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의 연기 (3)
15. 물 위의 연기 Smoke on the Water (3)
오톰판과 샬토칸의 군대가 소위 ‘꽃의 전쟁’을 위해 몰려온 군중 앞에서 창 하나, 화살 한 대 날려보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호숫가 땅에 널리 퍼졌다.
귀족과 사제들 중 평소 미움을 많이 받았던 이들, 틀라콰나틀록 이단을 진압한답시고 애먼 사람들을 괴롭혔던 이들 등은 제 목숨을 구하려 인접한 다른 아스카포찰코의 속국들로 도망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그 수가 많은지, 그 발걸음만으로도 땅이 흔들렸소.”
“그래, 우리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무장이고 갑주고 전혀 없는 맨몸 평민들이야 족히 일인당 대여섯씩 죽일 수도 있었겠지¹. 허나 그 다음은? 전사라면 전장이나 제단에서 피를 흘려야지, 몰지각한 무지렁이들의 발길질에 맞아죽는다면 그만한 망신이 어디 있단 말이오?”
“어리석은 백성들이 거룩한 신들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제들의 잘못 아니오?”
지휘관으로 나섰던 귀족들과 그 친인척들은 이렇게 항변하고,
“저들이 아무리 수가 많았다 한들 고작해야 시와코아틀 신을 사칭하는 이방인과 왕자를 사칭하는 거짓말쟁이에게 이끌려 나온 군중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진압하기는커녕 가장 먼저 도망쳤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신들만 모독하는 게 아닙니다. 귀족과 평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로 하여금 저들 말을 따르라며, 마치 발이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용기고 무엇이고 없는 자들이 군대를 지휘하였으니 평민들이 그렇게 방자하게 구는 것도 슬프지만 당연한 일이지요.”
그 지휘관들이 무능해서 저들까지 도시에서 도망쳐나왔다 여기는 사제들은 이렇게 떠들었다.
어느 쪽이든, 그리고 어느 쪽의 변명을 듣든, 한 가지에는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틀랄콰나틀록 이단은 단순한 이단이 아니요, 지금껏 그들이 알고 또 누려왔던 질서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
저 ‘꽃의 전쟁’ 시위대가 외치는 세상, 전쟁도, 제물도 없는 세상에서는, 귀족과 사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특권을 마냥 누릴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또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질서가 그리 쉽게 무너지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이방인들을 따라 우르르 몰려온 군중들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 아나왁 땅에서 가장 강력한 아스카포찰코의 황제 테소소목에게 도전하였으므로.
테츠코코에서 도망친 네사왈코요틀(혹은 그 사칭자)이 어마어마한 군중과 정체불명의 이방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는 소문에 조용히 동요하던 테노치티틀란 시는, 그 군중이 내세우는 바가 무엇인지를 듣자마자 발칵 뒤집혔다.
아직까지는 그저 조금 힘센 야만인 도시에 불과한 테노치티틀란. 아스테카라 자처하는 이 도시의 메시카인들이 주변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 용맹한 군대뿐이었다.
그런 판에, 한쪽에서는 아예 전쟁을 뿌리뽑자며 난동을 부리는 군중이 몰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전부터 저 군중과 한통속이라고 저들을 의심하는 테소소목이 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우리의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저 틀라콰나틀록 이단들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이야말로 그대들의 신 위칠로포치틀리를 모시는 방도임을 분명히 밝히고, 함께 테츠코코로 나아가 어리석은 군중을 흩어 없애고 사칭자를 붙잡자는, 실로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제안입니다!”
이 뒤숭숭한 시국에 도시에 찾아온 테소소목의 사절은 이렇게 말했다.
테소소목은 계략에 능통한 군주였다. 그는 항상 약과 독을 함께 건네주어, 반드시 두 가지를 함께 삼키도록 만들곤 했다.
당장 테노치티틀란의 틀라토아니 위칠리위틀Huitzilihuitl에게도 저의 딸을 시집보내놓고, 관대하게 상국인 아스카포찰코에 바치는 공물을 감면하는 처사를 베푼 뒤, 뒤에서는 은근히 시민들을 선동해 언제든 그 공물의 양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압박하고 있지 않던가.
