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66화 (66/116)

물 위의 연기 (4)

15. 물 위의 연기 Smoke on the Water (4)

언제든 돌격할 준비만 갖추고 있던 아스카포찰코-테노치티틀란 연합군을 덮친 연기.

그 매캐한 연기가 진압군 대열을 죽 훑고 그들 등 뒤의 호수까지 퍼져나가니, 연기 걷힌 곳에는 정예한 군사 일만육천은 온데간데없고 눈을 부여잡고 뒹구는 불우한 사람들만 잔뜩 있었다.

“아악! 내 눈! 내 눈!”

화끈거리는 눈을 비비면 비빌수록 격통은 심해지고, 흐릿한 시야로 더듬더듬 물가까지 간 이들 또한 큰 효험은 보지 못하였다.

“정신들 차려라! 콜록, 콜록! 정신을...”

암만 이들 군세가 아나왁 땅에서 가장 강력하다 한들, 그 견문은 이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았다. 재규어 전사들조차 똑같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판에, 어찌 정신을 차리라는 명령에 힘이 담길 수 있을까.

운 좋게 연기를 덜 쐰 이들, 매운 연기를 그나마 잘 참아낸 이들이 저들끼리 뭉칠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짐승을 타고 창백한 거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돌격! 모두 해산시켜라!”

“공포탄 일발, 사격 개시!”

시위대가 진압군에게 최루가스를 살포하는 데 이어, 기마돌격에 숫제 공포탄 사격까지 해버리는, 오지 않을 미래의 반전反戰 시위를 반전反轉시킨 구도.

천둥소리와 더불어 자욱하게 일어나는 매캐한 총연에, 이미 한 번 연기에 놀란 전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었다.

공포空砲로 말미암은 공포恐怖에 휩싸여 그나마 멀쩡하던 대열이 붕괴하니, ‘꽃의 전쟁’ 시위대는 한껏 기세가 올랐다.

오만 시위대가 곳곳에 남은 매운 냄새를 참아가며, 괴성 지르며 하나둘씩 달려드니, 제 발로 도망칠 수 있는 자는 도망치고, 차마 그러지 못한 자는 비틀거리며 몸 가누려다가 금방 시위대에 휩쓸렸다.

“에워싸고 몽둥이로 후려쳐라! 제깟 놈들이 재규어 전사라 한들 앞을 못 보는데 뭐가 대수냐!”

저쪽의 눈이 잠시 멀었기에, 혹시라도 훗날 만나 보복당할 걱정도 없었다. 귀족이고 뭣이고 마음껏 욕지거리 내뱉으며 군중들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죽이면 안 된다! 그냥 제압만 해라!”

“시와코아틀께서 말씀하셨다! 꽃의 전쟁에서는 피가 흐르면 안 된다!”

시그리드가 딱히 신은 아니라 여기면서도, 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인 것도 아니라 여기는, 틀라콰나틀록 교리에 심취한 이들이 그저 마음껏 날뛰고픈 마음으로 따라온 이들을 알아서 제지하였다.

그렇게 진압군 태반은 포로 신세가 되었다. 흑요석 칼날에 힘줄이 베이거나 하진 않고, 그저 동아줄에 손이 묶이기만 했으니 포로치곤 괜찮은 대접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어리석은 군중을 흩어버리는 것을 선보이겠노라며 저의 도시 앞까지 시위대를 끌어들인 테소소목의 계책은 그대로 패착이 되고야 말았다.

정신 차리고 겨우 도망친 이들 또한 아스카포찰코 시로 돌아오는 대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야 말았으니, 이제 아스카포찰코 시는 잔뜩 기세 오른 군중, 도시 전체의 인구와 머릿수 맞먹는 군중과 그들을 이끄는 무시무시한 이방인들을 무방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우웨이 틀라토아니시여, 부디 대책을!”

그리 머지않은 저들의 도시. 높은 제단 위에 올라 딱히 승리라고 하기도 뭣할 만큼 싱거운 결과가 나오기만 기다리던 아스카포찰코의 귀족들은 경악하며 그들의 황제 테소소목만을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테소소목은 조용히 답했다.

“그대들은 모두 보았을 것이다. 저 신비로운 연기를.”

실제로 테소소목이 넋이 나갈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은 저들의 군주가 내놓을 방책을 기다렸다.

“저것이야말로 연기 나는 거울의 신, 테스카틀리포카의 뜻이요 가호일지니, 우리의 사제들이 신들의 뜻을 잘못 헤아린 것이다.

