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68화 (68/116)

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2)

16. 무엇이든 밤을 견디게끔 해 준다면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2)

머나먼 바다 건너에서 태감 정화나, 영락제 주체, 조선왕 이방원 등등이 무엇을 하고 있던 아직은 알 바 아니었던 시그리드는, 제 코가 석 자였던지라 안락한 저의 집을 떠나 근처 언덕 위에 올라와 있었다.

1416년 여름 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그린란드 회사의 장인 및 조선공 영입사업은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대개는 저들이 번뜩이는 황금의 빛 앞에서 한 마리 불나방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이들이 사후에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원래 올 가을까지 넘어오기로 했던 보헤미아 이주민들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모은 장인들이 신대륙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던 좋은희망 사람들도, 이제는 논쟁 대신 온갖 토목공사에 열중하게 되었다.

보름 전 좋은희망에 모인 부족민 대표들은 조선소와 벌목장 확장 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아직까지는 니놀리노 사람들이 머무는 숲과 바닷가만 개척 대상이었기에, 다른 부족 사람들로서는 그들과 교역할 개척민들이 많이 오면 올수록 이로웠던 것이다.

땅이 얼기 전에 기초공사를 마칠 심산으로 조선소 확장공사가 첫 삽을 떴고, 동녘정착지와 좋은희망 사이 어장에서 포경을 하는 바스크 어부들을 위한 항만시설 공사도 이어졌다.

리프와 함께 공사 현장을 멀찍이서 구경하던 시그리드는 메이플 차, 그러니까 메이플 시럽을 뜨뜻한 물에 푼 음료를 홀짝이고 있었다. (욘을 통해 차Tea라는 말은 배웠으나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던 시그리드를 통해, 무언가를 탄 따뜻한 음료를 모조리 차라고 부르는 문화가 널리 퍼졌다.)

의회가 파한 뒤에도 장삿속 밝은 미크막 사람 몇몇은 좋은희망에 남아 있었는데, 공사 인부들에게 메이플 차를 파는 상인들도 그런 축에 들었다. 공사 인부들이 휴식할 때 찾아와, 왐품을 받고 차를 팔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시그리드를 알아보곤 눈치껏 한 잔 건네주었던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몇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시그리드가 이곳 좋은희망에 머물 때 비서 노릇을 하는 – 상관의 명을 충실히 받드는 독일인 본성 탓이리라 – 보안관 디폴트의 목소리에 시그리드는 잔을 내려놓았다.

리프는 두 사람 얘기하시라며 자리를 비우는 것인지, 아니면 저 달달한 수액보다 저의 입에 더 맞는 육즙 가득한 새끼 마멋Marmot을 발견한 것인지, 푸드득 날아올라 떠나갔다.

“보헤미아 장인들이 남쪽에 잘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아, 아까 입항한 배들이 따뜻한환영으로 향했던 배들이었나 보군요.”

이제는 바스크 사람들뿐 아니라 뱃일에 적성이 맞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람들도 꽤 많이 참여하게 된 대서양 횡단 무역은, 보통 유럽에서 사람들을 싣고 온 뒤 좋은희망에서 말린 생선과 모피, 담배 등을 싣고 돌아가는 식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네. 다행히 중간에 큰 사고나 갈등은 없었다고 합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아직까지는’ 사고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을 테지만.

지금쯤이면 신대륙 연합의 인구는 일만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그린란드 회사 사장 노릇을 하면서 회계의 소질을 발견한 파울 주교의 추산에 따르면, 따뜻한환영과 근처 곳곳에 정착한 인구가 대략 오천 (대개는 보헤미아인), 좋은희망과 푸른들판에 독일인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인 위주로 약 삼천, 더 남쪽 우애의 도시에 이천. 그리고 개척만 주변의 소소한 어업기지와 좋은거래 정착지를 모두 합하면 또 대략 일천.

동녘정착지에 남은 이들과 그린란드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바다코끼리 사냥과 고기잡이를 위해 모여든 칼라알릿 사람들까지 합하면 거의 이천.

단숨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건너온 이상, 그리고 그들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져 이 땅을 조금씩 보금자리로 삼게 된 이상, 시그리드가 아나왁 땅에서 돌아왔을 때 이곳 좋은희망에 닥쳤던 것과 같은 갈등은 이제 겨울철 추위처럼 꾸준히 끊이지 않고 벌어질 것이었다.