공식적인 제안을 전한 뒤, 위칠리위틀과 그 측근들과 함께 밀실로 들어간 사절은 ‘무용한 야만인이 되느니 유용한 전사로 남으라’ 하는, 테소소목의 진정한 전언을 밝혔다.
이번에도 테소소목은 약과 독을 함께 전했다. 만약 위칠로포치틀리 신앙의 교리를 슬쩍 바꾸어, 명확하게 이단을 배격하고 단죄한다면, 보나마나 테소소목은 이를 명분삼아 메시카 전사들을 부려 주변의 불충한 봉신들을 제압토록 만들 것이다.
아직 불안정한 아스카포찰코의 패권을 이로써 공공히 하고, 물밑에서 테노치티틀란과 교섭하던 이들을 테노치티틀란의 손으로 때려잡도록 만듦으로써 그 누구도 메시카인들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테노치티틀란은 쓰임이 다하는 일 없이 아스카포찰코 바로 아래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된다. 결코 다시는 그 이상을 바라지도 못하겠지만.
오톰판과 샬토칸 연합군을 격파하고 저의 고향 테츠코코에 돌아와 열렬한 환영을 받는 중이던 네사왈코요틀이 이러한 소식을 들을 수 있던 까닭은, 바로 눈앞에 도착해 있는 틀라카엘렐Tlacaelel² 왕자 덕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위칠리위틀은 네사왈코요틀의 외조부이기도 했으므로, 틀라카엘렐은 그의 삼촌뻘 되는 입장이었다.
허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도 않거니와, 테츠코코의 민중을 대표하는 – 즉, 그 민중에게 맞아죽기를 원치 않았던 – 귀족들은 이미 네사왈코요틀을 틀라토아니로 추대하였으므로³, 틀라카엘렐은 눈치껏 저의 외조카를 공대하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끔찍한 일이라?”
“저 노괴 테소소목이 우리에게 건네준 약과 독은, 비단 이번 ‘꽃의 전쟁’ 진압에 우리 테노치티틀란이 나서도록 강요한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틀라콰나틀록 이단은 거짓이며, 그들이 섬기는 전쟁의 신 위칠로포치틀리를 노엽게 하는 불경스런 행위라고 사제들이 선포하자마자, ‘틀라콰나틀록을 위해!’라고 외치며 달려든 광신도들에게 위칠리위틀은 살해당했다.
그 광신도들이 곧 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진짜 광신도들이었는지, 아니면 광신도로 가장한 암살자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테소소목의 은밀한 사주가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테소소목의 제안을 따르기로 작심한 귀족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앞잡이를 풀어 마구잡이로 테노치티틀란을 공포와 피로 물들였지요. 저는 겨우 농부의 배를 타고 도망쳐나올 수 있었고요⁴.”
“외조부의 일은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나 그 복수를 위해서라도 이런 질문을 곧장 던져야 하는 나를 용서해주기 바라오. 도시의 민심은 어떻소? 저 무도한 자들의 편을 들고 있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겠지요.”
아스카포찰코의 용병으로 호숫가 땅 곳곳을 누비며 전공을 세운 메시카인들. 그러나 전리품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테소소목과 아스카포찰코 귀족들은, 저들과 친분이 있는 메시카 귀족들에게만 전리품을 나누어주곤 했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굳이 평민들을 위해 목소리 높이느니 그냥 아스카포찰코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언제고 저들의 힘으로 강대한 제국을 세울 방법을 구상하고 있던 틀라카엘렐은, 권력을 잡게 되면 꼭 이 폐단을 바로잡아 도시의 평민 하나하나가 전쟁의 이익을 체감토록 만들겠노라 마음을 먹은 바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도 아버님의 복수를 한다고 떠들면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때려잡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도망쳐나오기 직전까지 본 바로는, 꽤 효과도 있었고요. 그 누구도 앞장 서서 재규어 전사들에게 맞설 각오는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곧 그 복수를 명분삼아 귀족들이 군사를 모을 때도 누구 하나 반발치 않고 순순히 따라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곳 ‘꽃의 전쟁’ 군중들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공적을 내세워 치말포포카Chimalpopoca를 틀라토아니로 삼겠지요.”
