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의 연기 (2)
15. 물 위의 연기 Smoke on the Water (2)
테츠코코의 총명한 왕자 네사왈코요틀은 도시의 현인들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찌하여 아나왁 땅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가?
현인들은 이렇게 답했다.
연기 나는 거울의 신, 테스카틀리포카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도록 세상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는 굳이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지 않더라도 세계를 면밀히 관찰한다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진리였다.
비옥한 호숫가 땅일지라도 풍흉은 일정하지 않았고, 그 바깥의 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수확이 그나마 풍성한 곳에서 물자를 들여와야만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수단은 때에 따라 교역이 되기도 하고 전쟁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과 평화는 그러므로 하나의 신에게 여러 모습이 있는 것과 같았으니, 도시들 간의 교역이 끊어지지 않듯 전쟁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제의 또한 그에 맞추어졌다. 신들은 전장에서 흐른 피와 전장에서 잡힌 포로의 피를 공히 흠향하였으며, 전사와 귀족들은 전쟁의 영광을 누리고자 흔쾌히 흑요석 무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네사왈코요틀로서는, 시그리드의 ‘꽃 전쟁’ 계획을 몇 번 들어도 당혹스러움을 면할 수 없었다.
“반전시위를, 그것도 적어도 당분간은 이 땅에서 전쟁을 입에 올릴 엄두도 못 낼 만큼 거대한 시위로 벌이는 거에요.”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시그리드는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바뀐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 또한 바뀌어야만 한다.
검은 책에 기록된 역사 또한 그러하였다.
얀 후스가 든 불꽃은 얀 지슈카의 손에 넘어가 보헤미아를 불태웠고,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출판하자 농민반란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또한 그보다 한참 전, 머나먼 가운데 왕국中國에서 한 수도사가 위대한 평화의 도太平道를 입에 올리매, 노란 터번黃巾을 둘러맨 농민들은 옛 하늘의 죽음과 새 하늘의 탄생을 노래하며 들고 일어났다.
이제는 이 땅의 차례였다. 겨울을 거치며 퍼질 대로 퍼진 교리. 진심으로 교리에 심취하든, 그 교리가 약속하는 자유에 이끌렸든, 호응할 사람은 적지 않았다.
“왕자님 말씀대로, 이 땅의 전쟁을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할 거에요. 그렇지만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을 압박해서, 최소한 이 땅에 새로운 가축들이 퍼지고 교역망이 정비될 때까지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건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한 번 그렇게 평화가 정착하면, 그때부터는 전쟁보다 평화에서 더 큰 이익을 얻는 이들이 목소리를 얻게 될 테고요.”
전쟁이 사라지면 누가 이익을 얻는가? 두말할 것 없이 평민들이었다¹.
더구나 사람을 모을 명분도 차고 넘쳤다.
이미 들불처럼 퍼지고 있는 틀라콰나틀록 교리 (혹은 이단). 그 교리를 빌미로 테소소목은 피의 숙청을 벌였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네사왈코요틀 또한 그 희생자 아니던가.
고귀한 틀라토아니의 집안조차 그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저 불의한 세상에 맞서고자 한 평범한 백성들이라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틀라콰나틀록 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귀족과 사제들은 아스카포찰코의 선례를 들먹이며 마구 백성들을 탄압할 터였다.
그러니 사람을 모아, 이 틀라콰나틀록 교리를 탄압하지 말 것을, 헛되이 신들의 이름을 내세워 전쟁을 벌이지 말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그 어떤 귀족이나 사제도 함부로 입을 벙긋하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머릿수로 온 아나왁을 뒤엎는다.
“우선은 주변 도시와 마을에 소식을 전해 우리와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야겠지요. 그렇게 해서, 전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진 시위대를 꾸려 아스카포찰코까지 행진하는 거에요.”
가만 듣던 얀 지슈카와 네사와코요틀이 각각 뭔가를 지적하려 하였으나, 시그리드가 선수를 쳤다.
“이 계획이 정말 피를 더 흘리지 않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려면, 대항하는 군대들이 전의를 잃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의 시위대를 꾸리는 게 관건이겠지요.