저의 어깨 위에 올려진 사람들의 무게, 신대륙 연합의 미래를 위해 계속 이민을 받다 보면 더욱 무거워질 그 무게를 새삼스레 느끼던 시그리드는, 디폴트가 엉뚱한 얘기를 꺼내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뜻한환영에 내리기를 거부하고 이곳까지 따라온 승객들이 있었습니다.”

보헤미아에서 압수한 교회 재산으로 노블 선 여럿을 새로 건조하면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넘어오는 것 외에 직항로 또한 자주 이용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긴 소소한 문제로, 승객들 중 조금 이상한 자들을 미리 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도망친 농노들이야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으니 상관 없었지만, 이번에 당당히 자리 내놓으라 요구하며 배에 오른 불청객들은 상황이 달랐다.

“잠깐만요. 설마...?”

“그중에 시그리드 각하에게 청혼하러 찾아온 귀족, 혹은 그 귀족의 대리인들 한 무리가 또 있었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시그리드로서는 한숨이 푹 나오는 일이었다.

이미 아이슬란드와 동녘정착지를 통해 넘어온 구혼자 무리가 한 패거리 있었던 차에, 이제 보헤미아인들 사이에 섞여 넘어온 무리까지 합류하게 생겼던 것이다.

당장 시그리드가 이곳 공사장을 구경하러 나온 것도, 마을 한쪽에 저를 위해 그린란드 사람들이 마련해준, 넓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꽤 아늑한 통나무집에 머물다가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웬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기에, 혹 저 멀리서 무슨 적대적 원주민이라도 쳐들어왔는가 싶어 창문을 열어보니, 저의 ‘매력’으로 시그리드의 마음을 사로잡겠노라 자부하던 한미한 귀족 집안 넷째아들이 딱 들어도 엉터리인 프랑스어로 이제는 사라진 부르고뉴 궁정의 연애시를 낭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또 그 이후로 각하께 무례를 범한 자가 있었습니까? 제 선에서도 몇 명 거르긴 했습니다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디폴트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 하면서 이 소음공해를 처단하였는데, 그것을 보고 디폴트야말로 귀부인 수행하는 편력기사라고 생각한 몇몇이 있었던 것이다.

‘쾨커리츠의 디폴트 경! 귀부인의 명예를 위해 창을 들 권리를 얻고자 그대에게 도전하는 바요!’

마치 무슨 토너먼트나 주스트라도 열리는 것처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기사 망신을 시키는 자도 있었다. 기사다움을 과시하면 시그리드의 마음을 열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이었다.

‘흠흠, 제가 주군으로 모시는 분은 외팅엔Oettingen 가문의 방계에 속하시기는 하지만, 그 방계 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습니다. 경께서 어떻게 잘 말씀만 해 주신다면...’

그런가 하면 디폴트가 시그리드의 측근이라 단정하고서는 은밀히 찾아와 은화 쌈지를 건네는 자도 있었다.

“노래는 효험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내 배필이 되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같은 걸 늘어놓는 자들이 있더라고요.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소리에, 운율meter의 ‘m’ 자도 안 맞긴 했지만요.”

“그, 기사들을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아무래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정직한 용맹이나 명예보다는 그런 겉치레에 더 밝아서...”

괜히 머쓱해진 디폴트가 – 저도 그리 나이가 많진 않건만 – 요즘 젊은것들 탓을 하고 나섰다.

허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애초에 이 시대의 귀족들치고 제대로 연애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자는 드물었으니, 귀부인을 연모하는 것은 ‘기사다운’ 유행일 뿐, 진짜 결혼은 재산이나 세력을 위해 하기 마련이었다.

“귀부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두고 연애시를 줄줄 낭송할 수 있는 자들은 많지만, 개중 정말로 속세의 권력이나 재산 대신 사랑을 위해 결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소위 이론이라는 것도 죄다 글러먹은 것뿐일 수밖에 없지요.”

사실 말과 갑옷 값을 대기 위해 같은 하급 기사 집안의 딸과 결혼한 디폴트도 딱히 뭐라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그나마 서로 애정은 없어도 정 비슷한 것은 있어서, 작년에 장인댁을 설득해 겨우 아내와 일가친척을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어째 코펜하겐 쪽은 조용하더라니...”

