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고 곤궁하게 만드는 것은 비단 변덕스러운 날씨만이 아니에요. 잦은 전쟁도 한몫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땅의 황금 또한 우리들에게 제대로 들어오지 못할 거에요. 숱한 사람들이 계속 고통을 받을 테고요.”

당연히 이 시점에도 아즈텍 제국이 있으리라 여기고서 이 땅에 찾아왔던 시그리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야만인 메시카인들이 모여 사는 호수 위의 도시 테노치티틀란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고, 순조롭게 교역이 이루어질 것을 담보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지금껏 일으킨 변화와 시그리드 머릿속의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수밖에.

“그러니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처음 쿠와테목 왕으로부터 황금 교역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죽 이어지던 고민이 어느 정도 끝난 시그리드는, 아직 다 정돈되지는 않은 저의 발상을 꺼내 보였다.

“... 이렇게 해보자는 얘기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쟁 아닌 전쟁이라... 한 번도 그런 전례는 없었습니다만...”

이미 저의 상상을 한참 벗어난 이야기에 쿠와테목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비슷하게 경악했으나 애써 그 모습을 상상하는 데 성공한 네사왈코요틀은 한참을 심사숙고했다.

“말씀마따나, 지금껏 이 땅에 알려진 전쟁과는 다른 전쟁이 되겠지요. ‘꽃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요?”

그 이름이 오지 않을 미래에 아스테카인들에 의해 다른 쪽으로 쓰이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시그리드는, 그저 베트남 전쟁을 멈춘 플라워 파워Flower Power 이야기를 떠올릴 뿐이었다.

--- *** ---

1. 인신공양을 비롯한 광범위한 희생 제의를 기반으로 한 메소아메리카 신앙은 아즈텍(아스테카)뿐 아니라 지역의 모든 문명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층 민중과 고위층 사이에 수용의 정도 및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귀족들 중에는 진심으로 신앙에 심취하여, 포로로 잡혔을 때 석방 대신 희생되는 것을 선택한 사례도 종종 있었지요.

반면 이러한 신앙 체계는 고달픈 삶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메리트’가 없는 믿음이었고, 마침 이런 희생 기반 종교관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이 유입되면서 하층민들은 정말 순식간에 개종하게 됩니다. 코르테스의 상륙으로부터 불과 12년 뒤인 1531년에 벌어진 과달루페 성모 발현은, 당시 메소아메리카 민중이 얼마나 진심으로 가톨릭을 수용했는지 방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지요. 원 역사 가톨릭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어쨌든 하층민들에게 어필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작중의 틀라콰나틀록 교리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2. 카카오 열매와 이 열매로 만든 초콜릿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고대부터 애용된 기축통화 겸 기호식품이었습니다. 이전에 언급된 카호키아 일대에서도, 메소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카카오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지요. 또한 아즈텍 상류층은 후식으로 코코아를 자주 음용했고, 아즈텍 장교들(재규어 전사) 또한 일종의 전투식량으로서 코코아 가루를 지참하고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설탕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메소아메리카인들은 코코아에 다양한 재료와 향신료를 넣어 그 맛을 보충했다고 전해집니다.

3.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알래스카부터 로키 산맥을 거쳐 안데스 산맥까지 이어지는 환태평양 조산대는, 험준한 지형만큼이나 풍부한 금속 자원을 품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원주민 문명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원인이 된 황금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비옥하지만 딱히 금속자원이 풍부하지는 않은 아즈텍은, 주로 남쪽 와샤칵(오아하카)에서 공물로 황금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반면 비슷하게 광물자원이 풍부한 아즈텍 서쪽의 푸레페차는 – 이들은 자원이 풍부한 덕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거의 유일하게, 청동기를 폭넓게 사용하였습니다 – 끝까지 아즈텍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었지요.

4. 대체로 척박하고 기후변동의 영향을 크게 받는 메소아메리카에서, 멕시코 중부 고지대의 화산 호수 주변에 형성된 멕시코 분지Valley of Mexico는 몇 안 되는 안정적 농업생산이 가능한 지역이었습니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20만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던 것도, 그런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최적의 농경 기술이 만난 덕분이었지요.