그렇지만 가는 도중 합류하는 인원이 예상보다 적을 수도 있고, 현지에서 식량을 원활하게 조달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시위대 일부를 조기 해산시켜야 할 수도 있을 거에요. 도중에 마주치는 도시들이 전의를 잃지 않고 군사를 내어 우리 앞을 막아설 수도 있을 테고요.
그 경우에 대처할 방법은 제가 미리 준비할게요. 정 안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써야 하겠지만요.”
시그리드가 탐사대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면서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지슈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리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왜 굳이 그런 전례없는 방법을 택하면서까지 평화를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네사왈코요틀도, 우선은 어찌 되나 보자는 심정으로 시그리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제 발로 이 도시에 걸어들어왔고, 또 제 눈과 귀로 이들 이방인이 결코 탐욕에 눈먼 무리가 아님을 확인했으므로, 일단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곧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는 도중에 다칠 수도 있으니까, 생명의 물(알코올)을 준비해야 할 거에요.”
“옥틀리² 술이 있긴 하던데... 그건 도수도 별로 안 높거니와 쉽게 상하더구나.”
“그러면 증류를 하면 그만이지요.”
지슈카와 함께 뭔가 이상한 일을 벌이던 시그리드는, 사제들은 물론이요 도시의 틀라토아니까지 동원해 옥틀리 술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이 지역에서 자라는 채소를 긁어모으기도 했는데, 네사왈코요틀이 보기에는 암만 보아도 마법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에잇, 이게 왜 안 된담!”
단, 진짜 마법이라고 보기에는 어째 시행착오도 많고 어설펐지만.
허나 혼자서 궁시렁대던 시그리드는 또 저의 숙소에 쏙 들어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던 그 ‘검은 책’을 참고하고 나와서는 다른 술수를 부리는 것이었다.
“하하! 됐다!”
대체 채소와 술을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엄청난 효험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시그리드가 확신하고 있다는 것만은 네사왈코요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비단 시그리드뿐 아니라, 시그리드를 따르는 이방인들 또한 그런 확신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었다.
“저기, 정말로 저 마법이 효험이 있을까요?”
“마법? 아, 시그리드 아씨가 준비하는 저것 말씀이십니까? 그 원리야 저 같은 녀석은 당연히 들어도 알지 못하겠지만, 아씨께서 준비하시는 일이라면 결코 허탕으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언제고 콜그림에게 물으니, 시그리드가 바다 건너 땅에서 행했던 놀라운 일들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번개를 불러내고 역병을 몰아냈으며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네사왈코아틀은 정말로 시그리드가 사람 탈을 쓰고 있는 여신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잠시 품게 되었다.
물론 금방 그런 헛된 생각은 털어내고, 처음부터 이방인들 손을 빌릴 작정으로 왔으니 한 번 믿기로 한 것 끝까지 사활 함께한다는 심정으로 시그리드의 준비를 돕게 되었지만.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짐승을 타라는 말인가?”
벌써 콜그림보다도 능숙하게 말을 다루게 된 올라카틀이, 지슈카를 설득해 예비로 데려온 말 한 필을 얻어내 네사왈코요틀 앞으로 몰고 온 것이다.
“예. 전하께서도 우리 틀라콰나틀록의 길에 함께하시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마땅히 위엄을 갖추셔야지요. 이 경이로운 짐승을 다루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새 저를 신앙의 대표격으로 추대하는 올라카틀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는 네사왈코요틀이었지만, 자신이 일찍이 품은 결심을 상기하곤 금방 올라카틀을 따라나섰다.
(소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즉 올라카틀이 말 탄 모습이 왠지 굉장히 멋있어 보였기에 저도 해보고 싶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테츠코코의 왕자로서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점점 날씨가 온난해지고, 올라카틀과 콜그림의 설교에 호응한 투슈판과 주변의 평민들은 하나둘씩 옥수수 가루를 짊어지고 도시로 모여들 무렵.
계속 물자와 사람을 모으면서 테츠코코에 닿은 다음, 메시카인들을 설득해 대열에 동참시킨 뒤 아스카포찰코로 향한다는 계획이 확정되었다.
메시카인들 또한 억울하게 이단자로 몰린 판이니,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에게 항의하고자 우르르 몰려가는 수만 명 군중과 그들 가운데의 수백 이방인 전사들을 보게 되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스카포찰코를 거꾸러뜨리려 나설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불과 이삼천 명으로 시작한 행렬은, 와스테카 땅을 벗어나 남동쪽으로 향하면서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을 타고 나타난 이방인과 이단자 사제는, 이미 틀라콰나틀록의 교리를 듣고 희망을 품은 이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외쳤다.