시그리드가 혼잣말을 했다.

이런 일이 터지면 가장 광분했을 법했던 에릭이, 딱히 구혼자들을 훼방놓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잊지 않고 있다, 언제든 글 한 통만 써서 부쳐다오.’가 골자인 짤막한 편지 한 통만을 부쳤던 것이다.

시그리드의 미래 지식을 제멋대로 오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나, 시그리드가 구혼자 혹은 대리인이랍시고 찾아온 놈팽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거나, 아니면 시그리드의 배필감은 저밖에 없다는 그 집착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에릭과 그 끄나풀들은 다른 구혼자들처럼 시그리드를 당장 골치 아프게 하진 않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방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 한 사람 편하자고 저들을 박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구혼자들은 불청객들이긴 했지만 다들 저들 체류하는 만큼의 밥값은 들고 온 무리였다. 시그리드 한 사람 좋자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무리를 무작정 내쫓을 수는 없었다.

“내년 봄, 다시 배들이 바다를 오갈 무렵이면 저 사람들도 알아서들 포기할 거에요. 그때까지만 사고를 안 치고 견디면 그만이지요, 뭐. 여차하면 저 혼자 몰래 남쪽으로 가거나 스베인네 집에 머물러도 되고요.”

그때, 막 도착한 배에서 내린 구혼자 몇몇이,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이쪽 언덕으로 찾아오는 게 보였다. 심지어 개중 두엇은 일꾼까지 거느리고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가지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아마 저들이 섬기는 귀족네 자제의 초상화일 것이었다.

“부탁드릴게요.”

“예, 각하.”

디폴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들을 가로막으러 나섰다.

이어지는 가벼운 언쟁, 그리고 두고 보자며 돌아가는 구혼자들.

그들을 보면서 시그리드는 생각에 잠겼다.

시그리드의 나이도 이제 스무줄에 접어든 지 조금 지났다. 아이슬란드와 교류가 끊어지면서 점차 저들끼리만 결혼하게 된 동녘정착지 기준으로 생각하면, 진작에 결혼은 하고 아이는 하나쯤 생길까 말까 할 즈음.

아마 이방인 욘이 없었더라면, 시그리드는 지금쯤 아이슬란드 상인 토르스테인과 결혼하고 그린란드를 떠나 레이캬비크 근처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사람의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사실 별로 없었다. 가정을 꾸리는 것은 그저, 척박한 땅의 가혹한 겨울을 함께 견딜 동료, 그리고 저들을 부양해줄 믿음직한 일꾼을 얻기 위함이었으니까.

시그리드가 알기로, 나머지 유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결혼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고, 때가 되면 죽을 뿐. 그 상궤를 벗어나는 자는 – 성직자나 수녀가 아니라면 – 잘 해봐야 공동체 바깥의 괴짜, 잘 안 풀리면 악마와 교접하는 마녀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달랐다. (이미 마녀로 몰리기도 했거니와) 이방인 욘을 만난 순간부터 남들과는 다른, 유별난 삶을 살게 된 시그리드는, 자신의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고 평범한 아낙네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그리고 시그리드의 마음속에 들어와 그런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해 줄 사내 또한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바다 건너 에릭이야, 자신이 그런 사내라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디폴트의 제지에 불응한 사내 하나가, 독일어로 ‘이쪽 보시라’ 외치면서 제가 들고 온 초상화 위의 보자기를 벗긴 것은 그때였다.

“시그리드 전하! 보십시오!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전하의 조카 되시는 루프레히트 경의 늠름한 모습입니다!”

유럽의 어지간한 군주들을 직접 만나본 시그리드는 이 시대의 초상화만 보고서 실제 인물의 모습을 짐작하는 재주를 익혔는데, 암만 봐도 저 얼굴은 늠름함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보나마나 진짜 합스부르크의 후예라기보다는, 급히 방계에 입양시킨 사생아 하나를 그저 혼맥 잇는 용도로 신대륙에 던지려는 것이리라¹.

가뜩이나 한 곳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는 문제를 두고 심란해져 있던 시그리드는, 그것을 보며 더욱 저의 자칭 신랑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그리드 자신이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힘 합쳐 일구어 온 것들을 그토록 쉽게, 그냥 굴러들어오는 혼수처럼 여기는 그 생각.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저 더 많은 땅과 세력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야, 지난 수백 년간 유럽에서 이어져 온,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이어질 일이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보통 시그리드에 대한 불만은 이런 식으로 터져나오곤 했다.