위칠리위틀의 아들이자 테소소목의 외손주인 치말포포카Chimalpopoca는 틀라카엘렐과 동갑이었지만, 네사왈코요틀의 절반만큼도 어른스럽지 못했다. 아스카포찰코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에는 제격이었다.
“곤란하게 되었군.”
테츠코코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이래로 시위대는 오만 명까지 불어나 있었다.
허나 그중 진짜 군사는 이방인들과 현지인을 다 합해 이천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어느 한 도시에서 작정하고 파견한 군사가 아니라, 틀라콰나틀록에 심취해 곳곳에서 따라나선 이들일 뿐이었다.
샬토칸과 오톰판의 어설픈 군세쯤이야 머릿수로 쉽게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작정하고 군사를 모으면 족히 일이만은 낼 수 있는 아스카포찰코-테노치티틀란 연합군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만약 투슈판을 떠나기 전, 시그리드가 이렇게 될 경우에 대비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네사왈코요틀 또한 진지하게 일시 후퇴를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
틀라카엘렐은 자못 진지하게 네사왈코요틀을 설득하였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군중들을 흩어 돌려보내고, 주변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저 ‘시와코아틀’을 따르는 이방인들이 천둥과 벼락을 부린다는 소문은 저 또한 들었습니다. 그들의 힘과 테소소목에게 질린 다른 도시들의 힘을 모은다면, 아스카포찰코를 무너뜨리지는 못하더라도 막아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군중들을 흩어라? 저들이 무엇 때문에 저 멀리 와스테카부터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그대는 모르는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저야말로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정녕 저 평민들의 말대로 신들이 인간의 뜻을 따르는 세상이 열리리라 믿으십니까?”
이 아나왁 땅에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연기 나는 거울의 신 테스카틀리포카의 뜻.
저들이야말로 신들의 참된 뜻을 안다면서, 신의 안배를 저들 맘대로 비틀겠노라 떠드는 군중은 이미 이 땅에 내려오는 교의에 입문한 틀라카엘렐의 눈에는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틀라카엘렐은 야심을 품고 있었다. 메시카인들이 야만인이라 불리면서도 모두의 멸시 대신 경계와 두려움을 사는 까닭, 그 탁월한 용맹과 무력을 바탕으로 테노치티틀란을 개혁하고 위대한 나라를 만들겠노라는 야심.
모든 것이 전쟁을 위해 이루어지고 전쟁은 다시 모두를 위해 이루어지는 그 위대함을 머릿속으로 막 그리기 시작한 젊은 틀라카엘렐은, 이 땅에서 전쟁이 끊어지도록 만들겠노라는 그 허장성세를 믿지도, 타당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저 이방인들이 모종의 술수를 준비해두었으리라는 점은 저 또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모래 제단처럼 무너질 이 군중을 몰고 이곳까지 오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그 술수가 정말로 기적처럼 테소소목의 군세를 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마법이든, 마법같은 눈속임이든, 이 세상의 법도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공물이 아까워 전쟁을 멈추자고 하는 평민들도, 막상 흉년이 닥쳐 먹거리가 부족해지면 당장 군사를 일으켜 이웃 도시에서 공물을 뜯어내자며 아우성을 칠 겁니다. 어찌 세월의 도전 앞에서 금방 무위로 돌아갈 일에 이토록 진심으로 나서시는지요?”
잠시나마 정적이 흘렀다.
틀라카엘렐의 물음은, 투슈판에서 이곳 테츠코코까지 오면서 네사왈코요틀 또한 몇 번이나 스스로 묻고, 종국에는 시그리드 본인에게까지 물었던 질문이었으니까.
“나는 이방인들의 지도자, 시와코아틀이라고도 불리는 시그리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어쩌면 우리가 준비한 술수가 부족할 지도 모르오. 어쩌면 그대 말마따나, 인간의 노력은 세상의 법도를 바꾸기에 부족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그들 말마따나, 불타는 수백 심장보다는 살아 헐떡이는 수만 심장이 더욱 영험할 터. 그리고 결국 전쟁도, 평화도, 평민들이 도시의 척추로써 우리를 지탱하기에 가한 일이니, 척추 없이 설 수 없는 사람은 없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고작 한두 달 전. 출발 준비가 한창이던 투슈판에서 자신이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시그리드는 답했다.
‘우리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이렇게 확신하느냐고요?’