내 생각건대, 이 착오는 신전과 제단의 터가 좋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마땅히 불태울 수 있는 것은 불태우고 허물어야 할 것은 허물어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어찌하여 과오를 저질렀는지, 저들 군중에게도 사람을 보내 이를 알릴지어다.”

애먼 신들을 탓하며, 결코 테소소목이나 아스카포찰코 시의 잘못이 아니요 그저 과거의 착오를 뒤늦게 고칠 뿐이라 주장하는 것. 즉 사실상 항복하되 테소소목과 아스카포찰코가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틀라콰나틀록 이단은 이제 이단이 아니게 되겠지만, 적어도 저 들판의 의기양양한 군중이 아스카포찰코 시로 밀려들어오는 일은 막을 수 있으리라.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의 ‘오해’를 푼다는 명목으로 테소소목은 도시에 저장된 식량까지 풀어 시위대를 대접해주었다.

시그리드와 지슈카는, 이렇게 방심시킨 다음 야습하려는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의심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테소소목은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연기에 한 번 당했으니, 또 다른 기상천외한 술수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조금은 충격에서 벗어난 틀라카엘렐이 설명해주었다. 뭔가 비장의 수를 품고 투슈판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오늘 낮에 그가 본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싱거운 승리를 자신하던 아스카포찰코의 귀족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불길은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공터에 진을 친 시위대 눈에도 훤히 보였다.

이 모든 과오를 애먼 제단과 신전에 돌리면서, 사실 저는 틀라콰나틀록을 이단으로 탄압할 마음도, 전쟁을 그만하자는 평민들의 아우성에 흑요석 칼날로 답할 의도도 없었노라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은 테소소목이, 잽싸게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테소소목의 사절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우리 도시의 위대한 틀라토아니이시자 저의 주군이신 테소소목 폐하께서는, 다시 한 번 그간의 과오를 깊이 반성한다는 뜻을 표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테츠코코에서 챙겨온 제법 번듯한 천막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사절을 맞이한 시그리드의 앞에는, 사절뿐 아니라 그 사절의 아랫사람들이 끙끙대며 가져온 궤짝 여럿도 놓여 있었다.

이제 보니, 애먼 신전을 지목해 잘못을 떠넘긴 데는 다른 속셈도 있던 듯했다. 그 신전을 치장하고 있었을 온갖 보석과 금은 장신구가 궤짝 여럿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돌로 된 신전과 제단이 고작 불에 무너질 리 없는데도 굳이 불을 지른 까닭은, 보나마나 테소소목이 몰래 사람을 시켜 그 안의 금은보화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으리라.

“이것은 시와코아틀 여신과 테스카틀리포카 신의 가호를 입은 고귀한 이방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데 사죄하는 뜻으로 테소소목 폐하께서 보내신 공물입니다.”

터키석과 옥, 금과 흑요석 등등. 온갖 화려한 보석과 귀금속을 정성껏 세공한 예술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는 유럽인인 지슈카의 외눈이, 금에 눈이 닿자마자 크게 뜨였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사절은, 저의 주군의 혜안에 은근히 감탄하였다. 이방인들이 이 ‘꽃의 전쟁’ 지도부 중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꿰뚫어보고서, 도시의 부유함으로써 그들을 꼬드기면 충분히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계산했던 것이다.

시그리드는 조심스레 네사왈코요틀과 틀라카엘렐의 안색을 살폈다. 어떻게든 이 땅에 교역 관계를 구축하고, 훗날 유럽 본토 사람들이 도착해도 함부로 정세를 교란할 수 없도록 균형 상태를 만드는 게 목표인 시그리드와 달리, 두 사람은 훨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네사왈코요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늙은 테소소목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개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시위대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평민들이 하나로 뭉쳐, 먹고살기도 벅찬데 전쟁이니 제의니 하는 것을 명분삼아 공물 뜯어내는 것을 관두라고 외치자, 아나왁 땅에서 가장 강력한 아스카포찰코의 우에이 틀라토아니가 굴복했다는 전례가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포찰코에 대해 쌓인 원망과 분노를 고작 이 정도로 풀어 없앨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사절이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시그리드는 궤짝 속 보물들을 하나씩 살피고 있던 네사왈코요틀과 틀라카엘렐에게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언제 말을 맞추었는지, 입 모아 답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각하. 장담컨대 테소소목은 차라리 저 불길에 뛰어드는 게 나았으리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다만 각하의 도움이 조금 필요합니다. 이 땅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도 이로운 일일 겁니다.”

저들의 승리를 기뻐하며, ‘꽃의 전쟁’ 시위대는 삼삼오오 흩어졌다.