‘시그리드 아씨? 대단한 사람이지, 암.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꼭 나뿐 아니라 프라하에서 온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사실일세.

다만, 다 좋은데, 아무래도 시그리드 아씨 혼자서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실수도 하고, 또 착각도 하곤 한다는 것뿐이지.’

‘시그리드 전하를 미워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 고집이 문제인데, 애초에 그 고집이 없었더라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런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도 못했겠지요.

물론 바다 너머에서 부렸던 고집을 이곳에서까지 부린다면야 잘못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시그리드 전하만한 분도 없지 않습니까?’

시그리드의 일처리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그리고 살갗의 색과 믿는 신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 등을 두고서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도, 막상 시그리드 본인의 인품이 언급되면 딱히 흠을 못 잡던 것이다.

시그리드와의 연은, 그저 교회에서 들은 하얀 마녀 이야기와, 더 나은 삶을 막연히 기대하며 함부르크에서 탄 그린란드 회사의 이민선이 전부인 독일과 프랑스 농민들은 그마저도 딱히 언급하지 못하였다.

“흥, 누가 죄악의 땅 아니랄까 봐. 마녀 주제에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유세 떠는 모양새라니.”

“얼굴만 반반하면 다냐고, 쳇.”

반면 제 버릇을 개 못 주고, 술집을 전세라도 낸 것처럼 떠들고 있는 귀족 자제들은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면박당한 처지는 비슷한 대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본인이 직접 온 귀족 자제들과 비견할 만큼 한미한 귀족 출신이거나, 아니면 명문대가의 총애를 받아 자신이 귀족 반열의 말미에는 든다고 착각하는 부유한 평민 출신이거나 했던 것이다.

“어르신. 저거 가만 내버려두실 겁니까?”

시그리드 따라 아나왁 갔다가 돌아온 전직 불량배 한스가, 저들 버릇대로 남이야 듣건 말건 술을 마구 들이키는 무리들에게 눈짓하였다.

“그럼 네가 술값 낼 것이냐?”

헤니히네 조그만 양조장은 요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간은 미크막과 니놀리노 사람들이 모아오는 나무 열매를 발효시킨 과실주가 전부였지만, 이제 잉여식량이 조금씩 생기면서 다른 술도 다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시그리드를 따라다니며 익힌 ‘생명의 술’ 제조법으로 만든 증류주는 벌써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왐품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값을 치르는 놈들과 달리, 저것들은 엄연히 진짜 손님이다.”

다른 집안에 비해 저들의 세가 밀리지 않음을 과시하려는 마음뿐이던 구혼자들은 다들 금화와 은화를 한가득 싸 들고 찾아왔다. 특히나 남들보다 더 집안 사정 여유롭던 이들은, 되도 않는 견제를 한답시고 그 돈을 흩뿌리곤 하였으니, 그럴 여력 안 되는 집안 사람들이 일찌감치 단념하고 돌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럼 뭐합니까. 벌써부터 저놈들 행패에 원성이 자자한 걸요.”

“시그리드 아씨도 저들을 가만 내버려두고 계시지 않으냐. 후스 선생도, 플레톤 그 영감도 마찬가지고.”

플레톤이 그런 괴짜 사상을 내세우면서도 그간 모레아 공국의 수도 미스트라에 발 붙이고 살 수 있던 것은, (정작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짜증나면서도 친근한 구석이 있는 덕이었다. 그로 인해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스 선생과 플레톤 영감’이라는 표현에서 딱히 이상을 못 느끼게 되었지만.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참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당장 어제도 아르니 아저씨가 저들을 모욕했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디폴트 경이 제때 안 나타났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귀족과 농노 대신, 자유민과 노예의 구분만을 알고 있던 – 그 구분마저도 가혹한 겨울이 닥쳐오며 거의 사라졌다 – 그린란드 사람들에게, 저들의 머나먼 핏줄만 믿고 특별한 대우를 바라는 구혼자들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무리였다².

반면 지체 높은 구혼자들과 대리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온 것만으로도 불만 품을 일인데 저들을 고깝게 보는 (혹은 고깝게 보는 듯한) 무지렁이들까지 곁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눈과 속이 공히 뒤집히기 십상이었다.