네사왈코요틀은 시그리드가 행한 기적들에 대해 익히 들었다. ‘술수’를 준비하는 것을 직접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므로 시그리드가 뜻한 바가 당장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그렇게 절묘한 술수로, 피 흘리지 않고 테소소목을 꺾는다 한들, 그것만으로 이 땅에서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간 이어져 왔을 인간의 조건 자체를 뒤바꿀 수 있을까?
‘그야 장담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희망하고, 힘 닿는 한 그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는 걸요.
그리고 그 희망이 끊이지 않고 마침내 눈앞의 벽을 넘을 때, 비로소 세상은 변화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그 벽 앞에 사다리를 가져다주는 것뿐이고요.’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식과 거리가 먼 평민들, 아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옥수수 농사 따위가 전부인 이들이, 그저 공물을 내기 싫다는 욕심에 이끌렸다고만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꽃의 전쟁’에 따라나서는 것을 보면서, 네사왈코요틀의 마음 또한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이성은 말해주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움직이는 섬, 아니, 노블이라 불리는 거대한 배가 가져다줄 ‘철기’와, 이미 그들이 가져다 준 가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이 땅의 삶이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임을 방증하는 증거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의 감정은 외쳤다. 방증傍證은 방증일 뿐. 진정한 증거는 바로 처음 듣는 새 신화에 열광하고, 기꺼이 집에 남은 건량을 긁어모아 따라나서는 저 민중의 대열 안에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나는 사흘 뒤에 이 도시를 떠나 아스카포찰코로 향할 것이오. 그곳에서 테소소목에게 무도한 처사의 책임을 묻고, 신들의 이름으로 사람을 탄압하고 죽이는 것을 멈추라고 군중들과 함께 외칠 것이오.
따라오고 싶다면 따라와도 좋소. 떠나고 싶다면 막지 않겠소. 허나 나 네사왈코요틀의 뜻은 이미 정해졌소.”
그 숱한 물음들을 통해, 이곳 호숫가 땅까지 머나먼 귀향길을 걸으며 조금은 성숙해진 젊은 왕은 그것으로 저의 말을 마쳤다.
사흘 뒤, 새 틀라토아니 네사왈코요틀을 따라 일어선 테츠코코 시민들과 테노치티틀란 시민 한 명(어떻게 되나 보자는 심정으로 따라온 틀라카엘렐)까지 포함해 오만 명 넘게 불어난 시위대는, 호수 주변에서 유일하게 아스카포찰코에게 (아직) 복속되지 않은 도시, 찰코Chalco의 영역을 경유하여 아스카포찰코로 향했다.
테츠코코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통해 ‘꽃의 전쟁’ 시위대가 출정했다는 보고를 받은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은, 그 즉시 지시를 내렸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마지막 기쁨을 허락하거라!”
저들이 무슨 심산으로, 거의 비무장한 채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와코아틀 여신’이 뭔가 신통력을 발휘하리라는 맹목적인 믿음 때문일지도, 아니면 오톰판 근교에서의 싸움 아닌 싸움을 겪은 뒤 저들의 머릿수가 발휘하는 힘에 한껏 도취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똑똑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감히 신들의 뜻을 입에 올리며, 불경과 신성모독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자들에게 어떤 벌이 예비되어 있는지를!”
테소소목은 아스카포찰코 코앞까지 저 ‘꽃의 전쟁’ 시위대를 끌어들여, 중인환시 하에 제압하여 위엄을 보이고자 작정하였다.
물론, 겉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그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이곳 아스카포찰코 코앞에서 군사를 모은다면, 훨씬 많은 군사를 큰 부담 없이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있었다.
이미 출정을 준비하고 있던 아스카포찰코와 테노치티틀란의 군사들은, 테소소목의 지시를 받자마자 빠르게 소집되었다. 그 규모만 자그마치 일만육천.
십 대 일로 중과부적에 처해 무력하게 무너진 오톰판과 샬토칸의 군세와 달리, 이곳 아스카포찰코 앞 호숫가에서 이쪽 전사들과 저쪽 군중의 머릿수는 거의 삼 대 일의 비율을 이루었다.
그것도 군중들 앞에서 바로 무너져내린 그 오합지졸들에 비하는 것이 실례일 만큼 강력하고 정예로운 군세.