“설령 신들 중 매정한 이가 있어, 신들 사이의 대의를 배신하고 우리를 일개 벌레로, 일개 장난감으로 여긴다 한들, 이제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수백의 심장을 함께 불태워 바치니 능히 하늘의 태양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고작 수백의 심장만으로도 그리할 수 있었다면, 수만의 심장이 그대로 살아 헐떡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발을 내디딜 때라면 어떻겠습니까?”
이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기꺼이 저의 재능을 드러낸 네사와코아틀이 도와준 덕에 한결 사람들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 올라카틀 사제였다.
귀한 사람의 혀를 거쳐 한결 정교해진 논변으로, 항상 저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이방인을 만나 비로소 싹 틔웠다 여기는 교리를 설파하는 올라카틀의 목소리에, 어떤 도시의 사람이건 똑같이 곤궁한 처지였던 평민들은 호응했다.
“대지조차 전율할 것이요, 창공조차 두려워할 것이니, 사람이든 신이든 깨닫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갑시다! 가서 말합시다! 신들의 뜻은 우리에게,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노라고!”
“옳다! 전쟁도, 공물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불의한 세상을 우리 손으로 끝내자!”
틀라콰나틀록의 길을 탄압하고자 하는 못된 틀라토아니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말.
그 이면에 다른 뜻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놓치지 않았다. 전쟁을 끝없이 이어가는 이들, 그것이 신의 뜻이라 말하는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까.
정말로 틀라콰나틀록이 약속하는 구원에 이끌렸든, 아니면 이 기회를 빌어 사제와 귀족들에게 저들의 실력을 보여줄 마음에 취했든, 아나왁의 가운데 호숫가 땅으로 가는 길을 걸을수록 시위대의 규모는 불어났다.
이만큼의 머릿수가 모이지 않는다면, 지닌바 재주 보잘것없고 세력이랄 것도 없는 자신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을 다들 머릿속으로든 가슴으로든 짐작했으리라.
진심으로 그 목소리가 통하리라 믿든, 아니면 한여름 밤의 즐거운 꿈으로 끝나도 괜찮다 내심 여기고 따라오든.
누군가는 기꺼이 식량을 제공하고, 누군가는 아예 그 식량을 메고 따라왔다.
심지어, 신들의 뜻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에 동감하여 따라오는 전사들도 몇몇 있었다.
저들이 정직하고 명예롭게 이 삶을 살아가는 한, 전사들에게 예비된 여덟 번째 저승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리라는 말, 그리고 틀라콰나틀록의 그날 신들과 함께 가없이 영예로운 전장에 나서게 되리라는 약속에 이끌린 이들이었다.
도중에 마주친 도시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틀라콰나틀록 교리를 이단이라 몰아붙이던 도시들이 있는가 하면, 틀라토아니와 사제들이 그 새로운 해석에 심취하거나 그 확산세에 편승하려 심취한 시늉을 하는 도시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도시도 일부러 군사를 내어 시위대를 막아세우지는 않았으니, 투슈판에서 틀랄록 신을 기리는 제의를 치룰 때, 시위대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이방인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서운 무기를 지닌 자들이 저 멀리 아스카포찰코를 겁박하러 나아간다 하였으므로 굳이 자신들이 개입할 이유는 없었다.
하물며 소문처럼 기이한 생김새를 한 ‘시와코아틀’이 먼저 다가와, 겨우내 잘 자란 닭을 선물로 흩뿌리면서 통행을 허락해달라고 선뜻 먼저 청했음에랴.
그렇게 (거의) 비무장한 군중의 행렬은 남서쪽으로, 아나왁의 심장부에 있는 호숫가 땅으로 차곡차곡 다가갔다.
아스카포찰텍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수는 불어났다. 거리가 가까워졌기에 훨씬 부담없이 여정에 동참할 수도 있었거니와,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족한 지역일수록 도리어 삶은 각박했기에 더욱 시위대의 주장이 크게 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테츠코코와 아스카포찰코, 테노치티틀란 등 이 아나왁 땅 최대의 도시들이 모두 접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³를 눈앞에 둘 무렵, 처음으로 시위대를 막아서는 군세가 있었다.