“일전에 잉글랜드 목수, 그 뭣이냐, 백스터인가 하는 사람이 의회 일로 찾아와서 한 얘기가 있었다. 저들 땅에도 악명 높은 이단자가 있었는데, 그놈이 그렇게 떠들었단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귀족이 어디 있었냐고 했다던가³.”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여기 이 땅에 귀족 없는 것만 봐도.”

“이놈아, 좀 멀리 봐라. 겨우겨우 그놈의 이단이니 마녀니 타령에서 유예 판정을 받고 슬쩍 풀려난 우리 시그리드 아씨인데, 이제 와서 또 귀족을 부정하니, 지체 높은 이들을 모욕하니 뜬소문이 돌면 어떻게 되겠느냐?”

바다 건너의 영주와 귀족들이 딱히 이곳 신대륙 연합을 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시그리드의 계획에 어깃장은 놀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바로 그 영주들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이민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그만 좋은희망에서 워낙 많은 정치적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비단 헤니히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조금씩 이런 사고를 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그 누구도 이 사실이나 그 함의를 자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에휴, 거 참 더러운 세상입니다.”

“좀만 참아라. 내년 봄이 되는대로 시그리드 아씨가 무슨 핑계라도 만들어서 저놈들을 쫓아낼 테니. 그때까진 내 장사에 훼방 놓지 말고.”

그때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들의 입에서 음담패설이 나오기 시작했다⁴.

낮에는 달콤한 연애시와, 고결한 기사와 명예로운 귀부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던 이들은, 밤에는 저들의 성적인 정복, 실제로는 그저 보잘것없는 위세로써 얻은 것에 불과한 그 추잡한 성취를 자랑스레 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짓거리와 시그리드의 이름이 엮여서 나오기에 이르렀다.

어떻게든 자빠뜨리면 그만이라는 둥,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게 문제니 도와주면 될 것이라는 둥.

결국 참다 못한 한스가 의자를 밀치며 벌컥 일어났다.

“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뭐라고?”

“당신들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단장님이 훨씬 고귀하고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 댁들이 뭐라고 그분을 그리 모욕하는 겁니까?”

“어쭈, 디폴트 그 시골 기사놈이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걸 보니까, 아주 기사니 귀족이니 다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말 똑바로 하쇼. 튜튼 기사단 머리통에 바람구멍 내고 다닌 게 우리 백송고리 용병단이오. 시그리드 단장님은 그중에서도 최고였고.”

귀족 자제들이 주먹을 들고 몇몇은 단검을 뽑으려던 차.

묵직한 퍽- 소리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리인 노릇을 하던 아돌프라는 자가 풀썩 쓰러졌다.

“내가 해적 시절에 소위 귀족이란 자들도 종종 잡아봐서 안다, 이놈들과는 논쟁을 벌이면 안 돼.”

슬그머니 사라졌던 헤니히가, 장작 패는 도끼 뒷면으로 아돌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논쟁을 하면 꼭 원한을 사게 되거든. 그때는 아예 발트해 바닷속에 가라앉혀서 원한을 없애버려야 하는데, 몸값을 못 받으니 얼마나 아까운 일이냐.”

한 마디 한 마디, 실전으로 다져진 협박 솜씨. 저들과 달리 정말로 사람을 여럿 죽여본 사람다운 차디찬 말투와 시선에, 그제야 귀족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아저씨. 이놈들 족치면 안 된다면서요.”

“우리 신대륙 연합도 나름 하나의 나라 아니냐? 국가원수를 모욕하는 놈은 족쳐도 괜찮을 게다.”

미친 술집 주인이 저들을 모욕했다며, 방금 전까지 시그리드와 싸잡아 그리 열심히 헐뜯었던 디폴트를 찾으러 뛰쳐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헤니히가 도끼 뒷면을 쓱쓱 닦았다.

문제를 일으킨 귀족들과 헤니히는 그대로 술집 창고에 연금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그사이 헤니히의 주점에는 경쟁자가 생겼기에 – 가을마다 좋은희망으로 찾아오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세례 받은 니놀리노 사람 애덤의 주점이었다 – 헤니히와 귀족들을 분리해서 수용할 수 있었다.