또한 높고 안정적인 농업생산성은 아즈텍 이전에도 수많은 원주민 문화가 멕시코 분지에서 꽃피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스테카(아스틀란Aztlan에서 온 사람들)라 자칭하던 메시카인들 또한 이 지역의 풍요에 이끌려 멀리 북서쪽에서 남하해온 유목민의 후손들이었지요. 작중에서 메시카인들이 계속 야만인이라 지칭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스카포테찰코는 아즈텍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이 지역의 주도권을 쥐기 전까지 멕시코 분지를 장악하고 있던 테파네카인들의 도시였습니다. 그 지도자로, 일설에 따르면 100세 넘게 장수한 테소소목 왕은 아스카포테찰코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황제를 자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테소소목 사후 즉위한 마슈틀라의 무능으로 인해, 지역의 패권은 15세기 초, 테노치티틀란과 테츠코코, 틀라코판의 삼각동맹Excan Tlahtoloyan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테소소목의 사주로 암살당한 테츠코코의 왕 이슈틀릴소치틀의 아들 네사왈코요틀은 이 삼각동맹의 결성에서 큰 역할을 했지요.

5.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메소아메리카의 의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외상 치료에 있어서는 동시대 유럽이나 동아시아보다 더 뛰어난 면도 있었지요. 원 역사에서 아즈텍 군사들의 투석 공격에 머리를 크게 다친 에르난 코르테스의 목숨을 구한 것도 틀라스칼텍 외과의들이었습니다.

6. 할라페뇨 고추는 이름 그대로 샬라파(할라파) 시 주변에서 널리 재배하던 고추의 한 품종입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이 일대에서는 고추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법이 발달했지요.

7. 네사왈코요틀은 테츠코코의 전설적인 명군이었습니다.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멕시코에 도착한 유럽 학자들은, 테노치티틀란이 로마라면 테츠코코는 아테네에 가깝다고 비유하곤 했는데, 이러한 높은 학술적, 문화적 성취의 기반을 닦은 것이 바로 네사왈코요틀 왕이었지요.

원 역사에서 그는 아스카포찰코의 음모로 아버지를 잃은 뒤 인근 도시들을 전전했고, 결국 어머니의 고향인 테노치티틀란에 한동안 머물며 복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이후 테소소목 왕이 사망하고 아스카포찰코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테노치티틀란과 틀라코판, 그리고 주변의 다른 도시와 부족들을 끌어들여 테츠코코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지요. 이때 정복에 성공한 연합은 아스카포찰코를 계속 밀어붙여, 아스카포찰코가 달성한 패권을 거의 그대로 집어삼키게 됩니다.

8. ‘플라워 파워’는 베트남전 반전시위를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로, 1967년 10월 2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반전집회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젊은 시위자 하나가 펜타곤을 지키던 헌병대 병사의 M14 소총 총구에 꽃을 올려놓는 사진이었지요. 이를 촬영한 『워싱턴 이브닝 스타』 신문의 기자가 ‘플라워 파워’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총구에 꽂힌 꽃은 반전시위와 1960년대 히피 문화를 공히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게 됩니다.

반면 작중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꽃의 전쟁’은, 원 역사에서 아즈텍(아스테카) 제국이 전면전으로 제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적들 – 대표적으로 틀락스칼텍(틀라슈칼라) - 을 상대로 벌이던 의례화된 전쟁을 말했습니다. ‘꽃의 전쟁’에는, 인신공양에 쓰기 위한 포로를 획득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아스텍의 무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적의 힘을 예방적으로 소진시키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꽃의 전쟁은 당하는 쪽에게는 결코 아름답지도, 명예롭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험준한 지형 덕에 끝까지 아즈텍에게 복속당하지 않고 버텼지만 그 대가를 수십 년간 이어진 꽃의 전쟁으로 치러야 했던 틀라스칼텍인들은 적극적으로 코르테스를 도왔고, 마침내 테노치티틀란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