“샬토칸Xaltocan과 오톰판Otompan의 군사로군요.”
몇십 년 전, 메시카인 용병을 앞세운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 왕이 호수 북쪽 섬에 있는 샬토칸을 정복했을 때, 도시에 거주하던 오토미Otomi 족 일부는 동쪽 평원으로 도망쳐 새 도시 오톰판(오토미 사람들의 땅)⁴을 세웠다.
그러나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결국 오톰판 또한 아스카포찰코에게 복속되고야 말았으니, 지금 이곳 오톰판 근처 평원에서 시위대를 막아세운 두 도시의 군세는 아스카포찰코의 위세를 증언하는 셈이었다.
“테츠코코로 가려면 저들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겁니다.”
시그리드와 지슈카, 콜그림과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네사왈코요틀이 단언했다.
“어디 보자...”
“한 삼사천 명쯤 되는 듯하군.”
저들이 상국으로 섬기고 있는 아스카포찰코의 지시에 따라 끌려나온 게 분명했다. 멀리서 보아도 썩 전의가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 정도면, 준비해온 그 물건을 쓸 필요도 없겠는데요. 물론 만약에 대비하긴 해야겠지만요.”
얀 지슈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주변으로 지시가 전달되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고, 네사왈코요틀과 시그리드는 말을 타고 저쪽 군대 앞으로 나섰다.
말이라는 처음 보는 짐승과, 시그리드의 특이한 용모에 술렁이는 소리가 금방 두 사람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대들은 들어라! 나는 네사왈코요틀. 테소소목의 수하에게 비겁한 습격을 당해 살해당한 테츠코코의 정당한 틀라토아니 이슈틀릴소치틀의 아들이다!
우리는 테소소목에게 항의하고, 나아가 이 땅을 좀먹고 있는 전쟁과 불의를 멈추고자 이곳까지 찾아왔다!”
물론 그 ‘대의’ 중 일부인 틀라콰나틀록에까지 네사왈코요틀이 공감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쟁을 멈추는 것이 이 땅 사람들과 이방인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임은 족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그리드의 말마따나, 이 땅 사람들이 진심으로 무언가 달라지기를 – 설령 그것이 세상의 파멸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 바라고 있다는 것도.
그만큼의 소망이라면, 정말로 전쟁이라는 신의 뜻에도 항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이 땅까지 강력한 이방인들을 데려온 이상 메시카인들을 끌어들여 테소소목을 몰락시키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터.
“네사왈코요틀을 자처하는 이는 들으시오! 우리는 불경한 무리를 이 땅에 들여놓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며, 비단 우리뿐 아니라 현명한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 테소소목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모든 현명한 이들은 이에 동의하고 있소!
허황된 이단에 이끌려,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막무가내로 온 어리석은 백성들은 들어라! 우리는 오로지 전사들만을 포로로 잡을 것이니, 그대들이 전사가 아니라면 마땅히 흩어져 돌아갈지어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목숨은 신들께 맡겨지리니!”
이렇게 딴에는 단호하게 외친 오톰판과 샬토칸의 지휘관들은, 기이한 이들이 이방인과 군중 사이로 돌아가자마자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금방 경악하고야 말았다.
‘꽃의 전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사만에 달하는 대군이, 양옆으로 넓게 퍼지며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춤추니 태양이 멈추고, 우리가 발 구르니 대지가 울리네!
그대 강대하다는 자들이여, 걸음 멈추고 스스로 물어보시오!
태양과 땅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세계의 신들은 우리의 편인데,
그대들이 무어라고 우리를 가로막는가!”
그 기세에 위압된 지휘관과 귀족들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곳곳에 휘날리는 깃발 태반은 평민들이 높으신 분들을 어설프게 따라할 기회를 한껏 즐기며, 낄낄대면서 만든 가짜 깃발임을.
그리고 언뜻 무시무시해보이는 양익으로의 기동은, 그저 우르르 몰려온 이들이 좌우로 퍼져나가는 것에 불과하며, 그들을 이끄는 몇몇 전사들이 없다면 갈팡질팡하다 흩어질 만큼 조직력이 변변치 않음을.