매 가을에 열리는 원주민들과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직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던 후스와 플레톤, 그리고 다른 임시의회 대표들이 소집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헤니히가 증언하기를, 자칫 귀족들을 모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가는 시그리드 각하의 계획에 큰 지장이 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시의 분기를 참지 못해 도끼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헤니히가 담담하게 풀어놓은 진술을 그대로 읊는 디폴트였다.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저 한 사람을 처벌하라는 뜻이리라.

분명 헤니히의 생각에는 일리가 있었다. 얼른 신대륙 연합의 인구를 늘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사소한 트집 하나라도 잡히지 않는 게 중요했다. 특히나 아나왁의 황금이 유럽에 풀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눈이 벌게지며 대양 너머를 노려보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나 머릿속에서야 그것을 납득할 수 있어도, 함께 오만 고생을 하면서 아직 ‘신대륙 사람’이라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우리네 사람’이라는 관념에는 도달한 임시의회 대표들의 가슴은 도저히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회의 속에서, 시그리드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저 구혼자들,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찾아왔잖아요?”

“잘못된 생각이라뇨? 각하께서 혼처를 찾고 계시다는 그 거짓말 말씀이십니까?”

“아, 그것도 잘못된 거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착각이 있잖아요.”

시그리드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다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탓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

아직 제대로 이름도 붙지 않은 시그리드의 직함. 독일인들은 영도자Fuhrer라 부르고, 시그리드는 프레지던트라 부르고, 로마인들은 그냥 명예직 직함 그대로 데스포이나라 부르는 그 자리는...

바로 선출직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만약 1419년에 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설령 저들이 저와 결혼한다 한들 아무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아.”

‘선출직 국왕’의 전례라고 해보아야 고작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왕 선거가 전부였기에 다들 떠올리지 못한 점이었다.

“그걸 알려주자고요. 이왕 이렇게 된 길에, 저 사람들을 이용해서 우리 신대륙 연합의 힘을 키울 방법이 떠올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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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 최대의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다진 인물로, 특히 알프스 산맥의 금은 광산을 개발해 유럽의 귀금속 부족 사태 속에서 큰 이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독선적·모험적인 성격의 소유자기도 했고, 그 인색함으로 인해 (실제로는 극히 부유했음에도) ‘무일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mit der leeren Tasche’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그는 원 역사에서도 콘스탄츠 공의회로 인해 끈 떨어진 뒤옹박이 된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받아들여 지기스문트가 후원하는 공의회에 대항하려 했는데, 이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고, 프리드리히 본인도 지기스문트의 군사에게 체포당해 많은 영지를 뜯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성품을 고려하면, 사생아 하나를 방계로 입적시켜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기반으로 삼으려 하는 협잡질도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2. 흔히 중세 서유럽 하면 떠오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북유럽에서는 13세기 말에야 성립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가문의 지체에 대한 개념은 있었고, 강력한 영주/족장godi의 집안이나 왕가는 세습되는 권력과 지위를 누렸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유민들 중 가장 높은 이들일 뿐이었지요. 중세 초까지도 북유럽에서 자유민 모임인 팅그가 힘을 가질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사회구조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귀족이라는 개념과 그 특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1280년 알스뇌 칙령이 선포된 이후였습니다. 그보다 수백 년 전에 떨어져나가, 유럽 본토와 띄엄띄엄 교류하는 게 전부였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3. 이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와트 타일러의 난에 가담한 것으로 유명한 수도사 존 볼John Ball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와트 타일러의 농민반란이 잉글랜드를 휩쓴 것은 고작 1381년으로, 작중 시점에서 40년이 채 안 되었지요. 존 볼은 사실 신분질서를 부정한 것을 제외하면 딱히 이단적 면모가 없었지만, 당대 잉글랜드인들, 특히 위클리프에 반대하던 기득권층은 위클리프와 롤라드파의 주장이 존 볼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몰아붙이곤 했습니다.

4. 술자리에서는 왕가를 소재로 한 음담패설도 종종 주고받던 중세 유럽이었으니, 시그리드가 추잡한 농담에 얽혀 언급되는 것도 (안타깝지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일례로 11~13세기 초의 독일 속요俗謠 모음집인 『보이언의 노래들Carmina Burana』에는 절세미인으로 유명했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동침하길 원한다는 내용의 시도 수록되어 있는데 –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제 10곡에 해당합니다 – 이는 보다 낯뜨거운 형태의 음담패설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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