세상의 멸망을 바라마지않는 간악한 이단들이 승리하는 현실에, 평생 정성스레 사람과 짐승을 제물로 바쳐온 경건한 사제들은 혀를 끌끌 차곤 했지만,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장 테소소목부터가 저 ‘시와코아틀’이 신은 아닐지라도 그 가호를 입은 게 틀림없다고 공인해주었고, 호수 위를 뒤덮었던 그 거룩한 연기는 테스카틀리포카 신마저도 저 틀라콰나틀록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징표와 같이 보였던 것이다.

이 땅에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이제는 제멋대로 전쟁을 관두라며 이방인과 어리석은 군중들에게 가호를 베풀어주는 신. 그러나 저들의 교리대로라면 신은 원래 그러한 존재요 인간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으니 – 이를 부정하는 자, 신들은 본디 선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곧 틀라콰나틀록 이단자였다 –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일상은 조금씩 돌아왔다. 아나왁의 변두리 와스테카부터 이곳까지 찾아왔던 사람들은 얼른 돌아가 올해 농사일에 나설 심산으로 먼저 돌아갔고, 테츠코코 같은 근처 땅에서 모여든 이들 또한 걸어서든 배 타고든 저들의 정든 도시로 돌아갔다.

장삿속 밝은 메시카인 농부들은, 어느새 삯을 받고 사람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날라주는 장사를 부업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와코아틀’이 머물고 있는 테노치티틀란을 들락거리는 귀족과 상인들 또한 끊이지 않았다.

“흠흠, 다름이 아니라, 이방인 분들께서 참으로 황금을 귀하게 여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먼 땅에서 우리 도시까지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많은 역경이 있었을 터인데, 그 와중 이처럼 우리 백성들을 위해 힘써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여, 미약한 선물을 이렇게...”

아스카포찰코 앞 호숫가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최루가스를 쐬었던 이들조차, 이렇게 입을 싹 씻고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이 그저 시그리드 눈에 들기 위해 집안의 금붙이를 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저야말로 고마운걸요. 앞으로도 부디 평화를 위해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황금이든 터키석이든, 이 땅에서는 다 같이 귀한 물건. 그러므로 시그리드는 테소소목에게 받아낸 귀중한 예술품 중 귀금속이 아닌 것을 이렇게 금붙이와 교환하곤 했다.

그날의 ‘장사’가 다 끝나고, 이제 거의 황금으로만 가득 찬 상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시그리드는, 멀리 기둥 사이에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고 있는 틀라카엘렐와 네사왈코요틀을 발견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각하.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크흐흐. 지금쯤이면 테소소목 그 늙은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을 겁니다. 그래봤자 손 쓸 방도는 없겠지만요.”

시그리드가 오기 전만 해도, 호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아스카포찰코에 복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스카포찰코에서 신들께 정성껏 제사를 드릴 때, 다른 도시의 귀빈들 또한 종종 함께하곤 했다.

그러니 태연하게 ‘우리 땅에서는 황금만 귀하게 여깁니다’ 떠드는 시그리드와 귀물을 맞바꾼 귀족들 중에는, 왠지 자신이 받은 터키석이나 옥 예술품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테소소목은 분명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 여길 것입니다. 신들의 뜻이 우리에게 있었으니, 신전을 살짝 모독하는 것쯤은 괜찮다 여겼을지도요.”

허나 이미 테소소목은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 불탄 신전에서 신성한 물건들을 빼돌려 이방인에게 공물로 바쳤다는, 평소라면 그저 사람들 마음속에만 머물렀을 의혹은 점차 그늘 속에서 소근소근, 나중에는 태양 아래서 공공연히 구설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일전에 테소소목의 두 아들, 타야친Tayatzin과 마슈틀라Maxtla을 본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얼른 왕위를 계승하고 싶은 마음뿐이더군요¹.”

“테소소목에게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장담했던 것처럼 그 남은 일평생은 구차하게,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호시탐탐 저의 왕위를 노리는 두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든, 그 손에 죽든, 어느 쪽이든 테소소목에게는 비참한 운명만이 남아 있었다.

시그리드에게는 차마 밝히지 못했지만, 틀라카엘렐과 네사왈코요틀은 지금껏 아스카포찰코가 저들 도시에 행했던 바를 그대로 돌려줄 심산이었다. 곧 정체불명의 후원자가 나타나, 타야친과 마슈틀라를 충동질하여 아비의 권좌를 노리도록 사주할 에정이었다.

“자, 그 얘기는 슬슬 그만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해보도록 할까요.”