누구 하나 지시하지 않았건만, 처음 겪는 대규모 농민봉기 – 그것을 봉기라 할 수 있다면 – 의 기세에 위압된 두 도시의 군사들은 차츰 뒤로, 그 다음에는 대놓고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의 수가 수십만에 달하여, 부득불 도시로 물러나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전령이 아스카포찰코에 닿자, 늙었으나 아직 눈빛만은 형형한 테소소목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세계를 파멸시키겠다는 이단이라면 그만한 파격은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잘 되었다 여기는 것이었다.
저들이 이 세상이 파멸을 맞을 때까지 평화를 지키겠노라 말한다면, 그 평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메시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라! 저 호수 반대편에 저들의 쓰임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으니, 무용한 야만인으로 남을지, 아니면 그나마 유용한 전사로 남을지, 그것은 스스로 결정할 몫이라고!”
메시카인들이 당연히 저들 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했던 테츠코코의 어린아이, 물정 모르고 달려온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영합하여 무언가 달라지리라는 환상에 빠져든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들을 기다리는 앞날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면서, 노회한 테소소목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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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소아메리카에서 발굴되는 고인골古人骨은, 농업생산성이 증진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평균적인 건강 상태는 하락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인구압이라는 숙명을 면할 수 없는 전근대 농업사회의 공통적인 특징이지요.
그러나 유럽인 도착 이전 메소아메리카 사회가 겪었을 인구압은 동아시아나 유럽의 인구압보다 훨씬 가혹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력작물을 제외한 식량자원(가축 등)이 부족하고, 인력과 제한적인 수운을 제외한 운송수단의 부재로 잉여생산물 운송의 효율성 또한 지극히 낮았던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잦은 전쟁이 특히 민중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병참 운송은 징발된 인력에만 의존해야 했을 것이고, 따라서 동아시아나 유럽의 군대에 비해 메소아메리카 군대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양의 군량을 소모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2. 멕시코 고원과 사막 등지에 자생하는 다육식물 용설란(아가베)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 다용도로 쓰인 식물이었습니다. 그 용도 중 하나는 용설란 수액을 발효시켜 만드는 술 옥틀리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옥틀리는 신의 피로 간주되었기에 오로지 종교의례나 의료 목적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음용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메소아메리카가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옥틀리는 대중적인 주류로 널리 소비되게 되었습니다. 훗날 맥주가 그 아성을 빼앗기 전까지, 에스파냐어로 ‘상한 옥틀리’를 지칭하는 나와틀어에서 ‘상한poliuhqui’ 부분만 따온 단어인 풀케Pulque로 지칭된 옥틀리는 멕시코 민중에게 가장 친숙한 술이었지요.
한편,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술을 증류하는 기법도 함께 가져왔는데, 양조와 유통이 까다롭고 도수도 낮던 풀케를 증류하여 만든 것이 바로 메스칼Mezcal입니다. 오늘날 메스칼의 통칭으로 널리 통용되는 데킬라는, 실은 이 메스칼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3. 지난화부터 계속 언급되고 있는 이 호수는 오늘날의 멕시코 시티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하기 전만 해도, 이 호수 가운데의 섬과 그 주변에는 여러 도시가 번영하고 있었지요. 테노치티틀란 역시 호수의 혜택을 입어 크게 성장한 도시로, 이 호수 서쪽의 작은 섬 여럿 위에 세워진 수상도시였습니다.
테노치티틀란을 마주하고 있는 서쪽 호숫가에는 아스카포찰코가 있었고, 그 반대편(동편)에서는 테츠코코가 번영하고 있었지요. 작중 등장한 샬토칸과 오톰판은 호수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지금 이 호수들은 모두 개척되어 멕시코 시티가 되었는데, 거대한 호수를 메우고 지은 도시인지라 지반 침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4. 오톰판이라는 지명은 훗날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오툼바Otumba로 기록되었습니다. 코르테스의 콩키스타도르-틀라스칼텍 연합군과 이들을 추격하던 아즈텍(아스테카) 군 사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그 오툼바 평원이 맞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즈텍 군의 압도적 물량에 위기를 맞이한 코르테스는, 기병 돌격으로 기적에 가까운 대승을 거두었고, 그전까지 코르테스의 군대를 테노치티틀란에서 몰아내면서 그를 추격했던 아즈텍은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