메시카인들은 호수에 놓인 제방 겸 다리를 건너 저들의 상국인 아스카포찰코 앞에 모여들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재규어 전사들의 모습은 그 뒤를 따라 무기를 든 평민들의 낯빛을 가리고 있었다.
아스카포찰코 군세는 메시카인들과 합류하여, 곧 저 남쪽에서 나타날 어리석은 난민亂民들을 기다렸다.
이 척박한 땅에는 숲이 드물었다. 또한 금속이 드물었기에, 화살이든 투창이든 그리 멀리 날릴 일이 없었다. 암만 강한 활이나 투창기(아틀라틀Atlatl)를 쓰더라도, 흑요석 촉으로 맨살을 뚫으려면 바짝 붙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따라서 이 땅의 사람들은 바람에 이름을 붙일지언정 그 풍향까지 깊게 고찰하지는 않았다.
반면 시그리드는 이방인 욘에게서 기초적인 기상학을 배운 바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군에게 기상은 중대사항이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분지 지형의 기상에 호수가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도 있었다.
“다행이에요. 딱 예상대로네요.”
네사왈코요틀이 예상한 대로, 테소소목이 군사를 내보낸 것은 전투의 광경이 훤히 보이는 한낮이었다.
혹시나 싶어 테츠코코 사람들 중 농부로 잔뼈 굵은 노인들에게 수소문하기보기까지 했던 시그리드는 자신의 계산대로 바람이 불고 있다는 데 안도했다.
모닥불 연기가 저쪽 진영에서도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하늘로 조금 치솟던 연기 기둥은 금방 호수 쪽으로 몰리곤 하였던 것이다.
네사왈코요틀은 저것이 이 지역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하였다. 아마 그렇기에, 이쪽의 평민들, 고작해야 대충 돌멩이와 나뭇가지, 조금 사정 나으면 날 없는 몽둥이 정도로 무장한 이들이 여기저기에 장작을 쌓고 있는 것을 저쪽에서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리라.
“주변에 주의사항은 다 전해졌겠지요?”
“물론입니다, 각하.”
“지슈카 아저씨?”
“우리도 때맞춰 돌격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걱정 말거라.”
“고맙습니다.”
이쪽 시위대 진영 곳곳에 놓인 모닥불에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단순히 신호 목적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연기가 많이 치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저쪽 전사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술렁이는 기미가 보였다.
이대로라면 호수를 등진 저들에게 저 연기가 그대로 날아올 것이었다.
장교로 보이는 이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호통을 치는 게 보였다. 고작해야 연기일 뿐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며 다그치는 것이리라.
시그리드는 숨을 고르고, 저의 라이플을 들었다.
그러고는, 유효사거리에서 한참 떨어진 적의 지휘관들을 노리는 대신, 총구를 허공에 향했다. 어차피 주변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이방인들과 투슈판 사람들을 제한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인조 천둥소리가 울리고, 화들짝 놀란 시위대 가운데서 정신 먼저 차린 이들은 그 신호의 뜻을 상기하곤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슈판에서부터 가져온 단지 속에는, 마치 잘 익은 고추처럼 붉은 기 감도는 탁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샬라파Xalapa에서 주로 재배하기에, 오지 않을 미래에는 할라페뇨Jalapeno라고도 불리게 될 고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물 대신 용설란 발효주 옥틀리에서 증류한 알코올에 고추를 푹 담근 시그리드는, 알코올을 증발시킨 뒤 남은 끈끈한 물질이 바로 잘 농축된 캡사이신Oleoresin Capsicin, OC임을 확인했다. (좋은희망에 이어 그린란드 연대와 투슈판 시내에 퍼진 오목 덕에, 시그리드 대신 캡사이신의 효과를 검증해줄 사람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다. 어떻게 하면 이 캡사이신을 잘 써먹을 수 있을지만 추가적으로 연구하면 되었으니까.
오늘 새벽, 시위대 사람들은 끈끈한 죽처럼 농축된 캡사이신을 물과 섞어 현탁액을 만들었다. (호기심에 슬쩍 그 맛을 본 이들이 종종 있었기에, 모두가 금방 교훈을 얻고 극히 조심스럽게 이 물질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가 떨어진 지금, 사람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조심스럽게 그 현탁액을 부었다. 열기에 물이 증발하면서, 물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하고 섞여 있던 캡사이신도 수증기와 함께 에어로졸aerosol로 화했다⁵.