네사왈코요틀이 이방인들의 제스처를 모방해, 손뼉을 짝 쳤다.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며 쇠락의 길을 걸을 아스카포찰코. 그러나 애초에 그 쇠락이 어떻게 촉발되었는지를 훤히 아는 호숫가 도시들 중 그 누구도 선뜻 아스카포찰코의 빈자리를 채우겠노라며 흑요석 칼날을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 사이에 빠르게 이 아나왁 땅과 북쪽의 신대륙 연합까지,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그 너머까지 교역망을 완비한다.

훗날 유럽 본토에서 다른 경쟁자들이 도착해도 쉽게 교란되거나 붕괴하지 않을 만큼 탄탄한 교역망. 고작 약간의 강철이나 질병 따위에 무너지지 않을 교역망을 세우는 것이, 그간 테노치티틀란에 머물면서 시그리드와 네사왈코요틀, 틀라카엘렐 세 사람이 논의한 계획이었다.

말이라는 짐승을 본 것만으로 지금껏 장난감에 불과했던 바퀴의 진정한 힘을 깨닫게 된 네사왈코요틀은, 투슈판에서 테츠코코까지, 금광이 있는 저 남쪽 와샤칵에서 테노치티틀란까지 이어지는 육상 교역로의 가능성을 이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스카포찰코의 농간에 얼마나 쉽게 이 도시 테노치티틀란이 놀아났는지를 생생히 겪은 틀라카엘렐은, 장차 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이 땅의 사정에 무관심하면서도 무자비한 이들이 나타나 이 땅을 제멋대로 다루려 할 것이라는 시그리드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머릿속 상상을 완고한 귀족들에게 설득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고, 그간 네사왈코요틀이 몇 번이나 테츠코코를 오가야 했던 것도, 틀라카엘렐이 밤마다 은밀히 도시의 귀족들을 만나고 다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행히 신들의 도움 덕인지, 아니면 시그리드 각하의 이방인들을 보고 뭔가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인지, 겨우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틀라카엘렐, 우리 테츠코코는 그대들 테노치티틀란이 동맹에 찬성한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소.”

암살당한 위칠리위틀의 뒤를 이을 이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테소소목의 외손자인 치말포포카가 꼭두각시 틀라토아니로 자리에 올랐겠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스카포찰코와의 우의를 강조하던 귀족들은 지금은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평화를 찬양하고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틀라카엘렐이 치말포포카 대신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틀라카엘렐은 아직까지는 그런 이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테츠코코와 신대륙 연합을 끌어들여 삼각동맹Excan Tlahtoloyan을 맺자고 주장할 때 누구도 함부로 반박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우리 테노치티틀란의 네 구역을 대표하는 이들 또한, 하나같이 삼각동맹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에게 호응한 전과가 있던 귀족들은, 차기 틀라토아니로 유력한 틀라카엘렐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동의한다는 말만 뻐끔할 뿐이었다. 정작 틀라카엘렐은 저의 숙부 이츠코아틀Itzcoatl을 틀라토아니로 추대할 심산이었지만.

“물론 당분간은 이 동맹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긴 어려울 것입니다. 최소한 몇 년은 기반을 쌓아나가는 데만 주력해야 할 테고요.”

시그리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시그리드네 신대륙 연합 사람들은 투슈판에 상관을 차려야 했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허리케인에 대비해 오가는 항로 중간에 거점도 마련해야 했다.

또한 아나왁 내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동맹 내에서 군사력으로 이름난 테노치티틀란은 장거리 교역과 그 교역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닌 테츠코코는 교역 상대들과의 외교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지만, 이 역시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앞으로 이렇게 보조를 맞춰나가자’ 하는 정도에 동의하는 정도가 최선이겠지요.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일이겠지만요.”

당장 이곳에서 시그리드가 모은 황금만 하더라도, 더 많은 배와 무역 거점을 마련하는 데 고스란히 투자될 예정이었다.

원 역사에서 무작정 원주민들을 쥐어짜 황금을 갈취할 때만큼 빠르게 금을 모을 수는 없겠지만, 대신 원 역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온갖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으리라.

내년부터 동녘정착지에서 여름 내내 긁어모은 바다코끼리 상아가 처음으로 투슈판에 하역될 것이었다.

그 무렵이면 지금껏 한 번도 이 땅에 존재한 적 없던 ‘마차’라는 기물이 등장해, 메시카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른 귀한 물건들과 함께 내륙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또한 보헤미아에서 건너온 유리 장인들과 이 땅의 뛰어난 흑요석 석공들이 만나, 지금껏 베네치아만 독점하고 있던 정교한 유리 세공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².

그리고, 여기서 남쪽으로 더 나아가 태평양에 새로 항구를 세우고, 그곳에서 배를 만들어 더 남쪽의 잉카와 교역하고, 그곳에서 더 많은 금과 은, 그리고 새로운 작물들을 들여오고...

시그리드가 그런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것을 본 네사왈코요틀은, 조심스레 일어나며 틀라카엘렐에게 눈치를 주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언질만 주고는, 그들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테노치티틀란의 분주한 시내가 잘 보이는 기둥 사이로 돌아온 네사왈코요틀이 물었다.

“마음이 바뀌었나 보군. 뭔가 다른 얘기를 더 할 줄 알았는데.”

틀라카엘렐이 그리고 있던 미래가 무엇인지, 대략은 짐작하고 있던 네사왈코요틀이었다.

그러므로 네사왈코요틀은, 틀라카엘렐이 어떤 시점에서건 시그리드의 제안을 거부하고, 저들에게 그 강철로 된 무기와 화약만 공급해준다면 거뜬히 아나왁 땅 모두를 정복하고 황금을 양껏 제공하겠노라 역제안을 하지는 않을까 내심 생각하였다.

“저는 이 도시의 사람들, 우리 아스테카 사람들이 전쟁만을 원한다고, 또 전쟁만을 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지엽적인 것이고, 우리가 위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지양되고 억눌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생각이 바뀌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는 여전히, 언제고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황금을 두고든, 이방인들과 교역하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서든... 그리고 그 전쟁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달리, 저들의 날카롭고도 단단한 쇠붙이로 벌어지며 엄청난 피를 흩뿌리겠지요.”

후대인들은,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피가 땅을 적시길 바란 테스카틀리포카 신의 뜻이었다고 냉소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생각이 아예 바뀌지 않았다고 하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요.”

틀라카엘렐은 기둥 사이로 보이는 저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저무는 석양이, 오늘도 바쁘게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돌아오는 작은 나무배들을 비추고 있었다.

늘 붐비는 시장 한쪽에서는, 이방인들로부터 닭을 사들인 부유한 상인이 돈을 받고 그 닭이 낳은 병아리를 구경시켜주고 있었다.

사람의 피가 아닌 태양의 빛으로 붉게 물든 도시 어딘가에서는, 그들 기준으로는 헐값으로 황금과 바꾼 예술품들을 다시 저들끼리 바꾸거나, 더 가치 있는 다른 물건들로 교환하기 위한 귀족들만의 작은 경매 시장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든, 두 귀로든 접하면서, 틀라카엘렐은 문득 깨달았다.

“우리 아스테카 사람들은, 그저 싸움에만 능한 야만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도 그것을 믿어 왔고요. 일백여 년 전, 아스카포찰코의 틀라토아니가 우리에게 이 호수 가운데 섬들에 정착하도록 허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 아스테카 사람들은 뛰어난 상인이기도 하더군요. 전쟁과 평화, 약탈과 교역이 항상 함께 있던 우리 세상에서는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새삼스레 깨닫고서, 어쩌면 조금 다른 미래에 한 번쯤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만하면 족하오.”

두 사람은 석양에 비친 시장과 호수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 태양이 진 뒤에도 똑같은 태양이 다시 뜰 것임을, 그리고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달라져갈 것임을, 냉소를 담아서든 희망을 곁들여서든 믿으면서.

--- *** ---

1. 이전에 잠깐 언급되었던 것처럼, 한때 멕시코 분지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그 너머까지 영향력을 투사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스카포찰코는 테소소목 사후 빠르게 몰락하게 됩니다. 이는 이미 테소소목의 대부터 차곡차곡 업보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두 아들들이 아버지보다 한참 못한 용렬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마슈틀라는 테노치티틀란-테츠코코 연합에 패배했고 – 야사에 따르면 마슈틀라는 네사왈코요틀에게 직접 심장을 뽑혔다고 합니다 – 이 새로운 연합은 테파네카인들의 다른 도시인 틀라코판을 동맹에 편입시킴으로써 테소소목이 이루어놓은 패권을 거의 그대로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멕시코 분지에서 마지막까지 아스카포찰코에 저항했던 찰코Chalco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메소아메리카에 전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해나가게 되지요.

2. 아즈텍 사회에서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상인 다음가는 지위를 누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부역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을 누렸고, 황제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에게 예술품을 납품하곤 했지요. 금속 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수준 높은 조각상이나 장신구 등 많은 예술품을 후대에 남겼고, 흑요석 공예 또한 그중 일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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