봄철 햇살에 달아오른 땅에서 그나마 선선한 호수를 향해 부는 바람을 타고, 매캐한 연기는 캡사이신을 잔뜩 머금은 채 퍼져나갔다.
물 위의 연기는, 테노치티틀란과 그 너머 아스카포찰코의 높은 제단에서도 족히 보일 만큼 성대하게 피어올랐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농민봉기이자 신대륙 최초의 반전시위인 ‘꽃의 전쟁’에서, 시위대가 그들을 진압하러 나선 공권력을 상대로 최루가스를 살포하게 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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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즈텍인들이 인명살상이 아닌 인신공양 제물 노획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벌였기에, 막상 콩키스타도르들이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멸망했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물론 흑요석이나 투창기(아틀라틀) 등으로 무장한 메소아메리카 군대가 철기를 사용한 군대에 비해 인명살상에 부적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즈텍이 테츠코코 등과 동맹을 맺고 마침내 아스카포찰코를 점령했을 때 벌였던 대규모 학살에서 볼 수 있듯, 이들 또한 구대륙의 ‘문명인’들처럼 대량살상을 해야 할 때는 잘만 했습니다. 훗날 콩키스타도르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이 보였던 졸전은, 테노치티틀란에 처음 입성한 콩키스타도르들의 손에 고급 지휘관을 겸하는 귀족들이 몰살당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틀라카엘렐은 테노치티틀란-테츠코코-틀라코판 삼각동맹 구축과 이후 아즈텍의 체제 정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위칠리위틀의 여러 아들 중 하나로 태어난 틀라카엘렐은 탁월한 자질 덕에 어려서부터 요직을 맡았고, 점차 노골적으로 들어오는 아스카포찰코의 견제에 맞서 네사왈코요틀과 함께 주변의 다른 도시들을 동맹으로 묶어내는 데 성공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아스카포찰코를 무너뜨린 뒤 그는 아즈텍의 군사적 문화를 더욱 군국주의에 가깝게 재편하여, 대규모 인신공양과 전쟁 등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체제를 구축하였지요. (이 과정에서 신화와 역사에 관한 기존 서적을 불태우고 제례를 대규모로 재정비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마치 틀라카엘렐이 아즈텍을 ‘악의 제국’으로 만든 장본인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90세까지 장수한 틀라카엘렐은 아즈텍의 실권자로 수십 년간 군림하며 – 그는 왕위에 오르는 대신 행정장관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시와코아틀 직위를 맡았습니다 – 아즈텍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3. 이 무렵 메소아메리카 도시들의 틀라토아니는, 실질적으로는 부계로 상속되는 직위였지만 원칙적으로는 시민들의 결정(즉, 시민들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귀족 대표들)에 따라 추대되는 직위였습니다. 1427년 아스카포찰코의 음모로 왕통이 끊어진 테노치티틀란에서 귀족 대표들이 왕가의 방계 후손이던 이츠코아틀Itzcoatl을 추대했던 것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 원칙이 실효성을 되찾아 왕을 선출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지요.
4. 멕시코 분지 중심부 호수 일대에서 성행한 치남파 농법은, 호수 가장자리와 밑바닥의 진흙을 이용하여 곡물을 재배하는 농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경지는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 모양으로 만들어지곤 했지요. 틀라카엘렐이 ‘농부의 배’를 빌려탈 수 있던 것도 이 덕분입니다.
5.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제조한 캡사이신 추출물oleoresin capsicum은 조류나 설치류, 심지어 곰과 같은 야생동물을 쫓는 데까지 폭넓게 쓰이곤 합니다. 한국의 기성세대 및 군필자에게 익숙한 최루가스(CS 가스 등)의 유해성 논란이 제기된 이후로, 선진국 각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기도 하지요. 다만 작중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훨씬 유효한 살포 방법(고무탄에 액체 형태로 채워서 발사, 스프레이 분사 등등)이 많기 때문에, 작중에서 등장한 원시적 화학전(?) 형태로는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